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행성적 사유 앞에서
삶의 풍경을 송두리째 바꾼 코로나19 팬데믹은 3년 4개월 만에 종식되었다. 아직도 이 파국의 여진은 남아 삶의 곳곳에서 고통이 잇따르고 있다. 지금 전 세계인들이 겪고 있는 경제위기뿐만 아니라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한 정서적 단절감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팬데믹을 견뎌낸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하지만 세상일이 대개 그러하듯 고통의 강도는 성찰의 깊이와 무관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이러한 삶의 난경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인류 전체가 하나로 연결된 운명공동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팬데믹은 ‘아우르다’라는 뜻의 접두어 ‘pan’과 ‘사람’을 뜻하는 ‘demos’가 결합된 파생어이다. 인류 전체를 아우른다는 어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기간은 서로가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또한 팬데믹은 우리의 삶을 인류에만 국한하여 사유할 수 없다는 점도 분명하게 인식시켰다.
코로나바이러스뿐만 아니라 바이러스 일반은 다양한 생물종들 사이에 상호 감염이 된다는 사실은 이 기간 내내 우리가 접해야 했던 뉴스이기도 했다. 인류의 상호 연관성을 확인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우리는 비인간 생물종과의 연관성을 확인하면서 인간만을 중심에 두고 사유하는 일체의 방식에 대한 발본적 성찰을 요구받았다. 그 결과 개인, 사회, 국가, 인류라는 범주에 한정되었던 우리의 상상력이 이들 범주가 배제해 왔던 외부로 인식의 지평을 확대하기에 이르렀다. 인간을 중심에 두고 세계를 인식하고 구성해 왔던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자 동물의 삶이 눈에 들어왔고, 연이어 생물과 무생물을 아우르는 생명 전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생명 공동체가 실감을 획득하면서 우리의 인식 속에 새겨진 경험이 찾아왔다고 해야 할까.
더 근원적인 삶의 곤경은 기후 위기로부터 발원하고 있다. 변화를 넘어 위기가 되어버린 기후 문제는 인류의 절멸까지를 경고하며 일상적 삶의 지층을 흔들고 있다. 지금 인류가 직면한 위기는 인류를 넘어서서 대기와 지질을 포함한 지구적 위기이고, 이러한 위기의 주된 행위자가 우리 인류라는 사실로 인해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담론적 결집이 진행 중이다. 현시점에서 기후 위기의 문제를 어느 한 부분에 국한하여 그 원인을 찾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 문제의 중심에 인간중심주의가 놓여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 사이 인류라는 말이 갖는 개념적 모호함으로 인해 현재의 위기에 대한 책임의 실체가 흐릿해진다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며, 지구적 위기의 원인을 명확하게 하는 자본세나 기술세 등의 용어가 제안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개념에 담긴 선명한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인간 중심의 사유에서 배제해 온 억압된 자연의 반격을 막을 묘책은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연의 점령자이자 파괴자임을 자처한 근대적 삶의 방식에 대한 성찰과 탈출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지금 여기의 중심 화두라 할 수 있다.
서구 중심의 역사 인식을 비판하며 탈식민적 시각을 견지해 온 역사학자 디페시 차크라바르티(Dipesh Chakrabarty)는 기후 위기에 직면한 지금의 현실을 인식의 전환기로 보고 있다. 그는 인간만의 역사라는 인식에 갇혀 있는 우리의 사유를 자연의 역사를 향해 열어젖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인간의 사유 안에서만 인식되던 지구(globe)라는 개념과 대지 시스템으로서 행성(planet)이라는 개념을 구분한다. 인간만을 중심에 둔 사유에서 벗어나 인간을 탈중심화하는 행성적 사유를 제안하며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해체를 시도하고 있다. 인간의 역사와 자연사(自然史)로서 지구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 인식에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는 디페시 차크라바르티의 주장은, 가공할 산불과 가뭄, 빈발하는 지진과 화산 폭발, 해양 산성화 등이 일상적 삶의 일부가 되고 있는 현실에서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어떤 진실을 담고 있다. 인간은 더 이상 자연의 외부로 존재할 수 없다는 진실. 그렇다면 이러한 행성 시대에 시집 《님의 침묵》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새롭게 읽힐 수 있을까?
