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진인(無位眞人)과 무위진인(無爲眞人)
백제의 미소(관음상)
‘무위진인(無位眞人)’은 무의도인(無依道人)과 같은 말이다.
‘무위진인(無位眞人)’과 ‘무의도인(無依道人)’ 모두 임제(臨濟義玄, ?~867) 선사의 <임제록(臨濟錄)>에 나오는 말로서 어떤 틀에도 구속되지 않고 모든 범주를 초월한 자유인, 해탈을 이룬 사람, 깨달음을 얻은 참사람, 세상 잡사에 물들지 않고 구애 받지 않은 자유인을 일컫는다.
그리고 무위진인(無爲眞人)은 원래 도가(道家)에 이르는 말로서 격의불교(格義佛敎) 당시 불교에서 차입해 사용하기도 했고, 근래에 원불교 측에서 자주 사용하는 것 같다.
두 단어가 발음도 비슷하고 개념도 비슷하지만 엄연히 다르므로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무위(無位)는 ‘지위 없음’이고, 무위(無爲)는 ‘함이 없음’이다.
이렇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임제 선사의 무위진인(無位眞人)을 설명하면서도 무위진인(無爲眞人)이라고 오기 하는 경우가 매우 많아서 혼란스럽게 한다.
따라서 두 단어의 차이를 명확히 해야 할 것 같다.
1. 무위진인(無位眞人)
어느 날 임제 선사가 설법을 함에,
『上堂云, 赤肉團上에 有一無位眞人하야 常從汝等諸人面門出入하나니 未證據者는 看看하라 時有僧出問, 如何是無位眞人고 師下禪牀把住云, 道道하라 其僧擬議한대 師托開云, 無位眞人이 是什麽乾屎橛고하시고 便歸方丈하다.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적육단(赤肉團―붉은 살덩어리)에 한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있다. 항상 그대들의 얼굴을 통해서 출입한다. 아직 증거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잘 살펴봐라.”
그때에 한 스님이 나와서 물었다.
“어떤 것이 무위진인(無位眞人)입니까?”
임제 선사가 법상에서 내려와서 그의 멱살을 꽉 움켜잡고,
“말해 봐라. 어떤 것이 무위진인가.”
그 스님이 머뭇거리자 임제 선사는 그를 밀쳐버리며 말했다.
“무위진인은 무슨 개뿔, 마른 똥 막대기 같으니라고!" 하시고는 곧 방장실로 돌아가 버렸다.』
질문하고 있는 ‘너’가 바로 무위진인이고 무위진인이어야 하는데, 그런 걸 물어보니, 너 같은 게 알 리 없지, 개뿔 똥 막대기 같은 놈! 하고 방장실로 가버린 것이다.
도를 닦은 마음이 뛰어나서 남녀의 구분을 초월한 사람, 성속의 구별을 초월한 사람, 인연과 업보를 떠난 사람이어서 지위를 매길 수 없을 만큼의 위치에 오른 당체, 참된 인간, 즉 무위(無位―자리/지위 없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왜 자리가 없는가. 그 사람을 어떻게 경계 지을 수 없고, 어떤 모습으로도 그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적육단’은 인간의 육체, 살덩어리를 말하는데, 특히 심장을 말하고, ‘일무위의 진인(一無位眞人)’이란 부처, 불심, 불성을 말한다.
‘진인(眞人)’은 장자(莊子)가 이상으로 삼았던,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완전히 자유로운 경지에 있는 해탈인과 같은 말이다.
인간사회에는 불범(佛凡-성자와 범부), 현우(賢愚), 귀천(貴賤), 미오(迷悟) 등의 차별이 있다. 그러나 ‘무위(無位)’란 이런 잘나고 못남, 똑똑하고 미련함, 귀하고 천함의 차별이 전혀 없이 모두가 평등한 경지를 말한다. 그런 무위의 진인이므로 그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사로잡히지 않는 절대의 경지에 있는 존재, 곧 부처(불성)이다.
