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관련

『육조단경』, 혜능 어록, 광덕 역주, 불광출판사(2008)

수선님 2023. 10. 8. 14:38

육조단경

인도에서 석가로부터 시작된 불교는 중국의 전통사상인 유교와 도교의 개념으로 중국에 수용[격의불교(格義佛敎)]되어 중국화의 길을 걷는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가 된 보리달마(菩提達磨, 527~536)[남인도 출신의 승려로, 인도 불교의 제28대 조사(祖師)이자 선종의 창시자]로부터 제6조인 혜능(六祖慧能, 638~713)과 후대 조사들이 남긴 어록은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불교의 주류를 형성하여 불교의 참 정신을 찬란하게 꽃피운다.

그 가운데 『육조단경(六祖壇經)』[원제는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 이하 『단경』으로 칭함]은 어록임에도 ‘경(經)’의 지위를 획득할 만큼 동아시아 불교에서 절대적 지위를 갖는다. “사람의 본성이 곧 부처다”라는 혜능의 혁명적 선언은 종교를 넘어서 당시 사회 전반에 민본주의적 정신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자기 본래 성품을 떠난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므로 득도(得道)·성불(成佛)하는 데 지위의 높낮이, 빈부귀천, 지역과 민족의 구분 없이 중생이 모두 평등하다는 혜능의 가르침은 전생 업력(業力)의 구속으로부터 사람들을 자유롭게 했다. 그러한 까닭에 1,30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중국인이 저술한 불교 문헌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걸작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단경』은 세계를 움직인 100대 명저에 오르기도 할를 만큼 영향력이 크다.

한국불교의 법맥은 대부분이 혜능의 법손(法孫)이며, 고려불교의 중흥조로 일컫는 지눌은 『단경』을 스승 삼아 수행했다고 전한다. 현재 한국불교의 대표종단인 조계종의 소의(所依)경전[신행(信行)을 비롯하여 교의적(敎義的)으로 의지하는 근본 경전]이 『금강경(金剛經)』과 ‘전등법어(傳燈法語)’[선종의 조사스님들이 깨치고 설법한 법어집으로 『육조단경』, 『임제록』, 『서장』, 『선요』 같은 조사어록을 말함]인데 『단경』은 단연코 대표적인 ‘전등법어’라 할 수 있다.

『단경』은 혜능의 10대 제자의 한 사람인 법해(法海)가 혜능의 생애와 어록을 중심으로 편찬한 것으로 돈황본(燉煌本)[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판본] 외에 여러 판본이 있는데 그 중 우리나라에서 널리 읽히고 있는 것은 덕이본(德異本)이다. 이는 고려 충렬왕 때 승려들과 교류가 많았던 남송 및 원대의 승려 몽산덕이(蒙山德異, 1231~1308)에 의해 교정된 판본(1290)으로 전 10장으로 되어 있다. 책나비에서 소개하는 『단경』은 1975년에 광덕(光德, 1927~1999)이 역주(譯註)해 출간한 덕이본이다.


선종 조사들의 어록을 해설한 책들 가운데 불교도가 아닌 일반인도 이해하기 쉬운 책이 흔하진 않다. 그 중 가장 추천할만한 책은 대만의 법학자이며 철학자이자 외교관이었던 오경웅(吳經熊, 1899∼1986) 박사가 서양인을 대상으로 저술한 『선학(禪學)의 황금시대』[원제 『The Golden Age of Zen』]다. 이 책은 선(禪)에 관한 기독교의 견해를 비롯해 선의 기원과 중요성, 달마로부터 육조혜능 및 후대의 위대한 선사들에 의해 체득되고 교시되었던 선학의 발생과 발전, 정신을 밝히고 있다.

특이할 사항은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이 서장(序章)으로 쓴 ‘선에 관한 기독교의 견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불교적 지혜의 정수와 친교를 맺을 수 있다며 적고 있다. 또한 선 묵상이 그리스도교적 관상(觀想)과 결코 배치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사유와 실재, 주관과 객관을 분리시켜 온 서양의 정신을 치유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방편임을 보여준다. 이는 서양인뿐 아니라 이분법적 사유로 피폐해진 현재의 우리에게도 해당한다.

