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마경
유마경목차
•유마경 - 해제
•유마경 - 1. 법회의 서곡
•유마경 - 2. 보적(寶積)의 찬가
•유마경 - 3. 부처님의 설법
•유마경 - 4. 유마거사
•유마경 - 5. 사리불의 좌선
•유마경 - 6. 목건련의 설법
•유마경 - 7. 가섭의 걸식
•유마경 - 8. 수보리의 식사
•유마경 - 9. 부루나의 설법
•유마경 - 10. 가전연의 논의
•유마경 - 11. 아나율의 천안
•유마경 - 12. 우바리의 계율
•유마경 - 13. 라훌라의 출가
•유마경 - 14. 아난다와 부처님의 병
•유마경 - 15. 광엄동자와 도량
•유마경 - 16. 문수사리의 문병
•유마경 - 17. 비어있는 방
•유마경 - 18. 법(法)을 구함
•유마경 - 19. 중생에 대한 관찰
•유마경 - 20. 보살의 대비(大悲)
•유마경 - 21. 천녀(天女)의 꽃
•유마경 - 22. 불이법문(不二法門)
•유마경 - 23. 위촉
*일체중생이 병들지 않았다면 나의병도 곧 나으리라*
유마경 - 해제
유마경 (維摩經)의 범어 원제는 Vimalakirtinirdesa-sutra. `비마라힐경(浚摩羅詰經)', `비마라힐이제경(浚摩羅詰利帝經)'이라고 음사하며 `무구칭경(無垢稱經)', `정명경(淨名經)'이라고 한다. 유마경은 반야경의 정신을 계승하여 공(空)의 실천이념인 반야바라밀을 재가생활 속에서 적용하고 원대한 대승불교의 지평을 열어나가려는 경전이다.
종래 출가교단의 권위주의와 보수주의에 대한 사상적 비판이 실려 있는 이 경전의 원형은 이미 대승불교가 발흥하기 시작하던 서기 1세기경에는 성립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범어원전이 처음 한역된 시기가 서기 188년이므로[後漢 嚴佛調 譯 古維摩詰經, 失傳] 적어도 서기 1세기경에는 이 경전의 원형이 성립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본 경은 옛부터 7역 3존(七譯三存)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즉 일곱 차례 한역되었으나 세 가지 역본(譯本)만이 전해진다는 것이다. 7역 3존은 다음과 같다.
1) 서기 188년(中平 5年) 후한(後漢) 엄불조(嚴佛調) 역 고유마힐경(古維摩詰經) 2권(失傳)
2) 223년(建興 1年) 오(吳) 지겸(支謙) 역 불설유마힐경(佛說維摩詰經) 3권(存)
3) 291년(元康 元年) 서진(西晋) 축법란(竺法蘭) 역 비마라힐경(臻摩羅詰經) 3권(失傳)
4) 303년(太安 2年) 서진(西晋) 축법호(竺法護) 역
유마힐소설법문경(維摩詰所說法門經) 1권(失傳)
5) 동진(東晋) 우전인(于]人) 기다밀(祇多蜜, Gi-tamitra) 역 유마힐경 4권(失傳)
6) 406년(弘始 8년) 후진(後秦) 구마라집 역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存)
7) 650년(永徽 元年, 一說 貞觀年中) 당(唐) 현장 역 설무토구칭경(說無土垢稱經) 6권(存)
이상의 7역 3존 가운데 현존하는 역본은 지겸(支謙)구마라집(鳩摩羅什)현장(玄 )에 의한 3역본(三譯本)이다. 특히 구마라집의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은 유마경이라는 약칭으로 가장 널리 독송되어 왔으며 아름답고 힘찬 문체로 유명하다. 구마라집 역 유마힐소설경의 전(全)14품명(品名)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불국품(佛國品)
2. 방편품(方便品)
3. 제자품(弟子品)
4. 보살품(菩薩品)
5. 문질품(問疾品)
6. 부사의품(不思議品)
7. 관중생품(觀衆生品)
8. 불도품(佛道品)
9. 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
10. 향적불품(香積佛品)
11. 보살행품(菩薩行品)
12. 견아촉불품(見阿촉佛品)
13. 법공양품(法供養品)
14. 촉루품(囑累品)
유마경은 재가거사 유마힐(維摩詰)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가 설하는 대승불교의 심원한 철리(哲理)를 희곡적 구상을 바탕으로 엮고 있다. 우리에게는 유마거사라는 이름으로 더욱 잘 알려진 그는 유마경에서 부처님의 재세시(在世時) 라자가하에서 가까운 바이샬리의 시중(市中)에 살면서 부처님의 제자들보다 깊은 불법(佛法)의 경지를 체득하고 있는 재속(在俗)의 성자(聖者)로 등장한다. 그는 무구칭(無垢稱)정명(淨名)이구(離垢)라고 한역(漢譯)되는 이름처럼 번뇌 속에 있으나 번뇌의 물 효【 완전히 해방되어 있는 자유인이다. 유마거사는 어느 날 병상에 누워 병을 앓기 시작한다. 유마경은 유마 자신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병(病)의 의미를 설하고 있다.
중생의 병이 남아 있는 한 탐욕이 남아 있는 한 나의 병도 계속되리니 만일 일체중생이 병들지 않았다면 나의 병도 곧 나으리라. 보살은 중생을 위해 생사에 들었고 생사가 있음에 병도 있거니와 만약 중생이 병들지 않는다면 나의 병도 곧 나으리라.
예로부터 유마경의 주석자들은 이 유마의 병을 방편시설(方便施設)이라고 불렀다. 즉 대승불교의 지혜와 자비를 설하기 위해서 방편으로 꾸며진 병이라는 것이다.
유마가 병을 앓자 석존은 십대제자(十大弟子)를 차례로 불러 유마거사에게 문병 갈 것을 지시한다. 그런 십대제자들은 유마거사에게 질책 당했던 사실을 들면서 "감히 문병 갈 수가 없다"라고 사양한다. 즉 지혜제일의 사리불(舍利弗)도, 신통제일의 대목건련(大目∼連)도, 두타(頭陀)제일의 대가섭(大迦ⓣ)도, 해공(解空)제일의 수보리(須菩提)도, 설법제일의 부루나(富樓那)도, 논의(論義)제일의 마하가전연(摩 迦녔?도, 천안(天眼)제일의 아나율(阿那律)도, 지율(持律)제일의 우바리(優波離)도, 밀행(密行)제일의 라훌라(羅훌羅)도, 다문(多聞)제일의 아난(阿難)도 그들의 독선적인 수행과 비좁은 안목을 비판하는 유마거사 앞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지혜제일의 보살로 알려진 문수사리보살(文殊舍利菩薩)이 석존의 명을 받고 유마에게 문병을 가게 된다. 그리고 유명한 유마의 일묵(一默)이라는 설법이 펼쳐지고 있다. 이제 모두 함께 유마경의 세계로 가보기로 하자.
유마경 - 1. 법회의 서곡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비야리(浚耶離)성의 암라수원(庵羅樹園)에서 덕이 높은 제자 8천과 3만 2천의 보살들과 함께 계셨다.
그들은 모두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부처님께서 갖추어진 지혜와 그것을 얻기 위한 수행을 모두 성취하였으며 그것은 여러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들은 진리의 성(城)을 지키기 위해 항상 가르침을 받들고 능히 백수의 왕인 사자의 사자후(獅子吼)와 같이 설하여 명성이 시방에 떨치었다.
