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과학

불교와 과학, 그 멀고도 가까운 거리 / 장회익

수선님 2024. 9. 22. 14:30
특집 | 불교로 읽는 과학, 과학으로 읽는 불교

들어가는 말

《네 발 위의 부처님(Der Buddha auf vier Pfoten)》(Dirk Grosser 지음)이란 책이 《우리가 알고 싶은 삶의 모든 답은 한 마리 개 안에 있다》는 제호로 번역되어 나온 바 있다. 이 책은 한 젊은 철학도가 떠돌이 개를 입양해 14년을 함께하면서 겪은 이야기를 감명 깊게 담고 있다. 불교철학을 전공하는 저자의 눈에는 ‘보바’라고 이름을 붙인 이 개의 행동 하나하나가 마치 불교의 참뜻을 깨달은 성인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네 발 위의 부처님”이라는 다소 불경스러운(?) 제목으로 그들이 함께해 온 생활을 차분히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강아지도 이렇게 불심(佛心)을 보이고 있는데, 사람은 어째서 이 경지에 도달하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그 해답으로 강아지에게는 제거해야 할 번뇌가 없지만 사람에게는 번뇌가 있어서 그렇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맞는 말이겠지만 그렇다고 강아지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서운해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결국 사람에게는 강아지가 가지지 못한 그 무엇이 더 있다는 것인데, 이를 부정적으로 보자면 ‘제거해야 할 번뇌’가 되겠지만 긍정적으로 보면 ‘주체적 삶의 소지’라 할 수 있다. 단지 많은 사람이 이 주체적 삶의 소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그날그날의 관성적 삶에 이끌려 살아가다가 소중한 생애를 마감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주체적 삶에 대한 자각은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는가? 이는 한마디로 ‘나는 어떠한 세계에 있는 어떠한 존재이며, 그렇기에 나는 어떠한 자세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하는 물음을 진지하게 제기하고 추구하는 데서 출발한다. 근원적으로 보자면 불교의 가르침이나 자연과학의 탐구 내용도 결국 이 물음에 답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지만 그 강조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이 물음은 ‘나는 어떠한 세계에 있는 어떠한 존재인가?’ 하는 앞부분과 ‘나는 어떠한 자세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하는 뒷부분으로 구성되는데, 자연과학이 앞부분의 물음에 강조점을 둔다면 불교는 뒷부분에 강조점을 둔다. 그러나 본래 물음에서 이 두 부분이 ‘그렇기에’라는 접속사로 연결되었듯이, 이 두 부분이 각기 독자적으로만 추구된다면 삶에 대한 진정한 주체적 자세라 할 수 없다. 이상적으로는 이 두 부분이 정합적으로 연결되어 누구에게나 공감이 되고 누구에게도 만족스러운 해답이 주어져야겠지만 현실은 아직 여기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점을 바탕에 깔고, 불교와 과학에서 각각 추구하는 깨달음의 방식과 내용에 어떠한 공통점과 차이가 있는지를 불교의 몇몇 중심 사상을 기준으로 살펴 나가기로 한다. 특히 불가에서 말하는 중도(中道)와 무아(無我)의 개념은 삶에 대한 피상적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 심층적 이해로 들어가게 하는 방편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중도와 무아의 개념이 불교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고, 현대 과학에도 이에 해당하는 개념들이 있는지,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생각해 보기로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中道) 개념

불교 초기 경전에 중(中)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다음과 같은 용례가 있다.

깟짜야나여, ‘모든 것이 있다’라고 하는 이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이 없다’라고 하는 이것은 두 번째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이 두 극단으로 가지 않고 여래는 중(中)에 의해 법을 설한다.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하여 행(行)이, … 생(生)을 조건으로 하여 노사(老死), 우비고뇌(憂悲苦惱)가 생겨난다. 이와 같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발생한다. 그러나 무명(無明)의 남김 없는 소멸로부터 행(行)의 소멸이, … 생(生)의 소멸로부터 노사(老死), 우비고뇌(憂悲苦惱)가 소멸한다. 이와 같이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한다.

