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관련

홍자성(洪自誠) 《채근담(菜根譚)》 : 선불교적 사유로 펼쳐낸 인생의 지혜 / 안대회

수선님 2024. 7. 14. 13:05
불교로 읽는 고전

1. 들어가는 말

한국인에게 홍자성(洪自誠)의 《채근담(菜根譚)》은 백여 년 이상 꾸준하고 폭넓게 읽히고 있는 고전의 하나이다. 험한 세상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지 마음 깊은 곳에서 웅숭깊게 성찰하도록 만드는 잠언집으로 지금도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고 있다. 이것은 한국의 독서 시장만의 고유한 현상이 아니다. 조금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일본과 중국은 한국보다 더 오래 많은 독자에게 환영받고 있다. 명실상부하게 동양의 잠언집을 대표하는 책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디지털 시대로 전환한 21세기에도 여전히 큰 호응을 받는 책일 것이다.

《채근담》을 말하는 사람은 으레 유교와 불교, 도교의 세 가지 사상과 종교를 아우른 책이라고 평가한다. 삼교(三敎)의 사상을 융합하여 저술한 책이라는 말인데, 틀린 말이 아니다. 다만 나의 소견으로는 《채근담》은 유가의 사유를 중심으로 하고 여기에 선불교와 도교의 사유를 활용하였다. 그중에도 선불교의 사유가 깊이 스며 있다. 이를 입증하듯이 한국과 일본에서는 불교의 시각에서 《채근담》을 번역하고 해설한 책이 적지 않게 나왔다. 그러나 홍자성은 유학을 배운 학자로서 승려가 아니고, 《채근담》은 불교의 교리를 설명한 책이 아니다. 책에 깊이 드리워진 선불교의 그림자는 이 책을 불교 전문서 수준으로 볼 정도는 아니다. 처세와 처신에 적용할 수준의 불교적 사유이다.

이 책이 지어진 명대 말엽에는 강남 지역의 지식인과 상인 사회에서 삼교를 융합하려는 지적 경향이 널리 성행하였고, 홍자성은 그런 지적 흐름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아서 이 책을 지었다. 특유의 사상을 해설하거나 전파하는 책이 아니라 삶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읽힐 잠언집으로 썼다. 당시로서는 교양성에 해당하는 책이다. 필자는 최근에 《채근담》을 새롭게 번역하고 해설한 책을 출간하고, 저자를 밝히고 이 책의 주제와 성격을 분석한 논문 두 편을 썼다. 그 성과에 바탕을 두고 《채근담》에 스며 있는 선불교의 사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2. 홍자성과 《채근담》의 서지사항

《채근담》에는 선불교와 관련한 내용이 풍부하게 실려 있다. 유마힐 거사의 행적도 말하고, 산중의 사찰에서 생활하는 문제도 나오며, 선승의 시와 어록도 여러 편 직접 인용한다. 더 중요하게는 소재 차원을 넘어서 불교가 인생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관점에 닿아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먼저 저자인 홍자성의 인생 경력과도 깊은 관계를 맺는다.