뭇 사람들이 청하지 않아도 스스로가 그들의 벗이 되어 그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며,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그것을 받들어 행하는 승가(僧伽)가 길이 융성하고 끊이지 않도록 하며, 악마의 원한을 항복받음과 동시에 많은 이교도[外道]를 제압하여 몸과 마음이 청정하여 오래전부터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져 있었다.
마음은 항상 걸림이 없는 해탈의 경지에 안주하고 있어 바른 생각과 선정(禪定)을 지니고 있었다. 뛰어난 변재(辯才)는 끊이지 않았으며 보시를 행하며, 계를 지키고, 인욕하며, 정진(精進)하여 선정을 닦고 지혜를 얻을 뿐만 아니라, 그 방편의 힘을 부족함이 없이 두루 갖추고 있었다. 공(空)의 바른 깨달음으로 일체의 집착을 떠난 경계에 이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따름으로써 다시는 물러나지 않는 깨달음의 경지를 설하며, 모든 사물의 진상(眞相)을 깨달으며 동시에 중생의 능력을 알며 온갖 사람들을 능가하여 두려움 없는 자신[無所畏]을 갖고 있었다. 이미 얻은 공덕과 지혜로써 그 마음을 닦았고 뛰어난 상호(相好)에 의하여 그 몸을 장엄하고 있으므로 그 모습은 세상에 비할 자가 없었다. 그러나 세간의 온갖 장식을 몸에 붙이고 있지는 않았다.
높고 먼 명성은 수미산을 지나고 그 깊은 믿음의 견고함은 금강석에 비유되었다. 가르침의 보배는 널리 빛나 불사(不死)의 가르침을 널리 비쳐주고 그 미묘함은 뛰어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연기(緣起)의 깊은 이법(理法)을 깨달아 여러 가지 그릇된 견해를 끊어 버렸으므로 `있다', `없다'라는 상대적인 견해의 집착[有無二邊]이 뒤에 남는 일이 없었다. 법을 설할 때에는 사자가 포효하듯이 두려움이 없고, 그 설하는 가르침은 천둥소리와 같아서 울려 퍼지는 그 소리는 헤아릴 수 없어 어떠한 한계도 없었다.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모두 성취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의 나라를 깨끗이 장엄하고 그를 보고 듣는 이들은 이익을 받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들 보살들은 이 같은 공덕을 모두가 한결같이 갖추고 있었다.
유마경 - 2. 보적(寶積)의 찬가
그때 부처님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공경을 받으며 그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고 계셨다. 그 모습은 마치 수미산이 대해(大海)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것과 같았다. 온갖 보물로 장식된 사자좌(獅子座)에 앉아 여러 곳으로부터 찾아온 대중들을 그 위광(威光)으로 남김 없이 덮고 있었다.
그때 비야리성의 장자(長者)의 아들로서 보적(寶積)이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5백 명의 장자의 아들들과 함께 저마다 칠보(七寶)로 꾸민 일산(日傘)을 받고 부처님을 찾아왔다. 그들은 부처님의 발 아래 엎드려 예배하고 받고 온 일산을 모두 부처님에게 공양하였다. 부처님은 그의 위신력으로 일산들을 합쳐 하나로 만들었고 그 모든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덮었다. 그리하여 이 모든 세계에 있는 온갖 것이 그 안에 모두 나타났다. 또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그 부처님들이 설하는 가르침도 칠보의 일산 안에 나타났다.
그때 모든 대중들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부처님의 위력을 눈앞에 보고 찬탄하였으며 손을 모아 부처님께 예배하였다. 그들은 부처님의 얼굴을 우러러 보며 눈을 떼지 못하였다.
이때 장자의 아들 보적이 부처님 앞으로 나아가 게송(偈頌)을 읊었다.
연꽃잎처럼 깨끗하고 고운 눈을 가지시고
그 마음은 맑아 온갖 선정(禪定)을 다 닦으셨고
오래도록 쌓은 정업(淨業)은 한량이 없어
중생들을 깨달음으로 이끄시는 부처님께 정례(頂禮)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신비한 교화의 힘으로
시방의 수많은 나라들을 드러내고
그곳에서 가르침을 펴시는 부처님의
모습을 남김 없이 보이셨습니다.
그 가르침의 힘은 뭇 목숨을 이끄시고
항상 진리의 재물을 베푸시며
온갖 사물을 바르게 판단하시니
참다운 모습을 잃지 않으십니다.
사물은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닌 것
인연으로 인하여 생긴 까닭에
아(我)도 없으며 받는 자도 주는 자도 없어
선악의 업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설하시네.
처음 보리수(菩提樹)아래 계실 때 악마의 항복 받으시고
불사(不死)의 법을 얻어 깨달음을 이루시었으니,
이미 마음의 번뇌가 없어 받음[受]과 지음[行]이 없고
더욱 모든 외도를 굴복시켰네
온 세계를 향해 세 번 설하신 가르침은 본래부터 항상 청정하고
하늘과 사람이 진리를 구함에 이를 등불로 삼으니
삼보(三寶)는 이로써 세간에 나타나셨네.
헐뜯거나 칭찬함에 움직이지 않음은 수미산과 같고
선과 악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자비로우며
마음과 행(行)이 평등함은 허공과 같아
누가 세존을 뵙고 예배하지 않으리.
십력(十力)을 가져 중생들을 이끌고
대정진하는 부처님께 예배합니다
이미 얻으신 두려움 없는 지혜에 예배합니다
비할 데 없는 덕을 몸에
지니신 대도사(大導師)에게 예배합니다
능히 온갖 구속을 끊으신 분께 예배합니다
이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러 중생을 제도하며 생(生)과 사(死)를 떠난 부처님께 예배합니다.
유마경 - 3. 부처님의 설법
그때 장자의 아들 보적은 이 게송을 마치고 부처님께 다음과 같이 물었다.
"세존이시여, 우리들 오백 명 장자의 아들들은 이미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는 마음을 일으켜 불국토의 청정을 얻을 수 있는지 듣고자 합니다. 세존이시여, 부디 원하오니 여러 보살이 정토(淨土)로 나아가기 위해 닦는 수행을 설하여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적이여, 여러 보살들을 위해 여래에게 정토로 나아가는 수행을 묻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다. 내 그대를 위해 설하노니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뭇 중생의 종류가 바로 보살의 불국토(佛國土)이다. 왜냐하면 보살은 교화할 중생을 따라서 불국토를 취(取)하고 중생이 선(善)을 닦고 악을 버리는 것에 따라 불국토를 취하기 때문이다. 또한 중생들이 어떠한 나라에 의하여 부처님의 지혜로 이끌려 들어갔는가에 따라서 그에 알맞는 불국토를 취하고 중생들이 어떠한 나라에 의하여 보살에게 갖추어진 능력을 행사하였는가에 따라서 불국토를 취한다. 왜냐하면 보살이 정토(淨土)를 취하는 것은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누가 빈 터에 집을 짓고자 하면 뜻대로 지을 수 있으나 만약 허공에 짓고자 하면 끝내 지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보살도 이와 같아서 중생을 완성시키기 위해서[成就衆生], 불국토를 취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불국토를 허공에서 취하고자 하지 않는다.
보적이여, 마땅히 알라. 정직한 마음[直心]이 바로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그 나라에는 거짓을 행하지 않는 중생이 태어난다.
깊이 도(道)를 구하는 마음[深心]이 바로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그 나라에는 공덕을 갖춘 중생들이 태어난다.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그 나라에는 대승(大乘)의 가르침을 받은 중생이 태어난다.