사람의 몸속에는 그런 불성이 들어있으며, 늘 인간과 함께 살고 있다. 그런 것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사람의 참다운 모습은 세속적인 지위나 명예 따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6조 혜능(慧能, 638~713) 대사 때까지만 해도 주로 양자강 이남에 머물던 선종(禪宗)은 ‘끽다거(喫茶去)’로 유명한 조주(趙州從諗, 778~897) 선사와 ‘참사람[무위진인(無位眞人)]’을 외친 임제(臨濟) 선사의 선풍에 의해 하북에도 널리 퍼지게 됐다.
헌데 무위진인(無位眞人)은 문자나 이론으로 이해되는 경지를 넘어선 말이다. 수행하고 증득하는 것도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무위진인은 이 육신을 근거로 해서 존재한다. 그리고 무위진인은 사람의 얼굴을 통해서 출입하는 모습이 분명하고 확실하건만,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하면서. 또 손과 발을 통해서도 출입하건만 스스로는 잘 알지 못한다.
남녀노소와 동서남북과 재산이 있고 없고, 지위가 높고 낮은 것에 아무런 차별 없이 동등하게 존재한다. 여기에 차별이 있으면 가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스님이 말귀도 못 알아듣고 “무위진인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은 것이다. 자신이 무위진인이면서 달리 무위진인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임제 선사가 “(너 자신이 무위진인 것도 모르고)어떤 것이 무위진인이냐고 물은 것이냐, 어디 한 번 대답해 봐라.” 하고 다그쳤다. 그러나 알 턱이 없고 대답할 수 있을 리 없다. 가만히 있으니까. 똥 막대기 같은 놈, 너 같은 놈이 무위진인을 알 턱이 없지 하고, 방장실로 들어 가버린 것이다.
무위진인은 남의 길을 가지 않고 자기 자신의 길을 간다. 인간은 대개 무엇엔가 의지하고 집착하는데, 무위진인은 자기의 본래마음 이외에는 그 어떠한 것에도 의지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자유해탈을 얻은 사람을 말한다. 즉,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고 꺼들리지 않은 사람, 어디에도 의존함이 없는,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당당한 참사람을 일컫는다. 무위진인, 무의도인은 법부도, 성인도, 중생도, 부처도 아닌 절대자유의 주체를 말하는 것이다.
헌데 선종사를 되돌아볼 때, 대체로 마조(馬祖道一, 709∼788) 선사에 와서는 즉심즉불(卽心卽佛),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 말해서 성(性)보다 작용의 뜻이 있는 ‘심(心)’ 자를 많이 사용했다. 그리하여 백장(百丈懷海, 749-814), 황벽(黃壁希運, ?~850) 선사에 이르기까지 ‘심(心)’ 자를 많이 사용했다.
그러나 임제(臨濟) 선사 때에 이르러서 ‘인(人)’자를 많이 사용하게 됐으니, ‘인(人)’ 자는 성(性)과 심(心)보다 구체적이고 행동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임제 선사는 무위진인(無位眞人), 무의도인(無依道人), 무사인(無事人), 청법저인(聽法底人), 승경저인(乘境底人) 등을 말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보통으로 말하는 흔한 그런 인간과 같은 것은 아니다.
사람은 본래 항상 스스로 일어설 수 있고, 스스로를 의지해 당당히 나아갈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잡다한 것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부모에 의지하고, 자식에 의지하고, 처와 남편에 의지하고, 재물에 의지하고, 명예에 의지하고, 직위에 의지하고, 직장에 의지하고, 하다가 종교에 의지하고, 심지어 출신지에 의지하고, 나라에 의지하고… .
도대체 사람들은 무엇인가 의지할 것이 없으면 불안해진다. 의지하던 것이 없어지면 한동안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것은 청정한 자성(自性)에는 없던 병이 생긴 것이다.
