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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집주(論語集註)≫ 서설(序說)

수선님 2024. 2. 10. 14:20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설(序說)

드디어 논어다. 유학, 유교, 한문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공자다. 그리고 공자의 말씀이 적혀 있다는 논어다. 한문/한자하면 공자, 논어인 게다. 그리고 한문을 한다고 하면 논어는 정말 외울 정도로 읽어야 한다. 입이 닳도록 읽고 또 읽어도 외워지지 않는 머리를 타고 나서 나는 지금도 몇 구도 머리에 암기하고 있지 못하다. 책을 펴고 글자를 봐야 기억이 나는 사람이다. 한문학과를 졸업했다고 해도 논어 20편 제목을 다 못 외는 사람이 수두룩하다고 하니 말 다 했다. 나 역시도 ‘學而’ 다음 편 제목도 가물가물하다.

논어는 책 제목이 굉장히 많다. 그리고 헷갈린다. 어느 시대에 간행이 되어 나왔는지에 잘 살펴야 되는 책이다. 책 제목을 보면 간행 시대를 유추할 수 있고 책의 변화 흐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보통의 우리들이 그 정도까지 알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냥 논어하면 공자가 말한 책으로 집에 굴러다니는 논어 책 정도로 아는 게 다이다. 바로 이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책이 바로 “논어집주”라는 책이다. 주자가 주를 달고 여러 제현들의 주석을 끌어모아 놓은 거다. 그래서 지금 읽어 보는 서문 또한 ‘序’라고 하지 않고 ‘序說’이라고 달면서 다른 학자의 설을 가지고 와서 서문을 엮어 놓고 자기 말이 없다. 여기서 가져온 사람의 글이 사마천의 “사기”에 있는 내용인 “세가 열전”에 실어 놓은 여러 인물들 중 “공자”의 글을 인용해 왔다. 사마천의 글을 신뢰한다는 말이겠다. 공자의 일대기를 나이순으로 정리해 놓은 글이다. 이걸 잘 읽고 이해를 해야 논어라는 책을 읽기가 편하고 쉬운데, 무슨 이름과 연도와 지명들이 그렇게 이해가 어렵다. 2천여 전의 사람들 이야기를 적어 놓으니 그 시대 상황도 잘 모르겠고, 어디서 누구랑 무슨 사건이 있는지도 파악이 되지 않으니 읽어도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공자가 살아왔던 춘추전국시대를 잘 이해하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러고 나서 논어를 읽으면 공자의 말이 좀 더 와닿는다.

공자가 한 일이 논어에 나오는 제자들이 기록해 놓은 말이 전부가 아니다. 이 서설을 통해 그의 업적을 뽑아 보자면,

1)敍書傳禮記, 2) 刪詩正樂, 3)序易彖繫象說卦文言, 4)作春秋

하, 은, 주 요순우탕 임금들의 일인 서경을 찬술(敍)하신 일, 시를 뽑아 가려서 시경을 만들어 낸 일, 악경은 지금 볼 수 없으니 모르겠다. 음악을 바로 잡은 일, 주역이라 부르는 역경의 십익전을 쓴(序) 일, 그리고 춘추를 지은 일이다. 정말 공자가 이 경전들을 정리하고 차례를 잡고 부언을 했는지 공부를 깊게 하지 못해 나는 말을 못 하겠다. 한문을 공부한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믿고 있다. 이렇게 큰 업적을 세운 공자였기에 추앙을 받는 거라 생각한다. 그 제자들과 손자 자사에 의해 道가 이어지고 맹자에게까지 내려오다가 그만 도통이 끊어졌다는 거다. 그러다 한나라, 당나라를 거쳐 새롭게 유학을 퍼뜨리고 공부를 하고 考證學이 흥왕하고 그랬던가 보다. 송나라 주자에 와서는 그것이 신유학이니 성리학이니 하면서 부리는 거라고 내 스스로 정리하고 있다.

