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논어(論語)》불교의 이상론, 유교의 현실론 접목해야 / 김방룡

수선님 2023. 12. 17. 13:02

  불교로 읽는 고전

1. 들어가며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멀리 서부터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 도 노여워하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이는 《논어》 〈학 이편〉에 나오는 첫 문장이다. 대학에 다닐 때 이 구절을 접하고서, ‘학(學)’과 ‘습(習)’과 ‘열(說=悅)’의 관계 그리고 ‘기쁨(悅)’과 ‘즐거움 (樂)’과 ‘노여워하지 않음(不慍)’의 차이에 대하여 깊이 고민한 적이 있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희열(悅)’이야말로 도학(道學)의 첫 관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2006년 그리고 2014년 중국에 머무를 때 이 문장을 다시 떠올리 게 된 적이 있었다. 그곳은 항주에서 장사로 가는 버스 속에서 그리 고 연변에서 북경으로 가는 기차 속이었는데, 그때 떠올린 것은 의 외로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 즉 ‘벗이 있어 멀리서부터 찾아오니’ 하는 대목 가운데 ‘멀다(遠)’라는 단어였다. 공자가 말한 ‘멀다’ 라는 말의 의미가 20시간 넘게 달리는 버스와 기차 속에서 새롭게 다가왔다. 그 거리는 “율곡이 멀리서 찾아와 퇴계를 만났다”라고 할 때의 ‘멈’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때 엉뚱하게도 주희가 집주한 해석 을 통해 공부했던 사서(四書)에 대한 나의 이해도 한국과 중국에서 달리 느껴지는 ‘멀다’라는 말처럼 주자의 해석을 벗어나면 달리 느 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2015년에서 2017년까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 아래 ‘유불 교섭사 의 맥락에서 바라본 조선불교 심성론의 변용’이란 주제를 가지고 연구하면서 조선의 유학자와 승려들이 《논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검토할 기회가 있었다. 조선 전기 유학자들이 주희의 《논 어집주》를 중심으로 주희의 관점을 올곧게 계승하고자 하였다면, 조선 후기 유학자들과 승려들은 탈주자학적 관점을 구축하고자 하 였던 것이 큰 특징이다. 이때 다산 정약용의 《논어고금주》와 명말 4대 고승의 한 분으로 추앙되고 있는 우익지욱(蕅益智旭)의 《논어 점정(論語點睛)》 등 탈주자학적 《논어》 이해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얻을 수 있었다.

중국의 경우 《논어》 관련 연구 주석서가 1,100여 종에 이른다고 하니, 북송 성리학자들의 주석을 중심으로 모아 편찬한 주희의 《논 어집주》가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공자 사상을 이해하는 절대 불변의 관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 되기 이전 에 이미 《논어》는 중국인의 생활세계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 고, 선진 시기 성선설을 주장한 맹자와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를 비 롯하여 많은 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또 주희 이후 왕양명 과 이탁오 그리고 우익지욱 등은 주희의 《논어》 해석에 반기를 들 고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하기도 하였는데, 이 또한 《논어》가 중국사상계에 끼친 영향이 그만큼 지대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 중국 인에게 적극적으로 포교하고 자 할 때 부처님의 가르침과

《논어》에 나타난 공자의 가르 침이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 지를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 을 수 없었다. 

그래서 《홍명 집》의 서문 벽두에서 “깨달음 의 바다는 한없이 넓고,지혜 의 거울은 걸림 없이 원만하 게 비춘다. 불타의 신비한 교 화는 전 세계에 두루 미치어 서 도자기와 주조물을 만들 듯이 요임금과 순임금을 만들어 내고, 그 가르침은 언어를 초월하여 전 세계에 널리 퍼져서 점토를 만들 듯이 주공과 공자를 만들어 내었다.”라고 하였다. 또 《모자 이혹론》에서는 “공자가 5경(經)을 도의 가르침으로 삼으니, 그것을 받들어 독송하고 실천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이 설명하는 도 는 허무하고 황홀하여 그 의미를 모르겠고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모르겠다. 성인의 말씀과 어찌 그리 다른가?”라는 물음을 제시하 고, “‘도(道)’라는 것은 집 안에 머물 때는 그것으로 부모를 섬길 수 있고, 나라를 다스릴 때는 그것으로 백성을 다스릴 수 있으며, 홀로 자립할 때는 그것으로 자신을 수양할 수 있다. 이 도를 실천해 가면 천지에 가득 차고, 가령 버리고 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소멸해서 그것과 분리될 수는 없다.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지, 어찌 5 경과 다른 점이 있겠는가?”라고 대답하고 있다.