차별 없는 참 사람이, 나의 면전을 통해서 출입한다. 왜 나는 보지 못하는가. 죽지도 아니하고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파랗지도 아니하고 하얗지도 아니하고 늙지도 아니하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 그 불생불멸의 참사람은 어디 있는가? 무위진인(無位眞人)은 바로 그런 ‘참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부처님은 출가하면 철저히 아무것도 갖지 말라고 하셨다. 비구는 6물만 가지라고 하셨다. 즉 발우, 좌복(깔게), 물병, 대가사(큰옷-이불대용), 중가사(춘추용), 소가사(여름용), 거기다가 주장자 하나를 더 들고 다니도록 했다.
그래서 초심자는 불교에 입문 순간부터 버리기 시작한다. 부모자식간의 정을 버리고, 애정을 버리고, 명예도 버리고, 재물도 버리고, 가진 걸 다 버리고, 오직 자비심만 남겨둔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으니 자유스럽고,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죽음이 와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 작은 ‘나’는 사라지고 거대한 ‘나’만 존재한다. 아무 것도 없으니 의지할 것도 없다. 그래서 참나, 무의도인(無依道人)이 되는 거다.
임제 선사가 ‘사람’을 설명하는 데에서, 가장 즐겨 쓰는 말이 ‘무의도인(無依道人)’이었다. ‘무의도인’이라는 말은 어느 곳에도 의지하지 않는 독립적인 ‘사람’을 가리킨다. 그것은 모든 경계를 조정하고 나타내는(뛰어넘는) ‘사람’의 속성을 이야기한다. 임제 선사는 바로 이 속성을 ‘승경(乘境)’, 즉 ‘경계(境界)를 탄다’라는 개념을 사용해서 표현했다.
임제 선사가 ‘무의도인(無依道人)’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황벽 선사는 ‘무의무주(無依無住-의지할 바 없으며 머무를 바도 없다)’라고 했다. 또 영가 현각(永嘉玄覺) 선사는 “무위절학(無爲絶學)의 한도인(閑道人)”이라 했다.
그밖에 선가의 ‘참된 주인’이며, 자성천진불(自性天眞佛)이며, 자성불(自性佛)이며, 명백리인(明白裡人-해탈자) 등이 모두 동어동의(同語同義)이다. 이와 같이 진인은 여러 가지로 표현되나 그 의미는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무애한 경지에 있는 진정한 해탈인을 가리는 것이다.
※무위절학(無爲絶學)---무위(無爲)의 진리를 깨쳐 지식이나 학문을 더 배울 것이 없는 경지. 무위의 진리를 깨친 사람에게는 언어문자는 군더더기 같은 것일 뿐 아무런 소용이 없다. ‘무위(無爲)의 진리’란 모든 분별 망상을 여읜 부처님 법, 절대 진리를 말한다. 절학(絶學)은 도덕경에 나오는 말로 배움을 끊어버린다는 말이다. 지식 같은 것을 멀리한다는 뜻이다.
무위진인이므로 그 어떤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절대경지에 있는 각자(覺者-부처)이다. 인간의 육체에는 해탈인으로서의 부처가 내재해 있어서 항상 인간과 동거하며 생활을 함께 한다. 중생은 그 내존불(內存佛)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임제 선사는 ‘보라!’고 간절하게 말했던 것이다. 항상 자기를 자주 응시하고 내재해 있는 진인(부처), 참사람을 만나야 한다. 무위진인이라는 주체성이 자각되고 확립돼야 한다.
그러나 참사람(眞人)은 보통의 현실에 외재하는 것은 아니다. 참사람은 바로 현금에 주체가 돼있는 절대 현재(現在)를 말한다. 그래서 임제 선사는 어디서든지 주인이 되라고 했다(隨處作主). 항상 서있는 자리, 현실에서 진실하라(立處皆眞)고 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 지금 있는 그곳이 바로 진리(깨달음)의 세계이니, 자기가 처한 곳에서 주체성을 갖고 전심전력을 다하면 어디서나 참된 것이지 헛된 것은 없다는 말이다.
