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임제록 강설-序(서)
-臨濟錄(임제록)-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진주임제혜조선사어록) 序(서)
진주임제혜조선사어록 서문
延康殿學士(연강전학사) 金紫光祿大夫(금자광록대부) 眞定府路安撫使(진정부로안무사) 兼馬步軍都總管 兼(겸마보군도총관겸)
知成德軍府事(지성덕군부사) 馬防(마방) 撰(찬)
연강전의 학사이며, 금자광록의 대부며, 진정부로의 안무사요, 겸하여 마보군의 도총관이며, 겸하여 지성덕군의 부사인 마방이 쓰다.
(강의)
서문은 임제스님이 강남 황벽산에서 수행하던 일과 깨달음을 체험하게 된 사연들,
그리고 하북 땅 임제원에 주석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의 독특한 가풍을 보여준다.
또 노년에 이르러서 입적에 관한 일들과 임제록 간행에 대한 이야기들을 네 자의 시 형식으로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
임제록 전편을 압축한 샘이다.
한 때 선찰(禪刹)에서는 선객이 방부를 들이러 가서는 아무런 말도 없이 선방 문 앞에서 임제록 서문을 큰 소리로 외우고 있으면
그 선객을 높이 보아서 얼른 받아 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지금도 이와 같은 아름다운 풍속이 있었으면 한다.
서문을 쓴 마방이라는 사람은 당시에 뛰어난 명사였던 것 같다.
어록 중에 왕이라는 임제록에 서문을 쓴 큰 영광을 얻은 것 못지않게 글이 빼어나서 불교에서 손꼽는 명문으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많은 벼슬의 이름을 너들 너들 하게 붙인 것이 좀 흠이긴 하다.
그냥 <연강전 학사 마방이 쓰다>라고 했어야 했다.
黃檗山頭(황벽산두)에 曾遭痛棒(증조통방)하고 大愚肋下(대우늑하)에 方解築拳(방해축권)이로다
임제스님은 황벽스님에게 일찍이 매서운 몽둥이를 얻어맞았다.
그리고는 대우스님의 옆구리에 비로소 주먹질을 할 수 있었다.
(강의)
번갯불 속에서 황벽스님은 불조의 용광로를 열어두었다.
임제스님은 처음으로 그 용광로에 들어간 것이다.
또 대우스님에게는 우주적 생명 대기대용(大機大用)을 들어보였다.
임제스님은 황벽스님의 회상에 가서 공부한지 3년 만에 수좌(首座)의 책임을 맡고 있는 목주(睦州)스님의 안내로 불교의 대의를 물었다.
“불교의 분명한 대의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조실인 황벽스님의 몽둥이가 날아왔다.
무려 20대나 얻어맞고 쫓겨났다.
이런 일이 세 차례나 있었다.
무려 60대나 신나게 얻어맞은 샘이다.
그리고는 황벽스님과는 인연이 없음을 알고 대우스님에게로 가게 되었다.
황벽스님에게 불교를 물으러 갔다가 얻어맞은 일을 대우스님께 모두 말씀드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무슨 잘못이 있어서 그렇게 때렸는가를 물었다.
그랬더니, “황벽스님이 노파심으로 그대에게 그렇게나 친절하게 하였는데 여기까지 와서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묻는가?”라고 하였다.
임제스님은 그 말에 크게 깨달았다.
그리고는 “응, 황벽스님의 불법이 간단하구나[無多子(무다자)].” 하였다.
그랬더니 대우스님은 당장에 멱살을 잡고 “이 오줌싸개 어린놈이 황벽스님에게서 쫓겨 와서는 방금 ‘무슨 잘못이 있어서 그렇게 때렸는가?’라고 하더니 지금은 도리어 ‘황벽스님의 불법이 간단하다.’라고 말하는가. 너는 무슨 도리(道理)를 알았는가? 빨리 말해보아라.”라고 하였다.
그러자 임제스님은 대우스님의 옆구리에 주먹으로 세 번 쥐어박았다.
대우스님은 잡고 있던 멱살을 밀쳐버리고는 “너의 스승은 황벽스님이다. 나와는 관계없다.” 라고 하였다.
