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불교와 대승불교 / 현응스님
‘기본불교’란 무엇인가
나는 대다수 사람들이 대승불교의 성격과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기본불교(무상, 무아, 연기, 공, 반야 등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하는 모든 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고 보는 것이다. 지나친 오만일 수도 있고, 착각일 수도 있는 이런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 왔다. 큰스님들의 법문과 강의를 들을 때도 외람되게 그러했고, 서적을 통해 국내외 여러 불교학자들의 의견과 주장을 보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불만스러운 감정이 자리 잡곤 했다. 그 이유는 그러한 법문이나 저술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들이 기본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를 명확하게 알고 있지 못하다고 여겨지는 그 어떤 점으로 인해 대개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먼저 2,600년 불교의 흐름 속에 나타난 다양한 불교의 가르침을 크게 기본불교와 대승불교라는 용어로 분류하고자 한다.
‘기본불교’라고 이름 하는 것은 새로운 시도인데, 초기불교·근본불교·소승불교 등으로 쓰이는 일련의 불교와는 별도로 기본불교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대승불교의 가르침과 비교함으로써 이 시대에 필요한 불교적 전망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기본불교와 대승불교의 내용은 무엇인가?
‘초기불교’라는 표현은 가치중립적이기는 하지만, 용어상으로는 그 내용의 특성이나 위상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시기적으로 처음 시작하는 단계의 불교’라는 의미로서 부처님 당시에서부터 일정 기간 동안 불교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근본불교’는 초기불교를 지칭하는 또 다른 용어이기도 한데, 근본이라 함은 ‘근원, 기원, 원천, 유래 ……root, source, origin……’라는 의미로 읽히기 때문에 오리지널한 원형이라는 당위성과 절대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다소 논쟁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소승불교’는 초기불교, 근본불교, 상좌불교, 부파불교 등을 통틀어 지칭하지만, 실은 부파불교를 가리켜 대승불교도들이 폄하하는 뉘앙스를 담아 쓴 용어로서, 근자에는 다소 조심스레 사용하거나, 대승불교와 특별히 대비하여 말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이에 비해 ‘기본불교’는 ‘기초, 근거, 토대, 바탕 ……foundation (fundamental), basis(basic), standard……’의 뜻을 가지는 ‘기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따라서 ‘기본불교’라는 표현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인 ‘무상, 무아, 연기, 공, 반야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잘 알기 위한 모든 방편과 노력들(4념처·8정도를 위시한 37조도품이나 지관행, 선불교의 참선 등)’의 내용을 담지하고 있는 불교라는 뜻이다.
이러한 기본불교의 내용은 초기불교나 아비달마의 기본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초기불교나 아비달마의 가르침은 기본불교라 부를 수 있다.
또, 선(禪)불교도 표현 양식은 다르지만 반야와 공을 기본 내용으로 하기에 기본불교라 할 수 있다. 대승경전과 논(論)도 무상, 무아, 연기, 그리고 반야와 공을 기본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승불교도 기본불교의 가르침을 기본적으로는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대승불교는 그러한 기본적인 측면에 더하여 성격을 달리하는 별도 영역을 추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기본불교와 구분하여 대승불교라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대승불교는 초기불교, 근본불교 등과 대칭되는 용어라기보다는 기본불교와 대칭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본불교에서 추가되는 대승불교의 별도 영역은 무엇이며 왜 추가하게 되었는가?
대승불교 출현과 그 배경
불교의 기본 가르침은 무상, 무아, 연기, 공 그리고 반야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사람들로 하여금 존재가 덧없고 허망한 것임을 일깨워 주어 존재의 실재성으로부터 해탈하게 해 주는 효과를 이끌어냈다. 또한 부파불교, 아비달마 시대를 거치면서 교리적 발전과 정립을 거쳐 더욱 정치한 이론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기본불교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본불교의 가르침은 삶과 세계를 설명하고 해석하는 입장이었다. 즉 기본불교는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일깨워 주었지만,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바꾸어 나가야 하는지, 어떤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무상, 무아, 연기의 가르침은 상대주의적 세계관에 입각한 것이므로, 그 어떠한 실재(實在)도 세우지 않는다. 세상의 어떤 존재나 가치도 절대적이지 못하며, 덧없으며 허망하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부처님 당시의 인도사회에는 브라만교가 있어 ‘브라만’이라는 보편적 실재를 중심에 놓는 교리를 내세우고 있었다. 브라만교는 모든 가치가 브라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었다. 그 밖에도 당시에는 객관적 실재론, 주관적 실재론, 일원적 실재론, 다원적 실재론 등 다양한 실재론을 표방하는 가르침이 횡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교가 출현함으로써 인도사회는 다양한 실재론을 내세우는 여러 종교와 어떠한 실재도 인정하지 않는 불교로 크게 이분되었다. 불교 이외의 종교나 가르침은 모두 실재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당연히 비실재론의 불교와 실재론의 여러 종교 간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세상이 무상하고 무아하다면 결국 세상이 허망하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가?’
‘목숨은 과연 연장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가정생활은 해야 하는가?’
‘세상이 허망하다면 사회는 바람직하도록 개조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세상이 허망하다는 이론이 세상을 변화시킬 방향과 방법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불교도들에게 쏟아져 들어왔을 것이다. 도대체 실재를 전제하지 않은 세계가 가능한 것인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납득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신(神)이나 존재의 본성 같은 실재가 없다면 우리 삶의 가치는 어디서 유래되며, 행동의 동기는 어디에 근거해야 하는가? 비단 다른 종교인들의 질문뿐만 아니라, 불교도 스스로도 이런 질문을 자연스럽게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 대한 딜레마는 불교 내부에서 교리적으로 모색하여 해결해야 했던 과제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의 인도사회에서 불교 이외의 종교나 사상들과 많은 논쟁을 하는 과정에서 당연하게 부각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재론적 세계관에 서 있는 그들과 논쟁하는 과정에서 불교도들이 무상, 무아의 세계관을 설명하여 이해시키는 일은 매우 힘들었을 것이고, 더구나 모든 것이 덧없고 허망하다는 입장을 가지고 어떻게 삶을 살아가는 것인지 설명하기란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한 당시의 정황은 많은 경전에서 묘사되고 있다. 예컨대 초기 대승경전인 반야경(《금강경》 《소품》 《대품》 등)에는 “어떠한 종류의 실재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놀라지 않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매우 희유한 일일 것이다.”라는 표현이 무수히 나오고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그것이 어떤 종류이든 반드시 실재를 전제로 해서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실재가 없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이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그 어떤 실재를 전제로 하지 않는 삶의 경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너무 막연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상, 무아, 공을 내세우는 불교가 대중을 설득하기 힘든 점이었다. 반야경 등 대승경전의 편찬자는 이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 어려움 점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삶과 행동의 근저에는 그 어떤 실재(예컨대 신, 브라만, 선, 이성, 명예, 부, 쾌락 등)가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실재로부터 행위의 동기와 목적을 부여받고 있다. 그런데 불교가 말하는 무상, 무아, 공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면 실재성의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동기와 행동의 당위성 및 필요성이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알 수 없어 ‘놀라고 두려워하고 허둥댄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는 실재론에 서 있는 다른 종교, 사상들과 대항할 ‘적극적인 연기적 역사관’이 필요하게 되었고, 내부적으로도 연기론을 이해한 불교도들에게 삶을 열심히 살 수 있도록 하는 보다 진전된 불교 이론을 펼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본불교의 가르침은 이러한 교리적 도전에 응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내용을 포함하는 불교’로 발전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대승불교’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새로운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상, 무아, 연기, 공이라는 비실재론적인 세계관을 통해서 존재와 세계의 실재성으로부터 해탈하여 모든 괴로움을 원천적으로 소멸할 수 있다는 삶의 자세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비실재론적 세계관을 유지하면서도 실천적이며 적극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그 어떤 태도와 방법을 말한다.
