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

[스크랩]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1

수선님 2018. 1. 14. 13:00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1-

 

 

 

<화엄일승법계도> '법계도' '법성게'등으로도 불리는데

<화엄경>의 사상을 그 핵심만 들어 간략히 정리했을 뿐만 아니라

해동화엄(海東華嚴)의 발원지가 된 명문(名文)이다.

가히 유식에서의 <유식삼십송>에 비견할 '화엄삼십송'이라 할 만하다.

 

저자는 해동화엄의 초조(初祖) 의상(義相, 625-702)이다.

의상은 황복사에서 출가하여 원효를 만나 같이 입당. 유학을 꾀하게 된다.

1차의 입당 시도는 실패하고, 36세 때 행한 2차의 입당 시도는 성공하여

중국 화엄의 기초자 지엄(智儼)에게 사사하였다.

이때 현수 법장과는 동문(同門)이 되었다.

<법계도> 역시 <화엄경>의 대의를 간추려, ()으로 만들어

지엄에게 제시.인가를 받았다고 한다.

귀국하여 이른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을 건립하고 십대제자(十大第子)를 두었다.

의상의 가풍(家風)은 원효와는 대조적으로 차분하며 온화하게

도제양성의 승가 내적 불사에 매진하였다.

 

<법계도>에서 의상은 먼저 7 30 210자의 도인(圖印)을 제시하고

이어서 이를 2()으로 나누어 해석한다.

즉 구성을 살펴보면 첫째 대의 및 도인, 둘째 석문(釋門)이다.

문장을 풀이한 석문은 다시 총석인의(總釋印意)와 별해인상 (別解印相)으로 나누고

별해인상은 도인의 글이 지니고 있는 모습에 대한 설명인

'설인문상(設印文相)' 문자의 형상에 관한 해석인 '명자상(明字相)',

문장을 뜻 풀이한 '석문의(釋文義)'로 이루어져 있다.

 

<법계도>에 나타난 의상의 화엄사상도 성기(性起)사상이다.

그것은 <법계도> 의 첫 구절 '법성원융 무이상'에서 나타난다.

법성(法性)은 언어가 끊어진 불가설이고 본래 적정한 증분(證分)인데

이것이 진성(眞性)으로 대체되면서 연기분(緣起分)이 성립된다.

법성이 연기하는 것(性起) <법계도>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기와 연기는 둘이 아니다.

성기 즉 연기. 연기즉성기인 것이다.

 

주석서로는 직계제자의 주해를 모은 <법계도기총수록> 

균여. 설잠. 유문의 것이 있으며 모두 현존한다.

뿐만 아니라 보조선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법계도(法界圖)

 

법계도는 화엄교학의 대가 의상(625-702)<화엄경>의 광대무변한

진리를 압축한 게송을 하나의 도인(圖印)으로 나타낸 것이다.

원래 이름은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이나 흔히

'법계도' '해인도'라고 하며, 게송은 '법성게(法性偈)'라 한다.

법성게는 730 210자의 짧은 시문(詩文)이고

법계도는 이 시문을 54()의 네모꼴 도인(圖印)에 합쳐서 만든 인장(印章)이다.

 

의상이 법계도를 완성한 것은 668 7월이다.

스승 지엄(智儼)화상은 자신이 그린 72()보다

의상의 1()이 더 훌륭하다고 칭찬하고 인가했다.

의상은 인()이란 형식의 법계도를 짓게 된 까닭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그물과 같은 교법이 포괄하는 삼종세간(三種世間)

해인삼매를 좇아 드러내이름에만 집착하는 무리들로 하여금

이름마저 없는 참된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다.

 

삼종세간이란 물질의 세계(器世間), 인간들의 세계(衆生世間),

지혜의 세계(智正覺世間)를 말한다.

흰 종이에 붉은 도인(圖印)의 줄()과 검은 글자를 써서 만든

법계도의 백지는 기세간, 검은 글자는 중생세간,

붉은 줄은 지정각세간을 나타낸 것이다.

3종세간이 별개의 것이 아니면서도 따로 이해해야 함을 표현했다.