천하의 대선지식인 황벽스님은 불교를 물은 것에 대하여 몽둥이로 사람을 한 번에 20대나 후려쳤다
세 번에 걸쳐서 무려 60대를. 그렇게 불교를 열어주고 보여주고 깨닫게 해주고 들어가게 하였다.
그 일에 대하여 “그토록 노파심으로 친절하게 가르쳐 주더란 말인가.”라고 하신 대우스님의 말씀은 더욱 숨이 막힌다.
饒舌老婆(요설노파)는 尿牀鬼子(요상귀자)라한대 這風顚漢(자풍전한)이 再?虎鬚(재날호수)로다
말 잘하는 노파 대우스님은 “이 오줌싸개 어린 놈??이라 했고, 황벽스님은 “이 미친놈이 또다시 여기 와서
호랑이 수염을 뽑고 있어!??라고 했다.
(강의)
죄인의 목에 쉬우는 칼을 쉬운 격이다.
‘아직 불교에 있어서는 잠자리에서 오줌이나 싸고 남의 집에 소금을 얻으려 다니는 어린아이 같다.’라는
대우스님의 말씀은 그 표현이 너무 절묘하다.
그래서 ‘말 잘하는 노파’라고 했다.
임제스님에게 ‘오줌싸개’라는 애칭을 쓰는 것은 천하의 대우스님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임제스님은 대우스님과 작별하고 다시 황벽스님에게로 돌아갔다.
황벽스님이 말하기를 “너는 이렇게 왔다 갔다만 하니 언제 공부를 마치겠는가?”
“저야 다만 스님의 간절하신 노파심 때문입니다.”라고 하고나서 인사를 마치고 옆에 서 있었다.
황벽스님이 묻기를 “어디를 갔다 왔는가?”
“대우스님을 친견하고 왔습니다.”
“대우스님이 무슨 말을 하던가?”
임제스님은 앞서 있었던 대우스님과의 일을 다 말하였다.
그랬더니 황벽스님은, “어떻게 해야 이 놈 대우를 만나서 한 방망이 단단히 때려줄 수 있을까?”라고 했다.
“뭘 기다릴게 있습니까? 지금 바로 한 방망이 때려주시지”하고는 곧바로 손바닥으로 황벽스님을 후려쳤다.
임제스님의 영원한 참 생명, 우주적 생명을 들어 보인 것이다.
그랬더니, 황벽스님은 “이 미친놈이 또다시 여기 와서 호랑이 수염을 뽑고 있어!??라고 했다.
그러자 임제스님은 “할!” 하고 소리를 질렀다.
황벽스님의 불법을 간단하다고 말하던 자신은 그보다 더 간단하다.
황벽스님은 “시자야, 이 미친놈을 끌고 가서 선방에 쳐 넣어라.”라고 하였다.
임제스님이 호랑이 수염을 뽑은 솜씨를 독자들은 잘 살펴야할 것이다.
천하에 누가 또 호랑이 수염을 뽑은 사람이 있던가.
“뭘 기다릴게 있습니까? 지금 바로 한 방망이 때려주시지”하고 곧바로 손바닥으로
황벽스님을 후려친 그 용기와 수단과 날랜 솜씨는 천하에 짝할 이가 없다.
더하여 “할”을 한 소식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말은 짧아도 사연은 길다. 이런 사연은 뒤편 행장(行狀)에서 잘 밝히고 있다.
임제스님의 마음과 그의 불교를 잘 이해하려면 이런 사연들을 익숙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반복해서 들으며 눈을 떠야 할 일이다.
巖谷栽松(암곡재송)은 後人標榜(후인표방)이요 ?頭?地(곽두촉지)하니 幾被活埋(기피활매)로다
임제스님이 험한 골짜기에 소나무를 심은 것은 후인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한 것이요,
또 괭이로 땅을 팠으니 황벽스님은 거의 산채로 생매장 당할 뻔했다.
(강의)
이 이야기는 임제스님이 소나무를 심을 때 황벽스님이 물었다.
“깊은 산에 이렇게 많이 심어서 무엇을 하려는가?”