여기서 ‘모든 것이 있다’라는 것은 우리의 세계가 눈에 보이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가리키며, 반면 ‘모든 것이 없다’라는 것은 이것이 실은 모두 허상이어서 아무것도 있지 않다는 견해를 말하는데, 이 두 견해는 모두 극단에 치우치는 것이므로 이러한 극단에서 벗어날 지혜가 바로 ‘중(中)’이라고 말한다. 이는 그저 가운데 자리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둘 너머에 있는 더 큰 이치를 깨우치라는 이야기이다. 위의 사례는 특히 12연기라는 모습으로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발생하고 소멸하는 이치를 일깨우는 가운데 언급된 것인데, ‘있다’는 것에만 매여서는 ‘소멸’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고, ‘없다’는 것에만 매여서는 ‘발생’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특히 ‘무명(無明)’을 통해 괴로움이 발생하고, 이것이 소멸하면서 괴로움이 소멸된다고 하면서, 무명에서 벗어남 곧 깨우침에 이르는 것이 최상의 지혜임을 말하는데, 중(中)에 의한다는 것이 곧 깨달은 눈으로 본다는 것임을 암시한다.

또 초기 경전에는 중도(中道)를 언급하기도 한다. 다음과 같은 사례를 보자.

 

비구들이여, 수행자는 이 두 가지 극단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저급하고 천하고 속되고 고귀하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쾌락적 삶에 몰두하는 것과, 괴롭고 고귀하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자신을 괴롭히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 두 가지 극단으로 가지 않고 여래가 완전히 깨달은 중도(中道)는 눈을 만들고 앎을 만드는 것이며, 적정과 뛰어난 지혜와 완전한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끈다.

그렇다면 비구들이여, 여래가 바르게 깨닫고 눈을 만들고 앎을 만드는 것이며, 적정과 뛰어난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끄는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고귀한 여덟 가지 길[八正道]이니, 즉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이다.

 

이 사례에서 보다시피 초기 경전에서 ‘중(中)에 의한다’는 말과 중도라는 말은 치우침에서 벗어나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으로 거의 동의어로 쓰이면서도, 중도의 경우에는 특히 수행의 방식과 그 지침에 관련된 내용 즉 중을 통해 깨달은 자가 가지게 될 지혜의 내용과 바른 삶의 자세가 강조되고 있다. 한편 중도의 개념은 초기불교에서 대승 경전과 중관학파를 거쳐 중국의 삼론종(三論宗)에 이르면서 더욱 체계화되고 정교해진다. 여기서는 특히 삼론종의 《대승현론(大乘玄論)》에 나오는 사중이제(四重二諦)와 이제합명중도(二諦合明中道) 개념을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대승현론》에는 앎을 두 종류로 구분하여 세상에서 통용되는 앎을 세제(世諦)라 하고 이를 넘어서는 한층 심층적인 앎을 진제(眞諦)라 한다. 그리고 이 둘을 통합하여 이제(二諦)라 부르는데, 이러한 이제가 네 개의 층위에 걸쳐 형성된다고 하는 이른바 사중이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저쪽은 단지, 유(有)를 세제(世諦)로 하고, 공(空)을 진제(眞諦)로 삼는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유(有)와 공(空)을 모두 세제(世諦)로 하고, 비공비유(非空非有)라야 비로소 진제(眞諦)라 부르게 됨을 밝힌다. 셋째 단계에서는, 공(空)과 유(有)를 이(二)라 하고 비공유(非空有)를 불이(不二)라 칭할 때, 이(二)와 불이(不二)는 모두 세제(世諦)이고, 비이비불이(非二非不二)를 진제(眞諦)라 부르게 된다. 넷째 단계에서는, 이 세 가지 이제(二諦)가 모두 가르침(敎門)에 속하는 것이어서 이 셋이 불삼(不三: 진제가 아닌 셋)임을 깨달아 알게 된다. 더 이상 기댈 것과 얻을 것이 없어야 비로소 참 이치(理)라고 불리게 된다.

 

또 《대승현론》에는 이러한 이제를 각각 설정해 내는 지혜를 이제각론중도(二諦各論中道)로, 그리고 이러한 이제를 현명하게 결합해내는 지혜를 이제합명중도(二諦合明中道)로 부른다. 이렇게 규정된 이제합명중도는 앞에서 설정된 사중이제 구조와 대략 다음과 같은 연결을 가진다.

