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불교평론과 경희대 비폭력연구소가 주관하는 ‘열린논단’(2013년 5월 23일)에서 발표한 내용을 보완한 것이다. 본고의 전반부는 인도불교의 쇠망에 관한 현재까지의 여러 주장을 정리하고, 후반부에서는 필자의 생각을 많이 보탰다. 특히, E. H. Carr(1892~1982)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다”라는 구절이 널리 회자되듯, 인도불교사에서 불교 쇠망 요인의 논의는 과거를 비추어 현재의 문제를 점검해보고, 바람직한 불교 미래를 계획하고 준비하는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의도로 발제한 것이다.
1. 인도, 불교유적만 있고 불교는 없다
C. E. 1203년, 인도불교의 멸망의 해!
서력기원 1203년은 인도사 또는 인도불교사에서 불교가 자취를 감추게 된 해로 기록된다.
누구나 불교의 발상지는 인도라고 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인도를 불교의 나라일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런데 책자나 언론 매체를 통해 인도 인구의 80% 이상이 힌두교이고 불교는 겨우 0.9% 정도밖에 되지 않음을 알고 나서는 왜 그럴까 하는 의구심을 저버리지 못한다. 불교 발상지인 인도에서 불교 인구가 그렇게 적은지에 대해 매우 궁금해하며 그 이유를 묻는다. 또한 인도를 여행한 사람들 가운데는 ‘인도에는 불교유적만 있고 불교는 없더라’라는 말을 남기기도 한다.
세계사에는 수많은 종교가 명멸을 거듭했다. 그리고 현재에도 새로운 종교가 계속 태어나고 사라져가고 있다. 한때 천년만년 갈 것처럼 위세를 크게 떨치던 종교도 몇 세대를 넘기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예도 있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살펴보더라도 수많은 종교가 명멸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른 인도 종교와 달리 불교는, 인도에서는 사라졌지만 아시아 전역으로 광범위하게 전해져 크게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아시아와 동양을 대표하는 종교로 그리고 각 나라의 전통문화 또는 전통종교로 자리 잡았다. 정작, 발상지인 인도에서는 사라졌는데! 혹자는 인류 역사상 교조가 있는 종교는 그 근원지에서 별로 환영받지 못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예를 들면, 예수의 기독교도 유태인의 이스라엘 땅에서 환영받지 못한 것처럼.
불교도의 인도(Buddhist India)
불교는 지금으로부터 약 2,600년 전, 인도에서 역사적 인물인 석가모니 붓다의 출현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이전의 종교와 사람들이 신 관념 또는 신 개념에 붙들려 있는 것을 비판하였다. 인류의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창조주 관념을 부정한다. 대신 그 자리를 인간을 포함한 개개의 생명으로 치환한다. 그야말로 세계관의 혁명이다. 이는 불교가 초기경전에서 거침없이 바라문교의 창조주 관념에 대한 부정과 비판, 신에 대한 제식주의 반대와 배격과 함께 바라문교의 동물희생제의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으며, 창조주라는 정점의 위계가 설정된 모든 인간관과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파기하는 이유가 된다. 그리고 위계를 부정하는 새로운 세계관인 연기법을 제시하고 있다. 붓다는 이러한 연기법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계몽하기 위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상가(saṁgha)로 불리는 매우 전문적인 선교 조직체로서 종교공동체를 탄생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대담하게도 새로운 세계관에 따라 ‘상가’가 구현해야 할 목표는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복지와 행복임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붓다는 처음으로 가르침을 설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직체가 약 60명으로 늘어나자 곧바로 그들을 각지로 파견한다. “‘세계에 대한 큰 자비심(lokānukampa)’을 가지고 ‘많은 부류의 복지(bahujanahita)’와 ‘많은 부류의 행복(bah-ujanasukha)’을 위해 널리 돌아다녀라. 그래서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마라.”라고 독려하는 ‘전도 선언문’과 함께.
붓다의 서거 후 100~200년 후의 마우리아 왕조는 인도 역사상 최대로 영토를 확장한다. 이 왕조의 아소카 왕은 불교에 귀의하여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덕분에 불교는 인도 아대륙 전체에 속해 있는 마우리아 왕국에 뿌리를 확고하게 내렸다. 나아가 아소카는 아대륙을 넘어 멀리는 유럽과 아프리카까지 불교 전도단을 파견했다.
