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와 서양철학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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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은 그가 죽기 3년 전인 1935년 5월 7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강연했다. 제목은 〈유럽 인간성의 위기와 철학〉이다. 이 강연에서 인간의 영혼을 사물처럼 취급하는 유럽 학문의 위기를 고발하고 철학적으로 구원하는 길을 제시했다. 그는 아우슈비츠를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유대인으로서 많은 핍박을 받았다. 그는 인간의 생명을 사물처럼 취급하는 나치의 폭력에 철학으로 대응했다. 물론 그의 책 어디에서도 나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그의 책 행간에는 철학자의 저항이 농밀하게 함축되어 있다. 그는 영혼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타인 사랑을 통해 유럽을 상호인격적 공동체로 회복하기를 소망했다.
필자는 2017년 2월 후설의 고향 프로스테요프를 방문한 적이 있다. 프라하에서 느린 기차로 두어 시간 정도 걸린다. 자그마한 시골 도시다. 나치 점령지였던 곳이다. 이곳 시청 벽에 후설의 얼굴이 크게 부조(浮彫)되어 있다. 나치에 합병되면서 이곳의 유대인 1,825명 중 1,390명이 학살당했다. 1938년 후설이 죽자, 나치에 의해 사라질 뻔한 후설의 속기 원고 4만 5천 장과 타이프 원고 1만 장을 당시 벨기에 루벵대학의 철학도였던 반 브레다 신부가 유족과 벨기에 당국을 설득해 루벵대학으로 옮겼다. 이것이 오늘날의 후설문서보관소(Husserl-Archive)이다. 1950년부터 후설 전집(Husserliana)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2012년까지 42권이 발간되었고, 발간 작업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필자가 후설의 현상학을 불교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방법론’으로서의 현상학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현상학은 또 하나의 형이상학적 이즘(ism)이 아니라, ‘진리’라는 사태를 드러내기 위한 방편론이다. 현상학적 방법은 ‘사태 자체를 있는 그대로 여실(如實)하게 폭로하는 것’이다. ‘사태 자체로!’라는 화두는 인간의 온갖 망념에 의해 은폐된 사태 자체로 되돌아가는 실천적 수행이다. 지금까지의 철학은 인간의 추상적 개념에 의해 짜 맞추어진 선입견으로, 사태 자체를 마치 피자 반죽하듯 마사지해 왔다. 사태는 인간의 개념 이전에 주어진 사건이다. 후설은 이 사건을 은폐한 모든 선입견을 내려놓고, 사태 자체에서 들려오는 진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주문한다. 필자가 그의 현상학을 불교적 수행론으로 읽는 이유이다.
1. ‘나’는 무엇인가?
누군가가 당신에게 당신의 실체가 무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당신의 이름을 말할 건가? 키가 얼마인지 혹은 직업이 무엇인지를 말할 건가? 무엇을 말하든 그게 과연 당신의 실체가 맞는가? ‘실체’란 어휘는 고대 그리스 때부터 사용된 용어이다. 근대철학자 데카르트는 실체를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서 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스피노자 역시 실체를 ‘자기 원인’, 즉 다른 것의 결과가 아닌 원인 그 자체로 정의한다. 이 정의는 다른 모든 것이 변해도 변하지 않은 채, 그 ‘기저에 놓여 있는 그 무엇(sub-stance)’을 말한다.