우선 사중이제에서는 유(有)와 공(空) 개념을 대응시켜 이제를 말하고 있음에 비해, 이제합명중도에서는 생(生)과 비생(非生)을 대응시켜 논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중이제에서는 “유(有)를 세제(世諦)로 하고, 공(空)을 진제(眞諦)로 삼는다”고 하는 내용에 대해 이제합명중도에서는 이를 이미 중도의 하나로 보면서 비생비불생(非生非不生)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중이제에서 말하는 세제가 유(有)만을 고집하지 않고 스스로를 가유(假有)로 보아 공(空)의 가능성도 열어놓고 있다면 이는 이미 중도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며, 반대로 진제 또한 공만을 내세우지 않고 최소한 가유로서의 유를 인정한다면 이 또한 일정한 중도의 자세를 취한 것으로 볼 수 있기에, 그런 점에서 이들이 각각 이제각론중도(二諦各論中道)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 이제는 중도의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그 바탕은 여전히 세제와 진제에 두고 있어서 엄정한 의미의 중도에는 아직 달하지 못했다고 본다. 그래서 이 둘을 함께 인정하는 진정한 의미의 중도가 요구되는 것으로 보아, 이를 이제합명중도라 규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세제는 ‘진제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세제’여서 진정한 세제일 수 없고, 진제 또한 ‘세제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진제’여서 진정한 진제일 수 없으니, 이 둘을 완전한 하나로 엮는 중도 그것이 바로 이제합명중도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앞에 소개된 사중이제 구조는 네 단계에 걸쳐 점점 심화되는 이제합명중도의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것은 왜 하필 네 단계냐 하는 점이다. 사실 이러한 진행은 굳이 네 단계에 그쳐야 할 이유가 없다. 실제로 선종에서는 이를 무한히 반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를 흔히 사구백비(四句百非)라 하는데, 백 번을 부정해도 역시 부족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사중이제론에서는 같은 논리를 무한히 되풀이한다는 것을 피해, 넷째 단계에서 나머지 모두를 아우르는 최종적 진리의 가능성 곧 “더 이상 기댈 것과 얻을 것이 없어야 비로소 참 이치[理]”라는 언설로 대변되는 목표치만을 제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이처럼 《대승현론》에 제시된 사중이제 구조를 이제합명중도와 결합해 보면 다음과 같은 간단한 도식이 형성된다.

 

1 단계: 유(有)1: 세제(世諦), 공(空)1: 진제(眞諦)

2 단계: 유2(새로운 유와 공1 포함): 세제, 공2(새로운 공): 진제

비공2 비유2(非空2 非有2): 이제합명중도

3 단계: 유3(새로운 유와 공2 포함): 세제, 공3(새로운 공): 진제

비공3 비유3(非空3 非有3): 이제합명중도

4 단계: 이들은 모두 상대적 진리이다. 참 이치는 오직 가능성으로만 남는다.

 

현대 과학에 나타난 중도 개념

위에서 살펴본 중도의 논리는 특정 대상에 대한 어떤 사실을 말한다기보다 우리가 사물을 보고 파악해 나가는 과정에 대한 논의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 적용 범위에 어떤 제한을 둘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고의 패턴이 현대 과학에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흥미롭게도 이러한 사중이제의 논리가 물리학 특히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특징짓는 시간과 공간 개념의 발전단계에도 관련됨을 볼 수 있다.

현대인들은 거의 누구나 공간이 3차원 구조를 가졌음을 쉽게 동의한다. 그러나 고전 역학이 출현하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사람이 수평 방향의 평면과 수직 방향의 높이를 별개의 개념으로 생각했다. 지평면을 구성하는 수평 방향의 평면 위에도 동서남북을 구분할 수 있지만, 이는 지형지물과 천체운동 등 우연적인 여건에 기인하는 것일 뿐 원천적으로는 평면상의 모든 방향은 서로 대등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아래위 쪽 방향은 물체를 낙하시키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수평 방향과는 원천적으로 구분되는 그 어떤 것이라고 보기 쉽다. 이를 현대의 차원 개념에 맞추어 말한다면 수평 방향의 평면은 2차원 공간을 형성하며, 수직 방향은 이와 독립된 별도의 1차원 공간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일상적 경험에서 오는 가장 자연스러운 공간 개념이다.

사실 이러한 일상적 공간 개념과 좀 더 세련된 3차원 공간 개념은 자연의 ‘실재’를 반영하기보다는 우리가 자연을 파악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 만들어 가진 바탕 관념에 해당한다. 하지만 어느 관념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묻게 되는 물음의 성격이 달라진다. 우리가 일상적 공간 관념을 취할 경우, 물건이 떨어지는 현상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된다. 이때 만일 우리 지구가 허공에 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것이 왜 안 떨어지느냐?” 하는 심각한 문제에 부딪힌다. 실제로 중세의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엄청난 고민을 해 왔다. 반면 우리가 일단 3차원 공간 개념을 수용하게 되면, 물건이 떨어지는 현상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 된다. 수평 방향과 수직 방향은 원천적으로 대등한 것인데, 왜 유독 수직 방향에는 이런 이상한 현상이 생기느냐 하는 문제다. 이것이 바로 ‘사과는 왜 떨어지는가?’라는 유명한 뉴턴의 물음이다. 그리고 뉴턴이 이 물음에 대해 흡족한 해답을 제시했기에 오늘 우리는 3차원 공간 개념을 어렵지 않게 수용하고 있다.