불교적 관점에서 유학의 대표적인 경전인 《논어》를 어떻게 읽어 야 할까? 이것이 이 글에서 밝히고자 하는 주제이다. 이에 대해 다 양한 접근이 가능하겠지만 여기에서는 첫째 《논어》의 서지사항과 주요 사상은 무엇이고, 둘째 우익지욱의 《논어점정》을 통해 불교의 관점에서 《논어》는 어떻게 해석되며, 셋째 조선 승려들에게 미친《논어》의 영향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2. 《논어》의 서지사항과 주요 사상

《논어(論語)》란 선사들의 선어록과 같이 공자(孔子, BC 551~BC 479)가 제자들이나 당시 사람들과 대화한 말이나 제자들끼리 토론 한 말들을 모아서 편찬한 것이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서는 “논어는 공자가 제자나 사람들의 물음에 응답한 것과 제자 들이 서로 더불어 토론하고 그것을 공자에게 직접 물어 들은 말들 이다. 그 당시 제자들이 각기 그것을 기록해 두었다가 공자 사후 문 인들이 서로 모여 그것을 모아 논찬하였는데, 그것을 일러 ‘논어’라 부르게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논어》는 원래 20편으로 구성된 노론(魯論)과 22편으로 구성된 제론(齊論)과 공자의 구택에서 발견된 21편의 고론(古論) 등 3종이 있었으나 완전하게 전해지는 것은 없다. 지금 전하는 것은 서한 말 안창후(安昌候) 장우(張禹)가 노론과 제론을 합하여 20편의 정본을 만들었고, 이후 후한의 정현(鄭玄)과 위나라 하안(何晏)에 이르러 현존본의 원문이 결정되었다. 20편의 편명은 각 편의 첫머리의 글자를 따서 이름 지은 것으로 ‘학이 · 위정 · 팔일 · 리인 · 공야장 · 옹야 · 술이 ·태백 ·자한 ·향당 ·선진 ·안연 ·자로 ·헌문 ·위령공 ·계씨 ·양화 · 미자 ·자장 ·요왈’ 등이다.

한대 이후 《논어》에 대한 수많은 주석서가 등장하였는데, 그 특 징은 한학은 훈고(訓詁)를 위주로 하였고, 송학은 의리(義理)를 숭 상하였다. 대표적인 《논어》 주석서로는 하안(何晏)의 《논어집해 (論語集解)》 황간(皇侃)의 《논어의소(論語義疏)》 형병(邢昺)의 《논 어주소(論語注疏)》 주희(朱熹)의 《논어집주(論語集註)》와 유보남 (劉寶楠)의 《논어정의(論語正義)》를 들 수 있다. 조선시대 성리학 이 국교가 되면서부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주희의 《논어집주》이다.

근대 이전 동아시아 사회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사상은 유 학이다. 그 유학의 창시자가 공자이고 공자 사상의 정수는 《논어》속에 간직되어 있다. 주나라 말기에 봉건제도가 무너지면서 심각한 사회적 혼란이 나타났는데, 중국의 수많은 사상은 이때 출현하였 다.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고자 한 공자의 사상과 모든 인위적 질서 를 ‘해체’하고자 한 노자의 사상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상보적인 역 할을 하면서 대표적인 사상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또 중국인에 의 하여 받아들여진 불교는 유교의 인성론적 토대 위에서 ‘여래장 불 성’ 사상을 이해하였고, 도교의 무(無) 사상의 토대 위에서 반야 공 (空) 사상을 이해하였다. 그리고 불성과 반야사상을 결합하여 중국 적 대승불교를 만들어 내었다.

