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심결

勸修定慧結社文 권수정혜결사문

수선님 2023. 8. 13. 12:51

勸修定慧結社文 권수정혜결사문

권수정혜결사문 勸修定慧結社文1)

해동 조계산사문 지눌 지음

海東 曹溪山沙門 知訥 撰2)

1) 저본(底本)은『한국불교전서(韓國佛敎全書)』제4책(동국대학교출판부, 1982)에

수록(pp.698a1-707c19)된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이다. 이에 대한 교

감본으로, 갑본(甲本)은 만력(萬曆) 36년(1608)에 송광사(松廣寺)에서 중간(重

刊)한『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이며, 을본(乙本)은 융희(隆熙) 2년

(1908)에 범어사(梵魚寺)에서 개간(開刊)한『선문촬요(禪門撮要)』에 수록된 『권

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이며, 병본(丙本)은 탄허스님이 현토(懸吐)하고

역해(譯解)한 『보조법어(普照法語)』(回想社, 1978)에 수록된『권수정혜결사문(勸

修定慧結社文)』이며, 정본(丁本)은 보조사상연구원(普照思想硏究院)에서 펴낸

『보조전서(普照全書)』(佛日出版社, 1989)에 수록된『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

社文)』이다.『한국불교전서』에서는 갑본을 저본으로 하였다.

2)「海東曹溪山沙門知訥撰」이라는 문구는 저본의 편집자가 보충해서 넣은 것이

다.(韓4, p.698c) 지눌스님은 『권수정혜결사문』의 말미에서 “명창 원년 경술 늦

은 봄에 공산에 은거하는 목우자 지눌이 삼가 쓰다”[時, 明昌元年庚戌, 季春, 公山

隱居, 牧牛子 知訥, 謹誌.]라고 밝히고 있다. 이로써 이 글이 지눌스님의 진찬임을

알 수 있다.

삼가 들으니, ‘땅으로 인해 넘어진 사람은 땅으로 인해서 일어난다. 땅을

여의고 일어나기를 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3)라고 하였다. 한 마음[一心]4)

을 미혹하여 끝없는 번뇌를 일으키는 이는 중생이며, 한 마음을 깨달아 끝

없이 미묘한 작용을 일으키는 분은 모든 부처님이다. 미혹과 깨달음이 비

록 다르지만, 요지는 한 마음을 말미암는 것이니, 마음을 여의고 부처를 구

하는 것 또한 옳지 않다.

恭聞, ‘人因地而倒者, 因地而起, 離地求起, 無有是處也.’ 迷

一心, 而起無邊煩惱者, 衆生也, 悟一心, 而起無邊妙用者, 諸

佛也. 迷悟雖殊, 而要由一心, 則離心求佛者, 亦無有是處也.

3) 이 구절의 전반부와 비슷한 내용은 이통현(李通玄, 635~730)의『신화엄경론(新

華嚴經論)』권14에서 볼 수 있다. 즉, “만약 어떤 사람이 땅으로 인해 넘어지면

땅으로 인해서 일어난다. 일체 중생이 자기 마음의 근본지로 인해 넘어지면 자

기 마음의 근본지로 인해서 일어난다.”(大36, 812b29. 如人, 因地而倒, 因地而起.

一切衆生, 因自心根本智而倒, 因自心根本智而起.)『신화엄경론』의 이 내용은 『종

경록(宗鏡錄)』 권7(大48, p.454c1-3)에도 인용되었다. 또『경덕전등록(景德傳燈

錄)』권1의 「제사조우바국다(第四祖優波毱多)」에서는 지눌스님이 인용한 구절

과 비슷한 내용을 볼 수 있다. 즉, “만약 땅으로 인해 넘어졌다면 도리어 땅으로

인해 일어나라. 땅을 여의고 일어나기를 구하는 것은 결코 이치가 없다.”(大51,

p.207b16-17. 若因地倒, 還因地起, 離地求起, 終無其理.)『경덕전등록』의 이 내용은

이후의 전등사서에서 우바국다 존자의 기연(機緣)과 연관해서 거의 그대로 인

용되고 있으며,『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이하『대혜어록』)에서

도 대혜선사의 법어로 기록되어 있다.(大47, p.898b8)

4) 한 마음[一心]은 중생과 부처가 차별 없는 하나의 마음을 뜻한다. 지눌스님의

저술에서 한 마음은 자심(自心), 자성(自性), 불성(佛性), 본래면목(本來面目), 법

인(法印), 공적영지(空寂靈知)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 마음은 『대

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의 일심(一心), 곧 중생심(衆生心)을 가리킨다.(大32,

p.575c21) 그래서 지눌스님은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에서 “이 마음은 성

인에게 있어도 늘어나지 않고 범부에게 있어도 줄어들지 않기 때문에 성인의

지혜에 있어도 빛나지 않고 범부의 마음에 숨어도 어둡지 않다”(韓4, p.711a3-5)

고 하였다. 지눌스님의 저술에서 큰 마음의 범부[大心凡夫], 큰 마음의 중생[大

心衆生] 등으로 표현된 큰 마음도 같은 의미이다.

지눌은 묘년(妙年)5)부터 조사의 세계에 몸을 던져 선원을 두루 다니면서

부처님과 조사가 중생을 위해 자비로 내린 가르침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요점은 우리들로 하여금 모든 반연을 쉬고 텅 빈 마음으로 깊이 계합하

여 밖에서 바쁘게 구하지 않도록 한 것이었다. 경에서 말씀하신 바,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님의 경계를 알려고 한다면 마땅히 그 뜻을 맑히기를 허

공과 같이 해야 한다”6)라는 등과 같은 가르침이다. 무릇 [부처님과 조사의

가르침을] 보고 듣고 외우고 익히는 사람은 마땅히 [이러한 가르침을] 만나

기 어렵다는 마음을 내어 스스로 지혜를 써서 관조하여 가르친 바와 같이

닦는다면, 스스로 부처님의 마음을 닦고 스스로 부처님의 도를 이루어 몸

소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知訥, 自妙年, 投身祖域, 遍參禪肆, 詳其佛祖垂慈爲物之門.

要令我輩, 休息諸緣, 虛心冥契, 不外馳求. 如經所謂,“ 若人

欲識佛境界, 當淨其意如虛空,”等之謂也. 凡見聞誦習者, 當

起難遇之心, 自用智慧觀照, 如所說而修, 則可謂自修佛心, 自

成佛道, 而親報佛恩矣.

5) 묘년(妙年)은 묘령(妙齡)과 비슷한 말로 20세 안팎의 젊은 나이를 말한다. 김군

수(金君綏)가 지은「조계산 수선사 불일보조국사 비명(曹溪山修禪社佛日普照國

師碑銘)」에서는 ‘지눌스님이 8세에 출가하여 53세에 입적하였으며, 이때의 법

랍이 36세였다’고 한다.[『동문선(東文選)』 권117, p.23右, p.26左 참조.] 각안(覺岸)

의『동사열전(東師列傳)』에서는 지눌스님이 16세에 출가하였다고 한다.(韓10,

p.1003c8) 이에 따라 비명의 ‘법랍 36세’라는 기록과 연관해서 지눌스님이 16세

에 출가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법랍 36세는 구족계를 수지한

햇수를 말한 것이므로 출가하여 사원에서 생활한 햇수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

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묘년은 특정한 시기를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 ‘선문에

서 출가 생활을 시작한 어린 나이’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6) 이 구절은『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하『화엄경』) 권50의「여래출현

품(如來出現品」)」에서 인용한 것이다.(大10, p.265b10-11)『화엄경』에서는 “만약

부처님의 경계를 알고자 한다면[若有欲知佛境界]”이라고 하였는데, 지눌스님은

이 구절의 ‘유(有)’를 ‘인(人)’으로 바꾸었다. 설잠(雪岑), 즉 매월당(梅月堂) 김시

습( 金時習)도 『화엄석제(華嚴釋題)』에서 선문의 뜻으로 이 구절을 인용하였는

데, 지눌스님처럼 ‘유(有)’를 ‘인(人)’으로 바꾸었다.(韓7, p.29917-23).

그러나 우리들이 아침·저녁으로 행하는 자취를 돌아보면, 부처님의 법

을 빙자하여 나와 남을 꾸미고, 이양(利養)의 길에서 구구(區區)7)하며, 풍

진의 세상에 골몰하며, 도덕은 닦지 않고 의식만 허비하니, 비록 출가하였

다지만 무슨 덕이 있겠는가? 아! 삼계를 벗어나려 하지만 풍진을 끊는 행

이 없으니, 헛되이 남자의 몸이 되었을 뿐 장부의 뜻이 없다. 위로는 도를

넓히는 데 어긋나고, 아래로는 중생을 이롭게 못하며, 중간으로는 네 가지

은혜[四恩]8)를 빚졌으니 진실로 부끄러울 따름이다. 지눌은 이런 일로 탄

식해온 지 오래되었다.

然返觀我輩, 朝暮所行之迹, 則憑依佛法, 裝飾9)我人, 區區於

利養之途, 汨沒於風塵之際, 道德未修, 衣食斯費10), 雖復出

家, 何德之有? 噫! 夫欲出離三界, 而未有絶塵之行, 徒爲男子

之身, 而無丈夫之志. 上乖弘道, 下闕利生, 中負四恩, 誠以爲

恥. 知訥, 以是長歎, 其來久矣.

7) 구구(區區)는 잘고 많아서 일일이 언급하기가 구차스럽다, 떳떳하지 못하고 졸

렬하다는 의미이다.

8) 네 가지 은혜[四恩]는 부모의 은혜, 중생의 은혜, 국왕의 은혜, 삼보의 은혜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은혜는 모든 중생이 평등하게 받는다.[『대승본생심지관경(大

乘本生心地觀經)』 권2, 大3, p.297a12-14 참조.]

9) 저본에는 「餙」로 되어 있으나 을본・병본・정본에 따라 「飾」으로 바꾸었다.

10) 저본에는 「䝴」로 되어 있으나 을본・병본・정본에 따라 「費」로 바꾸었다.

임인년(1182) 정월에 상도(上都)11) 보제사(普濟寺)12)의 담선법회(談禪法

會)13)에 나아갔을 때, 하루는 동학 10여 명과 약속하였다. “법회를 마친 후

에는 마땅히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산속에 은둔하여 함께 결사를 맺자. 항

상 정(定)을 익히고 혜(慧)를 고르게 함을 본분으로 삼고, 예불하고 경을

읽고, 노동하고 울력하는 데 이르기까지 각자 소임에 따라 경영하자. 인연

에 따라 성품을 길러 평생을 넉넉하게 지내면서 멀리 달사(達士)14)와 진인

(眞人)15)의 고결한 행을 따른다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歲在壬寅正月, 赴上都普濟寺, 談禪法會, 一日與同學十餘人,

約曰.“ 罷會後, 當捨名利, 隱遁山林, 結爲同社. 常以習定均

慧爲務, 禮佛轉經, 以至於執勞運力, 各隨所任而經16)營之. 隨

緣養性, 放曠平生, 遠追達士眞人之高行, 則豈不快哉!”

11) 상도(上都)는 경사(京師)와 같은 말로 수도[京]를 가리키며, 여기서는 당시 고려

의 수도인 개경(開京)을 가리킨다. 고려에는 왕경(王京)으로서의 개경(開京), 태

조 때 설치한 서경(西京), 성종 때 설치한 동경(東京), 문종 때 설치한 남경(南京)

등의 4경이 있었다. 남경이 설치되기 이전의 삼경은 중경(中京:개경)・서경・

동경이다. 남경이 설치된 후에 왕이 순행하던 삼경은 중경・서경・남경이며, 왕

경으로서의 개경을 제외한 삼경은 서경・동경・남경을 말한다.

12) 보제사(普濟寺)는 고려시대 개경에 있던 대표적인 선종 사찰로 광통보제사(廣

通普濟寺)라고도 하였으며, 크다고 하여 대사(大寺) 또는 당사(唐寺)라고도 하

였다. 승과는 광종 때부터 실시되었지만, 선종 2년(1084) 보제사 정쌍(貞雙)의

제의를 받아들여 3년마다 1회씩 선종・교종・천태종으로 나누어 실시하였다고

한다. 보제사는 언제부터인지 연복사(延福寺)로 명칭이 바뀌었고,『고려사(高麗

史)』에는 충숙왕이 즉위한 1313년에 연복사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한다.

13) 담선법회(談禪法會)는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불교 행사로, 선의 학습과 선풍(禪

風)의 선양에 그 목적이 있었다. 국가에서 주재한 법회와 각 사원에서 주재한 법

회가 있었으며, 각 사원이 주도하여 연 법회는 총림(叢林)이라고 하였다. 국가에

서 주재한 담선법회는 고려 초기부터 보제사(普濟寺)에서 3년 단위로 개최되었

으며, 이밖에도 서보통사(西普通寺)・광명사(廣明寺)・창복사(昌福寺)에서 열렸

다. 고려 중기 이후에는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존숭했던 『육조단경(六祖壇經)』

과『대혜어록(大慧語錄)』을 중심으로 법회가 개최되었다. 이 법회는 선의 수행

을 목적으로 한 것 이외에도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목적으로 많이 개최되었

다. 고종과 원종 때에 특히 성행했는데, 한때 원에서는 이 법회가 자신들을 저주

하는 법회라 하여 강제로 금지하기도 했다. 광조사(廣照寺)・보림사(寶林寺)・용

담사(龍潭寺) 등의 법회가 유명했다.

14) 달사(達士)는 달인(達人)과 같은 말로, 학문이나 기예에 통달하여 남달리 뛰어

난 역량을 가진 사람, 또는 널리 사물의 이치에 통달한 사람을 가리킨다.

15) 진인(眞人)은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다.『장자(莊子)』의「대종사(大宗

師)」편에서는 진인을 도가(道家)의 이상적인 인격을 갖춘 도인을 진인으로 보

며,『태자서응본기경(太子瑞應本紀經)』에서는 진인을 아라한(阿羅漢) 또는 수행

의 완성자로 보고 있다.(大3, p.475a26)『중아함경』권21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

에 따라 진리를 실천하는 진인법(眞人法)과 그렇지 않은 부진인법(不眞人法)의

차이를 자세히 설한「진인경(眞人經)」이 수록되어 있다.(大1, pp.561a21-562a28)

임제(臨濟, ?~866)선사는『진주임제혜조선사어록(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이하

『임제록』) 권1에서 일체의 차별을 여읜 자유인을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고 하

였다.(大47, p.496c10-14)

16) 저본에는 「徑」으로 되어 있으나 을본・병본・정본에 따라 「經」으로 바꾸었다.

1.17)

17) 이 번호는 원문에는 없지만 역주자가 문답을 중심으로 구분하여 [1]부터 [7]까

지 붙인 것이다.

여러 스님들이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지금은 말법 시대라서 바른 도가

잠기고 숨었는데 어떻게 정혜(定慧)18)로써 본분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부지런히 미타(彌陀)19)를 염하여 정토의 업을 닦는 것만 같지 못할 것입니

다.”라고 하였다.

諸公聞語曰, “時當末法, 正道沉隱, 何能以定慧爲務? 不如勤

念彌陀, 修淨土之業也.”

18) 정혜(定慧)는 선정[定, samādhi]과 지혜[慧, prajñā]를 의미한다. 지눌스님은

『권수정혜결사문』에서『익진기(翼眞記)』를 인용하여 ‘계는 그릇됨을 막고 악을

그침[防非止惡], 정은 이치에 맞게 산란을 거둠[稱理攝散], 혜는 법을 가려서 공

을 관함[擇法觀空]’ 등으로 계・정・혜의 의미를 밝혔다.(韓4, p.700c3-7) 지눌스

님은『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韓4, p.712b1-4)과『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

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韓4, p.748c20-22)에서도 언제나 이 해석으로 정과

혜의 수행을 설명하고 있다. 또 지눌스님의 저술에서 나타나는 정관(定觀)은 정

혜의 다른 표현이며, 관행(觀行)은 정혜를 관조하는 수행이라는 뜻이다.

19) 미타(彌陀)는 아미타불(阿彌陀佛, amita-buddha)을 줄인 말로, 아미타불은 무

량수불(無量壽佛, amitāyus-buddha)과 무량광불(無量光佛, amitābha-buddha)

의 두 가지로 해석된다.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세계의 부처님으로 정토교(淨土

敎)에서 특히 중시되어 왔다. 오랜 과거세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의 감화를

받은 법장비구(法藏比丘)가 48원을 세워 오랜 수행 끝에 성불한 부처님이 바로

아미타불이다.[『불설무량수경(佛說無量壽經)』, 大12, pp.265c-279a ;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 大12, pp.346b-348b 참조.]

나는 말한다. 시대는 비록 옮겨가고 변하지만 심성은 바뀌지 않는다. 법

(法)과 도(道)가 흥하고 쇠한다고 보는 것은 삼승(三乘)에서 방편을 배우

는 이의 견해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결코 이와 같지 않다. 여러분과 내가

이 최상승20)의 법문을 만나서 보고 듣고 익혀가는 것이 어찌 숙세의 인연

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스스로 경사스럽게 여기지 않고 도리어 끊고 나누

는 생각을 일으켜 기꺼이 방편을 배우는 사람이 되려 한다면, 예전 조사를

저버리고 최후로 부처님의 종자를 끊어버린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염불하

고 경 읽으며 온갖 행을 베풀어 행하는 것은 사문이 머무르며 지녀야 할 일

상의 법인데21) 어찌 장애가 있겠는가. 그러나 근본을 궁구하지 않고 모양

에 집착해서 밖에서 구한다면 지혜로운 사람의 웃음거리가 될까 걱정이다.

余曰. 時雖遷變, 心性不移. 見法道之興衰者, 是乃三乘權學

之見. 有智之人, 不應如是. 君我, 逢此最上乘法門, 見聞薰習,

豈非宿緣! 而不自慶, 返生絶分, 甘爲權學人, 則可謂辜負先

祖, 作最後斷佛種人也. 念佛轉經, 萬行施爲, 是沙門住持常

法, 豈有妨碍. 然不窮根本, 執相外求, 恐被智人之所嗤矣.

20) 최상승(最上乘, agrayāna)은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난 교법, 또는 가장 뛰어난 가

르침을 뜻한다.『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에서는 선을 외도선(外道禪),

범부선(凡夫禪), 소승선(小乘禪), 대승선(大乘禪), 최상승선(最上乘禪)으로 나누

면서, 달마(達摩)로부터 전해진 선을 최상승선이라고 하였다.(大48, p.399b14-22)

21) 이 구절은『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권9의「경조대천복사홍변선사(京兆大薦福

寺弘辯禪師)」조에 나오는 당나라 선종(宣宗) 황제와의 문답에서도 보인다. 즉,

“황제가 말한다. ‘선사가 이미 조사의 뜻을 알았는데, 도리어 예불하고 경을 읽

습니까?’ 대답한다. ‘사문인 부처님의 제자가 예불하고 경 읽는 것은 모두 머물

러 지니는 일상의 법이며 네 가지 과보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계를 의지

해 몸을 닦고, 선지식을 찾아뵙고 점차 범행을 닦으며, 여래께서 행하신 자취를

밟아가고 있습니다.’”(大51, p.269c6-7. 帝曰. 禪師既會祖意, 還禮佛轉經否? 對曰.

沙門釋子, 禮佛轉經, 蓋是住持常法 有四報焉. 然依佛戒修身, 參尋知識漸修梵行, 履

踐如來所行之迹.)

『화엄론(華嚴論)』에서 말한다. “이 일승(一乘)의 가르침은 근본지로써

이룰 바를 삼아서 이름을 일체지승(一切智乘)이라고 한다. 시방 세계가 양

이 허공과 같음이 부처님 경계가 된다. 그러므로 일체의 모든 부처님과 중

생의 마음과 경계가 서로서로 나란히 들어가는 것이 마치 그림자가 거듭거

듭 겹쳐 있는 것과 같아서, 부처님이 있고 부처님이 없는 세계를 말하지 않

고 상법(像法)과 말법(末法)이 있다22)고도 말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어느

때나 항상 부처님이 나오시며 항상 정법(正法)이라고 한 것은 요의경(了義

經)23)이며, 다만 이 세계의 예토와 다른 세계의 정토가 있다거나 부처님이

있고 부처님이 없는 곳과 상법과 말법을 말하는 것은 모두 불요의경(不了

義經)이다.”

華嚴論云.“ 此一乘敎門, 以根本智爲所成, 名一切智乘. 十方

世界, 量同虛空, 爲佛境界. 故一切諸佛, 及以衆生, 所有心境,

互相參入, 如影重重, 不說有佛無佛世界, 不說有像法末法. 如

是時分, 常是佛興, 常是正法, 此乃了義經, 但說有此方穢土,

別方淨土, 有佛無佛處所, 及像法末法, 皆爲不了義經.”

22) 부처님의 입멸 후 부처님의 가르침이 행해지는 시기를 정법(正法)・상법(像法)・

말법(末法)의 삼시(三時)로 나누었다. 이 가운데 상법(像法)과 말법(末法)은 부

처님이 계시지 않는 시기를 가리킨다. 정법시는 부처님의 가르침[敎]과 실천

[行]과 깨달음[證]이 구현되는 시기이며, 상법시는 깨달음을 얻는 사람은 없지

만 부처님의 가르침과 실천은 행해지는 시기이며, 말법시는 부처님의 가르침

만 있고, 실천과 깨달음이 없는 시기이다. 말법은 불교가 쇠퇴하는 시기이며,

이 시기를 지나서 부처님의 가르침도 없는 법멸(法滅)의 시기로 접어든다. 부

처님의 법이 전해지는 시기에 대해서는『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과 같은 초기

경전에서 이미 정법과 상법이 세상에 머무는 시기가 500세라고 표현하고 있으

며,(大3, p.672a)『법화경』의「비유품(譬喩品)」(大9, p.11c)과「상불경보살품(常不

輕菩薩品)」(大9, p.50c),『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의「여래성품(如來性品)」(大12,

p.386b)에서도 상법시대에 법이 쇠퇴해가는 것에 대해 설하고 있다.

23) 요의경(了義經)은 요의의 가르침이 설해져 있는 경전을 가리킨다. 요의(了義,

nītārtha)는 불법(佛法)의 도리를 온전하게 드러낸 것인데 반해 불요의(不了義)는

방편으로 가르침을 드러낸 것이다. 요의를 설한 가르침을 요의교(了義敎)라고

하고, 불요의를 설한 가르침을 불요의교(不了 義敎) 또는 미요의교(未了義敎)라

고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대승의 가르침을 요의교라고 하고, 소승의 가르침을

불요의교라고 구분하여 설하기도 한다.

또 말한다. “여래는 일체의 잘못된 견해로 생각이 뒤바뀐 중생들을 위해

그 모습을 나타내어 세상에 나오셔서 간략히 작은 부분 복덕의 경계를 설

하셨지만, 실제 여래는 나타나심도 없고 가심도 없다. 오직 도에 상응한 사

람만이 지혜와 경계를 스스로 알아서 여래가 나타나셨다거나 가셨다는 견

해를 내지 않고 다만 스스로 정관(定觀)24)의 두 문으로써 마음의 때를 다스

릴 뿐이다. 생각이 있고 모양이 남아있어서 아견으로 도를 구한다면 결코

상응하지 못할 것이다. 반드시 지혜로운 사람을 의지해서 스스로 교만을

꺾고 공경하는 마음이 사무치게 이르러야 비로소 정혜(定慧)의 두 문으로

결택할 수 있을 것이다.”25) 예전 성인의 가르친 뜻이 이와 같은데 어떻게

감히 잠깐 동안26)이라도 경솔하게 함부로 말하겠는가. 맹세코 요의의 간절

히 당부하는 가르침만을 따르며 권학(權學)27) 방편(方便)의 말은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又云.“ 如來, 爲一切邪見顚倒衆生, 示現出興, 略說少分福德

境界, 而實如來, 無出無沒. 唯道相應者, 智境自會, 不於如來

出興滅沒之見, 但自以定觀二門, 以治心垢. 情在相存, 我見求

道, 終不相應. 須依智人, 自摧憍慢, 敬心徹到, 方以定慧二門

決擇.” 先聖敎旨如斯, 豈敢造次, 輒有浪陳. 誓遵了義懇苦之

言, 不依權學方便之說.

24) 정관(定觀)은 정혜(定慧)을 다르게 표현한 말이다. 지눌스님은 이 책의 다섯 번

째 문답에서 『법집별행록』을 인용하여 발심에서 성불에 이르기까지 적지(寂知)

・이지(理智)・지관(止觀)・정혜(定慧)・보리열반(菩提涅槃) 등으로 과정에 따라

이름이 조금 다를 뿐이라고 하였다.(韓4, pp.702c15-703a2)

25)『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권31(大36, p.937a16-b4).