이후 불교는 아대륙의 모든 지역에서 문화적, 종교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불교는 지역과 계율 그리고 교리상의 문제로 여러 부파가 성립하면서 더욱 발전하였다. 최초로 아대륙의 동북부 지역과 서북부 지역 간에 상좌부와 대중부라는 불교 부파가 성립된 이후 다시 인도불교는 18부파나 20부파 또는 그 이상의 다채로운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인도불교는 과거 인류역사에서 단일 문화체계로는 가장 큰 규모의 전적을 남겼다. 동아시아 문명의 중심에 있었던 중국은 그러한 정교한 전적을 중화의 자존심을 꺾고 왕조와 시대에 상관없이 오랜 기간에 걸쳐 국가적 사업으로 수용하기에 바빴다. 우리나라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라는 방대한 정신문화의 보고(寶庫)도 바로 그러한 역사적 맥락에 있는 것으로 인도불교의 위상을 방증한다. 고대 인도사에서 이와 같이 불교가 누린 과거의 영광을, 저명한 서구의 동양학자 리즈 데이비스(T.W. Rhys Davids, 1843~1922)는 ‘불교도의 인도(Buddhist India)’라고 부르면서 책을 출간했는데, 지금까지도 고전으로 불리며 널리 읽히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인도 전역의 많은 불교 유적을 통해서도 불교가 인도의 오랜 역사 속에서 얼마만큼의 크게 영향을 미친 종교인지를 알게 해준다. 인도 아대륙뿐만이 아니라 아대륙을 넘어 동으로는 중앙아시아를 지나 중국과 우리나라, 일본에까지 전해졌다. 서로는 한때 우즈베크 등에 이르기까지, 남으로는 스리랑카 그리고 북으로는 몽골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현재 10억이 넘는 인도 인구 가운데 불교도의 비율은 2001년 기준으로 겨우 0.8% 정도를 웃도는 것으로 보고된다. 인도가 독립하기 전 영국 식민지 기간인 1931년의 조사에서도 불교도는 438,769명으로 인구비례로 보아 0.1%에 지나지 않았다. 인도에서 불교인구의 비율은 이렇게 미미하다. 인도에서 불교가 미미한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인도불교, 본 고장에서 800년 이상이나 단절
이러한 인도불교의 쇠퇴와 멸망은 일종의 문화 수수께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현재까지도 인도는 물론 동서양의 많은 역사학자, 문화학자 그리고 종교학자들이 적절한 답을 제시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나름의 많은 의견과 답변이 제출되어 학계에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최근에는 오래된 이슬람 자료를 통해 불교 쇠퇴와 멸망 원인을 제시해 보려는 한 외국학자의 시도가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소개되기도 했다.
불교가 인도역사의 중심에서 쇠퇴하고 멸망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로 이야기된다. 그렇지만 크게 외부적 요인과 내부적 요인과 같은 두 가지로 압축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외부적 요인으로 바라문교를 이은 힌두교의 융성과 경쟁 종교인 불교에 대한 집요한 박해와 이슬람교(회교)의 무자비한 파괴 등이 거론된다.
둘째, 내부적 요인으로 불교교단 내부의 정체(停滯)와 타락 등이 논의된다.
여러 논의에도 불구하고 인도불교 쇠퇴와 멸망을 가져다준 결정적인 사건은 13세기에 이슬람의 침입에 따른 파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불교교세는 재기할 수 없을 만큼 꺾이고 만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약 800년 이상 동안이나 인도에서 불교는 공백 기간이었다. 차츰 인도인의 기억에서 불교는 망각되었다. 현재 많은 힌두 인도인은 붓다가 그저 힌두 신 중의 하나인 비슈누 신의 화신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다.
필자는 불교가 인도역사의 중심에서 쇠퇴하고 멸망하게 된 외부적 요인과 내부적 요인과 같은 두 가지 점을 중심으로 논의를 해보기로 한다.
2. 인도불교 멸망의 외부적인 요인
부서진 채 방치되어 오늘의 이르고 있는 산치 대탑 주변 승원.