실재를 전제하지 않는 연기론적 세계관을 가진 불교도가 세상을 덧없이 알고 허망하다고 하는 생각을 유지하면서도 과연 세상을 적극적이고도 뜨겁게 살 수 있는가?
여기서 냉정한 판단을 기초로 한 해답이 나왔다. ‘덧없다, 허망하다, 꿈같다’라는 것은 사실판단이지 가치판단이 아니라는 점이다. 세계가 덧없고 꿈같고 허망하다는 것은 현실이 그러하다는 사실판단의 영역이며, 그것이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거나, 즐겁다거나 괴롭다거나 또는 무언가를 하겠다거나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겠다는 것은 가치판단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상투적으로 생각하면 ‘덧없다, 허망하다, 꿈같다’라고 하는 면은 당연히 ‘그만두어야지,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지, 아! 슬프다’ 따위와 연결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논리적으로 아무런 상관 관계를 가지지 못한다. 즉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은 전혀 다른 논리적 차원의 영역인 것이다. 그러므로 대승불교는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결합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여 그 결합을 적극적으로 시도하였다.
마치 흰 것과 딱딱함이라는 다른 차원의 내용이 하나의 바둑돌이 되는 것처럼, 세계가 허망하다는 사실판단을 전제로 하면서도 특정한 가치판단인 어떤 목표를 세워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성격의 논리적 영역이 결합하여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승불교란 이와 같이 세계가 허망하다고 보는 사실판단을 바탕으로 하되,‘자비’와 ‘원(願)’이라고 하는 투명한 가치판단을 내세워 다양한 방편바라밀을 통해 적극적이고도 뜨거운 삶을 살아갈 것을 가르친다.
예를 들어보자. 영화는 끊어진 필름의 연속동작으로 이루어지는 착시현상을 통해 성립된다. 이러한 착시현상으로 이루어지는 영화는 허망하며, 덧없고, 꿈같고, 환상(illusion)과 같다. 사실판단으로 보면 그렇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활동사진을 허망하고 환상과 같다고 하여 일찌감치 폐기처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움직이는 허망한 필름 속에 인간의 꿈과 사랑, 슬픔과 용기 등을 담아내면서 영화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왔다. 즉 영화는 허망한 것이긴 하지만, 그 허망함 위에 뜨거움과 정열을 구현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영화가 허망한 것인 줄 알기에, 또한 그러기에 영화 속에 구현되는 삶의 모습들과 꿈들을 애틋하게 여기는 것이다.
대승불교도들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허망한 삶과 세계에 투명한 ‘자비’와 ‘원’을 바탕으로 뜨거움과 적극적인 실천을 담아내고자 했다. 이러한 일은 세계를 무상, 무아, 공, 반야라고 하는 연기론적 세계관을 저버리는 데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에 근거하기에 가능한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대승불교의 미묘함이라 하겠다. 마치 활동사진의 허망과 환상이라는 속성을 통해 영화가 가능하듯이.
이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 대승불교인 것이다.
《금강경》을 대승경전이라 부르는 이유
문답형식으로 이루어진 초기 대승경전인 《금강경》은 다음과 같은 그 유명한 첫 질문으로 시작한다.
“사람들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하였다면 일상에서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며 다스려야 합니까?(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
즉 무상, 무아, 공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실재론에 근거하고 있는 타 종교인이나 비실재론에 서 있는 불교도들의 공통적인 의문을 대변하고 있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되 구제한다거나 했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대답했다.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구제한다는 생각이 없이 구제하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구제하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만일 구제 등의 행위가 무의미하다거나 불필요하다면 부처님은 ‘일체가 무의미한 일이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라고 답변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은 선남자, 선여인으로 하여금 무수한 선행과 자비를 행하도록 권함과 동시에 존재와 삶, 그리고 세계가 허망하다는 것을 잘 알아 마음에 집착하거나 머물지 말 것을 중요한 조건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머물거나 집착하지 않는 자비행을 말하는 것으로서 대승의 첫 가르침이 되는 것이며, 《금강경》을 대승경전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이러한 자비를 불교에서는 여환자비(如幻慈悲; 환상과 같은 자비), 무연자비(無緣慈悲; 논리적이거나 현실적 연관성이 없는 자비)라고 말하는데 이는 실재론에 근거한 사랑이나 욕망과 구분된다.
《금강경》의 대표적인 구절인 “머무름 없이 마음을 내라!(應無所住而生其心)”는 이야기도 같은 맥락의 뜻이다. ‘아(我), 인(人), 중생(衆生), 수자(壽者)라는 각종 상(相)은 허망한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상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고자 하는 어떤 마음을 내어야 한다.’ 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머물지 않으면서도 마음을 내어 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요, 그것이 결국 대승의 핵심적 요체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구절은 ‘응무소주’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기심’에 강조점이 있는 것으로 읽어야 대승의 취지가 더 잘 드러난다. 그 어떠한 상(相)에도 머물지 않되, 마음을 내어 행하는 일, 이것이 대승에서 말하는 청정심이며, 미묘한 행인 것이다.
불교의 경전이나 어록에서 나오는 청정이라는 표현은 ‘깨끗하다(clean)’는 뜻이라기보다는 연기적 세계의 모습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실체가 없이 다른 것과의 연관 속에 드러나 있으며 변화해 가는’ 그 어떤 투명한 상태를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청정심이라 할 때는 그러한 상태를 잘 이해하고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예컨대 선불교에서 ‘마음을 잘 살펴 맑음을 본다(住心看淨)’라고 할 때도 그러하고, 《열반경》 등에서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고 말씀할 때도 깨끗한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와 반야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경전이나 어록에서 ‘맑을 정(淨)’이라는 구절이 나오면 대개 ‘연기(緣起)의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틀림이 없다.