26) ‘잠깐 동안’의 원문인 조차(造次)는 조차간(造次間)으로, 다음 발을 내딛을 동안

의 짧은 시간, 곧 잠깐 사이를 뜻한다. 조차는『논어(論語)』「이인(里仁)」편의

다음 구절에서 나온 표현이다. 즉 “군자는 한 끼의 밥 먹는 사이에도 어김이 없으

니, 잠깐 사이에도 반드시 이렇게 하며 엎어지고 넘어짐에도 반드시 이렇게 하

니라.”(君子, 無終食之間, 違仁. 造次必於是, 顚沛必於是.) 지눌스님의 비문에서는

‘조차필어시(造次必於是)’가 쓰이고 있다.[『동문선(東文選)』 권117, p.23左5 참조.]

27) 권학(權學)은 권승(權乘)이라고도 하며, 방편의 가르침 또는 방편의 가르침을

배우는 이들이라는 뜻이다. 선종에서는 경전을 포함하여 모든 교학적인 가르

침을 배우는 이들을 일컫어 권학이라고 한다. 『임제록(臨濟錄)』에서는 선을 닦

는 사람은 문자 가운데서 도를 구해서는 안 된다고 경계하면서 삼승권학(三乘

權學)에서 벗어나라고 강조한다.(大47, p.502c20-22) 또한『신화엄경론(新華嚴經

論)』에서는 삼승의 가르침을 권학이라고 하였다.(大36, p.722c16-17)

우리 사문들이 비록 말법시대에 태어나 타고난 성품이 완고하고 어리석

지만, 만약 스스로 물러나 모양에 집착해서 도를 구한다면, 전부터 배워 얻

은 정혜(定慧)의 미묘한 문은 다시 어떤 사람이 행할 일이겠는가? 행하기

가 어렵다고 버려두고 닦지 않는다면 지금 익히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많

은 겁을 지내더라도 더욱 그 어려움이 있을 것이며, 만약 지금 닦기 어려

운 행을 힘써 닦는다면 닦고 익힌 그 노력 때문에 점차 어렵지 않게 될 것

이다. 옛날에 도를 이룬 사람이 범부로부터 오지 않은 이가 있었던가? 모든

경론 가운데 말세 중생이 무루도(無漏道)28) 닦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곳이

있었던가?

我輩沙門, 雖生末法, 稟性頑癡, 若自退屈, 着相求道, 則從前

學得定慧妙門, 更是何人所行之事? 行之難故, 捨而不修, 則

今不習故, 雖經多劫, 彌在其難, 若今强修難修之行, 因修習力

故, 漸得不難. 古之爲道者, 還有不從凡夫來者耶? 諸經論中,

還有不許末世衆生, 修無漏道乎?

28) 무루도(無漏道, anāsrava-mārga)는 무루정(無漏定)을 성취하여 일체의 번뇌를

벗어난 불변의 도를 말한다. 누(漏)는 마음에서 더러운 번뇌가 새어 나온다는

뜻이므로, 무루는 더러운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마음을 말한다.

『원각경(圓覺經)』에서 이르기를, “말세의 모든 중생이 마음에 허망한 생

각을 내지 않으면,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사람은 현세에 곧 보살이다’라

고 말씀하셨다.”29)라고 한다.『화엄론』에서 “만약 ‘이 법이 범부의 경계가

아니며 보살의 행할 바이다’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부처님의 지견을 없애

고 정법을 파멸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30)

圓覺經云, “末世諸衆生, 心不生虛妄, 佛說‘如是人, 現世卽菩

薩.’” 華嚴論云,“ 若言‘此法, 非是凡夫境界, 是菩薩所行,’ 當

知是人, 滅佛知見, 破滅正法.”

29)『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이하『원각경』, 大17,

p.917 b23-24).

30)『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권12(大36, p.800b28-c1).

모든 지혜 있는 사람은 응당 이와 같이 부지런히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

다. 설사 행하여 이루지 못하더라도 선한 종자를 잃지 않아서, 오히려 내세

에 훌륭한 연을 쌓고 익힘을 이룬다. 그러므로『유심결(唯心訣)』에서 “듣고

서 믿지 못하더라도 오히려 부처님 종자의 인(因)을 맺고, 배우고 아직 이

루지 못하더라도 오히려 인간과 천상의 복을 덮는다.”31)라고 말한다. 이로

말미암아 그것을 보면, 말법과 정법의 시대가 다름을 논할 것도 아니고, 자

기 마음의 어리석음과 총명함을 근심할 것도 아니다. 다만 우러러 믿는 마

음을 내어 분에 따라 수행하여 그로써 바른 인을 맺어서 겁내고 나약한 마

음을 멀리 여의어야 한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세상의 즐거움은 오래 가지

않고 바른 법은 듣기 어려우니, 어찌 그럭저럭 인생을 헛되이 보내겠는가.

諸有智者, 不應32)如是, 不勤修行. 設行不得, 不失善種, 猶成

來世, 積習勝緣. 故唯心訣云,“ 聞而不信, 尙結佛種之因, 學

而未成, 猶盖人天之福.” 由是觀之, 不論末法與正法時殊, 不

憂自心昧之與明. 但生仰信之心, 隨分修行, 以結正因, 遠離

怯33)弱. 當知. 世樂非久, 正法難聞, 豈可因循虛送人生.

31) 이 구절은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6) 선사가 저술한『영명지각선사유심결

(永明智覺禪師唯心訣)』(이하 『유심결』, 大48, p.996c21)에서 인용한 것으로,

마지막 구절의 내용이 좀 다르다. 원문에서는 “오히려 인간과 천상의 복을 더한

다[猶益人天之福]”라고 하였는데, 지눌스님은 이 구절의 ‘익(益)’을 ‘개(盖)’로

바꾸어 “오히려 인간과 천상의 복을 덮는다[猶盖人天之福]”라고 하였다.

32) 저본에는「勸」으로 되어 있으나, 을본・정본에 따라「勤」으로 바꾸었다.

33) 저본에는「劫」으로 되어 있으나, 을본에 따라 「怯」으로 바꾸었다.

이와 같이 미루어 생각하니, 아주 먼 과거로부터 헛되이 온갖 몸과 마

음의 큰 고통을 받았지만 아무런 이익이 없었으며, 현재에도 헤아릴 수 없

는 핍박이 있고, 미래의 괴로움 또한 한도가 없어서 버리기 어렵고 여의기

도 어렵지만 깨달아 알지도 못한다. 하물며 이 몸의 목숨은 나고 죽음이 무

상(無常)하여 찰나도 보존하기 어려움이겠는가. 부싯돌의 불꽃과 바람 앞

의 등불과 밀려가는 파도와 지는 해로도 비유할 수 없다. 세월은 급하고 빨

라 조용히 늙음을 재촉하는데 마음[心地]은 아직도 닦지 못한 채 점점 죽음

의 문에 가까워진다. 옛날 함께 지내던 이들을 생각하니 어진 사람과 어리

석은 사람이 뒤섞여 있었지만, 오늘 아침에 손꼽아 보니 아홉 명은 죽고 한

명이 살았다. 산 사람도 저들처럼 차례로 쇠잔해 가니 앞날이 얼마이겠는

가. 오히려 다시 방자한 뜻으로 탐내고 성내고 질투하며 아만과 방일로 명

예를 구하고 이익을 구하면서 헛되이 세월만 보내며 쓸데없는 이야기로 천

하를 논한다.

如是追念, 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現在

卽有無量逼迫, 未來所苦, 亦無分齊34), 難捨難離, 而不覺知.

況此身命, 生滅無常, 刹那難保. 石火風燈 逝波殘照 不足爲

喩. 歲月飄忽, 暗催老相, 心地未修, 漸近死門. 念昔同遊, 賢

愚雜遝, 今朝屈指, 九死一生. 生者如彼, 次弟衰殘, 前去幾何.

尙復恣意, 貪嗔嫉妬, 我慢放逸, 求名求利, 虛喪天日, 無趣談

話, 論說天下.

34) 저본에는「劑」로 되어 있으나, 을본・병본・정본에 따라「齊」로 바꾸었다.

혹은 계를 지킨 덕도 없으면서 부질없이 신심어린 보시를 받고, 남의 공

양을 받으면서도 부끄러움도 없고 창피함도 없다. 이와 같은 허물이 한량

없고 가없는데 그것을 덮고 감추어서 애통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약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반드시 삼가고 조심하여 몸과 마음을 채찍질

하여 일으키며, 스스로 자기의 허물을 알아 고치고 뉘우쳐 고르고 부드럽

게 하며, 밤낮으로 부지런히 닦아 모든 괴로움에서 빨리 벗어나야 할 것이

다. 다만 부처님과 조사의 성실한 말씀을 의지하여 밝은 거울로 삼아, 자기

의 마음이 본래부터 신령스럽고 밝아 맑고 깨끗하며 번뇌의 성품이 공함을

비추어 보고, 다시 부지런히 삿되고 바름을 결택하는 [수행을] 더하니, 자

기의 견해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에 어지러운 생각이 없으며 혼침35)에 빠짐

도 없고 단견(斷見)36)도 일으키지 않으며 공(空)에도 유(有)에도 집착하지

않아서 깨달음의 지혜가 항상 밝다. 부지런히 청정한 행을 닦고 큰 서원을

세워서 널리 중생을 제도하니, 한 몸만을 위하여 홀로 해탈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或無戒德, 空納信施, 受人供養, 無慙無愧. 如是等愆, 無量無

邊, 其可覆藏, 不爲哀痛乎? 如有智者, 當須兢愼, 策發身心,

自知己過, 改悔調柔, 晝夜勤修, 速離衆苦. 但依佛祖誠實之言

爲明鏡, 照見自心, 從本而來, 靈明淸淨, 煩惱性空, 而復勤加

決擇邪正, 不執己見, 心無亂想, 不有昏滯, 不生斷見, 不着空

有, 覺慧常明. 精修梵行, 發弘誓願, 廣度群品, 不爲一身獨求

解脫.

35) 혼침(昏沈)은 혼침(惛沈, styāna)이라고도 하며, 마음을 가라앉게 하여 비발사

나(毘鉢舍那)를 방해하는 심소를 일컫는다. 즉, 몸과 마음이 혼매하고 둔감하며

침울하여 어둡게 가라앉아 적극적이고 활발함이 없게 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이는 부파의 5위75법 가운데 대번뇌지법(大煩惱地法)의 하나이며, 유식의 5위

100법 가운데 수번뇌(隨煩惱)의 하나이다.

36) 단견(斷見, uccheda-drst 3 3 3 i)은 단멸론(斷滅論)이라고도 하며, 변집견(邊執見)의

하나로 상견(常見)의 대칭어이다. 단견은 인과(因果)의 도리를 무시하고 업과

윤회를 인정하지 않으며, 목숨이 다하면 몸과 마음이 모두 사라져 공무(空無)로

돌아간다고 하는 그릇된 견해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아공(我空)에 집착하는 것

뿐만 아니라 법공(法空)에 대해 집착하는 것까지도 단견이라고 한다.[『대지도론

(大智度論)』 권26, 大25, p.254a 참조.]

만약 세간의 일에 갖가지로 얽매이거나 혹은 병의 고통으로 괴로워하거

나 혹은 삿된 악마나 귀신으로 두려워하는, 이와 같은 등으로 몸과 마음이

불안하면 시방세계의 부처님 앞에 지극한 마음으로 씻고 참회하라. 무거운

장애를 없애는 것으로써 예불과 염불을 고르게 행하여 [업장이] 녹고 [망념

이] 쉬는 때를 안다. 움직임과 고요함과 베풀어 행함과 혹 말하고 혹 침묵하

는 모든 시간 가운데 자신과 타인의 몸과 마음이 연에 따라 허깨비처럼 일

어나서 공하여 체성이 없는 것이 마치 물거품 같고 또한 구름의 그림자와

같으며, 일체의 비방하고 칭찬하며 시비하는 소리가 목구멍에서 망령되게

나오는 것이 빈 골짜기의 메아리 같고 바람소리 같음을 알지 못함이 없다.

如或世間事務, 種種牽纏, 或病苦所惱, 或邪魔惡鬼, 所能恐

怖, 如是等, 身心不安, 則於十方佛前, 至心洗懺. 以除重障,

禮念等行, 消息知時. 動靜施爲, 或語或黙, 一切時中, 無不了

知, 自他身心, 從緣幻起, 空無體性 猶如浮泡, 亦如雲影, 一切

毁譽是非音聲, 喉中妄出, 如空谷響, 亦如風聲

이와 같이 허망한 자신과 타인의 경계에서 그 근본 연유를 살펴서 치우

쳐 움직임을 따르지 않고 온 몸을 안정되고 질박하게 해서 마음의 성을 지

키고 보호하여 관조함을 더욱 늘리면, 고요하여 돌아감이 있고 편안하여

사이가 없을 것이다. 이 때가 되면 좋고 싫음이 자연히 담박해지고, 자비와

지혜가 자연히 더욱 밝아지며, 죄업이 자연히 끊어져 없어지며, 공행(功行)

이 자연히 더욱 늘어날 것이다. 번뇌가 다할 때에 생사가 곧 끊어지고, 나

고 죽음을 멸하여 마치면 고요함과 비춤이 앞에 나타나고 응하고 씀이 끝

없어서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니, 이것이 일을 마친 사람[了事人]의 분상

에서 점차 없는 가운데의 점차며 공용(功用) 없는 가운데의 공용인 것이다.

如是虛妄自他境界, 察其根由, 不隨傾動, 全身定質, 守護心

城, 增長觀照, 寂爾有歸, 恬然無間. 當是時也, 愛惡自然淡薄,

悲智自然增明, 罪業自然斷除, 功行自然增37)進. 煩惱盡時, 生

死卽絶, 生滅滅已, 寂照現前,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是爲了

事人分上, 無漸次中漸次, 無功用中功用也.

37) 저본에는「精」으로 되어 있으나, 병본・정본에 따라「增」으로 바꾸었다.

2

묻는다. 스님이 지금 해설한 것은, ‘먼저 반드시 자신의 성품이 깨끗하고

미묘한 마음임을 믿고 이해하여야 바야흐로 성품을 의지해서 선을 닦을 수

있다’는 것이니, 이는 예로부터 스스로 불심을 닦아 스스로 불도를 이루는

요긴한 방법이다. 무엇 때문에 일반적으로 선을 닦는 사람을 보면 신통과

지혜를 내지 못하는가? 만약 신통의 힘을 나타낼 수 없다면 어찌 여실하게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問曰. 汝今解說者, ‘先須信解自身性淨妙心, 方能依性修

禪,’ 是乃從上已來, 自修佛心, 自成佛道之要術也. 何故, 凡

見修禪之士, 不發神通智慧乎? 若無通力可現, 則何名如實

修行者也?

나는 웃으면서 말한다. “신통과 지혜는 스스로 불심과 법력을 바르게 믿

고 가행(加行)38)하고 공력을 씀을 따라 얻는다. 비유하자면, 거울을 가는데

더러움이 점점 없어지면 점점 밝아지고, 밝음이 나타나면 비치는 모습이

천 가지로 다른 것과 같다.〈이것은 단지 원수판사(圓修辦事)39)에 비유한 것이다.〉

만약 신해(信解)가 바르지 못하고 공행(功行)이 깊지 못해서 혼미하게 앉

아 졸면서 침묵을 지키는 것으로써 선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신통이 스스로

나타남이 있겠는가?” 예전 조사가 말하기를, “그대들은 다만 자기 성품의

바다를 향해서 여실하게 닦을 뿐 삼명(三明)과 육통(六通)40)을 바라지 말

라. 왜냐하면 이는 성인의 끄트머리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

은 마음을 알아 근본을 통달하는 것이다. 다만 그 근본을 얻는다면 그 지말

은 걱정하지 말라.”41)라고 하였다.

予笑曰.“ 神通智慧, 隨自正信佛心法力, 加行用功而得之. 比

如磨鏡, 垢漸盡而漸明, 明現則影像千差.〈此但喩圓修辦42)事也.〉

若也信解未正, 功行未深, 昏昏坐睡, 以守黙爲禪, 則何有神通

自發也?” 先德曰, “汝等, 但向自己性海, 如實而修, 不要三明

六通. 何以故, 此是聖末邊事. 如今且要, 識心達本. 但得其本,

莫愁其末.”

38) 가행(加行, prayoga)은 수행을 한층 더한다는 의미가 있으며, 일반적으로 준비

적인 행위, 준비 단계의 노력을 말한다. 곧 어떤 일을 달성하기 위한 방편수단으

로서 행하는 준비적 수행, 공용(功用)을 더하여 행한다는 의미에서 정행(正行)

에 대한 예비행을 말한다. 가행에 의해 얻은 선을 가행선(加行善), 가행에 의해

얻은 것은 가행득(加行得)이라고 한다.

39) 원수(圓修)는 원만하게 만행을 닦는 것을 말한다. 원수판사(圓修辦事)는 원교

(圓敎)에서 원만하게 만행을 닦는 측면에서 현상을 판별하는 것이다.

40) 삼명(三明, tri-vidyā)과 육통(六通, s3 ad3 -abhijñā)은 수행을 통해서 얻을 수 있

는 초인적인 능력을 가리킨다. 삼명은 숙명명(宿命明)・천안명(天眼明)・누진명

(漏盡明)의 세 가지 신통력이며, 숙명통(宿命通)・천안통(天眼通)・누진통(漏盡

通)이라고도 한다. 숙명명은 자신과 타인의 숙세의 인연을 아는 것으로, 이것에

의해 상견(常見)을 고칠 수 있다. 천안명은 자신과 타인의 미래의 과보를 아는

것으로, 이것에 의해 단견(斷見)을 고칠 수 있다. 누진명은 번뇌가 다하여 얻은

지혜로, 이것에 의해 현재의 번뇌를 끊으며 삿된 견해를 바로잡을 수 있다. 육통

은 육신통(六神通)이라고도 하며, 삼명에 신족통(神足通)・천이통(天耳通)・타심

통(他心通)의 세 가지를 더한 것이다. 신족통은 자유로이 원하는 곳에 나타나는

능력이며, 천이통은 보통사람이 들을 수 없는 것을 듣는 능력이며, 타심통은 타

인의 생각을 아는 능력이다.[『구사론(俱舍論)』 권27, 大29, pp.142c-143c 참조.]

41)『원주앙산혜적선사어록(袁州仰山慧寂禪師語錄)』(大47, p.586a3-7).

42) 저본에는 「辨」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을본・병본에 따라 「辦」으로 바꾸었다.

“사산인(史山人)이 규봉종밀(圭峰宗密)43) 선사에게 묻는다. ‘무릇 마음

닦는 법은 마음을 깨달으면 바로 마치게 됩니까, 따로 행하는 문이 있습니

까? 만약 따로 행하는 문이 있다면, 어찌 선문의 돈지(頓旨)라고 합니까?

만약 마음을 깨달으면 곧 마친다면, 어찌 신통광명이 드러나지 못합니까?’

[종밀선사가] 답한다. ‘얼음 연못이 전부 물인 줄은 알지만 태양의 기운을

빌어서 녹고, 범부가 그대로 참임을 알지만 법력을 의지해서 닦고 익힌다.

얼음이 녹으면 물이 윤택하게 흘러 비로소 물을 대고 씻는 공을 드러내고,

망령됨이 다하면 마음이 신령스럽게 통하여 비로소 신통 광명의 감응을 나

타낸다. 마음 닦는 것 이외에 따로 행하는 문이 없다.’”44)

“史山人, 問圭峰宗密禪師, ‘凡修心地之法, 爲當悟心卽了, 爲

當別有行門? 若別有行門, 何名禪門頓旨? 若悟心卽了, 何不

發神通光明?’ 答曰.‘ 識氷池而全水, 藉陽氣而鎔銷, 悟凡夫

而卽眞, 資法力而修習. 氷銷則水流潤, 方呈漑滌之功, 妄盡則

心靈通, 始發通光之應. 修心之外, 無別行門.’”

43) 규봉종밀(圭峯宗密, 780~841)은 중국 화엄종의 제5조이며, 그의 생애에 관한 자

료는 배휴(裵休)가 지은「규봉선사비명병서(圭峯禪師碑銘幷序)」를 비롯하여 약

30종이 있다. 속성은 하(何)씨이고, 780년에 과주(果州) 서충현(西充縣)의 명문

가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유학을 배워 일찍이 진사에 올랐으나 수주도

원(遂州道圓) 선사를 만나 출가하였다. 종밀선사는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원각경(圓覺經)』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으며, 다시 징관(澄觀)의 화엄관련 저술

을 통해 확연히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에 그는 징관에게 사사하고 중국 화엄종

조가 되었다. 회창(會昌) 원년(841) 1월 6일 흥복탑원(興福塔院)에서 좌탈하였

으며, 선종(宣宗)이 정혜선사(定慧禪師)라고 시호하였다. 그의 저서로는『원각

경대소초(圓覺經大疏抄)』,『선원제전집(禪源諸詮集)』,『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

詮集都序)』,『원인론(原人論)』,『중화전심지선문사자승섭도(中華傳心地禪門師

資承襲圖)』등이 있다.[『송고승전(宋高僧傳)』권6(大50, pp.741c-742c)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권13,「종남산규봉종밀선사(終南山圭峯宗密禪師)」

(大51, pp.305c-308c6) 참조.]

44) 이 문답은『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권13의「종남산규봉종밀선사(終南山圭峯

宗密禪師)」에 나오지만(大51, p.307b13-19), 사산인(史山人)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사산인과 종밀선사의 열 가지 문답은 『오등회원(五燈會元)』 권2의「종남

산규봉종밀선사」(卍138, pp.73a13-74b6)와『능엄경종통(楞嚴經宗通)』권10(卍25,

pp.403b2- 404a17) 등에도 전체 또는 일부가 수록되어 있다.

이로써 마땅히 알아야 한다. 상호나 신통을 걱정하지 말고, 먼저 반드시

자기의 마음을 돌이켜 비추어서 신해가 참되고 바르며 단견과 상견에 떨어

지지 않고, 정혜(定慧)의 두 문에 의지하여 모든 마음의 때를 다스림이 곧

그 마땅함이다. 만약 신해가 바르지 못하면, 닦는 바 관행도 모두 무상에

속해서 마침내 물러나 잃게 될 것이다. 이것이 어리석은 범부의 관행이니,

어찌 지혜로운 사람의 행이라 하겠는가.

以是當知. 不愁相好及與神通, 先須返照自心, 信解眞正, 不落

斷常, 依定慧二門, 治諸心垢, 卽其宜矣. 若也信解未正, 所修

觀行, 皆屬無常, 終成退失. 是謂愚夫觀行, 豈爲智人之行哉.

저 교가(敎家)에서도 또한 관행의 깊고 얕음과 얻고 잃음을 가려서 밝힌

것이 있는데, 그 뜻이 매우 자세하다. 다만 배우는 사람이 오직 말에만 힘

써서, 혹 높이 성인의 경지로 미루고 안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구하지 않으

며, 또는 날이 오래도록 갈고 닦지도 않으면서, 그 공능만 알 뿐이다.

他敎家, 亦有簡辯觀行深淺得失, 其義甚詳. 祇爲學人, 唯攻言

說, 或高推聖境, 不能內求自心, 亦不能鍊磨日久, 知其功能耳.

또 원효(元曉)45)법사가 말씀한 것과 같다. “모든 세간의 어리석은 범부의

관행은 안으로는 마음이 있다고 헤아리며 밖으로는 모든 이치를 구한다.

구하는 이치가 미세해지면 더욱 바깥 모양을 취하기 때문에 도리어 이치

를 등지고 멀어져감이 마치 하늘과 땅 같다. 그러므로 결국에는 죽어서 끝

없는 생사를 받는다. 지혜로운 사람의 관행은 이와 상반해서, 밖으로는 모

든 이치를 잊고 안으로는 자기의 마음을 구한다. 구하는 마음이 지극해지

면 이치를 잊는 것마저 모두 다하여 취하는 바도 모두 잊고 취하는 마음까

지도 모두 없어진다. 그러므로 이치 없는 지극한 이치에 이르러 끝내 물러

남이 없어서 도리어 머무름 없는 열반[無住涅槃]46)에 머무를 수 있게 된다.

또한 소승 성인[小聖]이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먼저 일으키는 성품이 있기

때문에, 지나치게 미세한 마음이〈소승 성인은 점점 세밀해지고, 점점 미세해지고,

미세한 데서 더 미세해지는 세 가지 방편으로 들어간다.〉 마음의 사라져 없어짐을 얻

어서 지혜도 없고 비춤도 없음이 허공계와 다르지 않다. 대승 보살[大士]이

마음을 아는 것은 본래 생기는 성품이 없기 때문에, 세밀한 생각을 여의고

사라져 없어짐도 없다. 참되게 비추는 지혜[眞照智]가 있어서 법계를 증득

해 안다.”47) 이와 같이 어리석은 이와 지혜로운 이, 소승 및 대승인의 관행

의 얻고 잃음을 가리고 구별하였는데,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且如元曉法師云.“ 如諸世間愚夫觀行, 內計有心, 外求諸理.