『단경』의 핵심내용을 요약해 해설한 부분만 발췌해 싣는다. [편집자 주]


혜능의 돈오법문(頓悟法問)

 

후대의 선사들은 달마대사의 교의를 원칙화 하였는데, 이것은 아마 ‘사구게(四句偈)’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경전 밖에 따로이 전하여 敎外別傳

문자에 의존하지 아니하고 不立文字

사람의 마음에 곧장 가리키니 直指人心

자성을 보고 부처를 이룰지니라. 見性成佛

– 『조정사원(祖庭事苑)』과 종감(宗鑑)의 『석문정통(釋門正統)』 참조

이 사구게는 혜능의 생존시에는 없었는데, 그가 죽은 지 얼마 후에야 나타난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 게송은 달마의 정신보다는 혜능의 사상을 더욱 특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중략) 이 사구게는 혜능에게 적용시키더라도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혜능의 정신은 ‘직관적 – 직증(直證)으로’ 활동하고, 그의 지각과 통찰-돈오는 단지 네 구절의 원칙 안에 제한시키기에는 너무 빨리 솟아 넘치는 물줄기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혜능의 사상을 사구게와 연결해서 생각하면 혜능이 정말 가르칠 바를 연상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方便)으로 사용했음을 알게 된다. 한 원칙에서 다른 원칙으로 나아가면서 우리는 동시에 네 가지 원칙이 상호 의존적이고 상관적이어서 어느 정도의 예견과 중복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1. 교외별전(敎外別傳)

교외별전의 의미는 ‘법’이나 본체(本體) 또는 진리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 가능할 뿐이고 경전(經典)들은 다만 우리 자신의 진정한 통찰 – 자오(自悟)를 자극하고 환기시키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경전 이외에 우리를 일깨워 진리로 유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다른 수단들이 있고, 이 깨우침은 먹고 마시는 데 차고 더운 것은 각자가 아는 것과 같이 엄밀히 개인적 경험이라는 것이다. 모든 외적 사물은 우리들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의 반사에 지나지 않으며, 모든 외적 교리는 우리들 자성의 진정한 음악적 메아리에 불과하다. 누구나 자기 자신을 단순히 반사 혹은 메아리와 동일시하지 말 것이다. 자기가 자신의 자성을 봄으로써만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인 바의 존재가 된다.

선사는 비록 그 자신이 아무리 고명하더라도 자기 자신의 깨달음을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주입시키거나 스며들게 할 수는 없다. 그는 기껏해야 해산 시기가 임박한 임산부의 출산을 돕는 조산원에 불과하다.

이 점에서 가장 좋은 설명은 혜능이 조사가 된 후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한 경험에 관한 사실이다. 그가 황매산에서 도망쳐 나왔을 때에 그는 진혜명이라는 중에게 추격을 받았다. 그의 참된 동기가 무엇이었든 진혜명은 의발(衣鉢) 때문이 아니라 구법(求法) 때문에 왔다고 선언하며, 자기가 깨닫도록 진리를 말해 달라고 혜능에게 간청하였다.

“그대가 이미 법을 위하여 왔을진대, 이제 모든 반연(攀緣)[속된 인연에 끌림]을 다 버리고 한 생각도 내지 마시오. 그대를 위하여 말하리다.”

한참이 지나서 혜능은 말을 이었다.

“선(善)도 생각하지 않고 악(惡)도 생각하지 않는 바로 이러한 때 어떤 것이 혜명 상좌 그대의 본래 면목입니까?”

이 말을 듣자 혜명은 곧 대오(大悟)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조사들에 의하여 전승된 비전적인 밀의(密意) 이외에 어떤 극비의 말과 뜻이 또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하여 혜능이 대답하였다.

“그대에게 말한 것은 결코 비밀이 아니네. 그대가 스스로를 반조(返照)해 본다면 비밀은 그대 마음에 있소.”

“비록 저는 오랫동안 황매에 있었으나 실은 아직도 자신의 본래면목을 살피지 못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가르침을 받으오니 마치 스스로 물을 마셔 보고 그 차고 더운 것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

지성(知性) 하나만을 통하여 전달될 수 있는 기술적 지식과는 달리 정신적 지혜는 우리의 모든 존재 – 두뇌와 마음, 육체와 정신 –에 의하여 경험되고 터득되어야 한다. 다윗이 “주계서 얼마나 좋은지 혀로 맛보고 눈으로 본다(『구약』 「시편(詩篇)」 34:8)”고 노래하였을 때, 그는 선적(禪的) 체험을 언급한 것이리라.

경전 공부에 대한 혜능의 태도는 금지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사실 그가 최초로 깨달은 것은 『금강경』을 들음으로써였다. 비록 그 당시 혜능은 문맹자였으나 틀림없이 경전에 대하여 충분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금강경』과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은 말할 것도 없고, 그밖에 『열반(涅槃)』 · 『유마힐(維摩詰)』 · 『능가(楞伽)』 · 『아미타(阿彌陀)』 · 『보살계(菩薩戒)』 등 여러 경전에서 적절한 구절들을 그의 설법에 인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분명히 그는 경전에 대하여 학자로서나 박식한 해설가로서가 아니라 그 정신적 핵심을 이해하는 성자(聖子)로서 접근하였다. 그의 손안에서 경전은 생기를 얻고 정신적 해탈이라는 원대한 목표에 이르게 하는 안내자로 변한다. 그의 다음과 같은 말이 바로 그것이다.