인도불교 멸망의 외부적인 요인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고대 인도에서 왕권(정치권력)과 교권(종교)이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흔히 인류 고대 사회는 제정일치(祭政一致) 또는 신정일치(神政一致) 사회에서 차츰 사제권과 왕권이 분화된다. 나아가 교권 또는 사제권이 왕권에 종속되는 경향을 보여준다. 하지만 고대 인도의 바라문교는 사제권이 계급적으로 왕권보다 우위에 있음을 주장한다. 이는 인도의 사성계급의 순서에서도 잘 나타난다. 바라문 사제계급은 왕권의 기원도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모두 천부적(天賦的)이라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한다.
결국 왕권이 바라문 종교를 배제할 수 없는 구조로 만들었다. 불교 흥기 이전이나 이후에도 국가의 대소사를 위한 제의에 바라문 사제(purohita)가 대신의 수석 자리를 차지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이다. 이에 반해 불교는 출발부터 정교분리(政敎分離) 입장을 분명히 한다. 따라서 인도불교는 왕권과 출세간적 교권 간의 기능과 역할에서 서로 간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승인하며 출발한다. 이에 반해 힌두교나 이슬람교의 경우는 정치권력과 유착관계를 유지한다. 즉 인도불교 교단이 쇠퇴하고 멸망한 것은 힌두교나 이슬람교가 모두 정치권력과 결합 또는 결탁한 가운데 불교에 박해와 탄압을 가했기 때문이다. 숭가왕조의 뿌쉬야미뜨라(Puṣyamitra) 왕으로 시작하여 후대 싸상까 왕 그리고 이후 이슬람 종교의 무력이 그 한 예이다. 정교분리 원칙을 고수한 불교는 정치세력과 무력을 앞세운 왕권, 종교세력에 의해 끝내 무력하게 괴멸된다.
힌두교의 융성
고대 인도사에서 바라문교와 사문종교는 서로 경쟁 종교이다. 불교는 자이나교에 이어 사문종교의 대표가 되었다. 바라문과 사문이 대등 또는 우위의 관계를 다투는 경쟁 양상은 여러 문헌을 통해 입증된다. B.C.E. 2세기 《요가수트라(Yoga Sutra)》의 저자인 빠딴잘리(Patañjali)는 양자를 마치 뱀과 몽구스와 같은 천적 관계라고 규정한다.
힌두교는 사회·문화적인 여러 방면에서 영향력을 강화시켜 인도 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한다. 예를 들면, 카스트에 기반한 《마누법전(Ma-nusmṛti)》 등 여러 법전류를 작성하고 완비하여 사람들의 일상을 바라문 중심의 사회체제로 정착시키는 데 성공한다. 다음에는 문화적으로 바라문의 언어인 산스끄리뜨어를 지배어로 정착시키는 데도 성공한다. 나아가 종교적으로는 경쟁 종교의 장점도 채용한다. 또한 일반대중의 주술신앙은 물론 각 지방의 부족이나 민간신앙 등의 매우 다채로운 신앙을 수용하여 힌두교 세계를 확장한다. 이에 반해 불교는 바라문의 새로운 종교운동에 적절한 대응을 펼치지 못했다.
힌두교의 박해와 탄압
더 나아가 힌두 왕권이 적극적으로 불교를 탄압하는 경우도 있었다. 인도 불교사에서 불교탄압의 첫 시작은 대략 B.C.E. 2~1세기에 해당하는 숭가(Śuṅga) 왕조의 뿌쉬야미뜨라(Pushyamitra) 왕이다. 그는 바라문 출신으로 바라문교를 깊이 신봉하여 불교를 박해한 왕으로 알려졌다. 그는 바라문교의 제사의식을 대대적으로 부흥시켰다. 반면에 불교를 혐오하여 경전을 불태우고 불탑과 가람을 닥치는 대로 파괴했으며, 출가 승려들을 대량 학살했다고 한다.
