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종하처래(生從何處來) 사향하처거(死向何處去)>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공수래공수거시인생(空手來空手去是人生)
생종하처래生(生從何處來) 사향하처거(死向何處去)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부운자체본무실(浮雲自體本無實) 생사거래역여연(生死去來亦如然)
독유일물상독로(獨有一物常獨露) 담연불수어생사(湛然不隨於生死)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인 것을.
태어남은 어디서 오며 죽음은 어디로 가는가?
태어남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이 사라지는 것인데,
뜬구름이 본래 실체가 없듯 삶과 죽음도 실체 없기는 마찬가지라.
한 물건이 항상 홀로 이슬처럼 드러나 담담히 생사(生死)에 걸림 없어라.」
항간에서는 위 시의 작자를 고려 말의 나옹 혜근(懶翁 惠勤, 1320∼1376)이라고도 하고, 함허 기화(涵虛 己和, 1376~1433)라고도 하며, 혹은 조선 중기의 서산대사 청허 휴정(淸虛 休靜, 1520~1604), 조선 후기의 백파 긍선(白坡 亘璇 : 1767~1852)이라 하는가 하면, 심지어 중국의 소동파(蘇東坡)라고도 한다.
그러나 고려 말의 나옹화상(懶翁和尙)의 누님이 지은 <부운(浮雲―뜬 구름)>이라는 시에서 유래했다고 하는 말이 가장 근사하다.
고려 공민왕 때 왕사(王師)를 지냈던 나옹화상(懶翁和尙)의 누님이 동생인 나옹에게 염불을 배우고 나서 스스로 읊었다는 <부운(浮雲)>이라는 빼어난 선시(禪詩)라고 한다.
나옹의 누님은 동생을 위해 늘 손수 음식을 만들어 암자로 찾아와 함께 공양을 들며 혈육의 정을 나누곤 돌아갔다. 그런 누님에게 나옹은 경전도 읽고 염불도 배워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청했으나 누님이 말하기를,
“자네가 이미 득도하여 높은 경지에 있으니 자네의 누나인 나는 공부를 안 해도 저절로 득도한 게 되는데, 내가 왜 새삼스럽게 공부를 할 것인가”라고 하며, 불법 닦기를 게을리 했단다.
어느 날 누님이 맛깔스럽게 음식을 만들어 나옹을 찾아왔더니 그때 나옹은 점심공양을 혼자 들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나옹의 태도에 누나는 내심 괴이한 생각이 들었지만 나옹이 공양을 끝내기를 기다린 후에 물었다.
누님 : 누나도 배가 고픈데 왜 자네는 같이 먹자는 말도 없이 혼자만 드시는가?
나옹 : 누님 동생인 내가 배가 부르면 누님은 안 자셔도 저절로 배가 부르는 게 아니오?
이러한 나옹의 당기일구(堂機一句)에 홀연 깨달은 누님은 그 후 마음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고 지극 정성을 다해 마침내 득도하게 됐다고 한다. 그런 누나가 득도 후 지은 선시라고 한다.
처음 두 구절은, 삶은 일어났다가 스러지는 뜬구름과도 같고, 뜬구름처럼 생과 사는 실체가 없다. 인연에 따라 왔다가 사라지는 것, 이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엄연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살아있는 나’가 고정된 실체인 것처럼 착각하고 집착한다. 그래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에 집착하고 남을 차별하니, 삶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뒤의 두 구절은, 이러한 존재의 현실을 받아들인 불교적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생과 사, 나와 남의 차별과 집착이 없는 경지를 표현한 것인데, 다시 말해 내 머릿속 관념일 뿐인 이분법적 차별이 없는 불이(不二)의 경지, 생과 사, 나와 남의 차별이 없는 일물(一物)의 경지를 표현한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경지에 오르면, 내 삶에는 초연해지고, 남의 삶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중생이 아프면 부처도 아프다고 했듯이 말이다.
헌데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답하되, 그것이 유교적 답변이든, 도교적 답변이든, 기독교적 답변이든, 또 다른 답변이든, 모두 좋다. 질문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우리 각각의 삶이 더 깊고 다채로워진다면, 우리 사회도 더 다채롭고 풍요로워질 것이다. 내 종교라는 울타리를 넘어 진솔한 삶을 산다면 그것이 그 종교의 진리에 다가가는 것이 되리라.
헌데 또 다른 일화가 있다.
조선 후기 유랑시인으로 유명했던 김병연(金炳淵, 1807~1863), 김삿갓에 관련된 이야기이다.
김삿갓이 유랑을 하다 어느 대감 집에 들었는데, 때 마침 점심 시각이었다.