마음이 미혹하니 법화경에 굴리우고 心迷法華轉

마음이 깨달으니 법화경을 굴리누나. 心悟轉法華

혜능에게는 모든 책이란 진실인 한에서 우리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샘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작은 개울물에 불과하다. 위대한 宋代 유학자 육상산(陸象山, 1139~1193)이 “학문에서 만일 그 근본을 안다면, 육경(六經)은 모두 마음속 여러 진리에 대한 각주(脚註)에 불과하다”라고 말하였을 때, 그는 분명히 선적(禪的) 해탈 정신의 영향을 입었음에 틀림없다.

 

2. 불립문자(不立文字)

이 구절은 흔히 ‘언어 문자에 매이지 않음’이라고 해석되어 왔다. 원문에서 ‘입(立)’이라는 글자는 어떤 형태로 정립(定立)한다는 뜻이다. 전체의 의미는 경전 문자에 집착되어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언어의 노예가 되기를 기대해서도 안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전형적인 예로서 혜능은 ‘자성진공(自性眞空)’[본래 가지고 있는 성질은 일체 색과 모양을 초월한 참으로 공허한 현상임] 에 관하여 이야기한 다음, 바로 그의 청중들에게 ‘공(空)’이라는 글자에 집착하지 않도록 경고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지식(善知識)이여, 내가 지금 공을 설하는 것을 들었다고 공에 집착하지 않도록 하시오. 무엇보다 첫째로 공에 집착하지 마라야 합니다. 만일에 마음을 비운다면서 조용히 앉아 있다면, 그대들은 곧 정신 부재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질 것입니다.”

사실 진정한 공[眞空]은 무한한 본체(infinite Reality)와 같다.

“인간의 자성은 대단히 커서 능히 만법을 포함하고 있고, 만법이 모든 사람의 성품 가운데 있느니라.”

혜능은 그의 마지막 설법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공(空)에 집착하는 사람은 경전을 비방하면서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만일 이미 문자를 쓰지 않을진대 사람과 더불어 말하는 것도 마땅하지 않다고 하겠으니, 말이 또한 바로 문자의 한가지 형태임을 어찌하랴.”

글자 그대로 ‘문자를 세우지 않음[不立文字]’에 집착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혜능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또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고 하나 이 ‘세우지 않는다’ – ‘불립’이라는 두 글자도 또한 문자인 것이다. 대개 이런 사람은 남이 말하는 것을 보고, 곧 그를 비방하면서 문자에 집착한다고 흉을 본다. 그대들은 마땅히 알지니, 스스로 미혹한 것은 오히려 괜찮다고 하겠으나 어찌 부처님의 경전을 비방하겠는가?”

‘불립문자’란 다만 문자에의 집착이 없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문자가 진리를 가리키는 방편(方便)으로 사용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필요불가결한 것은 견성(見性)이다.

“견성한 사람은 세워[立]야 할지 세우지 않아야 할지를 알맞게 꿰뚫어 본다. 왜냐하면 그는 왕래에 자유로워 지체되거나 구애됨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경우에 따라서 언제고 응하여 활동하며, 그에게 향한 질문에는 언제고 응하여 대답한다. 그는 한순간도 자성을 여의지 아니하고 모든 상황에서 자기 역할을 한다. 이렇게 그는 최상의 자유라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하여 지속적 희열인 ‘유희삼매(遊戱三昧)’를 누린다. 이것이 바로 견성의 의미이다.”

 

3. 직지인심(直指人心)

‘마음’이란 파악하기 어려운 말이다. 우리의 마음은 마음에 대하여 말을 해야 할 때마다 당혹을 느낀다. 그러나 마음이 바로 선의 돌쩌귀이다. 따라서 선사들의 마음에 대한 의미를 명백하게 이해하지 않고서는 선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선의 궁극 목표는 견성(見性)과 성불(成佛)에 있으나 마음이 그 본성을 보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선 마음을 가리키지 않으면 안 된다.

“보리자성(菩提子性)이 본래 청정하니 다만 이 마음을 쓰시오. 성불해 마칠 것이오.”