2. 오동잎에 관한 명상
한용운은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오동잎에 대한 인상적인 글을 두 편 남기고 있다. 이 가운데 한 편이 논설적 수필인 〈우주(宇宙)의 인과율(因果律)〉(《불교》 제90호, 1931.12)이다. 이 글에서 그는 세계를 인식하는 당대의 통상적인 사유들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며 나름의 세계 인식 방법을 제시한다. 떨어지는 오동잎이 촉발한 이 사색을 통해 그는 존재의 근원을 추적하면서 오동잎 하나도 우주적 시간과 공간으로 교직된 존재임을 논증해 나간다.
오동의 한 잎새는 나무에서 나고, 나무는 땅에서 나고, 오동이 난 땅은 지구의 일부분이다. 지구는 태양계 유성의 하나이다. 지구는 성무시대(星霧時代)로부터 현상(現象)의 지구가 될 때까지 삼엄한 인과율로 변천되어 온 것이다. 그러면 오동 일엽의 개락(開落)이 지구의 창조와 연쇄 관계보다도 동일한 계통(系統)의 인과율임을 알기에는 그리 어렵지 아니하다. …(중략)… 오동잎을 떨어뜨리는 가을바람이 태평양에서 일어나는 저기압의 영향을 받았다 하자. 몽골사막에서 일어나는 고기압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자. 다시 태평양의 저기압과 몽골사막의 고기압이 북빙양 기류의 영향을 받았다 하자. 그러면 오동잎의 변천은 시간적으로 우주 창시의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공간적으로 태평양 · 몽골사막 · 북빙양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중략)… 그리하여 오동의 한 잎새 떨어지는 것, 즉 그 시(時)와 처(處)와 동태가 우주의 창시할 때 규정한 그대로의 계속적 진전이며 현존한 만유와의 연쇄적 관계를 가진 것이다.
한용운은 오동 한 잎에도 태양계를 넘어 광막한 허공과 별에서부터 지금의 지구가 형성되기까지를 가로지르는 우주적 시공간의 역사가 축적되어 있다고 본다. 전 우주가 오동잎 하나의 존재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우주적 관여에는 오동잎과 동시대 현상들과의 연쇄적 관계도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모든 존재는 과거와 현재를 종횡하는 ‘우주적 존재’이고, 이 존재의 원리는 ‘우주의 인과율’이 된다. 이러한 한용운의 인식은 만유의 상호 연관성을 깊이 통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화엄의 법계연기론적 세계 인식을 자기화한 논리라 할 수 있다. 즉 ‘우주의 인과율’은 석가의 깨달음인 연기법이 오동 한 잎에 얹혀서 우주를 주유하면서 존재에 내재된 이치를 포착한 한용운의 법계연기론이다. 그는 모든 존재는 독립된 개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기대고 스며 있는 상의적(相依的) 관계로 존재한다고 인식했다. 이러한 시각은 의상이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系圖)〉에서 제시한 티끌 하나에 시방세계가 들어앉아 있다는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에 담긴 인식이나, 윌리엄 블레이크가 〈한 알의 모래〉라는 시에서 노래한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네// 너의 손바닥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담아라”는 인식과도 강한 유사성을 보인다. 이들 세계 인식은 모두 존재들의 상의적 관계성에 주목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을 대립적 관계로 인식해 온 근대적 시각에서 벗어날 출구를 제공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한용운의 세계 인식 방법은 “‘나’가 없으면 다른 것이 없다. 마찬가지로 다른 것이 없으면 나도 없다.”라는 진술이나, “나는 다른 것의 모임이요, 다른 것은 나의 흩어짐이다”(〈권두언〉 《불교》 88호, 1931.10)라는 진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이처럼 오동잎 하나까지도 우주적인 존재로 인식하려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인식의 대척점에는 보이는 현상만으로 세계를 인식하면서 존재를 무(無)나 우연으로 이해하는 표층적인 과학주의나 삶의 의지를 포기한 숙명론적 세계관이 놓여 있다. 그는 우주의 인과율에 따르는 존재의 실상을 해명함으로써 외면적이고 결정론적인 존재 인식에서 벗어나 근원적이고 심층적인 존재 이해를 도모하고자 했던 것이다.
특히 그는 이 글에서 숙명론적 세계 인식을 강하게 비판한다. 그에게 오동잎은 단순히 오동잎을 둘러싼 존재들과 얽힘으로만 인식되는 대상은 아니었다. 그는 연기론적 인식이 초월적 존재를 가정하고 그의 의지에 따른 숙명론을 좇는 방식이 될 수 있음을 경계한다.