손님을 마주하고 앉은 대감에게 하인이 와서 ‘인량복일 하리까’ 묻는다.
대감은 잠시 헛기침을 하고는 ‘월월산산 하거든’이라고 했다.
김삿갓은 두 사람의 하는 수작이 재미있어서 한마디 붙이는데, ‘정구죽천에 녹자화중이로다’라고 하니,
대감은 얼른 사과를 하고 점심상을 겸상으로 내오게 했다.
대감과 하인의 수작에 인량복일(人良卜一)이라는 말은 사람 인(人) 밑에 어질 량(良)자가 들어가 밥 먹을 식(食)자가 되고, 복일(卜一)은 합하면 윗 상(上)자가 되니, ‘점심 식사를 올릴까요’ 하는 말이 된다.
대감은 재물이 아깝고, 과객이 하찮아 보였던지 김삿갓에게 점심 주고픈 마음이 없어 월월산산(月月山山)이라 하니, 이는 달이 둘이 합해 벗 붕(朋이) 되고, 산이 둘이 합해 날 출(出)자가 되니, ‘벗이 떠나거든 내오라’ 하는 말이 된다.
천하에 김삿갓이 대감이 그런다고 점심을 못 해결한다면 삿갓을 벗어야 할 일, 두 사람의 수작을 보다가 한 말이 정구죽천(丁口竹天)이라 한 것은 정구(丁口)를 합하면 가(可)자가 되고, 죽(竹)과 천(天)자를 합하면 웃을 소(笑)자가 되니, 두 사람이 노는 수작이 가소롭다는 말이다.
거기에 한마디 덧붙인 녹자화중(鹿者禾重)은 녹(鹿)과 자(者)를 합하면 돼지 저(猪)자가 되고, 화(禾)와 중(重)을 합하면 씨 종(種)자가 되니, ‘가소롭구나 돼지의 종자들이여’ 하고 비웃는 모습이 되니, 괜하게 공자 앞에 문자 써서 축객을 하려다가 잘못해 지체 높은 대감이 돼지의 종자로 한순간에 전락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대감은 체면불구하고 점심상을 잘 차려내 김삿갓을 대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객에게 밥 한 그릇 나눔을 아끼던 대감이 죽으면서 아들에게는 정작 한마디 말을 못하고 “기~ 기~” 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기~’라는 말은 기둥 밑을 파 보라는 말인데, 저승사자의 재촉에 미처 말 못하고 죽었으니, 재물에 집착이 심했던 대감은 자기가 숨겨 놓은 재물을 지키겠다고 그 집의 강아지로 태어났다고 한다.
얼마 후 스님이 오셔서 아들과 같이 재(齋) 지낼 일을 상의하는데, 강아지가 아들의 바지춤을 물고 자꾸 끌어당기다가, 기둥으로 가서 밑을 자꾸 파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아들이 의아해 하자, 스님은 그 기둥 밑을 한번 파 보시오 하는지라, 파보니 대감이 그동안 뭉쳐 놓은 막대한 재산이 들어있었다.
사십구재 천도재(薦度齋)를 지내는 날 스님은 강아지를 앉혀 놓고 말했다.
“그대가 평소에 자기 재산 늘리기에만 급급하고, 자기 잘난 줄만 알고 남들 훌륭한 점은 모르면서 잘 난 체, 아는 체, 최고인 체 하는 세 가지 체병에 걸렸다가 죽으니 어디 바로 갈길 몰라 축생으로 태어났다.
생종하처래生(生從何處來)요, 사향하처거(死向何處去)라.
오고 가는 도리를 모르고 탐심 진심 어리석음으로 많은 재산을 모았다가 이 같은 결과가 난 것임을 지금이라도 바로 알아듣고 무엇이 바로 사는 길인가를 생각하다가 이 축생의 몸을 벗으면 불도를 잘 익혀 해탈의 길로 가도록 하라.” 하고 일러주니, 강아지는 그 몸을 벗더라는 이야기이다.
너무 인색하지 말고 너그럽고 넉넉한 마음으로 베풀며 살아야 복된 삶, 아름다운 사회가 될 것이라는 가르침의 일화인 것 같다.
갓 태어난 아이는 손을 꽉 움켜쥐고 있지만 늙어서 죽을 때는 손을 편다고 한다.
태어나는 인간은 이 세상의 모든 걸 움켜잡으려 하기 때문이고, 죽을 때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아무 것도 지니지 않은 채 떠난다는 의미이다.
빈손으로 태어나 빈손으로 돌아가는 인생, 어차피 모든 걸 다 버리고 떠날 삶이라면 베푸는 삶이 되면 얼마나 훈훈할까. 우리 모두 부처님 가르침을 되새겨보자.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마신(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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