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11. “아무리 둘러봐도 중이 없구나, 너만은 스님이라 부를만하다.”
"성철은 용성 스님의 손상좌였다. 용성은 성철이 정진하는 모습을 기특하게 바라봤다. 흡사 할아버지가 손자의 글공부를 지켜보듯 했다. 용성이 보기에 성철은 큰 그릇이었다. 제대로 배워 제대로 간다면 크게 깨칠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성철이 선방에 앉아있으면 그대로 그득했고, 그 뒤태만 봐도 안심이 되었다."
성철은 1936년 스승 동산 스님을 따라 부산 금정산 범어사로 옮겨갔다. 의상대사가 문무왕(678년) 때 창건했다고 알려진 범어사는 신라 화엄십찰이었다. 금정산과 범어사라 부르게 된 연유가 ‘동국여지승람’에 나와 있다.
‘동래현 북쪽 20리 쯤에 명산이 있고, 산꼭대기에 금빛을 띤 우물이 항상 가득 차 있다. 물속에 범천(梵天)의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내려와 놀고 있어 우물을 금샘이라 부른다. 그래서 산을 금정산(金井山), 절을 범어사(梵魚寺)라 이름지었다.’
범어사는 왜구를 격퇴시키고자 원을 세운 국찰(國刹)이었다. 하지만 정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모두 불타버렸다. 이후 고승들이 중건을 거듭했고 근현대에는 경허, 용성, 성월, 만해 등 선사들이 수행 정진하여 선풍을 드높였다. 구한말에 일찍 개화문물을 받아들여 야학과 유치원 등을 운영했고, 일제강점기에는 남녘의 항일운동 본거지였다.
범어사는 동산이 일으킨 절이었다. 크고 작은 불사를 통해 사격을 높였고, 참선수행도량인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의 면모를 갖추는 데 힘을 쏟았다. 서울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용성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동산은 이후 수행가풍을 진작시켜 수좌들의 존경을 받았다.
성철은 범어사 금어선원에서 하안거를 지냈다. 금어선원은 스승 동산이 하안거 중에 오도(悟道)한 곳이었다. 동산은 방선시간에 선원 동쪽에 있는 대나무 숲을 자주 거닐었다. 어느 날 대나무 숲에서 서걱대는 댓잎 소리를 들었다. 한데 그날은 평소에 듣던 소리가 아니었다. 바람이 흔들자 대나무들이 어지럽게 울었다. 순간 동산은 활연히 깨쳤다. 짓누르고 있던 의심덩어리가 사라졌다. 동산은 그 순간 서래밀지(西來密旨)가 눈앞에서 명백해졌다고 말했다. 의사의 꿈을 버리고 진리를 찾아나선 지 15년 만의 일이었다. 동산은 이후 그 대숲을 특별히 아꼈고, 자신의 별호를 순창(筍窓)이라고 지었다.
성철 또한 스승이 깨친 대숲을 자주 거닐었다. 묵곡리 속가에도 대밭이 있었기에 감회가 깊었다. 사실 성철은 댓잎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집 앞 바위에서 생각에 잠겨있을 때면 댓잎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어느 때는 울고, 어느 때는 속삭이고, 어느 때는 소리치는 듯했다. 그 소리에 진리가 숨어있었다니 새삼 신기했다. 깨친 스승이 ‘죽순의 창’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떨지 궁금했다.
성철은 그해 범어사 원효암에서 동안거를 지냈다. 동안거 중인 1936년 11월, 동산이 용성 스님으로부터 지리산 칠불계맥(七佛戒脈)을 전해 받았다. 조선시대 대은화상이 지리산 칠불선원에서 7일 동안 기도하니 이마에 상스러운 빛이 내리고 저절로 향에 불이 붙어 ‘서상수계(瑞祥受戒)’한 것이 칠불계맥의 연원이다. 조선불교에는 ‘상서롭고 향기로운’ 일이겠지만 계맥이 끊겨 ‘범망경’에 의지하여 새로 세웠으니 고육책이었을 것이다. 그 후 금담, 초의, 범해, 선곡, 용성 스님에게 전해졌다. 용성이 전계증(傳戒證)을 내려 제자에게 당부했다.
“보인(寶印)을 계맥과 더불어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바로 전하는 신표로 삼아 은근히 동산혜일(東山慧日)에게 부여하노니, 그대가 스스로 잘 보호하고 지녀서 단절됨이 없게 할 것이며, 여래의 정법과 더불어 세상에 머물러서 다함이 없게 하라.”
사실 억불숭유의 조선시대에서 불교의 지계 의식은 속절없이 엷어졌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왜색불교의 영향으로 계맥이란 말 자체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친일승들이 펼쳐놓은 파계(破戒)의 그늘에서 너나없이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럼에도 계맥을 주고받아 청정비구승의 가풍을 세우려는 노력들은 이어지고 있었다. 용성은 1884년 21세가 되던 해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선곡 율사로부터 받은 칠불계맥을 제자 동산에게 전해주었다.
성철은 그 의미 있는 현장을 지켜봤다. 계맥을 전수하는 장면은 장엄했다. 성철은 많은 생각을 했다. 저 인도에서 온, 오래된 불교는 이렇듯 시공을 뛰어넘어 살아있었다. 부처님은 열반에 들기 전 사방이 고요한 한밤중에 말했다.
“내가 열반에 든 뒤에는 계율 존중하기를 어둠 속에서 빛을 만난 듯이, 가난한 사람이 보물을 얻은 듯이 해야 한다. 계율은 너희들의 큰 스승이요, 내가 세상에 더 살아있더라도 이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가르침은 사방으로 퍼졌고, 그 후 바른 법이 있는 곳에는 계율이 있었다. 마하가섭과 아난 등이 이은 계맥은 동쪽으로 건너와서도 면면이 내려왔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맥이 끊겨 결국 스님이 아닌 경(범망경)을 율사 삼아 계(戒)를 다시 세워야 했다. 나라를 잃은 일제강점기에는 이마저 전해줄 비구승이 보이지 않았다. 칠불계맥은 용성에게서 동산에게로 비장하게, 어찌 보면 위태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1937년 3월 성철은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비구계를 수지했다. 그리고 원효암에서 하안거를 지냈다. 이때도 성철의 수행은 비범했다. 누가 보든 말든 치열하게 정진했다. 스스로를 다잡는 12명(銘)을 지었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에 새긴 나름의 계율이었다.
아녀자에게는 눈길도 주지 말라.
속세의 헛된 이야기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으리라.
돈이나 재물에는 손도 대지 않으리라.