주자가 살았던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고 학문과 철학, 통치 이념과 체제, 종교적 분위기가 주자의 사상에 그리고 그의 언어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의 우리도 신조어나, 세속어나 비속어, 또래 집단이 사용하는 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하지 않나. 주자가 논어집주에서 주를 달 때도 그랬을 것이다. 남을 설득하고 자신의 주장을 펼치면서 당대의 유행하는 말이나 그 시대에 통용되는 단어들, 그리고 자주 사용되는 유행어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한다. 불교가 성행했다고 하니 불교 용어가 나올 수도 있는 거라고 본다. 이렇게 알고서 우리가 논어집주를 읽어 나가 봐야 한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은 서설의 글은 바로 서설 마지막 부분에 붙은 정자(정이천)의 말이다.

 

程子曰 讀論語에 有讀了全然無事者하며 有讀了後에 其中得一兩句喜者하며 有讀了後에 知好之者하며 有讀了後에 直有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者니라

(정자(伊川(이천))가 말씀하였다.“《논어》를 읽을 적에, 다 읽은 뒤에 전혀 아무런 일이 없는 자도 있으며(전혀 감명을 받지 못한 자도 있으며), 다 읽은 뒤에 그 가운데 한두 句(구)를 얻고 기뻐하는 자도 있으며, 다 읽은 뒤에 좋아하는 자도 있으며, 다 읽은 뒤에 〈너무 즐거워〉 곧바로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춤을 추고 발로 뛰는 자도 있다.”)

程子曰 今人은 不會讀書로다 如讀論語에 未讀時도 是此等人이요 讀了後에도 又只是此等人이면 便是不曾讀이니라

(정자(伊川(이천))가 말씀하였다. “지금 사람들은 책을 읽을 줄 모른다. 예를 들면 《논어》를 읽었을 적에 읽기 전에도 이러한 사람이요 다 읽고 난 뒤에도 또 다만 이러한 사람이라면 이것은 곧 읽지 않은 것이다.”)

 

이 구절은 읽을 때마다 사람을 후려치고 후벼 파는 기세가 있다. 움찔 놀라고 갑자기 초라해지고 기분이 묘해진다. 나는 누구며, 지금까지 뭘 읽었던 거지? 나는 책을 읽은 게 맞나? 나는 뭐하고 있나? 이런 생각이 계속 맴돌 게 된다.

 

논어집주서설(論語集註序說)

 

史記世家曰 孔子는 名丘요 字仲尼니 其先은 宋人이라 父는 叔梁紇이요 母는 顔氏니 以魯襄公二十二年庚戌之歲十一月庚子에 生孔子於魯昌平鄕郰(鄹)邑하니라 爲兒嬉戱에 常陳俎豆하고 設禮容이러시니 及長爲委吏하사는 料量平하고-委吏는 本作季氏史로되 索隱云 一本에 作委吏라하여 與孟子合하니 今從之하노라 爲司職(樴)吏하사는 畜蕃息하시니라-職은 見周禮牛人이라 讀爲樴이니 義與杙同하니 蓋繫養犧牲之所라 此官은 卽孟子所謂乘田이라- 適周하사 問禮於老子하시고 旣反而弟子益進이러라

 

《史記(사기)》의 〈孔子世家(공자세가)〉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공자는 이름이 丘(구)요 字(자)가 仲尼(중니)이니, 그 先代(선대)는 宋(송)나라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叔梁紇(숙량흘)이요 어머니는 顔氏(안씨)이니, 魯(노)나라 襄公(양공) 22년(B.C.551) 庚戌年(경술년) 11월 庚子日(경자일)(21일)에 공자를 노나라 昌平鄕(창평향) 鄹邑(추읍)에서 낳았다.

공자는 어려서 장난할 때에 항상 俎豆(조두)를 진설하고 禮(예)를 행하는 容貌(용모)를 베풀었다. 장성하여 委吏(위리, 창고관리자)가 되어서는 料量(요양)을 平(평)하게 하시고,-‘위리’는 본래 季氏史(계씨사)로 되어 있으나, 《史記索隱(사기색은)》에 ‘ 一本(일본)에 위리로 되어 있다’ 하여 《孟子(맹자)》와 부합하므로 이제 이것을 따른다.- 司樴吏(사직리, 축산 담당자)가 되어서는 가축이 번식하였다.-‘職(직)’은 《周禮(주례)》〈牛人(우인)〉에 보이는바 樴(직)으로 읽으니, 뜻이 杙(익, 말뚝)과 같으니, 희생을 매어놓고 기르는 장소이다. 이 벼슬은 바로 《맹자》의 이른바 乘田(승전)이라는 것이다.- 周(주)나라에 가서 老子(노자)에게 禮(예)를 물으셨고, 돌아오자 제자들이 더욱 많이 찾아왔다.