“첫째는 산의 경치를 아름답게 하자는 것이고, 둘째는 후인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함입니다.”하고는 괭이로 땅을 세 번 쳤다.
황벽스님이 말하기를, “비록 그런대로 괜찮기는 하나 자네는 이미 나에게 30방망이를 얻어맞은 꼴이다.”
임제스님이 다시 괭이로 땅을 세 번 치면서 “허 허”라는 소리를 냈다.
황벽스님이 “나의 종풍(宗風)이 너의 대에 가서 세상에 크게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물론 소나무를 심은 것이 후인들의 본보기가 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후인들의 본보기가 될 소나무를 심은 진정한 뜻은 무엇일까?
그것은 곧 임제스님의 불교인 것이다.
온갖 지엽은 다 떨어지고 몸뚱이만 드러내 보인 부처님과 조사들의 그 마음, 그 불교인 것이다.
오늘날 같이 불교에 거품과 방편설이 난무하고 있는 이즈음에 지엽과 가식이 전혀 없는 졸가리뿐인 이 올곧은
불교가 만고에 후인들의 본보기가 되리라는 것이리라.
임제스님의 그 깊은 은혜에 뜨거운 가슴으로 감사를 느낀다.
임제스님이 대중들과 함께 밭을 매는 운력(運力)을 하다가 황벽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는 괭이를 짚고 서 있었다.
황벽스님이 다가와서 말하기를, “이 녀석이 피곤한가?”
“괭이도 아직 들지 않았는데 피곤할리가요.” 그러자, 황벽스님이 몽둥이로 곧바로 한 대를 때리니
임제스님이 그 몽둥이를 붙잡아서 던져버리고 황벽스님을 넘어뜨렸다.
황벽스님이 유나를 불러 “유나스님, 나 좀 일으켜다오.”
유나스님이 가까이 와서 황벽스님을 일으키면서 “스님, 이 미친놈의 무례한 짓을 왜 용서하십니까?”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황벽스님은 막 일어나자마자 도리어 유나를 때렸다.
그 때 임제스님이 땅을 파면서 “제방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대개 화장을 하지만 나는 여기서 산채로 매장을 한다.”라고 하였다.
크게 죽은 뒤 다시 살아나는 큰 생명을 보였다.
법을 거량(擧揚)하는 일도 이쯤 되면 누구나 혀를 내두르게 마련이다.
유나스님은 미친놈의 무례한 짓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누가 그 높은 뜻을 알랴.
황벽과 임제만이 느끼며 주고받는 진검싸움인 것이다.
불꽃을 튀기고 천둥이 치며 폭우가 쏟아지는 상황이다.
하늘이 흔들리고 땅이 진동하며,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뒤엎어지는 일이다.
천(千)이면 천, 만(萬)이면 만이 산채로 매장당할 상황이다.
肯箇後生(긍개후생)하야 驀口自?(맥구자괵)하고 辭焚机案(사분궤안)하야 坐斷舌頭(좌단설두)로다
황벽스님은 후생(後生) 임제스님을 인가하다가 갑자기 입을 스스로 쥐어박았다.
임제스님은 황벽스님과 하직하고 떠날 때 법을 전한 것을 증명하는 경상[机案]을 주어도 받지 않고 오히려 불사르라 하였다.
그러나 황벽스님은 가져가서 천하 사람들의 논란을 차단하게 하라고 하였다.
(강의)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임제스님이 방 앞에 앉아 있다가 황벽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는 갑자기 눈을 감아버렸다.
황벽스님은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고는 방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임제스님은 뒤따라가서 사과하였다.
그 때 수좌인 목주스님이 옆에 있었는데, 황벽스님이 “이 승려는 비록 후생이지만 <이 일>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수좌스님이 “노스님께서도 아직 멀었는데 도리어 후생을 깨달았다고 인가하십니까?”라고 하니 황벽스님은 스스로 입을 쥐어박았다.
그랬더니 수좌스님이 “알면 됬어.”라고 하였다.
황벽스님이 수좌에게 점검을 당했다.
또 한 가지 특기할만한 사실은 임제스님이 황벽스님의 법을 받고 떠날 때, “어느 곳으로 가려는가?”