고대 그리스의 실체론적 사유에 익숙했던 메난드로스 1세(밀린다왕)는 인도 수도승 나가세나의 무자성(無自性)의 경지를 이해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자아든 대상이든 스스로 독립된 정체성을 갖는다는 생각은 인연의 고리를 떠난다. 실체성에 대한 집착은 서양 근대철학에 와 절정에 이른다. 그도 그럴 것이 중세 오랜 기간 인간은 신의 피조물로서 그 정체성을 도난당했다. 도난당한 정체성을 새롭게 구축하려는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화두로 ‘나’의 정체성을 ‘생각하는 실체(res cogitans)’로 규정한다. ‘사물’은 일정한 장소를 차지하고 있는 실체(res extensa)이다. 나와 사물을 독립된 두 개의 실체로 정의한다. 나는 사물과, 사물은 나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를 중심으로 한 근대 대륙 합리론은 자아를 실체로 본다. 실체 개념을 약간은 다르게 정의하면서도 자아를 실체로 규정하는 것은 다르지 않다. 반면 영국 경험론자들, 특히 데이비드 흄(D. Hume, 1711~1776)은 자아를 ‘실체’는커녕 ‘ㅅ’도 아니라고 한다. 그는 나의 마음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여러 가지의 경험의 다발에 ‘나’란 이름을 붙였을 뿐이라고 정의한다. ‘실체’는 경험될 수 없다. 이처럼 데카르트의 입장은 자아에 대한 상견론(常見論)이고, 흄은 단견론(斷見論)이다. 자아는 고정된 실체라고 하기에는 지속적 흐름이고, 마냥 흘러가는 것이라 하기에는 흐르지 않는 그 무언가라야 한다. 자아는 있다고 하기에는 없고, 없다고 하기에는 있다. 불교는 이 있고 없음을 다 포괄한 자아의 실상을 ‘묘공(妙空)’이란 메타포로 은유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논리학에 익숙했던 당시 고대 철학자들에게는 있고 없음이 공존하는 것은 모순이었다. 이러한 고대철학의 형식논리적 실체론을 유산으로 받은 근대는 근대철학의 최종주자인 헤겔에 이르러 변증법이라는 새로운 방법으로 극복하려고 했지만, 자아를 더욱더 절대화시키는 데 만족했다. 자아에 부여한 자성(自性)을 걷어내지 못하고, 연기의 실상을 깨닫지 못한다.
필자는 서양 근대철학의 실체론적 사고를 불교적 관점에서 극복하려 한 대표적인 철학자를 에드문트 후설로 이해한다. 물론 현상학의 창시자인 그가 불경을 읽었는지를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1920년대 그가 불경 번역서에 감탄하면서(admiringly) 관심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preisgeben) 모든 것을 얻는다(gewinnen).”는 불교적 함의가 담긴 언급이 단 한 번 있다.
독일에 불경을 소개한 것은 “칼 오이겐 노이만(Karl Eugen Neu-mann, 1865~1915)의 역할이 매우 컸는데, 다르마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 그의 불교 연구는 산스끄리뜨어, 빨리어 등의 원어를 습득하기에 이르렀고, 이어서 원전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빨리 경전을 독일어로 번역해 냈는데, 그러한 업적은 불교가 널리 퍼지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한 셈이 되었다.”
2. 지향성과 연기
의식의 지향성(Intentionalität)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의식은 무엇에 ‘관한(von)’ 의식이다. 대상의 의미는 의식에 상관적이다. 지향성은 의식[識]과 대상[境]의 상관성을 일컫는 개념이다. 마치 의식과 대상이 독립된 두 개의 실체로 존재하고, 대상이 의식의 상자 속으로 실재적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실체론적 사고의 전형이다. 하지만 실재하든 않든 의식은 항상 대상에 ‘관한’ 의식이다. 통도사의 은행나무 앞에서 지리산의 은행나무를 기억해도, 여전히 의식과 대상의 관계성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지각과 기억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동시에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앞의 은행나무도 상상해 본다. 통도사의 은행나무는 지각된 대상이고, 파르테논 신전의 은행나무는 상상된 대상이다. 이 점이 다를 뿐 의식은 항상 대상으로 지향되어 있다. 모든 존재가 지향적 고리로 얽혀 있음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지향성은 연기의 실상을 드러내는 위한 개념적 도구이다. 물론 포스트 후설인 메를로 퐁티(Merleau Ponty, 1908~1961)나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가 후설은 여전히 의식에 주도권을 주고 있다고 비판한다. ‘의식의 대상 구성’이라는 인식론적 채널을 포기하지 않는 한, 즉 존재론적 채널로 바꾸지 않는 한, 의식과 대상 사이의 근본적인 얽힘[交織, 키아즘]을 읽을 수 없다는 게 프랑스 현상학자 메를로 퐁티의 생각이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 역시 인간은 이미 ‘세계 내 존재(In-der-welt-sein)’로 세계와 분리될 수 없는 세속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후설의 지향성 넓이와 폭을 더 확장해가면 없어질 수 있는 오해이다. 의식과 대상은 마치 한 켤레의 신발처럼 상호의존적이다. 의식 없이 대상을 그리고 대상 없이 의식을 생각할 수 없다. 의식은 대상에 관한 의식이고, 동시에 의식은 대상에 의해 비로소 의식적으로 되는 ‘공동 창발(co-emergency)’이다.