“인과율은 신(神)의 명령이나 천(天)의 법률이나 운명의 지휘에 구속되어서 기계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요, 우주 원리의 합리성과 필연성의 인과관계로 진전된다는 말”이라고 주장하면서, 합리와 필연을 만드는 존재 자체의 자유의지를 긍정한다. 숙명론적 인식이야말로 존재에 내재해 있는 자유성을 부정하는 논리라고 보면서, 인과율은 내재적 자유성의 기율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인과율을 만유의 자유가 문란하게 되지 않도록 만드는 일종의 ‘보안법’이라고 단언한다.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오동잎은 우주적 시공간을 자기 안에 품은 존재이자 현존하는 만유와 서로 기대고 있는 존재이며, 동시에 자기 안에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라고 보면서 이 모든 것을 조율하는 원리를 ‘우주의 인과율’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한편, 한용운의 오동잎에 대한 명상을 이끄는 두 번째 예는 그의 대표 시 가운데 한 편인 시 〈알 수 없어요〉에서 시적 발화를 촉진하는 오동잎이다. 이 시의 첫 행에서 한용운은 바람도 없는 공중에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에 시선을 던지고 있다. 떨어지는 오동잎이 촉발한 시상의 전개를 따라가 보자.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波紋)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 〈알 수 없어요〉 전문
이 시는 해방 이후 중등 교과서에 수록되면서 널리 알려진 한용운의 대표작이다. 마지막 행에서 대상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마음을 표출하고 있지만, 이 시의 울림은 사랑의 간곡함보다는 오히려 자연에서 감지되는 미묘하고 신비한 생기(生氣)와 신성(神性)에 대한 외경(畏敬)의 정서에서 촉발된다. 자연에 깃든 생기와 이러한 기운을 추동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성스러운 존재자에 대한 예감이 시적 정서를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파문을 내는 오동잎이나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보이는 푸른 하늘, 꽃도 없는 깊은 나무나 근원도 알 수 없는 곳에서부터 흐름을 시작한 시내에서 자연현상에 깃들어 있는 생기와 신성은 감지되고 있다.
특히 시적 화자의 반복되는 물음은 자연에 깃든 신령한 기운을 예감하게 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깊은 두려움과 한없는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킨다. 이 물음의 과정에서 자연 속에 감추어져 있던 내재적 생명성은 자신을 현시하는데, 이러한 존재의 열림을 통해 사물화된 자연은 깊고 오묘한 신성을 지닌 존재로 우리 곁에 다가온다. 그러므로 이러한 존재의 실상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화자의 겸손한 고백은, 자연이 품고 있는 충일한 존재감의 현시를 유도하면서 인간과 자연을 내밀하게 결합시킨다.
흥미롭게도 인류세의 문제를 직시하며 행성적 사유를 제안하고 있는 디페시 차크라바르티가 이러한 위기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한 것도 자연에 대한 외경의 태도이다. 종교적인 감각과 결부된 외경의 태도를 문화사에서 전면적으로 부각시킨 이는 ‘생명에 대한 외경(reverence for life)’을 주창한 알베르트 슈바이처이다.
그는 우리 인류에게 필요한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윤리를 탐색하던 중 아프리카의 원시림 사이를 흐르는 강에서 이 개념을 떠올렸고, 그 후 제1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서구 문화에 대해 전면적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생명에 대한 외경’의 윤리를 체계화했다. 슈바이처의 이러한 생명윤리는 한용운이 이 시를 통해 포착하고 있는 자연 생명에 대한 외경감과 다르지 않다. 두 사람 모두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결합된 근대의 파괴적 속성을 경험하면서 자연을 포함한 생명 전체를 신령한 외경의 대상으로 인식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에 깃들어 있는 생기와 신성을 감지하는 이러한 경험이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는 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총 6행으로 구성된 이 시가 5행까지의 반복된 물음으로 마무리되었다면, 이 시는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표출한 시로만 이해될 것이다. 하지만 이 시의 마지막 행에서는 외부로 향하던 시선이 시적 주체의 내면으로 방향을 돌리며, 내면에서 생성되는 타자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전환을 가능하게 한 동력은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는 역설적 승화이다.
가시적인 현상적 차원에서 보면 재가 기름이 될 수는 없다. 재가 삶의 밑거름이 되어 다시 기름이라는 삶의 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다는 인식은, 보이지 않는 심층적 삶의 질서를 믿을 때만이 가능하다. 이런 인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떨어지는 오동잎에서 우주적 시공간의 얽힘을 포착할 수 있는 연기의 안목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심층적 차원에서 포착되는 존재들의 내적 연관성이 곧바로 재가 기름이 되는 역설적 승화를 견인하는 것은 아니다.