홍자성은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 사람이다. 임진왜란이 초유의 동아시아 국제전쟁으로 한창 벌어지던 시기의 문인이자 학자이다. 본명은 홍응명(洪應明)인데 한국과 일본에서는 본명보다 자성(自誠)이란 자(字)를 더 많이 쓴다. 호는 처음의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뜻을 지닌 환초도인(還初道人)이다. 나는 연구를 통해 그가 안휘성(顔徽省) 휘주(徽州) 흡현(歙縣)의 부유한 염상(鹽商) 가문 출신이고, 그 고장 출신으로 저명한 문인이자 관료인 왕도곤(汪道昆, 1525~1593)의 제자임을 밝혔다. 이는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으나 《채근담》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그는 대략 1550년 어름에 출생하여 청장년 때에는 상인으로서 사업도 하였고, 문인과 학자로서 공부하면서 험난한 역경을 두루 겪은 뒤 늦은 나이에는 저술에 종사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전하는 그의 저술에는 1602년 도사와 고승의 행적 및 어록을 판화와 곁들여 편집한 《선불기종(仙佛奇蹤)》 4권이 있고, 1610년 무렵에는 《채근담》이 있다. 2종의 저서는 휘주 지역에서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먼저 주목할 저술은 《선불기종》이다. 도사와 승려의 기이한 자취라는 제목처럼 역대의 중요한 도사와 선사(禪師)의 생애 및 어록을 간명하게 편찬한 저술이다. 홍자성은 유학에 뿌리를 둔 학자였으나 이렇게 도교와 불교에도 심취하여 책까지 저술하였다. 이 책에 붙인 풍몽정(馮夢禎, 1548~1605)의 서문 〈불인(佛引)〉에서는 “홍자성 씨는 젊어서는 화려함을 사모하였으나 나이 들어서는 선(禪)의 적막함에 깃들어 살았다.”라고 밝혔다. 젊은 시절에는 유자로서 관료로 나가거나 상인으로서 사업을 일구려던 목표 사이에서 큰 뜻을 품고 노력했으나 큰 결실을 거두지 못하자 선불교의 세계에 빠져들었다는 취지의 말이다.

《선불기종》은 홍자성이 도교와 선불교에 대해 전문적 식견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이 책은 《채근담》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 2종의 저술이 치밀한 계획에 따라 저술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선불기종》이 개론서나 이론서라면, 《채근담》은 삶의 현실에 적용한 책으로 보인다. 《선불기종》에는 도사의 어록 〈장생전(長生詮)〉과 선사의 어록 〈무생결(無生訣)〉이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각각 도사와 선사의 핵심적 어록을 요약하고 있다. 그 어록을 찬찬히 검토해 보면 《채근담》의 여러 잠언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 하나의 실례를 살펴본다. 《채근담》에는 무엇에도 속박당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인생의 이상으로 삼고 있는데 다음에 인용하는 후집 33칙은 그중 하나이다.

 

외로운 구름 한 줄기가 산골짜기에서 피어나

가든 머물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휘영청 밝은 달이 창공에 떠서

조용하든 시끄럽든 무엇에도 상관하지 않는다.

孤雲出岫, 去留一無所係; 朗鏡懸空, 靜躁兩不相干.

— 홍자성 저, 안대회 평역 《채근담》 민음사, 2022, 456~457쪽.(이하에서 인용은 이 책에서 인용하고 인용처를 따로 밝히지 않음)

구름과 달의 자유로움을 표현한 잠언으로 이는 자유로운 인생을 비유한다. 세상의 온갖 일과 사물에 속박된 관계 속에 살아가고 있는 인간에게 공간이든 현상이든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구름과 달은 부럽기 한량없는 존재이다.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 존재로서 인간의 의지를 잘 표현한 잠언이다.

그런데 이 잠언은 홍자성의 완전한 창작이 아니다. 남송의 임제종 고승인 사범(師範, 1178~1249) 불감 선사(佛鑑禪師)의 게송을 본떠서 새롭게 만든 잠언이다. 《선불기종》의 〈무생결(無生訣)〉에는 불감 선사의 어록에서 “밝은 거울이 경대에 있으니 어찌 조용함과 시끄러움을 분간할 것이며, 외로운 구름이 산골짜기에서 피어나니 가든 머물든 어찌 얽매이랴?(明鏡當臺, 豈分靜躁; 孤雲出岫, 寧係去留?)”라는 게송을 수록하였다. 홍자성은 이 게송을 앞뒤 순서를 바꾸고 문장을 더 시적이고 세련되게 수정하여 새로운 작품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잠언은 표절이라고 볼 수는 없다.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지는 않으나, 《채근담》의 해당 잠언이 《선불기종》의 〈무생결〉에서 점화(點化)한 사실을 저자가 숨기려는 의도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 사례와 같은 사유와 문장의 일치가 두 종의 저술 사이에 다수가 확인된다.

