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공간

경허 성우선사 행장(鏡虛 惺牛禪師 行狀)

수선님 2024. 9. 22. 14:23

30여 년 전인가? 최인호(崔仁浩. 1945~2013)의 "길 없는 길" 1~4권을 단박에 읽고 앞서 소개한 경허선사의 게송(偈頌) "세여청산하자시(世與靑山何者是)"를 소개한 바 있다. 당시 주말이면 자주 찾았던 청계산 청계사(淸溪寺)는 경허가 태어난 해에 부친을 여의고 9살에 경기도 의왕에 있는 이곳에서 출가했다. 경허(鏡虛)는 1846년부터 1912까지 살았던 조선 말기의 승려다. 일자무식이었던 그는 17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사서삼경(四書三經)과 불교경론(佛敎經論),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섭렵(涉獵)했고 31세 때 깨달음을 얻어 서산대사 이후 맥이 끊겼던 선종의 계보를 이은 실존인물이다. 이미 고인이 된 가톨릭 신자인 최인호는 경허의 행적을 세밀히 추적, 심도 있는 내용으로 그 당시 불교를 몰랐던 내게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길 없는 길"은 선시(禪詩)에 대한 매력과 고승(高僧)의 기행(奇行), 승속(僧俗)의 경계(境界)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두타행(頭陀行), 무애행(無碍行)을 행한 당대 최고의 선승(禪僧)이신 경허를 통해 불교에 대한 이해와 작가에 대한 열정을 느끼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경허의 행장과 게송을 통해 다시 한번 그때의 감흥(感興)을 느껴보고자 게송 몇 수와 법제자(法弟子) 만공선사(滿空禪師)의 게송을 행서체로 자서 해 보았다.

 

경허 성우(鏡虛惺牛) 선사 행장

 

경허 스님은 1849년 8월 24일 전라북도 전주 자동리(子動里)에서 송두옥(宋斗玉)씨와 밀양 박씨 부인 사이에서 차남으로 출생하였습니다.

 

처음 이름은 동욱(東旭)이요, 법호는 경허(鏡虛), 법명은 성우(惺牛)이며, 형은 먼저 출가하여 공주 마곡사에서 득도한 태허성원(泰虛性圓) 스님이십니다. 경허가 태어난 뒤 사흘 동안 울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다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9세에 어머니를 따라 서울에 올라와서 경기도 청계산 청계사(淸溪寺)에 가서 계허(桂虛)대사에 의하여 머리를 깎고 계를 받았습니다. 14세 때 마침 한 선비가 절에 와서 여름을 지낼 적에 여가로 글을 배우는데, 눈에 거치면 외우고, 듣는 대로 뜻을 해석할 만큼 문리(文理)에 크기 진취가 있었습니다. 그해 가을에 계허스님의 천거로 계룡산 동학사 만화화상(萬化和尙)을 찾아가 일대시교(一大時敎)를 수료하고, 23세 적에 대중의 물망으로 동학사에서 개강(開講)함에 사방에서 학인들이 물처럼 몰려왔습니다.

 

대중들의 요청으로 동학사(東鶴寺) 강원의 강단에서 강의를 하다가 여름 어느 날, 은사(恩師)스님을 뵈러 가던 길에 폭우를 만나 비를 피하던 중 호열자(虎列刺 : 콜레라)로 인하여 사람들이 다 죽어가고 있는 현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무상(無常)이 빠르고 생사(生死)가 신속함을 느꼈는데, 밤이 되어 하루 묵을 곳을 찾다가 어느 처사 집에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집에서 하루 머무는데 집주인 처사가 경허스님에게 묻기를,

"스님네 들은 일생동안 시주만 받아먹고 살다가 죽게 되면 소가 된다는데..."

하는 말에 대꾸 한마디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경허스님은 강원(講院)의 강백(講伯)으로서 모든 학인을 지도하고 부처님의 교리를 원만히 다 안다 하더라도 그것은 생사의 언덕에 큰 힘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실로 불교의 깨달음이란 실참실오(實參實悟)해야만 비로소 부처님 지혜에 이를 수 있는 것이라고 느끼고 그 길로 동학사로 돌아와 학인들을 흩어 보내고 폐문(閉門)한 뒤 좌선(坐禪)을 시작하였습니다.