이제 이 상황을 《대승현론》에 나타난 중도의 개념과 연결해 해석해 보자. 실제로 우리가 지닌 일상적 공간 개념을 세제(世諦)라 하고 좀 더 세련된 3차원 공간 개념을 진제(眞諦)라 할 때, 이것이 사중이제의 제1단계 즉 “유(有)를 세제로 하고, 공(空)을 진제로 삼는다.”는 언명에 적용됨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유’는 수직 방향의 공간이 “물체를 떨어지게 하는 특별한 성질을 가진다[有]”는 주장에 해당한다면, ‘공’은 “그러한 성질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非有], 혹은 그러한 성질의 자리는 비어 있다[空]”는 주장에 해당한다. 그런데 사실을 알고 보면 그러한 성질은 다른 이유 때문에 나타나는 겉보기 현상[假有]에 해당하므로 이를 세제중도(世諦中道)라 할 수 있고, 또 그러한 성질이 본질적으로는 없지만 현상적으로는 나타나므로 이를 단순한 비유(非有)가 아니라 숨겨진 비유[假非有]로 보아 이것을 진제중도(眞諦中道)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세제와 진제가 모든 면에서 대등하다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2차원+1차원 관점으로 해석하던 현상들을 3차원 관점으로 보게 된 것은 이해의 폭을 한 차원 넓힌 새로운 깨달음에 해당한다. 세제에 대비해 진제라는 용어를 쓴 것이 이 점을 말해준다.

현대 과학에 나타나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시간 공간에 대한 이해가 이러한 한 단계의 이제(二諦)에 그치지 않고, 그다음 단계 곧 “유와 공을 모두 세제로 하고, 비공비유(非空非有)라야 비로소 진제라 부르게 됨”을 밝히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상대성이론인데, 여기서는 3차원 공간 개념마저도 가유(假有) 곧 겉보기 관념의 틀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이를 한 단계 뛰어넘는 4차원 시공간의 개념이 좀 더 적절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곧 사중이제의 둘째 단계인데, 이를 유와 공의 관점에서 풀이해 보면, 앞 단계에서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3차원 공간과는 구분되는 독자적 성격을 가지고[有] 있었던 것임에 반해, 새 관점에서는 이것마저도 공간의 한 성분일 뿐 그 독자적 내용이 비었다[空]는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유 안에는 이 시간의 개념과 함께, 앞 단계에서 진제라 생각했던 3차원 공간 개념이 포함되며, 새로운 공으로서 4차원 시공간이 새 진제로 떠오르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공간과 시간이 완전히 대등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공간의 한 축을 실수(實數)에 대응시킨다면 시간 축은 허수(虛數) 축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그만큼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것은 다시 비공비유(非空非有)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 두 관점을 함께 생각해야 하는 이제합명중도(二諦合明中道)에 이르게 된다.

현대 과학에서는 이에 그치지 않고 다시 셋째 단계의 사중이제 곧 양자역학을 통한 도약으로 나아가고 있다. 양자역학 이전의 단계에서는 4차원 시공간 이외에 이와는 별개로 4차원 에너지-운동량 공간이 있는[有] 것으로 상정해 왔다. 그런데 양자역학에서는 이것이 독자적인 공간이 아니라 4차원 시공간이 지닌 또 다른 측면 즉 이것의 푸리에(Fourier) 변환 공간에 해당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렇기에 이것 또한 시공 개념의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사중이제의 셋째 단계에 맞추어 해석해 볼 수 있다.

즉 둘째 단계에서의 공(空)인 4차원 시공간과 4차원 에너지-운동량 공간이 새로운 유(有)로 떠올라 모두 세제를 구성하게 되고, 이들과 구분되는 4차원 겹-공간이 새로운 공이 되어 진제로 떠오르는 것이다. 여기서 4차원 겹-공간이라는 것은 푸리에 변환으로 연결된 특별한 관계로 엮어졌다는 점에서 기왕의 세제와 여전히 관계를 맺고 있기에, 이를 다시 이제합명중도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8)

이제 남아 있는 한 가지 흥미로운 질문은 현대 과학의 공간 개념이 여기에 그칠 것인가, 아니면 이것들을 넘어 더 높은 단계의 진제, 그리고 더 높은 단계의 이제합명중도로 나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당연히 현대 과학에서는 한층 더 높은 단계도 추구하고 있지만, 아직은 이렇다 할 성과가 공인되고 있지는 않다.

