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소카왕(Ashoka, 阿育王, 재위 B.C. 273~232)과 불교>
고대 인도에서 여러 도시국가와 전제왕권국가가 서로 경합을 벌이면서 싸워나가다가 드디어 B.C. 4세기 마가다(Magadha)제국의 마우리야왕조(Maurya dynasty)에 의해서 통일국가를 이루게 된다. 이를 중국의 역사와 견주어볼 때, 군소국가가 쟁탈전을 벌이던 춘추전국시대를 진(秦)나라가 통일한 진시황(秦始皇)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찬드라굽타(Candra Gupta, B.C. 340~298)에 의해 인도 최초의 통일국가인 마가다(Magadha)제국 제3왕조인 마우리아 왕조(B.C. 322~185 존속)가 성립됐다. 마우리야왕조는 불교를 특별히 우대했는데, 그 대표적인 왕이 아소카왕(Ashoka)이었다.
아소카왕(Ashoka, 阿育王, B.C. 273~232경 재위)은 마우리아왕조 개창자인 찬드라굽타의 손자이고, 명실 공히 인도 최초의 통일국가가 이에 의해 이루어졌다.
아소카왕이 이룬 제국은 지금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과 서쪽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 북쪽으로는 캐슈미르와 네팔까지, 그리고 인도 대륙 대부분을 차지한 광대한 통일국가였다. B.C. 265년에 이르러서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국가로 성장했다.
그가 왕위에 오른 지 8년째 되던 해 인도의 남동부인 오리사(Orissa) 주 해안의 칼링가(Kalinga)라는 나라를 정복했다.
이 전투를 하기 위해 보병 60만, 기병 10만, 코끼리부대 9천 마리를 이끌고 쳐들어가 10만이 넘는 인명을 살상했다. 아소카왕은 폐허가 된 칼링가의 수도를 직접 둘러보다가 자신의 야심으로 무수한 인명이 죽고 고아가 된 아이들 모습과 미쳐버린 사람들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칼링가 전투로 아소카왕은 인도 최초 통일왕국을 세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스스로 많은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그 뒤로 다른 나라 침략을 그만두고 비폭력을 진흥하고, 공공사업을 후원하고, 병원과 고아원, 양로원을 세워 전쟁으로 떠돌던 이들을 치료하고 돌보게 했다고 한다. 더불어 역사상 처음으로 동물보호 및 학대금지 법령을 제정했으며, 동물병원을 세우고 인류 최초로 수의사 제도를 만들기도 했다.
참고로, 아소카왕 이후 최초의 근대적 동물보호법을 만든 사람이 공교롭게도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란다. 하여튼, 아소카왕은 유럽 역사학자들로부터도 대단한 관심을 받았으며, 2천 년도 더 된 옛날의 아시아에 이렇게도 훌륭한 업적을 쌓은 군주가 있었다는 게 놀랍다며 감탄했다고 한다.
아소카왕은 전쟁의 비참함을 깊이 느껴 불교를 융성하게 하고, 윤리에 의한 통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아소카왕은 열렬한 호불군주로서 ‘법의 진리’에 의한 통치를 지도이념으로 삼는 등 불교 이상국가를 구현한 ‘법의 대왕’으로 불린다. 즉, 불법에 바탕 둔 통치이념 전파와 불교의 세계종교화 기틀을 마련함으로써 ‘전륜성왕(轉輪聖王, cakravarti-rāja)’으로도 불린다.
그러면서도 불교만을 강요하지 않고 다양한 종교를 관대하게 인정했다. 재미있는 것은 마우리아의 1대 왕이자 자신의 할아버지인 찬드라굽타는 자이나교를 믿었으며, 2대 왕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빈두사라는 브라만교를 믿었다.
아래 글은 유명한 아소카왕 비문 중 하나에 그의 종교정책을 표현해 놓은 글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남의 종교를 공대할지니라.
누구든 이런 식으로 나가면,
그는 자기 자신의 종교도 신장시키고,
남의 종교에도 유익을 끼치는 것.
그 반대로 하면,
그는 자기 종교도 해치고 남의 종교에도 욕을 돌리는 것.
이것이 모두 자기 종교만을 찬양하려는 데서 나오는 일.
누구든 자기 종교를 과대선전하려면,
그는 오히려 자기 종교에 더욱 큰 해만을 가져다줄 뿐,
일치만이 유익한 것.
각자는 남의 종교에 대해 경청하고 거기 참여할지라.」
아소카왕의 호불정책에 의해 불교교세는 인도 전체에 퍼져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런데 당시 외도(外道)들이 의식(衣食)을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가짜 불교도가 돼 불교사회를 혼탁하게 하고 있었으므로 아소카왕은 이를 바로잡아 외도들로부터 불교를 보호하고, 국론통일을 기하기 위해 불교를 국교로 인정하는 한편 제3차 불전결집을 단행했다(BC 3세기).
