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의 보배 비 허공 가득하지만 근기만큼만 담을 수 있어”
화엄경의 중심사상은 법계 연기…인드라망으로 펼쳐진 연기의 그물
십주품은 보살의 수행 과정을 가장 체계적으로 설명한 중요한 설법
항상 보살의 삶을 발원하며 생활에서 실천하는 불자가 되기를 기원

사진=통도사
‘화엄경’은 내용이 방대하여 설주와 설처, 설법의 내용이 다양합니다. 80권 ‘화엄경’은 7처 9회 39품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서 7처란 7번의 법회 장소를 말하고, 9회란 법회의 횟수를 말하며, 39품은 ‘화엄경’의 총 품수를 말합니다. 오늘 오전 제가 맡은 십주품은 제3회 15품에 해당하며, 법회 장소는 도리천입니다.
‘화엄경’의 중심사상 하나는 법계연기(法界緣起)입니다. 법계연기란 모든 존재와 현상이 서로 의존하며 관계 속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인드라망(因陀羅網)에 비유됩니다. 인드라망은 제석천의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그물입니다. 그물코마다 칠보의 보배구슬이 달려 있는데 각각의 보배구슬은 다른 모든 보배구슬을 비추며 끝없이 중중무진하게 이어집니다. 하나의 존재가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전체는 하나에 영향을 미친다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사상을 보여줍니다.
십주품은 보살의 수행 과정을 설명한 부분입니다. 이 품은 보살이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52위의 수행 계위 중 십신위를 지나 제11위에서 제20위까지 해당하는 십주(十住)를 상세히 다룹니다. 십주의 십(十)은 만수(滿數), 즉 가득 찬 수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우주를 표현하는 개념으로 동·서·남·북의 사방(四方)과 간방의 사유(四維) 그리고 상하(上下)를 포함한 모든 방향을 시방(十方)이라 했습니다. 명리학에서는 천간(天干)의 열 가지, 갑(甲)·을(乙)·병(丙)·정(丁)·무(戊)·기(己)·경(庚)·신(辛)·임(壬)·계(癸)를 십간이라 불렀습니다. 불교에서도 십악(十惡), 십선(十善) 등 많은 용례가 나옵니다. 이렇게 십이라는 숫자는 가득함과 완전함의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십주의 ‘주(住)’란 보살의 수행 단계에서 10신위(十信位)를 지나 진리의 이치에 안주하는 경지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주’는 머문다는 것을 넘어 마음이 진리에 깊이 자리 잡아 흔들림 없이 평온한 상태를 뜻합니다. 이는 마음을 어디에 머물게 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개념일 뿐 아니라 우리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깊이 성찰하게 합니다.
‘금강경’ 제2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에서 이러한 주제에 대해 수보리가 세존께 하는 질문이 나옵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와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했다면 마땅히 어떻게 머무르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금강경’의 핵심적인 물음 중 하나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 보리심을 일으킨 사람, 즉 발심한 보살의 마음가짐과 수행 방법을 묻습니다.
여기에서 응운하주(應云何住)의 ‘주’가 나옵니다. ‘주’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단순히 머문다는 의미가 아니라, 마음이 안정되고 깨달음의 상태에 머무는 경지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발심하지 못한 중생은 육진(六塵, 색·성·향·미·촉·법)의 경계 속에 머물며 흔들리기 쉽습니다. 반면 발심중생(發心衆生)은 육진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보리심에 머물러 마음이 육진의 경계 즉 바깥 경계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마음이 본래의 자리에서 흔들림 없이 안정되고, 외부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온한 상태를 유지한다는 말입니다. 자타불이(自他不二)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기도를 성취한다고 할 때, 그 성취가 단순히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스로 반드시 이루겠다는 강한 행원의 힘(行願力)으로 끊임없이 정진하며 선근(善根)을 심어 나갈 때, 그 노력은 비로자나 법신(毘盧遮那法身)의 본원력과 계합됩니다. 이로 인해 기도가 성취되는 것입니다. ‘법성게’에 “중생들을 위한 보배 비가 허공에 가득 차 있지만, 중생들은 각자의 근기 따라 그 이익을 얻는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무량한 공덕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많아서 중생에게 두루 미치지만, 각 중생은 근기에 따라 가르침과 공덕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제 십주의 10단계를 설명하겠습니다. 첫째 발심주(初發心住)는 초발심주라고도 합니다. 보살이 깨달음을 위해 보리심을 처음 일으키는 단계로,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겠다는 마음의 자리입니다. 둘째, 치지주(治地住)는 발심한 다음 자신을 다스리는 단계입니다. 보살이 중생을 대할 때 내는 열 가지 마음, 이익심(利益心), 대비심(大悲心), 안락심(安樂心), 안주심(安住心), 연민심(憐愍心), 섭수심(攝受心), 수호심(守護心), 동기심(同己心), 사심(師心), 도사심(導師心)으로 자신보다 남을 생각하며 마음을 닦아가는 단계입니다. 세 번째 수행주(修行住)는 10가지 행을 통해 일체법(一切法)의 실상을 관찰하며 수행하는 과정입니다. 10가지 행이란 온갖 법이 무상(無常), 고(苦), 공(空), 무아(無我), 무작(無作), 무미(無味), 이름이 갖지 않음(不如名), 처소가 없음(無處所), 분별을 여읨(離分別), 견실하지 않음(無堅實)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보살은 10가지 행을 통해 법의 본질을 깊이 관찰해 수행이 깊어지고 안목이 넓어져서 궁극적으로 인식의 전환을 하게 됩니다.