앞에서 말했듯이 사중이제론에서는 이 넷째 단계에서 또 하나의 상대적으로 진전된 합명중도를 제시하기보다 이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그 무엇이 존재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즉 지금까지 수용된 세 단계의 이제(二諦)가 모두 우리가 설정한 상대적 진리 즉 ‘가르침[敎門]’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아직 진정한 진리[理]에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고, 더 이상의 ‘유(有)’가 발생하지 않을 완결된 경지에 이르러야 함을 말하고 있다. 현대 과학 또한 이러한 성취를 궁극의 지향점으로 삼고 있으나 어떤 완성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다.

이렇게 볼 때 현대 과학의 공간 개념 확장에 관한 이러한 도식은 불교에서 말하는 사중이제의 이제합명중도 구도 도식과 매우 잘 일치하는 것이며, 이는 불교적 직관과 현대 과학의 사고 사이에 놀라운 공통점이 있음을 말해주는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 개념

이번에는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 개념에 대해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경전에 나오는 개념들이 우리의 일상적 개념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특히 무아의 개념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매우 독특한 성격을 지닌다. 그 한 예로 붓다가 초기에 무아를 설하여 다섯 비구를 해탈로 이끌었다는 《무아상경(無我相經)》에 나오는 내용을 살펴보자.

비구들이여, 색(色)은 무아(無我)이다. 왜냐하면 비구들이여, 이 색이 자아라면 이 색은 고통으로 이끌어지지 않을 것이고, 색에 대해서 ‘나의 색은 이렇게 되기를, 나의 색은 이렇게 되지 말기를’이라고 하면 그와 같이 될 것이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색은 무아이기 때문에 색은 고통으로 이끌어지고, 색에 대해서 ‘나의 색은 이렇게 되기를, 나의 색은 이렇게 되지 말기를’이라고 해도 이와 같이 되지 않는다. 수(受)는 무아이다… 상(想)은 무아이다… 행(行)은 무아이다… 식(識)은 무아이다…

여기서는 생멸 변화의 바탕을 이룬다는 오온(五蘊)의 다섯 요소 즉 색, 수, 상, 행, 식 하나하나를 거론하며 이들이 모두 무아임을 말하고 있다. 예컨대 색이 자아라면, 자기가 원하면 원하는 대로 될 것이고, 특히 고통으로 이끌어지지 않을 것인데,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아 색이 무아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두 가지 전제를 바탕에 깔고 있다. 첫째 자아 즉 아(我)를 가진다는 것은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며, 둘째 무아 즉 아가 없으면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의 상식에서 많이 벗어난다. 우리는 아가 없으면 고통받을 리도 없을 것이며 설혹 아가 있더라도 자기의 몸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 점을 해명하려면 여기서 말하는 자아의 뜻을 어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아를 뜻하는 attā(빨리어)와 ātman(산스끄리뜨어)은 모두 본질, 호흡, 영혼 등의 어원에서 나온 것으로 영원불변, 상주불멸하는 존재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오온이 무아라고 하는 말은 오온 안에 괴로움으로 이어지지 않는 불변하고 영원한 어떤 것도 들어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이를 깨치지 못한 사람들은 이들에 대해 ‘나’라는 집착을 일으켜 탐욕에 빠지게 되고 그 결과 고통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오온이 무아(위에 말한 의미)이고 ‘나’가 오온이라면 그 ‘나’가 진정한 의미의 무아 곧 아(我)=무아(無我)라고 하는 이상한 등식이 성립한다. 그렇기에 우선 경전에서는 ‘나’와 오온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왓차곳따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왓차여, 여래, 아라한, 정등각자는 색(色)을 나로 간주하지 않고, 나를 색(色)을 지닌 자로, 나에게 색(色)이, 색(色)에 내가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수(受)를 나로 간주하지 않고… 상(想)을 나로 간주하지 않고… 행(行)을 나로 간주하지 않고… 식(識)을 나로 간주하지 않고… 식(識)에 내가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이는 곧 오온과 ‘나’가 무관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경전에 언급되는 이유는 많은 사람이 오온을 자아로 여기면서 이것이 영구불변하는 어떤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미망을 깨우쳐 주려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온을 자아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의 자아는 어떻게 볼 것인가? 즉 오온과 무관하게 오직 주체로서의 자아만을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이러한 자아에 대해서는 어떤 말을 할 수 있는가? 《아난다경》에는 이 점과 관련해 생각해 볼 만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한 곁에 앉아 있던 왓차곳따 유행승은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런데 자아는 있습니까?” 이렇게 말하자 세존께서는 침묵하셨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자아는 없습니까?” 두 번째에도 세존께서는 침묵하셨다. 그러자 왓차곳따 유행승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갔다. 왓차곳따 유행승이 나간 지 오래지 않아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왜 왓차곳따 유행승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습니까?” …