《채근담》은 주자학과 양명학 등 이학(理學)의 영향이 큰 가운데 선불교의 영향도 짙게 드리우고 있다. 다만 《채근담》이 이해하기 힘든 선종의 이치를 문학으로 쉽게 풀어서 설명하려는 목적을 가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홍자성은 도사도 아니고 선사도 아니다. 명나라 말엽 지식인이 공유한 여러 사상을 자연스럽게 수용하여 그 정수를 처세의 방법으로 적절하게 적용하고 활용하였을 뿐이다.

《채근담》에 드리워진 선불교의 사유는 이 책이 전파되고 독자에게 수용된 양상에도 잘 나타난다. 동아시아 세 나라에서 《채근담》이 전파된 양상은 매우 복잡하다. 세 나라마다 전해지고 읽힌 과정이 독자적이며 흥미롭다. 판본이 매우 많고, 편집자가 텍스트를 자의적으로 바꾸어 저자의 원본을 훼손하고 엉뚱한 텍스트와 섞어서 출간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저자가 출간한 원본과는 크게 다른 텍스트가 세상에 널리 유통되고 있다.

크게 보아 《채근담》 판본에는 두 가지 계통이 있다. 하나는 명나라 만력 연간에 저자가 간행한 초간본(初刊本) 계통으로 주로 일본에서 전해졌고, 하나는 청나라에서 수정하여 재편집된 청간본(淸刊本) 계통으로 주로 중국과 조선에 전해졌다. 초간본은 전해지는 판본이 매우 희귀한데 일본에 전해져 1822년 오사카에서 간행되면서 일본에 《채근담》 독서열을 불러일으켰다. 이 화각본(和刻本)은 19세기 말엽부터 다시 중국과 조선에 전해져 20세기 《채근담》 열풍을 촉진하였다.

청간본은 편차와 항목, 분류, 수록 순서가 초간본과는 매우 크게 다르다. 전체의 절반 남짓만 같은 내용이고 나머지는 전혀 다르므로 동일한 책으로 보기 어렵다고 말할 수준이다. 건륭 33년(1768)에 북경 교외에 있는 담자산(潭柘山) 수운사(岫雲寺) 감원(監院)의 승려 내림(來琳)이 중간한 판본이 가장 오래된 판본이다. 청간본은 사찰에서 간행된 것이 많고 20세기 초반까지도 그런 현상이 이어졌는데, 여기에서 《채근담》이 불교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20세기 이후 일본과 한국에서도 승려와 불자 등이 이 책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선불교의 관점에서 《채근담》을 번역하고 해설하는 책이 많이 출간되었다. 한국에서도 20세기 초에 만해 한용운 선생이 본격적으로 《채근담》을 번역하고 해설한 점에서도 확인되는 사실이다. 한용운의 《채근담》은 청간본을 저본으로 삼은 것인데 현재도 여전히 한용운의 번역과 해설을 다시 해설한 책이 몇 종 판매되고 있다. 《채근담》을 불교적 사유가 스며 있는 책으로 받아들이는 측면이 있다는 증거이다.

3. 《채근담》의 인생론과 선불교

《채근담》은 험한 세상을 견디며 살아가는 처세술과 인생론을 제시하고 있다. 전집(前集) 222칙과 후집(後集) 141칙의 시적인 잠언으로 구성된 책이다. 전집에는 현실 세계에서 남과 부대끼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처신의 문제를 다룬 처세(處世)의 잠언이 주도하고 있다. 후집에는 출세(出世), 곧 은퇴하여 한가롭게 지내는 생활의 잠언이 주도하고 있다. 전집이 세상에 나가서 뭔가를 이루려 애쓰는 청장년 인생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후집은 세상에서 물러나 인생을 관조하는 노년의 인생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를 각기 처세(處世)와 출세(出世)라는 말로 단순화하여 표현할 수 있는데 처세가 유교적이라면 출세는 선불교의 색채가 강하다. 출세는 이른바 출세간(出世間)의 종교로서 불교의 성격에 부합한다.