 

昭公二十五年甲申은 孔子年三十五라 而昭公奔齊魯亂하니 於是에 適齊하여 爲高昭子家臣하사 以通乎景公하시다-有聞韶問政二事라- 公欲封以尼谿之田한대 晏嬰이 不可라하니 公惑之어늘-有季孟吾老之語라- 孔子遂行하사 反乎魯하시니라 定公元年壬辰은 孔子年四十三이라 而季氏强僭하고 其臣陽虎作亂專政이라 故로 孔子不仕하시고 而退修詩書禮樂하시니 弟子彌衆이러라

 

昭公(소공) 25년(B.C.517) 甲申(갑신)은 공자 나이 35세였는데, 소공이 齊(제)나라로 달아나 노나라가 혼란하니, 공자께서는 이에 제나라로 가시어 高昭子(고소자)의 家臣(가신)이 되어서 景公(경공)에 通(통)하였다.-〈제나라에 계시면서〉 韶樂(소악)을 들으신 것과 〈경공이 공자께〉 정사를 물은 두 가지 일이 있다.- 경공이 尼谿(니계)의 토지로 공자를 봉해 주고자 하였는데, 晏嬰(안영)이 불가하다 하니 경공이 의혹하였다.-〈齊 景公(제 경공)이 공자를 대우하며 말하기를 “계씨처럼 대우함은 내 하지 못하겠으나〉 계씨와 맹씨의 중간으로 대우하겠다.” 하고는 “내가 늙었으니, 〈그의 말을〉 쓰지 못하겠다.”라고 한 말이 있다.- 공자는 마침내 제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돌아오셨다.

定公(정공) 원년(B.C.509) 壬辰(임진)은 공자 나이 43세였는데, 계씨가 강하여 참람하고 그의 가신인 陽虎(양호)가 난을 일으켜 정권을 독단하였다. 그러므로 공자는 벼슬하지 않고 물러나 《시》 · 《서》와 《예》 · 《악》을 닦으시니, 제자가 더욱 많아졌다.

 

九年庚子는 孔子年五十一이라 公山不狃(뉴)以費畔季氏하고 召孔子어늘 欲往而卒不行하시니라-有答子路東周語라- 定公이 以孔子爲中都宰하니 一年에 四方則(칙)之라 遂爲司空하시고 又爲大司寇하시다 十年辛丑에 相定公하사 會齊侯于夾谷하시니 齊人歸魯侵地하다 十二年癸卯에 使仲由爲季氏宰하여 墮(휴)三都하고 收其甲兵이러니 孟氏不肯墮成이어늘 圍之不克하다

 

정공 9년(B.C.501) 庚子(경자)는 공자 나이 51세였다. 公山不狃(공산불뉴)가 費邑(비읍)을 가지고 계씨를 배반하 고 공자를 부르자, 가시고자 하였으나 끝내는 가지 않으셨다.-子路(자로)에게 〈나를 써 주는 자가 있으면 나는〉 東周(동주)를 만들겠다고 대답한 말씀이 있다.- 정공이 공자를 中都(중도)의 邑宰(읍재)로 삼으니, 1년 만에 사방에서 본받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司空(사공)이 되시고 또 大司寇(대사구)가 되셨다.

정공 10년(B.C.500) 辛丑(신축)에 정공을 도와서 제나라 군주(경공)와 夾谷(협곡)에서 會盟(회맹)하시니, 제나라 사람들은 노나라에게 침략한 땅을 반환해 주었다.