좋은 옷에는 닿지도 않으리라.
신도의 시줏물에는 몸도 가까이 않으리라.
비구니 절에는 그림자도 지나가지 않으리라.
냄새 독한 채소는 냄새도 맡지 않으리라.
고기는 이빨로 씹지 않으리라.
시시비비에는 마음도 사로잡히지 않으리라.
좋고 나쁜 기회에 따라 마음을 바꾸지 않으리라.
절을 하는 데는 여자 아이라도 가리지 않으리라.
다른 이의 허물은 농담도 않으리라.
안거 해제 후에는 동산 스님의 은사인 용성 스님(1864~1940)을 시봉했다. 용성은 범어사 내원암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세수 74세였다.
용성은 일제강점기에 불교의 중흥을 위해 몸을 던진 범어문중의 중흥조였다. 평생을 왜색불교에 맞섰고 한 번도 꺾이지 않았다. 또 조선의 선맥은 임제종임을 직시하고 매종역조(賣宗易祖)의 친일행위를 규탄했다. 특히 기미독립선언서의 공약3장 중에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는 내용은 용성의 제안으로 막판에 채택되었다. 그만큼 일제에 담대하게 맞섰다.
서울 종로에 대각사를 건립하였고, 선지식들과 뜻을 합쳐 안국동에 선학원을 세웠다. 용성이 개창한 대각사(大覺寺)는 독립운동과 불교계의 혁신을 도모하고, 불교대중화를 외친 도심 포교의 산실이었다. 용성의 불교대중화운동은 단순히 구두선에 그친 것이 아니라 불교경전의 한글화로 이어져 그 결실을 맺었다.
성철은 용성 스님의 손상좌였다. 용성은 성철이 정진하는 모습을 기특하게 바라봤다. 흡사 할아버지가 손자의 글공부를 지켜보듯 했다. 용성이 보기에 성철은 큰 그릇이었다. 제대로 배워 제대로 간다면 크게 깨칠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성철이 선방에 앉아있으면 그대로 그득했고, 그 뒤태만 봐도 안심이 되었다.
용성은 어떤 스님을 보더라도 “선생”이라 불렀다. 하지만 성철에게만은 달랐다.
“성철 스님”
“성철 수좌”
이렇게 불렀다. 그때마다 성철이 민망하여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자 하루는 조용히 부르더니 그 연유를 들려줬다.
“어찌된 세상인지 아무리 둘러봐도 스님이라 부를만한 중이 없구나. 너를 보니 스님이라 부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참선정진 열심히 하거라.”
성철에게는 무엇보다 무거운 경책이었다. 그렇게 왜색불교에 맞서 싸우며 승려들을 일깨웠지만 용성이 보기에 그들은 무기력하기만 했다. 납자들의 수행태도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노스님의 말에 회한이 묻어났다.
용성은 성철을 미더워했다. 성철 또한 척박한 여건 속에서도 삿된 믿음을 경계하며 자신을 지키는 스님을 깊이 존경했다. 그런 할아버지스님이 살아계심이, 또 바로 곁에 계심이 든든했다. 자연 신명이 돋아나 시봉이 즐거웠다.
그해 가을 용성은 서울 대각사로 옮겨가야 했다. 큰스님은 손상좌 성철을 대각사로 데려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성철은 서울로 가고 싶지 않았다. 번잡한 도시보다는 산 속에 머물며 더 공부하고 싶었다. 노스님을 따라갔다가는 평생 시자 노릇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큰스님 앞에서는 감히 싫은 기색을 내비칠 수 없었다. 부산역까지 말없이 따라나섰다. 큰스님이 열차에 오르기를 기다렸다가 냅다 도망쳐 나왔다. 성철다운 선택이었다. 아직 갈 길이 멀었기에 촌음이 아까웠다. 깨달음은 서울에 있지 않았다.
김택근 언론인·시인 wtk222@hanmail.net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12. 절로 찾아간 어머니를 만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또 가슴이 무너졌다. 소리 없이 선방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아당겨보았다. 역시 문이 잠겨있었다. 아들이 잠근 문을 열어 달라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말없이 돌아섰다."
어머니 강상봉이 범어사 원효암을 찾아갔다. 큰절 범어사에 들러 아들을 찾으니 원효암에서 여름 안거 중이라 일러주었다. 어머니는 몸이 약한 아들이 늘 마음에 걸렸다. 계절이 바뀌면 약과 의복을 마련하여 성철을 찾아갔다. 그러나 성철은 어머니를 아예 만나주지 않았다. 해인사에서도 그랬고, 범어사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원효암은 금정산 중턱에 있다. 의상대사가 범어사를 창건한 해에 원효대사가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범어사 암자 중에서는 가장 높아 큰절에서도 한참을 올라가야했다. 어머니는 잡목 사이로 나있는 숲길을 보따리를 이고 올라갔다. 등짝에 한여름 불볕이 쏟아졌다. 온 몸이 땀에 젖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어머니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렇듯 힘들게 찾아감이 다행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설마 이리 고생해서 찾아가는 에미를 내치진 않겠지.’
원효암에 도착해서 두리번거리는데 스님 하나가 먼저 보고 말을 건넸다.
“보살님, 이 염천에 어떻게 오셨습니까?”
“성철 스님이라고 여기 있지요.”
“선방에 있습니다만…. 누구신지요.”
“에미되는 사람입니다. 좀 불러주시오.”
“잠시 기다려보시지요.”
스님이 선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스님의 키가 유난히 작다고 느꼈다. 아들 성철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키 작은 스님이 이내 혼자서 나왔다.
“만나지 않겠답니다.”
그렇게 전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자신이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허둥거렸다. 어머니는 또 가슴이 무너졌다. 소리 없이 선방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아당겨보았다. 역시 문이 잠겨있었다. 아들이 잠근 문을 열어 달라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말없이 돌아섰다. 이고 간 보따리를 풀어 선방 앞에 한약과 과일, 옷가지 등을 늘어놓았다.
어머니는 기다리지 않고 원효암을 나섰다. 내리막임에도 큰절로 내려오는 길은 다리가 풀려 힘이 들었다. 쉬엄쉬엄 걸으니 비로소 새소리,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오솔길에 주저앉아 어머니는 아들을 떠올렸다. 서운한 마음이 엷어졌다. 이내 미소를 머금었다.