또한 병력을 동원하여 당시 중심지였던 마가다의 유명한 사원을 파괴하고 차츰 여러 지역으로 확대하였으며 카슈미르(Kashmir) 왕국의 국경 지방에서는 500개의 가람을 파괴했다고 전한다. 심지어는 불교 승려의 머리에 상금을 걸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인도역사에서 경쟁 종교와 결합한 정치권력에 의한 최초의 불교탄압으로 기록된다. 다음으로 유명한 국가권력에 의한 불교탄압은 동인도 까르나수바르나(Karnasuvarna)의 싸상까(Sasanka) 왕이다. 이는 C.E. 8세기경으로 중국 당나라 현장(玄奘, 602~664)이 인도를 구법여행한 시기와 그리 멀지 않은 때로 보고된다. 동인도 지역을 지배했던 그는 불교의 중요성지인 보드가야와 쿠시나가라 등지를 파괴했는데, 현장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싸상까 왕이 외도(힌두교)를 믿고 불교를 배척한 나머지 절들을 파괴했다. 그러면서 (성도 보드가야의) 보리수도 잘라 뿌리를 캐어…… 남은 싹을 깡그리 없애려 하였다.” 또한, 절에 불상 대신에 힌두교 시바 신상을 안치시키고 반열반 장소인 쿠시나가라에서는 절에서 승려들을 축출하는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불교를 탄압하고 파괴하였다 한다. 이 밖에도 힌두교를 믿은 왕이 불교를 폐하고자 학식이 높은 바라문에게 불교 비판의 글을 짓게 하거나, 왕권의 비호 아래 양 종교의 대론을 대중 앞에서 개최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와 함께 꾸마릴라나 샹카라 같은 많은 힌두 논쟁가들이 주도한 불교 비판 캠페인 또한 인도불교 쇠퇴에 일조한 것으로 언급된다. 힌두교의 융성은 경쟁 관계에 있었던 불교의 상대적 몰락을 의미한다. 여러 연구자들에 의하면 인도불교 쇠퇴는 이미 C.E. 7세기경부터 시작하여 결정적으로 13세기에 괴멸한 것으로 본다. 이와 비슷한 사례를 중국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조선 시대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국가권력에 의해 불교를 강제하고 철저하게 무력화시킨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슬람의 무자비한 파괴
이슬람교도는 986년부터 인도 침략을 시작한다. 이들은 셈족 종교의 일반적 경향처럼 신상이나 불상을 우상으로 간주하여 극도로 혐오하였다. 때문에 인도 원정에서 이슬람은 불교나 힌두교의 사원과 성지를 무차별하게 파괴하고 승려를 살해한다. 동인도에는 8,000여 명의 승려들이 집단 거주했던 위끄라마실라(Vikramasila) 사원이 당시 불교의 최대 거점 사원으로 유명하였다. 하지만 이 사원마저 1203년, 이슬람교도의 춤 추는 칼날에 수많은 승려가 무차별적으로 살해되었고, 사찰 시설물은 우상숭배로 간주되어 약탈과 함께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때문에 1203년은 인도불교사에서 불교가 자취를 감추게 된 해로 기록된다. 당시 이슬람의 장군은 겨우 1, 2백 명의 기병을 이끌고 왕궁과 사찰을 점령하였다. 이 밖에 다른 불교 거점들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중 오단타뿌라(Odantapura) 사원을 파괴하면서는 2,000명의 승려를 대량학살하였다 한다. 이러한 이슬람의 파괴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승려들은 네팔이나 티베트 등지로 서둘러 피난하였다. 이후 불교는 급격하게 인도 본토로부터 점차 모습을 감추게 된다.
이와 같이 불교가 발생한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한 원인은 여러 가지로 논의되고 있지만 이슬람의 폭력이 결정적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 조직적인 교단 조직의 승원이 전부인 불교는 사원이 파괴되고 승려가 살해되면 더 이상 재기할 수 없는 치명상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서아시아 기원의 유일신 종교 전통의 배타주의는 이슬람에서도 잘 계승되고 있다. 예를 들면, 코란의 가르침 가운데 “불신자나 사이비 신자 등의 적들과 끝까지 싸워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자들에게는 아무리 잔혹하게 대해도 좋을지니” 또는 “같은 땅에 두 개의 종교를 허용하지 말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같은 마호메트의 유언에 따라 마구잡이로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다.