“하남(河南)지방이 아니면 하북(河北)지방으로 갈까합니다.
그러자 황벽스님은 곧 한 대 후려쳤다.
임제스님은 그 순간 황벽스님을 잡고 역시 손바닥으로 한 대 때렸다.
황벽스님은 크게 한바탕 웃고, 시자(侍者)를 불러서 스승 백장(百丈)스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선판(禪板)과 경상[机案]을 주었다.
그랬더니 임제스님은 시자에게 그것을 불태워 버리라고 하였다.
선판과 경상은 법이 아닌 가짜 물건이다.
가짜는 필요 없다는 식이다.
그 때 황벽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불태우는 일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너는 가져가서 뒷날 천하 사람들이
전법(傳法)의 문제에 대해서 시비할 때 증거를 제시하여 그런 논란이 없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어찌 되었든 이 이야기가 황벽스님의 부촉을 받은 것을 증명한 것이 되었다.
참으로 임제스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임제스님은 철두철미하게 적나라한 무위진인(無位眞人)으로 사셨고 무위진인으로 보여주었다.
스승과 이별하는 마당에서도 그렇게 활발발(活??)한 무위진인으로 이별하였다.
전법의 증거가 되는 신표(信標)에 대해서도 철저히 형식이란 찾아볼 수 없고 다만 무위진인이 존재할 뿐임을
확연하게 알려서 뒷사람들에게 진정한 본보기를 남겼다.
不是河南(불시하남)이면 便歸河北(편귀하북)이로다 院臨古渡(원임고도)에 運濟往來(운제왕래)로다
하남지방이 아니면 하북지방으로 돌아감이여, 임제원은 옛 나루터에 임해 있어서 오가는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강의)
임제스님이 법의 깃발을 세우고 종풍을 드날릴 곳을 말하고 있다.
어느 곳으로 가던지 그 장소가 무슨 문제이겠는가.
황벽스님은 황벽스님대로 나는 나대로 인연을 따라 가고 인연을 따라 머무를 것이다.
어디를 가든 천지만물은 그대로가 모두 무위진인인데. 가는 곳 마다 사람들을 건지고 눈을 열어주면 되는 일인 것을.
실로 그 후 임제스님이 가서 머문 임제원은 하북의 진주 호타하라는 강포구의 도시 오늘의 석가장이란 곳이다.
임제원에는 지금도 그의 탑과 비석이 있다.
강포구에서 나그네들을 강을 건너게 하는 일과 사람들을 제도하는 일의 표현이 같기 때문에 ‘임제원은 옛 나루터에 임해 있어서
오가는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라는 표현은 너무도 절묘하다.
把定要津(파정요진)하니 壁立萬?(벽립만인)이로다 奪人奪境(탈인탈경)하야 陶鑄仙陀(도주선타)하고
요새(要塞)가 되는 나루터를 지키고 있으니 그 절벽의 높이는 만 길이나 되고, 사람도 빼앗고 경계도 빼앗는 수단으로 선타바를 만들어 낸다.
(강의)
임제스님이 지키고 있는 곳은 불교 최후의 관문이며 요긴한 길목이다.
그 곳을 지나가지 않으면 불교의 세계에 들어설 수 없는 곳이다.
그 관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부처도 아니며 조사도 아니며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 그 관문의 높이는 만 길이나 되는 높고 높은 요새다.
견문각지(見聞覺知)를 다 떠난 자리다.
언어도단(言語道斷)하고 심행처멸(心行處滅)한 경지다.
사람들을 만나면 세상[객관]을 온통 부정해 버리는 방법과 그 자신[주관]마저 부정해 버리는 등등의 수단을 써서 건진다.
때로는 주관과 객관을 모두 부정하고, 때로는 주관과 객관을 모두 긍정하여 받아드린다.
이것을 사람들을 제접(提接)했을 때 네 가지로 구분하여 법을 쓰는 방씩으로 사구(四句) 또는 사요간(四料簡)이라 한다.
때로는 봄바람 같고 때로는 살을 에는 매서운 겨울바람 같다.
이러한 솜씨로 열반경의 선타바와 같은 총명하고 민첩하고 지혜로운 제자들을 길러낸다.