求理彌細, 轉取外相故, 還背理去遠, 若天與地. 所以, 終退沒,

受無窮生死. 智者觀行, 與此相反, 外忘諸理, 內求自心. 求心

至極, 忘理都盡, 盡忘所取, 取心都滅. 所以, 能得至無理之至

理, 畢竟無退, 還住無住涅槃. 又復小聖計心, 先有生性故, 過

微心〈小聖, 以漸細漸微, 微微三方便得入.〉, 得心滅無, 無智無照, 不

異空界. 大士解心, 本無生性故, 離細想, 不得滅無. 眞照智在,

證會法界.” 如是辨別愚夫與智者, 小乘及大乘人, 觀行得失,

不隱微毫.

45) 원효(元曉, 617~686)는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고승으로, 생애를 알 수 있는 자

료로는『삼국유사(三國遺事)』권4의「원효불기(元曉不羈)」(韓6, pp.347b17~348

b19),『송고승전(宋高僧傳)』권4의「당신라국황룡사원효전(唐新羅國黃龍寺元

曉傳)」(大50, p.730a6~b29),『동사열전(東師列傳)』권1의「원효국사전(元曉國師

傳)」(韓10, p.996b13~c16) 등이 있다. 원효스님은 속성이 설(薛)씨이며, 어릴 때

는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라고 불렸으며, 스스로 원효라고 불렀다고 한

다. 원효스님은 15세 경에 출가하여 여러 스님들에게서 배웠으며, 현장(玄奘,

602~664)의 신유식(新唯識)을 배우기 위해 의상(義相, 625~702)스님과 함께 두

차례에 걸쳐 당나라로의 유학을 시도하였다. 원효스님은 당나라로 가는 도중에

일체가 오직 마음에 의한 것임을 깨닫고 입당(入唐)을 단념하였으며, 이후 저술

과 대중교화에 전념하였다. 그는 100여부 240여권에 달하는 많은 저술을 남겼

으며, 대표적인 것으로는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와 『대승기신론별기(大

乘起信論別記)』,『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등이

있다. 원효스님은 686년 3월 혈사(穴寺)에서 70세를 일기로 입적하였으며, 아들

인 설총이 유해를 빻아서 소상을 만든 다음 스님이 늘 주석하였던 분황사에 봉

안하였다. 원효스님의 입적 후 100여 년이 지난 애장왕대(800~808)에 「고선사

서당화상비(高仙寺誓幢和尙碑)」가 세워졌으며, 1101년 8월에 고려의 숙종은 화

쟁국사(和諍國師)라는 시호(諡號)를 추증하였다. 지눌스님은 원효스님을 효공

(曉公)이라고 지칭하기도 하였다.

46) 머무름 없는 열반[無住涅槃, apratist 3 3 hita-nirvān3 a]은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이

라고도 하며, 생사에도 열반에도 머무르지 않는 열반을 말한다. 미혹의 세계에

머무르지 않지만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중생세계에서 교화하기 때문에 열반의

경지에도 머무르지 않는 것을 일컫는다.

47) 이 부분은 현존하는 원효스님의 저술에서 찾아볼 수 없으며, 이 내용의 일부가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에도 인용되어 있다.(韓4. p.737a1-2)

이로써 알아라. 선이나 교에서, 고금에 뜻을 얻어 관행한 사람은 모두 자

기의 마음을 통달하여 망상과 반연이 본래 스스로 생겨남이 없어서, 지혜

와 지혜를 쓰는 가운데에도 그치거나 끊어짐이 없이 법계를 증득해 안다.

영원히 어리석은 범부와 소승과는 가는 길 또한 다르다. 어찌 자기의 마음

을 관하지 않아, 참되고 허망함을 가리지도 못하고 깨끗한 업을 쌓지도 못

하면서 먼저 신통 도력만 찾을 수 있겠는가? 비유하자면, 무릇 아직 배를

타는 것도 알지 못하면서 그 물 굽은 것만 원망하려는 사람이라 하겠다.48)

是知. 若禪若敎, 古今得意觀行之人, 皆達自心, 妄想攀緣, 本

自無生, 智智用中, 無有間斷, 證會法界. 永與愚夫小乘, 途路

且別. 豈可不觀自心, 不辨眞妄, 未積淨業, 而先索神通道力

耶? 比夫未解乘舟, 而欲怨其水曲者哉.

48) 현각(玄覺),『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大48, p.394c7).

3

묻는다. 만약 자기의 참 성품이 본래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진 것을 근거

로 한다면, 단지 마음의 자재함에 맡겨도 옛 [성인의] 법에 부합할 것인데,

어찌 반드시 관조하게 하여 노끈도 없는데 스스로 묶으려 하는가?

問. 若約自己眞性, 本自圓成, 但任心自在, 合他古轍, 何須觀

照, 而無繩自縛乎?

답한다. 말법시대에는 사람들이 메마른 지혜[乾慧]49)가 많아서 괴로운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 뜻을 움직이면 헛것을 받들고 거짓을 의탁하며,

말을 내면 분수를 넘고 정도를 지나쳐서, 지견이 치우치고 메말라 행하고

아는 것이 고르지 않다. 요즘 선문에서 보통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이 대부

분 이러한 병이 있다. 모두 말하기를, ‘이미 자기의 마음이 본래 깨끗하고

있고 없는 데도 속하지 않는다면, 왜 몸을 수고롭게 하여 망령되게 행하는

작용을 더함을 빌겠는가’라고 한다. 이 때문에 걸림 없이 자재한 행을 본받

아 참 수행은 놓아 버리니, 몸과 입이 단정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마

음 쓰는 것까지 구부러져, 도무지 느끼지도 알지도 못한다. 혹 어떤 이는

성인 가르침의 법상(法相)50)과 방편의 말에 집착하여 스스로 물러나고 굽

히는 생각을 내어 수고롭게 점행(漸行)을 닦지만 성종(性宗)51)을 어기고 등

져서, 여래께서 말세 중생을 위하여 열어 놓은 비밀한 가르침〈『원각경』 가운

데 특히 미묘한 뜻이 있다.〉52)이 있음을 믿지 않고 먼저 들은 것만 고집하니,

삼을 지고 금을 버림[擔麻棄金]53)이다.

答. 末法時代, 人多乾慧, 未免苦輪. 運意則承虛託假, 出語則

越分過頭, 知見偏枯, 行解不等. 近來, 禪門汎學輩, 多有此病.

皆云,‘ 旣自心本淨, 不屬有無, 何假勞形, 妄加行用?’ 是以,

效無碍自在之行, 放捨眞修, 非唯身口不端, 亦乃心行迂曲, 都

不覺知. 或有執於聖敎法相方便之說, 自生退屈, 勞修漸行, 違

背性宗, 不信有如來爲末世衆生, 開秘密之訣〈, 圓覺經中, 特有妙

旨也.〉 固執先聞, 擔麻棄金也.

49) 간혜(乾慧, śukla-vidarśanā)는 건조하여 윤기를 머금지 못한 지혜라는 뜻으로,

여러 가지 알음알이를 내지만 선정(禪定)을 닦아 실다운 것으로 하지 못한 상태

이다.『대승의장(大乘義章)』권14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비록 지혜

가 있지만 선정의 물에 의해 윤택함을 얻지 못했으므로 간혜라고 한다. 이것은

사(事)에 대한 관(觀)은 있으나, 아직 이수(理水)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또한 간

혜라고 한다.”(大44, p.755c12-13. 雖有智慧, 未得定水, 故云乾慧. 又此事觀,

未得理水, 亦名乾慧.) 이러한 지혜를 지니고 있는 지위를 간혜지(乾慧地)라고 한다.

50) 법상(法相, dhama-laks3 an3 a)은 여러 가지 법의 현상적인 특질을 일컫는 말로,

부파불교에서는 5위75법, 유식불교에서는 5위100법으로 분류하여 법의 현상을

설명하였다.

51) 성종(性宗)은 법성종이라고도 하며, 불변・평등・절대・진실의 본체나 그 도리

를 중심으로 설하는 종지를 말한다. 이에 비해 현상적인 변화・차별・상대의 모

습을 중심으로 설하는 종지를 상종(相宗), 법상종이라 한다. 삼론・화엄・선종

등은 성종, 구사・법상종 등은 상종이라 한다.

52)『원각경(圓覺經)』가운데「금강장보살장(金剛藏菩薩章)」(大17, pp.915b10-916a14)

과「미륵보살장(彌勒菩薩章)」(大17, p.916a15-c25)에서 특히 자세하게 설해져 있

다.「금강장보살장」에서는 ‘여래의 깊고 깊은 비밀한 구경방편(如來甚深祕密究

竟方便)’에 대해서 설하였고,「미륵보살장」에서는 ‘여래의 심오하고 비밀하며

미묘한 뜻(如來深奧祕密微妙之義)’을 설하였다.

53) 삼을 지고 금을 버리는 비유는『중아함경(中阿含經)』의「왕상응품(王相應品)」에

나온다.(大1, p.529b18-c18) 가족의 생계를 돌보기 위해 두 친구가 길을 떠났는

데, 여행 도중에 주인 없는 삼(麻)과 은(銀)과 금(金)을 보고서 지혜로운 친구는

지고 오던 삼과 은을 차례로 버리고 결국 금을 지고 돌아오며, 어리석은 친구는

지고 오던 삼이 아까워서 친구가 버린 삼까지 지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결국 한

사람은 부자가 되어 가족은 물론이고 거느리는 사람까지 풍족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행자들에게 공양까지 넉넉하게 해서 천상에 나는 복을 받게 되고, 한

사람은 가족들의 가난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눌스님은 바른 수

행이 있는 줄 알면서도 자기 배운 것만 고집하는 당시의 수행자들을 안타깝게

여겨 이 비유를 제시한 것이다.

지눌은 자주 이와 같은 사람들을 만나 비록 해설해 주었지만 끝내 믿고

받아들이지 않고 다만 의심과 비방만 더할 뿐이었다. 어찌 먼저 반드시 마

음의 성품이 본래 깨끗하며 번뇌가 본래 공함을 신해하고, 신해를 의지하

여 익히고 닦는데 거리끼지 않는 것과 같겠는가. 밖으로 율의(律儀)54)를 지

키지만 얽매임과 집착을 잊고, 안으로 정려(靜慮)55)를 닦지만 억누름이 아

니다. 악을 끊고 끊어도 끊음이 없고, 선을 닦고 닦아도 닦음이 없는 것을

참된 닦음과 끊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이와 같이 정혜(定慧)를 함께

실천하고 온갖 행을 가지런히 닦을 수 있다면, 어찌 한갓 침묵만 지키는 어

리석은 선과 단지 글자만 탐구하는 미친 지혜의 사람과 견주겠는가.56)

知訥頻遇如此之類, 雖有解說, 終不信受, 但加疑謗而已. 何如

先須信解心性本淨, 煩惱本空, 而不妨依解薰修者也. 外攝律

儀, 而忘拘執, 內修靜慮, 而非伏捺. 可謂於惡斷斷而無斷, 於

善修修而無修, 爲眞修斷矣. 若能如是, 定慧雙運, 萬行齊修,

則豈比夫空守黙之癡禪, 但尋文之狂慧者也.

54) 율의(律儀)는 어떠한 경우에도 악을 막고 악행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세운 규범과 위의를 말하는 것으로 계율의 의미이다.

55) 정려(靜慮, dhyāna)는 고요히 생각한다는 뜻으로, 사유수(思惟修) 또는 정(定)

으로도 쓰인다.

56) 종밀(宗密),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 권상(大48, p.399c16).

또 선을 닦는 한 문이 가장 친절하여 능히 성품 위의 무루공덕을 드러낸

다. 만약 뜻을 얻고 닦는57) 사람이라면, 모든 때에 가고 머무르고 앉고 눕

고, 혹 말하고 혹 침묵하는 생각 생각이 텅 비고 현묘하며 마음 마음이 밝

고 미묘하여 온갖 덕과 신통 광명이 모두 그 가운데서 드러난다. 어찌 도를

구하는데 본래 성품만 믿고 스스로 안주하여 정혜(定慧)를 오로지 하지 않

겠는가?

且修禪一門, 最爲親切, 能發性上無漏功德. 若得意修者, 於

一切時, 行住坐臥, 或語或黙, 念念虛玄, 心心明妙, 萬德通光,

皆從中發. 安得求道, 恃本性而自安, 不專定慧乎?

57) 뜻을 얻고 닦는 것[得意修]은 먼저 깨닫고 이 깨달음을 의지하여 닦는 수행을

가리킨다. ‘먼저 마음의 본성이 본래 깨끗하고 번뇌가 본래 공함을 신해함’이 뜻

을 얻는 것[得意]이며, ‘신해를 의지하여 익히고 닦음’이 닦는 것[修]이다. 이는

선오후수(先悟後修)를 가리키며, 돈오후수(頓悟後修), 신해후수(信解後修), 돈오

후수(頓悟後修) 등이라고도 한다.

『익진기(翼眞記)』에서 말한다. “정(定)과 혜(慧) 두 글자는 삼학(三學)의

나눈 이름이니, 갖추어 이르면 계·정·혜이다. 계는 그릇됨을 막고 악을 그

침으로써 뜻을 삼으니, 삼도(三途)58)에 떨어짐을 면한다. 정은 이치에 맞게

산란을 거둠으로써 뜻을 삼으니, 여섯 가지 욕망[六欲]59)을 뛰어넘는다. 혜

는 법을 가려서 공을 관하는 것으로 뜻을 삼으니, 미묘하게 생사에서 벗어

난다. 무루성인의 인행(因行) 중 수행이 모두 반드시 이것을 배우므로 이름

을 삼학이라 한다. 또한 이 삼학에는 수상(隨相)과 칭성(稱性)의 구별이 있

다. 수상은 위에서 설한 것과 같다. 칭성은 이치가 본래 나가 없는 것을 계

라 하고, 이치가 본래 어지러움이 없는 것을 정이라 하며, 이치가 본래 미

혹이 없는 것을 혜라고 한다. 다만 이 이치를 깨달으면 곧 참된 삼학이다.

翼眞記云.“ 定慧二字, 乃三學之分稱, 具云戒定慧. 戒以防非

止惡爲義, 免墮三途. 定以稱理攝散爲義, 能超六欲. 慧以擇法

觀空爲義, 妙出生死. 無漏聖人, 因中修行, 皆須學此, 故名三

學. 又此三學, 有隨相稱性之別. 隨相如上說. 稱性者, 理本無

我, 戒也, 理本無亂, 定也, 理本無迷, 慧也. 但悟此理, 卽眞三

學耳.”

58) 삼도(三途)는 삼악도(三惡道)를 가리키며, 악한 행동에 대한 과보로 가야 하는

세 가지 나쁜 곳인 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이다. 지옥은 맹렬한 불길

이 타오르므로 화도(火途)라고 하며, 아귀는 칼 막대기로 박해를 당하는 곳이므

로 도도(刀途)라고 하며, 축생은 서로 잡아먹는 곳이므로 혈도(血途)라고 한다.

59) 여섯 가지 욕망[六欲]은 기쁨・노여움・슬픔・즐거움・좋아함・싫어함 등의 여섯

가지 감정, 또는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뜻[意]의 여섯 가지 감

각으로 느끼는 욕망을 말한다.『마하지관(摩訶止觀)』권6에서는 범부가 이성(異

性)에 대해서 갖는 여섯 가지 욕망으로, 색욕(色欲)・형모욕(形貌欲)・위의욕(威

儀欲)・언어음성욕(言語音聲欲)・세활욕(細滑欲)・인상욕(人相欲) 등의 여섯 가

지를 말하고 있다.(大46, p.70a-b)

예전 대덕이 “나의 법문은 옛 부처님께서 전해 주셨지만, 선정과 정진을

논하지 않고 오직 부처님의 지견을 통달할 뿐이다”60)라고 말하였다. 이것

은 다만 수상의 상대해 다스리는 이름을 타파한 것이지 칭성의 삼학을 무

너뜨린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육조[曹溪]스님61)이 “마음에 그름 없음이 자

성의 계이며, 마음에 어지러움 없음이 자성의 정이며, 마음에 어리석음 없

음이 자성의 혜이다”62)라고 말한 것이다. 또 “선이라고 말한 바는 얕음이

있고 깊음이 있다. 외도선, 범부선, 소승선, 대승선, 최상승선을 말한다”63)

라고 하였으니, 자세한 것은 『선원제전집(禪源諸詮集)』에 실린 것과 같다.

지금 논하는 바, 마음의 성품이 본래 깨끗하고 번뇌가 본래 공하다는 뜻은

최상승선에 해당한다. 그러나 공(功)을 쓰는 문 가운데 처음 발심한 사람은

방편승[權乘]의 상대해 다스리는 뜻이 없지 않다. 그러므로 이『권수문』

안에는 방편과 진실을 아울러 펴서 알지 못할 수 없게 하였다.

先德曰, “吾之法門, 先佛傳授, 不論禪定精進, 唯達佛之知

見.” 此卽但破隨相對治之名, 不壞稱性三學. 故曺溪云, “心地

無非自性戒, 心地無亂自性定, 心地無癡自性慧.” 此之是也.

又,“ 所言禪者, 有淺有深. 謂外道禪, 凡夫禪, 二乘禪, 大乘禪,

最上乘禪.” 廣如禪源諸詮集所載. 今之所論, 心性本淨, 煩惱

本空之義, 是當最上乘禪. 然於用功門中, 初心之人, 不無權乘

對治之義. 故此勸修文內, 權實竝陳, 不可不知也.

60)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14,「석두희천대사(石頭希遷大師)」(大51, p.309b13-15).

61) 육조[曹溪]스님은 대감혜능(大鑒慧能, 638~713), 즉 중국 선종의 제6조로 추앙되

는 혜능을 말한다. 조계(曹溪)는 중국 광동성 소주의 쌍봉산 아래로 흐르는 냇

물을 일컫는 말로, 이 냇물이 조후(曹侯)의 무덤을 지나가므로 조계라고 불렀다

고 한다. 677년에 혜능이 조숙량(曺叔良)으로부터 이 땅을 얻어 보림사(寶林寺)

를 짓고 선풍을 드날리자 이후로 혜능의 법을 일컬어 조계(曹溪)라고 하였다.

62)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이하 『육조단경』, 大48, p.358c12).

63) 이 부분은『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권상에 나온 내용을 간추린 것이

다.(大48, p.399b12-22) 여기에서는 선의 종류를 다섯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①외도선(外道禪)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높은 것을 좋아하고 낮은 것을 싫

어하며 닦는 선이며, ②범부선(凡夫禪)은 바르게 인과를 믿고 또한 좋고 싫은 것

으로써 닦는 선이며, ③소승선(小乘禪)은 아공(我空)의 이치만을 깨닫고 닦는

선이며, ④대승선(大乘禪)은 아공(我空)・법공(法空)의 이치를 모두 깨닫고 닦는

선이며, ⑤최상승선(最上乘禪)은 자기 마음이 본래 청정하며 번뇌 없는 지혜의

성품을 본래 스스로 구족하여 이 마음이 곧 부처이어서 결국 다름이 없다는 것

을 깨닫고 닦는 선이다. 최상승선이 여래청정선이고 일행삼매이며 진여삼매이

어서 이것이 모든 삼매의 근본이다.

정(定)과 혜(慧)가 이름과 뜻은 비록 다르지만 중요한 것은 각자의 신심

이 물러나지 않고 자기를 이겨 성취를 이루는데 있다.『지도론(智度論)』에

서 말하기를, “만약 세간의 가까운 일을 구하더라도 오로지 정밀하게 하지

않으면 맡은 일을 이루지 못하나니, 하물며 위없는 보리(菩提)64)를 배우는

데 선정을 쓰지 않겠는가.”65)라고 한다. 게송으로 말하기를, “선정의 금강

갑옷은 번뇌의 화살을 막을 수 있고, 선은 지혜를 지키는 곳간이며 공덕의

복전이다. 자욱한 먼지가 하늘의 해를 가리면 큰 비가 그것을 씻고, 느끼고

보는 바람이 마음을 흩으면 선정이 그것을 없앨 수 있다.”66)라고 한다.

定慧名義雖殊, 要在當人, 信心不退, 剋己成辨耳. 智度論云,

“若求世間近事, 不能專精, 事業不成, 況學無上菩提, 不用禪

定.” 偈云, “禪定金剛鎧, 能遮煩惱箭, 禪爲守智藏, 功德之福

田. 囂塵蔽天日, 大雨能淹67)之, 覺觀風散心, 禪定能滅之.”

64) 보리(菩提, bodhi)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는 불교의 이상인 불타 정각

의 지혜, 즉 불과(佛果)를 의미한다. 두 번째는 불타 정각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닦는 도(道), 즉 불과에 이르는 길을 의미한다.

65)『대지도론(大智度論)』 권17(大25, p.180c12-13).

66)『대지도론(大智度論)』 권17(大25, p.180c18-25).

67) 저본에는「掩」으로 되었으나『대지도론』에 따라「淹」으로 바꾸었다.

『대집경(大集經)』에서 이르기를, “선과 서로 응하는 사람이 나의 참된 자

식이다.”68)라고 한다. 게송으로 말하기를, “한가롭고 고요하며 함이 없는 부

처님의 경계, 그 곳에서 능히 깨끗한 보리를 얻을 수 있다. 만약 선에 머무

르는 이를 헐뜯고 비방하는 이가 있다면, 이는 모든 여래를 헐뜯고 비방한

다고 이름한다.”69)라고 한다.『정법념경(正法念經)』에서 이르기를, “온 세상

사람의 목숨을 구제하는 것이 한 번 밥 먹는 사이에 단정한 마음으로 뜻을

바르게 하는 것만 못하다.”70)라고 한다.『기신론(起信論)』에서 말한다. “만

약 어떤 사람이 이 법을 듣고서 겁내거나 나약한 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마

땅히 알아라, 이 사람은 결정코 부처님의 종자를 이어서 필히 모든 부처님

의 수기(授記)71)하는 바가 된다. 가령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중생들을 교화하여 십선(十善)72)을 행하게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한 번 밥

먹는 사이에 이 법을 바르게 생각하는 것만 같지 못하니, 앞의 공덕보다 더

나아서 비유할 수 없다.”73) 이로써 알아야 한다. 이를 의지해서 수행하는

모든 선한 공덕은 이루 말할 수 없다.

大集經云, “與禪相應者, 是我眞子.” 偈云, “閑靜無爲佛境界,

於彼能得淨菩提, 若有毁謗住禪者, 是名毁謗諸如來.” 正法

念經云,“ 救四天下人命, 不如一食頃, 端心正意.” 起信論云.

“若人聞是法已, 不生怯弱, 當知是人定紹佛種, 必爲諸佛之所

授記. 假使有人, 能化三千大千世界滿中衆生, 令行十善, 不如

有人, 於一食頃, 正思此法, 過前功德, 不可爲喩.” 是知. 依此

修行, 諸善功德, 不可勝言.

68)『대방등대집경(大方等大集經)』권46(大13, p.302a29).

69)『대방등대집경(大方等大集經)』권46(大13, p.303a12-13).

70) 이 부분은『정법념경』에서 확인할 수 없지만, 연수선사가 저술한『만선동귀집

(萬善同歸集)』에 보인다.(大48, p.974b17-18) 지눌스님이 인용한 구절이『정법

념경(正法念經)』에서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이 경전이『정법념처경(正法念處

經)』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종밀선사의 『원각경도량수증

의(圓覺經道場修證儀)』에서『정법념경』을 출전으로 밝힌「무상송(無常頌)」(卍

128, pp.943b17-944a4)이『정법념처경』의「관천품(觀天品)」에 나오는 내용(大17,

p.151a9-18)과 대응하므로 『정법념처경』이 『정법념경』으로 불린 것은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대주간정중경목록(大周刊定衆經目錄)』에서는『정법념처경』

에 수록된 『선시아왕경(善時鵝王經)』이 이전에는『정법념경』에서 나왔다(大55,

p.417a7-8)고 하였지만,『개원석교록(開元釋教錄)』(大55, p.616b10-11)과『정원신

정석교목록(貞元新定釋教目錄)』(大55, p.949b21-23)에서는 『정법념처경』을 소개

하면서『대주록』에서『정법념경』이 거듭 번역된 것으로 기록한 것은 잘못이고,

『선시아왕경』은『정법념처경』에서 나왔으며,『정법념경』은 별행경이라고 하였

다. 따라서 지눌스님이 인용한『정법념경』이 어떤 경전을 가리키는지 명확히 알

수 없다.

71) 수기(授記, vyākaran3 a)는 수기(受記), 기별(記別), 기설(記說)이라고도 하며, 부

처님이 제자에게 미래에는 부처를 이룰 것이라는 보증을 주는 것을 말한다.