네 번째 생귀주(生貴住)는 보살이 부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귀하게 태어나서 열 가지 법을 성취하는 단계입니다. 열 가지 법이란 영원히 부처님의 처소에서 퇴전하지 아니하며, 깊이 청정한 신심을 내며, 법을 잘 관찰하며, 중생과 국토와 세계와 업행과 과보와 생사와 열반을 잘 아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구족방편주(具足方便住)는 보살이 선근을 닦아 방편을 완전하게 갖추는 자리입니다. 이 단계에서 보살은 10가지 방식으로 일체중생을 이롭게 하는데, 일체중생을 구호하고, 중생에게 이로움을 제공하며, 일체중생을 안락하게 하고, 일체중생을 가엾이 여기며, 일체중생이 해탈의 길로 나아가도록 하고, 모든 재난을 여의게 하고,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청정한 신심을 일으키게 하고, 조복(調伏)함을 얻게 하고, 열반을 증득하게 합니다. 여섯 번째 정심주(正心住)는 올바르고 흔들림 없는 마음자리를 말합니다. 참된 보살은 보리심을 일으켜 그 마음이 확고히 결정되며, 어떤 상황에서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이를 ‘심정부동(心定不動)’이라고 표현합니다. 정심(正心)으로 마음이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는 경지를 의미합니다.
일곱 번째 불퇴주(不退住)는 보리심을 발한 참된 보살은 부처님이 있다거나 없다는 등 10가지 법을 듣고도 물러나지 않는 단계입니다. 부처님이 없고, 법이 없고, 수행자가 없고, 수행의 결과가 없다해도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자세를 말합니다. 누가 비난을 하거나 훼방을 놓아도, 굳건한 소신과 의지로 중도에 꺾이지 않고 깨달음을 향한 길에서 후퇴하지 않는 보살을 의미합니다. 여덟 번째 동진주(童眞住)는 순수하고 무심(無心)한 마음 상태를 유지하는 단계입니다. 신중탱화의 중앙에는 동진보살이 있습니다. 천진난만한 아이의 성품을 지닌 동진보살은 원래 32천의 우두머리인 위태천신으로, 유리광불이 출현했을 때 득도하여 보안보살로 불렸고, 이후 석가여래 회상에서 다시 도를 이루어 불법을 전파하는 중요한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아홉 번째 법왕자주(法王子住)는 보살이 법왕, 곧 부처님의 아들로서 불법을 완전히 이해하고 체득한 상태를 말합니다. 마치 왕을 이어받을 준비가 된 왕자처럼 이 단계에 오르면 더는 다른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불법을 통찰하여 명확히 압니다. 이 보살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계승하여 중생들에게 전하고, 그들의 고통을 구제하며 끝없는 자비와 지혜를 실천하는 수행의 궁극적 경지에 다다른 지도자의 역할을 펼칩니다.
열 번째 관정주(灌頂住)는 왕자가 관정식에서 왕위에 취임하는 것같이 보살이 10가지 지혜, 즉 일체종지를 얻어 최고 자리에 앉는 단계입니다. 여기서 ‘관정’은 산스크리트어 비세따(abhisekana)에서 유래한 개념입니다. 고대 인도의 왕위계승 의식에서는 사해(四海)의 물을 합하여 왕자의 정수리에 붓는 관정식을 거행했는데 이는 왕이 사해를 다스릴 권위를 부여받았음을 상징하는 의례였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관정주는 보살이 수행을 통해 십주의 최고 자리에 오른 상태를 의미합니다. 보살로 모든 덕목을 갖추고 지혜와 자비를 구현하는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자식입니다. 항상 부처님의 품 안에서 머물며, 부처님의 품 안에서 보리심을 일으키고, 부처님의 품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보살이 머무는 처소는 단순히 머무는 장소가 아니라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마음 상태를 의미합니다. 언제나 부처님의 품 안에서 이루어지는 보살의 삶을 발원하며 실천하는 불자님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지난 2024년 12월12일 영축총림 통도사에서 봉행된 ‘불기 2568년 화엄산림’ 12일차 법회에서 통도사 강주 인해 스님이 ‘십주품’을 주제로 설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767호 / 2025년 3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영축총림 통도사 강주 인해 스님 - 법보신문
‘화엄경’은 내용이 방대하여 설주와 설처, 설법의 내용이 다양합니다. 80권 ‘화엄경’은 7처 9회 39품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서 7처란 7번의 법회 장소를 말하고, 9회란 법회의 횟수를 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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