시집 《님의 침묵》의 논리적 전제이자 귀결이라 할 수 있는 ‘내가 곧 님이다’는 인식은 보이지 않는 삶의 질서에 대한 통찰이 가져다준 희망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합일은 관계 맺음을 아는 것만으로 실행되기는 어렵다. 따라서 모든 존재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인식과 함께, 밤을 지키는 등불로서의 삶을 감당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나는 ‘님’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사랑의 의지는 ‘누구의 밤’으로 비유되는 타자의 고통과 곤경에 귀 기울이고자 하는 관심과 염려의 마음에서 발원한다. 하이데거도 우리 인간의 존재론적 특성 중 하나가 관계 맺고 살아가는 존재들에 대한 염려(Sorge)라고 했듯이, 인간의 마음 안에는 이러한 본성이 내재해 있다. 하지만 이 본성을 깨우고 발현시키기 위해서는 시 〈알 수 없어요〉의 시적 주체처럼 뭇 생명에 깃든 생기와 신성을 만나야 한다. 살아 있는 생명으로 자연을 느끼고 경외의 마음으로 자연을 대하는 일은, 내 안의 생기와 신성을 일깨움으로써 타자를 염려하는 등불을 밝히는 강한 정서적 충동이 되기 때문이다. 시 〈알 수 없어요〉는 지구 시스템을 교란하고 훼손하는 결정적 행위자인 인류에게 사물처럼 인식되는 지구를 살아 있는 자연 생명으로 인식하도록 하는 생명 감각을 일깨운다는 점에서 우리의 죽은 감각에 생기를 불어넣는 시편이라 할 수 있다.
3. 표지의 단순함과 〈군말〉의 강렬함
1926년 5월에 출간된 《님의 침묵》 초간본에는 두 가지 특징적인 면이 발견된다. 특이하게도 이 시집의 앞표지에는 제목이 없다. 당시 상당히 많은 도서를 발간하면서 식민지 조선을 대표하던 출판사 회동서관(匯東書館)에서 출간된 시집의 장정으로는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다. 회동서관은 지석영이 저술한 옥편 《자전석요(字典釋要)》(1909)를 출간해 초판 5,000부를 반년 만에 판매하고, 이후 판을 거듭하여 10만 부가량을 판매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상당한 역량을 가진 출판사였다. 당시로서는 식민지 조선의 출판계를 주도하던 출판사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출판사에서 출간된 시집인 《님의 침묵》의 표지에 제자(題字)뿐만 아니라 도안이 전혀 없다는 것은 이채로운 면이 아닐 수 없다. 시집의 책등에는 필기체로 된 ‘님의 沈默’이라는 제목과 함께 ‘韓龍雲 著’라는 저자명이 활자체로 쓰여 있지만, 앞 · 뒤표지에는 특별한 장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제목조차 없다.
1921년에 최초의 근대시집으로 출간된 《오뇌의 무도》나 1923년에 최초의 창작 시집으로 출간된 《해파리의 노래》에서부터 일정한 형식을 갖추기 시작한 시집의 표지 디자인은 중요한 출판문화로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제자(題字)나 회화적 이미지를 가미한 도안을 통해 시집이 담고 있는 정서를 압축적이면서도 상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시집의 표지는 독자들에게 책의 내용이나 정서를 유추할 수 있도록 돕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
당대의 이런 출판 정황과 비교할 때, 시집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표지가 어떤 표식도 없이 비어 있다는 점은 다소 이색적이다. 《님의 침묵》이 출간되기 몇 개월 전에 출간된 김소월의 《진달래꽃》(1925년 12월)이나 몇 개월 후에 출간된 최남선의 《백팔번뇌》(1926년 12월)만 보더라도 시집의 장정에 상당한 공을 들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이미 표지는 단순한 디자인적 공간을 넘어서서 시집이 지향하는 이념적 성향까지를 포괄적으로 담아내는 예술적 창작 공간이었다. 이런 동시대의 정황을 참조해 보면, 시집 《님의 침묵》의 표지는 단순 소박함 그 자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1원 50전이라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고가의 시집을 제작하면서 표지에 제목을 인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특별한 표지 디자인을 하지 않은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 지금으로서는 여기에 대해 남아 있는 기록이나 증언이 없으므로 승려인 한용운의 성향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 정도가 가능할 뿐이다. 시집의 표지 디자인을 결정하는 데에는 시인의 의지가 어느 정도 반영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러한 형식적 단순함은 시집의 내용에 대한 시인의 자신감이 표출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듯하다.