‘수처작주(隨處作主)’란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는 뜻이다. ‘수처(隨處)’란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환경이고 삶터이며, ‘작주(作主)’란 인생의 주인공이 돼 주체적으로 살라는 뜻이다. 처하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는 말씀처럼, 모든 사람들 각자가 제 자리에서 자기 일을 묵묵히 잘 해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입처개진(立處皆眞)이란 지금 네가 서 있는 그 곳이 모두 진리의 자리라는 뜻이다. 모든 문제의 해결법은 멀리 있지 않다. 즉, 네가 서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이 풀어진다고 했다. 한마음 돌이키면 그 자리 모두가 진리인 것이다.
비슷한 말에 “입처즉진(立處卽眞)”이란 말이 있다. 마조(馬祖) 선사의 말씀인데, “서 있는 곳이 곧 진리이다”는 말이다.
따라서 수처작주(隨處作主)라 어떤 경우에도, 어디를 가든지 그곳에서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그 곳이 곧 참된 곳, 진실한 곳이라(立處皆眞)이란 는 뜻이다. 여기서 주인은 현재 인식되는 ‘나’라고 할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뜻한다. 그러므로 스스로 부처가 되면, 혹은 스스로가 부처임을 알게 되면, 그곳이 바로 깨달음의 세계이고 정토이이며 극락이고 열반의 세계라는 말이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잃어버리지 말고 상황에 꺼들리지 말고, 주체적 인간으로 살면 무엇을 하든 그 하는 일과 그 있는 자리가 모두 진실한 진리의 삶이다. 상황과 처지에 끌려 다니면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말고, 상황과 처지의 주체적 역할을 하라. 어떤 일도 주체적 역할을 할 때 그 일은 곧 온전한 내 일이고, 온전한 나의 삶이다.
2. 무위진인(無爲眞人)
노자와 장자는 무위진인(無爲眞人)에 대해 무위진인이란 인위적인 것을 덜고 덜어서 지음이 없고, 할 일도 없는 자연 그대로의 하나를 이룬 자유인을 말한다고 했다.
마치 고삐에 끌려 다니는 소가 인위적인 삶의 사람이라면, 고삐 없이 네발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배고프면 풀 뜯어먹고 목이 마르면 물 마시는 걸림 없는 자유의 소를 무위의 삶을 사는 참사람(眞人)으로 설명을 한다.
이러한 도교의 무위진인(無爲眞人)을 불교가 처음 중국에 전래될 당시 격의불교(格義佛敎)라 해서 비슷한 중국 전통의 용어를 차용해서 사용했는데, 그 당시 불교에서는 무위진인(無爲眞人)을 차용해서 인간의 욕망과 고뇌를 떠난 사람을 말했다.
도교의 무위진인(無爲眞人)은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과 윤리도덕을 그 바탕을 두고 있다.
① 맺고 풀지 말라(속박이나 집착에서 벗어나라) : 막결탈야(莫結脫也)
② 늘 한가운데 자리 할 때 그 마음을 비우고 겸손하라 : 중허기심(中虛其心)
③ 세상의 이치는 음양의 조화로움에서 기인한다 : 도소화음양(道消化陰陽)
①번은 노자와 장자가 무위진인(無爲眞人)을 말한 것이다. “인위적인 것을 덜고 덜어서 지음이 없고 할일도 없는 자연 그대로의 하나를 이룬 자유인을 말한다.”라고 했다.
요즘 말로 하면,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스스로를 잘 아는 사람을 말한다.
인간은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어딘가에 집착하지만, 의존과 집착의 초월함이 곧 무위진인(無爲眞人)이다.
남도 인정하는 사람, 자기 일을 통해 새로워지는 공의로운 사람을 이른다.
②번 중허기심(中虛其心)은 늘 남보다 잘 살고 있을 때 배려하고 겸손하라는 교훈이다.
