“계율 지키는 건 후회하지 않는 삶에 그 뜻이 있다”
부처님 “잘못 저지르고 후회하는 것은 성자가 아니다” 못 박아
“계행의 목적과 이익은 후회 없음…궁극에는 해탈지견 성취해”
재가자의 오계도 선함의 근본인 동시에 사회악 치유 위한 묘약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저지른 행위로 말미암아 그 과보를 받게 되면 뒤늦게 후회한다. 자신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 뉘우치고 참회하는 사람은 그나마 개선될 가능성이 높지만, 그 반대일 경우에는 사실상 구제불능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몸과 입과 뜻으로 지은 잘못을 참회하는 것을 중요한 수행으로 여긴다. 그러나 참회는 차선일 뿐 최선이 아니다.
나중에 후회할 일을 처음부터 저지르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붓다는 잘못을 저질러 놓고 나중에 후회하는 것은 성자의 삶이 아니라고 보았다. 어떤 사람이 상대방에게 폭언을 쏟아놓고 나중에 미안하다고 사과한다고 해서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사과를 받으면 증오와 원망의 마음은 약간 해소되겠지만, 마음깊이 상처받은 앙금은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마치 질병과 같이 병에 걸려 치료받고 회복되는 것보다 처음부터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 건강한 삶이다. 즉 치료보다 예방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때 아난다 존자가 ‘비난 받을 일이 없는 계’, 즉 유익한 계(kusalani-sīlāni)를 지키는 목적과 이익이 무엇이냐고 붓다께 여쭈었다. 이에 대한 붓다의 답변은 대략 다음과 같다.
“유익한 계들의 목적과 이익은 후회 없음(avippaṭisāra)이고, 후회 없음의 목적과 이익은 환희(pāmujja)이고, 환희의 목적과 이익은 희열(pīti)이고, 희열의 목적과 이익은 편안함(passaddhi)이고, 편안함의 목적과 이익은 행복(sukha)이고, 행복의 목적과 이익은 삼매(samādhi)이고, 삼매의 목적과 이익은 여실지견(如實智見, yathābhūta-ñāṇadassana)이고, 여실지견의 목적과 이익은 염오(厭惡, nibbidā)와 이욕(離欲, virāga)이고, 염오와 이욕의 목적과 이익은 해탈지견(解脫智見, vimutti-ñāṇadassana)이다.”(AN.Ⅴ.1-2)
이에 대응하는 한역 ‘아함경’에서는 “세존이시여, 계(戒)를 지키는 것은 무슨 뜻이 있습니까? 아난이여, 계를 지키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후회하지 않는 데 그 뜻이 있다. 만일 계를 지키면 곧 후회함이 없게 되느니라.”(‘중아함경’ 권10 제1 하의경(T1, p.485a). “世尊! 持戒爲何義? 世尊答曰: 阿難! 持戒者令不悔. 阿難! 若有持戒者, 便得不悔.”)
요컨대 계를 지키는 것은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함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몸과 입과 뜻으로 나쁜 행위를 저지른다. 그러나 그 행위가 나중에 자신을 얽어매는 족쇄가 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이처럼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계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다른 경(AN10:2)에서는 “비구들이여, 계를 지키고 계를 구족한 자는 ‘내게 후회가 없기를’ 하는 의도적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계를 지키고 계를 구족한 자에게 후회가 없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후회가 없는 자는 ‘내게 환희가 생기기를’ 하는 의도적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후회 없는 자에게 환희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중략)… 유익한 계들의 목적과 이익은 후회 없음이다.”(AN.Ⅴ.2-3)
이 경에서 ‘당연함’이라고 옮긴 원어는 dhammatā(法性)인데, 이것은 법의 고유한 성질(dhamma-sabhāva)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지계자(持戒者) 혹은 구족계자(具足戒者)가 후회 없기를 바라지 않더라도 후회할 일이 없게 되는 것은 법의 고유한 성질, 즉 법성이 그렇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불교의 수행론이 계·정·혜 삼학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계를 지키고 계를 구족한 자는 후회할 일이 없으며, 환희·희열·편안함·행복·삼매·여실지견·염오와 이욕·해탈지견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 세상에서 겪는 재난과 환란, 즉 비난과 고초를 당하는 것은 계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자신에게 주어진 계를 잘 지키면 어떠한 비난도 받을 염려가 없다. 계를 잘 지키고 나라에서 제정한 법을 잘 준수한다면 세속의 지옥에 해당되는 교도소에 갈 일은 없다. 이와 같이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재난과 환란은 모두 계를 지킴으로써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
‘삼학경(三學經)’에서 붓다는 “보다 높은 계율을 배움이란 무엇인가? 비구가 계목(戒目)인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에 머물고, 위의(威儀)를 갖추고 바른 행동의 활동을 갖추어, 작은 허물에도 두려움을 느끼고, 학습 계목을 받아 지닌다고 하자. 이것을 보다 높은 계율을 배움이라고 하느니라.”(‘잡아함경’ 제30권 832경, T2, p.213c)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이에 해당하는 니까야에서는 “계를 잘 지키고, 빠띠목카(pātimokkha, 戒目)를 수호하고 단속하면서 머문다. 올바른 행위의 경계를 갖추고, 사소한 허물에도 두려움을 느끼고, 학습 계목을 받아 지닌다.”(AN.Ⅲ.113)고 했다. 이것은 출가자가 계를 잘 지키고, 바라제목차에 어긋나지 않게 몸과 마음을 단속하고, 사소한 허물에도 두려움을 느끼고, 배워야 할 계목들을 받아 지닌다는 뜻이다.
한편 재가자는 부양할 가족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에 비구의 법, 즉 출가 수행자가 지켜야 할 계율을 완전히 이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재가자의 생활은 욕망의 세계에 살면서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욕망을 절제하고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재가 생활의 표준이 될 수 있는 별도의 규칙을 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정해진 재가자의 계율이 바로 오계(五戒)와 팔재계(八齋戒)이다. 오계는 재가자가 평소에 지켜야 할 최소한의 계율이고, 팔재계는 재가자가 특정월과 특정일, 즉 삼장(三長)과 육재일(六齋日)에 지키는 계이다. 오계는 불살생·불투도·불사음·불망어·불음주 등이다. 이 다섯 가지 계율은 만선(萬善)의 근본이며, 모든 사회악을 제거할 수 있는 묘약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붓다가 제정한 계를 지키면 나중에 후회할 일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굳이 액난을 소멸하겠다고 기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마성 스님 팔리문헌연구소장 ripl@daum.net
[1524호 / 2020년 2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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