정공 12년(B.C.498) 癸卯(계묘)에 仲由(중유)로 하여금 계씨의 가신이 되어 세 도읍의 성을 허물고 갑옷과 병기를 거두게 하였는데, 孟氏(맹씨)가 成(성) 땅의 성을 허물려고 하지 않으므로 포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十四年乙巳는 孔子年五十六이라 攝行相事하사 誅少正卯하시고 與聞國政하시니 三月에 魯國大治라 齊人이 歸女樂以沮之하니 季桓子受之하고 郊又不致膰俎於大夫한대 孔子行하시니라-魯世家에 以此以上이 皆爲十二年事라- 適衛하사 主於子路妻兄顔濁鄒家하시 다-孟子에 作顔讎由라- 適陳하실새 過匡하시니 匡人以爲陽虎而拘之하다-有顔淵後及文王旣沒之語라- 旣解에 還衛하사 主蘧伯玉家하사 見南子하시다-有矢子路及未見好德之語라- 去適宋하신 대 司馬桓魋(퇴) 欲殺之어늘-有天生德語及微服過宋事라- 又去適陳하사 主司城貞子家하시고 居三歲而反于衛하시니 靈公이 不能用하다-有三年有成之語라- 晉趙氏家臣佛肹(필힐)이 以中牟畔하여 召孔子어늘 孔子欲往이라가 亦不果하시다-有答子路堅白語及荷蕢過門事라- 將西見趙簡子라가 至河而反하사 又主蘧伯玉家러시니 靈公이 問陳이어늘 不對而行하사 復如陳하시다-據論語하면 則絶糧當在此時라-

 

정공 14년(B.C.496) 乙巳(을사)는 공자 나이 56세였다. 정승의 일을 攝行(섭행, 대행)하여 少正卯(소정묘)를 죽이시고 국정에 참여하여 들으시니, 3개월만에 노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제나라 사람들이 미녀 樂工(악공)을 보내어 저지하니, 季桓子(계환자)가 이것을 받았으며 郊祭(교제)에 또 제사지낸 고기를 大夫(대부)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자, 공자께서 노나라를 떠나셨다.-《사기》〈魯世家(노세가)〉에는 이 이상을 모두 12년의 일이라 하였다.- 衛(위)나라에 가서 자로의 처형인 顔濁鄒(안탁추)의 집에 주인을 정하셨다.-《맹자》에는 顔讎由(안수유)로 되어 있다.-

 

陳(진)나라를 가실 적에 匡(광)땅을 지나니, 광땅 사람들은 陽虎(양호)라고 여겨 拘留(구류)하였다.-〈공자가 광땅에서 경계하는 마음을 품고 계실 적에〉 顔淵(안연)이 뒤에 떨어져 있었으며, “文王(문왕)이 이미 별세하셨으니, 文(문)이 이 몸에 있지 않겠는가.”라는 말씀이 있다.- 풀려나자 衛(위)나라로 돌아와 蘧伯玉(거백옥)의 집에 주인을 정하시고 南子(남자)를 만나보셨다.-〈공자께서 南子(남자)를 만나보시자, 자로가 기뻐하지 않으니, “내 맹세코 잘못된 짓을 하였다면 하늘이 나를 싫어하시리라. 하늘이 나를 싫어하시리라.”라고〉 자로에게 맹세하셨고, 또 덕을 좋아하기를 여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하는 자를 보지 못했다는 말씀이 있다.- 위나라를 떠나 송나라에 가시니, 司馬(사마)인 桓魋(환퇴)가 죽이고자 하므로-“하늘이 나에게 덕을 주셨으니, 환퇴가 나를 어찌하겠는가.”라는 말씀과 微服(미복)으로 송나라를 지나간 일이 있다.- 또 송나라를 떠나 진나라에 가서 司城貞子(사성정자)의 집에 주인을 정하시고, 3년 동안 거주하다가 위나라로 돌아오셨는데, 靈公(영공)이 등용하지 못하였다.-〈공자께서 “만일 나를 등용해 주는 자가 있다면 1년만 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니,〉 3년이면 이루어짐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한 내용이 있다.- 晉(진)나라 趙氏(조씨)의 가신인 佛肹(불힐)이 中牟(중모)땅을 가지고 배반한 다음 공자를 부르니, 공자는 가서 만나시려고 하였으나 또한 결행하지 않으셨다.-자로에게 “단단하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갈아도 얇아지지 않는다. 희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검은 물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는다.” 라고 한 말씀과 삼태기를 멘 자가 공씨의 문 앞을 지나간 일이 있다.- 장차 서쪽으로 가서 趙簡子(조간자)를 만나 보려고 하시다가 黃河(황하)에 이르러 돌아와 다시 거백옥의 집에 주인을 정하셨는데, 영공이 陣法(진법)을 묻자 대답하지 않고 떠나 다시 진나라로 가셨다.-《논어》를 근거해 보면 양식이 떨어진 것이 마땅히 이때에 있었을 것이다.-