72) 십선(十善)은 열 가지의 선한 행위, 즉 십선업(十善業, daśakuśala-karma)으로

몸[身]・말[口]・뜻[意]의 세 가지 업(業)으로 행하는 열 가지의 선한 행위를 말

한다. 십선업도(十善業道)・십선도(十善道)・십선근본업도(十善根本業道)・십백

업도(十白業道)라고도 하며, 십악(十惡)의 반대이다. 열 가지 선한 행위는 ①생

명을 죽이지 않음[不殺生], ②도둑질하지 않음[不偸盜], ③사음하지 않음[不邪

淫], ④거짓말하지 않음[不妄語], ⑤이간질하지 않음[不兩舌], ⑥나쁜 말을 하지

않음[不惡 口], ⑦꾸미는 말을 하지 않음[不綺語], ⑧탐욕하지 않음[不貪欲], ⑨화

내지 않음[不瞋恚], ⑩삿된 견해를 품지 않음[不邪見]이다.

73)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大32, p.583a26-b01).

만약 선으로 생각을 고요히 하지 못한다면 업식(業識)74)이 아득하여 의

거할 만한 근본이 없다. 목숨을 마칠 때에 이르면 바람기운・불기운이 핍박

하여 사대(四大)가 흩어지고, 마음은 미쳐 초조하고 답답하며, 전도되어 견

해가 어지러워 위로는 하늘을 뚫을 계책이 없고 아래로는 땅으로 들어갈

꾀도 없으니, 당황하고 두려워 의지하고 기댈 바를 잃는다. 앙상한 몸의 쓸

쓸함은 마치 매미의 허물 같다. 미혹의 길이 아득히 이어져 외로운 혼이 홀

로 간다. 비록 보배로운 노리개나 진귀한 재물이 있다 해도 하나도 가져갈

것 없고, 비록 훌륭한 가문이나 권속이 있다 해도 마침내 한 사람도 뒤쫓아

서 구제하고 보호해줄 사람이 없다. 이것을 일러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는

것이어서 바꾸어 대신할 사람이 없다고 한다. 이러한 때를 당해서는 장차

어떤 안목으로써 고해(苦海)의 나루와 다리로 삼겠는가. 조그마한 유위(有

爲)의 공덕이 있어서 이 근심과 어려움을 면할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若不安禪靜慮, 業識茫茫, 無本可據. 臨命終時, 風火逼迫, 四

大離散, 心狂熱悶, 顚倒亂見, 上無衝天之計, 下無入地之謀,

慞惶恐怖, 失所依憑. 形骸蕭索, 猶如蟬蛻. 迷途綿邈, 孤魂獨

逝. 雖有寶翫珍財, 一無將去, 雖有豪族眷屬, 竟無一人追隨救

護者. 是謂自作自受, 無人替代矣. 當是時也, 將何眼目, 以爲

苦海之津梁. 莫言有少分有爲功德, 免此患難.

74) 업식(業識)은 숙업(宿業)의 인(因)에 의하여 감득한 심식(心識)으로 범부의 마

음을 말한다. 선업・악업에 의해서 초래된 과보로서의 식(識)이다.『대승기신론

(大乘起信論)』에서는 무명(無明)의 힘으로 불각(不覺)의 마음이 움직여서 보고

나타나고 경계를 취하고 생각을 일으켜 이어지게 하는 것을 의(意)라 하는데,

이 의(意)의 다섯 가지 이름 가운데 무명의 힘으로 불각의 마음이 움직이는 최

초의 것을 업식이라고 하였다.(大32, p.577b7)

백장(百丈)75)화상이 말한다. “비록 복과 지혜와 많이 들음이 있다고 해

도 모두 서로 구제하지 못하며, 마음의 눈이 아직 열리지 못하여 오직 모든

경계를 연해서 생각할 뿐 반조할 줄 모르고, 또한 부처님의 도를 보지 못

한다. 일생에 있었던 악업이 모두 앞에 나타나면 혹은 두려워하고 혹은 기

뻐하며, 육도(六道)76)와 오온(五蘊)77)이 앞에 나타나면 모두를 꾸며진 좋은

집과 저택, 배와 수레, 광명이 빛나는 것으로 보아 자기의 마음을 어지럽게

한다. 탐착과 애욕으로 본 바가 모두 바뀌어 좋은 경계로 되고, 보는 바에

따라 무거운 곳에서 생을 받으니 도무지 자유로운 여지가 없어서 용과 가

축, 양민과 천민 또한 모두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78) 그러므로 무릇 높은

식견과 원대한 뜻이 있는 사람은 먼저 반드시 삼세의 업보가 털끝만큼도

어긋나지 않아서 도망할 땅이 없음을 깊이 살펴야 한다. 지금 만약 연이 어

긋나 닦아 나아갈 수 없다면 나중에 반드시 괴로움을 받을 것이니, 진실로

불쌍할 따름이다.

百丈和尙云.“ 縱有福智多聞, 都不相救, 爲心眼未開, 唯緣念

諸境, 不知返照, 復不見佛道. 一生所有惡業, 悉現於前, 或怖

或欣, 六道五蘊現前, 盡見嚴好舍宅, 舟船車輿, 光明現赫, 爲

縱自心. 貪愛所見, 悉變爲好境, 隨所見, 重處受生, 都無自由

分, 龍畜良賤, 亦摠未定.” 是以凡有高識遠志之人, 先須深觀,

三世業報, 毫髮不差, 無地可逃. 今若緣差, 不能進修, 後必受

苦, 良可傷哉.

75) 백장(百丈)은 백장회해(百丈懷海, 749~814)를 가리키며, 성은 왕(王)씨이고, 법

명은 회해(懷海), 호는 백장(百丈)이며, 시호는 대지(大智)・각조(覺照)・홍종묘

행(弘宗妙行)이며, 탑호는 대보승륜(大寶勝輪)이다. 20세에 출가하여 마조도일

(馬祖道一, 709~788) 선사의 법을 이었다. 최초로 중국 선종의 청규(淸規)를 제

정하여 선종을 독립된 교단으로 만들었으며,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

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법어로 유명하다. 백장회해는 남전보원(南泉普願),

서당지장(西堂智藏)와 함께 마조도일 문하의 뛰어난 3대 제자로 알려졌으며, 그

의 제자로는 위산영우(潙山靈祐)와 황벽희운(黃檗希運) 등이 있다.[『경덕전등록

(景德傳燈錄)』 권6의「홍주백장산회해선사(洪州百丈山懷海禪師)」(大51, pp.

249b26-250c26) 참조.]

76) 육도(六道)는 중생의 업에 따라 윤회하는 길을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

生),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의 여섯 가지로 나눈 것이다.

77) 오온(五蘊, pañca-skandha)은 오음(五陰)이라고 하며, 다섯 개의 집합 또는 다

섯 종류의 무리라는 뜻이다. 즉, 물질계와 정신계를 색(色)・수(受)・상(想)・행

(行)・식(識)의 다섯 가지로 분류한 것이다.

78)『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6,「홍주백장산회해선사(洪州百丈山懷海禪師)」

(大51, p.250b29-c5).

곧 초저녁이나 밤중이나 새벽에 고요히 연을 잊고 우뚝하게 단정히 앉

아 바깥 모양을 취하지 않고 마음을 거두어 안으로 비추어야 한다. 먼저 적

적(寂寂)으로써 반연하는 생각[緣慮]을 다스리고, 다음으로 성성(惺惺)으

로써 혼침(昏沈)을 다스려라. 혼침과 산란을 고르게 조화하여 취하고 버리

는 생각이 없이 마음을 분명하고 분명[歷歷]하게 하면 확연히 어둡지 않아

망념 없이 안다. 거기서 들은 바가 아니라면 모든 경계를 결코 취해서는 안

된다. 만약 세상의 연을 따라서 베풀어 짓는 바가 있다면, 모두 마땅히 지

어야 할 것과 짓지 말아야 할 것을 관찰해서 온갖 행을 어긋남이 없이 하

라. 비록 짓는 바가 있더라도 텅 비고 밝음을 잃지 않아서 맑게 항상 머물

러야 한다.

卽於初中後夜, 闃爾忘緣, 兀然端坐, 不取外相, 攝心內照. 先

以寂寂, 治於緣慮, 次以惺惺, 治於昏沈. 均調昏散, 而無取捨

之念, 令心歷歷, 廓然不昧, 無念而知. 非彼所聞, 一切境界,

終不可取. 若隨世緣, 有所施作, 悉當觀察應作不應作, 萬行無

癈. 雖有所作, 不失虛明, 湛然常住.

일숙각(一宿覺)79)이 말한다. “적적(寂寂)은 바깥 경계의 좋고 나쁜 등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 성성(惺惺)은 혼침에 머무름・무기(無

)80) 등의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만약 적적하고 성성하지 않으면

이는 혼침에 머묾이며, 성성하고 적적하지 않으면 이는 반연하는 생각이

다. 적적하지 않고 성성하지도 않으면 이것은 반연하는 생각일 뿐만 아니

라 또한 혼침에 들어 머무는 것이다. 또한 적적하고 또한 성성하면, 분명하

고 분명[歷歷]할 뿐만 아니라 아울러 적적한 것이니, 이것이 근원으로 돌아

간 미묘한 성품이다.”81)

一宿覺云.“ 寂寂謂不念外境善惡等事, 惺惺謂不生昏住無記

等相. 若寂寂不惺惺, 此乃昏住, 惺惺不寂寂, 此乃緣慮. 不寂

寂不惺惺, 此乃非但緣慮, 亦乃入昏而住. 亦寂寂亦惺惺, 非唯

歷歷, 兼復寂寂, 此乃還源之妙性也.”

79) 일숙각(一宿覺)은 영가현각(永嘉玄覺, 675~713) 선사를 가리키며, 그는 절강성

(浙江省) 온주부(溫州府) 영가현(永嘉縣) 사람이다. 속성은 대(戴)씨이고, 이름

은 현각(玄覺), 자는 명도(明道), 별호는 일숙각(一宿覺), 시호는 무상대사(無相

大師), 또는 진각대사(眞覺大師)이다. 현각스님은 어려서 출가하여 삼장에 해

박하였고, 특히 천태지관(天台止觀)에도 정통하여 선관을 잘 닦았다. 좌계현랑

(左溪玄朗, 673~754)의 권유로 동양현책(東陽玄策)과 함께 조계혜능을 참방하

여 곧 인가를 받았으며, 인가받는 날 혜능의 권유로 하루를 묵었기 때문에 일숙

각(一宿覺)으로 불렸다. 용주 용흥사(龍興寺) 별원(別院)에서 세수 49세로 입적

하였으며, 저서로는『증도가(證道歌)』와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이 있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5의 「온주 영가현각선사(溫州永嘉玄覺禪師)」

(大51, pp.241a27-242b19) 참조.]

80) 무기(無記, avyākr3 ta)는 선(善)도 아니고 불선(不善)도 아닌 것으로, 선과 악을

기억하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무기라고 하며, 혹은 선악의 인과를 느끼지 못

하거나 이숙(異熟)의 과(果)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기라고 한다.

81)『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大48, p.390b20-23).

『십의론주(十疑論註)』에서 말한다. “무념(無念)82)은 곧 진여삼매(眞如三

昧)이다. 바로 반드시 성성하고 적적하여 반연을 일으키지 않고 진실한 모

습과 상응한다.”83) 예전 대덕이 말하기를, “범부는 생각이 있고 앎이 있으

며, 이승은 생각이 없고 앎이 없으며, 모든 부처님은 생각 없이 안다.”84)

고 하였다. 위와 같은 가르침이 마음 닦는 사람이 정(定)과 혜(慧)를 고르

게 지녀 불성(佛性)을 밝게 보는 미묘한 문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간절히

반드시 자세히 살펴야 할 것이니, 어찌 헛되이 대의만을 드러내고 문득 수

행은 버리겠는가.〈정(定)과 혜(慧)를 고르게 지니는 데는 다섯 가지 일으키는 마음과

여섯 가지 헤아려 구분하는 것이 있다.85) 대의가 여기에 있으니, 생각해 보라.〉

十疑論註云.“ 無念者, 卽是眞如三昧. 直須惺惺寂寂, 不起攀

緣, 實相相應.” 先德云. “凡夫有念有知, 二乘無念無知, 諸佛

無念而知.” 如上言敎, 是修心人, 定慧等持, 明見佛性之妙門

也. 有智之人, 切須審詳, 豈可徒標大意, 而便棄修行耶. 〈定慧

等持, 有五種起心, 六種料簡. 大意此在, 思之.〉

82) 무념(無念)은 마음에 망념이 없음을 말한다.『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마음에 시작 없는 무명(無明)이 생겨나는 처음을 아는 것을 무념이라고 하였

다.(大32, p.576b27-28)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는 모든 법에 마음이 물들어

집착하지 않는 것을 무념이라 하며, 육진(六塵)에 물들지 않는 반야삼매(般若三

昧)로 자재하고 해탈하는 행을 무념행이라 하며, 무념의 법을 깨달은 사람이 불

지(佛地)에 이른다고 하였다.(大48, p.351a25-b5)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

序)』에서는 공적(空寂)의 마음을 돈오하여 모든 모양이 공함을 깨달으면 마음

이 스스로 무념이 된다고 하고 온갖 수행이 무념을 근본으로 한다고 하였다.(大

48, p,403a3-10)

83) 이 구절은 천태지자(天台智者) 대사의 설에 징혹(澄彧)이 주석을 붙인『주십의

론(注十疑論)』 권1(卍107, p.730a1-12)에서 인용한 것이다.

84) 이 구절은 연수(延壽)의『주심부(註心賦)』권3에 나오는 ‘무념이지(無念而知)’

에 대한 주석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즉 “생각 없이 안다는 것은, 중생은 생

각이 있어서 알며, 성문은 생각도 없고 앎도 없으며, 보살은 생각 없이 안다.”(卍

111, p.84a7-8. 無念而知者, 衆生有念而知, 聲聞無念無知, 菩薩無念而知.) 지눌스님

은 원문의 ‘중생・성문・보살’을 각각 ‘범부・이승・제불’로 바꾸었다.

85)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의「사마타송(奢摩他頌)」에서는 마음 닦는 수행에 처

음 발심한 사람이 입문한 후에 정(定)과 혜(慧)를 고르게 닦는 수행의 과정을 자

세히 밝히고 있다.(p.390a23-c18) 처음 입문해서는 고기(故起)・관습(串習)・접속

(接續)・별생(別生)・즉정(即靜) 등의 다섯 가지 생각을 그쳐서[五念停息] 일념상

응(一念相應)을 이루고, 일념상응을 이루었을 때 식병(識病)・식약(識藥)・식대

치(識對治)・식과생(識過生)・식시비(識是非)・식정조(識正助) 등의 여섯 가지

헤아려 구분해야 할 것을 반드시 알고 닦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다섯 가지 생각

이 곧 한 생각이라고 아는 일념상응의 일념은 바로 신령스럽게 아는 자성[靈知

之自性]이다. 일념상응이 이루어졌을 때, 여섯 가지 헤아려 구분하는[六種料簡]

수행을 통해 마음의 성성적적(惺惺寂寂)을 이룬다.

 

4.

묻는다. 모든 부처님의 미묘한 도는 깊고 넓어서 생각하기 어렵다. 지금

단지 말세 중생들에게 자기의 마음을 관조하여 불도를 바라게 하였으니,

스스로가 뛰어난 근기가 아니라면 의심과 비방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問曰. 諸佛妙道, 深曠難思. 今只令末世衆生, 觀照自心, 而希

佛道, 自非上根, 未免疑謗.

나는 웃으며 말한다. 앞에서 물은 뜻은 어찌하여 스스로를 높였으며, 지

금 물음은 어찌하여 스스로를 낮추는가? 여러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에게

말하겠다.

予笑曰. 前來問意, 何爲自高, 此問, 何爲自卑? 且莫草草. 吾

語汝.

마명(馬鳴)86)보살이 백 가지 대승경전을 뽑고 요약하여『기신론』을 짓고

바로 나타내어 말한다. “말하는 바 법이라는 것은 중생심을 말한다. 이 마

음이 곧 모든 세간과 출세간의 법을 포섭한다. 이 마음을 의지하여 마하연

(摩訶衍)87)의 뜻을 나타내 보인다.”88) 대개 중생이 자기의 마음이 신령스럽

고 미묘하며 자재함을 모르고, 밖을 향해서 도를 구하는 것을 걱정하였을

따름이다.

馬鳴菩薩, 撮略百本大乘經典, 造起信論, 直標云. “所言法者,

謂衆生心. 是心, 卽攝一切世間出世間法. 依於此心, 顯示摩訶

衍義.” 盖恐衆生, 不知自心靈妙自在, 向外求道耳.

86) 마명(馬鳴, aśvaghos3 a) 보살은 중인도의 마갈타국 사람으로, 불멸 후 600년경

에 출세한 대승의 논사이다. 마명보살은 외도(外道)의 집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불법을 비방하였으나 협존자(協尊者)의 설득에 감복하여 그의 제자가 되어 불

교를 배웠다. 북쪽 월지국에서 대승을 널리 가르쳤으므로 대승불교의 시조로

추앙되었으며, 대표적인 저술은『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다.[『마명보살전(馬

鳴菩薩傳)』(大50, pp.183a-184a) ;『부법장인연전(付法藏因緣傳)』권5(大50,

pp.314c-315a) 참조.]

87) 마하연(摩訶衍)은 마하연나(摩訶衍那, mahāyāna)를 줄인 말이며, 대승(大乘)으

로 의역하여 많이 쓰인다. 대승에서 승(乘)은 타는 것이란 뜻이며, 미혹의 세계

로부터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는 가르침을 의미한다.

88)『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大32, p.575c21-23).

『원각경』에서 이르기를, “모든 중생의 갖가지 환(幻)같은 변화가 모두 여

래의 원만한 깨달음의 미묘한 마음[圓覺妙心]에서 생기는 것이 마치 허공

꽃이 허공으로부터 있는 것과 같다”89)라고 한다. 배상국(裵相國)90)이 말하

기를, “혈기로 된 무리는 필히 앎이 있다. 무릇 앎이 있는 것은 필히 본체가

같다. 말하자면, 참되고 맑고 밝고 미묘하며, 텅 비고 사무쳐서 신령스럽게

통하며, 우뚝 홀로 높은 것이다. 그것을 등지면 범부며, 그것을 따르면 성인

이다.”91)라고 하였다. 운개지(雲盖智)92) 선사가 항상 문인들에게 말하기를,

“다만 마음만 속이지 말라. 마음은 스스로 신령스럽고 성스럽다.”93)라고 하

였다.

圓覺經云, “一切衆生種種幻化, 皆生如來圓覺妙心, 猶如空花

從空而有.” 裴相國云, “血氣之屬, 必有知. 凡有知者, 必同體.

所謂眞淨明妙, 虛徹靈通, 卓然而獨尊者也. 背之則凡, 順之則

聖.” 雲盖智禪師, 常謂門人曰,“ 但莫瞞心, 心自靈聖.”

89) 『원각경(圓覺經)』(大17, p.914a10-11).

90) 배상국(裵相國)은 배휴(裴休, 797~870)를 가리키며, 그는 당(唐)나라 때 맹주제

원(孟州濟源) 사람이라고도 하고, 하동문희(河東聞喜) 사람이라고도 한다. 그는

일찍이 불교를 믿어서 규봉종밀 선사로부터 화엄을 배웠으며, 종밀선사가 저술

을 하면 항상 배휴에게 서문을 부탁하여 짓게 하였다. 또 그는 황벽희운 선사를

완릉에서 맞이하여 선에 대해서 묻고 법어를 기록하여 『완릉록』을 만들어 세상

에 유통시켰을 뿐만 아니라, 법난이 있었을 때는 중신으로써 불교를 보호하였

다. 그는 중년 이후에 육식을 끊고 향을 피우고 불경을 외워서 ‘하동대사(河東大

士)’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의 저작으로는『권발보리심문(勸發菩提心文)』1권이

있고, 희운선사의 법어를 모아 『전심법요』1권을 남겼다.[『거사분등록(居士分燈

錄)』권1의 「배휴(裴休)」(卍147, pp.876a-877a) ;『거사전(居士傳)』권13의

「배공미(裴公美)」(卍149, pp.846b-849a) 참조.]

91) 배휴(裵休),「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약소서(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略疏序)」

(大39, p.523b10-19).

92) 운개지(雲盖智) 선사에 대해서는『임간록(林間錄)』에 수록된 이 인용문과『지

월록(指月錄)』에 전하는 몇 가지 기록이 전한다. 명(明)나라 때 만들어진『선종

정맥(禪宗正脈)』에서는 황룡혜남(黃龍慧南, 1002~1069) 선사의 제자로 기록하

고 있고(卍146, p.13b12),『지월록』에서는『임간록』에서 밝힌 각범혜홍(覺範慧

洪, 1071~1128) 선사와 운개지 선사의 일화를 수록(卍143, pp.563b14-564a6)하

고 있다. 황룡혜남 선사의 제자로 추정되는 운개지 선사는 운개수지(雲盖守智,

1025~1115)라고 하지만 전기는 전하지 않는다.

93) 혜홍(慧洪),『임간록(林間錄)』 권1(卍148, p.611a11-12).

이러한 등이 모든 경론과 천하 선지식들이 남긴 말씀 가운데 미묘한 뜻

이다. 다만 그때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속이고 스스로를 감추어서 나날이

쓰면서도 스스로 믿고 스스로 닦지 않을 따름이다. 설혹 믿음이 있는 사람

이라도 결택을 더하지 못하고 생각에 따라 향하고 등져서 단견과 상견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굳게 자기의 견해만 고집하니, 어찌 그들과 더불어 도를

말할 수 있겠는가.

此等, 是諸經論, 及天下善知識, 所留言句中微旨也. 但時人,

自欺自瞞, 日用而不自信自修耳. 設或, 有信之者, 不加決擇,

隨情向背, 未免斷常, 而堅執己見, 豈可與之語道也.

5.

묻는다. 수다라 가운데 백 천의 삼매와 한량없는 미묘한 문을 연설한 것

은 [고기] 그물을 펴고 [새] 그물을 펼쳐서 하늘을 감싸고 땅을 감싼다. 모

든 보살이 가르침을 의지하여 받들어 행해서 [번뇌를] 끊고 [지혜를] 증득

한 계위에 이르면 마침내 삼현(三賢)94)과 십지(十地)95)와 등(等)・묘(妙)의

이각(二覺)이 있다. 지금 단지 성성과 적적의 두 문을 의지하여 혼침과 반

연하는 생각을 상대해 다스려서 마침내 구경위(究竟位)를 기약하는 것은

마치 하나의 작은 물거품을 오인하여 바다를 다한 것으로 여기는 것과 같

으니, 어리석지 않은가.

問曰. 修多羅中, 演說百千三昧, 無量妙門, 布網張羅, 該天括

地. 諸菩薩, 依敎奉行, 至於斷證階位, 則遂有三賢十地等妙二

覺. 今但依惺惺寂寂二門, 對治昏沈緣慮, 終期究竟位者, 如認

一微漚, 以爲窮盡瀛渤, 不其惑乎.

94) 삼현(三賢)은 성자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닦는 세 가지의 수행 단계인데, 소승

과 대승에서 각각 다르게 본다. 소승의 삼현은 오정심관(五停心觀), 별상염주(別

相念住), 총상염주(總相念住)이다. 대승의 삼현은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

향(十廻向)의 수행 단계에 있는 보살을 말한다.

95) 십지(十地)는 보살의 수행 계위인 41위 가운데 제31위부터 제40위, 또는 52위

가운데 제41위부터 제50위에 해당한다.『화엄경』의 십지는 ①환희지(歡喜地: 기

쁨에 넘치는 지위), ②이구지(離垢地: 번뇌의 때를 벗은 지위), ③발광지(發光地: 지

혜의 광명이 나타나는 지위), ④염혜지(焰慧地: 지혜가 매우 치성한 지위), ⑤난승

지(難勝地: 진제와 속제를 조화하여 매우 이기기 어려운 지위), ⑥현전지(現前地: 지

혜로 진여를 나타내는 지위), ⑦원행지(遠行地: 광대한 진리의 세계에 이르는 지위),

⑧부동지(不動地: 다시 동요하지 않는 지위), ⑨선혜지(善慧地: 바른 지혜로 설법하

는 지위), ⑩법운지(法雲地: 대법우를 비내리는 지위)이다.

답한다. 요즘 마음 닦는 사람들이 부처님의 종성을 갖추었으니, 돈종(頓

宗)의 바로 가리키는 문을 의지하여 결정적인 신해를 일으키는 사람은 바

로 자기의 마음이 항상 고요하며 바로 그렇게 성성함을 안다. 이를 의지하

여 닦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비록 온갖 행을 갖추어 닦지만 오직 무념(無

念)을 으뜸으로 삼고 무작(無作)을 근본으로 삼는다. 무념과 무작을 쓰기

때문에 시겁(時劫)과 지위의 점차적인 행이 없고, 또한 법과 의미의 차별된

모양도 없다. [온갖 행을] 갖추어 닦음을 쓰기 때문에 티끌 같이 많은 수의

법문과 모든 지위의 공덕이 미묘한 마음의 본체에 갖추어져 있음이 여의주

와 같다.

