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영원한 제자, 원택스님

▲ 원택스님
"'자기를 바로 봅시다. 남을 위해 기도합시다. 모르게 남을 도웁시다.'
큰스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더 의미있게 다가옵니다."
스승 생전 22년, 스승 입멸 31년, 스승의 손발이 되었던 제자는 이제 80살이 넘은 노승(老僧)이 됐었지만
아직 시봉을 마치지 못했다. 스승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법어로 유명하신 현대 한국불교의 거목
성철(性徹)스님, 그분을 53년 동안 시봉든 제자는 원택(圓澤)스님이다.
태산거두(太山巨頭)의 불같은 스승 곁에는 항상 염화미소(拈花微笑)의 제자가 있었다.
1993년 11월 성철스님 입멸 후 스승의 가르침을 빠짐없이 새긴 책을 출간했고, 성철스님은 34명의 제자가
있었건만 스승의 사리를 모신 사리탑과 기념관을 세우고, 쓰러진 생가를 복원한 건 상좌(上佐) 원택이었다.
스승이 추구했던 정신세계와 육신의 흔적을 알리는 데 온몸을 바쳤다.
불가에서는 '상좌를 제대로 만나야 스승이 대접받는다'는 말이 있다.
이런 연유일까. 원택이 없었으면 오늘날 성철이 없었을지 모른다.
가야산 호랑이를 은사로 모셨던 원택스님에게 지금껏 가슴에 남는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언제인지 물었다.
큰스님께서 1981년 한국불교의 지도자인 대한불교조계종 6대 종정(宗正)에 추대되고 나서 첫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았습니다. 법어 내려주실 것을 부탁드렸는데 여느 때와 달리 웬일인지 쉽게 승낙하셨습니다."
그러나 스승이 내려준 법어는 온통 한자 투성이였다. 진주중학교에 합격했으나 몸이 약해 그만둔 후 20대
초반까지 독학을 통해 동서양 지식을 습득하고 한학에 매진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제자는 야단맞을 각오로 "옛날처럼 산중의 스님이 아니니 이해하기 쉬운 언문 법어를 내려주셔야 합니다"
하고 건의했다. 내려온 법어는 이전보다 나아졌지만 여전히 어려운 한문이 절반, 언문이 절반이었다.
제자는 엎드려 다시 간청했다. 스승은 "그놈 참, 애 믹이네. 다시 생각해 보자" 한 뒤 명일 법어가 내려왔다.
한국 불교사상 처음으로 언문(諺文) 법어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明日
"모든 생명을 부처님같이 존경합시다.
만법의 참모습은… 거룩한 부처님과 추호도 다름이 없어서 일체가 장엄하고 숭고합니다.
" 이듬해 부처님 오신 날 법어는 그 유명한 '자기를 바로 봅시다'이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원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주러 오셨습니다." 언문 법어의 탄생은 천 년 동안 산속에 머물렀
던 불교가 비로소 산에서 내려와 민중 속으로 들어간 것을 의미했다. 사람들의 손을 따뜻하게 잡은 것이다.
팔십 평생 살아오면서 그때처럼 가슴 벅차고 행복한 순간이 없었습니다." 노승의 눈가에 물기가 촉촉했다.

▲ 영원한 스님과 제자.
원택스님은 지금은 대구광역시가 된 서쪽 달성군에서 1944년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여무의(余武義).세상이름조차 범상치 않다. 부친은 일제압제 자동차 정비를 배운 신기술자였다.
해방되자 작은 정비공장을 열었고 이때부터 가세가 피어났다. 원택 밑으로 여동생 셋과 남동생이 있었
지만 부모님의 교육열과 부유한 가정환경 덕분에 그 옛날 모두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원택은 어떤 아이였을까. 평범과 비범함을 동시에 지닌 아이였다고 할까. 행동은 곰같이 느렸지만 사리
분별은 여우처럼 빨랐다. 어른들과 장기를 두다 연속으로 이겨서 상대가 화가 날 즈음 한 번씩 져 주었다.
지방 명문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집안뿐 아니라 마을의 경사였다.
고교생이 된 원택은 불교학생회에 가입했다. 하지만 공부에 치여 불교는 조금씩 멀어졌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원택은 ROTC에 지원했다. 장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신체검사에서 낙방했다. 그의 병명은 고막파열로 인한 난청과 평발이었다.
이때 ROTC 장교가 됐다면 성철스님을 시봉하느라 고생하는 대신 4성 장군이 되었을지 모른다고 웃었다.