“좌우지간 별난 사람이야. 내가 낳았어도 그 속을 모르겠어.”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이 무렵 ‘황도(皇道)불교’란 용어가 등장했다. 황민화정책을 불교에 접목시킨 것이었다. 황민(皇民)은 ‘일본 천황의 백성’이라는 뜻이니 황민화정책은 조선백성을 황국(皇國)의 신민(臣民)으로 만드는 것이었고, 황도는 ‘천황의 도’를 뜻하고 있음이니 조선불교를 황국의 종교로 예속시킴이었다. 이에 소위 총독부 산하 불교단체 간부들은 재빨리 호응했다. 제국주의의 전쟁을 미화하고 승려와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보내는 데 앞장섰다.
대표적인 중앙기관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은 모든 사찰이 국위선양무운장구를 기원하는 재를 지내도록 독려했다. 8월이 되자 친일 학승 권상로와 김태흡이 청년들에게 참전을 부추기는 시국강연을 열었다. 또 주요 간부승려들이 중국 화북지역으로 떠나는 일본군을 환송했다. 이후 중앙교무원 간부들은 날마다 전장으로 떠나는 일본군을 향해 합장했다.
‘중앙종무원에서는 이와 같은 출동부대 송영과 아울러 중일전쟁에 나간 일본군인과 그 가족들을 위한 위문금을 경성시내 사·암과 포교소에서 모금하여 일본군에 갖다 바쳤다. 그해 8월20일 오후 6시에는 용산역에 도착하는 출정장병 유골 영접차 이종욱, 황금봉, 한성훈, 권상로, 최응산, 이태준, 이상열 등의 조선승려들이 조기를 들고 용산역 구내에 출영하였다가 유골 행렬과 함께 계행사(階行社)에 가서 일본군 영전에 독경·분향했다.’ (임혜봉 지음 ‘불교사 100장면’에서)
31본산 주지들은 주지회의를 마치고 신궁을 찾아가 단체로 참배했고, 불교단체들은 황군 위문단을 파견했다. 조선불교 개혁을 부르짖던 승려들도 하나둘 친일로 돌아섰다.
그렇다고 조선불교가 몽땅 왜색으로 물든 것은 아니었다. 비록 초라하고 궁해도 선방에는 수좌들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성철은 1937년 가을 범어사를 나와 통도사로 향했다. 동안거를 하기 위함이었다. 자장 스님이 646년(선덕여왕 15년) 창건한 통도사는 불보(佛寶)종찰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영축산이 통도사를 품고 있다. 부처님이 설법한 인도의 영축산과 닮아서 그리 불렸다고 한다. 경허선사가 선풍을 크게 일으킨 이후 근현대에는 성해, 구하, 경봉, 벽안 스님 등 고승들이 주석했다.
백련암은 1374년(공민왕 23년) 월화 스님이 창건했고, 1634년(인조 12년) 현암 스님이 중건했다고 전해진다. 백련암 선방은 숱한 고승들이 깨달음을 얻어간 명소였다. 만해 한용운도 백련암에서 ‘불교대전’을 집필했다. 백련암은 1935년 다시 선방을 열었는데 당시 통도사 주지인 경봉 스님은 백련암 선방에 쌀 200가마를 보냈다고 한다. 이후 선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통도사 백련암에 이르자 우선 우람한 은행나무가 성철을 맞았다. 오래 되어 늠름하고 더 푸르렀다. 적어도 500년은 그 자리에서 백련암을 지키며 선객들의 깨닫는 순간을 지켜봤을 것이다. 은행나무야말로 꼼짝하지 않고 화두를 들고 서있는 진정한 선객이었다. 그리 생각하니 비범해 보였다. 은행나무가 물었다.
“그대는 무엇을 붙들고 왔는가?”
이듬해 봄 스승의 부름을 받고 다시 부산 범어사로 돌아왔다. 동산 스님이 지키고 있는 내원암에서 하안거를 지냈다. 성철은 바르게, 또 치열하게 수행했다. 하지만 선방스님들은 그렇지 않았다. 성철이 보기에 화두를 건성으로 들고 흉내만 내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도 동산은 그런 선객들을 못 본 척하고 있었다. 성철은 스승에게 선객은 모름지기 용맹정진해야 옳다며 대중들을 경책해달라 요구했다. 동산이 이를 받아들여 선객들에게 용맹정진하라 일렀다. 그러자 선방 대다수 스님들이 수마(睡魔)를 이기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모든 불평이 성철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성철은 꿈쩍도 안했다.
“생사해탈을 기약해야 하는 선객들이 이만한 것도 참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이윽고 탈이 나고 말았다. 말싸움이 결국 주먹다짐으로 이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스승이 성철을 불렀다. 우선 상좌부터 나무라야 했다.
“공부하고 싶으면 자네만 열심히 하게. 앞으로 억지로 공부하게 만들지 말게. 그것이 함께 사는 요령일 수도 있음이야.”
그래도 성철은 쉽게 승복하지 않았다. 그것은 스승에 대한 불경이 아니었다. 깨달음을 향한 ‘분노’였다. 성철은 불경의 가르침대로 대각(大覺)이야말로 스승에 대한 최상의 보답이라 여겼다.
또 동산 스님과 이런 일도 있었다. 한 눈에 부잣집 안주인처럼 보이는 보살이 찾아왔다. 그러자 동산이 공손하게 맞이하더니 주지실로 안내했다. 공양시간이 되자 직접 밥상을 들고 들어가 대접했다. 성철이 이를 목격했다. 도인풍의 외모에 반듯한 몸가짐으로 기품을 잃지 않던 스승이 보살에게 굽신거리는 모습을 보니 부아가 올라왔다. 보살이 돌아가기가 무섭게 쫓아가 따져 물었다.
“출가승이라면 인천(人天)의 스승이라는데, 스님은 어찌 보살에게 밥상을 들고 가십니까?”
동산이 그런 제자를 한편으로는 다독이고 한편으로는 꾸짖었다.
“자네도 나중에 절 살림을 책임 맡으면 알게 될 거네. 주지는 주지대로 할 일이 있는 거야. 이 절에 머물고 있는 대중들을 굶게 할 순 없지 않은가. 적어도 선객들에게 수행할 여건은 마련해줘야지. 이 어려운 때 쌀 몇 십 가마씩 시주하는 보살한테 밥상 좀 나르는 게 무슨 큰 흠이라고. 설령 흠이 되더라도 그만 둘 생각은 없네. 자네는 그렇게 시주 받은 밥 먹고 힘내서 수행하면 되고, 나는 부지런히 쌀 모으면 되는 것 아닌가.”