答. 今時修心人, 具佛種性, 依頓宗直指之門, 發決定信解者,

直了自心常寂, 直然惺惺. 依此而起修故, 雖具修萬行, 唯以無

念爲宗, 無作爲本也. 以無念無作故, 無有時劫地位漸次之行,

亦無法義差別之相. 以具修故, 塵數法門, 諸地功德, 妙心體

具, 如如意珠.

이 가운데 성성과 적적의 의미는 혹은 바로 망념을 여읜 마음의 본체를

기준으로, 혹은 공(功)을 사용하는 문을 기준으로 설해진다. 그러므로 닦음

과 성품이 함께 원만하고 이치와 행이 아울러 통하니, 수행의 빠른 길이 이

보다 뛰어남이 없다. 다만 뜻을 얻어 마음을 닦아서 생사의 병을 벗어나는

것이 요긴한데, 어찌 이름과 의미로 다투어 논하여 견해의 장애를 일으키

는 것을 용납하겠는가. 그래서 지금 만약 망념을 여읜 마음의 본체를 잘 얻

으면 곧 부처님의 지혜와 서로 계합할 것인데, 어찌 삼현과 십성(十聖)96)

점차 법문을 논하겠는가.

此中惺惺寂寂之義, 或直約離念心體, 或約用功門說之. 故修

性俱圓, 理行兼暢, 修行徑路, 莫斯爲最. 但得意修心, 脫生死

病爲要, 何容名義諍論而興見障乎. 而今若善得離念心體, 卽

與佛智相契, 何論三賢十聖漸次法門.

96) 십성(十聖)은 십지위(十地位)의 보살을 지칭하는데, 삼현(三賢)과 함께 쓰이는

경우가 많다.

『원각수증의(圓覺修證儀)』에서 “돈문에는 정해진 계위가 없으니, 마음

이 깨끗하면 곧 참이라 이름한다”97)라고 말한다.『기신론』에서 말한다. “말

한 바 각(覺)의 의미는 마음의 본체에서 망념을 여읜 것을 말한다. 망념을

여읜 모양은 허공계와 같아서 두루하지 않음이 없으며 법계와 한 모양이

니, 곧 여래와 평등한 법신이다.”98) 또 “만약 어떤 중생이 무념을 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곧 부처님의 지혜로 향함이 되기 때문이다.”99)라고 말한

다. 4조(祖)100)가 법융(法融)101)선사에게 일러 말하기를, “무릇 백 천의 삼매

와 한량없는 미묘한 문이 모두 너의 마음에 있다.”102)라고 하였다. 그러므

로 알아라. 만약 자기 마음이 모든 법을 원만히 갖춘 줄 알지 못하거나, 또

성인 가르침의 천 가지 다른 말씀이 근기의 마땅함을 따라서 자기 마음의

법계를 가리켜 돌아가게 하지 않음이 없는 줄 알지 못하고, 도리어 문자의

차별된 의미의 문에 집착하거나, 또한 스스로 두렵고 나약한 마음을 내어

서 삼아승지의 행과 계위가 채워지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성종(性宗)의

뜻을 얻어 마음 닦는 사람이 아니다. 만약 이런 병이 있다면 지금부터 고치

기를 바란다.

圓覺修證儀云,“ 頓門無定位, 心淨卽名眞.” 起信論云.“ 所言

覺義者, 謂心體離念. 離念相者, 等虛空界, 無所不遍, 法界一

相, 卽是如來平等法身.” 又云, “若有衆生, 能觀無念者, 卽爲

向佛智故.” 四祖謂融禪師曰, “夫百千三昧, 無量妙門, 盡在汝

心.” 故知. 若不了自心, 圓該諸法, 又不知聖敎千途異說, 隨

順機宜, 無不指歸自心法界, 而返執文字差別義門, 又自生怯

弱, 望滿於三祇行位者, 非性宗得意修心者也. 如有此病, 請從

今改.

97) 종밀(宗密),『원각경도량수증의(圓覺經道場修證儀)』 권3(卍128, p.748b9).

98)『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大32, p.576b11-13).

99)『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大32, p.576b26-27).

100) 4조(祖)는 중국 선종의 제4조 대의도신(大醫道信, 580~651) 선사를 가리킨다. 호

북성 기주(蘄州) 광제현(廣濟縣)사람으로 성은 사마(司馬)씨이다. 13세에 제3조

승찬(僧璨)선사를 따라 9년 내지 12년을 모시고 의발을 전수받았다. 그 후 기주

쌍봉산(雙峰山)에서 30년을 정진하였기 때문에 쌍봉도신(雙峰道信)이라고 불렸

다. 도신선사부터 시작하여 5조 홍인선사로 이어진 두 선승의 선법을 동산법문

(東山法門)이라고 높여 부르는 것도 쌍봉이 동쪽에 위치한 때문이었다. 도신선

사는 수일불이(守一不移)와 좌선관심(坐禪觀心)을 크게 강조하였으며, 그의 저술

로는『입도안심요방편법문』과『보살계작법』이 있다.[『속고승전(續高僧傳)』 권21

의「기주쌍봉산석도신전(蘄州雙峯山釋道信傳)」(大50, pp.606b) ; 『경덕전등록(景德傳

燈錄)』 권3의 「제31조 도신대사(第三十一祖道信大師)」(大51, pp.222b-223b) 참조.]

101) 법융(法融, 594~657)선사는 강서성 윤주(潤州) 사람이고, 속성은 위(韋)씨이다.

우두종(牛頭宗)의 개조이며, 선종의 제4조 대의도신(大醫道信)의 법을 이었다.

법융선사는 19세에 경사를 모두 통달하고 우연히『반야경』을 열람하다가 진공

(眞空)을 통달하고 불법에 귀의하였으며, 모산(茅山)에 들어가서 20년을 정진하

여 크게 깨달았다. 그는 현경(顯慶) 2년(657) 건초사에서 입적하였으며, 저술로

는『절관론(絶觀論)』1권과 『심명(心銘)』1부가 전한다.[『속고승전(續高僧傳)』

권 26의「潤州牛頭沙門釋法融傳」(大50, pp.603c-605b) ; 『경덕전등록(景德傳

燈錄)』권 4의「법융선사(法融禪師)」(大51, pp.226c-228c) 참조.]

102) 이 구절과 비슷한 내용이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4의 「금릉우두산법융선

사(金陵牛頭山法融禪師)」조에 보인다. “스님은 아직 날이 밝기 전에 머리를 조아

리며 참된 요지를 설할 것을 청하였다. 조사는 말했다. ‘무릇 백천의 법문은 모

두 마음으로 돌아가고 항하사의 미묘한 덕은 모두 마음의 근원에 있다. 모든 계

문(戒門)과 정문(定門)과 혜문(慧門)과 신통과 변화가 모두 스스로 구족하여 그

대의 마음을 여의지 않는다.’”(大51, p.227a17-29. 師未曉, 乃稽首請說眞要. 祖曰.

夫百千法門, 同歸方寸, 河沙妙德 總在心源. 一切戒門定門慧門, 神通變化, 悉自具足,

不離汝心.)

근래에 아는 분의 처소에서『오위수증도(五位修證圖)』를 얻었는데, 건주

(建州) 대중사(大中寺)에서 강의하는 사문인 영년(永年)이 배열하여 정하

고, 항주(杭州) 상부사(祥符寺)에서 화엄교를 전하는 명의대사(明義大師)

담혜(曇慧)가 다시 자세히 배열하여 정한 것이다. 그 서문에서 말한다. “무

릇 위없는 보리는 삼무수겁의 밖에 있어서, 오위(五位)의 수행103)과 육도

(六度)104)가 원만하여야 바야흐로 증득할 수 있다. 여기서는 돈과 점 두 길

을 나열한다. 만약 원돈문이라면, 중생계로부터 선남자 등이 부처님의 종

성을 갖추고 한 생각에 번뇌를 등지고 깨달음에 계합해서 아승지를 거치지

않고 바로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게 되니, 그것을 일러 단박에 뛰어넘어 견

성하여 성불한다고 한다. 만약 삼승점차라면, 오위의 성현이 반드시 삼아

승지를 지내야 바야흐로 정각을 이룬다.”

近於故人處, 得五位修證圖, 乃建州大中寺講學沙門永年棑定,

杭州祥符寺傳華嚴敎明義大師曇慧重詳定. 其序云.“ 夫無上

菩提, 在三無數劫外, 五位修行, 六度圓滿, 方能證得. 今列頓

漸兩途. 若圓頓門, 從衆生界, 善男子等, 具佛種性, 一念背塵

合覺, 不歷僧祇, 直至悟界, 謂之頓超見性成佛. 若三乘漸次,

五位聖賢, 須歷三祇, 方成正覺.”

103) 오위(五位)의 수행은 화엄에서 설하는 초발심주(初發心住)에서부터 불지지(佛

智地)에 이르기까지 다섯 가지 발심을 일으키는 수행의 계위를 말한다. 『신화엄

경론(新華嚴經論)』에서는 초발심(初發心)부터 불지지(佛智地)에 이르기까지 다

섯 가지 발심이 있지만 한 생각[一念]을 여의지 않는다고 한다. 다섯 가지 초발

심은 십주초발심(十住初發心), 십행초발심(十行初發心), 심회향초발심(十迴向初

發心), 십지초발심(十地初發心), 십일지초발심(十一地初發心) 등이다. 이와 같은

오위의 초발심은 모두 여래의 근본지(根本智)와 다르지 않게 초발심을 일으키

기 때문에 지혜의 본체가 처음과 끝이 없다고 하였다.(大36, pp.914c-915a)

104) 육도(六度)는 육바라밀(六波羅蜜)을 가리키며, 육도무극(六度無極) 또는 육도피

안(六到彼岸)이라고도 한다. 바라밀다(波羅蜜多, pāramitā)는 도(度), 도무극(度

無極)으로 의역하기도 하며, 피안에 이른다는 뜻이다. 육도는 피안(彼岸)에 이르

기 위해 실천해야 할 여섯 가지 덕목이다.

이와 같이 가려서 밝혔으니,『수증도』가운데 돈점 행상을 배열하여 정

하는데 이르러서도 또한 서로 뒤섞이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는, 중생들의

근기가 혹은 이승의 종성, 혹은 보살의 종성, 혹은 부처의 종성이 있어서

영리하고 둔함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교문 중에도 또한 이와 같이 부처

님의 종성을 갖춘 중생이 생사의 지면 위에서 불승(佛乘)을 단박 깨달아서

가지런히 증득하고 가지런히 닦는 뜻이 있으니, 어찌 유독 남종(南宗)105)

만 돈문이 있다고 하겠는가? 다만 교를 배우고 선을 배우는 사람들이 비록

미묘한 뜻을 만났어도 높이 성인의 경계로만 미루고 스스로는 두렵고 나약

한 마음을 내어 ‘자기 마음의 날마다 쓰는,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본성이

동등함 없는 큰 해탈임’을 깊이 관할 수 없기 때문에 많은 의혹을 낼 따름

이다.

如是辨明, 至於圖中, 棑定頓漸行相, 亦不相雜楺. 所以然者,

以其衆生根機, 或有二乘種性, 或菩薩種性, 或佛種性, 利鈍各

別故也. 敎中, 亦有如是具佛種性衆生, 於生死地面上, 頓悟佛

乘, 齊證齊修之旨, 何獨南宗有頓門耶? 但學敎學禪之者, 雖

遇妙旨, 高推聖境, 自生怯弱, 未能深觀‘自心日用見聞覺知之

性, 是無等等大解脫’故, 生多般疑惑耳.

105) 남종(南宗)은 중국 선종의 남・북 두 종파 중 혜능(慧能, 638~713)을 정통 제6조

로 세우고, 돈오(頓悟)를 종지로 삼는 입장이다. 제5조 홍인(弘忍) 이래 거의 대

부분의 제자가 북방의 장안과 낙양지방에서 활약한 것에 대하여, 혜능은 남쪽

인 소주(韶州) 조계산(曹溪山)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므로 지역적 구별에 따라

남종이라 한다. 남종은 신수(神秀, 606~706)를 중심으로 하는 북종(北宗)의 법계

(法系)와 점수(漸修)를 비판하면서 돈오사상을 부각시켰다. 특히 혜능의 제자

인 하택신회(荷澤神會, 670~762)는 북종비판 운동을 주도하면서 남종을 정립시

킨 대표적인 인물이다. 남종은 사상적으로는 돈오를 표방하면서 북종을 점수로

평가절하하고, 계보상으로는 달마 이래의 정통성이 혜능에게 보존되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북종 신수를 비정통으로 규정한다. 남종선은 혜능 이후 남악회

양(南嶽懷讓, 677~744)과 청원행사(靑原行思, 673~741)의 두 갈래로 나뉘어졌고,

당나라 말기 이후에 선종의 주류가 되어 오가칠종(五家七宗)을 형성하는 뿌리

가 되었다. 이후 남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와 교외별전(敎外別傳)을 표방하며,

스승과 제자가 법을 인가하고 전수받는 것을 전통으로 삼는 조사선(祖師禪) 또

는 공안참구(公案參究)를 수행의 핵심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간화선(看話禪)이

라 불리는 선풍으로 이어지게 된다. 한국불교의 구산선문(九山禪門)도 남종계

인 임제종(臨濟宗)의 도입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후에 다시 성실한 증거를 이끌어서 단박에 뛰어넘어 견성한 사람이 비

록 삼승의 점차 행위를 빌지 않아도 또한 깨달은 이후 원만히 닦는 행의 문

에도 걸리지 않아서, 이와 같은 깨달음과 닦음의 근본과 지말이 원만하고

밝은 깨달음의 성품의 성성하고 적적한 뜻을 여의지 않음을 갖추어 밝히겠

다. 바램은 마음 닦는 사람들이 방편을 버리고 진실로 나아가서 잘못 공력

을 쓰지 않고 자신과 타인이 위없는 보리를 빨리 증득하게 하는 것이다.

此後, 更引誠證, 具明頓超見性者, 雖不藉三乘漸次行位, 亦

不礙悟後圓修行門, 如是悟修本末, 不離圓明覺性惺寂之義.

願106)令修心人, 遷權就實, 不枉用功, 自他速證無上菩提.

106) 저본에서는「愿」으로 되어 있으나 을본・정본・병본에 따라「願」으로 바꾸었다.

또한『법집별행록(法集別行錄)』에서 말한다. “처음 발심으로부터 나아

가 성불에 이르기까지 오직 고요함[寂]과 오직 앎[知]뿐이다. 변하지도 않

고 끊어지지도 않지만, 다만 지위에 따라서 이름과 의미가 조금 다를 뿐이

다. 말하자면, 완전히 깨달은 때를 근거해서는 이름이 이(理)와 지(智)가 되

며,〈이(理)는 곧 고요함이며 지(智)는 곧 앎이다.〉 발심해서 닦는 때를 근거해서는

이름이 지(止)와 관(觀)이 되며,〈번뇌의 연을 그치고 쉬어서 고요함에 계합하고, 성

(性)과 상(相)을 관조(觀照)하여 앎에 합한다.〉자유로이 행을 이루는 것을 근거해

서는 이름이 정(定)과 혜(慧)가 되며,〈연을 그치는 공을 인으로 마음의 정(定)에

융합한다. 정(定)은 고요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다. 관조(觀照)하는 공을 인으로 지혜가

드러난다. 혜(慧)는 앎에 분별이 없는 것이다.〉 번뇌가 모두 다하고 공행이 원만해서

성불할 때를 근거해서는 이름이 보리(菩提)와 열반(涅槃)이 된다.〈보리(菩

提)는 범어이니, 번역하면 깨달음이니 곧 앎이다. 열반(涅槃)은 범어이니, 번역하면

고요히 없어짐이니 곧 고요함이다.〉 마땅히 알아라. 처음 발심으로부터 끝마침에

이르기까지 오직 고요함이며 오직 앎일 뿐이다.〈지금 말하는 오직 고요함과 오직

앎이 성성과 적적이다.〉”107)

且如法集別行錄云.“ 始自發心, 乃至成佛, 唯寂唯知. 不變不

斷, 但隨地位, 名義稍殊. 謂約了悟時, 名爲理智.〈理卽是寂, 智卽

是知.〉 約發心修時, 名爲止觀〈. 止息塵緣, 契於寂也. 觀照性相 冥於知

也.〉 約任運成行, 名爲定慧〈. 因止緣功, 而融心定. 定者, 寂然不變. 因

觀照功, 而發慧. 慧者, 知無分別.〉 約煩惱都盡, 功行圓滿, 成佛之時,

名爲菩提涅槃〈. 菩提梵語, 此云覺, 卽是知也. 涅槃梵語, 此云, 寂滅, 卽是

寂也.〉 當知. 始自發心, 乃至畢竟, 唯寂唯知.〈今言唯寂唯知, 是惺惺

寂寂也.〉”

107) 이 내용은 종밀(宗密)의『중화전심지선문사자승습도(中華傳心地禪門師資承襲

圖)』(이하 『선문사자승습도』, 卍110, pp.873b7-874a8)에서 확인할 수 있다.『법집

별행록(法集別行錄)』은 현재 전하지 않으며, 최근에는 이 책이 『선문사자승습

도』와 같은 내용의 책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지눌스님 당시에는『법

집별행록』이라는 종밀의 저술이 유통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지눌스님

이『법집별행록』을 절요(節要)하고 자신의 사기(私記)를 붙인『법집별행록절요

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라는 저술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록』의 뜻에 의거하면, 비록 지금은 범부라 할지라도, 빛을 돌이켜 되돌

아 비출 수 있어서 방편을 잘 알아 혼침과 산란을 고르게 조화하여 성성하고

적적한 마음이 인(因)을 포함하고 과(果)에도 사무쳐서 변하지 않고 끊어지

지 않지만, 다만 설고 익음과 밝고 어두움이 공력에 따라 다를 뿐이다.

據此錄之旨, 則雖今時凡夫, 能廻光返照, 善知方便, 均調昏

散, 惺惺寂寂之心, 該因徹果, 不變不斷, 但生熟明昧, 隨功

異耳.

만약 자기 마음의 참되고 항상한 성품의 덕이 움직임과 고요함이 함께

융합함을 원만하게 비추어서 법계를 증득해 알면, 문득 모든 지위의 공덕

과 티끌 같은 수의 법문과 구세(九世)와 십세(十世)가 당시의 생각을 여의

지 않음을 안다. 마음의 성품이 신령스럽고 미묘하며 자재하고 만 가지 법

을 포함하여 수용하므로 만법이 일찍이 자기의 성품을 여의지 않아서 바뀐

듯 바뀌지 않은 듯 자성과 모양, 본체와 작용, 연을 따름과 변하지 않음이

동시에 걸림 없다. 처음부터 지금과 예전, 범부와 성인, 선과 악, 취함과 버

림의 마음이 없어서 공용(功用)이 점차 늘어나는데 방해되지 않아 모든 지

위를 지나는데 자비와 지혜가 점차 원만해져서 중생을 성취하지만, 처음부

터 끝까지 한 시간과 한 생각과 한 법과 한 행에서 옮기지 않는다.

若圓照自心眞常性德, 動靜雙融, 證會法界, 則便知諸地功德,

塵數法門, 九世十世, 不離於當念. 以心性靈妙自在, 含容萬種

法, 萬法未嘗離自性, 如轉如不轉, 性相體用, 隨緣不變, 同時

無碍. 初無今古凡聖善惡取捨之心, 而不妨功用漸增, 歷諸地

位, 悲智漸圓, 成就衆生, 而始終不移一時一念一法一行也.

『화엄론』에서 말한다. “자기 마음의 근본무명의 분별하는 종자로써 문득

부동지불(不動智佛)108)을 이루고, 법계의 본체와 작용으로써 믿고 정진하

고 깨달아 들어가는 문을 삼는다. 믿음과 계위에 들고 닦음으로 나아가는

것으로부터 십주(十住)109)・십행(十行)110)・십회향(十廻向)111)・십지(十地)・

십일지(十一地)를 거치는데 이르기까지 모두 근본부동지불을 여의지 않는

다. 한 시간과 한 생각과 한 법과 한 행을 여의지 않은 위에 헤아릴 수 없고

가없으며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법계와 허공계의 티끌같이 많은 법문

이 있다. 왜냐하면 법계와 근본부동지 위로부터 믿고 나아가고 깨달아 들

어감을 삼기 때문이다.”112) 또 말한다. “삼승 방편의 가르침에서 견해가 낮

은 중생들을 근거해서 세간의 삼세의 성품을 두는 것과 불과가 삼아승지겁

의 밖에 있다고 설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113)

華嚴論云.“ 以自心根本無明分別之種, 便成不動智佛, 以法

界體用, 以爲信進悟入之門. 從信及入位進修, 乃至經十住十

行十廻向十地十一地, 摠不離本不動智佛. 不離一時一念一

法一行上, 而有無量無邊不可說不可說法界虛空界微塵數法

門. 何以故, 爲從法界及根本不動智上, 爲信進悟入故.” 又

云. “不同三乘權敎, 約劣解衆生, 存世間三世之性, 說佛果在

三僧祇之外.”

108) 부동지불(不動智佛)은 동방의 금색(金色) 세계에 계신 부처님의 명호이며, 문수

사리(文殊師利)가 증득한 최후의 불과(佛果)로 해석한다.『신화엄경론(新華嚴經

論)』에서는 부동지불을 ‘법신 안에 지음 없는 성품의 지혜’(大36, p.752a)라고 하

고 있다.

109) 십주(十住)는 보살의 수행 계위(階位)인 41위 가운데 첫 10위이며, 또는 52위 가

운데 제11위에서 제20위까지의 계위이다. 신위(信位)를 지나서 마음이 진리에

안주(安住)하는 위치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주(住)라 한다. 『화엄경』의 십주는

①발심주(發心住), ②치지주(治地住), ③수행주(修行住), ④생귀주(生貴住), ⑤구

족방편주(具足方便住), ⑥정심주(正心住), ⑦불퇴주(不退住), ⑧동진주(童眞住),

⑨법왕자주(法王子住), ⑩관정주(灌頂住)이다.

110) 십행(十行)은 보살의 수행 계위인 41위 가운데 제11위부터 제20위, 또는 52위

가운데 제21위부터 제30위에 해당하는 열 가지 이타행을 가리키는 것으로, 십

행심(十行心)이라고도 한다. 『화엄경』의 십행은 ①환희행(歡喜行: 즐거운 행),

②요익행(饒益行: 이로운 행), ③무위역행(無違逆行: 어김이 없는 행), ④무굴요

행(無屈撓行: 굽힘이 없는 행), ⑤무치란행(無癡亂行: 어리석거나 어지러움이 없

는 행), ⑥선현행(善現行: 잘 나타나는 행), ⑦무착행(無著行: 집착이 없는 행), ⑧

난득행(難得行: 얻기 어려운 행), ⑨선법행(善法行: 법을 잘 설하는 행), ⑩진실

행(眞實行: 진실한 행)이다.

111) 십회향(十廻向)은 보살의 수행 계위인 41위 가운데 제21위부터 제30위, 또는 52

위 가운데 제31위부터 제40위에 해당하며, 대비심으로써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계위이다.『화엄경』의 십회향은 ①일체 중생을 구호하면서도 중생이라는 생각

을 떠난 회향[救護一切衆生離衆生相廻向], ②깨뜨릴 수 없는 회향[不壞廻向], ③

모든 부처님과 동등한 회향[等一切佛廻向], ④모든 곳에 이르는 회향[至一切處廻

向], ⑤다함이 없는 공덕장 회향[無盡功德藏廻向], ⑥모두 평등한 선근에 들어가

는 회향[隨順平等善根廻向], ⑦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따라주는 회향[隨順等觀一

切衆生廻向], ⑧진여인 모양의 회향[如相廻向], ⑨집착도 속박도 없는 해탈회향

[無縛無著解脫廻向], ⑩법계와 평등한 무량회향[等法界無量廻向]이다.

112)『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권17(大36, p.833a11-17).

113)『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권17(大36, p.833a9-10).

이 논의 뜻을 의거하면, 원종(圓宗)에서 원만히 믿는 사람은 자기 마음의

근본무명의 분별하는 종자로써 문득 부동지불을 이루어서, 믿음으로부터

구경위에 이르기까지 바뀌고 변하고 이루어지고 무너지는 모양이 없다. 말

하자면 심성은 본래 자재해서 연에 따라 바뀐 듯하지만, 항상 변하고 바뀜

이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據此論之旨, 圓宗圓信之者, 以自心根本無明分別之種, 便成

不動智佛, 從信乃至究竟位, 無有轉變成壞之相. 可謂心性, 本

來自在, 隨緣似轉, 而常無變易者也.

