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 전체를 똘똘 뭉치면 ‘心’자 한자위에 서 있어서 이 한 자의 문제만 옳게 해결하면 일체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일체 만법을 다 통찰할 수 있다. (성철스님)
중도철학과 원자론
- 찰라생멸하는 무수한 미립자 본성 없어 -
- 중도철학은 양극단을 포섭한 空의 세계 -
데모크리토스 이래 서구의 원자론은 물질의 궁극적인 요소를 탐구하고자하는 것이었고, 더 이상 분해될 수 없는 이 물질의 궁극적인 요소를 원자라고 불렀다. 물질의 구성 요소로서의 원자에 대한 초보적인 이해는 주기율표가 완성되면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접하는 물질은 종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해 보이지만, 이를 구성하는 원자는 1백여 종 밖에 안된다는 점이 밝혀졌다.
이 원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분자를 이루고, 무수히 많은 수의 분자들이 모여 우리가 보고 만지는 물질 즉 거시세계를 이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주기율표를 완성시키기는 하였으나, 그때 까지 원자 자체의 구조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그 이후 원자 구조를 탐구하면서,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구성되어 있고 원자핵은 다시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로써 원자론이 본래 의미하였던 바와는 달리, 원자는 물질의 궁극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점이 밝혀졌다. 우선 이 원자의 구조에 대하여 잠시 알아보도록 하자. 가장 간단한 구조의 원자는 수소 원자이다. 수소 원자는 하나의 양성자가 원자핵을 이루고, 그 주위를 전자가 돌고 있다. 양성자나 중성자의 질량은 전자 질량의 1천8백배 가량이므로 원자의 질량은 거의 대부분 양성자의 질량이다. 따라서 수소 원자의 경우 원자핵의 질량은 전자 질량의 1천8백배 가량이 되며, 다른 원자의 경우 이는 대부분 전자 질량의 3천6백배 이상이다. 그러나 원자핵의 반지름이 10-15 m 정도이고 수소 원자의 반지름은 5×10-11m정도이니 그들이 차지하는 공간적 부피는 그들의 질량과는 오히려 반대이다. 워낙 작은 숫자들이니 이해를 돕기 위하여 양성자를 반지름이 1Cm 정도인 구슬로 부풀린다고 하자.
그러면 수소 원자의 반지름은 5백m정도이다. 이 모형에 의하면 원자 질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원자핵은 반지름 1Cm인 구의 작은 공간 안에 존재하지만, 원자 질량의 1/1,800 밖에 안되는 전자는 반지름 5백m의 구가 차지하는 삼차원 공간을 도는 것이 된다. 더우기 이 두 구가 차지하는 부피의 비는 1:125,000,000,000,000정도이다. 가령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자들의 전자를 다 떼어내고 원자핵 만으로 뭉쳐 놓는다면, 반지름이 0.01mm 쯤 되는 구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앞에 놓여있는 어떤 물체를 보고 있다 하더라도, 사실 그 물체의 질량의 대부분은 100조분의 1이라는 작은 공간에 몰려 있을 뿐이고, 그 나머지 부분은 거의 텅빈 공간일 뿐이다. 우리는 사실 그 텅빈 공간을 보고, 만지고, 맛보고, 돌고 하면서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고 하고, 매끄럽다거나 거칠다고 하고, 맛있다거나 맛없다고 하며 깨끗하다거나 더럽다고 한다.
20세가 초의 과학자 일부는 원자의 구조를 알고 나서 자연의 궁극적인 모든 구조가 밝혀졌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탐구의 시작이었다. 원자핵이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이것 역시 궁극적인 물질은 아니었다. 이 양성자와 중성자는 다시 수없이 많은 미립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 미립자들의 수명은 불과 10-23 초에 불과하니, 순식간에 이어지는 생과 멸은 분자 그대로의 생과 멸이 아니다. 생과 멸 서로가 서로에 대해 동인(動因)으로 존재한다. 생과 멸이 동시적으로 공존하며, 역동적으로 결합하여 있다.
바로 생즉멸이요 멸즉생의 세계이다. 이러한 존재 양식은 생이나 멸 그 어느 것으로도 온전히 표현될 수는 없으니, 이를 일러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월정(月正)스님이 불생불멸의 멸이 찰라멸이라고 해석한 것은 현대물리학의 관점과 연관된다 하겠다.
이처럼 순간에 생하고 멸하는 이 미립자들이 고정된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자성을 가지지 않는 무수한 미립자들이 관계의 틀 속에서 양성자와 중성자를 형성하니, 이것이 곧 연기요 공이다. 우리 앞에 나타나지만 그 모든 것이 오직 연기일 뿐이니 공이요, 공이지만 연기에 의해 우리 앞에 현현하니 그것이 색이다, 그러므로 연기무자성공(緣起無自性空)혹은 색성공(色性空)이라 한다.
불생불멸만이 아니라 용수보살이 설한 팔불중도(八不中道)의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불거불래(不去不來), 그리고 반야심경의 불구부정이나 부증불감 모두는 어느 한 극단이 아닌 중도의 철학을 나타낸 것이다. 성철스님은 이 양극단을 떠나 중도를 행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이라 하였다.
