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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입명(安心立命) - 설정 스님

수선님 2024. 7. 28. 11:55

안심입명(安心立命)

불교는 자기 자신을 밝히는 일입니다. 불교의 최종목적은 안심입명입니다. 근본목적은 안심입명입니다.

註) : 안심입명 의미

“안온하고 편안한 경지에 도달하여 스스로 뿐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바른 법을 전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였다.”

어떻게 해야 안심입명이 될 수 있나? 육근(六根) 육식(六識)에 떠내려가지 않는 것이 안심입명입니다.

육진의 흐름에 육근이 춤을 추고 있으니까, 그 춤을 추는 흐름을 끊는 것입니다.

근본자성은 흔들리고, 요동치고, 탁하고, 방황하는 것이 아닌데,

언제부터인가 다생의 습기로 인해 육근이 육진에 요동치고 있는 그것을 끊어버렸을 때 자성이 드러납니다.

자성을 드러내는 것이 참선이나 주력 또는 염불의 목적입니다.

불교의 근본목적은 안심입명인데 안심입명은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생사윤회를 영구히 끊는 것입니다.

안심입명이 되면 일체 연기의 상황을, 세상의 연기법을 환히 들여다보는 지혜가 나옵니다.

이렇게 처음 드러나는 것 그것이 대원경지인데, 큰 텅 비고 청정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 대원경지(大圓鏡智)입니다.

대원경지라고 하는 것이 누구나 다 일체중생이 다 가지고 있는 근본자리인데,

근본자리를 망각한 사람들이 중생이고, 그것이 드러나서 수용하는 것이 부처님이요 보살입니다.

대원경지 속에 평등성지(平等性智)가 드러나는데 일체 삼라만상 두두 물물이 평등한 이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대원경지는 우주 삼라만상 일체가 둘이 아닌 하나인 경지가 대원경지요 평등성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평등성지만 가지고 안 되겠지요.

확실히 알려면 일체 것을 낱낱이 분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 묘관찰지(妙觀察智)가 있어야 합니다.

억지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고, 자동적으로 낱낱이 분석해 환히 아는 묘관찰지가 생기게 됩니다.

다음에는 성소작지(成所作智)라, 상황에 따라 대처할 수 있는 기능이 생깁니다. 그것이 안심입명의 완전한 형태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자비심이 자동적으로 표출됩니다. 그것이 무차대비입니다.

깨쳐서 자기만 행복하다면 불교가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공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대원경지가 드러나서 평등성지가 이루어지고, 묘관찰지와 성소작지가 이루어지면, 일체중생을

구제해야겠다는, 편안케 하겠다는 대자대비가 쏟아져 나오는 것이 차별이 없는 무차대비, 무한대비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니까 천당에 보내고, 싫어하니까 지옥에 보내고 등, 다른 종교에서는 무차대비가 없습니다.

모든 생명은 불성을 나눈 존재이고, 총 에너지가 불성 자신이고, 그것을 나누자는 것,

두두 물물이 불성의 존재여서, 불성을 나눈 자는 누구나 구제의 대상입니다.

불교에서 사물(四物)을 칩니다.

사물 중에 북은 소가죽으로 만들었습니다. 모체중생을 위해 곧 소나 개나 말이나 고양이 등,

가는 털을 가진 존재를 위해 북을 칩니다.

운판(雲板)을 치는 것은, 깃 달린 중생 곧 날개달린 중생, 새, 닭, 공작 등,

날아다니는 모든 것을 위해 운판을 칩니다.

목어(木魚)는 수중에 있는 모든 생명을 위해, 고기류 어패류를 위해 칩니다.

마지막으로 종은 시방법계에 있는 모든 고통 받는 지옥중생을 위해 칩니다. 지옥중생을 위해 칩니다.

지옥중생만 아니고 우주법계의 모든 고통 받는 중생을 위해서 칩니다.

사물을 치는 이유는, 불교목적은 사람만이 구제의 대상이 아니고

우주의 모든 생명을 전부 구제해 성불케 하는 그런 뜻으로 사물을 칩니다.

육조스님은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장엄법계라 해서 법계를 장엄한다.