제3차 불전결집을 위한 집회는 1,000여명의 대표들이 모여 무려 9개월간에 걸쳐 개최됐다. 아소카왕은 그의 종교적 스승인 목갈리풋타 팃사(Moggaliputta-tissa, 목건련제수/目健連帝須) 존자로 하여금 주관케 했고, 목갈리풋타 팃사는 아소카왕의 지지를 받아 불교계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상가를 숙정했다. 이때, ‘분별설(vibhajjavada)’을 기본으로 하고, 자기입장을 분명히 하기 위해 만든 논서 <논사(論事, Kathavatthu)>를 제시하면서 정법을 복원했다.
‘분별설’이란 모든 것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단정(一向記)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진리를 일방적으로 주장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싸움이 일어난다. 현실은 그러한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반드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섞여 있다. 이러한 인식에 입각해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구별(분별)해서 현실을 이해하는 것이 ‘분별설’의 입장이다. 그리하여 목갈리풋타 팃사에 의해 정비된 상좌부를 분별설부(分別說部, Vibhajjavāda)라 했다.
제3차 불전결집은 아소카왕 주도로 수도 파탈리푸트라(Pataliputra, 華氏城, 현재의 비하르주의 주도 파트나)의 계원사(鷄園寺)에서 행해져서 이를 ‘아소카결집’, ‘파탈리푸트라결집’, ‘화씨성결집(華氏城結集)’, 혹은 ‘일천결집(一千結集)’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때 불경어를 빠알리어(Pāli)로 통일하고, 교의는 상좌부 분별설부(分別說部)의 것으로 통일했다. 1, 2차 결집 때는 경(經)과 율(律)을 주로 결집했지만, 이때는 논장(論藏)도 결집해 산만했던 경(經)⋅율(律)⋅논(論) 삼장이 <빠알어 삼장>이라는 최초의 경전으로 조성됐다. 이때도 문자화된 것은 아니고 여전히 구두로 전승됐다. 그리고 이 제3차 불전결집 이전까지를 대개 초기불교(원시불교)라고 한다.
※제1차 불전결집(BC 5세기)---제1차 불전결집은 불멸 직후 마하가섭(摩訶迦葉)의 주도로 이루어진 결집을 말한다. 이때 주로 경장과 율장이 결집됐다.
※제2차 불전결집(BC 4세기)---불멸 후 100여년 경 계율의 해석문제를 놓고 보수파와 진보파 사이의 논쟁과 대립을 계기로 보수파 주도로 이루어진 결집을 말한다. 이때는 주로 율장이 결집됐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보수파인 상좌부와 진보파인 대중부로 분열(근본분열)돼 소위 부파불교가 시작됐다.
그리고 제3차 불전결집은 매우 엄정해서 아소카왕은 외도들뿐만 아니라 상좌부의 분별설부 이론을 반대하고, 공성(空性)을 주장하는 대중부(大衆部) 승려들을 이단으로 규정해 모두 흰옷을 입혀 교단에서 추방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마우리야 왕조의 수도인 파탈리푸트라(Pataliputra)에서 아쇼까라마(Aśo-kārāma) 사원를 중심으로 승단에 분란이 생겨서 7년 동안 포살(布薩)을 행하지 못했다. 이때 왕권의 차원에서 이 분쟁에 개입하는 사건이 발생되는데, 이 분란의 와중에 몇몇 승려들이 죽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아소카왕은 고민 끝에 그 해결책으로서 가장 신망이 있는 승려인 목갈리풋타 팃사(Moggaliputta-tissa) 스님을 모시고 7일 동안 가르침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와 함께 아쇼까라마 사원으로 가서 커튼 뒤에 앉아 승려들에게 질문을 던져 6만 정도의 정통파와 6만 정도의 비정통파들을 구분했다.
그리고 후자에 속하는 설일체유부(Sarvādtivāda) 학설을 따르는 사람들을 변방으로 추방하고, 전자에 속하는 분별설부(Vibhajyavāda) 학설을 따르는 사람들을 정통설로 인정해 이들을 중심으로 불교 포교단을 만들어 주변의 여러 국가들에 전교를 위해 파견했다.
이때 추방된 설일체유부 사람들은 자신들의 근거지를 인도 북서부로 옮겨 마투라, 간다라, 카슈미르 등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됐다. 그리고 이 지방에서 설일체유부를 공격하면서 대승불교가 흥기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에서 아소카왕의 역할을 칭송했지만, 엄밀하게 판단해보면 아소카왕은 이 사건을 통해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기고 말았다. 즉, 왕권이 교단의 분란에 개입할 수 있는 빌미를 만들어 주었고, 그 자신이 승단의 분란에 심각하게 개입하는 첫 번째 사람이 된 것이다. 사실상 불교의 교리적 측면에 대해 무지했던 군주가 교리적 문답을 통해 승려들의 사상을 판단해서 추방했다는 이야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제3차 결집을 끝내고 교단을 정비한 후 아소카왕은 자신의 지배이념인 ‘법(불교)에 의한 정복’을 실현하기 위해 주변국으로 전법사(傳法師, 포교사)를 파견해 불교를 전했다. 스리랑카 역사서 <마하방사(Mahavamsa, 大史)>에 의하면, 간다라, 카슈미르, 랑카(스리랑카), 멀리 이집트, 팔레스타인, 그리스 지방 등 9개국에 전파했다고 한다. 특히 스리랑카에는 아소카왕의 아들 마힌다(Mahinda) 장로를 보내 전파했다. 그것이 오늘날의 남방불교이다.