성철은 뭐라 대꾸할 수 없었다. 어려운 절 살림을 꾸려나가는 스승과 구도의 결기가 시퍼런 제자의 부딪힘이었다. 형편이 좋으면 뉘라서 보살에게 밥상을 차려가겠는가. 스승은 현실을 헤아리지 않는 제자가 섭섭했다. 친일승들이 종권을 쥐고 호의호식을 할 때 저 남쪽 가난한 절에서는 이렇듯 스승과 제자가 승려의 품격을 따지고 있었다. 성철은 훗날 제자들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스님은 그러면 안 되지, 안 그래?”
김택근 언론인·시인 wtk222@hanmail.net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13. 아들이 출가하며 어머니 눈 하나를 가져가다
"추운 겨울날임에도 강씨 부인은 아들을 찾아가려 보따리를 꾸리고 있었다. 이를 보자 참았던 분기가 솟구쳐 올라왔다. 이상언은 부인 강씨를 향해 숯불이 담긴 화로를 던졌다. 물론 부인을 향해 정면으로 던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화로에서 쏟아진 불씨가 부인의 오른쪽 눈에 박혔다."
묵곡리 집은 장남만 보이지 않을 뿐 그대로였다. 일찍부터 장남노릇을 해 온 차남 호주(昊柱)는 인근에 잘 알려진 유지였다. 형과는 달리 성격이 활달하고 사람 사귀기를 좋아했다. 활솜씨가 뛰어나 국궁대회에 나가면 우승을 놓치지 않았고, 한 잔 걸치면 술친구들에게 집안 자랑도 늘어놓았다. 하지만 아버지 이상언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차남보다 장남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집안 분위기는 갈수록 가라앉았다. 유가의 자존심이 우뚝 솟아있던 이씨네 집은 승려의 속가가 되어 버렸다. 아버지의 바깥출입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세상 사는 재미가 없으니 사람들과 마주치기가 싫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먼저 알아차리고 먼발치서 이상언이 나타나면 얼른 숨어버렸다.
사실 마을 사람치고 이상언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궁하면 언제라도 급전이나 양식을 빌리기도 하지만 그보다 몸이 아프면 맨 먼저 이상언에게 달려갔다. 큰 병이 아니면 이상언이 지은 약을 먹었다. 글을 아는 사람이 의서를 보고 약을 지어주는 것은 당시에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문리를 깨쳤으니 당연히 글 모르는 사람을,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 했다. 유건(儒巾)을 쓴 이상언도 약저울을 늘 곁에 두어야 했다. 그런 마을의 어른이 정작 자신의 아들을 중으로 떠나보냈으니 주민들은 그 참담함을 헤아려 어떤 안부도 물을 수 없었다.
북적이던 사랑방에도 차츰 유림과 과객의 발길이 줄어들었다. 그들의 먹고 마실 것을 차려내느라 정신없었던 식구들의 일손도 줄어들었다. 그러자 식솔은 그 빈자리를 힐끔거리며 자연 이상언의 심기를 살폈다. 이상언은 제 집처럼 드나들던 강 건너 향교에도 드문드문 나갈 뿐이었다. 합천 이씨 종친들이 세운 향교는 목화시배지 건너편에 있었다. 고려 말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붓두껍에 숨겨 들여와 처음 재배한 곳이다. 문중에서 세웠다 해도 그 중심에는 이상언이 있었다. 불필 스님은 할아버지 이상언을 이렇게 회상했다.
“으뜸가는 선비였어요. 향교에 가서 좌정하면 주변이 환했어요. 당당하고 어디서든 중심에 계셨습니다.”
그런 이상언이었지만 차츰 어깨 힘이 빠졌다. 향교에 들어 문묘 앞에 배례할 때는 무언가 뜨거운 것이 올라와 목울대를 적셨다.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 강씨는 아들 성철을 자주 찾아갔다. 철마다 옷가지와 약을 챙겨 집을 나섰다. 남 몰래 불서를 구해 읽기도 했다. 남편은 그런 부인이 못마땅했다. 이를 꾹꾹 누르며 참고 있던 이상언의 심기가 마침내 폭발했다.
추운 겨울날임에도 강씨 부인은 아들을 찾아가려 보따리를 꾸리고 있었다. 이를 보자 참았던 분기가 솟구쳐 올라왔다. 자신의 처지가 비루하고 집안 꼴이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상언은 부인 강씨를 향해 숯불이 담긴 화로를 던졌다. 물론 부인을 향해 정면으로 던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화로에서 쏟아진 불씨가 부인의 오른쪽 눈에 박혔다. 이상언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얼굴을 감싸 쥔 부인 강씨는 진주 시내 병원으로 실려 갔고, 치료가 어렵다고하자 다시 여수로 옮겨갔다. 그럼에도 끝내 한 쪽 눈을 잃고 말았다. 아들의 출가로 어머니가 눈을 잃었으니, 아들이 눈 하나를 가져가버린 셈이었다. 한쪽 눈만 지녔지만 어머니 강씨는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을 한쪽으로만 보지 않았다.
식구 중에서 가장 기막힌 사람은 아내 이덕명이었다. 시어머니를 따라 출가한 남편을 찾아 나설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가슴을 치는 시아버지 앞에서 어찌해야 좋으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또 친정으로 돌아가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도경과 수경, 두 딸이 잠들면 홀로 울었다. 혈육을 두고 출가한 행위는 아무리 생각을 고쳐먹으려 해도 정녕 무책임했다. 이덕명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내 기필코 지아비가 내친 피붙이를 잘 키워 훗날 그 앞에 당당히 세울 것이다.”
성철은 1938년 가을 범어사를 나왔다. 마음속으로 동안거 선방을 더듬어봤다. 범어사는 스승 동산의 주석처였기에 스승 곁에서 오래 머물며 정진할 만도 했다. 그럼에도 범어사를 떠나왔다. 성철은 그 이유를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범어사는 나하고는 맞지 않았어. 무엇보다 물이 맞지 않았지.”
선문답처럼 들린다. ‘물이 맞지 않다’는 뜻이 수행 풍토가 마음에 들지 않음인지, 아님 자연환경이 좋지 않음인지 알 수 없다. 하나 훗날 성철이 물을 가려 마셨고 물이 나쁜 곳에서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범어사 경내의 물이 몸에 맞지 않았다고 보인다. 범어사는 참선도량으로 손색이 없는 사격을 지녔지만 그 후로는 다시 찾지 않았다. 스승 동산의 따끔한 경책과 할아버지스님 용성의 따뜻한 격려가 스며있었지만 표표히 떠나갔다.