“아난다여, 왓차곳따 유행승이 ‘자아는 있습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내가 만일 ‘자아는 있다.’라고 대답했다면 이것은 나의 입장에서 보자면 ‘모든 법들은 무아다[諸法無我]’라는 지혜를 일어나게 하는 것과 부합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왓차곳따 유행승이 ‘자아는 있습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내가 만일 ‘자아는 없다.’라고 대답했다면 이미 미혹에 빠져 있는 왓차곳따 유행승은 ‘오, 참으로 이전에 있던 나의 자아가 지금은 없구나.’라고 하면서 다시 더 크게 미혹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는 물음의 성격상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여 ‘그렇다’ 또는 ‘아니다’라고 해야 할 것임에도, 붓다는 오히려 묻는 이의 정황을 고려하여 ‘그렇다’라고도 ‘아니다’라고도 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즉 그 사람이 대답을 들었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이냐에 마음을 쓰는 것이다. 중도의 관점에서 보자면 두 가지 답변이 다 불완전한 것인데, 어느 한쪽의 대답을 한다면 듣는 자는 결국 그로 인한 편견에 빠질 것을 우려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오온이 무아라든가, 내가 오온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매우 단호하면서도 자아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중도의 길을 널리 열어두고 있다는 것이다.

무아 또는 자아에 대한 이러한 양면성을 이해하기 위해 무아를 ‘실천적 무아’와 ‘형이상학적 무아’로 구분해 보아야 한다는 관점이 제기되고 있다. 이 관점에 따르면 ‘모든 법은 무아다[諸法無我]’라는 주장은 실천적 무아이며, 이것이 붓다의 주된 관심사이다. 반면 자아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물음은 형이상학적 자아에 관한 물음이며 붓다에게 이는 사실상 부차적인 관심사였다는 것이다. 굳이 이것에 답해야 할 상황이라면 여타의 많은 물음에서나 마찬가지로 중도의 지혜로 대처함이 옳다고 보는 입장이다. 위에 인용된 《아난다 경》의 이야기는 붓다가 이러한 중도의 지혜를 어떻게 발휘하고 있는지를 잘 말해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온생명 관점에서 살펴본 무아(無我)의 의미

위에서 보았듯이 불교 경전에는 아(我)와 무아(無我)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지만 이들 개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아, 무아 개념과 일정한 차이가 있다. 그런데 현대 과학 특히 온생명의 관점에서 보는 ‘나[我]’의 개념 또한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나’의 개념과는 많이 다르다. 그렇다면 온생명에서 보는 ‘나’의 개념이 불교 경전에 나타난 아 혹은 무아의 개념과 일정한 연관성을 지니지는 않을까?

이 점은 학문적으로도 흥미로운 주제가 되겠지만 특히 실천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반적으로 과학이 담고 있는 개념들은 사물의 이해를 위해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되지만, 삶의 지향성 문제에 대해 직접 관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논의가 삶의 주체인 ‘나’와 관련될 때는 곧바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나’라고 하는 문제는 생명의 이해라는 과학적 관심의 주제와 관련이 되면서도 또 삶의 지향이라고 하는 실천적 과제와 연관을 맺고 있다.

이러한 연관성을 염두에 두면서 여기서는 먼저 현대 과학 특히 온생명 이론에 나타나는 ‘나’의 개념을 간략히 살펴보고 이것이 불교 경전에 나타난 아와 무아 개념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나’라는 관념 속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것이 바로 ‘내 생명’이며 또 나에게 있어서 이 생명을 어떻게 보존하는가 하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이다. 그렇기에 이 논의는 결국 생명이 무엇인가 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흔히 살아 있는 존재와 살아 있지 않은 존재를 구분하고, 살아 있는 존재가 지닌 ‘살아 있음’이란 성격을 추상화하여 이를 생명이라 부른다. 그렇기에 이러한 성격을 지닌 존재, 예컨대 다람쥐나 소나무는 생명을 가진 것으로 보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생명을 가지지 않은 것이라 본다. 그런데 문제는 고립된 다람쥐나 소나무가 살아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들이 살아 있기 위해서는 공기가 있어야 하고 물이 있어야 하고 먹이 그리고 햇빛이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생명은 이들을 살아 있게 만드는 모든 인과관계의 그물에 엮여 존재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생명의 존재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이 인과의 실타래가 어디까지 뻗는가를 살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인과의 실타래가 더 이상 밖으로 뻗어나가거나 들어오지 않는 전 영역을 찾아내었다면, 생명은 바로 그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지구상의 생명을 생각한다면, 태양과 지구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생명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완결된 인과의 실타래를 이루고 있기에, 우리 생명은 바로 이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생명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완결된 인과의 실타래를 하나의 기본 단위로 보아 필자는 이를 ‘온생명’이라 부르고 있다.13) 이렇게 할 때, 다람쥐나 소나무와 같은 각개의 생명체들은 ‘온생명’과 구분해 ‘낱생명’이라 부르며, 이들은 모두 온생명의 나머지 부분이 함께할 때에 한해 생명의 구실을 하게 된다.