보시를 즐겨 행하는 것이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그 나라에는 보시하는 중생이 태어난다. 계를 지키는 것이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그 나라에는 열 가지 선한 길[十善道]을 행하여 원하는 바를 성취한 중생이 태어난다. 인욕이 바로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그 나라에는 서른두 가지의 뛰어난 신체적 특징[三十二相]으로 장엄한 중생이 태어난다. 정진이 곧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그 나라에는 모든 공덕을 힘써 닦은 중생이 태어난다. 선정이 곧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그 나라에는 마음을 닦아 흔들림 없는 중생이 태어난다. 지혜가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그 나라에는 깨달음을 얻도록 확정된 중생이 태어난다.
모든 것에게 도움을 베풀고자 하는 영원한 네 가지 마음[四無量心]이 바로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그 나라에는 항상 자비를 행하며[慈], 괴로움을 없애주며[悲], 남의 즐거움을 기뻐하고[喜], 누구에게나 평등한[捨] 마음을 완성한 중생이 태어난다.
깨달음으로 이끄는 네 가지 방편[四攝法]이 바로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그 나라에는 해탈의 과보를 얻을 수 있는 중생이 태어난다.
깨달음의 지혜를 얻기 위한 서른세 가지 수행방법[三十七道品]이 곧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그 나라에는 조용한 마음의 사색[念處]과 올바른 노력[正勤], 신통력[神足], 뛰어난 능력과 그 작용[根力] 그리고 깨달음으로 향하는 바른 길[覺道]을 아는 중생이 태어난다.
모든 공덕을 남에게 돌려주는 마음[廻向心]이 곧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그 나라에는 모든 공덕을 다 갖춘 중생이 와서 태어난다.
깨달음을 장애하는 여덟 가지 어려움[八難]을 없애도록 가르치는 것이 바로 보살의 정토이다. 보살이 부처가 될 때 그 나라에는 죄업의 과보로 받는 세 가지 세계[三惡道]와 여덟 가지 장애[八難]가 없다.
스스로 계행(戒行)을 굳게 지키면서도 남의 허물을 헐뜯지 않는 것이 바로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그 나라에서는 계율을 범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십선(十善)은 곧 보살의 정토이니 보살이 부처가 될 때 그 나라에는 목숨이 요절[中夭]함이 없고 재물은 풍부하고, 행실은 맑고 깨끗하여 말에는 진실함이 깃들어 있고, 항상 부드러운 언행을 씀으로 헤어지는 권속이 없고, 다툼[등訟]을 잘 화해시켜서 말을 하면 반드시 이익을 베풀고 질투하지 않으며 성내지 않는 바른 소견을 갖춘 중생들이 태어난다.
보적이여, 이와 같이 보살이 정직한 마음[直心]을 따라서 능히 바르게 실천하면 그 바른 실천에 의해 도(道)를 구하는 깊은 마음[深心]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 마음을 따라서 의식을 조복하고 그 조복하는 마음을 따라서 가르침과 같이 행하게 되면 능히 공덕을 남에게 되돌려 주게 되며[廻向], 공덕을 남에게 되돌려 주게 되면 방편을 얻게 된다. 그 뛰어난 방편을 실천하면 곧 중생을 성취하게 되고, 중생을 성취하게 되면 그에 따라서 부처님의 나라가 청정해지며 부처님의 나라가 청정해짐에 따라서 설하는 가르침도 청정해진다. 설하는 가르침이 청정해짐에 따라서 지혜도 청정해지며 지혜가 청정해짐에 따라서 그 마음이 청정해지고 그 마음이 청정해짐에 따라서 마음의 모든 공덕이 청정해진다.
보적이여, 만약 보살의 정토를 얻고자 할진대 마땅히 그 마음을 밝혀야 한다. 그 마음을 밝힘에 따라서 부처님의 나라도 곧 청정해지는 것이다.
이때 부처님께서 발가락으로 땅을 누르셨다. 동시에 모든 세계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진귀한 보배로 장식되었고 그것은 마치 보장엄불(寶莊嚴佛)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으로 장엄한 나라[寶莊嚴土]와 같았다. 모든 대중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이와 같은 모습을 찬탄하였다. 그리고 각자 모두가 그 세계에서 보석으로 장엄된 연꽃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부처님께서 그 나라의 청정한 장엄을 나타내 보일 때 보적이 이끄는 5백 장자의 아들들은 모두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으며, 8만 4천의 대중들은 모두 `가장 드높은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阿 多羅三 三菩提心]'을 일으켰다.
부처님께서 신통력을 거두어 들이시자 지금까지 있던 세계는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갔다. 스스로의 깨달음만을 목적으로 가르침을 구하는 3만 2천의 성문승(聲聞乘)과 모든 천(天), 인(人)은 유위법(有爲法)이 모두 무상(無常)함을 알고 번뇌의 오염에서 벗어나 진리를 바르게 통찰하는 눈[法眼淨]을 얻었다. 또한 8천의 제자들은 온갖 존재에 집착하지 않고[不受諸法] 번뇌가 다한 마음의 깨달음이 있었다.
유마경 - 4. 유마거사
그때 비야리대성(臻耶離大城)에는 한 장자(長者)가 있었으니 이름은 유마힐(維摩詰)이었다.
그는 아주 오랜 옛부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선근(善根)을 깊이 심어 무생인(無生忍)을 얻고 있었다. 그의 뛰어난 변재(辯才)는 걸림이 없고, 신통력을 자유롭게 구사하며 모든 가르침을 완전히 기억하는 힘에 숙달되어 있었다.
그는 두려움이 없는 자신[無所畏]을 얻어 악마의 재앙을 물리쳤고, 심오한 진리의 문에 들어 깨달음의 기슭에 이르렀으며 모든 방편을 통달하고 있었다. 큰 서원을 성취하여 중생들이 마음 속으로 바라는 바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또한 중생들이 지니고 있는 능력의 날카로움과 무딤을 잘 분별하였다.
오래도록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그 마음은 원숙하고 맑아 대승의 가르침에 나아갔고 온갖 것을 행함에 있어서는 바르게 생각하고 헤아렸으며 부처님과 같은 위의(威儀)에 주하여 마음의 크기가 큰 바다와 같았으므로 모든 부처님들이 칭찬하고 부처님의 제자와 제석천(帝釋天), 범천(梵天), 사천왕(四天王)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는 사람을 제도하고자 하는 서원을 실천하기 위한 방편으로 비야리성에 살고 있었다. 무량한 재산으로 모든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계를 청정히 받들고 지킴으로써 계를 범하는 많은 사람들을 구하며 마음을 다듬어 인욕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의 분노를 가라앉혔으며, 마음을 다하여 크게 정진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의 게으름을 바로 잡게 하였다. 마음을 통일하여 선정(禪定)을 닦아서 마음이 혼란한 사람들을 이끌고 명확한 지혜로써 지혜가 없는 모든 사람들을 제도하고 있었다.
그는 재가의 신도이지만 사문(沙門)의 청정한 계율을 받들어 행하고, 비록 세속에 살지만 삼계(三界)에 집착하지 않았다. 처자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항상 범행(梵行)을 닦았으며 친척이 있음을 나타내 보이지만 항상 멀리 떨어져있기를 좋아하였다.
그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가장 높은 사람으로서 공양을 받는다. 정법을 굳게 지녀서 어른과 어린이를 가르치고 모든 생업의 경영이 순조로워 비록 세속적인 이익을 얻지만 그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그는 세간에 다니면서 중생을 이익케 하고 정치와 법률에도 통달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하고 편안케 한다. 강론(講論)하는 곳에 가면 대승의 가르침으로써 사람들을 이끌고, 학교에 가면 학생들을 이끌어 깨우치게 한다. 창녀의 집에 가면 육욕의 잘못을 설하고 술집에 가서도 능히 그 뜻을 세운다.