이것은 혜능이 조계 지방에 있는 대범사(大梵寺)에서 설법하였을 때의 첫마디 말이다. 이것은 그의 온갖 교설에 깔려 있는 그의 깨달음을 아주 간결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의 통찰은 순수하였으나 자신의 독창성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이것을 “나의 본질 자성이 본래 청정하니 만일 자심(自心)을 알면 견성이다. 모두가 불도를 이루리라”고 하는 『보살계경(菩薩戒經)』[『범망경(梵網經)』이라고도 함]의 인용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혜능은 자성을 왕이라고 생각하였고, 마음을 그 나라와 신하라고 생각하였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성은 마음의 본체 또는 정수(精髓)인 반면에 마음은 자성의 기능이다. 우리의 이 내적 왕국에서 왕은 완전무결하나 신하는 항상 충성을 다하는 것만은 아니다.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면 온 왕국이 평화와 축복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기능이 병들거나 왕에게 거역하면 온 왕국이 붕괴될 것이다. 마음의 힘은 무한히 크다. 자아실현에 도달하는 것, 본래적 자아가 되는 것은 마음을 통해서이다. 지옥에 떨어지는 것도 또한 이 동일한 마음에 의해서이다. 마음이 없다면서도 악도, 초탈도 집착도, 각오(覺悟)도 미망(迷妄)도, 보리(菩提)도 번뇌도 없다. 혜능이 언급하는 것에는 맑은 마음[淨心], 착한 마음[善心], 공평한 마음[平心], 바른 마음[直心], 지혜 혹은 도의 마음[道心] 또는 보리의 마음[菩提心] 등이 있다. 그러나 그는 또한 흐린 마음[不淨心], 악한 마음[不善心], 비뚤어진 마음[邪見心], 번뇌의 마음[煩惱心], 망령된 마음[狂妄心] 등을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는 마음이 서로 다른 두 종류로 나뉘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마음은 단 하나뿐이다. 이는 단지 정태적(情態的) 시체가 아니고 동적인 과정으로서 항상 흐르는 강과 같이 때로는 청정하고 때로는 혼탁하며 때로는 순조롭게 흐르고 때로는 방해에 부딪힌다. 마음은 항상 흘러 멈춤이 없어야 한다.는 통찰이 혜능 철학 전반에 걸치는 관건이다. 우리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그 자신은 『금강경』의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어다[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라는 구절을 듣고 깨달았던 것이다. 앞으로 살펴보겠으나 그의 심리철학(心理哲學} 전체는 이 근본통찰 – 돈오에서부터 비롯한다.

그러나 강조해야 할 점은 우리의 사유 대상인 마음을 ‘진심(眞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즉 진심은 ‘생각하는’ 것이지 생각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은 주체로서 객체화되면 즉시 그 본성을 잃고 만다. 마음이 연구나 철학의 대상(Gegenstand)이 되는 찰나에는 그것이 이미 진심일 수 없으며, 단순히 진심의 개념 또는 추상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직접 마음을 실제로 가리키는 것[直指人心]이 아니라 기껏해야 ‘가리키는 것을 가리킬(pointing to the pointing)’ 뿐이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한 우리는 우리의 정적(靜的)이고 개념화된 대상이 마치 본체인 양 그것에 집착할 위험은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마음에 관한 개념과 참 마음[眞心]을 동일시한다면, 우리는 원래의 뜻을 죽이는 문자에 집착하여 우리 생각으로 짜여진 누에고치 속에 갇히듯 자승자박(自繩自縛)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헤능과 구의 문인들은 줄기차게 ‘무념(無念)’과 ‘무심(無心)’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혜능에게 ‘무념’은 단순히 “오염되거나 집착하지 않고 우리 마음으로 만물을 보는 것”을 뜻한다. 어떤 것에 고착됨이 없이 만물에서 우리 마음이 활발하고 자유롭도록 활동하게 해야 한다. 무념의 교의는 아무 것도 생각해서는 안된다거나 모든 생각을 끊어 버려야 한다거나 하는 요구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유롭게 하는 교의를 목에 씌우는 칼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진리느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러나 문자에만 집착하는 사람은 매사를 질곡(桎梏)으로 변화시키는 교묘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혜능 당시의 사람들에게 이것이 얼마나 참신한 견해였느냐는 것은 와륜(臥輪)이라는 선사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을 수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추리할 수 있다.

와륜은 특별한 재주 있어 臥輪有伎倆 (와륜유기량)

능히 백 가지 생각을 끊누나. 能斷百思想 (능단백사상)

대상을 대해서도 마음 일지 않으니 對境心不起 (대경심불기)

보리수가 나날이 마음에서 자란다. 菩提日日長 (보리일일장)

이 게송은 어느 날 한 승려가 혜능에게 매우 훌륭한 것 같다고 하면서 읊은 것이다. 그러나 혜능은 게송을 들었을 때 그 게송을 지은 사람이 아직 마음자리[心地]를 밝히지 못하였고, 따라서 만일 그에 따라 행동하면 자신에게 더욱 결박만이 더할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이에 그는 자신의 게송으로써 응답하였다.