홍자성은 현실 세계를 험난하고 비정한 생존경쟁의 현장으로 진단하였다. 그런 현세에서 영위하는 삶을 고해(苦海)로 파악한 시선에는 불교적 사유가 보인다. 그러나 그는 고해를 벗어나기 위하여 자연이나 산중의 사찰로 도피하는 선택을 긍정하지 않았다. 고해의 세상에서 도피하는 구차한 선택을 하지 말고 현실에서 강인하게 견디라고 말한다. “비뚤어지고 험악한 인정과 힘겹고 험난한 세상길에서 견딘다는 한마디를 얻어 꽉 붙잡고 지나가야 한다.”(전집 180칙)라며 현실 세계에서 견디며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손쉽게 세간을 벗어나려는 출세에 반대하는 그의 사유는 재가불자의 생활관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한다. 후집 79칙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참다운 공(空)은 비어 있지 않다.

현상에 집착하는 것도 참되지 않고

현상을 부정하는 것도 참되지 않다.

묻노라! 석가세존께서는 어떻다고 말씀하셨던가?

“속세에 있더라도 속세를 벗어나야 하니

욕망을 좇아도 괴롭고

욕망을 끊어도 괴롭다.

잘 들어라! 우리 스스로 잘 수양하여 지켜나가자!”

眞空不空, 執相非眞, 破相亦非眞, 問世尊如何發付?

在世出世, 徇欲是苦, 絶欲亦是苦, 聽吾儕善自修持.

 

이 잠언은 언어 자체가 불교의 개념을 그대로 가져왔다. 어떻게 처세하는 것이 좋은지를 불교의 사유에서 해답을 찾고 있다. 참다운 공(空)은 비어 있지 않듯이, 속세에 있더라도 속세를 벗어나는 삶을 산다고 하였다. 이는 재가불자의 삶과 의식이다. 현상에 집착해도 안 되지만 현상을 부정해서도 안 되듯이, 욕망을 끊어도 안 되고, 욕망을 좇아도 안 된다. 공(空)과 색(色), 성(聖)과 속(俗), 진(眞)과 범(凡)을 하나로 보는 불교의 의식을 보인다. 다시 말하면, 현실 세상에서 살면서 그 세상에 집착하거나 매몰되지 말고 초월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살라는 말이 된다. 처세관의 기본이 선불교에서 온 것임을 잘 알 수 있다.

그동안 《채근담》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벗어나 자연으로 은둔하는 인생을 권유한다고 읽어왔고, 그와 같은 은둔을 지향하는 삶을 동양적이거나 도가적이고, 불교적인 사유의 산물로 이해하였다. 널리 퍼져 있는 이런 관점은 《채근담》의 실상을 오해한 것이다. 오히려 생존경쟁의 고통이 있는 현실에서 도피하는 무책임한 선택을 하지 말고 그 안에서 견디면서 현실에 매몰되지 말고 의식을 갖고 초월하는 삶을 살라고 권유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생업을 꾸리기 위해 도회지에 살 수밖에 없는 당시 강남 지역 도회지 시민, 특히 상인의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도회지 생활이나 적막한 산중생활이란 두 가지 선택지에서 산중생활을 적극적으로 추천하지 않는다. 후집 32칙에서 “자유자재한 사람만은 시끄럽든 적막하든 가리지 않고, 영화롭든 쓸쓸하든 가리지 않는다. 어느 곳에 살든 마음껏 즐길 만한 세상 아님이 없다.[唯自得之士, 無喧寂, 無榮枯, 無往非自適之天.]”라고 말하고 있다. 북적대는 도회지나 쓸쓸한 시골과 산중 가운데 어느 곳을 선택하여 살 것인가를 묻는다면, 본래 살고 있던 터전을 버리고 굳이 산수로 도피하는 것은 생뚱맞은 짓이라는 뜻이다. 산수든 도회지든 모두 좋지마는, 자신에게 묻는다면 도회지에서 살겠다는 뜻을 완곡하게 표현한 잠언으로 읽을 수 있다. 이처럼 도회지 시민의 생활을 긍정한 논리는 여러 잠언에서 보이는데 다음은 후집 111칙이다.

 

욕심을 멈추면 문득 달이 뜨고 바람이 불어오는 풍경이 보이니

굳이 인간 세상을 고해(苦海)로 여길 필요가 없다.