공자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지면 관계상 생략하고자 한다. 다만 공자의 한평생 목표는 허물어진 주(周)나라 정치 의 문화 질서를 재건하려는 정치적 이상과 인과 예를 통하여 인간 다운 도덕적 문명사회를 구축하고자 한 것이다. 천(天)에 대한 새로운 이해, 인(仁)과 예(禮)를 통한 인간 완성, 충서(忠恕)와 정명 (正名), 수기치인과 대동사회 등은 공자 사상을 대표하는 키워드라 할 수 있다.

선진 시기 공자의 사상은 맹자와 순자를 통하여 계승 발전되었지 만,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정치적 이념은 법가였다. 한나라 무제 에 이르러 유학이 국교로 등장하였지만 관학(官學)으로 전락하여 지식인의 관심에서 멀어지면서 위진 시대 현학(玄學)이 유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 인도로부터 들어온 불교가 결국 중국 사상계를 평정하여 수 · 당에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게 된 다. 그리고 남송 대 주희에 의하여 완성된 성리학은 공자와 맹자의 유학 정신의 토대 위에서 도가의 우주론과 불교의 심성론을 받아들 여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육경 중심의 유학을 사서 중심의 유학으로 전환시킨 인물은 주희 이다. 그는 관학화(官學化)되고 사장화(詞章化)되었던 유학을 도학 중심의 유학으로 전환하기 위해 《논어》 《맹자》 《중용》 《대학》에 주 석을 달아 《사서집주》를 완성하고 이를 통하여 제자들을 양성하였 다. 주희는 사서를 공부하는 순서에 대하여 먼저 《대학》을 읽어 그 규모를 정한 다음 《논어》를 읽어 그 근본을 세우고, 다음으로 《맹 자》를 읽어 그 발산한 점을 보고, 그다음 《중용》을 읽어 옛사람의 미묘한 뜻을 추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주희는 《대학》의 핵심은 덕(德)을 말하는 것이고, 《논어》의 주제는 인(仁)에 있으며, 《맹자》에서는 심(心)을 강조하였고, 《중용》의 핵심은 이(理)라고 말한다. 이처럼 주희는 사서에 대한 집주를 통하여 도학에 입각한 유학을 강조하였으나, 원나라 이후 주희의 《사서집주》가 과거 시험의 교재 로 채택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주희의 의도와는 다르게 다시 관학 화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주희의 성리학을 신유학으로 부르는 이유는 중국 유학사는 물론 사상사에도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기 우주론과 성 정 심성론을 하나의 형이상학 체계로 통일하여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에 이르면 성인(聖人)이 된다는 것이 주희 성리학의 핵 심이라 할 수 있다. 주희는 《논어집주》에서도 성리학적 관점을 드 러내고 있는데, 예를 들어 〈옹야편〉에 “인자(仁者)는 자신이 서고 자 함에 남도 서게 하며, 자신이 통달하고자 함에 남도 통달하게 하 는 것이다.”라는 내용의 주석에서 “자기로써 남에게 미침은 인자 의 마음이니, 여기에서 살펴본다면 천리(天理)가 두루 흘러서 간격 이 없음을 볼 수 있다. 인(仁)의 본체를 형상함이 이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 〈술이편〉에서는 인(仁)에 대하여 “인은 우리 마음이 부여받고 태어난 덕이기 때문에 멀리 밖에 있지 않고 나의 마음 안에 있으니, 돌이켜 찾는다면 여기에 바로 있으니 어찌 멀리 있겠는가” 하고 주석하고 있다. 인의 본체를 천리로 해석 하고 있는 데에서 주희 사상의 특징을 볼 수 있다.