현대 과학은 이러한 온생명과 그것의 생리를 밝힘으로써 생명에 대한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이 안에는 여전히 과학으로서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의 신비가 숨겨져 있다. 즉 이 안에 ‘나’라고 하는 존재가 출현한다는 점이다.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물들이 긴 역사의 과정을 통해 하나의 온생명을 형성할 수 있음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나, 아무리 심오한 물리학 법칙으로도 그 안에서 ‘주체로서의 나’가 발생하리라는 사실을 이끌어 낼 방도는 없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현재 이를 설명할 가장 적절한 방식은 일원이측면론(一元二側面論)을 택하는 길이다. 즉 이를 기존의 객체적 현상들과 같은 반열에 놓인 또 하나의 현상으로 보지 않고 현상 그 자체의 이면을 구성하는 하나의 ‘숨겨진’ 속성으로 보자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파악한 모든 객체적 현상의 모습을 이것이 지닌 외적 혹은 표면적 속성이라고 한다면, ‘나’라는 존재는 현상의 내부에서 자기 스스로를 파악하게 되는 내적 혹은 이면적 속성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즉 이 둘은 실체적으로 구분되는 두 개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실체가 가지는 두 양상 곧 ‘객체적 양상’과 ‘주체적 양상’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인간의 의식 속에 나타나는 ‘나’가 굳이 어떤 제한된 범위의 실체 곧 ‘내 몸’과 연계를 짓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내 의식이 내 몸에 국한된 신경조직망을 통해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고, 더 중요하게는 이것의 활동을 통해 보호해야 할 대상이 ‘내 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경조직망은 외부의 정보도 입수하게 되고 이를 통해 보호해야 할 대상의 범위가 개별 신체를 넘어서기도 한다. 우리는 또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너’와 ‘나’를 다시 아울러 ‘우리’라는 ‘집합적 주체’를 형성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의 주체 곧 ‘나’라는 것은 하나의 고정된 ‘작은 나’에 국한되지 않고 주변과의 관계를 인식함에 따라 ‘더 큰 나’로 그리고 ‘더욱더 큰 나’로 내 주체성을 계속 확대해 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기까지도 인간의 집합적 주체 안에 담겨 있던 자아의 내용은 ‘인류’ 곧 생물종으로서의 인간을 크게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실제로 인간은 인간을 제외한 온생명의 나머지 부분을 ‘자연’이라 부르며 이를 오히려 인간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보아, 자연을 극복 혹은 활용해 인간의 자리를 넓혀 가는 것을 발전이라 여겨왔다. 하지만 이러한 자연은 인간과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이들이 합쳐 비로소 생명이 이루어지는 온생명의 한 부분이기에, 우리의 자아 또한 온생명에로까지 확장해 나가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이러한 상황을 ‘생명의 주체적 양상’이라고 할 ‘삶’과 연관시켜 생각해 보자. 우리에게 만일 주체가 없다면, 현상으로서 생명의 일부는 될 수 있으나 진정한 의미의 ‘삶’을 가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이 의식하는 ‘나’ 속에 어떠한 내용을 담느냐에 따라 어떠한 의미의 삶을 사느냐를 말할 수 있다. 낱생명으로의 ‘내 몸’을 ‘나’로 의식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이며 불가피한 것이지만, 여기에만 머문다면 가장 작은 ‘삶’ 곧 소인(小人)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인류’로서의 ‘나’까지 의식한다면 이는 전통적 윤리에 부합되는 ‘삶’ 곧 군자(君子)의 삶을 사는 것이 되고, 그 안에 온생명까지 담길 때에 비로소 대인(大人) 또는 성인(聖人)의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삶 가운데 어느 하나를 배타적으로 선택할 필요는 없다. 각각의 요소를 주체적으로 균형 있게 배합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배합을 얼마나 조화롭게 이루느냐 하는 것이 바로 삶의 지혜라 할 수 있다.