사실 성철은 해인사 퇴설당에 들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출가할 때의 해인사가 아니었다. 당시 해인사에는 변설호가 막 주지로 부임했다. 그는 지독한 친일승이었다. 중일전쟁이 터지자 용산 조선군사령부에 머물며 일본군 전사자들을 위해 독경을 하고 향을 살랐다. 국방헌금을 거둬서 일선부대를 찾아가 전달했고, 전장으로 떠나는 일본군에게 무운을 빌어주었다. 그 공을 사 총독부가 공석 중인 해인사 주지직 선거에 나서도록했다. 당시 해인사는 대중들이 두 차례나 주지를 선출했음에도 총독부가 인가를 해주지 않았다. 고경 스님 등 그들이 다루기 힘든 승려가 뽑혔기 때문이었다. 총독부는 주지 선거에 경찰관을 입회시켜 해인사와는 연고가 없는 변설호를 당선시켰다.
친일승이 종권을 장악하자 해인사는 왜색 사찰로 변했다. 친일로만 따지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이회광이 10년(1912~1921년) 동안 주지를 하면서 해인삼매의 사격(寺格)을 훼손시키더니 변설호가 다시 승풍을 망가뜨렸다. 변설호는 보란 듯이 친일행각을 벌였다. 강원에서 항일교육을 한다고 왜경에 밀고, 고경 스님을 옥사하게 만든 ‘해인사 사건’을 일으켰다. 또 비문 내용이 불온하다고 부추겨 왜경이 사명대사 비석을 네 조각으로 부수도록 만들었다.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지관 스님은 역저 ‘해인사지(海印寺誌)’ ‘해인성지를 오염시킨 왜정주구(倭政走狗)’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일제주구(走狗)의 두목 합천 경찰서장 다케우라는 여름이 되자 휘하의 형사와 석수를 데리고 홍제암에 있는 사명당 비석을 무너뜨리고 비면을 4등분하여 사이사이를 정으로 쪼아 망치로 내려치기 시작했다. 이것을 보고 있던 산내 대중들은 그저 울분을 토할 뿐 어떻게 할 도리 없이 보고만 있었다. 불·보살님과 호법선신(護法善神)의 가호였는지 청천백일에 천지가 캄캄해지더니 뇌성벽력을 하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석수가 하던 일을 멈추고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으니 다케우라 또한 두려운 생각에 일을 멈추고 귀가하였다. 그러나 이런 악독한 일을 하여 출세한 다케우라는 2, 3일 후에 한사코 거절하는 석수를 대동하여 원래 계획대로 네 동강내고 부서진 4개의 비면은 경찰관 해인사 파출소 정문에 디딤돌로 사용하고 사명당 영정은 압수해갔다.’
여기서 왜정주구는 바로 변설호였다. 해인사주지를 지낸 인물이라 차마 그 이름을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1947년 새로 사명대사비가 세워졌는데, 수주 변영로 선생이 지은 비문은 ‘왜(倭) 짐승과 절의 버러지가 통모하여’로 시작된다. 여기서 왜 짐승은 다케우라이고, 절 버러지는 변설호였다. 변설호는 해방이 되자 승적을 빼앗기고 절에서 쫓겨났지만 대한불교총화종을 만들어 초대종정을 지냈고 89세까지 천수를 누렸다고 한다. 그의 건재함은 역으로 한국불교의 취약함이니, 그 후로도 오래도록 불교가 제 자리를 못 잡고 흔들렸음이 아니겠는가.
성철은 변설호 일당이 장악하고 있는 해인사로 갈 수 없었을 것이다. 해인사에 팔만대장경은 있었지만 그 속의 가르침은 없었다. 변설호는 그 후로도 숱한 친일행각을 벌였다. ‘해인사지’의 지관 스님 개탄을 더 살펴보자.
‘일제의 말로가 가까워지니 조선재(造船材), 비행재를 포함하여 각종 목재로 천심노송(千尋老松)이 무참하게 벌목을 당했고, 각종 진귀한 보물 등 1900여점을 3대의 트럭에 만재하여 군수용으로 공출 당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성철은 해방이 될 때까지 해인사에 가지 않았다. 은해사, 송광사, 수덕사, 간월암, 법주사, 도리사, 대승사 등에서 정진했다. 성철이 가야산 산세를 지극히 예찬했음에도 찾지 않은 것을 보면 해인사가 왜색에 물들었기 때문이라 짐작된다.
성철은 다시 통도사 백련암을 찾아갔다. 수백 살 먹은 은행나무가 여전히 백련암을 지키고 있었다. 노란 잎을 흔들며 은행나무가 다시 물었다.
“그대 왜 다시 왔는가.”
김택근 언론인·시인 wtk222@hanmail.net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14. 운부암에서 향곡을, 마하연에서 자운을 보았다
"성철과 향곡은 운부암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이후 향곡이 먼저 입적할 때까지 가장 편하게 대했던 도반이었다. 하지만 구도의 여정에서는 누구보다 준엄하게 서로를 경책했다. 체구가 크고 근기마저 비슷해서 두 선승이 으르렁거리면 범종이 울고 산천이 놀랄 정도였다."
1939년 팔공산 은해사 운부암에서 하안거를 했다. ‘북 마하연 남 운부암’이라 불릴 만큼 남쪽의 대표적인 수행도량이었다. 운부암은 은해사에서 산길 3킬로미터를 더 올라가야만 나타난다. 651년(신라 진덕여왕 5년) 의상 스님이 창건했고, 절을 지을 때 상서로운 구름이 줄곧 떠있어 운부(雲浮)라 했다고 전한다. 혹자는 절이 ‘구름 위에 떠있어’ 그리 불렸다고도 한다. 스님이란 어차피 떠도는 운수납자이니, 운부암은 구름처럼 떠돌던 수도승이 문득 멈춰선 무문관인지도 모른다.
성철은 그곳에서 도반 향곡(1912~1978)을 만났다. 향곡은 성철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 두 선객의 만남은 개인은 물론이고 한국불교에도 커다란 사건이었다. 향곡은 16세에 양산 천성산 내원사로 출가하여 18세에 득도했다. 20세에 운봉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고, 33세인 1944년에 깨쳐 역시 운봉으로부터 전법게를 받았다.
성철과 향곡은 운부암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이후 향곡이 먼저 입적할 때까지 가장 편하게 대했던 도반이었다. 하지만 구도의 여정에서는 누구보다 준엄하게 서로를 경책했다. 체구가 크고 근기마저 비슷해서 두 선승이 으르렁거리면 범종이 울고 산천이 놀랄 정도였다. 성철과 향곡 사이에 전해오는 일화가 있다. 어찌 보면 별 얘기가 아닌데도 아이들의 천진한 장난처럼 속기가 없어 따사롭다.