근래에 오직 말만을 힘쓰는 사람들이 비록 널리 법계의 걸림 없는 연기

[法界無碍緣起]를 말하지만, 처음부터 자기 마음의 덕용을 돌이켜 관하지

않는다. 이미 법계의 성품과 모습이 자기 마음의 본체와 작용임을 관하지

않으니, 어느 때에 자기 마음의 허물을 열고 수많은 경권을 내겠는가. 경에

서 이르지 않았던가. “모든 법이 곧 마음의 자성인 줄 알면, 지혜의 몸을 성

취함이 다른 이의 깨달음으로 말미암지 않는다.”114) 또 이르지 않았던가.

“말로 설한 법을 작은 지혜로 망령되게 분별한다. 그러므로 장애가 생겨 자

기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자기의 마음을 알 수 없다면 어찌 바른 도를 알

겠는가. 저들은 전도된 지혜로 말미암아 모든 악을 늘린다.”115)

近來唯攻言說者, 雖廣談法界無碍緣起, 初不返觀自心之德用.

旣不觀法界性相, 是自心之體用, 何時, 開自心情塵, 出大千

經卷. 經不云乎. “知一切法, 卽心自性, 成就慧身, 不由他悟.”

又不云乎.“ 言辭所說法, 小智妄分別. 是故生障碍, 不了於自

心. 不能了自心, 云何知正道. 彼由顚倒慧, 增長一切惡.”

114)『화엄경(華嚴經)』권17,「범행품(梵行品)」(大10, p.89a2-3).

115)『화엄경(華嚴經)』권16,「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大10, p.82a24-27).

엎드려 바라노니, 참을 닦는 높은 선비는 위와 같은 간곡한 말씀을 의지

해서, 먼저 반드시 자기의 마음이 모든 부처님의 본원임을 깊이 믿어서 정

혜(定慧)를 관조하는 힘으로써 그것을 시작할 것이며, 단정히 앉아 어리석

음을 안고 분별없음을 본받아 큰 도로 삼아서는 안 된다. 얽매여 있는 진여

는 혼침과 산란을 모두 갖추고, 얽매임에서 벗어난 진여라야 정혜(定慧)가

바야흐로 밝다고 하였으니, 전체와 개별이 조리가 정연하여 앞뒤가 넘침이

없기 때문이다.

伏望, 修眞高士, 依如上懇苦之言, 先須深信, 自心是諸佛本

源, 以觀照定慧之力, 發出之, 不可端居抱愚, 效無分別, 而爲

大道. 所謂在纏眞如, 昏散皆具, 出纏眞如, 定慧方明, 摠別條

然, 前後無濫故也.

또한 ‘바로 지금 물든 것을 다스려서 그 다음에 깨끗함을 얻는다’라고 하

여, 본래의 미묘함을 관하지 않고 스스로 어렵다는 생각을 내서 수고롭게

점행을 닦아서도 안 된다. 『유심결』에서 말하기를, “혹은 지위를 사양하여

높이 지극한 성인에게 미루거나, 혹은 덕을 쌓아서 삼아승지겁이 채워지기

를 바라며, 온전한 본체가 앞에 나타났음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미묘한 깨

달음을 바라니, 어찌 본래부터 구족해 있음을 깨닫겠는가. 인하여 공이 이

루어지기를 기다리다가 원만하고 항상함에 들지 못하고 끝내 윤회의 굴림

을 이루니, 다만 성품의 덕에 어두워 참된 종지를 분별하지 못하고, 깨달음

을 버리고 티끌을 따르며, 근본을 버리고 지말로 나아간다.”116)라고 하였으

니, 바로 이것이다.

亦不可謂‘現今治其染, 當來得其淨.’ 不觀本妙, 自生艱阻, 而

勞修漸行. 唯心訣云,“ 或讓位, 高推於極聖, 或積德, 望滿於

三祇, 不知全體現前, 猶希妙悟, 豈覺從來具足. 仍待功成, 不

入圓常, 終成輪轉, 祇爲昧於性德, 罔辯眞宗, 捨覺徇塵, 棄本

就末.” 此之是也.

116) 이 구절은 연수(延壽)의 『유심결(唯心訣)』(大48, p.995b27-c2)에서 인용한 것으

로, 내용의 일부가 다르다. 『유심결』에서는 “혹은 지위를 알아 높이 지극한 성인

에게 미루거나[或認位, 高推於極聖]”로 되어 있는데, 지눌스님은 ‘인(認)’을 ‘양

(讓)’으로 바꾸어서 “혹은 지위를 사양하여 높이 지극한 성인에게 미루거나[或

讓位, 高推於極聖]”라고 하였다.

이러하므로 마음 닦는 사람은 스스로 굽히지 말고 스스로 믿지 말아야

한다. 믿으면, 이 마음이 자기의 성품을 지키지 않고 범부로 될 수도 성인

으로 될 수도 있어서 잠깐 조작하여 도리어 다시 들뜨고 가라앉는 작용에

떨어진다. 이 때문에 낮의 세 때와 밤의 세 때에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게 습

(習)을 쌓아서 성성하되 망령됨이 없고, 적적하되 밝고 분명하여 수행의 문

을 어기지 않는다. 굽히면, 이 마음이 신령스럽게 통하여 중생에 응하고, 항

상 눈앞에 있어서 종일토록 연을 따르지만 종일토록 변하지 않는 덕을 잃

게 된다. 이로써 어리석음과 애욕을 가지고 해탈의 참 근원을 이루고, 탐욕

과 성냄을 옮겨서 보리의 큰 작용을 나타내어, 거스르고 따름에 자재하고

얽힘과 벗어남에 거리낌 없이 성품의 문을 따른다. 이 수행과 성품의 두 문

은 새의 두 날개와 같아서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

是故, 修心之人, 不自屈不自恃. 恃則, 墮於此心, 不守自性,

能凡能聖, 刹那造作, 還復漂沈之用. 是以, 晝三夜三, 懃懃蘊

習, 惺惺無妄, 寂寂明亮, 不違修門. 屈則, 失於此心, 靈通應

物, 常在目前, 終日隨緣, 而終日不變之德. 是以, 將癡愛, 成

解脫眞源, 運貪嗔, 現菩提大用, 逆順自在, 縛脫無拘, 順於性

門也. 此修性二門, 如鳥兩翼, 闕一不可.

예전 대덕이 말하기를, “넉넉히 마음을 쓸 때에는 넉넉히 무심(無心)을

쓴다. 왜곡된 말은 이름과 모양을 수고롭게 하고 바른 말은 번거로움이 없

다. 무심을 넉넉히 쓰면 항상 넉넉히 무(無)를 쓰는 것이다. 지금 말하는 무

심처가 유심과 다르지 않다.”117)라고 하였다. 만약 이 말에서 뜻을 얻어 닦

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비록 말세 중생이지만 어찌 단견과 상견의 구덩

이에 떨어질 것을 근심하겠는가. 지금까지 말한 바의 티끌 같은 수의 법문

과 모든 지위의 공덕이 미묘한 마음의 본체에 갖추어 있음이 마치 여의주

와 같으니, 어찌 속이는 것이겠는가. 미묘한 마음이라고 말한 것은 성성하

고 적적한 마음이다.

先德云. “恰恰用心時, 恰恰無心用. 曲談名相勞, 直說無煩重.

無心恰恰用, 常用恰恰無, 今說無心處, 不與有心殊.” 若能於

此, 得意進修, 則雖是末世衆生, 何患乎落斷常之坑也. 向來所

謂塵數法門, 諸地功德, 妙心體具, 如如意珠, 豈誣也哉. 言妙

心者, 是惺惺寂寂之心也.

117)『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4,「우두산법융선사(牛頭山法融禪師)」(大51, p.227c6-8).

6.

묻는다. 요즘 마음 닦는 사람들이 만약 널리 배우고 많이 들어서 법을 설

하여 사람들을 제도한다면 안으로 비추는 수행을 잃게 되고, 만약 남을 이

롭게 하는 행이 없다면 고요함을 추구하는 무리와 어찌 다르겠는가?

問. 今時修心人, 若博學多聞, 說法度人, 則損於內照, 若無利

他之行, 則何異趣寂之徒耶?

답한다. 이는 각각 당사자에 달려 있어서 한결같을 수 없다. 만약 말로

인해서 도를 깨닫고 가르침을 빌려 종지를 밝혀서 법을 가리는 안목을 갖

춘 사람이라면, 비록 많이 들어도 이름을 오인하고 모양에 집착하는 생각

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비록 남을 이롭게 하여도 능히 자신과 타인의 싫

고 좋은 견해를 끊을 수 있어서 자비와 지혜가 점점 원만하여 미묘하게 환

중(環中)118)에 계합하면 진정으로 진실을 행하는 사람이다.

答. 此各在當人, 不可一向. 若因言悟道, 藉敎明宗, 具擇法眼

者, 雖多聞, 而不起認名執相之念, 雖利他, 而能斷自他憎愛之

見, 悲智漸圓, 妙契寰中, 則誠當實行者也.

118) 환중(環中)은 옳고 그름을 초월한 절대의 경지를 가리키는 말로,『장자(莊子)』

의「제물론(齊物論)」에서 유래한다. 즉, “추(樞)는 비로소 환중을 얻어야 무궁

에 응한다.”(樞始得其環中, 以應無窮.)『조론(肇論)』권1의「열반부명론(涅槃無名

論)」에서는 “도와 정신이 맞아서 미묘하게 환중에 계합하여야 이치를 통하지

않음이 없다”(大45, p.157a15-16. 道與神會, 妙契環中, 理無不統.)라고 하였다. 또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권1에서는 “진실로 그렇지 않은 크게 그러함이

기 때문에 설하는 말씀이 미묘하게 환중에 계합하며, 이치 없는 지극한 이치이

기 때문에 설명된 근본이 한계 밖으로 뛰어넘었다”(大34, p.961a17-18. 良由不然

之大然, 故能說之語妙契環中, 無理之至理, 故所詮之宗, 超出方外.)라고 하였다.

만약 말에 따라 견해를 내고 글과 같이 알음알이를 지어 가르침을 쫓고

마음을 미혹하여 손가락과 달을 구분하지 못하면서 이름이 나고 이익이 느

는 마음을 아직 잊지 못하고 법을 설하여 사람을 제도하고자 하는 것은 더

러운 달팽이가 자기를 더럽히고 남도 더럽히는 것과 같다. 이는 세간의 문

자법사이니, 어찌 오로지 정혜(定慧)를 정미롭게 하며 이름이 나는 것을 구

하지 않는 사람이라 하겠는가.

若隨語生見, 齊文作解, 逐敎迷心, 指月不分, 未忘名聞利養之

心, 而欲說法度人者, 如穢蝸螺, 自穢穢他. 是乃世間文字法

師, 何名專精定慧, 不求名聞者乎.

『화엄론』에서 말한다. “만약 자기가 묶여 있으면서 다른 이의 묶임을 풀

어줄 수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119) 지공(誌公)120)법사의『대승찬(大乘讚)』

에서 말한다. “세간에서 얼마만큼의 어리석은 사람이 도를 가지고서 다시

도를 구하려 하는가. 널리 모든 뜻을 분주하게 찾지만 스스로 자기의 몸을

구제하는 것도 마치지 못한다. 오로지 남의 글의 어지러운 말을 찾아 스스

로 지극한 이치가 미묘하고 좋다고 일컫지만, 한갓 수고로이 일생을 헛되

게 보내어 영겁토록 나고 늙음에 빠져 있다. 혼탁한 애욕이 마음을 얽매어

도 버리지 못하니, 청정한 지혜의 마음이 스스로 괴롭다. 진여법계의 총림

이 도리어 가시덤불과 거친 풀이 되었다. 다만 누런 잎을 금이라고 집착하

니, 금을 버리고 보배를 구함을 깨닫지 못한다. 입 속으로는 경을 외우고

논을 외우지만 마음속은 항상 메말랐다. 하루아침에 본래 마음이 공함을

깨달으면 진여를 구족함이 적지 않다.”121) 아난(阿難)이 “한결같이 많이 듣

는 것으로는 도력이 온전하지 못하다”122)라고 말하였다. 예전 성인의 뜻이

밝기가 해와 달을 넘으니, 어찌 널리 여러 뜻만 찾아서 자기의 몸도 구제하

지 못하고 영겁토록 빠져 있을 수 있겠는가.

華嚴論云. “若自有縛, 能解他縛, 無有是處.” 誌公法師大乘讚

云.“ 世間幾許癡人, 將道復欲求道. 廣尋諸義紛紜, 自救己身

不了. 專尋他文亂說, 自稱至理妙好, 徒勞一生虛過, 永劫沈淪

生老. 濁愛纏心不捨, 淸淨智心自惱. 眞如法界叢林, 返作荊棘

荒草. 但執黃葉爲金, 不悟棄金求寶. 口內誦經誦論, 心裏尋常

枯燥. 一朝覺本心空, 具足眞如不少.” 阿難曰, “一向多聞, 未

全道力.” 先聖之旨, 明踰日月, 豈可廣尋諸義, 不救己身, 而

永劫沈淪乎.

119)『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권2(大36, 733b7-8).

120) 지공(誌公)은 보지(寶誌, 418~514)화상을 가리킨다. 중국 남조(南朝) 때의 스님

으로 보지(寶志)・보지(保志) 또는 보지(保誌)라고도 쓰며, 일반적으로 보공(寶

公)・지공(誌公)으로 부른다. 속성은 주(朱)씨이고,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도림

사 승검(僧儉) 화상을 모시고 선업을 닦았다. 그는 세납 96세에 입적하였으며,

시호는 광제선사(廣濟禪師)이다. 그는『문자석훈(文字釋訓)』30권,『십사과송

(十四科頌)』14수,『십이시송(十二時頌)』12수,『대승찬(大乘讚)』10수 등을 남겼

다.[『고승전(高僧傳)』 권10의 「석보지(釋保誌)」(大50, pp.394a-395b) 참조.]

121)『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권29,「양보지화상대승찬십수(梁寶誌和尙大乘讚十

首)」(大51, 449c23-450a1).

122)『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

萬行首楞嚴經)』(이하『능엄경』) 권1(大19, 106c17).

다만 일상 중의 관행하는 여가에 성인의 가르침과 옛 대덕의 도에 들어

간 인연을 자세히 살핌을 거리끼지 않음은 삿되고 바름을 판단하고 가려

남을 이롭게 하고 자신을 이롭게 할 따름이며, 한결같이 밖에서 구하고 이

름과 모양을 분별함이 마치 바다에 들어가 모래를 세는 것처럼 헛되이 시

간을 보내기 위함은 아니다.

但時中觀行餘暇, 不妨披詳聖敎, 及古德入道因緣, 決擇邪正,

利他利己而已, 非爲一向外求, 分別名相, 如入海算沙, 虛度

光陰.

예전 대덕이 말한다. “보살은 근본이 남을 제도함이니, 이 때문에 먼저

정혜(定慧)를 닦는다. 텅 비고 한가하며 고요한 곳이 선관을 쉽게 이루고,

욕심이 적은 두타가 성인의 도에 들어갈 수 있다.”123) 이것이 그 증거이다.

이미 남을 제도할 원을 내었다면 먼저 정혜(定慧)를 닦아라. 도력이 있으면

구름처럼 자비의 문을 펼치고 파도처럼 행의 바다를 타고서 미래제가 다하

도록 모든 고뇌하는 중생을 구제하고 삼보(三寶)를 공양하여 부처님 집안

의 업을 잇는 것이니, 어찌 고요함을 추구하는 무리와 같겠는가.

先德曰. “菩薩本爲度他, 是以先修定慧. 空閑靜處, 禪觀易成,

少欲頭陀, 能入聖道.” 此其證也. 旣發度他之願124), 先修定慧.

有道力, 則雲布慈門, 波騰行海, 窮未來際, 救拔一切苦惱衆

生, 供養三寶, 紹佛家業, 豈同趣寂之徒也.

123) 연수(延壽),『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권중(大48, p.974b22-24).

124) 저본에서는「愿」으로 되어 있으나 을본・정본・병본에 따라「願」으로 바꾸었다.

7.

묻는다. 요즘 수행하는 사람들이 비록 정혜(定慧)를 오로지 하지만 대부

분 도력이 충분하지 못하니, 만약 정토를 구하지 않고 이 예토의 세계에 머

물러 있으면 모든 고난을 만나 물러날까 걱정된다.

問. 今時行者, 雖專定慧, 多分道力未充, 若也不求淨土, 留此

穢方, 逢諸苦難, 恐成退失.

답한다. 이 또한 각자 당사자에 달려 있어서 한 예로 취할 수 없다. 만약

큰 마음의 중생이라면, 이 최상승의 법문을 의지해서 사대(四大)는 물거품

과 허깨비 같고 육진(六塵)은 허공 꽃 같으며, 자기 마음이 부처님의 마음

이고 자기 성품이 법의 성품이며, 본래부터 번뇌의 성품을 스스로 여의어

서 성성함은 바로 그렇게 성성하며, 역력함은 바로 그렇게 역력함을 결정

적으로 신해한다. 이러한 신해를 의지해 닦는 사람은, 비록 비롯함이 없는

습기(習氣)125)가 있어도 의지하고 머무름이 없는 지혜로써 다스리니, 도리

어 이것이 근본 지혜여서 억누름도 아니고 끊음도 아니다. 비록 방편과 삼

매로 혼침과 산란을 여의는 공(功)이 있지만, 반연하는 생각과 분별이 참

성품[眞性] 가운데의 연기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성품의 깨끗함에 맡겨도

취하거나 거두어들이는 모양이 없다. 비록 바깥 연의 어기고 따르는 경계

를 지나더라도 오직 마음임을 알아서 자신과 타인, 주체와 대상이 없기 때

문에 사랑과 미움, 성냄과 기쁨이 자유로이 생기지 않는다. 이와 같이 법

에 맡겨 습기를 고르고 다스려 이치에 맞는 지혜가 더욱 밝아져서 연에 따

라 중생을 이롭게 하고 보살도를 행하니, 비록 삼계 속에 있지만 법성정토

아님이 없고, 비록 세월을 지나지만 본체는 때를 옮기지 않는다. 큰 자비와

지혜에 맡겨 법으로써 연에 따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비록 아주 옛날에

헤아림을 넘어선 사람이 한 번 뛰어 계위에 올라 신통력을 구족했던 것과

같지는 않지만, 숙세에 심은 선근으로 타고난 성품이 매우 영리하여 자기

마음이 본래 고요함과 작용이 자재하고 성품이 다시 바뀜이 없는 줄을 깊

이 믿는다. 그러므로 모든 세상의 어려움에 어찌 물러날 근심이 있겠는가?

答. 此亦各在當人, 不可一例取之. 若是大心衆生, 依此最上乘

法門, 決定信解四大如泡幻, 六塵似空花, 自心是佛心, 自性是

法性, 從本已來, 煩惱性自離, 惺惺直然惺惺, 歷歷直然歷歷.

依此解而修者, 雖有無始習氣, 以無依住智治之, 還是本智, 不

伏不斷. 雖有方便三昧, 離昏散之功, 以知緣慮分別, 是眞性中

緣起故, 任性淨而無取攝之相. 雖涉外緣違順之境, 爲了唯心,

無自他能所故, 愛憎嗔喜, 任運不生. 如是任法, 調治習氣, 使

稱理智增明, 隨緣利物, 行菩薩道, 雖處三界內, 無非法性淨

土, 雖經歲月, 體不移時. 任大悲智, 以法隨緣故. 此人, 雖不

如上古過量人, 一超登位, 具足通力者, 然以夙植善根, 種性猛

利, 深信自心本來寂用自在, 性無更改. 故於諸世難, 何有退失

之患?

125) 습기(習氣, vāsanā)는 업의 잠재적 인상, 잠재 여력, 습관성, 훈습에 의해 남겨

진 기분을 뜻한다. 이는 번뇌습(煩惱習), 여습(餘習), 잔기(殘氣) 등으로도 쓰며,

습(習)으로 약칭하기도 한다. 유식학파에서 습기는 종자(種子)의 다른 이름으로

사용되며, 명언습기(名言習氣)・아집습기(我執習氣)・유지습기(有支習氣)로 나

누고 있다. [『성유식론(成唯識論)』 권8, 大31, p.43a 참조.]

『화엄론』에서 말한다. “큰 마음의 범부126)는 능히 믿음을 내어 깨달음에

들 수 있기 때문에 여래의 집에 나며, 이미 부처님의 집에 난 모든 큰 보살

을 말한 것이 아니다.”127) 요즘에도 이와 같이 마음을 닦는 사람은 뛰어난

근기가 된다.

華嚴論所謂,“ 大心凡夫, 能生信證入故, 生如來家. 不言已生

佛家, 諸大菩薩者也.” 今時, 如此修心者, 爲上根也.

126) 큰 마음의 범부[大心凡夫]는 크고 넓은 마음을 가진 범부을 가리키며, 큰 마음의

중생[大心衆生]이라고도 한다. 40권본『화엄경(華嚴經)』권6의「입부사의해탈경

계보현행원품(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이하「보현행원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큰 마음의 중생이 모든 부처님의 법륜을 굴릴 수 있으며, 생사

의 바퀴를 버리고 바른 법의 바퀴에 머물러 모든 이도(異道)의 삿된 견해를 꺾

을 수 있다.”(大10, p.689c15-16. 大心衆生, 令其能轉諸佛法輪, 捨生死輪, 住正法輪,

摧滅一切異道邪論.)

127)『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권8(大36, p.770c16-18).

혹 어떤 수행자는 자기 마음의 깨끗하고 미묘한 덕을 듣고 믿고 즐거워

하며 닦고 익힌다. 그러나 시작 없이 아상(我相)을 굳게 집착함으로써 습기

가 치우치고 무거워 모든 미혹의 장애가 닥치면 생각을 잊을 수 없는 사람

은, 또한 공관으로써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은 사대(四大)와 오음(五陰)이 연

을 따라 허깨비처럼 나와서 헛되고 거짓되어 진실이 아닌 것이 마치 뜬 물

거품이 그 가운데가 텅 빈 것과 같으니 무엇을 나라고 하며 무엇을 남이라

하겠는가?’하고 미루어 부수어야 한다. 이와 같이 깊이 관하여 교묘히 생각

의 티끌을 씻어서 마음이 항상 겸손하고 공경하며, 교만을 멀리 여의고 현

행(現行)의 번뇌를 꺾어 조복하고 정혜(定慧)를 도우면 점점 밝고 고요한

성품에 들어갈 것이다.

或有行者, 聞自心淨妙之德, 信樂修習. 然以無始堅執我相, 習

氣偏重, 致諸惑障, 未能忘情者, 且以空觀, 推破‘自他身心,

四大五蔭, 從緣幻出, 虛假非實, 猶如浮泡, 其中空虛, 以何爲

我, 以何爲人.’ 如是深觀, 巧洗情塵, 心常謙敬, 遠離憍慢, 折

伏現行, 資於定慧, 漸入明靜之性.

그러나 이 사람이 만약 온갖 선으로 자기의 힘을 도와서 여는 것이 없다

면 멀리 막힘을 이룰까 두렵다. 바로 반드시 부지런히 삼보를 공양하고 대

승을 독송하며, 도를 행하고 예배하며, 참회하고 발원함을 처음부터 끝까

지 폐하지 말아야 한다. 삼보를 좋아하고 공경하는 순후한 마음으로 인해

부처님의 위신력과 가피를 입어 업장을 녹여서 선근이 물러나지 않을 수

있다. 만약 이와 같이 자력과 타력이 안팎으로 서로 돕고 온 마음으로 위없

는 도를 구할 수 있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然此人, 若無萬善, 助開自力, 恐成迂滯. 直須勤供養三寶, 讀

通大乘, 行道禮拜, 懺悔發願128), 始終無癈. 以愛敬三寶, 淳厚

心故, 蒙佛威加, 能消業障, 善根不退. 若能如是, 自力他力,

內外相資, 志求無上之道, 則豈不具美乎.

이 안팎으로 서로 돕는 가운데도 두 종류의 사람이 있어 원하는 바가 각

각 다르다. 혹 자비와 원력이 두터운 사람은 이 세계에서 생사를 싫어하지

않고, 자신도 이롭고 타인도 이롭게 하며, 자비와 지혜를 증장시키며, 대

보리를 구하며, 나는 곳에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법을 듣는, 그것으로써 원

을 삼는다. 이 사람은 따로 정토를 구하지 않지만, 또한 어려움을 만나 물

러나고 잃을 근심도 없다. 혹 정토와 예토, 괴로움과 즐거움에 좋고 싫어하

는 마음이 많은 사람은, 닦는 바의 정혜(定慧)와 모든 선근을 회향하여 저

세계에 태어나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법을 들어 빨리 물러나지 않음을 이

루어 되돌아와서 중생을 제도하기를 원하고 구하는, 그것으로써 원을 삼는

다. 이 사람은 뜻으로는 비록 오로지 안으로 비춘다고 하지만 참는 힘이 아

직 이루어지지 못해서 이 예토에 머물러 여러 고난을 만나면 물러나고 잃

는 근심이 있을까 두려워한다.