어쨌든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내어 행하는 일’, 즉 청정심으로 행하는 자비행이야말로 대승불교의 특징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강조하는 《금강경》의 문단들을 지칭하여 중국 양나라 소명태자는 ‘묘행무주(妙行無住; 머물지 않는 미묘한 행위)’, ‘정토장엄(淨土莊嚴; 세계를 멋지게 꾸미는 일)’이라고 소제목을 달기도 하였다.
대다수 사람들이 《금강경》을 포함한 반야경의 메시지를 ‘무주(머물지 않음)’나 ‘상을 여윔’ 또는 ‘공을 밝힘’이라 하지만, 사실 대승의 가르침은 ‘머물지 않으면서 어떻게 행하는가’에 있으며 《금강경》은 이에 충실하고 있다.
《반야심경》은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표현하고 있나?
그런데 이상과 같이 《금강경》이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잘 드러내고 있다면 《반야바라밀다심경(일명 ‘반야심경’)》은 어떠한가? 한국불교가 각종 의식에서 애송하는 《반야심경》은 반야 계통의 경전이지만, 대승불교를 이야기한다기보다는 기본불교를 강조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반야심경》은 ‘공(空)을 밝히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에서는 오온(五蘊; 물질이나 정신적인 각종 영역의 무더기 등)이 다 공(空)임을 관조하여 이해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이며, 이러한 반야바라밀을 통해 모든 괴로움을 벗어나게 되고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가르침을 천명하고 있다.
공은 바로 연기(緣起)를 뜻하며, 연기로 드러나 있는 현상을 말한다. 그것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변해가며 모든 영역과 상호 의존하며 삼투하고 있다. 이러한 존재들은 실재적인 의미로 볼 때, 존재하는 것도 아니면서 존재 자체가 없다고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그래서 인도의 나가르주나는 《중론》에서 이러한 존재의 양상을 공이라고도, 가(假)라고도, 중(中)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고 했던 것이다. 많은 대승경전에서 연기의 세계를 연기성(緣起性), 공성(空性), 법성(法性), 불성(佛性)등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다 같은 말이라 하겠다.
따라서 무상, 무아, 연기, 공 등에 대한 가르침을 기본불교라 했을 때 《반야심경》은 기본불교에 충실한 경전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반야심경》과 달리 같은 반야부 경전인 《금강경》이나 《소품》 《대품》 등은 기본적으로 반야나 공을 설명하지만, 추가로 각종 바라밀과 중생구제 등의 자비행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가리켜 대승불교라고 하는 것이다.
유식(唯識), 여래장, 진여의 세계는 대승불교인가?
연기, 무상, 무아, 공에 대한 가르침이 기본불교라면 유식(唯識), 여래장, 법계, 법신, 진여 등에 대한 가르침은 대승불교인가, 기본불교인가?
답은 기본불교이다. 법성, 공성, 연기성, 불성, 법신이라는 표현은 모두다 연기의 세계를 표현하는 동의어이다. 그렇듯이 유식성(唯識性), 법계성, 진여성, 여래장성 또한 같은 말로서 다 연기적 존재의 실상을 드러내는 동일한 용어이다. 따라서 연기와 공의 범주를 설명하는 것이라면 공, 여래장, 진여 등의 용어를 사용하여 세계를 설명하더라도 기본불교로 보아야 한다. 물론 유식, 여래장, 진여 등의 가르침을 기본으로 하면서 ‘머물지 않는 자세로 행하는 각종 바라밀과 자비행’을 말한다면 당연히 대승불교가 되는 것이다.
만일 기신론이나 《능엄경》 《화엄경》 등을 이야기하면서 마음, 여래장, 진여, 법계연기 등만 강조하면 기본불교를 설하는 것이요, 그러한 기본불교에다 각종 바라밀과 자비행을 연결시켜 말하면 대승불교로 설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한국불교는 대승경전을 기본불교로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지, 대승불교로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는지 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의 선불교는 대승불교인가?
중국의 선(禪)불교의 경우도 한번 살펴보자. 선불교는 대승불교인가, 기본불교인가?
선불교는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펼쳐진 이래 한참 후인 중국의 당, 송 이후에 나타난 불교 경향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대승불교라 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선불교는 인도의 반야사상, 즉 공사상이 중국적으로 변용되어 표현되는 특수한 장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선사들이 설법, 게송 읊기, 각종 제스처를 통해 불교를 표현하고 있는데,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반야와 공의 세계를 드러내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삼고 있다. 그렇다면 선불교도 대승불교라기보다는 기본불교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선불교에서는 특히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반야와 공(연기)에 대한 이해요, 깨달음이기 때문에 선불교는 기본불교의 중국적 변용(variation)인 셈이다.
그렇다면 선불교도 자비와 바라밀을 포함할 수 있는가? 당연히 포함해야만 한다. 그래서 선불교도 기본불교에 머물지 말고 대승적으로 선풍을 펼쳐 나가야 할 것이다. 이는 지혜(깨달음)와 자비를 구족하는 일이며, 반야와 방편을 겸하는 일이기도 하다. 선불교가 만약 반야와 공만 드러내는 데 그친다면 이는 불교의 기본적인 측면만을 강조하는 일로서 불교의 진화적 성과인 대승불교의 측면을 배제하는 일이 될 것이다.
20세기 초에 일본의 D. 스즈키 박사가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선불교에 대한 순회강연을 할 때의 기록을 보면, 선불교도 사회와 역사 문제에 관심을 갖는가라는 질문을 종종 받았는데, 그때마다 옹색한 답변으로 그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선불교는 ‘안목이 올바른 것을 존중하지 그대의 행동은 묻지 않는다.’는 가풍으로 인해 깨달음(반야와 공에 대한)만 중시하고 윤리나 실천적 문제는 등한시하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다. 즉 윤리, 사회, 역사 문제에 대한 성찰과 표현이 부족하게 된 것이다.
물론 연기, 공, 반야는 불교의 기본이니 선불교가 이에 충실한 것은 대단히 훌륭한 것이며 찬탄 받을 만하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불교는 초기불교 이후로 기본적인 세계관에다 대승이라는 불교의 독특한 역사적 상상력의 날개를 달았다. 그런데 부처님 열반 1,000년 후에 나타난 선불교가 비록 중국적인 새로운 양식으로 반야와 공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기본불교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당연히 선불교도 ‘역사’라는 날개를 달아야 대승불교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진수 《화엄경》
대승불교의 진면목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경전은 아무래도 《화엄경》인 것 같다.