 

季桓子卒에 遺言謂康子호되 必召孔子라하더니 其臣止之한대 康子乃召冉求하다-史記에 以論語歸與之歎으로 爲在此時라하고 又以孟子所記歎辭로 爲主司城貞子時語라하니 疑不然이라 蓋語孟所記本皆此一時語어늘 而所記有異同耳라- 孔子如蔡及葉(섭)하시니라-有葉公問答子路不對와 沮溺耦耕과 荷蓧丈人等事라 史記云 於是에 楚昭王이 使人聘孔子하여 孔子將往拜禮어늘 而陳蔡大夫發徒圍之라 故로 孔子絶糧於陳蔡之間이라 有慍見及告子貢一貫之語라 按是時陳蔡臣服於楚하니 若楚王來聘孔子면 陳蔡大夫安敢圍之리오 且據論語컨대 絶糧이 當在去衛如陳之時라- 楚昭王이 將以書社地로 封孔子러니 令尹子西不可라하니 乃止하니라-史記云 書社地七百里라하니 恐無此理라 時則有接輿之歌라- 又反乎衛하시니 時에 靈公已卒하고 衛君輒이 欲得孔子爲政하며-有魯衛兄弟及答子貢夷齊, 子路正名之語라- 而冉求爲季氏將하여 與齊戰有功한대 康子乃召孔子어늘 而孔子歸魯하시니 實哀公之十一年丁巳而孔子年六十八矣라-有對哀公及康子語라-

 

季桓子(계환자)가 죽을 적에 康子(강자)에게 유언하기를 ‘반드시 공자를 불러 등용하라’ 하였는데, 그 신하들이 저지하자 강자는 마침내 冉求(염구)를 불러왔다.-《사기》에는 《논어》의 돌아가야겠다는 탄식이 이 때에 있었다고 하고, 또 《맹자》에 기록되어 있는 탄식한 말씀이 사성정자의 집에 계실 때의 말이라고 하였는데, 옳지 않을 듯하다. 《논어》와 《맹자》에 기록한 말씀은 본래 모두 한때의 말씀인데, 기록한 내용이 異同(이동)이 있을 뿐이다.- 공자는 蔡(채)나라로 가시어 葉(섭)땅에 이르셨다.-葉公(섭공)과 정치를 문답하였고, 섭공이 자로에게 공자의 인물됨을 물었는데 자로가 대답하지 않았으며, 長沮(장저)와 桀溺(걸닉)이 함께 밭을 갈고 있었는데, 공자께서 지나가실 적에 자로를 시켜 나루터를 묻게 한 일과 지팡이로 대바구니를 멘 丈人(장인) 등의 일이 있었다. 《사기》에 이르기를 “이때 楚(초)나라 昭王(소왕)이 사람을 시켜 공자를 초빙하자 공자가 장차 찾아가서 절하는 예를 행하려 하였는데, 陳(진)나라와 채나라의 대부가 군대를 징발하여 포위하였다. 그러므로 공자가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양식이 떨어졌다.” 하였다. 자로가 성난 얼굴로 공자를 뵌 것과 子貢(자공)에게 一以貫之(일이관지)를 고해준 말씀이 있다. 살펴보건대 이때에 진나라와 채나라가 초나라에 신하로 복종하였으니, 만약 초왕이 와서 공자를 초빙하였다면 진나라와 채나라의 대부들이 어찌 감히 공자를 포위하였겠는가. 또 《논어》를 근거해 보면 양식이 떨어진 것이 마땅히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갈 때에 있었을 것이다.-초나라 소왕이 장차 書社(서사)의 땅을 가지고 공자를 봉해주려고 하였는데, 令尹(영윤)인 子西(자서)가 불가하다 하니, 마침내 중지하였다.-《사기》에 이르기를 “서사의 땅이 7백 리이다.” 하였으니, 이러한 이치가 없을 듯하다. 이때 초나라 광인인 接輿(접여)가 孔子의 수레 앞을 지나가며 노래한 일이 있다.-공자가 다시 위나라로 돌아오시니, 이때 영공이 이미 죽고 위나라 군주인 輒(첩)이 공자를 얻어 정치를 하고자 하였으며,-노나라와 위나라의 정사는 형제간이라는 말씀과 자공에게 伯夷(백이)와 叔齊(숙제)의 일을 대답하시고 자로에게 명분을 바로잡을 것이라고 대답하신 말씀이 있다.-염구가 〈노나라〉 계씨의 장수가 되어 제나라와 싸워 전공을 세우자, 康子(강자)가 마침내 공자를 불렀으므로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오시니, 실로 哀公(애공) 11년(B.C.484) 丁巳年(정사년)으로 공자 나이 68세였다.-애공과 강자에게 대답한 말씀이 있다.-

