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세계

직지인심 견성성불

수선님 2026. 4. 12. 12:31

직지인심 견성성불

(直指人心 見性成佛)

1.

조계종 종지(宗旨)는 조계종의 종헌이라고 하는 우리나라 헌법 같은 그런 것이다. 조계종은 우리나라 선종(禪宗)이라고 하는 조계종 종헌의 종지(宗旨) 제 1조에 이렇게 돼 있다. "조계종은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종지(宗旨)로 삼는다."는 문구가 있다. 그럼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것이 뭐냐? 이 문장은 조사선(祖師禪)의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그런 말이다. 당연히 방편(方便)의 말이지만, 어쨌든 조사선(祖師禪)의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직지(直指)라는 것은 곧 바로 가리키는 것으로, 직(直)은 곧 바로 곧장이란 말이다. 직접적으로 이런 뜻이다. 직접적으로의 반대는 간접적이다. 간접적으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지(指)는 가리킨다.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고, 손가락으로 가리킨다는 뜻이다. "가리킨다" 이것이다. 이렇게 가리킨다는 것이다. '무엇을 가리키느냐?' 인심(人心), 사람의 마음을 곧 바로 가리킨다. 왜냐하면 마음을 깨닫는 것이 깨달음이기 때문에, 또한 우리가 마음을 깨닫고자 하는 것이 불교 공부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깨달음이라는 것은, "무엇을 깨닫느냐?" 이렇게 물었을 때, 그것은 당연히 마음을 깨닫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갖추어져 있는 마음, 사람의 마음이다. 동물의 마음이나 식물의 마음, 이런 말은 할 수가 없고, 당연하게 사람의 마음이다. 그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모든 사람이 우리 각자가 다 가지고 있는 마음을 곧장 직접적으로 바로 가르쳐 주는 그런 뜻이란 말이다. 그런데 마음이라는 것은 대상(對象)은 아니다. 대상(對象)이 될 수가 없다. 무슨 말이냐 하면, 가리킨다는 말은 하지만, 마음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무엇을 가리킨다 할 때는, 저쪽에 있는 걸 가리킨다. 저쪽에 따로 있는 것, 밖에 있는 것, 그것을 대상(對象)이라고 한다. 대상(對象)은 저쪽에 있는 것, 따로 있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무엇을 가리킬 때는, 그것을 보든지, 듣든지, 이렇게 만져보든지, 생각을 하든지, 그렇게 해서 알 수가 있는데, 이런 것은 마음이 아니라, 대상(對象)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우리 각자의 마음이니까, 우리 마음은 바로 우리 스스로이다. 마음이라는 것은 우리 스스로에게서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러니까 내가 있고 내 마음이 있고,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내가 있고 내 마음이 따로 있으면, 내가 내 마음을 가리킬 수가 있고, 내가 내 마음을 보든지 어떻게 할 수가 있다. 그런데 '나(我)'라고 하는 게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게 '나(我)'라는 이 생각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있고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나(我)'라는 생각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음을 바로 가리킨다"하는 것은 사실은 뭔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인 것이다.

2.

무엇을 곧장 바로 가리킨다니까 무언가 따로 뭐가 있어야 꼭 가리키는 것 같은데, 손가락으로 가리킬 때도, 저쪽에 저기 이렇게 따로 있는 걸 가리키는 것인데, 마음은 저기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각자 자기 스스로에게 있어서 따로 있을 수 없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마음을 가리킨다는 것은 말로는 "마음을 직접적으로 바로 가리킨다" 그렇게 말을 하지만, 우리가 그 마음을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손으로 붙잡을 수도 없는 것이고, 머리로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왜냐?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알 수가 없다.

우리가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손으로 붙잡거나, 머리로 생각하면, 무언가 알 수가 있고, 몸으로 느껴볼 수도 있고, 뭔가를 할 수도 있는데, 그런 것이 아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그러니까 마음을 바로 가리키긴 하는데, 이거를 "아~ 저게 마음이구나" 이렇게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알 수는 없지만, 마음이라는 것은 우리 각자에게 이렇게 살아 있다. 살아있고, 항상 나타나 있고, 늘 이렇게 그 마음이 살아 있으니까, 우리가 살아있는 사람이다. 마음이 살아있지 않으면 그건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다. 마음은 분명히 이렇게 살아 있다. 살아 있는데, "뭐가 마음이냐" 이렇게 생각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알 수는 없다. 그러니까 마음은 이렇게 살아있고, 늘 이렇게 명백하게 살아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명백히 나타나 있다. 나타나 있는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따로 있고 마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나(我)'라는 것은 사실은 마음에서 만들어진 생각이기 때문에 이 '나(我)'라는 것은 사실은 이게 망상(妄想)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아상(我想)이라는 것은 망상(妄想)이다" 이런 말이 있다. '나(我)'라는 것은 마음이 활동을 해서 만들어낸 생각이란 말이다. 생각은 마음이 활동을 해서 만들어져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我)'라고 하는 거는 허상(虛像)이며, 헛것이다.