진정한 대승불교의 진면목은 무상, 무아, 공, 진여라는 연기적 세계를 이해하는 바탕을 기본 근거로 담고 있으면서 그 위에 적극적이고도 뜨거운 바라밀을 행하도록 강조하는 것이다.
초기 대승경전인 《화엄경》의 십지품(十地品)에서 주장하는 10바라밀의 내용은 이러한 대승의 역사적 실천론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10바라밀이란 주지하다시피 보시, 지계, 인욕, 선정, 혜(반야) 등 6바라밀에다 방편, 원, 역(力), 지(智)라는 4가지 바라밀을 추가한 것이다. 이 4가지 추가되는 바라밀이야말로 가장 대승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하겠다.
이 4가지 바라밀의 순서를 약간 바꾸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열 번째 지(智)바라밀은 구체적 현실의 삶과 세계와 역사를 총체적이면서 세부적으로 잘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아주 현실적인 지식, 지혜, 통찰을 뜻하는 것으로서 연기(공)적 통찰을 뜻하는 반야(혜)바라밀과 구별된다.
여덟 번째 원(願)바라밀은 열 번째 지바라밀을 통해 파악하게 된 그 시대의 상황과 의미를 바탕으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구체적인 어떤 목표를 세우는 일이다.
일곱 번째 방편바라밀은 여덟 번째의 원바라밀을 통해 세운 목표를 다양하고도 적합한 방법론을 통해 실현해 가는 일이다.
아홉 번째 역바라밀은 방편바라밀을 강력히 추진할 수 있는 힘을 말하는데 방편바라밀을 실천할 때 병행하는 바라밀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리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지), 목표(원)와 방법(방편)이 있더라도 추진하는 강력한 힘과 조건을 갖추지 못한다면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6바라밀에 이은 이 4가지 바라밀은 대승불교 회심의 역사적 상상력으로서 연기적 깨달음과 결합되어 멋있는 역사적 삶을 꾸려 나가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역사 장엄이요, 정토 장엄인 것이다. 즉 반야바라밀(bodhi)을 위시한 기본적인 6바라밀은 이러한 4가지 바라밀과 결합함으로써 비로소 연기와 공의 세계는 구체적인 역사성(sattva)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6바라밀이 개인적 덕목이며 기본적인 불교 세계관을 뜻한다면, 나머지 4바라밀은 그러한 덕목과 세계관을 갖춘 불교도가 구체적 현실에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활동해가는 것을 뜻한다. 그러기에 10바라밀이야말로 가장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잘 표현하고 있다 하겠다. 그래서 이러한 10바라밀을 강조하는 십지품이야말로 《화엄경》의 핵심이며, 《화엄경》은 이로 말미암아 대승불교의 정수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화엄경》을 현대적으로 표현하자면, 불교의 사회적 실천론, 역사적 실천론인 것이다.
정토, 열반, 법화 등의 대승경전도 같은 취지이다. 즉 대승경전은 마음을 밝히거나, 세상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목표로 삼는 이상사회(정토)에의 전망, 실천의 자세, 그리고 그에 이르는 다양한 방법론에 대한 설법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10바라밀은 《십지경》의 변형된 별행품으로 보이는 《화엄경》의 십신품, 십주품, 십행품, 십회향품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으며, 《유마경》 《해심밀경》 《유가사지론》 등의 대승경론에서도 주요 내용으로 강조되고 있어 명실상부 대승불교 이론의 기본이 되고 있다.
《화엄경》에 대한 중국 화엄종의 오해
한편 10바라밀을 중심으로 한 ‘불교의 세계관과 역사적 실천론’이 《화엄경》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이론인데도 불구하고 중국 당나라 때의 화엄종은 《화엄경》을 법계연기나 육상원융, 십현연기 등 연기론이 주된 핵심이라고 했다. 또 화엄교관이라 하여 그러한 연기론을 잘 음미하고 성찰하는 것이 수행관법으로서 대단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는 대표적인 대승경전을 기본불교의 틀로 해석했던 중국 화엄종의 오류라고 본다.
이러한 오류로 말미암아 중국 화엄종의 영향을 받은 한, 중, 일 삼국이 모두 《화엄경》을 연기론을 설하는 어떤 경전으로 이해하게 되는 풍조가 생겼다.연기론은 이미 인도에서 중관, 유식 등 아비달마의 시대를 거치면서 교리적 체계화가 벌써 이루어졌다. 중국 화엄종의 법계연기론 등이 이보다 진전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설사 나름대로 진전된 것이라 하더라도 연기론은 기본불교의 범주인 것이다.
보디사트바의 탄생, 그리고 꿈과 실천
기본불교 시대의 이상적 삶의 전형이 ‘아라한’이었는데 대승불교가 시작되면서 ‘보디사트바’로 바뀌게 되는 것도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아라한과 보디사트바의 세계를 비교해 보자.
기본불교는 삶과 세계에 대해 ‘해석하는 것(깨달음)을 기본으로 하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그 결과로 삶과 세계가 비실재임을 깨달아 그것들의 구속과 억압으로부터 해탈하여 자유로운 마음의 경지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지를 이루면 ‘아라한’이라 불렀다.
이러한 경지는 ‘삶과 역사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being and history)’라 표현할 수 있다.
대승불교는 기본불교의 경지를 바탕으로 하되, ‘실천을 통해 삶과 세계(역사)를 만들어 가거나 변화시켜 가는 일’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을 ‘보디사트바(보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실천은 ‘삶과 역사에로의 자유(freedom to being and history)’라고 표현할 수 있다.
대승불교는 보디사트바를 실천적 삶의 전형으로 내세운다. 보디사트바는 보디(bodhi)와 사트바(sattva)의 합성어로서 초기불교 경전에서부터 사용된 용어이지만 대승불교 시대에 와서 새로운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즉 보디는 연기적 깨달음을 뜻하며, 사트바는 중생계의 삶과 역사를 뜻한다. 즉 보디와 사트바가 결합된다는 것은 깨달음과 역사가 결합되는 대승불교의 입장을 가장 적절히 드러내는 것이다.
지금까지 ‘보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어 왔지만, 깨달음과 역사의 합성어로 읽어내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진정한 대승의 취지는 보살이라는 용어를 새롭게 재해석하는 것에서부터 구현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태도는 어찌 보면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상대주의와 절대주의를 결합하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서의 절대주의란 잠정, 가설, 의도성의 색깔을 띤 독특한 절대주의를 말한다.
