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 없는 화합이 모두 위한 승가의 길
마하쭌다 존자, 승가 내부 갈등 해소 위한 대안 제시해
상호 비난 멈추고 인정·존경하면 교·선 갈등 풀 수 있어
스님 간 칭찬·격려, 사부대중에 이익·행복 가져다 줄 것
‘쭌다경(Cunda-sutta)’(AN6:46)은 제목 그대로 마하쭌다(Mahācunda)라는 존자가 동료 비구들에게 설한 법문이다. 이처럼 초기경전에는 붓다의 설법이 아닌 제자들의 설법도 많이 수록되어 있다. 필자가 이 경에 주목하는 까닭은 마하쭌다 존자가 붓다의 뛰어난 제자도 아니면서 승가 내부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하쭌다 존자는 쭌다 혹은 쭌다까 존자로 불렸으며, 쭌다 사미로도 불렸다. 그는 사리뿟따 존자의 동생이었으며 구족계를 받은 후에도 사미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그는 한때 세존의 시자 소임을 맡기도 했던 인물이다.
이 경은 마하쭌다 존자가 쩨띠(Ceti)의 사하자띠(Sahajāti)에 머물고 있을 때 동료 비구들에게 설한 것이다. 이 경에 의하면 법상응자(法相應者, dhammayogā)들은 선정자(禪定者, jhāyī)들을 싫어하고, 반대로 선정자들은 법상응자들을 싫어한다. 이것은 붓다 재세 시에 실제로 있었던 교법(pariyatti)을 중시하는 그룹과 수행(patipatti)을 중시하는 그룹 간의 갈등을 말한다.
붓다의 설법은 교법으로서의 법(pariyatti-dhamma)과 통찰로서의 법(paṭivedha- dhamma) 둘로 구분된다. 붓다시대부터 승가는 교법을 중시하는 그룹과 수행을 중시하는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성향이 전혀 다른 두 그룹은 경쟁과 대립의 관계였다. 그러나 교법과 수행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두 가지 모두를 갖추어야만 한다. 그런데 두 가지를 다 갖추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법상응자란 ‘교학을 연찬하는 자’라는 뜻인데, 주석서에서는 ‘가르침을 설하는 자들(dhammakathikā)’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선정자란 ‘선정을 닦는 자’라는 뜻이다. 이들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경에서는 복수로 나타난다. 두 집단을 현대어로는 ‘교학자들’과 ‘수행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강사에 가깝고, 후자는 선사에 가깝다. 두 집단 간의 갈등은 한국불교사에서 있었던 교종과 선종 간의 갈등과 같은 맥락이다. 이처럼 교(敎)와 선(禪)의 갈등은 그 기원이 붓다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마하쭌다 존자는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르침을 중시하는 비구들은 선정을 닦는 비구들을 비난하고 헐뜯는다. 반대로 선정을 닦는 비구들은 가르침을 중시하는 비구들을 비난하고 헐뜯는다. 그래서 가르침을 중시하는 비구들도 마음이 편치 않고, 선정을 닦는 비구들도 마음이 편치 않다. 이것은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는 것도 아니며, 신과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는 것도 아니다.
“벗들이여, 그러므로 이와 같이 ‘교법을 중시하면서 선정을 닦는 비구들을 칭찬하리라’라고 배워야 한다. …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벗들이여, 세상에 이러한 불사(不死)의 경지를 몸으로 체득하고 있는 놀라운 사람들을 세상에서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서 불사의 경지를 몸으로 체득하여 머문다는 것은 죽음이 없는 열반의 경지를 명상의 주제로 삼아 수행하면서 점차 정신을 수반하는 몸(nāmakāya)으로 체득한다는 뜻이다. 즉 선정자들은 선정의 수행을 통해 불사의 경지인 열반을 체득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없기 때문에 마땅히 칭찬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법상응자들은 이론적으로 교법을 연찬하지만, 직접 체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선정의 수행에 전념하는 자들을 공경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벗들이여, 그러므로 이와 같이 ‘선정을 닦으면서 교법을 중시하는 비구들을 칭찬하리라’라고 배워야 한다. …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벗들이여, 세상에 이러한 심오한 의취를 지혜로 꿰뚫고 있는 놀라운 사람들을 세상에서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심오한 의취를 지혜로 꿰뚫어 본다는 것은 오온(五蘊)・십이처(十二處)・십팔계(十八界) 등의 깊은 이치를 지혜로써 꿰뚫어 본다는 뜻이다. 즉 법상응자들은 붓다가 설한 교설을 지혜로 꿰뚫어 보기 때문에 법을 설할 수 있다. 이러한 능력은 선정자들이 갖추지 못한 자질이다. 따라서 자기들이 갖추지 못한 자질을 갖춘 상대편의 법상응자들을 칭찬하고 존경해야 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훌륭한 법문이다. 서로 상대를 비난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갖추지 못한 부분을 실천하고 있는 상대편을 오히려 칭찬하고 존경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가르침이야말로 교(敎)와 선(禪)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쭌다경’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다.
붓다 재세 시에 있었던 최초의 승가 분열은 꼬삼비(Kosambī) 비구들의 다툼이었다. 꼬삼비 비구들은 두 집단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한 무리는 지법자(持法者, dhammadhara)를 따르는 집단이었고, 다른 무리는 지율자(持律者, vinayadhara)를 따르는 집단이었다.
붓다도 두 집단의 대립과 갈등을 막지 못했다. 그래서 붓다는 그들을 버리고 우기 동안 락키따(Rakkhita) 숲에서 홀로 안거(安居)를 보냈다. 꼬삼비의 재가신자들은 붓다께서 그들의 곁을 떠난 이유를 알고 비구들에게 공양을 올리지 않았다. 재가신자들은 붓다께서 그들의 잘못을 인정하기 전에는 공양을 올리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붓다는 떠났고 안거 중이었기 때문에 꼬삼비 비구들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 중에는 굶어서 죽는 비구들도 있었다. 안거가 끝난 뒤 꼬삼비 비구들이 붓다를 찾아가서 잘못을 뉘우침으로써 그들의 다툼은 중지되었다. 이렇게 해서 지법자와 지율자 간의 갈등은 완전히 해소되었다. 하지만 교법을 중시하는 그룹과 수행을 중시하는 그룹 간의 갈등과 대립은 붓다시대에서부터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승려 상호 간에 서로 비난하고 비방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반면 승려 상호 간에 서로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과 행복을 가져다준다. 굳이 충고할 일이 있으면 개인적으로 할 일이지, 공개적으로 할 일은 아니다. 충고는 개인적으로 하고, 칭찬은 공개적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마성 스님 팔리문헌연구소장 ripl@daum.net
[1563호 / 2020년 12월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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