의식의 작용[見分, noesis]이 조건[因]이 되어 그것의 결과[緣]로 사유된 대상[相分, noema]이 구성된다. 반대로 대상이 의식을 촉발하는 것이 조건이 되어, 그 결과로 의식의 작용이 일어난다. 좋다고 생각하는 의식이 연[能緣]이 되어 ‘좋은 어떤 것’이 그 결과[所然]로 구성된다. 싫다고 생각하는 의식이 조건이 되어 ‘싫어하는 어떤 것’이 그 결과로 구성된다. 의식은 그 무엇을 지향하더라도 항상 그 상관자인 대상과 상관관계를 갖는다. 이러한 후설의 입장을 ‘상관관계주의(Korrelativismus)’라 할 수 있다. 이 연기의 실상을 잘못 읽은 근대적 실체론을 후설은 지향성 개념에 호소해서 비판한다.
3. 본능 지향
통도사 반야암의 은행나무 자체가 아름다운 건 아니다. 나무는 의미를 지향하는 의식이 없다. 나의 의식이 아름답다고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아름다운 나무’로 의미가 부여된다. 후설은 이것을 ‘혼을 불어넣는다’라고도 한다. 그것을 넘어 그 아름다움에 집착한다면 그 나무는 ‘집착된 대상’으로 구성된다. 지향성은 물체를 나의 대상으로 구성하려는 본능적인 경향성이다. 존재 자체를 대상화하려는 주범은 바로 나의 의식이다. 그러므로 지향(志向, Intention)은 단순한 지향(指向, Orientierung), 즉 방향을 취함이 아니다. 대상에 대해 특정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지향은 대상의 의미를 구성하려는 의도가 담긴 의식의 합목적적 태도이다. 이 특정한 입장을 내려놓지 않는 한, 대상은 나에 의해 의도적으로 구성된 대상이 된다.
지향적 구성은 대상을 의식에 재현하는 작용이다. 의식이 대상을 지향적으로 현전화(現前化)하는 작용이다. ‘지향적으로 현전화한다’는 것은 나의 의도대로 대상을 의식에 떠올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전화는 자기 방식대로 재현하는 것이고, 다른 말로는 표상(表象, Vor-stellung, representation)이다. 표상은 말 그대로 의식 앞에(vor) 대상을 자기 방식대로 몰아세우는(stellen) 것이다.
후설이 지향성을 자신의 중요한 방법으로 인용하는 것은 모든 고의 원인인 표상지가 발생하는 의식의 작용을 분석하기 위한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에로 향해 있다. 본능적이다. 지향은 충동이고 본능이다. 자신의 의도 대로 표상지를 구성하여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 의식의 본성이다. 의식이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부여된 의미에 집착하는 것은 지향적으로 그릇되게 표상되기 때문이다. 그릇되게 표상하는 이유는 지향성은 본능적으로 좋은 것을 취하고 싫은 것을 피하는 의식의 특성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는 생물학적-존재론적 코나투스(conatus)가 지향의 원인이다. 의식의 그릇된 지향으로 일어나는 모든 정서 중 뿌리가 되는 것이 욕망, 기쁨 그리고 슬픔이다. 이것은 의식이 본능적으로 좋은 것과 싫은 것을 분별하는 그릇된 표상[분별지]에 의해 일어나는 고의 실체들이다.
코나투스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는 아집이다. 이 코나투스는 모든 정서의 뿌리가 된다. 마음을 흔드는 뿌리가 바로 이 코나투스이다. 후설 역시 의식의 지향을 촉발하는 수동적인 본능 지향성을 언급한다.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는 충동-지향성이 모든 지향성의 하부 토대이다. 충동-자아는 지속적으로 목적을 이루려고 활동한다. 모든 작용의 삶에 전체적으로 작용하는 원초적 촉발이 충동이라는 본능이다. 삶은 본능이 지속하는 한 자기보존을 지향한다. 자기보존의 목적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본능 지향성이 바로 코나투스이다. 지속적으로 자아의 동일성을 유지하려는 욕망은 아집이다. ‘아(我)’의 동일성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본능 지향성이 모든 자아의 활동을 토대 지운다.