불교는 보통 극단적인 상대주의 세계관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대승은 이러한 극단적인 상대주의적 입장에다가 의도적, 가상적(假想的, imaginary), 가설적(假設的, temporary)인 실재론적인 입장을 접목하는 것이다. 이는 초기불교의 연기론이 아공법유(我空法有)의 아비달마를 거쳐 대승의 공관사상으로 발전되어, 세상을 보는 관점을 공(空)·가(假)·중(中)이라는 독특한 존재관으로 형성하였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진전된 연기적 존재관에 의도적인 원(願)과 방편이라는 역사적 실천을 접목하는 일,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가 내세우는 회심의 역사론인 것이다.
대승불교와 연관하여 몇 가지 성찰해야 할 점들
1) 유식불교(唯識佛敎)는 인식론과 심리학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유식불교를 인식론과 심리학의 영역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유식불교의 취지는 연기론(緣起論)의 영역을 말하는 것이며, 나아가 보살행 등의 대승적 실천행을 강조하는 것이다.
유식(唯識)이란 ‘세계, 사물, 인식, 개념 등 모든 것이 마음에 비친 영상(影像)’이라는 뜻이다. 이 뜻은 인식(주관)과 대상(객관)이 상호규정, 삼투되어 나뉠 수 없이 연관되어 있음을 말한다. 유식학에서는 ‘세계, 사물, 인식, 개념 등’을 ‘5위 100법’으로 구체화하여 망라하고 있다. 즉 5위 100법이 상호규정, 삼투되어 연관되어 있는 연기의 실상이라는 것이다.
유식학에서는 이 세상의 존재 영역을 5가지로 크게 분류하며, 그것을 다시 100가지로 세분화하는데 일반적 용어로 말한다면 물질계[色法], 정신계[心法, 心所有法], 개념계[不相應行法]―물질과 정신에 해당하지 않는 개념의 영역으로서 시간, 공간, 언어, 문자, 수, 법 등― 등에 해당하는 말이다.
유식학의 핵심과 주요 메시지 중 하나는 이러한 5위 100법, 즉 물질계와 정신계와 개념계, 또는 주관계과 객관계가 상호 연기적 존재임을 파악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 ‘12가지 사이클로 진행되는 삶의 연기’라는 초기불교의 연기론은 ‘몸, 감각작용, 마음, 법[身受心法]’과 ‘5온, 12처, 18계’등이 상호 연기적 양상으로 존재한다는 단계를 거쳐 아비달마와 대승불교의 시대가 되면서 ‘5위 100법이 상호 연기적’이라는 매우 세분화되고 구체적인 연기론을 펼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유식불교라고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유식학은 인식론이나 심리학 차원의 세세한 이론을 펼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물질계·정신계·개념계 등이 상호 연기적 양상임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식불교의 근거가 되는 《해심밀경》 《유가사지론》 등에서는 인식 과정과 물질계의 존재 양상을 연기적으로 설명하고 이를 잘 알기 위한 방법으로 지관(止觀)을 권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론을 바탕으로 보살이 실천할 11지(地)와 10바라밀을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강조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유식불교는 지혜와 자비의 실천을 강조하는 대승불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유식불교는 인식론이나 심리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론, 존재론, 실천론을 겸한 대승불교의 정수인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해심밀경》 《유가사지론》 등의 가르침으로 형성된 유식불교를 설명함에 있어 심리학과 인식론의 영역(心法, 心所有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특히 책의 이름이 ‘요가행자(yogacara, 瑜伽師)의 실천 단계(bhumi, 地)’라는 뜻을 가진 《유가사지론(yogacarabhumi)》은 《해심밀경》을 전문 인용하면서 부연설명하고 있는 논서인데, 그 속에는 각종 바라밀 등 무수한 실천 방법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유식불교를 말하는 자는 왜 이런 점은 외면하고 심리학으로, 인식론으로만 이야기하는가?
이 또한 중국의 법상종(法相宗)의 폐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유식불교를 선도하고 있다는 독일 불교도 이러한 추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유식불교는 마땅히 인식론, 존재론이 어우러진 연기론을 바탕으로 대승적인 실천론을 제창하는 불교학이 되어야 할 것이다.
2)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쓴 소리
언젠가부터 중국적인 간화선을 수행하는 한국의 선불교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 위빠사나 열풍이 불고 있다. 초기불교 교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행하는 위빠사나 수련은 한국불교를 위해 무척 고무적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아쉬운 점은 위빠사나의 중심이 되고 있는 4념처(身, 受, 心, 法)에 대한 마음챙김과 관찰, 4념주(念住)를 행함에 있어 몸[身]과 감수작용[受]과 마음[心]에 대한 마음챙김과 관찰은 하는데, 법(法=존재계, 특히 5위 100법에 있어 불상응행법과 색법)에 대한 마음챙김과 관찰을 하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제대로 된 연기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음챙김을 하고 관찰한다는 것이 꼭 정좌를 하고 단체로 수련장에서 해야 하는가도 의문이지만(이 점은 중국의 선불교를 답습하고 재현하고자 하는 한국 선불교도 매한가지임), 중요한 것은 4념처 수행의 목적이 물질계, 정신계, 개념계 등이 모두 연기적 현상(공)임을 깨닫기 위함이라면서 법(法)에 대한 마음챙김과 관찰을 빠뜨린다면 전체적인 삶과 세계의 연기성이 드러날 수 있겠는가?
우리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연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정치, 사회, 경제, 법, 국가의 문제와 물리, 화학, 생물학, 천문학 등의 영역 등―유식학에서 말하는 색법, 불상응행법에 해당됨―에 대해서는 왜 관찰하고 마음챙김을 하지 않는가?
특히 색법이나 불상응행법이라는 것은 단순히 정좌하고 앉아 명상적 살핌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독서와 실험, 관찰, 대화, 토론, 강의 등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영역(색법, 불상응행법)에 대한 이해와 관찰은 2,000년 전의 인도의 불교철학에서 정리된 추상적인 이론을 대상으로 하기보다 발달된 인지와 문명을 통해 연구, 집적되어 있는 오늘날의 물리학, 생물학(유전자공학), 화학, 천체학, 정치학, 사회학, 법학, 윤리학 등을 살펴보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연기와 공을 깨닫는다는 것은 모든 존재 영역의 세밀한 측면까지 다 파악한다는 것이 아니라, 존재들의 구조적 상관성과 변화성을 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색법이나 불상응행법 등의 존재[法]에 대한 세세한 차별상을 다 알아야 한다고 주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과 우리 자신(심법, 심소유 등)과의 구조적 상관성을 알아야 곧 존재의 연기성(緣起性)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위빠사나 행법의 내용을 보면 정좌를 하여 살피는 대상이 우리 자신의 문제(호흡이나 신체, 그리고 마음의 흐름 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이런 위빠사나를 행함으로써 삶과 사회, 그리고 세계의 문제에 대해 어떤 전문적이고도 적합한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의문스럽다는 것이다.