스님의 풍모나 인품을 보면 4성 장군이 가능했을 것 같다.
대학 졸업을 전후해 행정고시를 봤던 스님은 몇 차례 낙방한 뒤 친구와 함께 해인사 백련암을 찾았다.
친구가 해인사에 이름 높은 스님이 계시니 인사라도 드리자고 권유했다. 1970년 늦은 겨울이었다.

▲ 입산 초기의 원택스님(사진 왼쪽)과 성철스님.
고교 때부터 간간이 불교 서적을 읽긴 하였지만 큰스님으로부터 좋은 말씀이라도 듣자는 말에 솔깃한
거지요. 큰스님은 눈빛이 형형해서 감히 쳐다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목소리도 쩌렁쩌렁하여 호랑이를 마주한 것 같았습니다.저희를 보자마자 '웬놈들이고?' 야단치시는데
제가 당돌하게 '스님, 뵙게 된 기념으로 좌우명이나 하나 주이소' 하고 말씀드린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그러자 '네 깐 놈들이 무슨 좌우명이고? 그럼 대가로 삼천 원을 내놓아라' 하시는 겁니다.
'여기 있심더' 하고 제가 지니고 있던 삼천 원을 내놓으니 갑자기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난 그런 돈 필요 없다. 삼천 배를 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삼천 배가 만 배가 되고, 결국 이조차 다하지
못 하고 절을 내려가게 되었지만 성철스님은 좌우명을 주셨습니다. '속이지 마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질긴 인연이 돼서 결국 제가 입산하게 된 것이지요." 사람 낚는 어부처럼 성철스님은 원택스님의
그릇을 알아보고 그를 낚았다.
이때부터 모진 시집살이가 시작됐다. 행자승이 된 날부터 시도 때도 없이 불호령이 떨어졌다.
따귀를 맞고, 발길질 차이고 엉덩방아를 찧고 하루도 평탄한 날이 없었다. 한 사람은 야단치고,
다른 사람은 야단맞기 위해 태어난 운명처럼 보였다.
법정스님은 호랑이 같은 스승과 곰 같은 제자를 보고 "성철스님은 저렇게 급하고 격한데 원택은 느리고
느긋하니 찰떡궁합"이라했다. 이에 원택은 "찰떡이 아니라 악연입니다.
제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무서운 스님을 만났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한탄했다.
이 말을 듣고 법정스님은 파안대소했다. 성철스님은 제자 원택에게 일을 맡기면 꼭 세 번 물었다.
"너 그 일 다했나?" "예" 하고 대답하면 한참 있다가 "너 시킨 일을 빈틈없이 끝마쳤다고 했제? 참말이가?"
하고 다시 물었다. 그러다 잊을 만하면 한 번 더 "너, 일 다 끝낸 것 맞제?" 하고 재차 물었다. 원택스님은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스승이 왜 세 번씩이나 묻는지 말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자신있게 대답했지만 스승이 세 번씩이나 다그치자 자신이 과연 일을 제대로 했는지
자신이 없어졌을 뿐 아니라 일을 했다는 사실조차 가물가물해졌다. 그렇다면 왜 스승은 세 번씩이나 어린
제자에게 다짐을 받았을까.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원택스님은 스승의 질문이 대답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자를 참말하는 진실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가르침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날 하안거 백중을 맞아 3박4일 아비라기도를 하는데 신도회장이 스님과 신도들에게 수박공양 하자고
제안했다. 장에서 사 온 수박을 시원하게 계곡물에 담가두었다가 명일 가장 더울 때 스님과 신도들이 둘러
앉아 수박을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제대로 먹지 않고 버린 수박이 문제였다.
쓰레기통에 던져진 수박을 발견한 큰스님의 눈이 뒤집혔다. "농부의 정성을 생각해야지. 기도하지 말고 싹
다 가던지, 아니면 쓰레기통에 처박아 놓은 수박을 꺼내 속살까지 먹던지 선택하라!" 하는 엄명을 내렸다.
신도회장이 엉금엉금 앞으로 나와 손이 발이 되도록 빈 뒤 신도들은 쓰레기통에서 먹다 버린 수박을 꺼내
씻은 뒤 모두 남김없이 먹었다.

▲ 백련암에서 담소 나누는 모습. 왼쪽부터 원영스님, 성철스님, 법정스님, 원택스님
성철스님은 평생 몸으로 근검절약을 실천했다. 고희를 넘기고도 내복과 옷가지를 손수 기워 입었다.