장자 유마힐은 이와 같이 무량한 방편으로 중생을 이익케 하고 있었으며 그 방편으로 몸에 병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 병 때문에 국왕대신장자거사바라문과 여러 왕자와 함께 그 나머지 권속 수천 명이 모두 찾아와 문병하였다. 유마힐은 찾아온 사람들에게 자신의 병을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설법하였다.
거룩하신 여러분, 이 육신은 덧없고 강하지 못하며 힘도 없으며 견고하지도 못합니다. 빠르게 시들어가는 이 몸은 가히 믿을 것이 못됩니다. 이 몸은 괴로움이며 근심이며 모든 병들이 모여 있는 덩어리입니다. 여러분, 지혜가 밝은 사람이라면 이와 같은 몸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이 몸은 물거품 같아서 오래 가지 않습니다. 이 몸은 불꽃과 같아서 애욕의 갈망으로부터 생깁니다. 이 몸은 파초(芭蕉)와 같아서 속에 굳은 것이 없으며 이 몸은 환상(幻想)과 같아서 미혹으로부터 일어납니다. 이 몸은 몽환(夢幻)과 같아서 허망한 것이 진실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며, 이 몸은 그림자와 같아서 업연(業緣)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몸은 메아리와 같아서 온갖 인연을 따라 생기며, 이 몸은 뜬구름 같아서 곧 변멸(變滅)하고 맙니다. 또한 이 몸은 번개와 같아서 한 순간도 머물지 않고 변하는 것입니다.
이 몸은 주인 없는 땅과 같아서 실체로서의 주체가 없으며, 이 몸은 불과 같아서 자아가 없으며, 이 몸은 바람과 같아서 생명으로서의 개체(個體)가 없으며, 이 몸은 물과 같아서 실체로서의 개아(個我)가 없습니다. 이 몸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실체가 아니라 네 가지 구성요소[四大]로 되어 있어 이를 집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 몸은 자아[我]와 자아에 소속하는 것[我所]에서 떨어져 있으므로 공(空)한 것입니다. 이 몸은 풀과 나무와 질그릇, 조약돌과 같아서 무지(無知)합니다. 이 몸은 지음이 없으므로 바람의 힘에 따라 흔들립니다. 이 몸은 깨끗하지 아니하여 더러운 것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몸은 거짓인 것입니다. 설사 몸을 씻고 옷을 입으며 밥을 먹는다 하여도 반드시 마멸되고 말 것입니다. 이 몸은 곧 재앙이니 백한 가지의 병으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이 몸은 낡은 우물[丘井]과 같아서 늙음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이 몸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언젠가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이 몸은 독사와 같고 원수, 도둑과 같고 사람이 살지 않은 마을[空聚]과 같아서 온갖 요소의 집적[陰]과 그 종류[界]와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의지하는 곳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괴로움이며 꺼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부처님의 몸[佛身]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몸은 곧 법신(法身)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헤아릴 수 없는 공덕과 지혜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법신은 계(戒)정(定)혜(慧)해탈(解脫)해탈지견(解脫知見)으로부터 생기고 자(慈)비(悲)희(喜)사(捨)로부터 생기며, 보시하며[布施] 계율을 잘 지키며[持戒], 잘 참고[忍辱] 마음을 온화하게 갖고[柔和] 힘써 수행을 쌓고[勤行] 닦아 나아가며[精進] 마음을 섭수하여 선정(禪定)을 닦는 등 온갖 수행의 완성으로부터 생깁니다. 여러분 부처님의 몸을 얻어 모든 중생의 병을 끊고자 하면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장자 유마힐은 모든 문병자들을 위하여 그들에게 알맞는 가르침을 설하여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게 하였다.
유마경 - 5. 사리불의 좌선
그때 장자 유마힐은 `내가 병으로 이와 같이 누워 있는데 세존께서는 어찌하여 대자비를 내리시지 않는가?'라고 생각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유마힐의 뜻을 아시고 곧 사리불(舍利弗)에게 말씀하셨다.
"사리불이여, 그대는 유마힐에게 문병을 가라."
사리불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숲속의 나무 밑에서 좌선하던 옛 일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유마힐이 찾아와 저에게 말했습니다.
`사리불이시여, 앉아 있는다고 해서 좌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좌선이란 생사가 겹쳐진 삼계(三界)에 있으면서도 몸과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것을 좌선이라고 합니다. 마음과 그 마음의 작용을 없앤 무심한 경지의 선정[滅定]에서 나오지 아니하고서도 온갖 위의(威儀)를 나타내는 것, 이것이 좌선입니다. 진리의 법을 버리지 않고서도 범부의 일을 나타내는 것이 좌선이며, 마음이 안으로 응집된 고요한 상태에도 탐닉하지 않고 밖을 향하여 혼란되지 않는 것, 그러면서도 서른일곱 가지[三十七道品]을 닦는 것을 좌선이라고 합니다. 번뇌를 끊지 않고서 열반에 드는 것을 좌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와 같이 좌선하는 사람이라면 부처님께서 인가하실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때 저는 이와 같이 설하는 말을 듣고도 말문이 막혀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유마경 - 6. 목건련의 설법
부처님께서는 대목건련(大目∼連)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을 하지 않겠는가?"
목건련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저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비야리대성(臻耶離大城)의 거리에서 거사(居士)들을 위하여 설법할 때의 일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그때 유마힐이 저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목건련이여, 백의거사(白衣居士)들을 위해서 설법할 때는 그대가 설하는 것처럼 해서는 안됩니다. 설법이란 마땅히 진리 그대로를 설하는 것입니다. 법에는 중생이 없나니 중생의 오염을 초월한 까닭이며, 법에는 자아가 없나니 자아의 오염을 초월한 까닭이며, 법에는 수명(壽命)의 한정이 없나니 생사가 없는 까닭입니다. 법은 항상 적연(寂然)하나니 모든 형상이 없기 때문이며, 법에는 모든 형상이 없는 것은 인식의 대상이 없는 까닭이며 법에는 일정한 이름이 없나니 언어가 끊어진 때문입니다.
목건련이여, 법상(法相)은 이와 같거늘 어찌 말로 설할 수 있겠습니까? 설법자에게는 설하는 것도 없으며 보여주는 것도 없습니다. 또한 그 법을 듣는 사람은 듣는 것도 얻는 것도 없습니다. 비유컨대 요술하는 사람이 요술로 지어진 인형을 위하여 법을 설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뜻을 세워서 법을 설해야 합니다. 중생의 능력에 날카롭고 무딘 차이가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고 어떠한 것에도 능히 걸림이 없는 지견과 커다란 자비심으로 대승(大乘)의 가르침을 찬탄하고 불은(佛恩)에 보답코자 염원하며 삼보(三寶)가 단절되지 않도록 한 연후에 설법해야 합니다.' 유마힐이 이 법을 설하였을 때 8백의 거사들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했습니다. 저에게는 이와 같은 변재(辯才)가 없으므로 저는 그에게 문병을 갈 수가 없습니다."