만일 신체와 호흡, 그리고 마음과 심리현상에 대하여 정밀한 분석과 성찰을 하는 노력을 우리의 삶과 사회와 세계에도 했다면 정말 불교도들은 세상과 역사를 두루 알아[正遍知, 世間解] 사람들을 도와주는 뛰어난 스승[無上師, 人天師]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위빠사나의 취지는 보살의 10바라밀에서 말하는 열 번째 지바라밀과 같이 삶과 사회 등에 대해 구체적이고도 현실(역사)적인 파악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마음은 물론이고 모든 존재들과의 상관성과 변화성을 읽어내어 그것들의 연기성을 깨닫자는 것이다. 즉 위빠사나는 4념처를 제대로 해서 연기와 공을 깨닫는 반야지혜를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위빠사나의 불교 교리적 위상은 바로 기본불교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도들은 위빠사나를 제대로 행함으로써 기본적으로 연기와 공에 눈떠야 하지만, 위빠사나에 대한 노력이 불교의 전부인 양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마땅히 기본적인 깨달음(연기, 공)을 바탕으로 자비와 원을 일으켜 각종 역사적인 바라밀을 닦아야 비로소 진정한 불교수행이라 할 것이다.
3) ‘수행(修行)’은 ‘보살행을 닦는 것(修菩薩行)’
근래에 와서 한국불교는 부쩍 수행을 강조하고 있다. ‘수행하는 한국불교’ ‘수행론 연구계발’ ‘수행가풍 진작’ 등의 슬로건이 그런 점을 말해 준다.
수행이라는 글자를 살펴보면 ‘닦는다(修)’와 ‘행한다(行)’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닦는다’라고 하면 유명한 중국의 마조 선사의 ‘기왓장 법문’이 떠오르기도 한다.(마조 스님은 제자가 참선을 할 때 그 앞에 가서 기왓장을 갈고 닦았다 한다. 그래서 의아해하는 제자에게 기와를 갈고 닦아 거울을 만들 수 없듯이 앉아 있거나 마음을 집중하는 것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했다.)
일반적으로는 수행이라 하면 ‘몸과 마음을 잘 다스리는 일’ 정도로 생각하지만, 한국불교 교단(조계종)에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참선(간화선)을 하는 일’을 수행이라 부른다. 또 근자에 와서 크게 관심을 얻고 있는 ‘위빠사나’나 ‘명상’ 등도 수행이라 함직하다.
초기경전에는 위빠사나(觀), 사마타(止), 드야나(禪)처럼 특별한 노력을 뜻하는 용어와는 별도로 일반적인 수행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바와나(bhavana)’란 용어가 무수히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바와나는 ‘변화되어 간다(becoming)’ ‘노력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근행(勤行)’ ‘수행(修行)’ 등으로 번역되었는데, 이 바와나가 수행이라는 말의 시원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한국에서 오늘날에 사용되는 수행이란 용어는 아무래도 《화엄경》 등 대승경전에서 번역되어 사용되는 ‘수행’이라는 용어인데, 이때의 수행은 ‘닦고 행한다.’라는 뜻이 아니라 ‘행을 닦는다.’라고 해석되는 용어이다. 이런 때의 ‘수(修)’는 타동사로서 ‘~을 닦다.’라는 의미이다. 수도(修道)가 ‘도를 닦다.’이듯이.
그러면 대승경전에서 말하는 수행의 ‘행’은 무엇인가? 바로 ‘보살행’이다. 《화엄경》 등의 대승경전에는 ‘수행’이라는 말과 ‘수보살행’ ‘수보살만행’ ‘수선근(修善根)’ ‘수공덕(修功德)’ 등의 말이 무수히 반복되어 나온다. ‘보살행을 닦는다.’ ‘보살만행을 닦는다.’ ‘선근을 닦는다.’ ‘공덕을 닦는다.’는 말이 약자가 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행을 닦는다.’는 수행인 것이다.
그런데 보살행은 10바라밀 등을 말하기 때문에 그 속에는 선정바라밀과 반야바라밀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지관행(止觀行)을 닦거나 위빠사나를 닦거나 간화선을 닦는 것도 당연히 수행이다. 그러나 대승의 경지에서는 선정과 반야는 모든 사고와 행동에 따라 붙어 있는 것이어야 한다. 반야바라밀이란 모든 사회적 실천과 역사적 삶의 현장에서 한순간도 저버릴 수 없는 안목과 지혜이다. 따라서 대승적 의미에서 보살행을 닦는다 함은 반야(연기적 관점)를 기본적으로 갖춘 바탕 위에 전개하는 실천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야나 선정의 문제는 이미 성취되어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연기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문제는 2,000년, 2,500년 이전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였겠지만, 오늘날은 발달된 문명과 학문(인문, 사회, 자연과학 등)으로 인해 매우 손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를 몸과 마음의 어떤 신비한 경지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삶과 사회, 세계의 연기적 의미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꼭 아비달마나 각종 불교경전을 탐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1,500년 전에 인도 범어로 된 경전과 논서를 언어 체계가 다른 한문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내용과 용어가 부정확하게 되거나 변형된 것도 무수히 많아 이를 현대인들이 꼼꼼히 번역하여 이해하라고 권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은 문명이 발달하지 못했고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시절의 불교 공부법을 답습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오히려 현대에 와서 연기와 공을 이해하기 쉬워졌다고 할 수 있다. 불교 공부란 일반 성인이 현대적 교육을 바탕으로 일정한 기간 동안 불교교리에 대한 공부를 하고 그 내용을 잘 음미하여 정리하면 알 수 있는 수준의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불교지도자들이 불교나 깨달음을 오도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말이다. 아직도 일부 불교지도자들이 연기와 공에 대한 깨달음을 ‘몸과 마음의 어떤 경지’로 설정하여, 깊은 산속 바위나 봉우리 위에 홀로 앉아 몸과 마음을 닦는(?) 것을 수행이라고 잘못 이끄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4) ‘본래부처론’의 밝음과 그늘
초기불교 이후로 불교는 삶과 세계를 무상, 무아, 연기, 공이라고 줄곧 강조함으로써 고정불변하는 실재를 전제하지 않는 상대주의적 세계관을 유지해 왔다. “모든 상(相)은 허망하다.” “따라서 허망함을 잘 알아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라.” 라는 것이 기본적인 메시지였다.