모든 우주의 생명을 아름답게 한다. 아름답게 장식한다. 외형적, 정신적으로 가장 아름답게 한다는 것입니다.

육조스님이 말씀하신 세 가지 장엄의 첫째가 법계장엄입니다.

탑을 세우고, 절을 세우고, 아름다운 전각을 짓고, 모든 중생이 사는 집을 지어 수용하는 것이 법계장엄입니다.

둘째 신법계는 일체중생을 청정하게 생각하고, 아주 존중해주는 것.

어떤 중생을 만나도 즐겁게 하고, 편안하고 아름답고, 기쁘게 하는 것 이것이 신법계입니다.

세 번째는 심법계로, 마음을 장엄하는 것입니다. 안 된 습관들, 악재악습을 다 제거하는 것입니다.

탁한 마음, 더러운 마음, 야비한 마음, 탐욕스러운 마음, 거짓된 마음, 시비하는 마음, 교만한 마음,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에게 해로운 마음을 다 제거하는 것이 심법계장엄입니다.

이것이 불교가 가진 기능이고 목적입니다.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첫째 마음이 청정해야 합니다.

그 길은 여러 가지 길이 있지만, 참선하는 것이 제일 빠릅니다.

한국은 간화선이 주인데, 간화선을 하는데 공부들 잘 되시던가요? 처음에는 잘 안됩니다. 그런데 이것 밖에 할 것이 없게 되요.

다른 것 다해 봐야 무상한 것이라서 돈을 암만 많이 벌어도 제 것이 아니고, 명예가 암만 높아 보아야 권불십년이에요.

인과법으로, 복을 많이 짓고, 공부 많이 한 분은 자동적으로 보살계만 잘 지켜도 왕위를 잃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나와서 힘들고 불편한 것은 스스로가 과거 잘못 살아서 그렇습니다.

대부분 자기 잘못은 생각 안하고 부모 원망하고, 이웃 원망하는데, 업을 지은대로 받는 것입니다.

가난한 업을 지은 사람은 가난하게 살고, 건강치 못한 몸을 받는 사람은 건강치 못한 업을 지었어.

나도 병고를 많이 겪었는데 남의 생명을 많이 죽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확실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보시하기를 꺼려하고 싫어합니다.

이기심이 중생심의 근원이고 탐심의 근원이야. 탐심 많은 사람이 이기주의야, 두 가지가 사회를 가라앉히고 있습니다.

극단 이기주의와 극단 자유주의, 가까운 예로 젊은 사람이 부모 모시지 않고, 또 시비나 걸어 남 잘 되는 것 끌어내리려 합니다.

노력은 하지 않고 그런 일이 많습니다. 불교를 잘 믿으면 그런 일은 싹 없어지는 데, 현실적으로 안타까운 일이 많이 있습니다.

인덕원이라고 불교 복지시설에 갔었는데, 노인 500명을 모시고 있어요.

250명은 치매 등 중증이고, 250명은 경증이었어요.

이사장 스님께 ‘여기 들어오시는 분이 어떤 분이냐?’ 물으니, 이사장님 말씀이,

‘집도 있고, 자식 있는 사람도 많다.’ ‘본인이 스스로 원해서 온 것이냐? 자식이 권해서 온 것이냐?’ 물으니,

‘본인이 원해서 온 것도 더러 있으나, 대부분 자식이 위탁을 했다.’고 그래요.

구식이라서 그런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데, 자식이 어떻게 부모를 시설에 위탁을 해?

이 나라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극단의 이기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부모가 거추장스러운 존재라고 생각해 그런 짓을 합니다. 아니면 시설에 들일 이유가 없지요.

인간의 극단의 이기와 자유스럽게 살자, 여기서 온 것입니다.

우리사회가 사회의 윤리와 도덕이 무너지는 것이 극단적인 이기, 극단 자유주의에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회복 되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괜찮은 나라다 하는 것이 있다면 효(孝)정신인데 효정신이 무너졌어요.

서구 이기주의에 오염이 되어 만연되고 있는데, 불교 입장에서 패륜이고 아주 잘 못된 것입니다.