 

모든 공안(公案)이 알음알이로 해결되어 버렸는데, 영운(靈雲)선사의 '나귀 일이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도래한다. 여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는 법문은 도무지 그 뜻을 알 수가 없어 이것을 화두(話頭)로 삼고 두문불출하시면서 졸음이 오면 날카로운 송곳으로 살가죽을 찌르고 칼을 갈아 턱 밑에 대놓고서 수마(睡魔)를 물리치며 용맹정진하였습니다.

그렇게 정진하시기를 석 달째, 화두 한 생각이 순일(純一) 하여 은산철벽(銀山鐵壁)과 같았습니다. 육근육식(六根六識)의 경계가 다 물러가고 화두 한 생각만 또렷해져 있던 어느 날, 우연히 바깥에서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말이 들려오는 순간, 여지없이 화두가 타파되었습니다. 이때가 31세셨습니다.

 

오도송(悟道頌)

忽聞人語無鼻孔(홀문인어무비공) 홀연히 사람에게서 고삐 뚫을 구멍 없다는 말을 듣고

頓覺三千是吾家(돈각삼천시오가) 문득 깨달아 보니 삼천대천 세계가 다 나의 집 일세

六月燕岩山下路(유월연암산하로)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野人無事太平歌(야인무사태평가) 들 사람 일이 없어 태평가를 부르네.

 

그리고 선사께서는 이으신 법(法)의 전등연원(傳燈淵源)을 청허휴정(淸虛休靜) 선사의 12세 손(孫)이며, 환성지안(喚惺志安) 선사의 8 세손이라고 밝히셨습니다. 이때부터 제방(諸方)에 선풍을 진작시키니 각처에 선원(禪院)이 개설되고 걸출한 선객(禪客)과 수행납자(修行衲子)들이 처처에서 많이 모여들어 적막하기만 하던 조선의 선불교는 다시 활기를 찾게 되었습니다.

 

오도 후, 참으로 의발(衣鉢) 전할 이 없음을 탄식하시더니, 1885년 선사 세수 37세 때, 비로소 눈 밝은 납자(衲子)를 얻으셨으니 그분이 바로 혜월 혜명(慧月 慧明) 스님입니다.

 

부 혜월혜명(付 慧月慧明 : 혜월 혜명에게 부치노라)

了知一切法(요지일체법) 일체법 깨달아 알면

自性無所有(자성무소유) 자성에는 있는 바가 없는 것

如是解法性(여시해법성) 이같이 법성을 깨쳐 알면

卽見盧舍那(즉견노사나) 곧 노사나 부처님을 보리라

依世諦倒提唱(의세제도제창) 세상법에 의지해서 그릇 제창하여

無文印靑山脚(무문인청산각) 문자 없는 도장에 청산을 새겼으며

一關以相塗糊(일관이상도호) 고정된 진리의 상에 풀을 발라 버림이로다

 

경허 선사께서는 말년(1905년 57세)에 세상을 피하고 이름을 숨기고자 갑산(甲山)ㆍ강계(江界) 등지에 자취를 감추고, 스스로 호를 난주(蘭州)라 하여, 머리를 기르고 유관(儒冠)을 쓰고, 바라문(婆羅門)의 몸을 나타내어 만행(萬行)의 길을 닦아 진흙에 뛰어들고 물에 뛰어들면서 인연 따라 교화하셨습니다.

 

1912년 4월 25일, 갑산(甲山)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입적하시니, 세수(世壽)는 64세, 법랍(法臘)은 56세였습니다.

 

경허 게송(鏡虛 偈頌)

心月孤圓 光呑萬像(심월고원 광탄만상) 마음만 홀로 둥글어 그 빛 만상을 삼켰어라

光境俱忘 復是何物(광경구망 부시하물) 빛과 경계 다 공한데 다시 이 무슨 물건 이리오.