후설은 가치판단의 토대를 정서를 넘어 본능으로 천착해 들어간다. 그는 스피노자의 정서나 흄의 감정보다 더 근원적인 본능에서 윤리학의 발생적 기원을 찾는다. 무엇을 추구하는 활동인 이상, 본능 역시 지향적이다. 성적 본능이나 호기심과 같은 본능은 그것을 충족시켜주는 대상을 지향한다. 지향은 충족을 목적으로 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가치 경험이나 판단은 발생적인 토대를 본능에 두고 있다. 가장 수동적 지향성이지만 본능적 지향성에 대한 분석이 없이 능동적인 가치판단의 토대를 알 수 없다. 우리가 아무리 능동적인 가치판단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인간의 본능적 지향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능동적인 가치판단을 의무로 규정한 칸트(I. kant, 1724~1804)의 윤리학은 충동 지향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일지도 모른다. 본능 지향은 어느 지향보다 더 충동적 지향이다. 가장 수동적 지향인 충동 지향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 과연 있을까? 정서의 본성을 알지 못하고 정서를 억누를 방도가 없다. 스피노자가 정서의 본질에 대해 집요하게 분석한 이유는 그걸 통해 정서를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알기 위해서이다.
후설 역시 의식의 지향성이라는 정적(靜的) 개념만으로는 지향성의 본성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후기로 올수록 의식의 지향을 촉발하는 가장 수동적인 지향인 본능적 지향성에 대한 발생적(發生的) 분석으로 옮겨간다. 가장 근원적인 지향성에 대한 분석이 없이 근원적 지향을 내려놓을 방법을 알 수 없다. 좋고 나쁨의 가치판단의 토대가 본능이다. 본능적으로 욕구하는 것이 좋음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나쁨이라는 것이다. 본능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지향해서 좋은 것이지, 좋은 것이 있어서 그것에 본능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니다. 욕구해서 선한 것이지 선한 것이 있어 욕구하는 것은 아니다. 능동적 지향에 앞서 가장 수동적인 단계에서 인간을 촉발하는 본능적 지향의 고리를 차단하지 않으면 그 지향이 충족되고 만족감을 얻을 때까지 지향은 지속한다. 하지만 지향한 것이 다 충족되지 않을 때는 고가 생긴다. 구불득고(求不得苦)이다.
4. 후설 자아론의 불교적 함의
‘나’라는 상(相)이 존재한다고 착각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 고의 원인이다. 무엇을 성취하려는 본능적 지향은 바로 아상(我相)에 집착해서 일어나는 자아의 분열이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상이 존재한다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망념이다. 모든 것을 객관화하려는 충동(Trieb zur Objektivität)인 지향성은 자아의 실재성[我相]을 구성하려는 욕망이다. 아상에 집착해서 일어나는 모든 지향은 종국적으로 충족을 성취하려는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고는 어디에서 오는가? 고를 느끼는 의식이 구성한 것이다. 의식이 아상에 집착해 쾌와 고를 분별하여 ‘고’라는 대상을 구성한 것이다. 구성하는 자아는 동일성을 가지고 자신을 위한 무엇으로 대상화하려고 한다. 자아와 세계를 대상화하여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데서 고는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 이상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고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도 인간은 어리석게도 아(我, 의식)와 비아(非我, 대상)의 실재성[相]에 집착하여 온갖 고를 구성해낸다.
대상의 의미를 구성하는 지향적 자아 이전에 가장 깊은 곳에 근원 자아가 존재한다. ‘자아’로 체험되기 이전의 근원-체험으로서의 ‘그것’은 수동적 흐름 그 자체이다. ‘자아’로 반성되기 이전에 이 반성을 하도록 동기 부여하는 선(先)반성적 자아이다. ‘자아’란 이름으로 대상화되기 이전의 선(先)대상적 자아가 절대적 자아이다. 현상학은 근원-사태(Ur-sache)에 대한 반성이다. 세속적 언설로 관념화되기 이전에 이미 주어져 있는 근원-사태를 있는 그대로 기술하려는 태도가 현상학적 태도이다. 현상학(Phänomenologie)은 ‘현상(Phänomen)’과 ‘학(Logos)’의 합성어이다. ‘현상’은 ‘그 자체가 스스로 드러나는 것’ 즉 ‘어떤 것이 그것이 있는 그대로 숨김없이 백일하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학’으로 해석되는 ‘logos’는 ‘말’ 혹은 ‘진리’ 등으로 사용된다. 로고스는 그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상학은 사태가 주어지는 그대로를 하나도 숨김없이 사실대로 말하는 방법 혹은 태도이다. 현상학은 세속적 언설로 인해 은폐된 근원-사태를 직관하고, 있는 그대로 서술한다. ‘자아’에 관한 통상적 이해에 의해 왜곡되기 이전의 근원-사태를 해명한다.