 

법성게는 의상이 자증(自證)한 화엄사상의 요체다.

의상은 법성게를 자리. 이타. 수행방편. 공덕 등으로 구분하여 풀이하고 있다.

지극히 과학적이고 조직적인 법계도의 게송은 중앙에서

'()'자로 시작해서 다시 중앙에서 '()'자로 맺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교의식이 집행될 때 반드시 법계도를 그리고

법성게를 독송하면서 회향한다.

그래서 불자들은 법계도. 법성게와 친숙하다.

 

 

의상(義湘)

625(진평왕 7)-702(성덕왕 1). 신라시대의 고승으로 우리나라 화엄종의 개조이다.

성은 김씨(송고승전에서는 박씨). 19세 때 경주 황복사에서 출가하였다.

진덕왕 4(650) 원효와 함께 당나라에 가려고 요동까지 갔으나

첩자로 오인 받아 붙잡혀 되돌아왔고, 10년 뒤 두 번째 시도에서

원효는 도중에 돌아오고 의상 혼자만 당나라로 들어갔다.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로 가서 지엄(智儼 ; 중국 화엄종의 제2)

문하에서 현수(賢首)와 같이 화엄을 공부했다.

그때 지엄에게 지어 올린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지엄은 자신의 '73()'보다 훌륭하다고 칭찬했다.

우리나라 불교의식에서 빠지지 않는 <법성게>가 바로 <화엄일승법계도>의 내용이다.

그 뒤 현수는 중국 화엄의 제3조가 되고 의상은 670(문무왕 10) 귀국하였다.

귀국동기는 <삼국유사>에서는 당나라의 신라 침략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 하고

<송고승전>에서는 화엄대교(華嚴大敎)를 펴기 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해 낙산사 관음굴에서 관세음보살께 기도를 드렸는데 이때 쓴 261자의

간결한 <백화도량발원문>에서 그의 관음신앙을 엿볼 수 있다.

그 뒤 676년 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고 화엄을 강술하여

우리나라 화엄의 시조가 되었다.

그는 또 화엄대교를 선양하기 위하여 화엄사.해인사 등 화엄 십찰을 건립하였다.

이 밖에도 불영사. 삼막사. 초암사 홍련암 등을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상의 교화활동 중 가장 큰 업적은 제자들의 양성이었다.

그에게는 3,000명 이상의 제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 유명했던 사람으로

오진. 지통. 표훈. 의적 등 10명의 제자가 있었다.

692(효소왕 1) 현수는 승전(勝詮)이 신라로 귀국할 때 그의 저서

<화엄경탐현기>그 비판을 구하는 서신을 보냈는데, 그 친필이 현존하고 있다.

저술로는 <화엄일승법계도> <백화도량발원문> 1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1,

<입법계품초기> <소아미타의기(小阿彌陀義記)> 1권,

최근에 발견된 <일승발원문(一乘發願文)>이 있다

 

 

법성게(法性偈)”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

無名無相絶一切 證知所知非餘境 (무명무상절일체 증지소지비여경)

眞性甚深極微妙 不守自性隨緣成 (진성심심극미묘 불수자성수연성)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

九世十世互相卽 仍不雜亂隔別成 (구세십세호상즉 잉불잡란격별성)

初發心時便正覺 生死涅槃相共和 (초발심시변정각 생사열반상공화)

理事冥然無分別 十佛普賢大人境 (이사명연무분별 시불보현대인경)

能仁海印三昧中 繁出如意不思議 (능인해인삼매중 번출여의부사의)

雨寶益生滿虛空 衆生隨器得利益 (우보익생만허공 중생수기득이익)

是故行者還本際 叵息妄想必不得 (시고행자환본제 파식망상필부득)

無緣善巧捉如意 歸家隨分得資糧 (무연선교착여의 귀가수분득자량)

以多羅尼無盡寶 莊嚴法界實寶殿 (이다라니무진보 장엄법계실보전)

窮坐實際中道床 舊來不動名爲佛 (궁좌실제중도상 구래부동명위불)

 

출처 : 제이제이
글쓴이 : 제이제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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