하안거 해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가을, 수좌 몇이서 포행에 나섰다. 햇살은 맑고 바람은 부드러웠다. 가을은 참으로 그득했다. 잣나무에는 잣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잣나무숲을 걷던 성철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대뜸 향곡에게 말했다.
“향곡아, 저 잣을 따 올수 있겠는가?”
“아무렴, 내가 저걸 못 따겠느냐.”
“아무래도 네 몸집으로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자 향곡이 자못 씩씩거리며 잣나무로 달려들었다. 이를 성철이 급하게 말렸다.
“옷을 벗고 올라야지, 송진이 옷에 묻으면 어쩌려고.”
향곡이 옷을 훌러덩 벗고 잣나무에 올랐다. 체구가 커서 잣나무가 심히 흔들렸다. 잣을 막 따려할 때 성철이 나무 아래서 소리쳤다.
“아이고 큰일이다! 저기 아가씨들 서넛이 올라오네. 향곡아 빨리 내려와라.”
성철은 소리를 지르고 도망쳐버렸다. 성철은 제자들에게 이 대목까지 말하고는 혼자 배꼽을 잡고 웃었다. 같은 얘기인데도 매번 즐거워했다. 보기 좋게 속은 향곡이 내려와 씩씩거렸을 것이니, 아마도 향곡의 분노에 잣나무숲이 들썩거렸을 것이다.
이때 성철의 이름은 전국 사찰에, 특히 선방에 널리 알려졌다. 치열한 용맹정진은 안거를 함께한 선객들 입을 통해 퍼져나갔다. 처음에는 법랍을 따져 성철을 얕보다가도 막상 수행정진에 들어가면 성철을 따라갈 스님이 없었다.
성철은 수도팔계(修道八戒)를 지어 스스로를 다스렸다. 훗날 불필 스님과 후학들에게 전해준 법문 노트를 보면 치열한 구도정진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억천만겁토록 생사고를 헤매다가 어려운 일 가운데 어려운 일인 사람 몸을 받고 부처님 법을 만났으니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제도할 것인가. 철석같은 의지 서릿발 같은 결심으로 혼자서 만 사람이나 되는 적을 상대하듯, 차라리 목숨을 버릴지언정 마침내 물러나지 않으리라.
1. 희생-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지 않으면 큰 것을 성취하지 못한다. 오직 영원한 자유를 위해서 일시 소소한 영화는 완전히 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일시 환몽(幻夢)인 부모처자, 부귀영화 등 일체를 희생하여 전연 돌보지 않고 오직 수도에만 전력해야 한다.
2. 절속(絶俗)- 생사의 근본은 음행에 있나니 이는 제불(諸佛)의 통설이다. 음행을 끊지 못하면 성도(成道)는 못한다.
3. 고독- 수도에는 인정이 원수다. 서로 돕고 서로 생각하는 것이 좋은 것 같지만 이것이 생사윤회의 출발이니 일체의 선인악업(善因惡業)을 다 버리고, 영원한 자유와 더불어 독행독보해야 한다. 일반에 있어서 일대 낙오자가 되어 참으로 고독한 사람이 되지 않고는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하지 못한다.
4. 천대(賤待)- 남에게 대접받을 때가 망하는 때이니 일시의 대접에 팔려 영원한 활로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천대받고 괄시받는 때만이 참으로 살아나가는 때다. 나를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은 나를 제일 방해하는 마군(魔軍)이다. 중상모략 온갖 침해로써 나를 적대하는 사람보다 더 큰 은인은 없다.
5. 하심- 내 못난 줄 알 때가 비로소 철나는 때이다. 나이 팔십이 넘어도 내 잘난 것이 있으면 아직 철이 안 난 것이다. 내 못난 줄 알고서 일체를 부처님처럼 섬기게 될 때 참으로 도가 높아지는 것이다. 가장 낮은 곳은 자연히 큰 바다가 되지 않은가. 남의 존경과 대접은 총알과 같이 피하고 독사같이 멀리해야 한다.
6. 전념- 한 몸으로 두 길은 못 간다. 영원한 자유는 화두를 바로 깨쳐 자성을 보는 데[見性] 있다. 그 외에는 모두 사로(邪路)다.
7. 노력- 모든 성공의 대소(大小)는 노력의 여하에 정비례한다. 영원한 자유는 보통의 노력으로는 성취하지 못한다. 고인들은 말하지 않고 잠자지 않고 사력을 다한 부단불휴(不斷不休)의 노력으로 성도했다.
8. 고행- 모든 타락과 실패는 해태(懈苔)에서 온다. 그리고 신도의 돈은 중을 죽이는 설비상(雪砒霜)이다. 고인이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철칙을 세움도 여기에 있다. 남의 밥 먹고 내 일을 하려는 썩은 정신으로는 만사 불성(不成)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정법이 두타제일인 가섭존자에게 가지 않았는가.’
그해 겨울 성철은 금강산 마하연 선원을 찾았다. 내금강 유점사의 말사인 마하연은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보우 스님이 출가했으며, 나옹선사도 머물렀던 천 년 고찰이었다. 장안사에서 10리 정도 오르면 표훈사가 있고, 그곳에서 조금 더 오르면 마하연이 나타난다. 한때 승방 53개를 갖춘 화엄10찰로 명성을 날렸다. 마하연 뒤쪽으로 촛대봉, 앞쪽으로는 혈망봉과 법기봉이 솟아 있다. 마하연 자리는 ‘금강산의 복장(腹臟)’이라 일컬어졌으니 금강산 가슴의 한 복판이었다. 의상은 선객들이 가슴으로 산 전체를 품으라고 이곳에 선방을 열었을 것이다. 선승이라면 한번쯤은 마하연 선방에서 정진하고 싶어 했다. 그만큼 선방 규모도 커서 마하연에서 함께 한철을 났어도 서로 얼굴을 모를 정도였다. 그곳에서 또 다른 도반 자운 스님(1911~1992)을 만났다.
자운은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났으며 17세에 해인사로 출가했다. 24세에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했고, 울진 불영사에서 3년 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하며 정진했다. 자운은 훗날 흐트러진 계단(戒壇)을 새로 정비하여 계율의 중흥조, 조계종단의 대표 율사로 추앙받았다. 종단 전계대화상을 지내며 수만 명에게 계를 주었다. 그 옛날 자장율사가 있었다면 근현대엔 자운 스님이 있었다.