후설은 흐름으로서의 ‘그것’을 마치 상주불변하는 ‘자아’로 착각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참된 자아를 현상학적으로 해명하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 현상학적으로 회복해야 할 마음은 어떤 것인가? 마음의 본질을 직관하기 위해 내려놓아야 할 편견은 자아를 영원불변하는 실재(實在)로 잘못 판단하는 것이다. 의식을 지속적으로 존재하도록 토대를 쌓아온 의식의 경험들을 마치 상주하는 자아로 착각하는 일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는 ‘나’라고 말하기 이전부터 언제나 항상 그리고 이미 나로서 기능해왔다. 다만 그것에 대해 주목하는 한에서 주체적으로 드러날 뿐 주목하지 않을 땐 그저 주어져 있는 단순한 ‘나’로 존재한다. ‘나’란 이름으로 거명되기 이전부터 흘러온 체험이 바로 나이다. “자아는 자아라고 불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어떤 것으로 불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이미 대상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자아는 말로 나타낼 수 없는 이름 없는 것이고, 정지해 있는 것도 아니고, 떠 있는 것도 아니며, 모든 것의 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체험되기 이전의 체험 그 자체가 바로 나이다. 하지만 이 나를 실재하는 자아로 의식하는 자아가 7식인 마나스식이다. 마나스식으로 대상화되기 이전의 흐름으로서 근원 자아는 아뢰야식이라 할 수 있다. 아뢰야식은 ‘자아’란 이름으로 불리기 전의 잠재적 자아로 비유할 수 있다. 자아로 주제화되기 이전의 선(先) 자아로 기능하는 자아가 아뢰야식이다. 후설은 이 아뢰야식을 상주불변하는 자아로 실체화하는 마나스식에 의해 제6식으로 그리고 전오식으로 생멸하는 과정을 현상학적으로 해명한다. 선(先)지향적 흐름으로서의 아뢰야식을, 마치 노끈을 뱀으로 착각하듯이, ‘자아’로 실체화하는 어리석음을 분석한다. 그의 자아론은 진심을 회복하기 위한 수행론적 성격을 띤다.
절대 흐름이 마치 시간적 대상처럼 여겨지는 것은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의 한계 때문이다. 절대 흐름을 시간화하여 ‘흐르는’ ‘정지해 있는’ ‘현재 있는‘ 등으로 시간적 대상처럼 언급하는 것은 더 적절한 언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절대 흐름은 시간 속에 있는 것도, 시간 속에 연장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자아는 대상이 아니라 근원상(Urstand)이다. 그것은 대상적 자아가 아니다. 대상적으로 이름을 붙일 수 없다. 그것은 대상적 이름을 갖기 이전의 ‘그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을 시간적으로 구성된 그 무엇으로 대상화하려는 본능적 지향성에 의해 해명하려고 할 경우, ‘지향적 대상’ ‘시간화된 흐름’ ‘내적 시간의식’ 등으로 불릴 뿐이다. 그것은 시간을 초월해 있으면서도, 시간화(時化, Zeitigung)의 대상으로 구성될 경우 시간적 대상으로 주제화될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모든 생멸과 유(有)를 떠나 있으면서도 동시에 생멸의 흐름 속에 동일한 자아로 남아 있고, 생멸의 흐름을 떠나 그 생멸의 체(體)로 남아 있으면서도 동시에 생멸의 흐름에 따라 흘러가는” ‘그것’이다.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통상적 시간으로 표현할 수 없어 ‘생생한 현전(lebendige Gegenwart)’이라고 이름 붙인다. 절대 자아는 모든 의식의 활동과 의식 대상의 관계 이전에 주어져 있는 절대 사실로서 이것을 반성의 대상으로 파악하는가 아니면 반성 이전의 양상으로 파악하는가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띨 뿐이다. 그것은 반성하는 자아에 의해 증시될 수 있을 뿐, 스스로 객관화될 수 없다. 그 어떤 시간적 양상도 갖지 않는 선시간적 흐름이다. 모든 시간 형식의 선구조로 존재할 뿐이다. 이것은 여래장이 제7식에 의해 전변되어 생멸상으로 다양하게 이름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모든 대상적 관계를 환원한 이후에 잔여로 남는 선험적 자아와 이 선험적 자아가 대상적으로 주제화되어 나타난 경험적 자아는 반성 이전/이후의 그것이 다르지만 동일한 모습이다. 그러므로 자기의식으로 반성되기 이전의 의식과 현상학 의식 자체가 구별되는 어떤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오히려 “전반성적 자기의식은 현상적 의식의 구성적 특질이고 필요불가결한 부분”이다.