이제 온생명 관점에서 보는 이러한 ‘나’와 불교 경전에 나오는 ‘나’ 사이에 어떤 공통점과 또 차이점이 있는지 살펴보자. 불교 경전에서는 앞에서 보았듯이 ‘무아’와 ‘자아’를 말하는 과정에서 ‘나’의 성격을 다분히 역설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즉 무아를 강조하고 있으면서도 자아를 부정하지 않는 이중성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이 무아 사상이 가진 진정으로 중요한 면모가 바로 주체로서의 ‘나’를 부정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나’의 한 중요한 요소를 부정하는 데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무아 사상이 부정하는 진정으로 중요한 대상은 개체 생명으로서의 ‘나’, 좀 더 정확히는 개체 생명으로의 ‘나’를 전부로 여기는 그 생각 자체에 해당한다.

이를 온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진정한 생명은 오히려 온생명이며 낱생명은 그저 온생명을 바탕으로 하여 잠시 조건부적으로 머무는 것인데, 이를 생명의 전체로 보아 과도하게 집착할 경우 바른 삶을 살아내지 못할 뿐 아니라 수많은 고통과 재앙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중도로서 깨우침을 얻어 이 작은 ‘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것이 진정한 무아 사상의 본질이며, 이 점에서 경전의 가르침은 온생명을 진정한 생명 그리고 진정한 ‘나’로 생각하는 현대 과학의 관점과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온생명 관점에서는 온생명을 위주로 한 여러 단위에서의 ‘나’ 즉 동심원적으로 조화된 ‘나’의 의미를 긍정하고 이 안에서 삶의 뜻을 찾아 나가는 것을 정상이라고 보는 데에 반해, 불교 경전에서는 이 작은 ‘나’에 대한 집착을 벗어버리는 데에 가장 큰 비중을 둔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외형적인 차이일 뿐 그 본질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강조점을 온생명에 두고 이를 진정한 ‘나’라고 할 경우 자연히 낱생명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면서 이것이 초래하는 고통과 재앙에서 벗어날 것이고, 반대로 강조점을 무아(無我)에 두어 낱생명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게 하면 자연히 더 큰 의미의 삶 곧 온생명을 지향하는 삶으로 그 중심점을 옮겨 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경전에 나오는 붓다의 가르침은 온생명에 대한 어떤 직관적 깨달음에 바탕을 두고 그 실천적 내용을 설파한 것이라 보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맺는말

이상에서 우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 개념과 무아 개념이 현대 과학의 사상 안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반영되고 있음을 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현대 과학 안에 이러한 개념들이 반영된 것이 불교 사상의 영향에서가 아니라 과학 자체의 독자적 발전을 통해 이루어 낸 결과물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곧 중도의 방법 그리고 중도의 지혜라는 것이 종교의 영역에서뿐 아니라 과학의 영역에서도 진리를 깨우쳐 가는 근원적 방식임을 각각 독자적으로 입증해 내었음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아직도 주체적 삶을 위한 근원적 물음의 중요한 실마리가 경전의 오래된 가르침과 현대 과학의 새로운 조명을 통해 밝혀지리라는 생각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깨우침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몇몇 선각자들이 아무리 외쳐본들 쇠귀에 경 읽기밖에 되지 못한다. 결국은 다수의 사람이 자신의 눈으로 직접 이러한 깨우침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할 것인데,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위에 언급한 중도와 무아의 지혜라 할 수 있다. 이제 이 방법론의 신빙성을 불교에서뿐 아니라 과학에서 함께 입증함으로써 좀 더 많은 사람이 이 길로 들어서게 된다면 이는 곧 주체적 삶에 이를 하나의 확실한 방편이 될 것이다. ■

 

장회익 zm530@hanmail.net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루이지애나주립대학교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30여 년간 서울대학교 물리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대학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겸임교수로도 활동했다. 한성학원 이사장, 경희대학교 석좌교수 등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 《과학과 메타과학》 《삶과 온생명》 《물질, 생명, 인간》 《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등 다수가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불교와 과학, 그 멀고도 가까운 거리 / 장회익 - 불교평론

들어가는 말《네 발 위의 부처님(Der Buddha auf vier Pfoten)》(Dirk Grosser 지음)이란 책이 《우리가 알고 싶은 삶의 모든 답은 한 마리 개 안에 있다》는 제호로 번역되어 나온 바 있다. 이 책은 한 젊은

www.budrevie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