주자학의 특징 중 하나가 불교를 이단 사설로 몰아 비판하고 있는 점이다. 주희는 《주자어류》 〈석씨편〉에서 남송 대 큰 영향력을 떨치고 있었던 대혜종고가 속한 임제종의 작용즉성(作用卽性)에 대하여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는 달리 보면 그만큼 대혜의 사상으 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주희에 의해 체계화된 성리학이 지배이념으로 정착하고 나서 불교계는 유 불조화 혹은 유불융합의 입장으로 한 걸음 물러나게 된다.

그렇다면 불교적 관점에서 《논어》를 해석하고자 시도는 없었는 가? 《논어》에 대해 탈주자학적 해석이 본격화된 시기는 송나라와 원나라를 지나 명말에 이르러서이다. 주지하다시피 감산덕청, 자백 진가, 운서주굉, 우익지욱 등 소위 명말 4대 고승이 출현하여 불교적 시각으로 도가와 유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이 중 지 욱은 《사서우익해》와 《주역선해》를 저술하여 유학에 대한 불교적 해석을 시도하였다. 《사서우익해》는 구체적으로 《논어점정》 《중용 직지》 《대학직지》 《맹자택유》 등이 실려 있는데, 그중 《맹자택유》는 유실되어 전하지 않고 나머지 세 권은 전해지고 있다.

이 가운데 《논어점정》이야말로 《논어》에 대한 불교적 해석이 어 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모범적인 저술이라 할 수 있다. 근 대 시기 양복자 강겸은 《논어점정보주》라 하여 우익의 저술에 대한 주석서를 펴냈다. 그 서문에서 우익이 논어를 풀어 쓴 이유에 대해 “세간의 법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로 하여금 본래 타고난 불성을 깨닫게 하고, 깊이 인과와 윤회를 믿게 하며, 윤리를 돈독히 하여 본분을 다하게 하고, 악행을 두려워하게 하여 선행을 실천하 게끔 하며, 오염된 번뇌를 씻어서 청정한 행업을 닦도록 하여 불교 를 창성하게 하고 유교도 더욱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3.지욱의 《논어점정》에 나타난 불교적 해석

지욱은 12세에 유가서를 읽었으며, 불교와 도교를 비판할 결심을 할 정도로 유학에 대한 신념이 강했던 인물이다. 그가 출가를 결심 하게 된 동기는 주굉의 영향과 더불어 23세에 《능엄경》을 읽다가 의심이 생겨 그 의문을 풀고자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 감산 의 문도인 설령(雪嶺)에게 출가하여 천태종에 몸을 담고 있었으나, 다양한 종파를 두루 거치며 수행하는 한편 많은 저술을 남겼다. 천 태, 화엄, 유식, 율, 정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경론을 강의 하였고 주석을 남겼다. 그가 《논어점정》을 저술한 시기는 49세 때 인 1647년이며, 1645년에 《주역선해》를 저술한 이후였다.

《논어점정》에는 지욱이 《논어》를 해석하기 위하여 불교는 물론 유가와 도가의 경전이 망라하여 인용하고 있다. 불교의 경전으로는 《화엄경》 《기신론》 《능엄경》과 선어록 등이며, 유가의 경전으로는 《대학》 《중용》 《맹자》 《주역》 《서경》 《예기》 등이 있고, 도가 경전 으로는 《장자》 《회남자》 등이 있다. 또 인용한 학자들로는 이탁오, 왕양명, 진민소, 정계청, 각령 선사, 주계후, 오인지, 오진선, 원료 범, 정이천, 왕안석 등이 있는데, 이 중 이탁오와 왕양명을 가장 많 이 인용하고 있다.

지욱은 이처럼 다양한 경전과 다양한 인물을 인용하여 《논어》를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유불의 조화 내지 회통을 꾀하 고자 함이다. 지욱은 공자가 강조하고 있는 군자, 수신, 인의예지, 치국, 위민 등이 불교에서 말하고 있는 보살, 불성, 정법, 자비, 계 율, 지혜, 수행, 정토, 중생구제 등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논증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지욱의 주석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데, 그 대표적 인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학이편〉 벽두의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에 대해 지욱은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다.