부모가 피땀 흘려 가르쳐 성공하게 하고 먹고살게 했는데,

뼈골 빠지게 한 부모를 저희 편하자고 시설에 넣었다? 이건 아닙니다. 좋은 현상이 아니고 좋은 나라가 아닙니다.

불교적인 또는 유교적인 입장에서도 안 된다, 이것은 회복 되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회복이 될지 안 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앞으로 잘 사는 나라가 되려면, GNP가 끝도 없이 올라가는 것 보다,

인간다운 삶이 자리 잡고 형성되는 것이 좋은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류국가로 가는 기능이 아니겠느냐?

그런 것이 소홀히 되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결국은 치성한 탐진치(貪瞋痴)만 조성하는, 지옥 갈 업만 만드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육조스님의 3장엄, 법계, 몸, 마음을 장엄하는 것이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가 나를 낳고 기르고 가르치고 관리해 주셨고, 땀과 피의 네트워크 위에 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은혜를 입었으니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의 것 털어먹고 갚지 않으면 사기꾼이고,

당장 편리한 것만 추구하는 것은 반인륜적이고 반도덕적입니다.

불교 배우고 실천하는 목적이 가족 뿐 아니고 모든 사람이, 사람 뿐 아니고 자연까지 편안케 하는 것입니다.

경전에 보면 풀 한 포기 꽃 하나 뽑는 것도 함부로 못하게 생명의 소중함을 우선하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사람을 위해서 만든 것이니 소나 돼지를 막 잡아먹어라 하는데 인과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자기 부모가 소, 개, 말이 되었는지도 모르고 생명을 마구 대하는 것은 반불교적인 것입니다.

모든 생명이 행복하고, 구원될 수 있는 길이 불교에서 밖에 없습니다. 불교문화 정신이 사회를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모든 생명을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행복으로, 해탈로 가는 길입니다.

다른 종교는 그런 기능이 전혀 없습니다.

다 아시겠지만 서양의 종교는 1300년 내려오면서 계속 살육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종교라는 이름으로 가장 살상을 많이 했습니다.

60년 전쟁, 100년 전쟁. 십자군 전쟁을 통해 끝도 없이 살육을 하고 지금도 전쟁을 합니다.

중세에 신의 이름으로 나무에 생사람 묶어 불태워 죽인 게 기록상으로 남은 것만도 45만 명입니다.

이것은 사랑과 관계없습니다. 종교가 잘못 신앙을 가지면 큰 인간이 아니라 더 옹졸한 인간이 됩니다.

자기 신앙, 자기 사상, 자기 종교를 지키기 위해 남을 죽여도 좋다는

배타적이고 이기적이고 반인륜적인 사견을 가진 신앙이 있습니다. 불교는 그것을 떠나 있습니다.

금강경에 중요한 문구 하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한테 뗏목의 비유를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너희들을 열반으로 건네는 뗏목과 같은 것이다.

뗏목으로 건너갔으면 뗏목에 집착하지 말라. 집어내버려야 한다.

곧 법상응사 하황비법(法尙應捨 何恒非法)

이것은 모든 것을 초월한 불교만이 가진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불교라는, 진리라는 말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이 위대한 것입니다. 차별을 가진 것을, 종교, 진리마저 버려야 하는데 법 아닌 것이랴.

이 중요한 엄청난 언어 하나에 세계를 수용할 수 있는 모든 장치가 다 들어 있습니다.

이 진리마저 버려야 너희가 해탈한다. 그것이 아공(我空)이고 법공(法空)이다.

나도 공하고 법도 공하다. 그 자리가 해탈의 경지이고 원융무애한 자리이다.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진리가 원융해서 두 모습이 아닌데, 중생이 나누어 두 모습을 만듭니다.

진리라 소리하면 진리가 아니다. 부처님의 위대한 법을 공부 열심히 해서,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열리는 순간에 일체 평등한 것이 그 자리, 해탈된 모습이 그 자리, 청정한 것이 그 자리,

원만한 것이 그 자리, 무한대비가 그 안에 있습니다.

그걸 하기 위해 여러분 열심히 해 좋은 결과 있기 바랍니다.

- 설정 스님 -

 

 

 

 

 

 

 

안심입명(安心立命) -설정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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