3.

'나(我)'라고 하는 것은 헛것이고 실제로는 마음이 있을 뿐이다. 내가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내가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이~~... 그렇게 마음 있는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 직지인심(直指人心)인데, 우리가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뭡니까?" "부처가 뭡니까?" "마음이 뭡니까?" "선(禪)이 뭡니까?" "도(道)가 뭡니까?" 이런 질문들은 전부 다 마음 하나를 묻는 것이다. 왜 그러냐? 마음을 깨달아야 깨달음이니까.

불교를 가르치는 스승에게 '선(禪)이 뭐냐', '도(道)가 뭐냐', '불법이 뭐냐', '부처가 뭐냐', '진여자성(眞如自性)이 뭐냐',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뭐냐', 어떤 식의 질문을 하더라도 말로는 여러 가지가 있는 것 같지만, 결국 뭘 묻고 있느냐면, 그것은 "뭘 깨달아야 됩니까?" 또는 "깨달음이 뭡니까?" 이것을 묻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뭐냐'면 우리가 이걸 보통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라든, 사실은 진여자성(眞如自性)이라든, 부처라든, 이름은 방편(方便)으로 만든 것이고, 실제로 이것, 이것 하나를 말한다.

누구에게나 이렇게 살아있는 것, 살아서 이렇게 활동하고 있는 이것 하나, 이것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고, 여기에 이렇게 한번 가리켜주는 게 그러니까 "똥막대기다" "잣나무다" 또는 '법상을 치고' '손가락을 세우고' '고함을 지르고' 하는 것이 전부 이것을 드러내는 것을 직지(直指)라고 하는 것이다. 직지(直指)는 알 수 없는 마음을 바로 가리켜주는 것을 전부 다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고 하는 것이다.

4.

깨닫기 위해 직지(直指)하는 말들을 우리는 화두(話頭)라 하기도 하는데, 화두(話頭)라 하든, 뭐라 하든, 그것에 이름을 일부러 붙일 필요도 없고, 하여튼 '부처가 뭐냐' '마음이 뭐냐' '도(道)가 뭐냐' '불법이 뭐냐' 물었을 때, '법상을 칠' 수도 있고, '손가락을 세울' 수도 있고 '안녕하십니까?' 할 수도 있는 것이고, '오늘은 비가 옵니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고, '밥 먹었냐' 할 수도 있는 것이고, 하여튼 '똥막대기' 할 수도 있고, '잣나무'라고 말을 할 수도 있고, 동작을 할 수도 있고, 어떤 행동을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전부 이 마음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게 직지(直指)를 하는 것인데, 그런데 이것은 알 수가 없다. 알 수가 없고 그냥 이렇게 가리켰을 때, 아는 게 아니고, 한번 그런 알음알이를 벗어나서, 아는 방향 그쪽이 아니다는 말이다. 직접적으로 이렇게 이것으로 체험(體驗)을 하고 그러면 아는 것이 아니니까, 체험(體驗)이란 말밖에 할 수가 없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뭔가를 분별을 한 것이고 생각을 한 것인데, 그것은 아니다. 그리고 분별을 하거나 생각을 하는 것은 전부 망상(妄想)이다. 망상(妄想), 그 쪽은 아니고 이것은 분별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분별하고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누구라는 게 있고 대상(對象)이 있다. 무엇에 대한 누가 무엇을 '안다, 모른다' 이렇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여기에는 누구라고 할 게 없고, 무엇이라고 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무엇(?)이다' 하는 것 자체가 다 마음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생각이기 때문에, 그것은 전부 망상(妄想)이다. 또 무엇이라고 할 것도 없고, 그냥 한번 이렇게 아무런 분별 없이 생각 없이, 이렇게 딱 체험(體驗)이 되고 감이 오는 것이다. 그래서 "통(通)한다" 하기도 하고 "체험(體驗)한다"고 그렇게 하기도 하고 "깨닫는다" 하기도 하고 "해탈(解脫)한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왜 '무엇으로부터 해탈(解脫)이냐?' 생각으로부터 벗어난, 여기에 통(通)하는 것은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해탈(解脫)한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것을 일러서 견성(見性)이라고 한다. 견성(見性)이란 것이 뭐냐면, 말 그대로 볼 견(見)자와 자성 성(性)자니까 자성(自性)을 본다는 뜻인데, 자성(自性)이라는 것은 마음의 본성(本性)을 가리키는 것이니까, 역시 분별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이것을, 이것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5.

자성(自性)이란 게 따로 있고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분별할 수 없는 마음 자체 그 자체를 자성(自性)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분별할 수 없는 이것을 진여자성(眞如自性)이라고 하고, 여기에 통(通)하는 것을 '자성(自性)을 본다' 그렇게 말 하지만 눈으로 보는 것은 아니고 깨닫는 것이고, 체험(體驗)하는 것이고, 통(通)하는 것이다.