무엇이든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공자의 말씀처럼 어떤 위치에 있던 겸허한 마음을 가지라는 의미이다.
③번 음양(陰陽)의 조화란 우리가 아는 이성적인 말이 아니라 서로 대립되는 모든 관계를 이른다.
해와 달, 낮과 밤, 남과 여, 물과 불, 현실과 이상, 불행과 행복 등, 이는 모든 관계가 좋고 나쁨의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라 음과 양이 그렇듯 서로 보완과 순환의 고리로 연결돼있음을 알려준다.
안다는 것(知)은 대립 관계의 두 현상을 나누어 보는 것을 말함이다.
이는 상당히 편협된 사고를 가질 수가 있다.
두 사물의 이치(理致)를 판별하는 지력(智力) 음양의 조화로움에서 분명히 의심(疑心)할 것이 없이 들어다 보는 것을 명(明)이라 하며, 음양의 조화로움을 말한다.
또한 자연이연(自然而然), 즉 “스스로 그러하여 그러함“, 스스로 이와 같음(自己如此), 외부의 힘이나 인위적인 방법이 아닌 사물 본연의 모습 그대로라는 자연에 대한 개념을 말한다.
요컨대 도(道)가 만물에 내재되어 각 개체로 드러난 것이 덕(德)이므로, 도(道)는 덕(德)의 근본이 된다.
만물이 생겨나는 원인이 도(道)이고 이후에 덕(德)으로써 길러진다.
덕(德)이 도(道)에 완전히 일치하기 위해서는 ‘최상의 덕(德)’을 실현해야하고 이를 위해서 무(無)를 실천해야한다.
무(無)의 실천이 무위(無爲)인데, 무위(無爲)는 행위에 있어서 사태나 사물의 본성에 맡겨서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객관적인 질서에 따르는 이상적인 행위가 바로 무위(無爲)라 할 수 있다.
결국 인간의 최상의 행위는 무위(無爲)이고 최상의 상태가 자연(自然)이다. 즉 인류사회는 보편성과 절대성을 지닌 자연의 도(道)를 법칙으로 삼고 이것에 의해 지배되고 작용되므로, “스스로 그러함(自然)”의 과정으로 설명된다.
도법자연(道法自然)을 통하여 도(道)는 ‘스스로 그러함’이고 도(道)가 만물과 만사의 본질로서 모든 것에 적용되는 최고 준칙이므로 인간이 이 원칙을 깨닫고 따라야함을 강조한 것이다. 즉, 하늘의 뜻(天理)인 양심과 본성에 충실히 따르는 것이 곧 우주와 자연의 본질에 합치되는 삶이며, 인생이 된다.
도덕경 29장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는데, 나는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음을 볼 뿐이다. ~ 중략~
어떤 것은 강하지만 또 어떤 것은 유약하다. 솟아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무너지는 것도 있다. 이 때문에 성인은 극단적으로 하거나 사치하거나 지나치게 하지를 않는다.
노자가 보기에 세상에는 앞서는 것, 따뜻한 온기로 감싸주는 것, 강한 것, 그리고 안정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되는 뒤따르는 것, 찬 기운을 내뿜는 것, 유약한 것, 무너지는 것이 함께 있다. 이 세상은 반대되는 대립 항들이 서로 존재 근거를 나누어 가지면서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도덕경 제43장
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을 대표하는 것은 물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견강한 것을 부린다. 형태가 없는 것은 틈이 없는 곳으로도 들어간다. 이런 이치로 무위(無爲)가 얼마나 유익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불언(不言)으로 하는 가르침이 얼마나 효과가 있고, 무위(無爲)가 얼마나 유익한지, 세상에 아는 이가 거의 없구나.