혜능은 별 뾰족한 재주 없어 惠能沒伎倆 (혜능몰기량)

온갖 생각이 끊이지 않누나. 不斷百思想 (부단백사상)

대상을 대함에 마음 자주 일어나니, 對境心數起 (대경심수기)

보리가 어찌 자라랴 菩提作麽長 (보리작마장)

혜능의 ‘무념’설은 노자의 ‘무위(無爲)’와 비슷하다. 노자는 “함이 없으나 하지 않는 바도 없다[無爲而無不爲](『도덕경』 제37장과 46장)”라고 말하였다. 이와 비슷하게 혜능은 우리 마음이 어떤 특정한 생각에 집착하지 않는 한, 그 경우 경우에 적합한 사유를 할 능력이 있다[無念而無不念]고 주장한다. 이 맑고 깨끗하게 물들지 않은 마음은 “왕래가 자유롭고 터럭 끝이나마 막힘이 없이 활동한다.”

좌선에 대한 혜능의 자세는 마음을 완전히 자유롭게 하려는 것과 같은 열망으로 영감을 얻었다. 혜능은 신수(神秀)가 제자들에게 “마음을 마음에 머물고 고요를 바라보되 눕지 말고 항상 앉아 있어라.[住心觀靜 長坐不臥]”는 식으로 가르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마음에 머물고 고요를 바라보는 이것은 병이요 선이 아니다. 마냥 앉아 있는 것은 몸을 구속하는 것일 뿐 마음에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그리고 그는 게송을 하나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살아서는 앉아서 눕지 아니하고 生來坐不臥(생래좌불와)

죽어서는 누워서 일어나 앉지 못하네. 死去臥不坐(사거와불좌)

이래저래 한 구(具)의 냄새나는 뼈다귀일지니 一具臭骨頭(일구취골두)

생명의 위대한 교훈과 그 무슨 상관 있으랴. 何爲立功過(하위립공과)

그는 언어 문자의 사용을 무조건 거부하지 않았듯이 좌선의 실천도 무조건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조심스럽게 그의 제자들에게 한 가지 꼭 필요한 것, 즉 명심견성(明心見性)하여 성불(成佛)할 것을 상기시켰다. 모든 다른 일들은 ‘깨달음(enligntenment)’이라는 궁극 목표에 종속해야만 한다. 인생에 한 가지 비극이 있다면, 그것은 방편(方便)에 집착하여 목적을 잊어버리는 데 있다.

혜능은 가장 철저한 무집착의 무주대사(無住大師)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에게는 출가자(出嫁者)인가 재속인(在俗人)인가에 대한 차별은 없으나, 그는 정신이 외계(外界)에 집착하느냐 집착하지 않느냐에는 큰 차이를 둔다.

“외계에 집착하면 바다에 파도 일 듯 생멸이 일어난다. 이를 ‘차안(此岸)’에 머문다고 부른다. 외계에 집착하지 않으면, 평온이 자유롭게 흐르는 강물과 같이 생멸에서 벗어난다. 이를 ‘피안(彼岸)’에 이른다고 부른다.”

우리 마음이 죄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당연한 것이겠다. 혜능은 다른 여러 불교철학자와 같이 우리가 덕(德)에서조차도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마 선악을 넘어서야 한다는 그들의 교의는 노자의 다음과 같은 잠언(箴言, aphorism)(『도덕경』 제38장)의 조명(照明) 아래서 가장 잘 이해될 것이다. :

높은 덕은 스스로 덕답지 않으니 上德不德(상덕부덕)

이것이 덕이요. 是以有德(시이유덕)

낮은 덕은 덕다움을 벗어나지 못하니 下德不失德(하덕부실덕)

이것은 덕이 아니다. 是以無德(시이무덕)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선행까지도 포함해서 일체 만물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우리는 무집착이라는 것에 집착할 것인가, 또는 무집착에 대한 집착에서도 벗어나야 할 것인가에 있다.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한 혜능의 대답은 전체 불교 문헌의 서술에서도 최고봉을 겨루는 한 뛰어난 구절로써 마련하고 있다.

“그대가 이미 모든 집착에서 자유롭고 선도 악도 생각하지 않는다. 깎아지른 듯한 공허에 떨어지지 말도록, 죽음과 같은 고요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할지니라. 그대는 모름지기 학문을 넓히고 견문을 더하도록 힘쓰라. 그러면 그대는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 모든 깨우친 사람의 근본 이치를 터득할 것이니라. 그대는 다른 사람과 사귀는 데에서 화합하기에 노력하고 ‘나’라든가 ‘남’이라고 하는 답답한 사념(思念)에서 벗어날지니라. 그러면 그대는 보리에 이르러 움직이지 않는 그대의 참 마음[眞心]을 깨달을 것이니라.”