대개 사람들은 영각(靈覺)의 성품을 소유하고 있다. 본래 밖의 경 계에 걸림이 없으니 본래 기쁘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본체를 미혹함으로 말미암아 두려움과 근심거리가 생각나는 것이다. 지금 ‘배운다(學)’는 뜻은 곧 시각의 지혜를 의미한다. 본각을 의지해서 생 각 생각 깨어 있으면 깨어 있지 않을 때가 없다. 그러므로 ‘때때로 익 힌다(時習)’고 하는 것이다. 때때로 깨어 있지 않음이 없으니 이 또한 매 순간 기뻐하지 않음이 없다.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지욱은 《대승기신론》의 시각과 본 각을 끌어들여 불교적인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또 “증자가 말하기 를 나는 매일 나 자신을 세 가지로 반성한다.”에 대한 주석에서 다 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세 가지 일이란 다만 자기 자신을 낮추는 일대사일 뿐이다. 혹여 나 와 남이라는 두 가지 상(相)이 있다면 정성(忠)과 신의(信)가 있는 사 람이 아니다. 만약 스승보다 부족한 점을 찾을 수 없다면 더 이상 익 히지 않아도 된다.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지욱은 ‘하루 세 번 반성한다’라는 증자의 말에 대하여 하심(下心)하고 분별심(分別心)을 가지지 않아 야 한다는 불교적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또 〈술이편〉의 “나는 태어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고 부지런히 탐구하 는 사람이다.”라는 공자의 말에 대한 주석에서 “다만 석가모니 부처님도 오히려 6년 고행만을 보이신 것은 아니다. 비록 미륵보살이 당일에 출가하여 당일에 성도했다고 하여도 이는 삼아승기겁 동안 수행을 실천한 결과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공자와 마찬가지 로 석가모니와 미륵보살이 오랜 수행과 탐구의 결과 성도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이 역시 불교적인 해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지만,〈계씨편〉의 “군자가 두려워할 것이 세 가지가 있다.”라는 다음과 같 은 지욱의 주석은 더욱 적극적으로 불교적 해석을 하고 있다.

천명을 두려워하는 것은 일체삼보에 귀의함을 의미하고, 대인을 두 려워하는 것은 주지삼보 중에서 불보와 승보에 귀의함을 의미하며, 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것은 주지삼보 중에서 법보에 귀의함을 의미한다. 마음, 부처, 중생 이 셋이 차별 없음을 알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이 오직 위험한 것임을 알지 못한다면 도를 닦고자 하는 마음도 오로지 미미해질 것이니. 능히 경계하고 삼가며 조심하고 두려워하 지 않게 된다.

《논어점정》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것은 왕양명과 더불어 이탁오(李卓吾)이다. 이탁오에 대한 인용은 93회에 이르는데 그 대 부분은 이탁오의 《논어평(論語評)》에 실린 내용이다. 유교의 이단 자로 불리는 이탁오의 저술로 널리 알려진 책은 《분서(焚書)》이지 만 불교와 관련해서도 《화엄경합론간요(華嚴經合論簡要)》 《반야 심경제강(般若心經提綱)》 《정토결(淨土訣)》 등 다수를 남겼다. 이 탁오와 지욱 모두 사상적으로 이학(理學)에서 출발하여 양명학을 거쳐 불교로 귀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논어점정》에서 우익은 여러 곳에서 원문을 싣고, 이에 대한 이탁오의 주석을 소개한 후, 이어 자신의 주석은 ‘방외사왈(方外史曰)’이라 하여 덧붙이고 있다.

예를 들어 〈자장편〉의 “자하가 말하기를 벼슬하면서도 여력이 있으 면 배우고, 배우면서 여력이 있으면 벼슬을 해야 한다.”라는 대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다.