한편 이 시집의 제목은 손으로 쓴 필체가 살아 있는 필기체로 쓰여 있다, 시집 제목도 누구의 글씨인지 밝혀진 바가 없다. 책등에 인쇄된 시집의 제목은 속표지에 인쇄된 제목의 필체와 동일한 필기체이고 저자는 활자체로 되어 있는데, 이 제목의 글씨를 한용운이 직접 썼을 가능성도 고려해 볼 만하다. 표지도 다른 시집과는 다르게 독자적인 스타일을 견지한 것으로 볼 때, 제목의 글씨도 자신이 직접 썼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남아 있는 한용운의 친필 원고들과 면밀한 비교가 필요하므로 확정할 수는 없지만, 이 글씨가 한용운의 기질이나 성정과 무관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어쨌든 이 시집은 앞표지에 제목과 디자인이 없는 최초의 근대시집이라는 특기할 만한 평가도 겸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이 시집이 갖는 또 다른 특징적인 면은 속표지의 제목과 자서(自序)에 해당하는 〈군말〉이 모두 붉은색으로 인쇄되어 있다는 점이다. 붉은색의 선택을 식민지 지식인의 애국적 정념의 표출로 읽어낼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해석은 현재의 민족주의적 시각에 자극받은 지나친 확대해석일 수 있다. 당시에 제목의 글자 색이 붉은색인 경우는 몇몇 시집이나 잡지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제목이나 〈군말〉이 붉은색으로 인쇄된 점은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특히 시집에서 〈군말〉이 차지하는 의미나 위상을 감안한다면 〈군말〉을 붉은색 활자로 인쇄한 것은 일정한 의도가 반영된 선택으로 볼 수 있다. 의도적 선택이라는 정황은 〈군말〉을 속표지와 대등하게 배치한 편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시집을 열면 속표지에 제목이 나오고 다시 한 페이지를 넘기면 속지에 〈군말〉이 사방에 테두리를 두른 채 한 면을 차지하고 있다. 왼쪽 면에 〈군말〉을 배치하고 오른쪽 면은 비워 둠에 따라 붉은색 활자로 인쇄된 이 글에 대한 인상은 매우 강렬해진다. 시집의 제목에 비견되는 의미가 〈군말〉에 담겨 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처럼 시집 《님의 침묵》은 표지의 단순함과 서문인 〈군말〉의 강렬함이 대조를 이루는 시집이다. 겉은 단순하지만 안으로 뜨거운 이 시집의 성격을 표지와 붉은색으로 인쇄된 〈군말〉을 통해서도 읽어낼 수 있다.
4. 기룬 것은 다 님이다
〈군말〉은 시집 《님의 침묵》 전체를 관류하는 세계 인식 방법을 압축적으로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해명이 필요한 글이다. 세 단락으로 구성된 그리 길지 않은 이 글에는 한용운이 시집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전언이 두 개의 아포리즘 형식으로 제시되어 있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衆生)이 석가(釋迦)의 님이라면 철학(哲學)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薇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伊太利)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연애(戀愛)가 자유(自由)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拘束)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 〈군말〉 전문
두 개의 아포리즘은 간명한 명제로 제시되어 있는데, 하나는 ‘기룬 것은 다 님이다’이고 다른 하나는 ‘님도 자유다’이다. 여기에 담긴 통찰은 아포리즘의 열쇠 말인 ‘기룸’과 ‘자유’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해명하는 가운데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기룸’부터 살펴보자.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는 진술은 우리의 통념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열어젖히고자 하는 일종의 사자후라 할 수 있다. 석가가 태어난 후 입을 열고 한 첫마디가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는 말이었고 이 최초의 발언이 사자후에 비유되듯이, 이 시집에서 시인의 최초 발언인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는 진술은 ‘님’의 의미를 닫힌 개념에서 열린 개념으로 전환시키는 사자후에 해당한다. 기룸의 동사형인 ‘기루다’는 충청과 전북 지역의 방언으로 그리워하다, 사랑하다, 애처롭다, 정을 두다, 찬양하다, 마음에 두고 키우다, 기르다 등의 폭넓은 의미를 함유한 한용운의 개인 시어이다. 실제로 이 시집에서 ‘기루다’라는 시어는 〈군말〉 이외에도 총 일곱 편의 시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 시어의 의미역(意味域)에 포함되어 있는 사랑하다, 그리워하다, 애처롭다, 찬양하다 등의 시어가 ‘기루다’와 별도로 사용되는 것으로 보아, 이 시어는 이들 시어와 의밋값을 공유하면서도 동일하게 볼 수 없는 특이성 내지는 고유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룸의 의미는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세 단락으로 된 〈군말〉에서 ‘기루다’는 첫 단락과 마지막 단락에서 활용되고 있다. 