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세계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

수선님 2026. 5. 10. 12:36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모든 나쁜 짓을 저지르지 말며, 모든 착한 일을 받들어 실천하라.」

이 말은 초기경전 중의 <출요경(出曜經)>과 <법구경(法句經)> 등에서 설하는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에 나오는 말인데, 아주 보편적인 가르침이라 할 수 있겠다.

‘칠불통계’란 ‘과거칠불(過去七佛)’이 공통적으로 하신 훈계를 말한다. 부처님은 석가모니 이전에도 여섯 분이 계셨고, 석가모니는 일곱 번째 부처님이시다. 이들 일곱 분을 통틀어서 과거칠불이다 한다. 과거칠불을 아래와 같다.

첫 번째 부처님은 비바시불(毘婆尸佛),

두 번째 부처님은 시기불(尸棄佛),

세 번째 부처님은 비사부불(毘舍浮佛),

네 번째 부처님은 구류손불(拘留孫佛),

다섯 번째 부처님은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

여섯 번째 부처님은 가섭불(迦葉佛),

그리고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은 일곱 번째 부처님이시다. 이 일곱 부처님을 총칭해서 ‘과거칠불’이라고 한다.

‘칠불통계’란 이 과거 일곱 부처님이 한 분도 빠짐없이 공통으로 한 훈계라는 뜻이다. 모든 부처님이 출현했던 초기에는 제자들의 마음이 청정해서, 세세한 계율을 제정할 필요가 없었고 다만 한 게송으로써 모든 경우의 계율을 회통했기 때문에 통계(通戒)라고 했을 것이다.

어쨌든 ‘칠불통계게’는 과거칠불의 공통적인 가르침으로서,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불교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정의요, 훈계이면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칠불통계게(七佛通誡偈)’의 내용은 문헌에 따라 약간씩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淨其意), 시제불교(是諸佛敎)」

• 제악막작(諸惡莫作) - 모든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으며,

• 중선봉행(衆善奉行) - 모든 착한 일을 받들어 실천하고,

• 자정기의(自淨其意) -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라.

• 시제불교(是諸佛敎) -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여기서 제1구 제악막작(諸惡莫作)은 옛 인연을, 제2구 중선봉행(衆善奉行)은 새 인연을 비유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옛 인연은 과거의 나쁜 습관 ‧ 악우(惡友) ‧ 악업(惡業) ‧ 번뇌 등을 상징하고, 새 인연은 현재와 미래의 좋은 습관 ‧ 선우(善友) ‧ 선업(善業) ‧ 열반 등을 상징한다.

따라서 좋지 못한 옛 인연은 마땅히 끊어야 하고, 좋은 새 인연은 마땅히 새로 지어야만 한다. 경전에서 나쁜 벗을 멀리 여의고, 어질고 착한 벗을 가까이 하라는 가르침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이 게송을 얼핏 보면 지극히 평범한 가르침인 것 같지만, 자세히 음미해 보면 불교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악을 경계하고 선을 권장하는 것이야 일반적인 도덕이나 다른 종교에서도 마찬가지이고, 뭐 그리 특별할 게 없다.

그러나 ‘스스로 그 마음을 청정하게 하라(自淨其意)’는 구절을 주의 깊게 봐야한다.

이에는 불교의 미묘한 사상적 입장이 깃들어 있고, 선악에 대한 불교의 독특한 관점이 반영돼있다.

불교는 현실적 질서와 윤리를 중시하면서도 생로병사, 즉 죽음의 실존적 한계상황으로부터 우리들 중생을 해탈시켜 구제하는 것을 그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다.

동시에 불교는 그 어떠한 절대자나 초월자 그리고 그들의 전지전능한 권능에 의한 구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사물과 존재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제법실상(諸法實相)]을 지혜의 빛에 의해 깨달음으로써 구제를 성취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범부 중생들은 무명(無明)과 탐욕, 또는 탐ㆍ진ㆍ치(貪瞋痴) 삼독(三毒)에 의해 마음이 항상 흔들리고 혼탁해서 제법(諸法)의 실상을 바르게 볼 수가 없다.

하지만 수행정진해서 마음이 고요하고 청정해지면, 일체만유의 참모습, 또는 우주와 인생의 참다운 진리가 그대로 드러나 깨달음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 그 마음을 청정하게 하라’는 가르침 속에는 이런 불교 메시지가 담겨있다.

이는 보편적이고 타당한 진리를 상징하면서, 어느 한곳, 혹은 한때에 그치지 않고 동서고금을 통해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는 불변의 가르침으로서, 불교 교의에 대한 간결하고도 분명한 가르침인 것이다.

“불교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묻는 물음이다.

그리고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를 비롯한 수많은 선지식들이 이 물음에 응답해 왔다.

팔만대장경은 물론 지금도 수없이 출간돼 나오는 불교서적은 이 영원한 물음에 대한 응답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 대한 정의는 이처럼 다양하고 복잡하지만 우리들에게 불교를 참으로 쉽고 간략하게 정의해 주고 있는 게송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이다.