이탁오는 “요즘 배우는 사람들은 여력이 없으면서도 벼슬을 하고 있다. 벼슬을 하면서 여력이 생긴다고 무엇을 기꺼이 배우고자 하겠 는가?”라고 하였다. 방외사는 “오직 배우는 사람들이 여력이 없음에 도 벼슬을 하고 있다. 따라서 벼슬을 한 이후에는 영원히 여력이 있을 때가 없다.”라고 말했다.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이탁오와 지욱의 해석은 표현이 다를 뿐 내용상에서는 차이가 없다. 자하가 벼슬하는 자를 긍정적 으로 보고 있다면 이탁오와 지욱은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내고 있음 을 볼 수 있다.

 

4. 조선 승려들에게 미친 《논어》의 영향

《논어》는 비단 조선조 유학자들뿐만 아니라 삼국시대 이래 지식 인들의 필독서였고, 승려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논어》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은 백제 근초고왕 이전으로 추정되며, 고려 말 안 향에 의해 주자학이 들어오고 그의 제자 권부에 의하여 《사서집주》의 간행이 건의되어 주자의 《논어집주》가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조선 태조 원년에 과거법이 실시되면서 시험과목으로 《논어》가 채 택되면서 중시되었고, 세종 대에 《논어집주》에 송원 제유(諸儒)의 설을 소주로 단 《논어집주대전》이 관의 주도로 광범위하게 퍼지면서 《논어집주》의 영향력이 일반 사회에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 다.

조선 사회가 성리학에 의하여 지배되었기 때문에 학식이 있는 승 려들은 출가 이전 《논어집주》를 중심으로 《논어》에 대한 공부를 하 였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승려들의 저술과 문집 속에는 《논어》와 관련한 적지 않은 내용이 전해온다. 여기에서는 유불회통을 추구 하였던 조선 초기 함허기화, 중기 청허휴정, 후기 운봉대지 등의 저 술에 나타난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기화(己和, 1376〜1433)의 《현정론》은 억불론을 주장한 정도전의 《불씨잡변》에 대한 반박의 글이다. 기화는 이 책에서 14가지 불교 에 대한 비판 내용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 은 생략한다. 이 책에서 기화가 《논어》를 인용하고 있는 것은 다섯 곳이다. 우선 〈서문〉에서 〈위정편〉에 나오는 “행정적인 명령으로 써 이끌고 형벌로써 다스리면 백성들은 이를 면하고자 하지만 부끄 러움을 모른다. 덕으로써 이끌고 예로써 다스리면 백성들은 부끄 러움도 있게 되고 진심으로 따르게 된다.”라는 대목을 인용하여, 유 교의 오상(五常)은 불교의 오계(五戒)와 같지만, 그것을 가르칠 때 유교는 덕행으로써 하지 않고 행정적인 명령이나 형벌로 한다고 비 판한다. 또 ‘출가는 불효이다’라는 비판을 반박하면서 기화는 출가 가 대효(大孝)이며 대자(大慈)라고 말한다. 이때 〈안연편〉에 나오 는 “하루만 자기를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도 온 세상이 인으로 돌아 간다.”라는 말을 인용하고 있다. 또 ‘불교의 경전에는 효용이 없다’ 는 내용을 반박하면서 “그대는 듣지 못하였는가, 세상에는 두 가지 도가 없고 성인에게는 두 가지 마음이 없다는 것을! 성인이란 비록 천 리를 떨어져 있고 만세나 되는 세월을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마 음이 일찍이 다른 적이 없다. 공자가 말하기를 ‘멋대로 생각하지 않고, 꼭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지 않고, 고집부리지 않고, 나만 내세 우지도 않는다.’라고 하였다.”라고 말한다. 이는 〈자한편〉에 나오는 내용이다.