 

4. 견성성불(見性成佛)

혜능에게 견성은 곧 성불이다. 사실 그는 “우리의 본성(本性)이 바로 부처이며, 이 본성을 떠나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인간의 자성(自性)은 대단히 커서 만법을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과거·현재·미래의 삼세제불(三世諸佛)과 12부경(十二部經)이 모두 본래적 천품(天稟)으로서의 인성(人性)에 갖추어져 있다.

중국사상사에서 혜능의 인성에 대한 견해는 그 원형을 맹자(孟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만물은 우리 안에서 완전하다. 우리의 눈길을 안으로 향하여 우리 자신이 본성에 성실한 것을 아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다.” – 『맹자』 「진심(眞心) 상(上)」

맹자에서와 같이 혜능에서도 우리의 본성은 진실(眞實)과 하나이다. 혜능의 표현으로는 “하나가 참되매 일체가 참되느니라”이다.

혜능에게 ‘불성’은 곧 깨달음이다. 그가 ‘부처’라는 말을 쓰면, 그것은 단순히 ‘깨달은 사람’을 가리킨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면, 우리는 그가 “내 마음에 스스로 부처가 있나니, 이 자불(自佛)이야말로 참 부처이니라”라고 한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손안에서는 일체가 유심화(唯心化)되고 관념화(觀念化)되었다.

‘자성삼보(自性三寶)’에 대한 그의 이론은 지극히 흥미롭다. 불교의 전통적 교리에 의하면, 신도는 불(佛)·법(法)·승(僧) 사보에 귀의(歸依)해야 한다. 그러나 혜능은 반대로 신도는 깨달음[覺]·올바름[正]·깨끗함[淨]에 귀의해야 한다고 설법하였다. 이것은 난해한 해석에서 조용히 제기된 것이나 참으로 무서운 혁명이었다. 그는 자성삼보에 대한 교리를 다음과 같은 말로 집약하였다.

안으로는 심성을 완전히 조화롭게 하고 內調心性 (내조심성)

밖으로는 모든 다른 사람을 공경하시오. 外敬他人 (외경타인)

이것이 스스로 귀의하는 것이니라. 是自歸依也 (시자귀의야)

그가 여기서 ‘안[內]’이니 ‘밖[外]’이니 하는 표현을 쓰는 것은 다만 자성 활동의 효과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다. 사실 자성 자체는 절대적이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피안에 있으며, 인간의 언어가 제공할 수 있는 모든 속성(屬性)을 초월한다. 인간의 언어는 단지 현상 세계의 사물과 끝없이 대립하고 있는 모든 사물의 상대성이 지배하는 장(場)을 취급할 뿐이다. 혜능에게는 인도의 상카라(Shankara, 788~820)와 같이 절대란 “그 앞에서 모든 언어가 뒷걸음질치는 것[“‘힌두교의 성 토마스’라고 할 저 경외감에 사무치는 지도자 상카라는 기도하기 시작한다. : ‘오! 그대여, 당신 앞에서 모든 언어는 뒷걸음질칩니다.’” – Huston Smith, 『The Religions of Mam』 73쪽]”이다. 신비자가 자신을 표현하고자 할 때마다 그의 언어는 마치 목마르고 눈먼 사자가 사막에서 샘물을 찾아 사방으로 헤매는 것과 흡사하다[다음의 구절과 비슷하다. “우리가 신에 관하여 찬양할 때에 모든 인간의 언어는 마치 눈먼 사자가 사막 가운데에서 물 있는 곳을 찾아 헤매는 것과 같다.” – Leon Bloy, 『The Pilgrim of the Absolute』 350쪽]. 오직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혜능이 깨달은 자와 미혹한 자 사이에, 보리(bodhi)와 번뇌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으며, 자성은 ‘도’도 아니고 악도 아니라고 주장한 것을 분명하게 이해할 만하다.

중종(中宗) 황제의 특사에 대한 대답에서 혜능은 ‘실다운 본성[實性]’의 절대성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표현한 바 있다.

“밝음[明]과 어둠[無明]은 범부의 눈에는 두 가지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있는 이는 그 성품이 둘이 아님을 꿰둟어 보는 통찰력을 지닙니다. 둘이 아닌 성품이 곧 실다운 성품입니다. 실다운 성품이라는 것은 바보라고 해서 적게 가진 것도 아니며, 성현이라고 해서 많이 가진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번뇌 속에서도 어지럽지 아니하고, 깊은 선정삼매(禪定三昧) 중에도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속적(斷續的)인 것도 영속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지도 않으며 가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중앙에 있지도, 안에 있지도, 밖에 있지도 않ㅅ급니다. 그것은 나지도 죽지도 않습니다. 그 본질과 그 현상은 그러함[如如]의 절대적 상태에 있습니다. 영원불변해서 우리는 이것을 ‘도(道)’라고 부릅니다.”