此內外相資中, 有二種人, 所願129)各異. 或有悲願130)重者, 於

此世界, 不厭生死, 自利利他, 增長悲智, 求大菩提, 所生之

處, 見佛聞法, 以之爲願也. 此人, 不別求淨土, 亦無逢難退

失之患. 或有淨穢苦樂, 欣厭心重者, 所修定慧, 及諸善根廻

向, 願131)求生彼世界, 見佛聞法, 速成不退, 却來度生, 以之爲

願132)也. 此人, 意謂雖專內照, 忍力未成, 留此穢土, 逢諸苦

難, 恐有退失之患.

129) 저본에서는「愿」으로 되어 있으나 을본・정본・병본에 따라「願」으로 바꾸었다.

130) 저본에서는「愿」으로 되어 있으나 을본・정본・병본에 따라「願」으로 바꾸었다.

131) 저본에서는「愿」으로 되어 있으나 을본・정본・병본에 따라「願」으로 바꾸었다.

132) 저본에서는「愿」으로 되어 있으나 을본・정본・병본에 따라「願」으로 바꾸었다

이 안팎으로 서로 돕는 두 종류 사람의 뜻과 원이 성인의 가르침에 깊이

합하여 모두 도리가 있다. 이 가운데 정토에 나기를 구하는 사람은 밝고 고

요한 성품 가운데 정혜(定慧)의 공덕이 있어서 멀리 저 부처님 안으로 증

득한 경계에 계합한다. 그러므로 저들이 다만 명호만 부르고 거룩한 얼굴

을 생각하며 왕생하기를 희망하는 사람과 견주어보면 우열을 알 수 있다.

此內外相資, 二種人志願133), 深諧聖敎, 皆有道理. 此中, 求生

淨土者, 於明靜性中, 有定慧之功, 懸契彼佛內證境界. 故望彼

但稱名號, 憶想尊容, 希望往生者, 優劣可知矣.

133) 저본에서는「愿」으로 되어 있으나 을본・정본・병본에 따라「願」으로 바꾸었다.

지자(智者)134)대사가 문인들에게 말한다. “불붙는 수레의 모양이 나타나

더라도 한 생각을 고쳐 뉘우치는 사람은 오히려 왕생할 수 있는데, 하물며

계・정・혜를 익혀 수행한 도의 힘이겠는가. 공력이 헛되이 없어지지는 않

는다.”135)『정명경(淨名經)』에서 이르기를, “부처님의 국토를 깨끗이 하고

자 한다면 마땅히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 그 마음이 깨끗함을 따라 곧 부

처님의 국토도 깨끗해진다.”136)라고 한다.『법보기단경(法寶記壇經)』에서

이르기를, “마음에 다만 깨끗하지 않음만 없다면 서방이 여기서 멀지 않다.

성품이 깨끗하지 않은 마음을 일으킨다면 어떤 부처가 와서 맞이하여 청하

겠는가.”137)라고 한다. 연수(延壽)선사가 말하기를, “마음을 알면 바야흐로

유심정토에 나고, 경계에 집착하면 단지 연하는 바의 경계 가운데 떨어질

뿐이다.”138)라고 하였다. 위에서와 같이 부처님과 조사들이 설한 바의 정토

에 나기를 구하는 뜻은 모두 자기의 마음을 여의지 않는다. 모르겠다. 자기

마음의 근원을 여의고 어디로 들어갈 수 있을까.

智者大師, 臨終謂門人曰, “火車相現, 一念改悔者, 猶能往生,

況戒定慧熏, 修行道力. 功不唐損.” 淨名經云, “欲淨佛土, 當

淨其心. 隨其心淨, 卽佛土淨.” 法寶記壇經云,“ 心地但無不

淨, 四方去此不遠. 性起不淨之心, 何佛卽來迎請.” 壽禪師云,

“識心, 方生唯心淨土, 着境, 只墮所緣境中.” 如上佛祖所說,

求生淨土之旨, 皆不離自心. 未審. 離自心源, 從何趣入.

134) 지자(智者)의 법명은 지의(智顗, 538~597)로 중국 천태종(天台宗)의 개조이다.

그는 형주 화용현(華容縣)사람으로 속성은 진(陳)씨이고, 자는 덕안(德安)이며,

세상에서는 지자대사(智者大師)・천태대사(天台大師)라고 불렀다. 18세에 출가

하여 혜광(慧曠)율사로부터 율과 대승교학을 배웠고, 560년에는 혜사(慧思)를

찾아가서 천태의 심관을 전해 받았다. 38세에 천태산으로 들어가 수선사를 창

건하고『법화경』을 중심으로 천태교학의 체계를 완성하였으며, 591년 여산에

서 진왕 양광에게 보살계를 주고 지자대사(智者大師)의 호를 받았다. 개황 17

년 천태산 대석상 앞에서 입적하였으며, 후주 세종이 법공보각존자(法空寶覺尊

者), 송의 영종이 영혜대사(靈慧大師)라고 시호하였다. 법을 전한 제자가 32인이

었으며, 장안관정(章安灌頂)이 상수였다. 대표적인 저서로『법화현의』,『법화문

구』,『마하지관』등 30여부가 전한다.[『속고승전(續高僧傳)』권17의「수국사지자

천태산국청사 석지의전(隋國師智者天台山國淸寺釋智顗傳)」(大50, pp.564a-568a) ;

『수천태지자대사별전(隋天台智者大師別傳)』(大50, pp.191a-198a) 참조.]

135) 관정(灌頂),『수천태지자대사별전(隋天台智者大師別傳)』(大50, p.196a27-29).

136)『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권상, 「불국품(佛國品)」(大14, p.538c4-5).

137) 이 구절은『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에 수록된 두 종류의『육조단경(六

祖壇經)』에서 확인할 수 없다. 법해(法海)가 집록한 『육조단경』에서 이 구절과

유사한 내용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즉, “마음에 단지 깨끗하지 않음만 없다면

서방이 여기서 멀지 않다. 마음에 깨끗하지 않은 마음을 일으키면 염불하여 왕

생함이 도달하기 어렵다. … 십악의 마음을 끊지 않는다면 어떤 부처가 와서 맞

이하여 청하겠는가?”(大48, p.341b15~18. 心但無不淨, 西方去此不遠. 心起不淨之

心, 念佛往生難到. … 不斷十惡之心, 何佛卽來迎請?) 종보(宗寶)가 편찬한『육조단

경』에서 이 구절과 유사한 내용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즉, “사군이여 마음에

다만 선하지 않음이 없다면 서방이 여기서 멀지 않다. 만약 선하지 않은 마음을

품었다면 염불하여 왕생함이 도달하기 어렵다. … 십악의 마음을 끊지 않는다

면 어떤 부처가 와서 맞이하여 청하겠는가?”(大48, p.352a25-b2. 使君, 心地但無不

善, 西方去此不遙. 若懷不善之心, 念佛往生難到. … 不斷十惡之心, 何佛即來迎請?)

138)『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 권상(大48, p.966c3-4).

『여래부사의경계경(如來不思議境界經)』에서 이르기를, “삼세의 모든 부

처님은 모두 있는 바가 없으나 오직 자기 마음을 의지한다. 보살이 만약 모

든 부처님과 일체법이 모두 오직 마음의 헤아림임을 알면 수순하는 법인

[隨順忍]을 얻고, 혹은 초지(初地)에 들어 몸을 버리고 빠르게 묘희(妙喜)

세계139)에 태어나며, 혹은 극락의 깨끗한 부처님의 국토에 태어난다.”140)

고 하였으니, 이것이 그 증거이다. 이로써 미루어보면, 비록 염불하여 왕생

을 구하지 않더라도 다만 오직 마음뿐임을 알고 그에 따라 관찰하면 자연

히 저 국토에 나는 것이 반드시 정해져 의심할 것 없다.

如來不思議境界經云,“ 三世一切諸佛, 皆無所有, 唯依自心.

菩薩, 若能了知諸佛及一切法, 皆唯心量, 得隨順忍, 或入初地

捨身, 速生妙喜世界, 或生極樂淨佛土中.” 此其證也. 以此而

推, 雖不念佛求生, 但了唯心, 隨順觀察, 自然生彼, 必定無疑.

139) 묘희(妙喜) 세계는 동방 아촉여래의 정토, 불국토를 가리킨다.『유마힐소설경

(維摩詰所說經)』의「견아촉불품(見阿閦佛品)」에서는 유마거사가 살았던 국토를

묘희 세계라고 하였다.(大14, p.555b5-6)

140)『대방등여래부사의경계경(大方廣如來不思議境界經)』(大10, p.911c20-24).

요즘 대부분의 의리를 배우는 사문들이 이름을 버리고 도를 구하지만,

모두 바깥 모양에 집착해서 얼굴을 서방으로 향하고 큰 소리로 부처를 부

르는 것을 도행으로 삼고, 전부터 배우고 익혀왔던 마음을 밝히는 부처님

과 조사들의 비결을 명리를 배우는 것으로 여기며, 또한 [자기들] 분상의

경계가 아니라고 여겨 끝내 마음을 두지 않고 일시에 버려버린다. 이미 마

음 닦는 비결을 버리고 돌이켜 비추는 공능도 알지 못한 채, 한낱 총명한

지혜의 마음만 가지고 헛되이 평생의 힘을 써서 마음을 등지고 모양을 취

하면서 성인의 가르침을 의지한다고 말하니, 모든 지혜 있는 사람들이 어

찌 슬퍼하지 않겠는가.

近世, 多有義學沙門, 捨名求道, 皆着外相, 面向西方, 揚聲喚

佛, 以爲道行, 前來學習發明心地, 佛祖秘訣, 以謂名利之學,

亦謂非分境界, 終不掛懷, 一時棄去. 旣棄修心之秘訣, 不識返

照之功能, 徒將聰慧之心, 虛用平生之力, 背心取相, 謂依聖

敎, 諸有智者, 豈不痛傷.

고산지원(孤山智圓)141) 법사의「아미타경소서(阿彌陀經疏序)」에서 말한

다. “무릇 심성의 본체가 되는 것은 밝고 고요한 하나일 뿐이다. 범부와 성

인이 없으며, 의보[依]와 정보[正]142)가 없으며, 긺과 짧음이 없으며, 깨끗

함과 더러움이 없지만, 그것이 중생에 감응하여 움직이고 연에 따라 변하

는데 미치면 육범(六凡)143)이 되고 삼성(三聖)이 되며, 의보가 있고 정보가

있다. 의보와 정보를 이미 만들었다면 몸의 수명도 길고 짧음이 있고 국토

도 깨끗하고 더러움이 있는 것이다. 우리 부처님 대성인께서는 밝고 고요

한 하나를 증득한 분이다. 그래서 길을 자애에서 빌리고 숙소를 연민에 의

탁해서 장차 온 중생의 미혹을 이끌어서 그 근본을 회복하게 하고자 한 것

이다. 이에 몸이 없이 몸을 보이고 국토가 없이 국토를 보이며, 수명을 늘

리고 국토를 깨끗이 하여 그들을 기쁘게 하고, 수명을 재촉하고 국토를 더

럽혀 그들을 싫어하게 하였다. 이미 기뻐하고 또 싫어하면 점점 가르치는

꾀가 행해지는 것이다. 비록 보배 누각과 금빛 연못이 눈을 즐겁게 하는 노

리개일 뿐이지만, 미혹하고 방탕하게 하는 색이 아니라 오직 마음일 뿐 경

계가 없음을 통달할 수 있게 한다. 비록 바람 부는 나무와 새소리가 귀에

들어오는 즐거움이지만, 가락이 맞지 않는 소리가 아니라 삼보를 생각하여

돌아갈 수 있게 한다. 무릇 이와 같다면 밝고 고요한 본체를 회복하는 것이

손바닥 뒤집는 것과 같다.”144)

孤山智圓法師, 阿彌陀經疏序云,“ 夫心性之爲體也, 明乎靜

乎, 一而已矣. 無凡聖焉, 無依正焉, 無延促焉, 無淨穢焉, 及

其感物而動, 隨緣而變, 則爲六凡焉, 爲三聖焉, 有依焉, 有正

焉. 依正旣作, 則身壽有延促矣, 國土有淨穢矣. 吾佛大聖人,

得明靜之一者也. 乃假道於慈, 託宿於悲, 將欲敺群迷, 使復其

本. 於是乎, 無身而示身, 無土而示土, 延其壽淨其土俾其欣,

促其壽穢其土俾其厭. 旣欣且厭, 則漸諭之策, 行矣. 雖寶樓金

池, 爲悅目之翫, 而非惑蕩之色, 而能達唯心無境矣. 雖風樹鳥

聲, 有入耳之娛, 而非惉懘之音, 而能念三寶有歸矣. 夫如是,

則復乎明靜之體者, 如轉掌耳.”

141) 고산지원(孤山智圓, 976~1022) 법사는 전당(錢塘) 사람으로 속성은 서(徐)씨이

고 자는 무외(無畏)였으며, 호는 잠부(潛夫) 또는 중용자(中庸子)라고 하였다. 그

는 8세에 출가하여 처음에는 유학을 배워 시문에 능했으며, 후에는 봉선사의 원

청(源淸)스님 아래서 천태교관을 배웠다. 원청스님이 입적한 후에는 산외파(山

外派)의 학설을 세워 천태종의 정통적인 입장인 산가파(山家派)의 사명지례(四

明知禮) 법사와 논변을 벌이기도 했다. 그 후에는 서호의 고산(孤山)에서 은거

하면서 경론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다가 47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그는 『아

미타경소』,『수능업경소』,『무량의경소』등 열 종류의 주석을 남겼으며, 이 주석

들은 십본소주(十本疏主)라고 불렸다. 그는 고산에서 은거하여 오래 살았으므

로 ‘고산지원’으로 불렸으며, 시호는 법혜대사(法慧大師)였다.[『불조통기(佛祖統

記)』권10의「법사지원(法師智圓)」(大49, p.204c-205b) 참조.]

142) 의보[依]와 정보[正]는 중생이 의지하여 살고 있는 환경과 그 안에 살고 있는 생

명체를 가리킨다. 과거세에 지은 행위의 과보로 금세에 받아 태어난 유정의 몸

을 정보(正報)라고 하며, 그 육신이 의지하는 객관의 환경, 곧 국토와 가옥, 의

복, 식물 등을 의보(依報)라고 한다.

143) 육범(六凡)은 육계(六界)를 가리키며, 이는 십계(十界) 가운데 범부(凡夫)의 세

계를 뜻한다. 범부의 세계는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

羅), 인간(人間), 천상(天上) 등의 여섯 종류의 세계이다.

144) 지원(智圓),『불설아미타경소병서(佛說阿彌陀經疏幷序)』(大37, pp.350c18-351a5).

나는 지원법사가 우리 부처님의 좋은 방편의 근본과 지말을 깊이 아는 분

이라고 여긴다. 지금 번거로운 글을 인용한 것은 요즘 정토를 구하는 사람

들이 부처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닦아서 공력을 잘못 쓰지 않게 하고자 함

이다. 부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비록 부처님의 명호를 생각하여 부지런

히 왕생을 구하지만, 저 부처님 경계의 장엄하는 등의 일이 옴도 없고 감도

없으며 오직 마음을 의지하여 나타나 진여를 여의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생각하고 생각하는 가운데 혼침과 산란을 여의고 정혜(定慧)를 고르게 하

여 밝고 고요한 성품에 어긋나지 않으면, 털끝만큼도 차이나지 않아서 감응

의 길이 통함이 마치 물이 맑으면 달이 나타나고 거울이 깨끗하면 그림자가

분명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에서 말한다. “부처

님은 실제로 오지 않았고, 마음도 또한 가지 않는다. 감응의 길이 통하여 오

직 마음이 스스로 나타난다.”145) 또 게송으로 말한다. “예를 올리는 이와 예

를 받는 이가 성품이 텅 비고 고요하니 감응하는 길 통함이 헤아리기 어렵

다.”146) 이 사람은 반드시 마음 밖의 경계를 취하여 치우친 헤아림으로 잘못

된 집착을 일으켜 모든 마군의 일을 불러서 부처님의 뜻을 위배해서는 안

된다. 모든 도를 닦는 사람들은 간절하고 반드시 뜻에 두어야 한다.

予謂圓師深知吾佛善權本末者也. 今引繁文, 庶使今時求淨土

者, 知佛意而修之, 不枉用功耳. 知佛意者, 雖念佛名, 懃求往

生, 知彼佛境莊嚴等事, 無來無去, 唯依心現, 不離眞如. 念念

之中, 離於昏散, 等於定慧, 不違明靜之性, 則分毫不隔, 感應

道交, 如水澄月現, 鏡淨影分. 故萬善同歸集云,“ 佛實不來,

心亦不去. 感應道交, 唯心自見.” 又偈云,“ 能禮所禮性空寂

感應道交難思議.” 此人, 必不取心外境界, 而興遍計倒執, 招

諸魔事, 違背佛意也. 諸修道者, 切須在意.

145)『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권상(大48, p.967b3-4).

146) 지례(知禮),『천수안대비심주행법(千手眼大悲心咒行法)』(大46, p.974b21).

혹 어떤 수행자들은 이름과 모양을 굳게 집착하여 대승의 오직 마음뿐이

라는 법문을 듣지 않는다. 또한 우리 부처님이 밝고 고요한 성품 가운데 본

원력으로써 방편으로 몸과 국토를 나타내어 환(幻)같이 머무는 장엄으로

중생들을 거두어 이끌어서 그들로 하여금 귀와 눈이 즐거워하는 것으로 오

직 마음일 뿐 경계가 없음을 통달하게 하여 그 근본의 좋은 방편을 회복하

게 함을 알지 못한다. 도리어 염불하여 왕생하면 오온의 몸을 가지고 한량

없는 낙을 받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생각의 집착을 잊지 못하기 때문에 혹

선을 닦는 사람을 보면, 이 사람은 염불해서 왕생을 구하지 않으니 어느 때

에 삼계를 벗어나겠는가하고 생각한다.

或有行者, 堅執名相, 不聞大乘唯心法門. 又不識吾佛, 於明靜

性中, 以本願147)力, 權現身土, 幻住莊嚴, 攝引衆生, 令其耳目

所翫, 達唯心無境, 復其本之善權. 却謂念佛往生, 將五蘊身,

受無量樂. 以是情執未忘故, 或見修禪者, 以爲是人, 不念佛求

生, 何時出離三界哉.

147) 저본에서는「愿」으로 되어 있으나 을본・정본・병본에 따라「願」으로 바꾸었다.

성인의 가르침에서 밝힌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에 곧 부처님의 국토가

깨끗하다’148)라는 취지를 알지 못하고, 또한 ‘닦는 바의 마음은 텅 비고 밝

아 대상이 없다’고 설하는 것을 듣고는 몸이 즐거움을 받을 곳이 없다고 여

겨 공(空)에 떨어질까 두려워한다. 공(空)은 본래 공(空)이 없어서 오직 이

여래의 원만한 깨달음의 밝고 고요한 마음이 허공과 같이 법계에 두루하여

중생의 마음을 모두 갖추어 사이와 끊어진 곳이 없음을 알지 못한다. 모든

중생의 무명(無明)149)으로 분별하는 마음은 그곳이 텅 비고 밝아 시방의 모

든 부처님과 더불어 동일한 지혜의 바다이며 동일한 법의 성품이지만, 다

만 중생들이 종일토록 그 가운데서 살아가면서도 스스로 은덕을 등지고 있

을 따름이다. 이러한 취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집착하고 아끼며 탐내고

애착하는 마음으로써 부처님의 경계를 구하는 것이니, 마치 모난 나무를

가지고 둥근 구멍을 막으려는 것과 같다.

不知聖敎所明, 心淨故, 卽佛土淨之旨, 又聞說所修心地, 空明

無物, 以謂無身受樂之處, 恐落空去. 不知空本無空, 唯是如來

圓覺明靜之心, 同虛空遍法界, 該衆生心, 無間斷處. 一切衆生

無明分別之心, 當處虛明, 與十方諸佛, 同一智海, 同一法性,

祇爲衆生, 終日其中行履, 而自背負恩德耳. 不知斯旨者, 以執

吝貪着之心, 求佛境界, 如將方木逗圓孔也.

148)『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권상,「불국품(佛國品)」(大14, p.538c4-5).

149) 무명(無明, avidyā)은 올바른 지혜가 없는 것으로, 진실을 보지 못하고 진리에

어두운 무지(無知)를 말한다. 일체를 있는 그대로 보는 힘이 없음을 일컫는다.

무명은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비롯한 모든 고통을 초래하는 원인이지만, 무명

이 무명임을 알면 무명은 사라진다.

혹 어떤 수행자는 타고난 성품이 들뜨고 거짓되지만 이 마음 법을 듣고

믿고 즐기며 닦고 익힌다. 그러나 조금 얻은 것으로 만족하고 판단하여 가

리는 [수행을] 더하지 않는다. 지견이 원만하지 못하지만 온전히 근본 성품

만 믿고 만행을 닦지 않으며, 또한 정토도 구하지 않으면서 정토에 나기를

구하는 사람을 보면 가벼이 업신여기는 마음을 낸다. 이 위의 두 사람은 불

법 가운데 마음을 잘 쓰지 못하여 막힘이 많이 있으니 슬프고 애통할 따름

이다. 만약 가장 낮은 근기의 사람이어서 눈멀어 지혜의 눈이 없지만 부처

님의 명호를 부를 줄 알면 그것을 희유하다고 찬탄하니, 어찌 부처님의 뜻

을 알지 못하고 수행하는 것으로써 허물로 삼겠는가.

或有行者, 稟性浮僞, 聞此心法, 信樂修習, 然得少爲足, 不加

決擇, 知見未圓, 全恃本性, 不修萬行, 亦不求淨土, 見求生者,

而生輕慢. 此上二人, 於佛法中, 不善用心, 多有滯障, 可悲可

痛也. 若是最下根人, 盲無慧目, 而知稱佛號, 則歎其希有, 豈

以不知佛意修行爲過哉.

혹 어떤 수행자는 받은 기운이 굳세고 크며 육정[情]의 연이 가장 깊어서

이 마음의 법을 들으면 뜻을 둘 곳을 알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능히 저 부처

님의 백호 광명을 관하고 혹은 범자(梵字)를 관하며 혹은 경을 외우고 염불

을 할 수 있어서, 이와 같은 수행의 문에 오로지 정미하여 어지럽지 않고 망

상을 고르게 할 수 있어서 미혹의 장애를 입지 않고 범행을 이룬다. 이 사람

은 처음에는 일을 쫓아 행하지만 감응의 길이 통하여 결국에는 오직 마음의

삼매에 든다. 그러므로 이 또한 부처님의 뜻을 잘 아는 사람이다.

或有行者, 受氣剛大, 情緣最深, 聞此心法, 不知措意之處, 然,

能觀彼佛白毫光明, 或觀梵字, 或誦經念佛, 如是行門, 專精不

亂, 能調妄想, 不被惑障, 梵行成建. 此人, 初從事行, 感應道

交, 終入唯心三昧. 故亦是善知佛意者也.

비석(飛錫)150)화상의 『고성염불삼매보왕론(高聲念佛三昧寶王論)』에서

말한다. “큰 바다에서 목욕하는 사람은 이미 백 가지 냇물을 사용한 것이

며, 부처님의 명호를 생각하는 사람은 반드시 삼매를 이룬다. 또한 마치 맑

은 구슬을 흐린 물에 내려놓으면 흐린 물이 맑아지지 않을 수 없듯이, 부처

님 생각을 어지러운 마음에 던지면 어지러운 마음이 부처가 아닐 수 없다.

이미 계합한 뒤에는 마음과 부처가 함께 없으니, 함께 없음은 정(定)이며

함께 비춤은 혜(慧)이다. 정혜(定慧)가 이미 고르다면 또한 어떤 마음이 부

처가 아니며, 어떤 부처가 마음이 아니겠는가. 마음과 부처가 이미 그러하

다면 만 가지 경계와 만 가지 연이 삼매 아님이 없다.”151) 누가 다시 마음이

일어나고 생각이 움직이는 것을 근심하여 높은 소리로 부처를 부르겠는가.

飛錫和尙, 高聲念佛三昧寶王論云.“ 浴大海者, 已用於百川,

念佛名者, 必成於三昧. 亦猶淸珠下於濁水, 濁水不得不淸, 念

佛投於亂心, 亂心不得不佛. 旣契之後, 心佛雙亡, 雙亡定也,

雙照慧也. 定慧旣均, 亦何心而不佛, 何佛而不心. 心佛旣然,

則萬境萬緣, 無非三昧.” 誰復患之於起心動念, 高聲稱佛哉.