 

然이나 魯終不能用孔子하고 孔子亦不求仕하사 乃敍書傳禮記4)하시며-有杞宋, 損益, 從周等語라- 刪詩正樂하시며-有語大師及樂正之語라- 序易彖繫象說卦文言하시니라-有假我數年之語라- 弟子蓋三千焉에 身通六藝者七十二人이러라-弟子顔回最賢이나 蚤死하고 後惟曾參得傳孔子之道라- 十四年庚申에 魯西狩獲麟하니-有莫我知之歎이라- 孔子作春秋하시니라- 有知我罪我等語라 論語에 請討陳恒事도 亦在是年이라- 明年辛酉에 子路死於衛하고 十六年壬戌四月己丑에 孔子卒하시니 年七十三이라 葬魯城北泗上하다 弟子皆服心喪三年而去로되 惟子貢은 廬於冢上하여 凡六年이러라 孔子生鯉하시니 字伯魚라 先卒하고 伯魚生伋하니 字子思니作中庸하시니라-子思學於曾子하고 而孟子受業子思之門人하니라-

 

그러나 노나라에서는 끝내 공자를 등용하지 못하였고, 공자 또한 벼슬을 구하지 않으시어 마침내 《書傳(서전)》과 《禮記(예기)》를 敍(서)하시고,-“夏(하)나라의 예를 내가 말할 수 있으나 그 후손의 나라인 杞(기)나라가 충분히 증명하지 못하며, 殷(은)나라의 예를 내가 말할 수 있으나 그 후손의 나라인 송나라가 충분히 증명하지 못함은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는 말씀과 “은나라가 하나라의 예를 인습하였으니 손익(가감)한 것을 알 수 있으며, 周(주)나라가 은나라의 예를 인습하였으니 손익한 것을 알 수 있다.”는 말씀과 “주나라는 하 · 은 二代(이대)를 보아 가감하였으니, 찬란하게 문채롭다.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는 등의 말씀이 있다.- 《시》를 刪定(산정)하고 樂(악)을 바로잡으시며,-노나라 大師(대사)에게 음악에 대해 고해 주신 말씀과 “내가 위나라로부터 노나라로 돌아온 뒤에 음악이 바루어졌다.”는 말씀이 있다.- 《周易(주역)》의 〈彖傳(단전)〉 · 〈繫辭傳(계사전)〉 · 〈象傳(상전)〉 · 〈說卦傳(설괘전)〉 · 〈文言傳(문언전)〉을 차례로 지으셨다.-“하늘이 나에게 몇 년의 수명을 빌려주어 마침내 《주역》을 배우게 한다면 큰 허물이 없을 것이다.”라는 말씀이 있다.-제자가 3천 명이었는데, 몸소 六藝(육예)를 통달한 자가 72명이었다.-제자 중에 顔回(안회)가 가장 어질었는데 일찍 죽었고 뒤에 오직 曾參(증삼)이 공자의 도를 전하였다.- 애공 14년(B.C.481) 庚申(경신)에 노나라에서 서쪽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기린을 잡으니,-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다는 탄식이 있었다.- 공자께서 《春秋(춘추)》를 지으셨다.- ‘나를 알아주는 것도 오직 《춘추》이며 나를 죄 주는 것도 오직 《춘추》이다.’라는 등의 말씀이 있다. 《논어》에 陳恒(진항)을 토벌할 것을 청한 일이 또한 이 해에 있었다.- 이듬해 辛酉(신유)에 자로가 위나라에서 죽었으며, 애공 16년(B.C.479) 壬戌(임술) 4월 己丑日(기축일)(11일) 에 공자가 별세하시니, 나이가 73세였다. 노나라 도성 북쪽 泗水(사수)가에 장례하니, 제자들이 모두 心喪(심상) 3년을 입고 떠났으나 오직 자공만은 무덤가에 廬幕(여막)을 짓고서 모두 6년을 지냈다. 공자는 鯉(리)를 낳으니 字(자)가 伯魚(백어)였는데 먼저 죽었고, 백어가 伋(급)을 낳으니 자가 子思(자사)로 《中庸(증용)》을 지으셨다.”-자사는 曾子(증자)에게 배웠고 맹자는 자사의 문인에게 수업하였다.-