위의 문장 정체로 보아 혜능이 장자(莊子)의 견해와 일치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혜능이 우연히 ‘도’라는 말을 써서가 아니다. 어쩌면 혜능의 견해는 맹자와 장자의 통찰을 새옹하는 전체로 융화시켰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법하다.

혜능의 철학은 흡사 노장철학(老壯哲學)처럼 초월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흡사 공맹철학(孔孟哲學)과 같이 인간 중심적이다. 혜능은 모든 불교 경전이 인간을 위하여 서술되었고, 자성의 반야심(般若心) 위에 세워졌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없었더라면, 애초부터 일체 만법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그가 모든 가르침과 교리를 인간 심성의 견지에서 해석하는 까닭이다.

그의 ‘삼신설(三身說, tridaya)’은 그의 ‘자성삼보론’과 같이 또한 혁명적이다. 그는 우리의 자성이 바로 부처의 삼신임을 설교한다. 우리 자신의 몸이 곧 ‘여래법신(如來法身)’을 포함한다. 우리의 자성이 근본적으로 맑고 청정하다는 뜻에서, 그리고 일체의 법이 그 원천을 자성 안에 가지고 있다는 뜻에서 그것은 ‘청정법신불(淸靜法身佛)’이라고 한다. 그러나 마음의 창조적 능력에 관한 그의 믿음은 ‘자성화신불(自性化身佛)론’에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난다. 우리를 우리가 있는 바대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사유이다.

“우리의 마음이 악한 일에 머물면 그것이 지옥이 될 것이고, 착한 일에 머물면 그것이 천당이 될 것이다. 악의와 증오를 품으면 용과 뱀이 될 것이고, 자비와 동정심을 가지면 보살이 될 것이다.”

미망에 사로잡힌 인간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외부의 축복을 구하면서 동시에 악행에 머물러 있다. 그것은 그들의 깨달음을 이루는 데에는 아무 쓸모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마음을 한순간이나마 좋은 일에로 돌린다면, 그 당장 반야-지혜가 생겨 그들은 이른바 자성화신불이 될 것이다.

혜능의 손에서 불교 교리는 심화되고 보편화되었다. 승(僧)·속(俗)간의, 성인과 범인(凡人)간의, 불교와 다른 사상 교파간의 장벽이 무너져 버렸다. 예를 들면, 유학자라고 할지라도 혜능이 재가자(在家者)를 위해 특별히 지은 다음과 같은 게송에 반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

그대 마음 정당하고 편벽됨이 없다면

계를 지킬 필요가 어디 있으리. 心平何勞持戒 (심평하노지계)

그대 행실 바로 잡기만 한다면

참선이 무슨 소용 있으리. 行直何用修禪 (행직하용수선)

감사하는 공덕(功德)을 키우려면

부모 공양보다 더 나은 것이 없겠고, 恩則親養父母 (은즉친양부모)

믿음과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위 아래가 서로 돕고 사랑할지라. 義則上下相憐 (의즉상하상련)

겸손과 존경의 덕을 알아서

위 아래 서로 화목하고 讓則尊卑和睦 (양즉존비화목)

인내하고 고난 겪은 결과는

나쁜 일들 조용히 사라지네. 忍則衆惡無喧 (인즉중악무훤)

그대가 나무 뚫어 불꽃을 얻는다면 若能鑽木出火 (약능찬목출화)

진흙 속 붉은 연꽃 그대 생명 피어나리. 淤泥定生紅蓮 (어니정생홍연)

입에 쓰면 봄에는 좋은 약이거니 若口的是良藥 (약구적시양약)

거슬리는 말 친우의 충언임을 기억할지라. 逆耳必是忠言 (역이필시충언)

허물을 고칠지면 반드시 지혜를 낳거니와 改過必生智慧 (개과필생지혜)

단점을 두호하면 마음 속은 어질지 못하리라. 護短心內非賢 (호단심내비현)

일상생활 어느 때나 다른 이에게

착한 행실 앞세워 베풀기를 앞세워라. 日用常行饒益 (일용상행요익)

도(道) 이룸은 남에게 돈을 주는 데에 있지 않고 成道非由施錢 (성도비유시전)

보리는 그대 마음에서 찾아져야 할지니 菩提只向心覓 (보리지향심멱)

어찌 진리를 밖에서 구하는 데

힘을 허비할소냐. 何勞向外求玄 (하노향외구현)

그대 이 게송 따라 수행할지면 聽說依此修行 (청설의차수행)

‘서방 정토(淨土)’뚜렷하게 눈 앞에 펼쳐지리라. 天堂只在目前 (천당지재목전)

위의 게송을 보면 유교윤리(儒敎倫理)의 요소를 혜능의 체계에서 쉽게 식별할 수 있다. 또 한편 그는 변증법적이어서 그와 노자 사이의 깊은 유사성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도덕경』의 제2장은 도가적 변증법의 전형적 서술이다.