휴정은 《유가귀감》의 벽두에서 “공자는 ‘하늘이 무엇이라 하던가’ 하였고, 동중서는 ‘도의 큰 근원은 하늘에서 나왔다’라 하였으며, 채 침은 ‘하늘이란 삼가는 마음이 스스로 나온 곳이디’라 하였으니, 주 무숙은 이를 ‘무극이면서 태극이다’라 하였다.”라고 말한다. 여기에 서 공자의 말은 《논어》 〈양화편〉에서 자공이 공자에게 “말하지 않 는다면 어떻게 전해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하자 이에 대해 공 자는 “하늘이 무엇이라 하던가. 사계절을 운행하고 만물을 생성해 낼 뿐이다.”라고 한 대답을 휴정이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 해 주자는 ‘천리가 발현되는 것’으로 해석하였고, 지욱은 “말할 때 침묵함이고, 침묵할 때 말함이다.”라고 주석하였다.

대지는 《운봉선사심성론》에서 “공자는 ‘도가 사람을 멀리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멀리한다.’고 말하였다. 이는 우리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똑같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공자의 말이기는 하 지만 《중용》에서 인용한 글이다. 비록 그렇긴 하나 대지가 불교 심 성론에 대하여 논하면서 유교의 심성론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백파긍선과 금명보정, 경허성우 등의 글에서도《논어》에 대한 글들이 발견되지만 지면 관계상 생략하고자 한다.

 

5.나가며

유교는 성인을 목표로 하고 불교는 부처를 목표로 하지만 이상적 인 인간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유교의 인(仁)과 불교 의 자비(慈悲)는 만물을 사랑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자신에 게 진실하고(忠) 타인을 배려하는(恕) 것이 인(仁)을 실천하는 법이 고, 모든 존재가 서로 의지하고 있다는 연기(緣起)의 실천이 곧 동 체자비이다. 비록 유교와 불교가 서로 생사관이 다르고 선비와 승 려가 세간과 출세간의 삶의 모습이 다르지만, 지와 덕이 완비된 인 성과 불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중국과 한국의 역사에서 불교와 유교는 시대에 따라 그 위상이 다르게 나타났다. 불교계의 유불조화, 유불회통에 대한 논의도 그 시대의 정치 문화적 상황에 따라서 다른 모습을 보여왔다. 불교가 우위에 있을 때는 불교를 포교하기 위해 유불조화를 말하였고, 유 교가 우위에 있을 때는 불교가 생존하기 위해 유불조화를 말하였 다. 불교계의 《논어》에 대한 이해와 해석 또한 이러한 상황과 맞물 려 있다. 그럼에도 항상 《논어》에 대한 불교계의 담론이 존재하였 던 것은 그 속에 담긴 사상이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어떻게 《논어》를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 또한 그 속에 담긴 보편적 가치에 주목한다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 한다.

언젠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주장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었다. 공자는 《논어》에서 “임금은 임금 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 워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자신에게 진실되고 자신의 처지에서 바 르게 행동하며,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고 역지사지의 정신으로 배 려해야 문명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공자의 주장이다. 남 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 자가 군자요, 인욕바라밀을 실천하는 자가 보살이다. 요즈음 학생이 학생답지 못하고 교권이 땅에 떨어졌다고 아우성들이다. 그럴수록 스승은 스승답고 부모는 부모다워야 하지 않을까? 사람과 사람 간의 올바른 관계가 ‘도덕적 자각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하는가, 법과 제도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이루어져야 할 문 제이다.오늘날에도 《논어》 속에 나타난 공자의 정명(正名) 사상에 대해 깊이 숙고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

 

김방룡 brkim108@hanmail.net

전북대학교 철학과, 동 대학원(석사)을 졸업하고, 원광대학교 불교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북경대, 절강대, 연변대 방문학자를 지냈으며, 한국선학회 회장 과 보조사상연구원 원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보조지눌의 사상과 영향》 등 40 여 권(공저 포함)이 있으며, 논문으로 〈보조지눌과 태고보우의 선사상 비교 연구〉〈경허성우의 선사상과 불교사적 위상〉 〈유불교섭사의 맥락에서 바라본 조선 전 · 후기 불교 심성론의 변용〉 등 100여 편이 있다. 현재 충남대학교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