마음이 멀어지면 수레 먼지와 말발굽 흔적이 저절로 사라지리니

굳이 산중을 애타게 그리워할 필요가 없다.

機息時, 便有月到風來, 不必苦海人世; 心遠處, 自無車塵馬迹, 何須痼疾丘山.

 

고해의 세상에서 수레 먼지가 하늘을 뒤덮고 말발굽 흔적으로 더러운 도회지에 살고 있는 시민을 가상하여 쓴 잠언이다. 도회지 사람도 탐욕을 부리지 않으면 조용하고 아름다운 산중과 다름이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고, 부귀영화에 연연해하지 않으면 세상이 곧 산중이므로 일부러 산중으로 도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속세에 살아도 산중에 사는 승려나 도사이고, 도회지에 살아도 부처가 될 수 있다. 전집 46칙에서는 “사람은 누구나 큰 자비심을 가지고 있으니, 유마힐(維摩詰) 거사와 백정, 망나니는 마음이 서로 다르지 않다[人人有個太慈悲, 維摩屠劊, 無二心也.]”라고 말하고 있다. 어디에 살든 무슨 일을 하든 불성과 자비심이 있다면 모두 성인이라 할 수 있다. 반대로 낡은 형식과 사고에 얽매여 도회지를 벗어나 산중에서 산다면, “속세를 끊고 고결하기를 구하는 자는 고결한 사람이 아니라 괴벽한 사람이다.”(전집 167칙)라고 평가하였다. 더욱이 굳이 승려나 도사가 되지 말라고 한다.

여기에서 산중이 아닌 도회지에서 속된 인간들과 어울려 사는 시민의 삶을 긍정하는 태도가 보인다. 이는 당시 지식인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던 만명(晩明) 시대의 산인형(山人型) 지식인들이 속세를 초월하여 산중으로 도피하는 삶을 긍정한 가치관을 비판하는 의미를 지닌다. 당시의 주요한 잠언집과 대비하여 《채근담》에는 현실을 도피하여 은둔하기를 권하는 사유가 약하다. 이렇게 도회지 생활을 영위하는 시민의 생활관을 반영한 《채근담》에서는 제한적이라도 왕성한 상업문화를 꽃피운 휘주 상인의 경영 문화와 지역사회 분위기가 반영되고 있다. 영욕과 득실, 시시비비와 이해관계로 뒤엉킨 현실이 세상의 본모습이고, 그 현실을 적극적으로 헤치고 살아가는 자세를 인생의 본질로 보는 적극적 처세관이 보인다.

여기에는 선불교의 영향이 짙게 드리운다. 그것은 처세(處世)든 출세(出世)든, 도회지이든 산중이든, 아니면 시민이든 승려이든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라는 생각에서 잘 드러난다. 홍자성은 “얽매이느냐 벗어나느냐는 오로지 자기 마음에 달려 있다. 마음속에서 일을 끝냈으면 푸줏간도 술집도 어엿한 정토(淨土)가 된다[纏脫只在自心, 心了則屠肆糟廛, 居然淨土.]”(후집 89칙)라고 하여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은 마음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마음이 속박되지 않으면 도회지의 푸줏간이나 술집에 있어도 절간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고, 반대로 속박돼 있으면 절간도 속세와 다름이 없다. 관건은 마음의 해방이요 자유로움이다. 진정 중요한 것은 무엇에도 속박당하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이다. 승려가 산중의 절간에 수도하고 있어도 마음의 자유를 얻지 못하고 속박당해 있으면, 승려는 승복 입은 속인일 뿐이다. 후집 84칙에서 “마음이 미혹에 깊이 빠져 있으면, 아무리 선을 말하고 게송을 읊더라도, 전부 정신을 희롱하는 겉치레 행동일 뿐이다[心地沈迷, 縱譚禪演偈, 總是播弄精魂.]”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게송만 줄줄 외고, 극도의 고행을 하고 있다고 깨달은 자가 아니다. 도회지 푸줏간의 백정이나 망나니도 깨달은 자가 될 수 있다. 한 걸음 나아가 마음을 어떻게 간직하고 수양할 것인가는 《채근담》에서 중요한 주제이다.

