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41.고경법전
부처님이 설한 계율이 해탈의 세계로 인도한다
밝은 거울처럼 살면서 제자와 불자들을 인도했던 고경법전(古鏡法典,1883~1946) 스님. 불보종찰 통도사에서 내외전을 두루 익히고 ‘남방대강사’로 불릴 만큼 교학에 뛰어났던 고경스님은 이후 율사로 계를 설하기도 했다. 해방 후 첫 통도사 주지로 추대됐을 만큼 대중에게 신망받으며 ‘수행자의 모범’을 보였던 고경스님 일화를 비문을 통해 살폈다. 또한 제자 일타스님이 도서출판 효림을 통해 발간한 <나의 스승 고경당 법전 대종사> 내용을 참고했다.
“부처님이 설한 계율이 해탈의 세계로 인도한다”
내외전 두루 익힌 ‘남방 대강사’ 명성
‘화합 · 공부 · 정진’ 후학들에게 당부
○…소년시절에 출가한 고경스님. 세속에서 미처 배우지 못한 사서삼경을 비롯해 부처님 가르침이 담긴 각종 경전을 익히는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특히 <화엄경>을 읽으면 환희심이 일어나, 8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양을 몽땅 외웠다고 한다. 통도사에서 도반과 밤새 책 읽는 일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더구나 한 도반과는 ‘선의의 경쟁’이 벌어져 밤을 꼬박 새우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어찌나 경을 열심히 독송하는지 “경(經)만 보면 신바람이 나는 스님”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10대 시절은 누구나 아무리 먹어도 배고픈 시절이다. 고경스님이 밤새 책을 읽다 배고프면 두부를 만들고 남은 비지찌꺼기를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별빛만 남아있는 한 겨울밤. 추위에 떨면서 먹은 꽁꽁 얼어붙은 비지찌꺼기는 고경스님의 법체(法體)를 유지시켜준 ‘고마운 공양’이었다.
○…어린 나이에 비록 부처님 제자가 되었지만, 마을에 남아있는 노모(老母)에 대한 효심(孝心)은 지극했다. 홀로 남아 농사 짓는 노모를 떠올리면 마음이 아팠다. 통도사 학인 시절이었다. 봄이 되어 보리 타작을 할 시기. 고경스님은 은사 혼응스님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스님, 비록 농사는 많이 짓지 않지만, 홀로 계신 노모가 보리타작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허락해주시면 어머니께 사흘만 다녀왔으면 합니다.”
이미 스님은 당신이 자리를 비운 3일간 은사스님이 필요한 땔감과 김치 등을 준비했고 빨래도 해 놓았다. 제자의 갸륵한 마음에 은사스님은 허락을 했고, 고경스님은 어머니가 계신 마을(언양)까지 20리를 쉴 새 없이 달렸다. 집에 도착해 모친께 절한 뒤 곧바로 보리밭에 가서 일했을 정도로 효심이 각별했다.
○…통도사 강사(講師, 지금의 강주)가 됐지만 고경스님은 손수 방을 청소하고 빨래를 하는 등 철저하게 하심(下心)을 했다. 스물여섯 살의 젊은 나이의 강사이다 보니 가끔 웃지 못 할 일이 있었다. 방을 청소하고 있는 고경스님을 보고는 찾아온 손님들이 시자로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났다. “이보게, 젊은 학인. 강사스님은 어디 가셨나.” 걸레로 방을 닦던 고경스님이 돌아보며 “지금 방에 계십시다”라고 인사를 드렸다. 손을 씻고 가사와 장삼을 수한 고경스님이 손님을 맞이하면 그제야 “아이고, 죄송합니다. 스님께서 강사이신 줄 몰랐습니다”라고 ‘사과 아닌 사과’를 했다고 한다. 이 같은 일 때문에 고경스님 방에서는 종종 웃음꽃이 피어났다.
○…부산 범어사에 2년간 머물다 통도사로 돌아온 스님은 1923년(41세)부터 통도사 금강계단의 전계대화상(傳戒大和尙)과 교수대화상(敎授大和尙)이 되어 보살계와 구족계를 전했다. 청정 율사로서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 제자가 되도록 인도했던 고경스님이 남긴 수계법회 당시 법문 가운데 일부를 옮긴다.
“우리는 모든 죄가 탐욕과 습관으로 생겨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탐욕과 습관의 결박을 풀지 못하여 끊임없이 죄업을 쌓으며 죽어가는 존재가 중생입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합장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면 모든 번뇌 망상은 구름 걷히듯 사라집니다. 참회하십시오. 불자들의 참회는 스스로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스스로 고백하는 것부터가 스스로 죄를 없애는 방법입니다. 심지어는 도저히 용서될 수 없는 죄까지도 스스로 죄의 본성(本性)을 관찰함으로써 참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더욱이 계를 받아 우리 마음에 깃든 선심(善心)을 일깨우면 해탈은 멀지 않은 곳에서 모습을 나타냅니다. 계를 받기 전에 죄 있는 자는 마땅히 참회하십시오. 죄 있는 자가 참회하여 몸과 마음을 유리그릇처럼 맑게 할 때, 부처님께서 설하신 이 계율이 여러분을 해탈의 세계로 인도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고경스님은 제자들을 매우 엄하게 지도했다. 잘못한 일이 있으면 그 어느 스님보다 엄하게 꾸짖고, 다시는 그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했다. 일타스님은 생전에 은사인 고경스님을 회상하면서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벼락불 같은 호통을 내렸다”고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누구보다 자상했던 어른이 고경스님이다. 일타스님은 “생활 하나하나에 대한 보살핌이 그렇게 지극할 수 없었다”면서 “학교를 다닐 때 공납금 등 필요한 학비는 언제나 은사 스님이 미리 내주셨다”고 회고한바 있다.