그런데 아비달마 시대를 거치며 대승불교를 표방하면서부터 이러한 상대주의적 세계관과 마찰하는 이상한 기류가 나타났다. 각종 대승경전과 논서에 ‘불성’ ‘진여’ ‘여래장’ ‘영원한 부처(久遠佛)’ ‘본래부처(本來佛)’ 등의 용어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그것이다. 그 후 인도에서는 일면 실재론적인 측면으로 비치는 진여, 여래장, 영원한 부처를 내세우는 불교와 무상과 무아를 강조하는 불교가 혼재되어서 많은 교리적 논쟁과 혼란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이런 내용들은 고스란히 중국에 옮겨졌는데, 중국에서는 무상, 무아를 강조하는 불교보다 진여, 여래장, 영원한 부처를 표방하는 불교를 대승불교라 하여 상위에 자리매김하여 존중하였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이런 점과 별도로 위진남북조 시대에 노장(老莊)사상의 용어를 차용해 불교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도’ ‘자연’이라는 실재론적 존재관를 끌어들였고, ‘천지는 나와 한 몸이며, 만물은 나와 한 뿌리’라는 보편적이고도 실재론적인 노장적 표현을 불교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그 후 당, 송 시대의 선불교에서는 ‘세상 전체가 다 진리(擧體皆眞)’ ‘푸르른 대나무는 진여의 모습이며, 소복이 피어 있는 노란 국화들은 반야 그 자체’ ‘두두물물이 모두 부처’ ‘푸른 산은 부처님의 모습, 흐르는 물소리는 부처님의 설법’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표현을 일상적으로 하게 되었다.
‘본래부처’ ‘영원한 부처’로 대표되는 이러한 불교는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불교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본래부처’ 등의 표현을 과연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초기불교의 교리로서는 용납하기 힘들 것이다. 《금강경》에서도 당시 인도 브라마니즘이 주장하는 영원한 자아라고 일컫는 아트만(atman)과, 오온과 별개로 존속하는 영원한 개아(個我: 개별적 사람, 개인, 인간 등)인 푸드갈라(pudgala)와, 영원한 생명(목숨, 영혼)인 지와(jiva)와 살아 있는 모든 것이라는 사트바(sattva)가 다 허망한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어떤 경로를 거쳐 ‘본래부처’ ‘영원한 부처’ ‘여래장’이라는 생각이 탄생되었는가?
역설적이게도 이런 생각들은 연기(緣起)의 존재관 속에 이미 배태되어 있었다. 초기경전에는 “연기법은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든 안 하든 법계로서 상주하는 것이다.”(잡아함 권12 제299경)라는 표현이 있는가 하면 “12인연을 보면 무상도(無上道)를 보게 되고 법신을 구족하게 된다.”(《도간경》)라는 내용도 있다. 이러한 연기법의 법계 상주에 대한 내용들은 부파불교에까지 심대한 영향을 끼치면서 연기법이 유위법인가 무위법인가 하는 논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연기와 관련한 이러한 특별한 구절들은 후대에 경전으로 편찬되는 과정에서 첨가되거나 변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고정불변하는 실재를 부정하는 연기적 세계관이 인도사회의 각종 실재론(수론, 승론 등)과 대론을 하는 과정에서 방어적 차원에서 변형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불교도들의 입장에서는 무아적 연기론을 가지고도 적극적인 역사적 삶을 살 수 있는 방안이 늘 필요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래서 연기의 가르침을 꼼꼼히 살펴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무상, 무아, 연기를 통해 세상이 허망하고 덧없으며 꿈같은 줄 알았다. 이러한 이해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해탈을 얻었다. 이것이 연기의 가르침을 통해 얻은 첫 번째 교훈이다.
그런데 세상이 연기적(변화성, 관계성)이라는 것은 ‘존재들이 고정불변하는 실재(實在)적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非有)’이지, ‘존재 자체가 없다는 것은 아닌 것(非無)’이다.
그렇다면 연기적 존재라는 것은 존재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존재들이 다른 존재들과 밀접한 관계로 이어져 서로 삼투되어 있으면서 한순간도 머물지 않고 변화해 간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연기를 이해한다면, 존재를 긍정적이고도 역동적으로 바라보는 적극적인 존재관을 가질 수 있는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이 두 번째 교훈이다.
이상과 같이 연기의 가르침을 통해 두 가지 다른 의미의 교훈을 이끌어내게 되었고, 이러한 생각들은 아비달마와 대승불교적 움직임을 통해 체계화하게 되었다.
특히 두 번째 교훈을 진전시킨 것이 설일체유부의 ‘아공법유설’이었으며, 중관사상에서 존재를 공(空), 가(假), 중(中)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고 본 것도 바로 그것들이었다.
불성, 진여, 여래장은 바로 이러한 ‘법유(法有)’ ‘가(假)’ ‘중(中)’이라는 중립적 표현이 종교적으로 윤색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본다. 그리고 중국 선불교의 ‘마음이 곧 부처’ ‘두두물물이 다 부처’ 라는 표현도 이런 맥락으로 보면 될 것이다.
이리하여 불교의 존재관은 ‘무상, 무아, 연기→공(空)→가(假)→중(中)→불성, 진여, 여래장→마음이 곧 부처→만물이 부처’라는 단계로 뉘앙스가 약간씩 달라지는 용어들로 다양하게(variety) 변천되었다.
문제는 불성, 진여, 부처라는 이름의 용어를 사용할 때, 연기론의 존재관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가의 여부이다. 그런데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는 설법이나 저술을 접할 때 그것들을 제3자가 구분하기란 쉽지가 않다.
‘영원한 부처’ ‘본래부처’ 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 이런 점을 늘 유의하지 않으면 불교를 자칫 표현만 다른 브라마니즘(brahmanism)이나 노장사상으로 오인시키는 결과를 야기하게 될 것이다.
결국 상황이나 필요에 따라 이러한 용어들이 사용되어 왔고, 앞으로도 사용하게 될 것인데, 어쨌든 불교의 연기적 존재관이 주는 두 가지 측면의 교훈을 늘 상기하면서 사용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진여, 여래장, 본래부처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도 《금강경》에서 말한 ‘머물지 않고 마음 내기’의 대승적 의미를 늘 상기시켜야 할 것이다. 그럴 때도 불교의 기본적 자세는 세상이 환상이며 공이라는 관점을 바탕으로 해야 하며, 본래부처, 진여, 여래장은 단지 연기상(緣起相)을 가설(假設)하여 임시로 붙인 이름임을 알고 사용해야 한다.
이러한 이중적 측면을 적용하여 사용해야 하는 대승적 입장은 조심스럽기도 하고, 이해받기가 쉽지만은 않다. 오죽하면 《법화경》에서 설법 초기에 부처님이 세 번이나 설법하기를 사양하고, 불만을 품은 5,000명의 대중이 퇴장하는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야 ‘영원한 부처’에 대한 이야기를 했겠는가?