통(通)하는 그것을 견성(見性)이라고 그러는 것이고, 그 견성(見性)이 바로 성불(成佛)이다. 성불(成佛)이라는 것은, 이룰 성(成)자와 깨달을 불(佛)자이며, "깨달음을 이룬다" 이 말이니까, 깨닫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견성(見性)이 바로 깨달음이다" 이런 말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이란 말은, 선(禪)에서 나온 말이다. 불교의 선(禪)이라고 하는 것과, 깨달음이라는 것은, 마음을 깨닫는 것인데, 마음을 바로 이렇게 가리키는 것이고, 선(禪)의 가르침도 마음을 바로 가리키는 것이다. 가르쳐서 설명해 주는 게 아니고 그냥 바로 곧장 이렇게 살아있는 마음을 "눈 앞에 떼어 놓고 딱 가리킨다" 이 말이다. 바로 이렇게 직접적으로 바로 가리키는 것이지, 설명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가리키고 생각 없이 분별 없이 알음알이 없이, 무엇을 아는 게 아니라 그냥 툭, 통(通)해서 체험(體驗)이 되는 것, 그것이 견성(見性)이다. 그래서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이것이 선(禪)이다.

6.

그리고 문자를 세워서 설명해 주지 않으니까 이것을 불입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그렇게 말을 하기도 하고,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 "문자를 세워서 가르치지 않는다"고 해서 불입문자(不立文字)이며,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는 말이다. 교외별전(敎外別傳)이란 것은 교(敎)는 설명이다. 언어 문자를 통(通)한 설명 외에 그 밖에서 따로 전(傳)한다. 어떻게 전(傳)하냐? 바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마음과 마음이 만나서 마음과 마음으로 바로 통(通)한다. 이런 뜻이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은 만나서 바로 통(通)할 수 있으나, 경전공부의 언어 문자는 책 속에 쓰여져 있기 때문에, 바로 만날 필요가 없다. 그냥 책을 보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은 직지(直指)가 아니다. 그런 것은 간접적인 것이고, 마음에 대한 설명문이다.

선(禪)은 반드시 가리키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바로 만나서, '마음이 뭐냐' '이것이다'. '도(道)가 뭐냐' '이것이다'. '법(法)이 뭐냐' '이것이다' 하고 면전에서 대면하고 그 앞에서 마음과 마음이 서로 만나서 통(通)하는 이것이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말이다. 만나서 바로 이렇게 가리키고 생각 없이 통(通)하고 이게 선(禪)이고, 이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가장 지름길이고 빠른 길이다. 그런데 이것은 "아~ 이렇게 깨닫는다"라고 하는 믿음이 있어야 된다. 그 믿음을 가지기까지가 쉽지는 않다.

7.

마음이라 그러면 다 그냥 내 마음이 지금 더러우냐, 혼란스러우냐, 시끄러우냐, 착하냐, 악하냐, 그리고 고요하냐, 들떠 있냐, 안정돼 있냐, 나약하냐, 아주 강하냐, 전부 이런 식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전혀 이것은 그런 것 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다.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인데,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생각 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생각할 수 없는 이 마음을 이렇게 "바로 가리키고 바로 통(通)한다" 이러면 굉장히 생소한 매우 뜻밖의 일처럼 여긴다. 보통 사람들은 지금까지 마음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접근해 본 적이 없으니까 당황 할 수 있다.

그래서 마음을 바로 가리키고 이 마음을 느낄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다. 그냥 즉각적으로 바로 체험(體驗)을 해서 깨닫는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평소에 그 생각했던 것하고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러니까 선(禪)이라는 게 굉장히 쉬운 공부 방법이지만, 처음에 접근할 때는 어렵다. 너무 좀 뭐랄까 너무 생소한, 너무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와 너무 좀 다른 그런 것이기 때문에, 처음에 접근할 때가 좀 어렵다. 처음 공부하는 사람은 믿음을 가지고 꾸준히 접근해야 하는 것이 선(禪)공부이다.

불교라는 것은 깨달음인데 깨달음이라는 것은. 우리 각자 자기 마음을 깨닫는 것이고, 마음이란 것은 우리가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고, 직접적으로 체험(體驗)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이다. 이런 말들을 사람들이 잘 듣지도 않았고, 들어본 적도 없고 잘 모르는데, 이런 걸 듣고 그래 "마음은 그런 거구나" "그렇게 깨달으면 되겠구나!"하고 이해를 하고 그렇게 믿음을 갖추면, 선(禪)이야말로 깨달음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다. 그래서 이런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이 조사선(祖師禪)은 한마디로 얘기하면 "깨달음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렇게 말할 수가 있다.

 

 

 

 

 

 

 

 

직지인심 견성성불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1.조계종 종지(宗旨)는 조계종의 종헌이라고 하는 우리나라 헌법 같은 그런 것이다. 조계종은 우리나라 선종(禪宗)이라고 하는 조계종 종헌의 종지(宗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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