‘그것’이라고만 부를 수 있는 절대 흐름은 모든 상대적 언술을 떠나 있다는 의미에서의 절대이다. 그것은 반성 이전에 지속적으로 기능해 온 그것이다. 그것을 반성하는 것 역시 그것이며 그렇게 반성된 것 역시 그것이다. 동일한 자아의 두 얼굴이다. 반성 이전/이후라는 시간적 양상으로 분화된 동일한 것의 다른 얼굴이다. 후설은 이런 자아의 특성을 초시간성과 전(全)시간성으로 표현한다. 자아는 시간적 흐름을 초월하면서도 동시에 흐름 속에서 함께 시간화되면서 항상성을 가진다.
‘그것’이 시간적 대상으로 반성되는 것은 ‘그것’을 오랜 기간 흐르면서 마치 불변적 성격을 가진 것처럼 대상화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자아’란 이름으로 구성하는 것은 자아를 습득성(Habitualität)의 기체로 상상하기 때문이다. 시간적 흐름 속에서 마치 동일성을 유지하는 자아처럼 상상하는 것은 습득되어 온 불변적 성격 때문이다.
그러므로 흐름으로서의 ‘그것’과 이 흐름 속에서 구성된 흐름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최종적으로 기능하는 근원적 흐름인 ‘그것’은 스스로는 비시간적이고(unzeitlich) 시간적 지속(Dauer)을 갖지는 않지만, 모든 시간적 흐름 양상을 가능하게 하는 선-시간(Vor-Zeit) 혹은 선-존재(Vor-Sein)이다. 이 흐름은 자아의 습기에 의해 훈습되어 전변될 수 있는 씨앗을 자신 속에 감추고 있는 익명적인 여래장(如來藏)이다.
의식의 주의력에 의해 자아극(Ichpol)이 형성되고 이 극에 상응하는 대상극(Gegenstandspol)이 구성될 뿐인데 이것을 고정된 실체[我]로 생각할 때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의 분열이 일어난다. “자아는 완전히 공허한 익명성 속에 살고 있고, 자아는 단지 사태(Sache)만을 가질 뿐 아무 주관적인 것을 갖지 않고…… 자아는 반성을 통해서 비로소 주관적인 것으로서의 자아, 즉 자기의식을 얻는다.”
5. 내려놓기
내려놓기는 판단중지(에포케(Epoche))다. 판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판단을 잠시 유보하는 것이며, 괄호로 묶어 두는 것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모든 것을 얻는다’는 후설의 언급은 철저한 태도의 변경을 요구한다. 어중간한 태도 ‘변화’가 아니라, 철저한(radikal) 태도 ‘변경’이다. 전(全)인격적인 총체적(total) 변경이다. 마치 직류에서 교류로 변경하는 듯한 총체적 변경이다. 개종(改宗)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우선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온 것부터 내려놓아야 한다.
첫 번째로 내려놓아야 할 것은 세계가 나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나는 생각하는 실체이고, 세계는 생각할 수 없는 공간적 실체라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하다. 근대과학에 의해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이 근대과학의 편견을 내려놓지 않으면 안 된다. 근대과학은 세계를 망원경으로 관찰되어야 할 물체 이상으로 보지 않는다. 하지만 스스로 의식을 가지지는 않지만, 의식의 지향을 촉발하는 대상이 바로 세계이다. 지향은 관심이고 충동이다. 세계가 의식을 자극하는 한에서, 의식은 지속적으로 세계를 자신의 대상으로 구성하려는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마음이 구성한 것이다. 의식을 떠나 스스로 존재하는 대상은 없다. 모든 것은 식(識)의 전변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고통도 쾌락도 의식의 지향적 구성물이다. 고통도 쾌락도 그 자체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의식이 자기 욕망에 따라 지어 놓은 것이다. 모든 것은 가치중립적이다. 그런데 의식은 마치 가치가 실재하는 것처럼 착각한다.