최근 이러한 코란의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 호사카 교수의 이슬람 사료 연구에서 우리는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불교 승려들과 불교도는 이슬람 침략자에 의해 개종과 죽음 가운데 하나를 강요받을 때 이슬람으로 집단 개종하는 사례가 많았다는 것이다. 즉 불교도는 이슬람의 폭력에 맞서 대항하기보다는 상대를 죽이는 유혈전쟁을 허락하지 않는 종교적 계율을 이유로 들어 개종을 선택한 경우가 많은데, 이를 입증하는 당시의 편지문이 소개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승병과 달리 외적의 폭력 앞에 무력하기만 했던 인도불교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이처럼 불교는 인도 중심부에서 이슬람에 의해 결정적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이는 정교유착의 종교가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현재 정교분리를 헌법으로 명시하고 있지만 종교가 아직도 정치권력화의 꿈을 저버리지 못하고 매달리는 이유는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3. 인도불교 멸망의 내재적인 요인
‘왜 인도에서 불교는 사라졌는가’는 이슬람의 파괴로만 모두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힌두교나 자이나교 등도 불교와 마찬가지로 이슬람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독 불교만 재기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이로 보아 외적 요인보다는 내적 요인을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내적 원인으로는 불교는 성격상 조직충성도를 크게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 믿음보다 지혜 중심으로 지식계급적 한계가 있었다는 점, 일반인의 생활의례 정착에 소홀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세속적 욕망에 반하는 냉혹한 무아 교리는 대중들로부터 호감을 얻지 못했다는 점, 불교의 힌두교 접근으로 정체성을 상실한 점, 힌두교의 불교박탈 전략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 거대한 승원 중심으로 민중과 유리된 점, 비대중적 언어인 산스크리뜨어의 진행에 따라 대중과 유리된 점 등을 함께 짚어볼 수 있다.
조직충성도를 강화시키지 못하다
불교는 생래적으로 배타적 결속력을 통한 종교 조직의 충성도가 낮다. 이에 반해, 신 중심의 종교는 특수한 종교 관념을 통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경계가 분명하다. 이러한 종교 관념의 경계는 신자들을 생리적으로 내부적 결속을 강하게 만들어 배타적 응집력과 충성도를 높인다. 불교의 경우는 보편적인 이법으로 나아가는 방향에 중심이 형성되어 있어 신본주의 종교처럼 어떤 특수한 도그마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라는 경계를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배타적 결속을 가져다주는 도그마를 강한 어조로 비판한다.
따라서 신도들의 결속력이나 충성도는 신본주의 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다. 더 나아가 불교는 어떤 특수한 종교 관념을 강요하거나 강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의식·무의식상의 구속과 속박의 관념을 분석하고 해체시켜 버린다. 자아관념[我執]은 물론 이념화 혹은 관념화[法執]하는 일체의 정신적 시도까지 경계하게 하는 가르침이 그것이다. 흔히 불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자유롭고 파격적이며 관용적이고 포용적인 종교로 서술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불교의 속성은 불교가 다른 종교 집단에 비해 결속력과 응집력이 약해 조직충성도가 낮을 수밖에 없는 약점이 된다. 이는 불교가 배타적 결속으로 충성도가 높은 종교와 본격적인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내적 요인이다. 이 같은 불교의 성격은 신본주의 도그마의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배타적 공격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던 역사적 사실에서도 잘 나타난다.
계급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다
불교의 출발은 밖으로 당시 종교와 신앙의 불합리하고 미신적인 요소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출발하였다. 안으로는 대단히 심리학적이고 철학적이며 심오한 명상 체계를 실천으로 제시했다. 불교는 교리적으로는 매우 지적이며 이성적인 그리고 합리성을 강조한 종교이다. 이를 불교는 의상응(義相應)과 법상응(法相應)이라는 말로 강조한다. 불교의 강한 이지적 특징은 자연스럽게 지식인 또는 지성인 중심의 종교가 될 수밖에 없었고 지적 바탕이 부족한 일반 민중이 중심에 자리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불교는 스스로 지혜의 종교라고 자처하기까지 한다. 이웃종교 지도자들조차 불교를 심오한 종교이니 철학적인 종교이니 하는 표현으로 평가한다.
불교는 믿음을 말하지만 어디까지나 믿음보다는 지혜가 강조된다. 과거 인도사회는 물론 인류사회에 전반에서 지식사회 구성은 지배적 계급에 의해 이루어졌다. 불교가 아무리 계급을 부정한 종교라 할지라도 문맹률이 높았던 과거 사회에서 불교의 핵심에 다가갈 수 있었던 사람은 교육받은 지식계급 또는 상류계급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불교는 계급을 부정한다지만 가르침의 성격 그 자체로 계급성을 내재하고 있었다. 이는 불교가 매우 전문적인 지식인 중심의 승원불교로 방대한 철학체계를 남긴 전통에서도 증명된다. 이는 인도뿐만이 아니라 불교가 전래된 다른 모든 지역에서 거의 공통된 현상이었다.