화장지 한 장을 네 조각이나 여섯 조각으로 잘라 썼다.
이쑤시개도 한 번 쓰고 버리지 않고 가지고 다니며 깎아서 썼다. 보통 산사에선 밤 9시에 자고 새벽 3시에
일어나 예불을 시작하지만 스님은 더 늦게 자고 더 일찍 일어났다. 체력 좋은 것도 있었지만 수도 생활에
누구보다 철저하셨다. 새벽 3시가 되어 처소에 가면 큰스님은 벌써 백팔배를 마치고 선체조와 냉수마찰을
하고 있었다. 스승은 그런 사람이었다.
성철스님은 1936년 해인사 백련암에서 하동산(河東山 1882~1943) 스님을 은사로 출가, 4년 만인 1940년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득도했다고 한다. 7년 후 문경 봉암사에 성철스님을 필두로 한국불교를 짊어질
젊은 스님들이 모였다. 우봉, 보문, 자운, 향곡, 월산, 도우, 청담, 법전, 일타, 혜암 등이었다.
이들은 '부처님의 법대로 살자'고 결심하고 칠성각, 삼신각에 있는 무속 잡신을 정리하고 제사는 물론 시주
받는 것까지 금지했다. 비단으로 된 화려한 빛깔 가사를 불살라버리고 송광사에 보관된 보조국사 지눌의
장삼을 본받아 괴색(짙은 갈색)으로 통일했다. 아침은 죽을 먹고, 저녁은 간단히 먹는 것을 비롯해 '일하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일제에 의해 왜곡되고 오염된 한국불교를 해체하고 바로 세우는 개혁운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봉암사 결사'는 개혁적인 스님 20여 명의 기도공동체였다.
이 운동은 6.25 전쟁 때까지 3년 동안 지속되면서 오늘날 한국불교의 모태가 되었다.

▲ 성철스님의 친필 글씨(불기자심,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말라).
그 중심에는 스승 성철스님이 있었다. 스승은 봉암사 결사 후 대구 팔공산 파계사 성전암에 들어가 주변에
철망을 치고 눕지도 자지도 않는 장좌불와(長坐不臥)와 10년 동안 수행하는 선방이나 절 밖에 나가지 않는
동구불출(洞口不出)한 뒤 세상에 나왔다. 나오자 피 토하듯 사자후를 토했다. 성철스님은 운달산법회에서
스님과 불자들을 모아놓고 20여 일 동안 쉬지 않고 <반야심경>, <육조단경> 등을 설법했다.
1967년에는 해림총림의 초대방장으로 취임한 뒤에는 백일법문(百日法門)을 강론하면서 그 유명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란 법어를 탄생시켰다. 내용은 선(禪)을 기본으로 한 불교사상과 서양의 철학과 역사,
과학을 접목한 성철스님의 웅혼한 철학세계였다.
원택(圓澤)이란 둥근 연못, 큰 연못이란 뜻이다.
해인사 백련암에 가자고 해 불가의 인연을 맺어준 친구는 원택이란 법명을 받기 전부터 "너는 남을 말을 잘
들어주니 큰 연못 아이가?"라고 말하곤 했다. 1972년 초 출가한 원택은 얼마 안 돼 상기병에 걸렸다.
그는 스승이 1967년 백일법문을 녹음한 테이프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백련암에
보관 중인 카세트 테이프를 어렵게 구해 듣기 시작했다.
듣다 보니 혼자 듣기 아까운 귀한 내용이 있어 녹취하기 시작했다. 참선을 못 할 바엔 법문을 듣자고 결심한
것이 큰스님의 사상을 세상에 출간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 성철스님의 누더기옷과 검정 고무신.
하지만 스승은 제자가 법문을 정리한 걸 보곤 "어느 놈이 이 글을 옮겨 적었노? 꼴도 보기 싫다" 소리쳤다.
스승에게 불호령을 들으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성철스님의 법문집이 하나둘 출간되기 시작했다.
성철스님의 선불교 사상을 정리한 <본지풍광>, <선문정로>가 출간되자 스승은 비로소 "밥값을 했다" 칭찬
했다. 해탈에 이르는 방법을 둘러싼 돈점(頓漸)논쟁이 불붙고 송광사에서는 보조사상연구회가 만들어졌다.
<선림고경총록> 37권과 <임제록> 등 불교계의 중요한 책들이 원택스님 손을 거쳐 출간되자 1987년 불교
전문출판사인 '장경각'이 세워졌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골방을 찾은 것이 스승의 사상을 온 세상에 전파한 셈이었다.