○…누군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고경스님은 반드시 찾아가 문상을 하고 극락왕생을 발원했다. 아픈 사람이 있으면 병문안을 했고,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남몰래 도와 주었다. 모든 중생을 자비심으로 대했던 부처님의 가르침을 고경스님은 그대로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고경스님은 은행보다 더 분명한 분이다.” 일제강점기 스님과 인연 있는 사람들이 고경스님에게 돈을 맡기는 일이 적지 않았다. 시중에 은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경스님에게 부탁했을 만큼 신의가 분명했던 것이다. 해방 후 불보종찰 통도사 주지로 추대됐지만, 이를 사양하고 안양암에 주석처를 정한 고경스님은 “조용히 공부에 전념하며 회향하겠다”고 했다.
또한 스님은 “내생(來生)에는 결정코 참선을 하겠다”면서 참선 수도에 대한 원력을 밝혔다. 당시 고경스님은 “나는 인천권(人天權)이 없어 앞장 못선다. 일제 강점기는 일본말을 몰라 주지를 못했고, 이제 해방은 됐지만 미군정 시대이니 영어를 하는 분이 주지가 돼야 한다”면서 극구 사양했다. 대중들이 거듭 주지로 추대했지만 스님은 끝내 고사했다.
○…고경스님이 안양암에 머물면서 미질(微疾, 가벼운 질환)을 보인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와 후학들이 찾아왔다. 이때 고경스님은 세 가지 당부를 했다고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합이 제일이니 싸우지 말라.”
“공부를 착실히 해라.”
“부지런히 정진하라.”
무엇보다 화합(和合)을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했던 것이다. 1946년 1월27일 원적에 들며 남긴 임종게는 후인들에 남긴 스님의 마지막 가르침이었다.
“平生所養底(평생소양저) / 都在一單子(도재일단자) / 絶愛無親(절애무친소) /
單單只者是(단단지자시) / 來與明月來(내여명월래) / 去髓明月去(거수명월거) /
去來本無實(거래본무실) / 實相今何在(실상금하재)”
“평생에 나의 한 짓이 / 표주박 하나뿐이네 /
사랑도 끊고 친소도 없고 / 오로지 다만 이것 밖에 없는 것을 /
올 때에 명월과 더불어 오고 / 갈 적에 명월을 따라 가는가 /
가고 옴이 본래 실속 없는데 / 실상은 지금 어디 있는가.”
■ 행장 ■
禪·敎·律 겸비…통도사 주지 사양
1883년 8월13일 울주군 삼남면 작하리에서 부친 윤성각(尹性覺) 선생과 모친 신씨(申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 14세에 양산 통도사에서 환담예은(幻潭禮恩)스님 제자인 혼응기연(混凝琪衍)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통도사에서 고경스님은 은사와 노(老)은사로 부터 사서삼경(四書三經)은 물론 <서장(書狀)> <도서(都序)> <금강경> 등 내외전을 고르게 익혔다. 경전 가운데 스님은 <화엄경>을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80권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화엄경>을 모두 외울 정도였다. 내외전을 두루 익힌 스님은 26세 되던 해에 통도사 강백으로 추대될 만큼 실력과 대중들의 두터운 신의를 받았다. 36세에는 부산 범어사에서도 강(講)을 설(說)하는 등 부처님의 가르침을 후학들에게 전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금강산 유점사의 일우(一愚)스님을 북방대강사(北方大講師)라고 했고, 고경스님을 남방대강사(南方大講師)라고 했다. 스님은 당대의 ‘2대(二大) 강사’로 명성을 떨쳤다.
스님은 41세 되던 1923년 통도사 금강계단의 전계대화상및 교수대화상으로 추대되어 보살계와 구족계를 주었다. 56세 때인 1938년 스님은 사교입선(捨敎入禪)의 뜻을 세우고 금강산 신계사 선원에서 안거에 들었다.
해방 후 대중들이 통도사 주지로 추대했지만 거듭 사양했으며, 이후 안양암(安養庵)에 머물렀다. “조용한 곳에서 공부하며 회향하겠다. 내세에는 결정코 참선을 하겠다”고 밝힌 스님은 1946년 1월27일 “세상일이란 그림자와 같고 인과는 분명하다”는 내용의 임종게를 남기고 원적에 들었다. 세수 64세, 법랍 50세로 스님의 진영과 비는 양산 통도사에 모셔져 있다.
제자로는 동운민호(東雲旼昊) 동안인종(東岸印宗) 동화상락(東華相洛) 동봉만업(東峰萬業) 동명효철(東溟孝喆) 동오진우(東悟震宇) 동초근창(東草根昌) 화산정달(華山正達) 일고덕근(一皐德根) 동곡일타(東谷一) 스님 등이 있다.
통도사=이성수 기자
[출처 : 불교신문 2485호/ 2008년 12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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