신앙은 말 그대로 지혜보다 믿음이 중심이 될 때, 교육받지 못한 계급이나 일반인을 쉽게 그리고 깊게 수용한다. 불교는 이러한 점에서도 인도사회에 확고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한계가 내재해 있었다. 때문에 이에 대한 극복의 움직임으로 믿음을 중심으로 하는 정토(淨土)나 법화(法華) 등과 같은 불교신앙이 후기에 대두되었지만, 끝내 주류불교로 부상하지는 못했다. 한국·중국·일본의 동아시아 불교에 인도불교의 모든 양상이 소개되었지만, 오히려 신앙 중심의 불교가 모두 강한 응집력과 생명력을 보여주며 현재까지 계승된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는 불교의 취약점이다. 이는 힌두교와 이슬람이 믿음을 중심으로 모든 계급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종교적 성격과는 비교된다. 때문에 불교는 경쟁 종교의 탄압과 공격으로 전문지식인 출가자가 해체되거나 붕괴되면, 일반 재가자 중심으로 재기할 가능성이 희박하다. 즉 일반인 사회에 불교가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다면, 언제든지 되살아날 수 있었을 것이다. 지적으로 계몽되기 이전의 고대 인류사회에서 불교의 지적이고 이성적인 성격은 사회적, 문화적 계급을 뛰어넘기 힘들었다.
일반인의 생활의례 정착에 소홀하다
불교는 출발과 함께 재래 의식과 의례 등의 형식성을 강하게 비판하였지만, 일반인을 불교적인 생활의례로 대체시키는 데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이에 비해 조직생활을 하는 출가자의 의식 의례는 발달하였다. 일반인의 탄생과 결혼 그리고 장례와 제사와 관련한 통과의례는 종교를 일반사회에 깊이 뿌리내리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한국사회에서도 현재 유교의 사회적 실체는 사라졌지만 조선시대에 뿌리내린 의식 의례 속에 유교가 아직까지도 일반 민중의 삶 속에 살아 있지 않은가. 불교는 일상 가정의례는 물론 종교적 기원의례를 정착시켜 신도의 의식과 삶을 강제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결국 불교는 민중으로부터 유리될 수밖에 없었으며, 의식 의례를 통해 불교 집단의 응집력과 조직에 대한 충성도 끌어낼 수 없었다.
이에 반해 힌두교나 자이나교는 불교처럼 이슬람의 공격과 파괴행위에 직면했지만, 일반 신자들에게 깊이 뿌리내린 의식 의례를 통해 재기할 수 있었다. 특히 힌두교의 경우 계속적으로 일반인들의 삶을 강제하고 구속하는 법전류들을 정비하여 사회를 힌두화해 불교의 사회적 여지를 박탈했다. 이에 따라 인도사회는 사성계급을 인정하게 되었고 계급제도를 비판하고 부정한 불교는 오히려 인도 땅에서 용납되지 못하고 말았다. 이는 불교와 달리 카스트제도와 타협하여 수용한 자이나교의 생존과 비교된다. 흥미롭게도 최근 암베드까르(B. R. Ambedkar, 1891~1956)로부터 출발한 신불교의 인도불교 부흥운동은 주로 하층계급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즉 불교 정신에 따라 카스트를 부정하는 낮은 계급의 사람들이 이제는 불교를 중심으로 강한 계급적 결속력을 보이며 자이나교와 같은 카스트를 형성해나가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처럼 인도에서 이슬람의 무력과 맞서 불교만이 재기할 수 없었던 내부적 요인의 하나는 의례와 카스트 제도 문제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냉혹한 무아 교리, 세속적 욕망에 반하다
불교가 인도에서 멸망한 이유는 아트만(Atman)을 부정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즉 불교의 중요한 가르침의 하나는 무아설(無我說)이다. 세계의 많은 종교가 그렇듯 인도 종교도 신 관념과 영혼 관념에 기반하고 있다. 특히 영혼 관념으로서 아트만은 대중의 종교적 욕망에 부응하는 기능을 하였다.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인간은 영혼설을 위안으로 삼는다. 하지만 불교는 이러한 영혼설은 허약한 인간의 ‘상상물’에 지나지 않다고 단언한다. 영혼설에 강하게 붙들려 있던 인도 땅에서 무아설은 강력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인도에서 불교가 끝내 용납되지 못한 이유로 간주될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아트만 혹은 영혼과 유사한 자아 개념과 관념을 제공하는 불교 종파[정량부(正量部)와 독자부(犢子部)의 보특가라(補特伽羅, pudgala) 설 등]는 후대까지 교세가 유지되고 발전한 반면, 무아를 견지하거나 강조한 부파나 종파는 차츰 교세를 잃어갔다. 동아시아 불교에서도 무아설을 완화하는 다양한 교리 구축을 보여주고 있다.