유마경 - 7. 가섭의 걸식
부처님께서는 대가섭(大迦ⓣ)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에게 가서 문병하지 않겠는가"
가섭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저는 옛날 가난한 마을에서 걸식하던 일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그때 유마힐이 저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대가섭이여, 자비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널리 베풀지 않고 어찌 부자를 버리고 가난한 사람에게서 걸식 합니까? 가섭이여, 평등한 법에 머물러 마땅히 순서에 따라 걸식해야 합니다. 다섯 가지 요소로 뭉쳐진 육체를 깨뜨리기 위해서 음식을 먹어야 하며 받지 않기 위한 까닭으로 마땅히 그 음식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이라는 생각으로 마을에 들어가야 하며, 형상을 보아도 장님과 같이 대해야 하며, 소리를 들으면 메아리를 듣는 듯, 향내음을 맡아도 바람과 같이 맡고, 먹고도 맛을 분별하는 일이 없어야 하며, 온갖 감촉을 느껴도 번뇌를 끊어버린 깨달음의 경계에서 느껴야 합니다. 또한 존재하는 모든 것을 환상(幻相)처럼 알아야 하며, 법에는 자성(自性)타성(他性)도 없으므로 그 자체로서는 생기지 않으므로 지금도 멸하는 일이 없습니다. 또한 음식을 보시하는 사람의 복덕도 대소(大小)의 차별이 없습니다. 손득(損得)을 떠날 때야말로 부처님의 길에 바르게 들어간 것이며, 자신의 깨달음만을 생각하는 성문(聲聞)의 길에 의지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섭이여, 만약 이와 같이 먹는다면 남의 보시를 헛되이 먹었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때 이와 같이 설하는 말을 듣고 일찍이 없었던 것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보살들을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또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속가의 사람도 변재와 지혜가 이와 같구나. 그 누가 이를 듣고서 가장 높은 부처님의 깨달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랴?' 저는 그후 다시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깨달음만을 위해 닦는 성문과, 자기 혼자서 깨달음의 기쁨에 젖는 벽지불( 支佛)의 수행을 권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제가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습니다."
유마경 - 9. 부루나의 설법
부처님께서 부루나(富樓那)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가서 유마힐에게 문병하지 않겠는가?"
부루나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옛날 커다란 숲속의 한 나무 밑에서 새롭게 배우기 시작한 비구들을 위하여 설법하던 일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그때 유마힐이 찾아와 저에게 말했습니다.
`부루나여, 마땅히 먼저 선정에 들어 이들의 마음을 관찰한 후 법을 설해야 합니다. 더러운 음식을 보물그릇에 담아서는 안됩니다. 마땅히 이 제자들이 바라는 바를 알아야 합니다. 유리를 수정(水精)과 동일시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대는 중생의 근원을 알 수 없습니다. 소승의 가르침으로 그 마음을 일으키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들로 하여금 부스럼이 없는데 긁어서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큰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에게 작은 길을 가리키지 마십시오. 큰 바닷물을 소의 발자국에 넣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햇빛을 저 반딧불과 동일시 해서는 안됩니다.
부루나여, 이들 제자들은 이미 대승심(大乘心)을 발한 지 오래 되었지만 도중에서 그 마음을 잃었을 뿐입니다. 어찌 소승의 가르침으로 그들을 이끌 수 있겠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소승은 지혜가 미천함이 마치 장님과 같고 모든 중생의 능력이 날카롭고 무딘 것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때 유마힐은 곧 삼매에 들어 이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숙명(宿命)을 알게 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의 완성을 위해서만 수도하는 성문(聲聞)은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갖추고 있는 능력을 밝게 살피지 않고서는 설법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까닭으로 제가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유마경 - 10. 가전연의 논의
부처님께서는 마하가전연(摩 迦녔?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에게 가서 문병하지 않겠는가?"
가전연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옛날 부처님께서 여러 제자를 위하여 가르침의 요점을 간략히 설하셨을 때, 저는 곧 이어서 그 뜻을 알기 쉽게 설명하던 일이 기억나기 때문입니다. 저는 `무상(無常)의 뜻, 괴로움의 뜻, 공(空)의 뜻, 무아의 뜻, 적멸의 뜻'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때 유마힐이 와서 저에게 말했습니다. `가전연이여, 생멸(生滅)하는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실상(實相)을 설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사물은 궁극적으로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무상의 뜻입니다. 다섯 가지 요소[五受陰]가 쌓인 것은 공(空)하며 생기는 것이 없음을 깨닫는 것, 이것이 고(苦)의 뜻입니다. 모든 것이 구경(究竟)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 이것이 공(空)의 뜻이며 아(我)무아(無我)에 있어서 둘이 아닌 것, 이것이 무아의 뜻이며 존재하는 것은 본래 생기는 것이 아니므로 지금 곧 멸하는 일이 없으며 이것이 적멸(寂滅)의 뜻입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을 들었을 때 여러 제자들은 마음의 해탈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유마힐에게 문병가는 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유마경 - 11. 아나율의 천안
부처님께서 아나율(阿那律)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에게 가서 문병하지 않겠는가?"
아나율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하기에 적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옛적에 어느 곳을 산책하고 있을 때의 일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그때 엄정(嚴淨)이라는 대범천(大梵天)이 1만을 헤아리는 범천의 무리들과 함께 광명을 밝게 비추면서 제가 있는 곳으로 찾아 왔습니다. 그들은 저의 발에 머리를 대고 예배한 다음 저에게 물었습니다.
`그대의 천안(天眼)으로서는 어디까지 볼 수 있습니까?'
저는 곧 `대범천들이여, 나는 이 석가모니불토와 삼천대천세계를 손바닥 위의 암마륵열매[庵摩勒果]를 보듯이 볼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유마힐이 저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아나율이여, 천안(天眼)에 보이는 것은 인연으로 해서 생긴 물체의 모습입니까? 아닙니까? 만약 인연으로 해서 생긴 물체의 모습이라면 그때 그것은 이교도들의 오통(五通)과 같은 것이요, 만약 그러한 모습이 아니라면 그것은 곧 무위(無爲)이니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범천들은 그 말을 듣고 일찍이 듣지 못했던 법문이라 여기고 곧 예배하며 물었습니다.
`이 세계에서 누가 진정한 천안(天眼)을 가졌습니까?'
유마힐이 말했습니다.
`부처님이신 세존께서 진정한 천안을 얻으셨으니 항상 삼매의 세계에 계시며 모든 부처님의 국토를 하나로 보고 계십니다.'
이 말을 들은 5백의 범천들은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고 유마힐의 발에 예배한 다음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를 방문하여 문병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유마경 - 12. 우바리의 계율
부처님께서 우바리(優波離)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가서 유마힐을 문병하지 않겠는가?"
우바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에 두 사람의 제자가 파계(破戒)한 일을 마음으로부터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부처님께 나아가 물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저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우바리님 저희들은 계율을 범했습니다. 진심으로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 스스로 부처님께 나아가 물어볼 수도 없습니다. 부디 참회하노니 허물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십시오.' 저는 그들에게 법답게 해설하여 주었습니다. 그때 유마힐이 저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우바리여, 이 두 제자들의 죄를 더욱 무겁게 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당장 두 사람의 뉘우침과 불안을 해소시켜 주어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의 본성은 그들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도 밖에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와 같이 마음이 오염되어 있으면 중생도 더렵혀지고, 마음이 청청하면 중생도 청정한 것입니다. 또한 이 마음은 안에 있는 것도 밖에 있는 것도 그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이 그렇듯이 죄의 본성 또한 그와 같으며 모든 존재도 그와 같아서 진여의 본성으로부터 떠나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대가 마음의 본래 모습을 관찰하여 해탈을 얻는다고 하면 그 마음은 오염되어 있겠습니까?' 저는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유마힐이 말했습니다.