 

何氏曰 魯論語는 二十篇이요 齊論語는 別有問王知道하여 凡二十二篇이요 其二十篇中章句도 頗多於魯論이라 古論은 出孔氏壁中하니 分堯曰下章子張問하여 以爲一篇하여 有兩子張하니 凡二十一篇이요 篇次不與齊魯論同하니라

 

○ 하씨(何晏(하안))가 말하였다.

“《魯論語(노논어)》는 20편이고, 《齊論語(제논어)》는 별도로 〈問王(문왕)〉과 〈知道(지도)〉 두 편이 있어서 모두 22편이며, 20편 가운데의 章句(장구)도 《노논어》보다 상당히 많다. 《古論語(고논어)》는 공씨(孔安國(공안국))의 집 벽 속에서 나왔는데, 〈堯曰(요왈)〉 아래 장의 ‘子張問(자장문)’을 나누어 한 편을 만들어서 두 〈자장〉이 있으니 모두 21편이며, 편의 차례도 《제논어》나 《노논어》와 같지 않다.”

 

程子曰 論語之書는 成於有子曾子之門人이라 故로 其書獨二子以子稱하니라

 

○ 정자(伊川(이천))가 말씀하였다.

“《논어》 책은 有子(유자)와 曾子(증자)의 문인에게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이 책은 유독 두 분만을 子(자)라고 칭하였다.”

 

程子曰 讀論語에 有讀了全然無事者하며 有讀了後에 其中得一兩句喜者하며 有讀了後에 知好之者하며 有讀了後에 直有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者니라

 

○ 정자(伊川(이천))가 말씀하였다.

“《논어》를 읽을 적에, 다 읽은 뒤에 전혀 아무런 일이 없는 자도 있으며(전혀 감명을 받지 못한 자도 있으며), 다 읽은 뒤에 그 가운데 한두 句(구)를 얻고 기뻐하는 자도 있으며, 다 읽은 뒤에 좋아하는 자도 있으며, 다 읽은 뒤에 〈너무 즐거워〉 곧바로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춤을 추고 발로 뛰는 자도 있다.”

 

程子曰 今人은 不會讀書로다 如讀論語에 未讀時도 是此等人이요 讀了後에도 又只是此等人이면 便是不曾讀이니라

 

○ 정자(伊川(이천))가 말씀하였다.

“지금 사람들은 책을 읽을 줄 모른다. 예를 들면 《논어》를 읽었을 적에 읽기 전에도 이러한 사람이요 다 읽고 난 뒤에도 또 다만 이러한 사람이라면 이것은 곧 읽지 않은 것이다.”

 

程子曰 頤自十七八로 讀論語하니 當時已曉文義러니 讀之愈久에 但覺意味深長이로라

 

○ 정자(伊川(이천))가 말씀하였다.

“나는 나이 17, 8세 때부터 《논어》를 읽었는데, 당시에도 이미 글 뜻을 알고 있었지만, 읽기를 더욱 오래함에 다만 의미가 심장함을 느꼈노라.”

 

[네이버 지식백과] 서설 [序說] (논어집주, 성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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