전집 66칙에는 다음 내용이 보인다.

 

마음이 올바르고 밝으면 어두운 방에서도 파란 하늘을 보게 되고

생각이 어리석고 어두우면 환한 대낮에도 도깨비를 보게 된다.

心體光明, 暗室中有靑天; 念頭暗昧, 白日下生厲鬼.

 

마음가짐에 따라 현상을 전혀 다르게 본다. 마음이 밝은 사람은 어두운 방이나 깊숙한 방구석에서도 푸른 하늘을 보고, 마음이 어두운 사람은 환한 대낮에도 도깨비를 보고 놀란다. 모든 것은 마음을 어떻게 수양하느냐에 달려 있다. 한용운은 1918년 10월에 불교 잡지 《유심》 제2호에서 이 잠언을 인용하여 〈마(魔)는 자조물(自造物)이다〉라는 수필을 실었다. 마귀는 실재하지 않고 마음이 스스로 만든 물건임을 밝히는 것이 이 수필의 주제이다. 푸른 하늘을 볼 것인가 마귀를 볼 것인가 선택은 스스로의 마음 수련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하권 109칙에서도 “인생에서 행복의 세계와 재앙의 나라는 모두 마음과 생각에서 만들어진다[人生福境禍區, 皆念想造成.]”라고 말하고 《법화경》 〈보문품〉을 해설한 책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그는 마음 수련의 구체적 방법을 몇 칙의 잠언에서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선 수행의 핵심적인 방법을 끌어오고 있다. 전집 124칙과 전집 173칙을 보면 다음과 같다. 2개 칙 전문을 인용한다.

 

마음이 혼미하고 산만할 때는 정신 차리도록 일깨울 줄 알아야 하고

마음이 긴장하여 속이 탈 때는 가볍게 풀어놓을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혼미하여 몽롱한 증세가 사라진 뒤에 또 뒤숭숭하고 불안한 번민이 찾아올까 두렵다.

念頭昏散處, 要知提醒; 念頭喫緊時, 要知放下. 不然, 恐去昏昏之病, 又來憧憧之擾矣.

아무 일이 없을 때는 마음이 흐리멍덩해지기 쉬우니

그때는 고요한 마음을 깨어 있음으로 일깨워야 옳다.

일이 많을 때는 마음이 밖으로 치달리기 쉬우니

그때는 깨어있는 마음을 고요함으로 달래야 옳다.

無事時, 心易昏冥, 宜寂寂而照以惺惺;

有事時, 心易奔逸, 宜惺惺而主以寂寂.

 

2개 칙 모두 한쪽으로 치우쳐 문제가 되는 마음 상태를 치유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이 누구나 일상에서 경험하는 마음의 상태이다. 무기력하거나 흐리멍덩한 상태와 마음이 들뜨거나 긴장이 심한 상태의 충돌이다. 무기력할 때는 의욕이 샘솟도록 정신을 차려야 하고, 긴장이 너무 심해 속이 탈 때는 마음의 짐을 홀가분하게 덜어내야 한다. 그런 병적인 상태를 치유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 상태가 더 나빠져 문제가 발생한다.

두 가지 마음의 상태를 치유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것은 선불교의 수행법이다. 선 수행에서는 마음이 혼미하고 축 처져서 무기력한 상태인 ‘혼침(昏沈)’은 정신이 또렷하고 맑게 깨어 있도록 하는 ‘성성(惺惺)’의 방법으로 치유한다. 그 반대로 마음이 들떠 흥분돼 있는 상태인 ‘도거(掉擧)’는 어떤 번뇌도 일어나지 않는 고요하고 편안하게 만드는 ‘적적(寂寂)’의 방법으로 치유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선 수행의 중요한 두 요소로서 고요한 가운데 깨어 있고, 깨어 있는 가운데 고요하여 균형을 이룬 상태를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3)은 적적성성(寂寂惺惺) 또는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 하였다. 사실 인간은 무기력하게 흐리멍덩한 혼침(昏沈)의 상태에 빠져 있거나, 그게 아니면 들떠서 소란스러운 도거(掉擧)의 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아무 일이 없어 마음이 흐리멍덩하고 혼미할 때는 또렷하고 맑은 각성으로 일깨워 정신을 퍼뜩 차리게 하여 그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 또 일이 많아 마음이 망상과 번뇌로 시끄러울 때는 집중을 통해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어 그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 그렇게 하여 평온하고 건강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처럼 일상생활에서 균형이 깨진 불안정한 마음을 선 수행으로 다스리는 방법을 간명하게 제시하였다.