이때의 중도란 양극단의 중간쯤에 위치한 어떤 것이 아니라 양극단을 여의면서도 양극단을 포섭하는 것이어서 공가중(空假中)의 삼제가 원융하니 천태의 기본교의와 연관된다. 또한 양극단을 여윈 중도의 깊은 이치는 생이나 멸등의 양극단의 문자가 의미하는 바에 의해서는 나타내질 수 없으니 언어나 문자, 관념의 한계가 발생하게 되며, 이는 승의제와 세속제나 선불교에서의 언어도단(言語道斷)과 연관된다. 더구나 현대물리학에서의 원자는 미립자의 기본 단위들을 그저 단순히 쌓아놓은 것이 아니라 미립자 상호간의 관계의 종합으로 파악해야만 하는 것이므로, 서로가 걸림없이 무한히 이어지는 중중무진 법계연기(重重無塵 法界緣起)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겠다.
양형진<고려대 교수·물리학과>
<현대불교미디어센터 ⓒ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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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즉시공
- 허공중의 에너지 인연으로 물체 드러내 -
- 색의 본 바탕은 생멸하지 않는 공의 세계 -
반야심경의 너무도 잘 알려진 구절이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색이 즉 공이고 공이 즉 색임을 설명하고 색과 공이 다르지 않음을 보이고자 한다. 굳이 색즉시공의 주어를 색이라고 본다면 색이 곧 공이라는 말은 우리 눈 앞에는 색이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나타난다 하더라도 이는 사대(사물의 제 요소)가 화합하여 인연따라 잠시 나타난다는 것으로서 자성으로서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니 연기무자성공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하겠다.
굳이 공즉시색의 주어를 공이라고 본다면 공이 곧 색이라는 말은 공이 허무단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색의 세계가 이 공으로 부터 현현하니 색의 무한한 가능성을 공이 내포하고 있다는 것으로서 진공묘유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하겠다.
진공묘유에서 설명하였듯이 색은 마치 잔잔한 바다에 바람이라는 인연이 닿아 생겨난 파도와 같은 것이다. 지금 당장은 파도라는 물 덩어리가 표면 위에 솟아 있지만 그 파도의 본성은 오직 바닷물일 뿐이니 바람이라는 인연이 다하면 바다라는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다.
더우기 그 파도 자체가 바다이다. 그러므로 우리 눈 앞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 본성은 공한 것이기 때문에 색즉시공이 된다. 자성이 없는 것이 연기에 의해 잠시 나타나는 것이므로 공이라고 하는 것이다.
현대 물리학이 기술하는 물질관이 정확하게 이 파도와 바닷물의 비유와 같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에너지는 물질과 같다. 이는 유명한 E=mc2 이라는 공식으로 표현된다. 물체의 질량은 (색 혹은 파도는) 에너지로 (색으로서의 가능태로) 바뀔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이 에너지는 허공에(공 혹은 바다에) 퍼져 있게 된다.
이 에너지가 어떤 좁은 공간으로 결집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물체이다.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물체가 (색이나 파도는) 어떤 상황이 되면 (색이나 파도의 인연이 다하면)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에너지로 변하게 된다 (공 혹은 바다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러한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것이 허공이다. 또 이 에너지가 어떤 상황이 되면 (사대의 인연이 화합하면) 물체(색 혹은 파도)가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물체란 에너지가 결집된 것 이상이 아니어서 색의 바탕은 공이지만, 색을 떠나서 공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허공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가 충만한 것이어서, 그 본성은 단멸공이 아니라 무한히 현현하는 색의 가능태이므로 색을 떠나서 공이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색을 떠나서 공이 존재하지 못하고 공을 떠나서 색이 존재하지 못하니, 이를 색체가 곧 공이요 공체가 곧 색이라 한다(色體卽空 空體卽色).
이를 다시 말하면 색성공(色性空)이다. 색성공이나 색체즉공, 색즉시공의 의미는 색이 멸하고 나서 공이 생겨난다는 것이 아니라, 색의 성품 혹은 색의 본 바탕이 공이라는 것이다. 파도가 곧 바다요 물체가 곧 에너지가 충만한 허공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색과 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이를 유마경에서는 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고 이른다.
대품반야(大品般若) 봉발품(奉鉢品)에서 부처님은 사리불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공 가운데에는 색도 없고 수상행식도 없으며 색을 여의고 공이 없고 수상행식을 여의고 공이 없다.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며, 수상행식이 공이고 공이 수상행식이다. …모든 존재의 참 성품은 생멸하지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다.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생멸을 보지 않고 더러움과 깨끗함을 보지 않으며 행한다.
왜냐하면 이름이란 인연의 화합으로 된 것이어서 단지 분별과 생각으로 거짓되게 이름을 붙인 때문이며, 이 때문에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일체의 이름을 보지 않고, 보지 않기 때문에 집착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사량 분별에 의한 일체의 이원론을 넘어서서 불이의 관점으로 세계를 관하는 불교적 세계관의 장쾌한 모습을 보게 되며, 이는 또한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가 하는 실천의 문제와 연결된다는것을 알게 된다.
양형진 <고려대 교수·물리학과>
<현대불교미디어센터 ⓒ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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