불교의 정체성을 상실하다
불교는 원래 바라문교의 비판적 입장에 서 있었다.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정신은 새로운 종교가 존재하는 당위성이었다. 불교는 거침없이 바라문교의 창조주 관념에 대한 부정과 비판, 그러한 신에 대한 제식주의의 반대와 배격, 바라문교의 동물희생제의에 대한 비판, 창조주로부터 기원한다는 인간 차별의 카스트제도 등을 부정하고 비판하는 대항종교로 출발하였다. 불교의 종교적 생명력과 정체성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불교는 대중적 종교 감정에 영합하여 힌두교적 요소를 채용하거나 절충하는 양상으로 나아갔다. 이를 불교의 힌두화 또는 힌두화한 불교라고 이름한다. 특히 힌두교의 신 관념과 함께 신들에 대한 예배의례를 대폭 수용하는 것과 같은 후대 불교는 오히려 불교의 독자성은 물론 생명력과 정체성을 상실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결국 힌두교적 옷으로 치장한 불교는 인도사회에서 일시적으로 민중들로부터 관심을 끌었을 수 있었지만 끝내는 불교의 독자성과 정체성이 실종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드디어는 일반인들의 눈에 불교와 힌두교는 구별할 수 없게 되어, 굳이 불교를 믿고 따라야 할 이유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힌두교의 불교박탈 전략에 무대응
한편, 바라문교를 계승한 힌두교 또한 불교적인 요소를 부단히 흡수했다. 마치 현재 한국 가톨릭이 불교와 한국의 전통 종교적 요소를 채용하는 것처럼. 이는 불교의 독자성을 박탈하는 방향이었으며 불교는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힌두교의 한쪽에서는 불교처럼 불살생과 비폭력을 강조하며, 불교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명상법을 흡수한다. 나아가 불교의 최고 경지인 열반까지도 힌두교적으로 채용하여 말함으로써 불교의 존재 이유를 계속 희석시키고 박탈해간다.
더 나아가 힌두교는 힌두 지식인에 의한 적극적인 불교 비판 캠페인을 전개하는 것은 물론 불교를 왜곡하는 신화집을 작성하여 대중에 유포한다. 예를 들면, 새롭게 제작된 많은 《뿌라나(Purāṇa)》에서는 붓다를 비슈누 신의 화현으로 악신(惡神)들을 속이는 데 목적을 둔 큰 사기꾼이나 대환영(大幻影) 정도로 등장시킨다. 그래서 힌두교를 따르지 않는 사람을 불교도로 만들어 지옥에 가도록 했다는 것이다. 세계 어디에서나 고대인들을 사로잡은 것은 신화의 세계였다. 현재 힌두 인도인들이 붓다는 단지 비슈누 신의 화신으로, 불교는 힌두교의 한 지류나 아류로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결국 불교는 힌두교로 흡수 통합된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출가 중심, 승원에 갇혀 민중과 단절되다
출가승려는 원래 일정한 장소에 머무르는 것보다 끊임없이 여기저기를 다니며 수행하며 포교하는 유행(遊行)의 삶이었다. 1년 12달 가운데 우기 3개월만 일정한 장소에 머무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러던 것이 왕과 부호들의 지원에 따라 승원불교가 정착되면서 출가승려들은 거대한 성채와 같은 사원에 집단거주하는 삶으로 바뀌었다. 현재 남아 있는 날란다 유적에서 알 수 있듯이 견고한 벽돌로 쌓은 성채의 외호는 차츰 일반인과 차단되고, 그들의 삶을 외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성채에 갇혀 불교는 수행, 해탈에 크게 도움되지 않는 번쇄한 철학 활동에 경쟁적으로 몰두한다. 즉 수많은 논쟁가들의 이름이 거론되는 아비달마 불교가 바로 그러한 결과물이다. 이는 불교가 이전에 보여주었던, 중생과 함께 수행하며 각지를 끊임없이 다니며 포교하는 실천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일반인과 유행을 통한 긴밀한 유대관계 상실은 불교가 인도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종교적, 신앙적 활력과 감화력을 끌어내지 못한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이렇게 상류층의 후원에 안주했던 후기불교는 왕조의 지원이 끊기거나 이슬람과 같은 외적의 침입이 발생하자 후원자의 몰락과 괴멸로 인해 거대 사원경제가 마비되고 승원이 파괴되었다. 이슬람의 승원 파괴가 곧바로 불교의 괴멸로 이어진 것이다.