`일체 중생의 마음은 본래 오염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바리여, 망상(妄想)은 오염이며 망상이 없으면 바로 청정한 것입니다. 실체로서의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면 오염되어 있는 것이지만 그릇된 생각이 없으면 본래 청정한 것입니다. 모든 것은 생멸(生滅)을 거듭하여 환영(幻影)이나 번갯불과 같아서 잠시도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한 모든 것은 서로 기다리는 일이 없이 한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아지랑이, 물 위에 비친 달, 거울 속의 영상과 같아서 망상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도리를 아는 사람이야말로 계율을 지키는 사람이며, 이 도리를 아는 사람이야말로 깨달음을 잘 얻은 사람입니다.' 유마힐의 설법을 듣고 두 사람의 제자는 말했습니다.
`얼마나 뛰어난 지혜인가? 이는 우바리님이 감히 미칠 수 있는 경지가 아닙니다. 우바리님만큼 계율을 훌륭하게 지키는 사람도 설하지 못하는 법문입니다.' 저도 찬탄하여 말했습니다.
`여래를 제외하고 소승의 성자나 대승의 보살에게 이와 같은 변재(辯才)를 지닌 사람은 없다. 그 지혜는 명석하고 사물의 도리에 통달해 있다.' 이때 두 사람의 제자는 의심과 불안을 버리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고 `모든 중생에게 변재의 재능을 얻게 하리라'는 원(願)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제가 유마힐에게 가서 문병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습니다."
유마경 - 13. 라훌라의 출가
부처님께서 라훌라(羅훌羅)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에게 가서 문병하지 않겠는가?"
라훌라는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일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전에 비야리(浚耶離)성 장자의 여러 아들들이 저를 찾아와 저의 발에 예배하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라훌라여, 그대는 부처님의 아들로서 전륜왕(轉輪王)의 지위를 버리고 깨달음을 위하여 출가하였습니다. 그 출가에는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저는 출가의 공덕에 대해서 여법하게 설했습니다. 그때 유마힐이 저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라훌라여, 출가의 공덕에 대해서는 그대와 같이 설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이익이나 공덕이 없는 것이 출가이기 때문입니다. 유위법(有爲法)에는 어떠한 공덕이나 이익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출가는 생멸의 변화를 떠난 깨달음을 구하는 것으로 이익이나 공덕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라훌라여, 출가에는 깨달음도 미혹도 없음이며 그 중간도 없습니다. 출가란 온갖 악(惡)에서 벗어나 외도(外道)들을 설복(說伏)하며 거짓된 이름에 집착하지 않으며, 욕망의 늪을 나와 이에 집착하지 않으며, 실체로서의 자아에 속하는 것을 모두 버리고 집착하지 않으며, 고요한 무심(無心)의 경지에 온갖 과오를 떠날 수 있다면 참다운 출가인 것입니다.'
유마힐은 장자의 아들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바른 가르침을 받들어 함께 출가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을 만나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장자의 아들들은 말했습니다.
`거사님, 저희들은 양친의 허락이 없으면 출가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러자 유마힐이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대들이 지금 이곳에서 최고의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일으킨다면 그것이 곧 출가입니다. 또한 교단이 정한 완전한 계율을 구족(具足)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32명의 장자의 아들들은 모두 최고의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유마힐에게 가서 문병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유마경 - 14. 아난다와 부처님의 병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에게 가서 문병하지 않겠는가?"
아난다는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에 세존께서 몸이 불편하셨을 때의 일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는 우유를 드시면 좋으리라고 생각하고 발우를 들고 어느 대바라문의 집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곳에 유마힐이 와서 저에게 말했습니다.
`아난다여, 무슨 일로 이런 첫새벽에 발우를 들고 이곳에 서 계십니까?' 저는 `세존께서 좀 불편하십니다. 우유를 드시면 좋으리라 생각하여 이곳에 왔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유마힐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아난다여, 그렇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여래의 몸은 금강석(金剛石)과 같아서 허물어질 수 없는 몸입니다. 모든 악을 이미 끊고 뭇 선을 빠짐없이 실천하고 계시므로 어떠한 병도 어떠한 괴로움도 있을 수 없습니다. 조용히 돌아가십시오. 아난다여, 부처님을 비방해서는 안됩니다. 전륜성왕은 약간의 복덕으로도 병에 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물며 헤아릴 수 없는 복덕을 지니셨으며 누구보다도 뛰어나신 부처님께서 어찌 병에 걸리겠습니까? 아난다여, 어서 돌아가셔서 저희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저는 그때 마음 속으로부터 부끄러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부처님을 늘 가까이 모시면서 어떻게 하면 잘못 듣는 일이 없겠는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공중에서 `아난다여, 거사의 말과 같다. 다만 부처님께서는 오탁악세(五濁惡世)에 출현하셨기 때문에 실제로 이와 같은 법을 나타내보이심으로써 중생을 가르치고 계신다. 아난다여, 부끄러워 하지말고 우유를 가지고 돌아가라'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유마힐의 지혜와 변설은 이같이 뛰어납니다. 그러므로 제가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5백명의 제자들은 각각 부처님께 그들이 경험한 사실을 이야기하며, 유마힐이 설한 바를 찬탄하고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유마경 - 15. 광엄동자와 도량
부처님께서 광엄동자(光嚴童子)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에게 가서 문병하지 않겠는가?"
광엄동자는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옛날 제가 비야리대성(浚耶離大城)의 문을 나가려할 때의 일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그때 마침 유마힐이 성문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인사를 하고 물었습니다.
`거사님, 어디서 오십니까?'
그는 `나는 도량(道場)에서 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다시 물었습니다.
`도량이란 어느 곳 입니까?'
`정직한 마음[直心]이 도량입니다. 거짓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정하고 수행하는 것도 도량입니다. 능히 사물을 판별하기 때문입니다. 마음 깊이 도(道)를 구하는 것[深心]도 공덕을 증가시키므로 도량이며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菩提心]도 오류에 떨어짐이 없고 진리를 의심하지 않으므로 도량인 것입니다.
보시(布施)도 보답을 바라지 않으므로 도량이며, 계를 지키는 것도 서원(誓願)을 성취하므로 도량이며, 인욕도 모든 중생에 대하여 장애하는 마음이 없으므로 도량이며, 정진도 나태하여 물러서는 일이 없으므로 도량이며, 선정도 마음의 수행을 성취하므로 도량이며, 지혜도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기에 도량입니다. 즐거움을 베푸는 따뜻한 마음[慈]도 모든 중생에 대해 평등하므로 도량이며,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주는 따뜻한 마음도 중생을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잘 참아내므로 도량인 것입니다. 중생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것[喜]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익히는 즐거움이므로 도량이며, 중생에 대한 사랑과 미움을 끊는 평등함도 바로 도량인 것입니다.'"
유마경 - 16. 문수사리의 문병
그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文殊師利)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에게 가서 문병하지 않겠는가?"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그 성자(聖者)는 상대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실상(實相)을 깊이 통달하고 있으며, 가르침의 요지(要旨)를 훌륭하게 설하며, 변설의 재능은 걸림이 없고 지혜는 막힘이 없습니다. 모든 보살에게 필요한 방편을 모두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부처님의 비장(秘藏)을 알고 있습니다. 많은 악마를 항복시키고 신통을 자유롭게 행하며 그 지혜와 방편은 이미 완성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의 성지(聖旨)를 받들어 그를 찾아가 문병하고자 합니다."
그곳에 모인 많은 보살과 부처님의 대제자들제석천범천사천왕(四天王)들은 `이제 문수와 유마힐 이 두 보살이 함께 담론(談論)을 하면 반드시 묘법(妙法)을 설하리라'고 생각하였다. 문수사리는 수많은 보살과 부처님의 제자, 천상의 신들에게 둘러싸여 비야리대성(浚耶離大城)으로 들어갔다.