수행에만 정진하려는 성철에게 문제가 생겼다. 선객들이 시도 때도 없이 편지를 써 달라, 읽어 달라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한문을 제대로 읽고 쓰는 승려들이 드물었다. 편지 글은 거의가 초서(草書)였다. 절 뿐만 아니라 마을에서도 편지는 당사자가 쓰고 읽는 경우가 드물었다. 글을 모르니 누군가 읽어주고 써줘야 했다. 대개의 대필자들은 한껏 갈겨써서 자신의 유식을 뽐냈다. 그래서 편지가 오면 으레 동네 훈장이나 유학자에게 보여주었고, 답장 또한 써주는 대로 공손히 받아야 했다.
“철수좌가 초서에 능하다더라.”
소문이 돌자 선객들이 은밀히 성철을 찾았다. 59칸짜리 선원이었으니 대중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팔도에서 모인 스님들의 사연도 사투리만큼이나 각양각색이었다. 처음에는 정성껏 대독, 대필해주었다. 그러나 수많은 선객들의 부탁을 감당할 수 없었다. 성철에게 은근한 미소를 보이면 영락없는 ‘편지 부탁’이었다. 특히 대필을 해줄 때면 서로의 사연을 알아야했으니 건성으로 써줄 수도 없었다. 나중에는 종일 편지만 써도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었다. 스님들이 다가오거나 미소만 지어도 겁이 날 정도였다. 할 수 없이 대중들에게 ‘편지 사절’을 선언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글 좀 안다고 너무하는 것 아닌가. 글 모르는 중들은 서러워서 살 수 있겠나.”
그래도 성철은 한번 뱉으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해 겨울 금강산에는 유독 눈이 많았다. 처음에는 설경이 곱더니 큰 눈이 내려 이내 설경마저 덮어버렸다. 그랬다, 결국 어떤 아름다움도 추함도 없었다. 모양도 없이 공(空)할 뿐이며 궁극적으로는 공마저 없음이었다. 마하연 선원도 눈 속에 파묻혔다. 눈이 눈을 삼킨 세상에서 성철이 깨어 있었다.
김택근 언론인·시인 wtk222@hanmail.net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15. 어머니를 업고 금강산을 구경하다
"성철은 어머니와 함께 금강산 구경에 나섰다. 늙은 공양주보살은 밥을 꾹꾹 눌러 도시락을 싸주었다. 그리고 마하연을 나서는 모자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개울이 나오면 손을 잡아 건너고, 험한 오르막길을 만나면 등에 업고 오르고, 넓고 평평한 바위가 보이면 앉아 함께 쉬기도 했다."
성철은 혈육을 멀리했다. 찾아오는 어머니마저 만나지 않았다. 심지어 돌까지 던졌다. 속세에 있었다면 천하의 불효자식이었다. 하지만 불가에 들어 법명을 받은 불자는 다르다. 성철은 흔들림 없이 정진하여 깨치겠다는 발원문(發願文) 마지막에 ‘소림문손(少林門孫) 성철’이라 밝히고 있다. 속연(俗緣)을 끊고 소림산문에 들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렇지만 두고 온 인연들이 얼마나 애틋하고 그리웠을 것인가. 자신을 기다리는 속가의 식구들을 떠올리면서 무수히 부대꼈을 것이다. 그럴수록 성철은 세속과 절연하자며 자신을 채찍질했다. 성철이 남긴 글을 통해 우리는 그런 심경을 엿볼 수 있다.
‘세속은 윤회의 길이요, 출가는 해탈의 길이니, 해탈을 위해 세속을 단연히 끊어버려야 한다. 부모의 깊은 은혜는 출가수도로써 보답한다. 만약 부모의 은혜에 끌리게 되면 이는 부모를 지옥으로 인도하는 것이니, 부모를 길 위의 행인과 같이 대하여야 한다.
황벽 희운선사가 수천 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황벽산에 주석하였다. 그때 노모가 의지할 곳이 없어서 아들을 찾아갔다. 희운선사가 그 말을 듣고는 대중들에게 명령을 내려 물 한 모금도 주지 못하게 하였다. 노모는 하도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가다가 대의강(大義江) 가에 가서 배가 고파 엎어져 죽었다. 그리고 그날 밤 희운선사에게 현몽하여 “내가 너에게서 물 한 모금이라도 얻어먹었던들, 다생(多生)으로 내려오던 모자의 정을 끊지 못해서 지옥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너에게 쫓겨나올 때 모자의 깊은 애정이 다 끊어져서 그 공덕으로 천상으로 가게 되니, 너의 은혜는 말할 수 없다”고 말하며 절하고 갔다 한다.
부처님은 사해군왕(四海君王)의 높은 지위도 헌신짝같이 벗어던져버렸으니, 이는 수도인의 만세모범이다. 그러므로 한때의 환몽인 부모처자와 부귀영화 등 일체를 희생하여 전연 돌보지 아니하고 오직 수도에만 전력하여야 한다.’ <수도8계 중 ‘절속(絶俗)’>
성철은 수도자들에 절속(絶俗)하라 이른다. 그것은 자신의 출가수도의 길이 험난했음을 얘기하는 것 아니겠는가. 피붙이를 두고 영원한 자유를 찾아 나선 구도의 여정이 얼마나 힘이 들었겠는가. 화두를 들고 있으면, 마음을 닦고 있으면 무수한 인연들이 파장을 일으켰을 것이다. 이를 물리치기 위해 성철은 눈을 부릅떴다.
“나는 말하노니 ‘청상과부가 외동아들이 벼락을 맞아 죽어도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을 만한 무서운 생각이 아니면 절대로 이 공부할 생각을 말아라’고 하겠다.”
요즘 언론에 스님의 부고가 자주 실린다. 본인의 입적이 아니라 속가의 부음이다. 스님의 혈육이 상(喪)을 당했으니 어쩌란 말인가. 아직도 세속의 인연에 핏줄을 대고 있으니, 성철이 보면 그런 자를 중이라 하겠는가.
1940년 봄, 어머니 강 씨는 다시 보따리를 챙겼다. 성철은 금강산 마하연에서 동안거를 하고 아직 선원에 머물고 있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데 며느리가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지아비에게 할 말이 얼마나 쌓여있을 것인가. 아마도 며칠 동안 궁리하여 밤 새워 눈물과 한숨을 섞었을 것이다. 강 씨는 말없이 편지를 받아 보따리 깊숙이 넣었다.