미국의 유명한 역사학자이자 저술가인 윌 듀란트(Will Durant)는 아소카왕이 불교 선교사들을 인도의 모든 지역과 스리랑카, 시리아, 이집트, 그리스까지 보냈으며, 아마도 이들이 기독교 윤리학(ethics of Christ)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아소카왕은 불교성지를 순례해서 기념물을 만들었다. 원래 붓다가 죽고 나서 8개의 사리탑을 세웠는데, 그 탑들의 사리를 수거해서 다시 전국에 탑을 세우고 해외로 포교하러 나가는 승려들에게 사리를 나누어주었다.
아소카왕의 치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사료에 석주(돌기둥-아소카왕 석주)가 있다. 아소카왕은 여러 곳에 세운 석주(아소카왕 석주) 그 돌기둥의 하단부에는 아소카왕이 자신의 통치이념들, 즉 법칙(法勅)들, 그리고 백성들에게 알리고 싶은 내용이나 붓다에 대한 찬탄 같은 내용들을 기록했다. 법칙들은 여러 가지 내용으로 돼 있다.
인도처럼 역사적인 문헌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나중에 이 석주들이 아소카왕 당시의 정치, 종교, 사회적인 모습들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금석문(金石文)으로서 인도역사를 위한 제1차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석주는 인도대륙뿐만 아니라 멀리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발견됐다. 아소카왕 석주의 비문은 주로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길가에 세워졌으며, 총 181개가 있었지만 현재까지 45개가 발견됐다. 또한 각각의 비문은 백성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산스크리트어가 아닌 각 지방의 고유 토속어로 씌었다. 아소카의 비문은 그가 다스린 영토의 범위뿐만 아니라 내외적인 정치역량까지 엿볼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사료이다.
아소카왕 석주 비문은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이 비문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겨우 170년 전(1837), 영국학자 제임스 프린셉(James Princep)이 비문 해독에 성공함으로부터이다. 비문의 양은 얼마 되지 않지만, 그 중요성은 매우 크다. 이 비문 덕택으로 아소카왕의 통치연대를 알게 됐고, 붓다의 입멸연대도 추정해 낼 수 있었다. 역시 붓다의 탄생지를 비롯한 몇몇 성지(聖地)들의 확인, 붓다가 사용한 언어, 가장 오래된 몇몇 불교경전들의 명칭, 기원전 3세기의 불교교단, 불교의 전도(傳道) 등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됐다.
아소카왕 비문은 불교와 관련된 사실들 뿐 아니라 왕의 인간적인 모습, 그의 통치 이념과 활동, 신앙생활과 종교정책 등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인도 고대의 종교ㆍ사상ㆍ예술ㆍ역사ㆍ사회ㆍ경제ㆍ법률뿐 아니라 언어학ㆍ고고학 등, 인도 고대사의 많은 문제들을 해명하는 데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주었다.
이와 같은 중요성을 가진 비문이 최근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는 비문에 사용된 언어와 문자가 완전히 잊혀져버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대 학자들이 “마가다지방의 언어”라는 의미에서 “Magadhi”라고 이름을 붙여준 언어이고, 그 외에 고대 서북 인도의 카로슈티(Kharoşṭhī) 문자와 페르시아어의 일종인 아람어(Aram) 및 고대 그리스어, 그리고 각 지방의 고유 토속어로 쓰인 것도 있어서 해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대한 업적을 이룬 아소카왕이지만 말년에 그가 총애하던 왕비를 잃고 고독과 번민 속에서 죽었으며, 종교적으로는 아라한(阿羅漢)의 자리에 올랐다고 한다.
아소카왕은 불교에 관심이 깊어 불교 문화권에서는 불교의 수호신 같은 이미지로 전해진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에도 아소카왕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하는데, 아소카왕이 철 57,000근과 금 3만분으로 석가삼존 불상을 만들다가 실패하자 혼자 힘으로는 안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됐다고 한다.
그리하여 당시 신라의 진흥왕은 이 금과 철을 가지고 황룡사의 장육존상(丈六尊像)을 주조했다는 것이다. 이 장육존상은 신라 삼보 중 하나로, 나중에 고려 태조 왕건도 이 장륙존상의 안부를 묻기도 하는 등 매우 중요한 보물 취급을 받았던 것 같으며, 재료의 양에 대한 꽤 세세한 기록이 있기에 큰 불상들을 만든 것은 사실인 것 같지만 고려시대 몽고의 칩입 때 소실됐다.
그런데 그걸 인도에서 보내왔다는 것은 믿기 힘들며, 아소카왕이 살았던 시대와 진흥왕의 시대는 거의 800년 차이가 나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다. 다만 불교적인 정통성을 위한 픽션이라고 추정됨으로 설화 정도로 이해함이 좋을 듯하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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