우공이산 결과였다. 언젠가 출가 전 낳은 성철스님의 女息 불필(不必)스님이 불가에 입문하기 전 수경이란
속명으로 육신의 父를 찾아와 무엇이 행복이냐고 물었다. 이때 성철스님은 "부처님처럼 도를 깨친 사람은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대자유인이고, 그렇지 않고 세상에서 오욕락(五欲樂)을 누리고 사는 것은 일시적인
행복 아이가"하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딸은 크게 깨친 뒤 입산해 아버지를 따르는 불제자가 됐다.
비록 속가의 인연이지만 그 아버지와 그 딸이다.
원택스님은 불같은 스승으로부터 '곰 새끼'란 말을 들으며 22년간 시봉하면서 스승의 뜻을 한 번도 거스른
적이 없었다. 같은 문중 스님들로부터 '절구통 수좌'라고 놀림을 받으면서도 묵묵히 그의 길을 걸어왔다.
스승의 열반 이후에도 자신의 고집을 밀어붙였다. 바로 성철스님 사리탑 조성이다.
범상치 않은 독특한 외양과 규모는 문중뿐 아니라 불교계의 파란을 몰고 왔다.
새벽에 스님들이 몰려와 사리탑 조성을 위해 조성된 기단을 깨부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죽을 듯 고통스러웠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무소의 뿔처럼 밀고 나갔기에 결국 파격적인 모습의 퇴옹당 성철 대종사 사리탑(부도)이 탄생했다.

▲ (왼쪽 사진) 성철스님 다비식, (오른쪽 사진) 성철스님 사리탑 앞에서 삼천배 하는 불자들.
1993년 당시 국회 출입 기자였던 나는 이기택 대표, 김태식 원내총무 등 민주당 지도부와 함께 11월 10일
성철스님 다비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른 시간 해인사를 향해 떠났다.
"나는 좋은 옷 입을 자격이 없데이"하며 평생 누더기옷을 입었던 큰스님이 이날만은 세상에서 가장 화사한
국화옷을 입고 장례식장으로 이동 중이라는 뉴스를 버스 안에서 들었다.
해인사에 접어들기도 전 전국에서 몰려든 차량들로 고속도로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우리가 탄 버스는 해인사 인근 톨게이트에 들어서지 못하고 라디오로 다비식 상황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30여만 명의 인파가 모인 실로 장엄한 행사였다.
"보통 스승이 돌아가시면 제자가 훌훌 벗어버리고 명산고찰을 찾아 떠나는 것이 통례지만 스님의 법력은
저에게 족쇄가 되어 스님을 기리는 일을 하게 됐습니다. 이 또한 저에게 부여된 운명이지요." 원택스님은
자신보다 더 똑똑한 상좌가 있었으면 스승을 더 빛나게 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 대구 동화사에서 열린 원택스님의 대종사 품수식 (왼쪽부터 원당스님, 원택스님, 원타스님).
원택스님은 2021년 한국 불교계의 최고 어른인 대종사 품계를 받았다.
1971년 성철스님으로부터 출가를 권유받은 지 50년 만이다. 스승 생전 정성을 다해 시봉했고 돌아가시자
흠모하는 스승을 널리 알린 업적의 인과응보인지도 모른다. '곰 새끼'라고 소리치고 따귀를 때리던 스승은
임종을 앞두고 원택스님을 불러 "참선 잘하그래이" 하는 말을 남겼다.
그는 스승의 법문과 행적을 전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평생 부처님을 모시고 설법을 가장 많이 들은 제자
아난다가 스승의 열반 후 경전으로 부처의 말과 행동을 세상에 알린 것처럼. 성철이 백두산이라면 그는
백두산이 안고 있는 눈물샘 천지인 셈이다.
원택스님에게 가난과 질병, 전쟁으로 고통받는 중생을 위해 불교가 나아갈 바를 물었다.
한참 묵상을 하더니, "이제 인공지능을 통해 어려움을 해결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인간 스스로 서로를 존중하는 가치관을 정립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점점 어려워지겠지요.
불교가 앞장서 생명 존중의 사상을 높여야 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성철스님의 영원한 제자, 원택스님▲ 원택스님. '자기를 바로 봅시다. 남을 위해 기도합시다. 모르게 남을 도웁시다.'큰스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더 의미있게 다가옵니다.스승 생전 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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