두 번째 내려놓아야 할 것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욕망을 벗어던질 수 있다는 생각이다. 마음은 몸과는 별개여서 몸에서 생겨나는 욕망을 마음은 멀리할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인간은 마냥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마음 이전의 신체이다. 모든 정신의 관념은 신체의 변용이다. 태양이 매우 멀리 있지만, 신체가 가까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과 흡사하다. 정신과 신체 사이에는 상호작용이 없다. “신체는 정신을, 정신도 신체를 다른 어떤 것으로 결정할 수 없다.”
마치 정신이 신체를 마음만 먹으면 압도할 수 있다는 것이 모든 오류의 원인이다. 행동을 결정하는 원인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그런 착각을 한다. 인과의 사슬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세계의 본질에 대해 아무런 타당한 관념이 없기 때문에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진정한 자유는 연기(緣起)를 깨닫는 데서 가능하다. 모든 것이 필연에 의한 것임을 인식할 때 자유롭다. 자유와 필연은 동전의 앞 뒷면과 같다. 기름과 물처럼 섞이지 않는 게 아니다. 필연을 인식할 때 오히려 자유롭다.
물론 이 두 가지의 선입견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렵다. 오랫동안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선입견을 내려놓지 않고서 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욕망 내려놓기는 쉬운 것이 아니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없는가? 대상으로 향한 마음의 지향을 끊을 수밖에 없다. 지향은 단순한 지향(指向)이 아니다. 목적을 가지고 대상을 탈취하려는 지향(志向)이다. 뜻 ‘지(志)’ 자는 의도와 목적을 함의한다. 그 지향적 음모를 내려놓아야 한다.
대상의 본질을 직관[觀]하기 위해 내려놓는[止] 것은 결국 대상의 본질을 구성하려는 의식의 지향 때문임을 깨닫기 위한 절차이다. 의식이 충족(Erfüllung)을 지향하는 한, 마음의 고(苦)에서 해방될 수는 없다. 대상을 나를 위한 의미로 구성하려고 욕망하는 주체의 지향이다. 하지만 존재는 나를 위한 의미로 구성되기를 거부한다. 지향하면 할수록, 그것이 원인이 되어 대상은 나의 욕망을 더 부추긴다. 따라서 지향 자체를 내려놓아야 한다. 내려놓기는 하이데거의 게라센하이트(Gelassenheit)로 이어진다. 지향이 있는 한, 지향된 대상으로 분열된다. ‘Gelassenheit’의 번역은 내맡김, 방념(放念), 초연(超然) 등이다. 어떻게 번역이 되든 독일어 사역동사인 ‘lassen’에서 나온 명사이다. 생각 내려놓기이다. 불교 용어로는 방하(放下)가 적절한 번역인 것 같다. 집착을 일으키는 의식의 모든 지향을 내려놓기이다.
단번에 내려놓기는 힘들다. 지속적으로 내려놓는 수행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비록 그 길을 가는 것이 어렵지만, 어려운 만큼 고귀한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 어려운 길을 ‘신에 대한 지적 사랑’으로 말한다. 욕망도 희망도 그리움도 아쉬움도 오만도 호기심도 사랑도 미움도 인간의 욕망에 의한 것임을 깨닫는 길은 바로 이 모든 욕망의 고리에서 벗어나 있는 신을 인식하는 길이다. 인식이 바로 깨달음이다. 모든 욕망은 의식이 대상으로 관심을 돌리는 순간에 잉태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단 한 번에 관심을 끊을 수 없는 한, 욕망 내려놓기는 우리가 가야 할 멀고도 험난한 길이다. 하지만 그 길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과 자유를 선사한다. 우린 주어진 이 길을 부단히 그리고 성실하게 가야 한다. 가다가 길을 모르면 길에게 길을 물으면서…….