산스끄리뜨화로 대중과 유리되다
일반인과의 단절은 언어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불교경전의 산스끄리뜨화(Sanskritization)는 불교 쇠퇴와 멸망의 한 요인으로 거론된다. 붓다는 자신의 가르침을 지식계급과 지배계급의 언어인 산스끄리뜨어보다는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각 지방의 말로써 전하도록 강조했다. 더 나아가 듣는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법을 설하는 것은 범계(犯戒)의 하나로 제정되었다. 이러한 붓다의 유훈은 처음에는 대체로 잘 지켜져 불교가 여러 지역에 넓고 빠른 속도로 전파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때문에 인도불교사에서 넓은 아대륙의 각 지역 초기불교 부파는 그 지역의 언어로 불교 경전을 유통시켰음이 여러 형태로 증명된다. 그러던 것이 차츰 굽타 시기부터 상류층에서 불교 경전의 산스끄리뜨화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산스끄리뜨화 경향은 진정한 의미에서 붓다의 뜻과는 다른 것이며 한편으로는 불교를 대중한테서 멀어지게 한 큰 요인으로도 간주되었다.
4. 마치는 말
이 외에도 불교 멸망의 많은 내적 요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대중에 유리된 출가 중심의 승원불교는 대중으로부터 버림받고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승원 중심의 불교는 일반대중에 대한 불교의 저변확대 실패를 의미한다. 이는 대승불교 또한 예외가 아니다. 대승불교는 처음 흥기 정신과 달리 자신들이 비판했던 이전의 불교를 빠른 속도로 답습하고 만다.
결국 인도불교는 위기에 처하자 출가교단을 적극적으로 외호(外護)하려는 재가 세력이 없는 채로 방치되어 소멸해 버린 것이다. 이렇게 800년 이상 오랫동안 단절된 인도불교에 다시 부흥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특이한 변화는 고대 인도에서 불교가 상층사회가 중심이었다면 현재는 주로 하층사회의 주도로 불교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또한 출가 중심보다는 재가 중심의 신불교(Neo-Buddhism) 운동도 있다. 그들에 의한 인도불교 미래의 모습은 어떻게 펼쳐질지 자못 궁금하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필요가 있는 것은 과거에 발상지인 인도에서 불교 쇠망의 원인인 된 불교의 결점이나 약점은 현대적 관점으로 보면 오히려 장점이나 강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특히 과학의 발달과 열린 정보사회로의 진행, 자유롭고 민주적인 정치사회 환경은 오히려 불교의 세계관과 인간관 그리고 가치관과 부합하여 큰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이와 함께 현대인은 세계와 인간의 문제에서 사실주의(寫實主義:realism)적인 지향과 높은 지적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 불교가 미래 인류의 대안적 종교로 선택될 가능성이 어떤 종교보다도 클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
조준호
한국외대 인도연구소 연구교수. 동국대 및 인도 델리대 불교학과 석사·박사. BK 21 불교사상연구단, 동국대 불교학술원 전임연구원,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교수 등 역임. 저서로 《우파니샤드 철학과 불교》 《실천불교의 이념과 역사》(공저) 등과 역서로 《인도불교부흥운동의 선구자―제2의 아소카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 주요 논문으로 〈대승의 소승폄하에 대한 반론〉 〈위빠사나 수행의 인식론적 근거〉 등이 있다. 불교평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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