《화엄경》(십지품)에서도 보살의 십바라밀과 십지(十地, 열 가지 실천 단계)를 설명하기에 앞서 금강장보살이 세 번이나 사양하고, 대중의 거듭된 요청이 있고서야 비로소 설법을 한다. 이런 것들은 대승의 이러한 미묘한 이중적 입장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불교가 일반인에게 주는 가장 큰 매력은 ‘모든 것을 다 꿈이요, 환상이며, 덧없다’라고 일깨워 주어 역사와 삶이 주는 무거운 짐을 일시에 다 놓아버리고 해탈해서 자유롭게 해 주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소설의 제목도 있듯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가벼운’ 입장을 견지하는 태도는 일면 삶을 진지하고도 무겁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비판받기 십상이다. 하지만 삶과 존재와 역사가 본래 그런 걸 어떡하겠는가? 삶이 허망하고 환상이어도 살아내고 존재하는 기간에는 행복을 추구하고 고통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머물지 않고 마음 내기’라는 대승의 입장이 나온 것이 아닌가?
다만 ‘영원한 부처’ ‘본래부처’ ‘삼라만상이 부처’라는 이야기를 불교도가 할 때는 반드시 《유마경》에서 이야기하는 ‘중생계는 환상이다. 하지만 환상과 같은 자비를 일으켜 각종 바라밀을 행하여 정토를 지향하되, 보살이 이루고자 하는 정토도 환상이다.’ 라는 대승불교의 기본입장을 늘 상기해야 한다. 즉 ‘본래부처론’의 밝음과 그늘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본래부처’라는 슬로건은 사람들에게 환희로운 가르침으로 다가올 수도 있지만, 존재들을 대함에 있어 무거운 중압감과 피로감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또 ‘영원한 세월에 걸쳐 본래부처’라면 무슨 개선할 노력이 필요하고, 새삼 다시 이루어야 할 목표를 수립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준비를 늘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본래부처’ ‘삼라만상이 모두 부처’라는 표현을 듣고도 사람들이 세계와 삶을 브라마니즘과 기독교적인 실재론으로 이해하지 않을 것이며, ‘모든 것이 부처’라는 명제가 주는 삶에 대한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마침내 삶과 역사를 ‘가벼움’과 ‘무거움’을 음악처럼 조화하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마무리하며
근자에 어떤 대중용 철학서를 읽다 보니 “우리 시대의 철학은 철학자 이외의 사람에게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라고 하면서 철학이 대중적 관심에서 멀어진 것을 개탄하는 구절이 있었다.
불교는 오늘을 사는 현대인과 한국사회에 어떤 의미로 존재하며, 어느 정도 알려져 있으며 얼마나 관심을 받고 있을까? 만일 불교가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없으며, 거의 알려지지 못하고 별 관심을 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불교를 개인의 삶에 있어서 정신을 단련하거나, 심리적 치료를 하는 수련법으로 비치게 하거나, 마음속에 있는 어떤 심오한 것을 깨달아 신비한 경지를 이루는 것으로 설명하는 까닭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있듯이 삶의 문제는 개인적 차원에서 자기 완결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없으며, 개인적인 문제라는 것도 사회적인 관계 속에 파생되는 것이다. 사랑, 돈(경제), 일, 휴식과 문화생활, 그 밖에 사회적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유, 평등, 정의 등……, 이 모든 것은 타인과 사회적 문제를 떠나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현대인의 초미의 관심사이며 필요한 부분인데 불교가 이런 점에 대한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오직 마음수양과 심리치유의 효과만 강조하거나 일반적 삶과는 무관한 신비한 경지인 깨달음을 권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불교를 어렵게 설명하고 있으며 불교인만 알 수 있는 전문적인 불교 술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이다.
승려나 포교사, 불교학자들이 현대적 삶의 용어로 불교를 설명하지 못하고 2,000년 전의 인도사회의 문명 수준을 반영하고 있는 불교경전이나 문헌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문제다. 더구나 훈민정음 시절의 한글도 해독 못 하는 현대인에게 1,500년 전의 고대 한자로 번역된 용어와 술어를 사용하고 있으니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다.
사회 경제가 여유로워지고 지식이 높아진 만큼 그에 따른 현대적이고도 참신한 불교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시대의 아비달마를 창출해야 하는데, 또다시 2,000년 전 부파불교 시대의 교리적 쟁점을 그 당시 문헌을 분석하고 연구하여 소개하는 것으로 현대인의 관심과 이해를 구할 수는 없다.
셋째, 일반인이 불교에게 가지는 사회적, 역사적 효용에 대한 기대와 열망에 부응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기도, 불공, 제사 등 생활의례나 기복적인 종교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형성된 이미지가 한국불교를 대표하고 있지만 이것이 불교 가르침을 구현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불교에서 가장 부족한 점은 사회성과 역사성, 그리고 윤리성이다. 깨달음과 역사의 결합을 말하는 대승불교가 무색할 지경이다.
초기불교의 정교한 교리 체계, 대승불교의 광활한 세계관과 풍부하고 상징적인 실천론, 선불교의 은유에 가득 찬 반야의 세계.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이 시대의 삶의 언어와 내용과 무관하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글은 ‘불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불교적 삶을 산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불교인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에 대한 의견이다.
결론은 불교를 대승의 의미로 이해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기본불교, 즉 연기·공·반야에 대한 관점을 기본적으로 베이스(base)에 깔고 그 위에 자비와 원(願)을 일으켜 각종 바라밀을 실천하는 역사를 살아가자는 것이다.
여기서 각종 바라밀이란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10바라밀 가운데의 방편, 원, 력, 지의 4가지 바라밀의 뜻이 그러하듯이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을 말한다. 그러자면 1,000년 가까이 아무런 조명을 받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는 역사와 관련한 바라밀 이론을 본격적으로 창출해야 할 것이다.
새롭게 창출된 바라밀은 윤리와 도덕의 문제에서부터 사회와 역사를 움직이는 모든 것에까지 구체적인 것을 갖추어야 한다. 그 내용을 경전과 논서, 어록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없으니까.
현대사회에 가득 차 있는 학문과 이론, 복잡다단하게 얽혀서 진행되는 역사의 현장에 그 내용이 있으니 거기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보살이여! 크나큰 자비를 일으켜 중생계의 빽빽한 숲 속에 들어가 세계의 차별상을 알아라.”고 말한 열 번째 지바라밀(智波羅蜜)의 뜻이니까.
현응 /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원장. 1971년 해인사 출가(은사 종성스님). 해인사 승가대학 졸업. 봉암사, 해인사등 제방선원 정진. 해인사 승가대학 강사 및 학감, 총무원 기획실장, 중앙종회의원, 불교신문사 사장, 해인사 주지 등 역임. 주요 저서로 《깨달음과 역사》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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