금강산 가는 길은 그야말로 천리였다. 산청을 떠나 진주로, 진주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서울로, 다시 서울에서 금강산 장안사로 가야했다. 버스로, 기차로, 또 걸어서 갔다. 강 씨는 장안사에서 다시 삼불암, 표훈사, 만폭동, 보덕암을 거쳐 마하연에 이르렀다. 꼬박 사흘이 걸렸다.
주지스님이 낯선 여인의 행색을 살폈다. 어머니는 주지에게 성철과의 속연(俗緣)을 밝혔다. 주지는 강 씨를 공양주보살 방에 머물도록 했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니는 조심스레 선방을 찾아갔다. 성철은 어머니를 보자 대뜸 먼발치서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이렇게 먼 길을 왜 찾아오셨습니까?”
그러자 어머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둘러댔다.
“나는 스님 보러 안 왔다. 금강산이 좋다기에 구경하러 왔을 뿐이지.”
사무치게 그리운 아들이었지만 막상 만나면 손 한번 잡을 수 없었다. 아들은 차디 찬 바위였다. 그래도 어디든 찾아가야하는 자신이 미웠다. 어머니는 이내 돌아섰다. 이런 일이 새삼스럽지 않았다. 해인사에서도, 범어사에서도, 그리고 통도사에서도 어머니는 그렇게 돌아섰다. 힘없이, 풀이 죽어 공양주 방으로 들어섰다. 늙은 보살이 노해서 소리쳤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는가. 목련존자는 어머니 찾아 지옥 불에 뛰어들었다는데, 천 리 길을 찾아온 어머니를 산속에서 내치다니. 세상에 이런 법은 없다.”
그날 밤 마하연 선방에서는 때 아닌 대중공사가 벌어졌다. ‘성철수좌가 모친 상면을 거부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를 두고 대중들이 저마다 의견을 얘기했다.
“철수좌의 구도정신은 산봉우리처럼 높습니다. 세속의 인연을 끊고 정진하겠다는 그 자세를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이미 부처님이 걸었던 길이기도 합니다.”
“그야 옳은 말이지만 그래도 철수좌가 어머니를 만났으면 합니다. 진주 산청이라면 얼마나 먼 곳입니까. 그리고 부처님께서도 혈족이 찾아오면 흔쾌히 제접하지 않았습니까.”
“글쎄요, 부처님과 철수좌를 같은 반열에 두고 얘기하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소승이 보기로는 철수좌의 공부가 범상치 않습니다. 행여 속연으로 인해 공부에 방해가 될까 걱정됩니다.”
“출가한 지 어제 오늘도 아닌데, 이제 어머니가 오셨다는 것을 속연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부처님도 찾아 온 혈족을 보살의 길로 인도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안거 기간도 아니고, 철수좌는 어머니를 모셔야 마땅합니다.”
마침내 뜻이 모아졌다.
“아무리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지만 성철수좌는 인정이 너무 없는 것 같소이다. 우리가 차마 볼 수 없으니, 어머니를 맞이하지 않으려면 떠나가도록 하시오.”
대중공사의 결정을 성철에게 통보했다. 성철은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이튿날 어머니와 아들이 마주보았다. 열아홉에 낳은 자식이 눈앞에 있었다. 강 씨는 아들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아들은 많이 변해 있었다. 빛나는 눈, 훤칠한 이마, 얼굴 전체에 흐르는 온화한 기운…. 자신의 뱃속에서 나왔지만 이제 자기 자식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꽉 찬 기쁨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허전함이기도 했다.
성철도 어머니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작은 키가 더 작아 보였다. 아직 오십 줄에 들어서지 않았는데도 노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얼굴에 속기가 없었다. 주름진 작은 얼굴은 온화했다. 성철은 어머니의 마음속이 평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어머니도 이미 불교에 빠져있음이었다. 그런데 어머니 눈이 이상했다. 한쪽 눈이 깜박거리지 않았다.
“어머니 눈이 왜 그리되셨습니까?”
“뭐 나이 먹으면 다 그렇지.”
어머니는 오른쪽 눈을 손으로 가렸다. 성철이 다가가 손을 잡았다. 어머니 거친 손이 파르르 떨렸다.
성철은 어머니와 함께 금강산 구경에 나섰다. 늙은 공양주보살은 밥을 꾹꾹 눌러 도시락을 싸주었다. 그리고 마하연을 나서는 모자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개울이 나오면 손을 잡아 건너고, 험한 오르막길을 만나면 등에 업고 오르고, 넓고 평평한 바위가 보이면 앉아 함께 쉬기도 했다.’
불필 스님이 들어서 전하는 모자의 행복한 모습이다. 길상암을 시작으로 보덕암, 만폭동, 표훈사, 삼불암 등을 둘러봤다. 어머니도 아들도 비로소 절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는 아들이 보고 싶어서, 아들은 오로지 화두 참구 일념에 금강산 비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니와 아들은 내친김에 신계사, 옥류동, 법기암, 구룡폭포, 상팔담, 만물상 등 외금강까지 두루 둘러봤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한쪽 눈으로 담은 경치였지만 어머니에게는 금강산이 곧 극락이었다.
“아들 등에 업히기도 하고 손과 팔을 잡혀 이끌리기도 하면서 보낸 일주일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서질 않았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지. 하도 좋아서 극락이 따로 없다는 생각까지 했다네.”
훗날 성철도 그때를 회고했다.
“나도 어머니 덕에 금강산 구경 잘했네. 나 혼자 있으면 정진만 했지, 금강산 구경은 꿈에도 못했을 거야.”
어머니는 그렇게 아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집에 있는 며느리를 생각하면 목이 메었다. 며느리의 편지를 아들에게 보여야 했지만 좀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기회만 엿보다 끝내 금강산을 떠나왔다. 묵곡리에 돌아오자 며느리에 대한 미안함이 전신을 휘감았다. 멀리 집이 보이자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어머니는 길모퉁이에서 눈물을 쏟았다. 오래도록, 펑펑.
김택근 언론인·시인 wtk2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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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21. 간월암에는 성철의 달이 떠올랐다 ~ 25. 쌍련선원의 두 연꽃, 성철과 청담 (0) | 2023.06.11 |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16.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 20. 회갑잔치 날 아버지가 울었다 (5) | 2023.06.04 |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6. “그러고도 당신들이 중이랄 수 있습니까” ~ 10. “중이 못되면 급히 죽을 사주랍니다” (1) | 2023.05.21 |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1. 저 언덕 너머로 ~ 5. 선승의 노래가 가슴을 쳤다 “아아 이런 공부가 있었구나” (1) | 2023.0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