여기에서 보듯이 《채근담》은 마음의 문제를 해소하려는 다양한 잠언을 만들되 선 수행의 방법을 활용하였다. 앞서 말한 영가현각의 수행법을 《선불기종》의 〈무생결〉에 자세하게 인용하여 소개한 것을 보면, 선불교의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여러 잠언을 썼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선어록과 문장이 일치하거나 현학적이지 않다. 잠언의 문학성과 간명한 표현으로 재탄생하였다. 일반 독자를 위하여 선불교의 깊고 난해하며, 선어록의 독특한 개념을 쉽게 풀어썼다.

 

4. 나가는 말

《채근담》은 인생관과 처세관에서부터 잠언의 여러 구체적인 내용에 이르기까지 선불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 점으로 인해 동아시아 세 나라에서 일반 독자뿐만 아니라 불교에 호의를 가진 독자들에게 더욱 큰 사랑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만해 한용운이 번역하고 해설함으로써 불교도에게 이 잠언집은 더욱 친근하게 읽혔다. 사실 한용운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도 그의 《정선강의채근담(精選講義菜根譚)》은 중요한 의의가 있다. 한용운이 스스로 밝힌 것처럼 이 책은 20세기 한국 독자에게 본격적으로 《채근담》을 소개한 첫 번째 책이다. 1917년에 초판이 나온 뒤 4년 뒤인 1921년에 출판사를 바꿔 재판이 출간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유일하게 나온 번역서이자 선집이었고, 해설서였다. 독자의 반응이 상당히 좋았던 책으로 1936년에는 월간지 《삼천리》에서 내용 일부를 재수록하기도 하였다.

당대의 고승인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 선사가 서문을 쓴 것도 이 책과 불교의 관련성을 보여준다. 자서에서는 조선 정신계의 수양을 위한 방법을 제시하려고 이 책을 번역한 취지를 밝히면서 이런저런 욕망에 빠져 사는 사람이나 그 반대로 세상을 버리고 방랑하거나 정신을 잃고 방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을 깨우쳐 어떤 처지에서든 자유롭게 사는 삶의 가치를 돌아보기를 희망하였다. 《채근담》이 지닌 잠언집의 성격을 표현한 이 말에서도 불교의 수양론이 잠재되어 있다. 삶의 보편적 주제를 다루면서 선불교의 깊이와 혜안을 시적인 언어로 가꾸어 제시한 것이 위기 속에서도 행복한 삶을 회복하고자 하는 현대인에게도 널리 읽히는 배경이라 하겠다. ■

 

안대회 ahnhoi@naver.com

연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문과대 학장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 《벽광나치오》 《선비답게 산다는 것》 《조선의 명문장가들》 《조선을 사로잡은 꾼들》 《천년 벗과의 대화》 《정조의 비밀편지》 《내 생애 첫 번째 시》 《18세기 한국한시사 연구》 《궁극의 시학》 《담바고 문화사》 등 다수가 있고, 옮긴 책으로 《채근담》 《해동화식전》 《소화시평》 《추재기이》 《북학의》 등 다수가 있다.

 

 

 

 

 

 

 

홍자성(洪自誠) 《채근담(菜根譚)》 : 선불교적 사유로 펼쳐낸 인생의 지혜 / 안대회 - 불교평론

1. 들어가는 말한국인에게 홍자성(洪自誠)의 《채근담(菜根譚)》은 백여 년 이상 꾸준하고 폭넓게 읽히고 있는 고전의 하나이다. 험한 세상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지 마음 깊은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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