150) 비석(飛錫)은 당(唐)나라 때의 스님으로 행적과 생몰년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다

만 그는 신력이 높았고 학식이 헤아릴 수 없었으며, 일찍이 율의를 연구하였고

밀교를 닦아 증득한 바가 있었다고 한다. 대종(代宗) 영태(永泰) 원년(765)에는

칙명으로 불공(不空) 삼장의 역장에 참여하여『인왕호국반야경』,『밀엄경』 등

의 번역을 돕기도 하였다. 그는『염불삼매보왕론』 3권을 저술하여 정토사상을

선양하였으며,『무상심묘선문전집법보』1권과『서왕생정토문』1권을 저술하였

다.[『송고승전(宋高僧傳)』권3의「당대성천복사비석전(唐大聖千福寺飛錫傳」(大50,

p.721c3-c21) 참조.]

151) 비석(飛錫),『염불삼매보왕론(念佛三昧寶王論)』권상(大47, p.134a25-b2).

『문수소설반야경(文殊所說般若經)』 가운데 ‘염불로 일행삼매(一行三

昧)152)를 얻는다’153)고 밝힌 것도 또한 이 뜻과 같다. 이 뜻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도리어 보는 것마다 애착하는 생각을 가지고 저 부처님의 상호를

관하고, 저 부처님의 명호를 생각하면서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지면 대부

분 마군과 도깨비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미쳐서 날뛰다가 헛되이 공부를

수고롭게 하여 일생을 망치게 된다. 요즘에 자주 자주 이와 같은 사람을 보

고 들었는데, 모두 십계의 의보・정보와 선・악의 인과가 오직 마음이 지은

바라서 본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임을 알지 못한 것에서 말미암는다.

文殊所說般若經中, 明“念佛, 得一行三昧”者, 亦同此意也. 不

了此意者, 却將見愛之情, 觀彼佛相, 念彼佛名, 日久歲深, 多

爲魔魅所攝, 顚狂浪走, 虛勞功夫, 傾覆一生. 近世, 頻頻見聞

如此之人, 皆由不知十界依正, 善惡因果, 唯心所作, 無體可得

故也.

152) 일행삼매(一行三昧)는 모든 부처님의 법신과 중생의 몸이 평등하여 둘이 없어

서 온 법계가 하나의 모양임을 아는 것으로, 이는 모든 삼매의 근본이다.[『대승

기신론(大乘起信論)』, 大32, p.582b1-3 참조.]『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는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더라도 항상 하나의 곧은 마음[直心]을 행하는 것이 일행삼매

라고 하며, 항상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망령되게 마음을 일으키지 않음이 일행

삼매라고 한다.(大48, pp.352c25-353a1)

153) 이 내용은『문수사리소설마하반야바라밀경(文殊師利所說摩訶般若波羅蜜經)』에

서 확인할 수 없으며, 이 경에서는 일행삼매를 증득하는 수행에 대한 내용만을

볼 수 있다.(大8, 731a25-b19) 즉, “법계의 한 모습이 법계를 매어 연함을 일행삼

매라고 한다.”(大8, 731a27. 法界一相, 繫緣法界, 是名一行三昧.)

혹은 앉아 있는 동안에 하늘 사람과 보살상과 혹은 여래상이 상호가 구

족한 것과 혹은 단정한 남자와 여자 및 여러 두려운 모양을 보거나, 모든

갖가지 허깨비에 미혹한 일을 말하고, 혹은 비록 밖으로 나타나는 모양은

아니지만 자기 마음 가운데 마군의 일에 따라 순응하는 나쁜 느낌과 생각

의 견해를 다 말할 수 없다. 이러한 때를 당해서는 혼미하여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구제할 지혜가 없어서 마군의 그물에 걸려 있으니 참으로 불쌍할

따름이다.『기신론』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마땅히 오직 마음뿐임을 생각

하면 경계가 곧 없어져서 끝내 괴로움이 되지 않는다.”154) 또 말한다. “수행

자는 항상 지혜로써 관찰하여 이 마음을 삿된 그물에 떨어지지 않게 하라.

마땅히 부지런히 바르게 생각하여 취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아야 한

다.”155) 가르친 뜻이 이와 같으니 어찌 경계를 쫓아 마음을 등지고서 부처

님의 보리를 구할 수 있겠는가.

或於坐中, 見天人菩薩像, 或如來像相好具足, 或端正男女, 及

諸恐怖之相, 說諸種種幻惑之事, 或雖非外現之相, 於自心中

隨順魔事, 惡覺情見, 不可具陳. 當此之時, 昏迷不省, 無慧自

救, 橫罹魔網, 良可傷哉. 起信論不云乎.“ 當念唯心, 境界卽

滅, 終不爲惱.” 又云.“ 行者, 常以智慧觀察, 勿令此心, 墮於

邪網. 當勤正念, 不取不着.” 敎旨如斯, 何得逐境背心, 而求

佛菩提哉.

154)『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大32, p.582b6-7).

155)『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大32, p.582b21-23).

요즘 수행자들이 대부분 “다만 염불해서 왕생을 얻은 연후에는 뭐가 있

는가”라고 말하는데, 구품(九品)에 오르고 내림이 모두 자기 마음을 신해함

이 크고 작고 밝고 어두움을 말미암아 나타남을 알지 못해서이다. 경전 가

운데서 ‘제일의제(第一義諦)156)를 알고 권하여 수행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상품이 된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총명하고 영리한 마음으로써 달게 아둔

한 근기가 되어 제일의를 알지 못하고 단지 명호만 부르겠는가.

今時行者, 多云,“ 但得念佛往生, 然後何有哉,” 不知九品昇

降, 皆由自心信解, 大小明昧而發現也. 經中, ‘以解第一義諦,

勸進行者, 爲上品,’ 豈以聰明靈利之心, 甘爲鈍根, 不解第一

義, 但稱名號哉.

156) 제일의제(第一義諦, paramārtha-satya)는 승의제(勝義諦)・진제(眞諦)・성제(聖

諦) 등으로도 부르며, 세속제(世俗諦)・속제(俗諦)와 상대되는 말이다. 제(諦)는

진리의 뜻이므로, 제일의제는 가장 수승한 최고의 진리를 가리킨다.

『만선동귀집』에서 말한다. “구품에 왕생하는 것은 위・아래가 모두 통달

한다. 혹은 변화 국토에 노닐면서 부처님의 응신을 보고, 혹은 보토에 태어

나서 부처님의 참모습을 보며, 혹은 하루 저녁에 문득 상품(上品)의 경지에

오르고, 혹은 겁수를 지내고 바야흐로 소승을 증득하며, 혹은 영리한 근기

와 아둔한 근기, 혹은 안정된 마음과 산란한 마음이다.”157) 이로써 알아라.

예나 지금이나 통달한 사람들은 비록 정토를 구하지만, 깊이 진여를 믿고

정혜(定慧)를 오로지 하는 것으로써 한다.

萬善同歸集云,“ 九品往生, 上下俱達. 或遊化國, 見佛應身,

或生報土, 覩佛眞體, 或一夕而便登上地, 或經劫而方證小乘,

或利根鈍根, 或定意散意.” 是知, 古今達者, 雖求淨土, 以深

信眞如, 專於定慧.

157)『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 권상(大48, p.968b12-15).

그러므로 알아라. 저 색상으로 장엄한 등의 일은 옴도 없고 감도 없으며

영역을 여의고 오직 마음을 의지해 나타나서 진여를 여의지 않는다. 범부

와 이승은 식(識)이 바뀌어서 나타난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밖으로부

터 오는 것으로 보아 색(色)의 영역을 취하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

와 같다면 비록 “함께 정토에 난다”고 하지만 어리석은 이와 지혜로운 이의

행하는 모양이 하늘과 땅처럼 멀리 떨어졌다. 어찌 지금 대승의 유심 법문

을 배워서 정혜(定慧)를 오로지 하는 것이 범부와 소승이 마음 밖에서 색

(色)을 취하는 영역의 견해에 떨어짐을 면하는 것과 같겠는가.

故知. 彼色相莊嚴等事, 無來無去, 離於分齊, 唯依心現, 不離

眞如. 不同凡夫二乘, 不知轉識現故, 見從外來, 取色分齊故

也. 如是, 則雖曰“同生淨土,” 愚智行相, 天地懸隔. 何如現今

學大乘唯心法門, 專於定慧, 免墮凡小, 心外取色分齊之見也.

만약 조사의 종지를 따르는 문하에서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는 비밀한

뜻으로 가리켜 주는 곳은 이 한계에 있지 않다. 기(琪)화상이 “능히 조사의

도를 깨달아 반야(般若)158)를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말법 세계에는 있지

않다”라고 말하였다.

若是祖宗門下, 以心傳心, 密意指授之處, 不在此限. 琪和尙

云,‘ 能悟祖道, 發揮般若者, 末季未之有也.’

158) 반야(般若, prajñā)는 파야(波若), 반라야(般羅若) 등으로 음사하고 혜(慧), 지

혜(智慧), 명(明) 등으로 번역한다. 반야는 모든 사물이나 도리를 꿰뚫어볼 수 있

는 깊은 지혜를 의미한다. 혜원(慧遠, 523~592)은『대승의장(大乘義章)』에서『대

지도론(大智度論)』에 근거하여 반야를 세 가지로 해석하였다.(大44, pp.669a-

670a) 첫 번째는 문자반야(文字般若)이며, 문자는 반야가 아니지만 반야를 드러

내는 방편이므로 문자반야라 한다. 두 번째는 관조반야(觀照般若)이며, 모든 법

의 실상을 관조하는 반야 지혜의 작용을 말하는 것으로 관조하는 체(體)가 반야

이므로 관조반야라고 한다. 세 번째는 실상반야(實相般若)이며, 관조하여 알게

되는 경계로서 그 체는 비록 반야가 아니나 반야의 지혜를 내는 것이므로 실상

반야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권수문』중에는 모두 대승 경론의 뜻을 의지하여 밝은 증

명으로 삼아, 현재 전하는 문에서 신해하여 밝음을 드러낸 연유로서의 이

치와 아울러 나고 죽으며 정토와 예토에 가고 오는 옳고 그름을 간략히 밝

혔다. 결사에 들어와 마음 닦는 사람들이 그 근본과 지말을 알고 모든 다툼

을 쉬며 방편과 진실을 밝혀서 대승 법문의 바른 수행의 길에서 잘못 공력

을 쓰지 않아, 함께 바른 인(因)을 맺고 함께 정혜(定慧)를 닦으며 함께 행

원(行願)을 닦고 함께 불지(佛地)에 나며 함께 보리(菩提)를 증득하게 하고

자 한다. 이와 같은 모든 것을 모두 다 함께 배워서 미래의 시간이 다하도

록 자재하게 노닐며, 시방 세계에 서로 주인과 반려가 되어 한 가지로 서로

도와 이루며, 바른 법륜을 굴려 널리 중생을 제도하여 그로써 모든 부처님

의 막대한 은혜를 갚고자 함이다.

故此勸修文中, 皆依大乘經論之義, 爲明證, 略辯現傳門, 信解

發明之由致, 并出生入死淨穢往來之得失, 欲令入社修心之人,

知其本末, 息諸口諍, 辯其權實, 不枉用功於大乘法門正修行

路, 同結正因, 同修定慧, 同修行願159), 同生佛地, 同證菩提,

如是一切, 悉皆同學, 窮未來際, 自在遊戱, 十方世界, 互爲主

伴, 共相助成, 轉正法輪, 廣度群品, 以報諸佛莫大之恩.

159) 저본에서는「愿」으로 되어 있으나 을본・정본・병본에 따라「願」으로 바꾸었다.

우러러 생각하노니, 부처님의 눈으로 이 작은 정성을 증명하시어 널리 법

계의 뭇 중생들을 위하여 함께 정혜(定慧)를 닦는 이 원을 일으키게 하소서.

슬프다. 중생이 가고 오는 곳은 육도(六道)이다. 귀신은 깊은 근심의 괴로움

에 빠져 있고, 새와 짐승은 놀라서 날고 달리는 슬픔을 품었으며, 아수라는

바야흐로 성내고, 모든 하늘은 바로 즐거우며, 마음과 생각을 정리함으로써

보리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람의 세계[人道]에서만 할 수 있을 뿐이

다. 사람이면서 하지 않는 것은 나도 어찌할 수 없을 따름이다.160)

仰惟佛眼, 證此微誠, 普爲法界群迷, 發此同修定慧之願161).

嗚呼, 衆生之所以往來者, 六道也. 鬼神沈幽愁之苦, 鳥獸懷獝

狘之悲, 修羅方嗔, 諸天正樂, 可以整心慮趣菩提者, 唯人道能

爲耳. 人而不爲, 吾末如之何也已矣.

160) ‘나도 어찌할 수 없을 따름이다’라는 구절은『논어(論語)』의「위령공(衛靈公)」편

에 나오는 다음 구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어찌할까, 어찌할까, 말하지 않는 사

람은 나도 어찌할 수 없을 따름이다.”(不曰, 如之何, 如之何者, 吾末如之何也已矣.)

161) 저본에서는「愿」으로 되어 있으나 을본・정본・병본에 따라「願」으로 바꾸었다.

지눌이 예전에 대승을 열람하면서 요의승(了義乘)의 경론에서 설하는

바를 차례대로 보니, 어느 한 법도 삼학(三學)의 문으로 돌아가지 않음이

없었고, 어느 한 부처님도 삼학을 빌리지 않고 도를 이룸이 없었다. 『능엄

경(楞嚴經)』에서 이르기를, “과거의 모든 여래도 이 문으로 이미 성취하였

고, 현재의 모든 보살도 지금 각자 원만하고 밝음으로 들어가며, 미래에 닦

고 배울 사람도 마땅히 이와 같은 법을 의지해야 한다.”162)라고 한다.

知訥, 曩閱大乘, 歷觀了義乘經論所說, 無有一法, 不歸三學

之門, 無有一佛, 不藉三學而成道也. 楞嚴經云,“ 過去諸如

來, 斯門已成就, 現在諸菩薩, 今各入圓明, 未來修學人, 當依

如是法.”

162)『능엄경(楞嚴經)』 권6(大19, p.131b8-11).

이러하므로 우리들이 지금 아름다운 기약을 맺고 미리 비밀한 서원을 펴

서 마땅히 범행을 닦는다면, 참된 가풍을 우러러 사모하여 스스로 굽히는

생각을 내지 않고 계・정・혜로써 몸과 마음을 돕고 훈습하며 버리고 또 버

려서 물가와 수풀 아래서 성인의 태(胎)를 길러야 한다. 달빛을 보며 소요

하고 냇물 소리 들으며 자재하여 시간과 공간에 거리낌 없고 곳에 따라 시

간을 소요하는 것이 마치 물결을 따르는 빈 배와 같고 허공을 떠다니는 편

안한 새와 같다. 몸은 세상에 나타내었지만 그윽한 영혼은 법계에 숨겨 근

기에 응하여 감응함이 있어도 항상 그러해서 기준이 없다. 내가 바라는 바

는 그 뜻이 여기에 있다.

만약 도를 닦는 사람이 이름을 버리고 산에 들어와서 이 행을 닦지 않고

거짓으로 위의를 나타내어 신심 있는 단월(檀越)163)들을 속여 미혹하게 한

다면 명리와 부귀를 구하고 술과 여색에 탐착해서 몸과 마음을 황폐하고

미혹하게 하여 헛되게 일생을 보내는 것만도 못하다.

是故, 我輩, 今結佳期, 預伸密誓, 當修梵行, 則仰慕眞風, 不

生自屈, 以戒定慧, 資薰身心, 損之又損, 水邊林下, 長養聖

胎. 看月色而逍遙, 聰川溪而自在, 縱橫放曠, 遂處消時, 猶縱

浪之虛舟, 若凌空之逸翮. 現形容於寰宇, 潛幽靈於法界, 應機

有感, 適然無準矣. 予之所慕, 意在斯焉. 若修道人, 捨名入山,

不修此行, 詐現威儀, 誑惑信心檀越, 則不如求名利富貴, 貪着

酒色, 身心荒迷, 虛過一生也.

163) 단월(檀越, dāna-pati)은 단나(檀那)・단나(旦那) 등으로 음역되며, 간략히 단

(檀)이라고 한다. 단(檀)은 베푼다는 뜻으로 보시(布施)를 말한다. 단월은 베푸

는 사람[施主], 보시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번역명의집(飜譯名義集)』 권1에서

는 “단나는 또한 단월이라 부른다. 단은 곧 베풂이니, 이 사람이 보시를 행하여

빈궁의 바다를 건너기 때문에 단월이라 한다”(大54, p.1073b6)라고 하였다.

모든 스님들이 말을 듣고 다 그렇다고 여기며 말하기를, “다른 날에 이

약속을 이루어 수풀 아래에 은거하여 함께 모임을 맺을 수 있다면 마땅히

정혜(定慧)로써 이름하자.”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맹세하는 글을 만들어

뜻을 맺었다. 그 뒤 뜻하지 않게 선불장의 좋고 나쁜 일을 원인으로 사방으

로 흩어져서 아름다운 기약을 성취하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거의 10년이

되었다.

諸公聞語, 咸以爲然曰,‘ 他日, 能成此約, 隱居林下, 結爲同

社, 則宜以定慧名之.’ 因成盟文而結意焉. 其後, 偶因選佛場

得失之事, 流離四方, 未遂佳期者, 至今幾盈十載矣.

지난 무신년(1188) 이른 봄에 함께 결사를 맺었던 스님 가운데 득재[材

公]164) 선백이 공산 거조사에 머물면서 지난날의 발원을 잊지 않고 장차 정

혜결사를 맺으려고 하가산 보문사에 있는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청함이

두세 번 간절하고 정성스러웠다. 나는 비록 오랫동안 숲속에서 살면서 스

스로 어리석음과 미련함을 지켜가면서 마음 쓰는 바가 없었지만, 그러나

지난날의 약속을 추억하고 또 그 간절한 정성에 감동하여 이 해 춘양(春

陽)165)의 계절을 택해 같이 수행하던 강선자(舡禪者)와 함께 이 절로 옮겨

살게 되었다. 옛날 함께 발원했던 사람들을 불러 모으니, 혹은 죽고 혹은

병들고 혹은 명리를 구해 모이지 못해 나머지 스님들 서너 명과 함께 처음

으로 법석을 열어 지난날의 원에 보답한다.

去戊申年早春, 契內材公禪伯, 得住公山居祖寺, 不忘前願166),

將結定慧社, 馳書請予於下柯山普門蘭若, 再三懇至. 予雖久

居林壑, 自守愚魯, 而無所用心也, 然追憶前約, 亦感其懇誠,

取是年春陽之節, 與同行舡禪者, 移栖是寺. 招集昔時同願167)

者, 或亡或病, 或求名利而未會, 且與殘僧三四輩, 始啓法席,

用酬曩願168)耳.

164) 재공(材公)은 지눌스님의 비문에 나오는 득재(得才)를 가리킨다.(『동문선』권

117, 23左9)

165) 춘양(春陽)은 봄볕을 말하며, 계절로서의 봄을 일컫기도 한다. 굳이 풀이하면 따

뜻한 봄 정도의 의미이다.

166) 저본에서는「愿」으로 되어 있으나 을본・정본・병본에 따라「願」으로 바꾸었다.

167) 저본에서는「愿」으로 되어 있으나 을본・정본・병본에 따라「願」으로 바꾸었다.

168) 저본에서는「愿」으로 되어 있으나 을본・정본・병본에 따라「願」으로 바꾸었다.

엎드려 바라노니, 선문・교문・유교・도교의 세상을 싫어하는 높은 사람

이 풍진 세상을 벗어나 높이 세상 밖에 노닐면서 오로지 안으로 행하는 도

를 정미롭게 하니, 이 뜻에 부합한다면, 비록 지난날 약속을 맺은 원인이

없더라도 결사문 뒤에 이름 쓰는 것을 허락한다. 비록 한 모임에서 습(習)

을 쌓지는 못하지만 항상 생각을 거두어 관조하는 것으로써 본분을 삼아

함께 바른 원인을 닦는다면, 경에서 이르기를, “미친 마음 쉰 곳이 곧 보리

이니, 성품이 깨끗하고 미묘하고 밝은 것이 남에게서 얻음이 아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문수게(文殊偈)에서 말한다.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이 도량이

니, 항하사만큼의 칠보탑을 만드는 것보다 수승하다. 보탑은 결국 부수어

져 티끌이 되지만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은 정각을 이룬다.”169)

그러므로 알아라. 잠깐 동안 생각을 거두어 번뇌를 없앤 인연은 비록 세

가지 재앙[三災]이 휩싸더라도 행업이 깊고 고요할 것이니, 특별히 마음 닦

은 사람이라야 그 이익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伏望, 禪敎儒道, 厭世高人, 脫略塵寰, 高遊物外, 而專精內行

之道, 符於此意, 則雖無往日結契之因, 許題名字於社文之後.

雖未一會而蘊習, 常以攝念觀照爲務, 而同修正因, 則如經所

謂,“ 狂心歇處, 卽是菩提, 性淨妙明, 匪從人得.” 文殊偈云,

‘一念淨心是道場, 勝造河沙七寶塔, 寶塔畢竟碎爲塵, 一念淨

心成正覺.’ 故知. 少時攝念無漏之因, 雖三災彌綸, 而行業湛

然者也, 非特修心之士, 成其益也.

169) 문수게로 소개된 이 구절은『송고승전(宋高僧傳)』권20의「당대주오대산화엄사

무착전(唐代州五臺山華嚴寺無著傳)」(大50, p.837a17-19)에 보인다. 또 『불조통기

(佛祖統紀)』 권41의 협주(大50, p.837a17-19)와『광청량전(廣淸涼傳)』 권2(大51,

p.1112, b13-15) 및『인천보감(人天寶鑑)』권1(卍148, p.101, b11-15)에서도 비슷

한 내용이 보인다.

이러한 공덕으로 축원 올립니다. 성상의 수명은 만세를 누리고 왕자의

수명은 천추를 누리며, 천하는 태평하고 법륜은 항상 구르게 하소서. 삼세

의 스승님과 부모님과 시방의 시주들과 널리 법계의 살아 있는 이와 죽은

이에 이르기까지 다함께 법의 비에 젖는 바를 받아서, 영원히 삼악도의 고

뇌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대광명의 곳집에 뛰어들어 삼매의 성품 바다에

즐거이 노닐고, 미래의 시간이 다하도록 어둠을 열고 등불과 등불을 서로

이어서 밝고 밝음이 다하지 않는다면, 그 공덕 됨이 또한 법성과 더불어 서

로 끝과 시작이 되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선(善)을 좋아하는 군자는 마음

에 두어 생각하고 살피십시오.

以此功德, 上祝. 聖壽萬歲, 令壽千秋, 天下泰平, 法輪常轉.

三世師尊父母, 十方施主, 普及法界生亡, 同承法雨之所霑, 永

脫三途之苦惱. 超入大光明藏, 遊戱三昧性海, 窮未來際, 開發

蒙昧, 燈燈相續, 明明不盡, 則其爲功德, 不亦與法性相終始

乎. 庶幾樂善君子, 留神思察焉.

명창(明昌)170) 원년 경술(1190) 늦봄에 공산에 은거하는 목우자 지눌이

삼가 쓰다.

승안(承安)171) 5년 경신(1200)에 공산에서 강남의 조계산으로 결사를 옮

겼는데, 근처에 정혜사(定慧寺)172)가 있어서 명칭이 혼동되었기 때문에 조

정의 뜻을 받들어 정혜사를 바꾸어 수선사로 하였다. 그러나『권수문』은

이미 유포되었기 때문에 그 옛 이름 그대로 판에 새기고 인쇄하여 베풀 따

름이다.

時, 明昌元年庚戌, 季春, 公山隱居, 牧牛子知訥, 謹誌. 至承

安五年庚申, 自公山, 移社於江南曺溪山, 以隣有定慧寺, 名稱

混同故, 受朝旨, 改定慧社, 爲修禪社. 然, 勸修文, 旣流布故,

仍其舊名, 彫板印施耳.

170) 명창(明昌, 1190~1196)은 중국 금(金)나라 장종(章宗, 1188~1208 지위) 때의 연호

이다.

171) 승안(承安, 1196~1200)은 중국 금(金)나라 장종(章宗, 1188~1208 지위) 때의 연호

이다.

172) 정혜사(定慧寺)는 현재 전라남도 순천시 서면 청소리 계족산 중턱에 있는 사찰

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화엄사의 말사이다. 정혜사는 오래된 사찰이라는

뜻에서 현지에서는 고사(古寺)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송광사 제6세 원감국사 충

지(冲止, 1226~1293)의 문집에 있는 「혜소국사제문(慧炤國師祭文)」(韓4, p.396b)

에 의하면, 혜소국사가 자신이 늙었을 때 머물려고 정혜사를 창건하였으나 절

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뒤를 이어 제자들이 사찰을

완성하고 큰 도량을 이루었다고 한다. 혜소(慧炤)국사는 혜조(慧照)국사로, 대

감국사 탄연(坦然, 1070년~1159년)의 스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