후설은 판단중지를 ‘환원(Reduktion)’이라고도 한다. 환원은 ‘되돌아간다’와 ‘되가져온다’는 이중적 의미가 있다. 되돌아가는 것은 의식과 대상이 분열되기 이전의 근원적인 의식인 불심(佛心)으로 되돌아감이다. 다시 가져오는 것은 망각하고 살았던 본래 마음[眞如]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세계에 대한 소박한 믿음을 괄호로 묶어야 한다. 세계에 대해 가져온 선입견을 철저히 부정해야 한다. 부-정(否-定)은 그릇된 입장을 정립하는 것을 내려놓는 것이다. 환원은 그릇된 이론이나 가설들로 짜 맞추어진 배설물을 토해내는 생산적 자기 정화의 과정이다. 이 철저한 부정은 진리 자체를 잃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보다 높은 의미에서 모든 것을 얻기 위한 절차이다. 환원은 판단중지를 통해 세계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의미를 다시 얻기 위한 절차이다. 환원은 단지 “추상적으로 편견이 없는 것이 되려는 일반적 의미만으로는 그 편견들에 대한 어떤 것도 변경시키지 못한다.” 판단중지는 “우선 본질적으로 완전한 인격적 변화를 이루어낼 것을 소명으로 삼으며, 이 인격적 변화는 우선 일종의 종교적 개종(改宗)과도 비교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이것을 넘어서서 인간성으로서 인류에 부과한 가장 위대한 실존적 변화의 의미를 그 자체 속에 간직하고 있다.”
6. 맺음말
허버트 스피겔버그가 후설이 불경 번역서에 관심을 보였다고 하는 전거(典據)만을 가지고 후설 현상학을 불교적 함의를 가진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한지는 확신할 수 없다. 후설이 그의 책 《제일철학(Erste PhilosophieⅡ)》에서 언급한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모든 것을 얻는다’는 구절에 의존해서 그의 자아론을 유식론과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필자는 졸저 《현상학의 이해》(1998) 중 제3장 ‘현상학적 자아의 두 얼굴’과 제4장 ‘후설 자아론과 유식론의 앙상블’이란 주제로 후설 현상학의 불교적 함의를 이미 다루었다. 25년이 지난 오늘 필자는 같은 주제의 글을 썼다. 그러면서 다음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포스트-후설, 즉 메를로 퐁티나 하이데거의 시각에서 보면 후설 역시 근대 자아론의 이분법에 그대로 머물고 있다. 만약 이런 시각에 동의한다면 후설의 자아론을 유식론으로 해석하는 데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다. 하지만 후설의 자아론을 유식론과 앙상블을 이루는 것으로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시각도 가능하다. 물론 후설의 자아론을 유식론과 동급 혹은 같은 수준에서 언급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후설의 현상학에는 불교적 수행이나 실천이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 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후설의 현상학적 방법인 판단중지는 불교적 수행에 비유할 만한 수행론이 담보되어 있다. 필자는 이 글에서 후설의 자아론적 분석을 제8식 아뢰야식에서 전오식으로 전변되어 가는 과정 분석으로 읽었다. 자아와 세계의 실재성을 지향적으로 구성하는 상견의 소유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 상견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폭로하는 유식론자로서 후설의 모습을 읽었다.
유대계 독일 철학자인 그는 제1차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말년에 제자인 프라이부르크대학 총장 하이데거로부터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수난을 당했다. 그는 나치주의의 비인간적 폭력을 마음에 새겼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인간의 근원적인 본능 지향성인 자기보존의 욕구를 폭로한다. 일체의 고가 자기보존의 욕구인 무명의 배설물이라는 불교적 진리를 그의 글 행간 행간에 묻어두었다. 필자는 이 몇 개의 행간에 잠재된 불교적 함의의 그 일부분 드러내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
김영필 kzeropil@hanmail.net
영남대 철학과(학사)와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석사)를 거쳐 계명대학교에서 철학박사(현상학 전공) 학위를 받았다. 대구교육대학교 연구교수 역임. 주요 논문으로 〈식(識)의 현상학〉 〈에드문트 후설의 ‘바깥의 현상학’-‘수동적 지향성’을 중심으로〉 〈에드문트 후설의 상호주관성 이론의 정신치료적 함의〉 등과 주요 저서로 《현대철학》 《현상학의 이해》 《한국불교와 서양철학》 《조선족 디아스포라의 만주 아리랑》 《욕망으로 성찰한 조선의 공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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