천하사람들이 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하지만 天下皆知美之爲美 (천하개지미지위미)

그것은 추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斯惡已(사악이)

착한 것을 착하다고 알지만 皆知善之爲善(개지선지위선)

그것은 불선(不善)이 있기 때문이다. 斯不善已(사불선이)

그런 까닭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서로가 낳고 故有無相生(고유무상생)하고

어려운 것과 쉬운 것은 서로가 성립시킨다. 難易相成(난이상성)

긴 것과 짧은 것은 서로가 형태를 드러내기 때문이며, 長短相形(장단상형)

높은 것과 낮은 것은 서로가 가지런하지 않기 때문이다. 高下相傾(고하상경)

음(音)과 성(聲)은 서로가 어울려 조화를 이루고 音聲相和(음성상화)

앞과 뒤는 서로가 서로를 따르는 것이다. 前後相隨(전후상수)

이렇게 대립되는 짝들은 모두 상대성의 영역에 속한다. 노자에 의하면 성인(聖人)은 상대적 관념에 머물지 않고 그를 초월한다.

이와 비슷하게 헤능은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베푼 설법에서 36가지나 되는 상대적 관념-‘36대(對)’를 열거한다. 즉 유(有)·무(無), 색(色)·공(空), 동(動)·정(靜), 청(淸)·탁(濁), 범(凡)·성(聖), 승(僧)·속(俗), 대(大)·소(小), 장(長)·단(短), 정(正)·사(邪), 치(痴)·혜(慧), 번뇌·보리, 자비·악의, 항상·무상, 허(虛)·실(實), 기쁨·노여움, 진(進)·퇴(退), 생(生)·사(死), 화신·보신 등등의 대법(對法)이 그것이다.

“만일 그대가 이 36대법을 적절히 쓸 줄 안다면 자유자재로 경법(經法)을 꿰뚫어 섭렵하고, 자성이 자발적으로 일어나고 작용하여 양극단을 피할 것이다. 또한 다른 이들과의 대화에서 여러 현상 가운데에서도 외적으로는 현상에 초연하며, 내적으로는 공 가운데 있어도 공으로부터 초연하다. 만일 그대가 전적으로 현상에 집착하면 사견(邪見)에 바질 것이고, 반면 그대가 전적으로 공에 집착하면 그대는 그대의 무명(無明) 속으로 깊이 빠져들 따름이니라.”

“어떤 이가 그대에게 유(有)의 의미를 물으면 무(無)에 입각해서 대답하라. 범상(凡常)한 것을 물으면 성(聖)스러운 것을 말하라. 성스러운 것을 물으면 범상한 것을 말하라. 이렇게 양 극단의 상호 관계로서 중도(中道)의 의미가 밝혀질 것이니라.”

“누군가 그대에게 어둠을 묻는다면 ‘밝음은 어둠의 첫째 원인[因]이요, 어둠은 밝음의 둘째 원인[緣]이다’라고 대답하라. 어둠의 원인은 밝음의 사라짐이다. 명과 암은 서로를 드러내며, 그들의 상호연관성은 필연적으로 중도(中道)의 의미를 가리킨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중도’란 상대성의 영역을 초월하는 어떤 원칙 안에서 반드시 찾아진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다름아니라 자성 바로 그것이며, 혜능의 체계에서는 절대적 진리인 것이며, 36대법 전부를 포괄하면서 그 모두를 초월한다. 홈즈(Holmes) 대법관은 깊고 지속적으로 통찰력이 탁월한 사람만이 논리적 도구로서의 양도논법(兩刀論法, dilemma)을 버리고, “한 사물은 A나 비(非)A가 아니라 단도직입적으로 초월한다. 쉽게 달리 말하자면 진리는 주어진 차원의 사고의 한계를 벗어나 한 단계 더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고 주장하였다. 혜능의 사상가로서의 위대성은 이 점에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양도논법을 사용하여 단적으로 초월해 들어가는 길을 지시하였고, 인간 정신이 절대(絶對)에로 상승하도록 촉진시키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 『선학의 황금시대』 (116~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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