(이 게송은 경허선사께서 즐겨 읊던 송으로 당승(唐僧) 반산보적(盤山寶積, 720~814) 선사의 게송을 인용 : 心月孤圓 光呑萬像 光非照境 境亦非存 光境俱忘 腹是何物)

 

여름에 천화(遷化) 소식을 듣고 제자 만공(滿空) 스님과 혜월(慧月) 스님이 열반지 갑산에 가서 법구(法軀)를 모셔다 난덕산(難德山)에서 다비(茶毘)하여 모셨습니다.(출처 : 해운정사 홈페이지)

 

제범어사보제루(題梵魚寺普濟樓 : 범어사 보제루에서 제하다)

神光豁如客(신광활여객) 깨달아 신광을 이룬 나그네

金井做淸遊(금정주청유) 금정산에서 맑게 노닐며 자적하네

破袖藏天極(파수장청극) 찢어진 소매엔 온 하늘을 감추고

短筇劈地頭(단공벽지두) 짧은 지팡이로 땅 머리를 쪼갠다

孤雲生遠峀(고운생원수) 외로운 구름은 먼 산봉우리에서 일고

白鳥下長洲(백조하장주) 흰 새는 긴 물가에 내려오는데

大塊誰非夢(대괴수비몽) 누가 한 덩어리 큰 꿈이라 하지 않으리

憑欄謾自悠(빙란만자유) 난간에 기대어 자적함을 감추어 보리라

 

세여청산하자시(世與靑山何者是) – 鏡虛

世與靑山何者是(세여청산하자시) 속세와 청산 중에 어느 것이 옳은가,

春光無處不開花(춘광무처불개화) 봄볕 드는 곳에 꽃피지 않은 곳이 없나니

傍人若問惺牛事(방인약문성우사) 누가 나에게 성우(惺牛)의 일을 물어 온다면,

石女心中劫外歌(석녀심중겁외가) 석녀의 마음속 영원한 노래라 대답해 주리

 

1903년 가을 해인사 가는길에 – 鏡虛

識淺名高世危亂(식천명고세위난) 아는 것 없이 이름만 높은데 세상은 어지러우니

不知何處可藏身(부지하처가장신) 어느 곳에 몸을 숨겨야 하는가

漁村酒肆豈無處(어촌주사기무처) 어촌이나 술집에 어찌 숨을 곳이 없을 손가

但恐匿名名益新(단공익명명익신) 감춘 이름이 다시 새로워질 까 다만 그를 두려워하노라.

전법게(傳法偈 : 月面 滿空에게 법을 전하며..)

雲月溪山處處同(운월계산처처동) 구름, 달, 물, 산 곳곳마다 같음이

叟山禪者大家風(수산선자대가풍) 수산선자(滿空)의 큰 가풍일세

慇懃分付無文印(은근분부무문인) 은근히 무문인을 주노니

一段機權活眼中(일단기권활안중) 권세 기틀 안중(眼中)에 살았구나.

(경허 선사의 수제자(受弟子)로 흔히 '삼월(三月)'로 불리는 혜월(慧月, 1861년 - 1937년), 수월(水月, 1855년 - 1928년), 만공(滿空, 1871년 - 1946년) 선사 등 총 12명의 제자가 있다.)

 

우음(偶吟 : 鏡虛선사께서 삼수갑산으로 들어가시기 전(前) 남기 시)

火裏蝍蟉卽不問(화리즉료즉불문) 불 속의 지네는 가리지 않고 꿈틀거리고

秋江烟澄鷗鷺眠(추강연징구로면) 가을 강 맑은 안개(속) 갈매기 해오라기는 쉬고 있네

遮般展振無人會(차반전진무인회) 이 반야 진실로 열어 내놓은 깨달은 사람 없으니

槐國風光夢裡傳(괴국풍광몽리전) 괴 나라 풍광은 꿈속에서 전하리라

 

해인사 퇴설당 주련(海印寺 堆雪堂 柱聯) – 鏡虛

春秋多佳日(춘추다가일) 봄가을 좋은 날 많더니

義理爲豊年(의리위풍년) 의리(義理)의 풍년 들었네

精聽魚讀月(정청어독월) 고요한 밤 고기가 달 읽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笑對鳥談天(소대조담천) 웃으며 새와 천문(天文)을 이야기하네

雲衣不待蠶(운의불대잠) 누더기면 그만인 걸 누에 칠 시기 기다리지 않네

禪室寧須稼(선실영수가) 선방에서 어찌 농사는 바라는가?