그때 장자 유마힐은 마음 속으로 `지금 문수사리가 많은 대중들과 함께 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곧 신통력으로 방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하고 시자(侍者)들도 내보냈다. 그리고 텅 빈 방안에 오직 하나의 침상만을 남겨두고 그 침상 위에 혼자 누워 있었다.
문수사리가 그 집에 들어가자 방안은 텅 비어 아무것도 없이 오직 유마힐이 혼자 누워 있었다.
유마힐이 말했다.
"문수사리여, 어서 오십시오. 온다는 상(相)이 없이 오셨으며 본다는 상(相) 없이 보셨습니다."
문수사리는 말했다.
"그렇습니다. 거사여, 만약 이미 왔을진대 다시 올 수 없을 것이며, 만약 이미 갔을진대 다시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오지 않은 것은 오는 것을 알 수 없으며 지나간 것도 가는 것은 알 수 없으며, 보인 것이 두 번 다시 보이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렇고 거사여, 병은 참을 만 하십니까? 치료에 차도가 있습니까? 세존께서도 여러 가지로 물으셨습니다. 거사여, 이 병은 무엇으로 인하여 생겼습니까? 그 병은 언제부터 생겼으며 언제쯤 나을 수 있습니까?"
유마힐이 말했다.
"나의 병은 모든 중생의 어리석음[痴]과 애착으로부터 생겼습니다. 무지(無知)가 남아 있는 한, 존재에의 애착이 남아 있는 한, 나의 이 병도 계속될 것입니다. 만일 모든 중생의 병이 낫는다면 그때 나의 병도 낫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중생을 위하여 생사(生死)에 들었고 생사가 있으므로 병은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중생의 병이 다한다면 보살도 병에서 떠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장자에게 외아들이 있어 그 아들이 병들면 그 부모도 병들고 만약 아들의 병이 나으면 부모도 낫는 것과 같습니다. 보살도 이와 같아서 모든 중생을 내 자식과 같이 사랑하고, 중생이 병을 앓을 때 보살도 병을 앓으며 중생의 병이 나으면 보살의 병도 낫습니다. 또한 이 병의 원인은 보살의 큰 자비인 것입니다."
유마경 - 17. 비어있는 방
문수사리는 물었다.
"거사여, 이 방은 무슨 까닭으로 텅 비어 있으며 시자(侍者)도 없습니까?"
"제불(諸佛)의 국토는 모두 공(空)하기 때문에 텅 비어 있는 것입니다."
"공이란 무엇입니까?"
"그릇된 사유(思惟)를 떠난 것이므로 공(空)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을 사유할 수 있습니까?"
"사유 또한 공입니다."
"그렇다면 공은 어디서 구해야 합니까?"
"예순두 개의 잘못된 지견[六十二見]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문수사리가 물었다.
"예순두 개의 잘못된 생각은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유마힐이 대답했다.
"일체 중생의 마음작용에서 구해야 할 것입니다. 또 그대는 왜 시자가 없느냐고 물었습니다만 모든 악마와 모든 외도(外道)가 모두 나의 시자입니다. 왜냐하면 악마는 생사의 세계를 즐기며 보살도 생사의 세계를 버리지 않고 있으며, 외도는 여러 가지 그릇된 견해를 즐기지만 보살은 그릇된 견해에 동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수사리가 유마힐에게 물었다.
"그대의 병은 몸의 병입니까, 마음의 병입니까?"
"몸과는 관계가 없으므로 몸의 병은 아니며 마음은 꼭두각시와 같은 것이므로 마음의 병도 아닙니다."
"보살은 어떻게 병들어 있는 보살[有疾菩薩]을 위로해야 합니까?"
"몸의 무상(無常)을 설하면서도 몸을 염리(厭離)하도록 설하지 않으며, 몸의 괴로움을 설하여도 깨달음을 바라는 일을 설하지 않으며, 몸에 자아는 없다고 설하여 중생을 가르치고 이끌 것을 설하며, 몸의 공(空)함을 설하여도 궁극적인 깨달음[畢竟寂滅]은 설하지는 않습니다. 자기의 병을 헤아려 남의 병을 동정하고 영원한 과거에서부터의 괴로움을 알아야 합니다. 문수사리여, 이와 같이 병들어 있는 보살은 병의 원인인 괴로움과 즐거움을 감수(感受)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을 위하여 온갖 괴로움과 즐거움을 감수하며 또 부처님의 가르침이 충분히 미치지 않는 한 감수하는 일을 버리고 깨달음의 경계에 들지 않습니다. 만약 자기의 몸에 괴로움을 받는 일이 있으면 죄의 과보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중생들을 생각하고 무한한 자비심을 일으킬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드는 것이 보살의 행이며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은 청정하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필요에 따라서 스스로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보살의 행입니다. 또 모든 부처님의 나라는 영원히 적정(寂靜)하여 공(空)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온갖 부처님의 청정한 나라를 나타내는 것이 보살의 행이며 부처가 되어 가르침을 설하고 깨달음의 경계에 들면서도 더욱 보살의 수행을 버리지 않는 것이 보살의 행입니다."
유마힐이 이와 같이 설하였을 때 문수사리가 데리고 온 많은 사람들이 가장 높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일으켰다.
유마경 - 18. 법(法)을 구함
그때 사리불(舍利弗)은 유마힐의 방 안에 앉을 자리가 없는 것을 보고 `여러 보살들과 부처님의 수많은 제자들은 어디에 앉을 것인가?'라고 생각했다. 유마힐은 사리불의 마음을 관찰하고 사리불에게 물었다.
"사리불이여, 그대는 진리를 구하기 위해서 왔습니까, 앉을 자리를 구하기 위해서 왔습니까?"
사리불은 말했다.
"저는 진리를 위해서 왔습니다. 앉을 자리 때문에 온 것은 아닙니다."
"알았습니다. 사리불이여, 진리를 구하는 보살은 신명(身命)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하물며 앉을 자리에 집착하겠습니까? 또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물질적 현상[色]이나 감각[受]표상[想]충동[行]의지[識]를 구하지 않으며, 의지하는 곳, 마음의 업으로 윤회하는 세계도 구하지 않습니다."
유마경 - 19. 중생에 대한 관찰
문수사리가 유마힐에게 물었다.
"보살은 중생을 어떻게 관(觀)해야 합니까?"
유마힐이 말했다.
"예를 들어 환술사(幻術師)가 환술(幻術)로써 만들어낸 꼭두각시를 보는 것과 같이 보살도 중생을 그렇게 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물에 비친 달그림자를 본다든가,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이나 모습을 보듯이, 한낮의 아지랑이, 메아리의 울림처럼, 허공의 구름처럼, 물거품이 일어나는 것처럼, 물 위에 뜬 거품처럼, 텅빈 파초의 줄기처럼, 반짝이는 번갯불같다고 봅니다."
유마경 - 20. 보살의 대비(大悲)
문수사리가 유마힐에게 물었다.
"무엇을 보살의 대비(大悲)라고 합니까?"
"보살이 스스로 지은 모든 공덕을 중생과 함께 갖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살의 기쁨[喜]이라고 합니까?"
"모든 이익을 베풀어 주고 마음으로부터 기뻐하여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버리는 마음[捨]이라고 합니까?"
"지은 바 복덕에 아무런 바람이 없는 것입니다."
문수사리가 다시 물었다.