노자에게 가장 위대하고 가장 큰 능력을 가진 것은 도(道)이고, 이 도가 작용하는 모습은 부드럽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을 대표하는 것에는 물이 있다. 물은 낮고 더러운 곳으로 흐르고, 억지로 길을 내지 않으며, 일정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고, 모든 곳에 골고루 퍼진다. 부드러운 것이 강하고 굳센 것을 이긴다고 하는 노자의 사상은 <도덕경>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천하의 지극히 부드러운 것 그것은 물(水)이다. 물은 굳고 단단한 것을 마음대로 부린다. 즉 물과 같은 지극한 부드러움은 아무리 견고한 장애물이 막고 있다 할지라고 마을 마음대로 부리며 달려가듯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아무 거리낌 없이 나아갈 수 있다. 더구나 물은 고정된 일정한 형체가 없기 때문에 틈이 없는 곳 까지 침투해 들어간다. 노자철학에서 강조하는 삶의 방식으로서 무위(無爲)는 이러한 물의 속성과 닮았다. 물과 같은 무위의 가르침은 말이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는 가르침을 주니, 이것이야 말로 無爲의 유익함과 같다. 세상 삶에 있어서 불언지교(不言之敎) 그리고 무위지익(無爲之益)만한 것이 없으니 이를 따라야 할 것이다.
무위(無爲)는 말 그대로 해석하면 ‘함이 없음’, 혹은 ‘행위 하지 아니함’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행위(行爲)의 단절 혹은 인간적 노력의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산 중에나 앉아 있으라는 은둔사상을 말하는 게 아닌 것이다. 인간이 생존하는 한 인간은 행위를 전혀 중지할 수 없다. 행위를 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래적 모습인 것이다. 그러므로 무위(無爲)는 아무 것도 행(行)하지 않는 ‘불위(不爲)’와 다르다. ‘위무위(爲無爲)’, ‘처무위지사(處無爲之事)’란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무위(無爲)도 일종의 행위인 것이다. 그것은 더 나아가 인간에게 유익(有益)을 주며,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게 한다.
그렇다면 무위가 주는 유익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말없는 가르침이다. 말없이 가르친다는 것은 어떠한 편견이나 선입견 혹은 언어, 제도나 법령 그리고 윤리나 가치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대상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함을 의미하는 것이요, 또한 대상 사물의 고유한 특성을 존중하는 것이요, 스스로의 주인으로서의 삶이요 그래서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삶은 물처럼 사는 것과 같다.
원래 우주는 생명 자체이다. 우리는 자칫 산이나 냇물이나 이런 자연이 생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업장을 가진 중생들이 가진 견해이지, 진리의 견해가 못된다. 진리에서 보면 우리 생명은 본래로 죽음이 없다. 불생불멸이라, 우리 생명 자체는 본래 나지도 죽지도 않고, 영생(永生)으로 존재한다. 내 생명이 몇 십 년 살다가 죽는다는 범부중생의 생각은 거품 같고 그림자 같은 것이다. 우주의 실상, 그것은 불생불멸이다.
이러한 우주의 기운을 받은 불교적 성자가 무위진인(無爲眞人)이다. 도교적 무위진인(無爲眞人)의 불교적 개념이다. 그리하여 ‘오도(悟道)’를 이룬 깨달은 사람, 불교 말로 참된 사람, 진인(眞人)을 무위진인(無爲眞人)이라 일컫는다. 모양이나 이름에 걸리지 않아야 한다. 금옥 보배에 걸리고 무슨 감투에 걸리고 재산에 걸리면 진인이 못 된다. 그런 것에 걸리지 않는 자재무애(自在無礙)한 해탈인을 무위진인(無爲眞人)이라 한다.
진리는, 우리 인간적인 견해, 탐⋅진⋅치의 마음, 이런 장애를 걷어낸 성자의 경지에서만 참답게 보인다. 이러함을 견성오도(見性悟道)라 한다. 오도(悟道)를 이룬 해탈한 성자가 바로 무위진인(無爲眞人)이다. 따라서 불교의 목적은 무위진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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