石鉢收雲液(석발수운액) 돌 바루에 운액(雲液)을 거두리

 

경허 게송(鏡虛 偈頌)

斜陽空寺裏(사양공사리)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진 빈 절 속에

抱膝打閑眠(포슬타한면) 무릎을 안고 꾸뻑꾸뻑 졸고 있었다

蕭蕭驚覺了(소소경각료) 소슬한 바람소리에 놀래서 깨 보니

霜葉滿階前(상엽만계전) 서리 맞은 낙엽 뜨락에 가득 쌓여 있네

 

지리산 영원사(智異山 靈源寺) – 鏡虛

不是物兮早騈拇(불시물혜조변무) ‘한 물건도 없다’ 해도 벌써 군더더기인데

許多名相復何爲(허다명상부하위) 허다한 이름과 모양은 또 뭘 하자는 건지

慣看疊嶂煙蘿裏(관간첩장연라리) 첩첩 멧부리 안개 낀 넝쿨 속을 잘 들여다보니

無首猢猻倒上枝(무수호손도상지) 머리 없는 원숭이가 거꾸로 나무를 기어오르네

 

범어사 계오암 창건기(梵魚寺 鷄鳴庵 創建記) – 鏡虛

拈來何事政堪嬴(염내하사정감영) 세상에 무엇인들 쓸모없는 것 있으랴.

不托端宜土椀成(불탁단의토완성) 수제비는 질그릇에 담는 게 제격이지.

穿入鷄巖藏一笑(아입계암장일소) 계명암 바위 뚫어서 한 웃음 감추노니

他年天畔化雷聲(타년천반화뢰성) 훗날 하늘 저편에서 우레 소리 되리라.

 

경허선사 임종게(鏡虛禪師 臨終偈 : 1912. 4. 25일 甲山 熊耳坊 道下洞에서 시적(示寂 : 고승의 죽음) 때 저고리 속에서 발견된 경허의 임종 시로 추정)

 

임종게(臨終偈)

三水甲山長谷裡(삼수갑산장곡리) 삼수갑산의 깊은 계곡 속에

非僧非俗宋鏡虛(비송비속송경허)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송경허라는

故鄉千里無人便(고향천리무인편) 고향은 천리 길 인편은 없어

別世悲報付白雲(별세비보부백운) 세상 떠난 슬픈 소식 흰구름에 부치노라

 

 

문경허법사천화음(聞鏡虛法師遷化吟 : 경허선사 천화 소식을 듣고..) -滿空禪師 偈頌

善惡過虎佛(선악과호불) 선과 악이 호랑이, 부처보다 심한 분이

是鏡虛禪師(시경허선사) 바로 경허선사 이시라

遷化向甚處(천화향심처) 천화(고승의 열반)하여 어느 곳으로 떠나셨는가?

酒醉花面臥(주취화면와) 술에 취해 꽃 밭에 누우셨도다

 

1912년 어느 날 혜월(慧月) 스님으로부터 스승 경허가 함경도 갑산 웅이방에서 열반(涅槃)하셨다는소식을 듣고 달려가 스승의 유품과 무덤을 확인하고 다시 다비를 하여 평소 즐겨 다니시던 산천(山川)에 뿌렸다.

 

어함경북갑산군 웅이면 난덕산하 선법사 다비시음(於咸鏡北甲山郡 熊耳面 難德山下 先法師 茶毘時吟 : 함경북도 .. 난덕산 아래 다비를 할 때 읊다) -滿空禪師 偈頌

舊來是非如如客(구래시비여여객) 시비에 물들지 않은 여여한 나그네가

難德山止劫外歌(난덕산지겁외가) 낙덕산 아래서 겁외가를 그쳤도다

驢馬燒盡是暮日(구마소진시모일) 나귀와 말이 한 일 모두 태워 저문 날에

不食杜鵑恨小鼎(불식두견한소정) 먹지도 않는 소쩍새가 솥 적다 울고 있네

 

 

 

 

 

 

 

 

경허 성우선사 행장(鏡虛 惺牛禪師 行狀)

30여 년 전인가? 최인호(崔仁浩. 1945~2013)의 "길 없는 길" 1~4권을 단박에 읽고 앞서 소개한 경허선사의 게송(偈頌) "세여청산하자시(世與靑山何者是)"를 소개한 바 있다. 당시 주말이면 자주 찾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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