첫 단락의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는 진술에서 ‘기루다’는 ‘사랑하다’라는 의미에 가깝게 사용되고 있다. 또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라는 진술에서는 ‘연민하다’는 의미에 가깝게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군말〉에서 기룸이라는 말은 사랑과 연민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포함한다. 이렇게 보면 기룸은 불교의 자비 개념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자비는 타자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극대화한 자(慈)와 타자의 고통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극대화한 비(悲)의 합성어이기 때문이다. 기룸을 자비에 상응하는 시어로 본다면, 이러한 기룸의 실천에는 모든 존재의 상의적 관계성이 심층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불교에서는 지혜와 자비가 새의 두 날개와 같다고 보기 때문에 이 두 개념은 분리되어 인식될 수 없다. 따라서 기룸은 존재의 상호의존성을 내면화한 상태에서 자비심을 실천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글에서 석가, 칸트, 장미화, 마치니와 중생, 철학, 봄비, 이태리는 주체와 대상이라는 고정된 자리에서 서로를 인식하는 일방적 관계가 아니며, 기룸의 지향성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주체이자 대상으로 작용하는 상호적 관계로 엮여 있다. 한용운은 이러한 기룸의 마음 작용이 미치는 대상에 제한을 가하지 않음으로써 ‘님’을 모든 존재를 향해 열린 개념으로 재규정한다. 이렇게 보면 조국 상실의 시기에는 조국이 ‘님’일 수 있고, 기후 위기로 인해 아픈 지구를 살려내야 할 인류세에는 지구가 절실한 ‘님’이 될 수 있다. 기룬 것은 모두 님이기 때문이다.
〈군말〉에서 이러한 기룸을 실천하는 데에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와 관련된 말이 ‘자유’이다. 근대 시기에 들어서면서 민주주의의 두 원리인 자유와 평등은 사회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가치였다. 특히 온전한 개인으로서 삶을 확보하지 못했던 당시로는 자유가 개인의 탄생을 가능하게 하는 소중한 가치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자유의 가치는 사회 전반에 수용되고 있었는데, 한용운은 이러한 자유의 수용에 대해 깊은 우려감을 드러내고 있다. “연애(戀愛)가 자유(自由)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拘束)을 받지 않느냐”라는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한용운은 자유의 과잉이 야기하는 폐해를 예감하면서 우려 섞인 목소리로 자유의 그림자를 보라고 권유한다. 그는 ‘이름 좋은 자유’란 ‘알뜰한 구속’을 수반하는 상태라고 보고, 대상에 대한 구속이나 애착을 넘어서지 못한 채 자신의 욕망만을 추구하는 자유를 자유의 그림자라고 비판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한용운은 ‘님도 자유다’라는 아포리즘에 담아내며 자유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라고 권유하고 있다.
한용운은 인간의 자유가 극단적으로 강조되면서 자연을 훼손하고 파괴하기 시작한 근대사회의 초입에서 자유의 어두운 그림자를 염려한 시인이었다. 근대인이 맹목적으로 추구한 자유가 바로 “너의 그림자”라는 시인의 질책은,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해체와 극복을 소망하는 지금 여기에서 오히려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지금은 인간이 자유라면 지구도 자유임을 깨닫고 파괴적 자유가 야기한 근대의 어두운 그림자를 되돌아보아야 할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가공할 자연의 반격을 목도하면서 읽는 〈군말〉은 인류가 자신들의 자유만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면서 인류의 존재 기반인 지구 시스템을 파괴한 어리석음에 대해 미리 쓴 경고문으로 다가온다. ■
이선이
경희대학교에서 한용운 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저서로 《근대 문화지형과 만해 한용운》 《만해시의 생명사상 연구》 《생명과 서정》 《상상의 열림과 떨림》 등이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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