옛날 중국 당나라에 조과 도림(鳥窠道林, 741~824) 선사라는 분이 계셨다. 도림은 법명이고 조과는 호인데, 당시 사람들이 조과(鳥窠, 새둥지) 선사, 작소(鵲巢, 까치집) 선사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스님은 가지와 잎이 무성한 낙락장송(落落長松)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좌선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당나라 시대 유명한 시인 백거이(白居易-白樂天, 772~846)가 권력 다툼을 피해 항주(杭州)로 내려가 그곳에서 자사(刺史) 벼슬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자신의 관할지역 내에 고승 조과 도림(鳥窠道林, 741~824) 선사라는 분이 계신 것을 알았다.

항주자사(杭州刺史)로 부임한 시인 백거이(白居易, 樂天)가 이 소문을 듣고 하루는 수행원을 거느리고 그 부근 사찰에 거주하는 도림 선사를 뵈려고 찾아갔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스님이 나무 위에 앉아 좌선하는데, 그 모습이 위태로워 보여서 말하기를,

“선사께서 계신 곳이 몹시 위태합니다.”라고 소리치자, 스님은,

“그대가 더 위태하네.”라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백낙천은 그 뜻을 알 수가 없어서,

“저야 벼슬이 자사이고 이렇게 땅 위에 있는데 뭐가 위태롭습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선사가 말했다.

“장작과 불이 서로 사귀는 것과 같이 망상과 망념이 끊어지지 않으니 어찌 위험하지 않겠소? 밖으로는 높은 벼슬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정치력을 발휘해야 하고, 안으로는 처자식을 거느리고 보살핌으로 인한 심화(心火)가 끊어지지 않으며, 티끌 같은 세상 지식으로 교만한 마음만 늘어 번뇌가 끝이 없고, 탐욕의 불길이 쉬지 않으니 어찌 위태롭지 않겠는가.”라고 쏘아 붙였다.

비록 단단한 땅 위에 발을 딛고 서 있다고는 하나 사바세계는 명리와 이해가 엇갈리는 위험한 곳이라, 그런 곳에 살고 있는 당신이 높은 나무에 있는 나보다도 더 위험하다는 말이었다.

지식인으로서 가진 자만과 벼슬아치의 처세에 대한 경계였다. 이에 움찔한 백낙천이 다시 여쭈었다.

“어떠한 것이 불법의 큰 뜻입니까(如何是佛法大意)?”

이에 스님의 대답은 간단했다.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 -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뭇 선행을 받들어 행하라.」

심오한 대답을 기대했던 백낙천은 그만 실망이 돼 말했다. 그래서 웃으며,

“그거야 삼척동자도 다 아는 게 아닙니까?” 그러자,

도림 선사가 말했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팔십 노인도 행하기 어려운 말이네.”

도림 선사는 높은 나무 위에 앉아 있지만 무사태평한 반면, 백거이는 사바세계에 시달리며 시비ㆍ분별심으로 세상을 살아가니 늘 긴장 속에 괴로울 수밖에 없다.

원래 세간의 삶이란 언제나 권력과 돈, 쾌락을 쫒는 이해타산이 바탕에 깔린 생존경쟁의 장이기에 자칫 방심하다가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위험천만이다.

그래서 도림 선사는 이 점을 일깨워주면서 분별심이 아닌 무심(無心)으로 살아갈 때 세간 속에서도 청정한 깨달음의 삶을 구현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선사의 가르침은 불법의 요체가 단순한 지식이나 앎이 아닌, 수행과 실천이 일치하는 지행합일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을 자부하던 백낙천이 아마도 ‘칠불통계게’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 마음을 깨끗이 하기”를 제대로 실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은 선악을 초월한 가운데 선을 행하면서 공덕과 지혜를 닦고 쓰는 것이다.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 쓸모가 없다. 가르침을 실천해 인격화하지 않으면 아만(我慢)과 번뇌만 더할 뿐 진리의 길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더구나 불법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일반적인 선문답은 뜰 앞에 잣나무[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니, 똥 막대기[간시궐(乾屎橛)]이니 하면서 기상천외한 답변이 주류를 이루는데, 도림 선사는 평범하고 쉬운 말로 백거이를 경책한 것이다.

이에 백낙천은 엎드려 큰 절을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백거이는 크게 깨쳐, 말년에는 출가해 불제자로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이 일화에서처럼 유학자라 해서 다 불교를 배척한 것은 아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처럼 편협한 지식인들이 있는가 하면, 여기 나오는 백락천처럼, 그리고 당대의 재상 배휴(裴休) 거사는 물론이려니와 소동파(蘇東坡) 같은 사람도 스스로 거사로 자처했으며, 심지어 성리학을 완성시킨 주자(朱子)조차도 그의 철학 핵심은 선불교에서 도입했을 정도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의 대표적 지식인이라 할 추사 김정희(金正喜) 같은 분은 불교이론에서도 일가를 이룰 정도여서 당대 최고의 선지식이라 할 백파(白坡) 대사와 격렬한 토론을 벌였을 정도였으며, 그와 마음을 나눈 막역한 친구가 초의(艸衣) 선사였음에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만큼 열린 마음의 지식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존중할 줄 알았던 것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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