"생사(生死)에 두려움이 있는 보살은 마땅히 무엇에 의지해야 합니까?"
유마힐이 말했다.
"만약 보살이 생사에 두려움이 있다면 마땅히 여래의 공덕력(功德力)에 의지해야 합니다."
"보살이 여래의 공덕에 의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만약 보살이 여래의 공덕력에 의지하려면 마땅히 모든 중생이 업과 번뇌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중생을 돕고자 한다면 무엇을 행해야 합니까?"
"중생을 돕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 번뇌를 없애도록 해야 합니다."
"번뇌를 제거하고자 하면 무엇을 행해야 합니까?"
"마땅히 마음을 바르게 하여 정념(正念)을 실천해야 합니다."
"어떻게 정념을 실천해야 합니까?"
"마땅히 생하는 것도 아니며 멸하는 것도 아님을 체득해야 합니다."
"어떠한 것이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습니까?"
"악(惡)은 생하지도 않고 선법(善法)은 멸하지도 않습니다."
"선과 악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고 있습니까?"
"이 몸을 근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 몸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고 있습니까?"
"탐욕이 근본입니다."
"탐욕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고 있습니까?"
"허망분별(虛妄分別)이 근본입니다."
"허망분별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고 있습니까?"
"그릇된 망상(妄想)입니다."
"그릇된 망상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고 있습니까?"
"의지하는 곳이 없는 상태[無住]를 근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의지하는 곳이 없는 상태는 무엇을 근본으로 삼고 있습니까?"
"의지하는 곳이 없는 상태는 근본이 없습니다. 문수사리여, 이 의지하는 곳이 없는 상태가 근본이 되어 모든 존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유마경 - 21. 천녀(天女)의 꽃
그때 유마힐의 방 안에는 한 사람의 천녀(天女)가 있었다. 여러 보살들을 보고 또 설하는 가르침을 들은 그녀는 곧 몸을 나타내 하늘 꽃[天華]을 보살과 부처님의 대제자(大弟子)들에게 뿌렸다. 보살들 위에 뿌려진 꽃은 몸에 붙지 않고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부처님의 대제자들 위에 뿌려진 꽃은 떨어지지 않고 그들의 몸에 붙어 있었다. 모든 제자들은 신통력으로 꽃을 떨어버리려고 하였으나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천녀는 사리불에게 물었다.
"무슨 까닭으로 꽃을 떼어 버리고자 합니까?"
"천녀여, 꽃으로 꾸미는 것은 출가의 법에는 적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꽃을 떼어내 버리려는 것입니다."
천녀는 말했다.
"이 꽃을 법답지 못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이 꽃은 아무런 분별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대덕(大德)께서 스스로 분별하는 마음을 낸 것 뿐입니다. 만약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출가하고서도 분별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법답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분별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법다운 것입니다.
대덕이여, 보십시오. 사리와 분별을 떠나 있는 보살들의 몸에는 꽃이 붙어있지 않습니다. 이미 분별하는 마음을 끊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두려운 마음을 지니고 있을 때 악귀의 힘이 미치기 쉬운 것처럼 대덕께서 생사를 두려워하고 있으므로 빛깔[色]과 소리[聲]향기[香]맛[味]감촉[觸] 등이 그 힘을 미치는 것입니다. 이미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오욕(五欲)의 힘이 전혀 미치지 않습니다. 번뇌가 다하지 않았으므로 꽃이 몸에 붙은 것입니다. 번뇌가 다하면 꽃은 붙지 않습니다."
유마경 - 22. 불이법문(不二法門)
그때 유마힐은 수없는 보살들을 향하여 말했다.
"여러 어지신 분들이시여, 보살은 어떻게 상대적 차별을 끊고 절대평등한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드는지 저마다 생각하는 대로 설해주시기 바랍니다."
법자재(法自在)보살이 말했다.
"여러분, 생하는 것과 멸하는 것은 서로 대립[二]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은 본래 생하는 것이 아니므로 지금 멸하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체득하는 것이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드는 것입니다."
불사(弗沙)보살이 말했다.
"선(善)과 불선(不善)은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선과 불선에도 집착하지 않고 평등하며 진실한 공(空)의 도리를 깨닫는다면 바로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드는 것입니다."
보수(普守)보살은 말했다.
"자아와 무아는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실체적 자아도 인지(認知)할 수 없거니 어찌 무아(無我)가 인지될 수 있겠습니까? 자아의 본래 모습을 보는 사람은 이 두 가지 생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이것이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드는 것입니다."
희견(喜見)보살은 말했다.
"물질적 현상[色]과 그 현상이 공한 것[色空]은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적 현상은 그대로가 공한 것으로서 물질적 현상이 멸하여 공한 것은 아닙니다. 물질적 현상의 본성이 공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감각[受]표상[想]충동[行]인식작용[識]도 그대로가 공한 것입니다. 인식작용[識] 그대로가 공한 것이지 인식작용이 멸했기 때문에 공한 것은 아닙니다. 인식작용의 본성이 그대로 공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체득하는 것이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드는 것입니다."
낙실(樂實)보살이 말했다.
"진실과 허위는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을 보는 사람은 진실까지도 보지 않습니다. 하물며 허위를 보겠습니까? 왜냐하면 진실은 육안(肉眼)으로 보는 것이 아니며 지혜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나, 이 지혜의 눈에는 본다고 하는 것도 보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절대평등의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드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수많은 보살들이 제각기 자신의 견해를 설했다. 유마힐이 문수보살에게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하면 보살은 절대평등의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들 수 있습니까?"
문수사리가 대답했다.
"제가 생각하건대 모든 것에 있어서 말이 없고, 설(說)함도 없으며, 가리키는 일도, 인지(認知)하는 일도 없으며 모든 질문과 대답을 떠나는 것이 절대평등한 경지에 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문수사리가 유마힐에게 말했다.
"지금까지 여러 보살들이 자기의 견해를 말했습니다. 거사께서 말씀해주실 차례입니다. 어떻게 하면 보살은 절대평등한 경지에 드는 것입니까?"
그러나 유마힐은 오직 묵연(默然)하여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문수사리는 감탄하여 말했다.
"참으로 훌륭합니다. 문자도 언어도 없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드는 길입니다."
이와 같이 절대평등의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드는 가르침이 설해졌을 때 이곳에 모인 5천의 보살이 모두 불이법문에 들었으며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다.
유마경 - 23. 위촉
부처님께서 미륵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미륵이여, 나는 이제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시간에 걸쳐 닦아 이룩한 최고의 깨달음에 관한 가르침을 그대에게 위촉하고자 한다. 이 경전은 부처가 입멸한 뒤 말세에도 수행의 힘을 모아 널리 유포하여 단절되지 않도록 해야한다. 왜냐하면 미래세에의 선남자선여인천(天)용(龍)귀신건달바나찰 등이 최고의 깨달음을 얻고자 원(願)을 세워 대승의 가르침을 구하는 일이 반드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경전의 가르침을 듣지 못하면 그들은 뛰어난 대승의 은혜를 잃게 될 것이다. 그들이 이 경전의 가르침을 듣는다면 반드시 마음으로부터 믿고 기쁨에 싸일 것이고 희유한 마음을 낼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전을 수지하여 중생이 어떻게 하면 이익을 얻을 수 있는가에 따라서 널리 설하여 들려 주어야 한다."
부처님께서 이 경전을 설하여 마치시자 장자 유마힐과 문수사리사리불아난다천상의 신들아수라 등 모인 대중은 한결같이 커다란 기쁨에 싸이고 마음으로부터 믿고 봉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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