三要三玄(삼요삼현)으로 鈐鎚衲子(검추납자)로다 常在家舍(상재가사)하야 不離途中(불리도중)하니
삼요삼현으로 수행납자들을 단련하였고, 항상 집안에 있으면서 길거리를 떠나지 아니하였다.
(강의)
임제종풍(臨濟宗風)의 특징이라 할 삼구(三句)와 삼요삼현(三要三玄)과 사요간(四料簡)과 사빈주(四賓主)와 사조용(四照用)등이 있다.
임제스님이 말씀하시기를 “한 구절의 말[一句語(일구어)]에는 반드시 세 가지 깊고 현묘한 문을[三玄門(삼현문)]을 갖추어야하고,
한 가지의 깊고 현묘한 문에는 반드시 세 가지의 긴요 한 점[三要(삼요)]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방편도 있고 방편의 활용도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삼요삼현은 근기를 활용하는 세 가지의 양상을 나타낸 것이다.
결코 법문의 깊고 얕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세 가지로 활용하는 양상을 보여 수행납자들을 잘 단련하였다.
마치 무쇠를 두드려 강철을 만들고 나아가서 천하의 명검(名劍)을 만들듯이 하였다.
임제스님이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한 사람은 영원히 길거리에 있으면서 집안을 떠나지 않고, 한 사람은 집안을 떠나 있으면서 길거리에도 있지 않다.
누가 인천의 공양을 받을만한가?”
불교의 이상적 인물인 부처님을 달리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조화를 이룬 상태를 말하기도 한다.
문수는 깨달음의 지혜를, 보현은 그 깨달음의 실천을 나타내는 인물이다.
깨달음과 그의 실천은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다.
마치 몸과 몸짓의 관계다.
몸이 있으므로 몸짓이 있고 몸짓은 몸이 있어야 할 수 있다.
그들을 말할 때 ‘문수는 언제나 집에 있지만 길거리의 일을 떠나지 않고,
보현은 언제나 길거리에 있지만 집안의 일을 떠나지 않는다.’라고 한다.
임제스님은 그처럼 안과 밖을 겸하였고, 이(理)와 사(事)를, 선(禪)과 교(敎)를, 문(文)과 무(武)를,
지혜와 그 칠천을 완전하게 겸하여 어떤 일도 부족함이 없는 삶이였다.
無位眞人(무위진인)이여 面門出入(면문출입)이로다 兩堂齊喝(양당제갈)에 賓主歷然(빈주역연)이요
무위진인이 얼굴을 통해 출입하고, 두 집의 수좌가 동시에 “할”을 함에 주객이 분명하다.
(강의)
임제스님의 보고 듣고 하는 작용은 불조(佛祖)의 지위에도 속하지 않고 중생(衆生)의 지위에도 속하지 않는다.
임제스님이 어느 날 법상에 올라 말씀하시기를, “붉은 고기 덩어리에서 한 사람의 무위진인이 있어서
항상 여러 분들의 얼굴을 통해서 출입한다.
그것을 증명하지 못한 사람들은 잘 살펴보아라.”하였다.
그 때 한 스님이 나와서 물었다.
“무엇이 무위진인입니까?”
그러자 임제스님은 법상에서 내려와서 멱살을 잡고 말씀하시기를, “빨리 말해봐라.”
그 스님이 머뭇거리고 있는데 임제스님이 잡았던 멱살을 밀쳐버리고 말씀하시기를,
“무위진인이 이 무슨 마른 똥 막대기인가.”라고 하시고는 곧 방장실로 돌아가 벼렸다.
임제록에서 첫째가는 한 구절을 꼽으라면 이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차별 없는 참 사람><참사람>이라고도 표현한다.
임제스님의 법석(法席)의 전장(戰場)에는 언제나 활과 칼을 서로 겨누고 있는 매우 긴장된 상황이었다.
임제가풍을 표현하는 말로 <임제 할(喝) 덕산 방(棒)>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임제스님은 할을 잘 하고 덕산스님은 방을 잘 쓴다는 뜻이다.
그 날도 법상에서 수행납자들과 할을 주고받으며 법을 거량하였다.
그 날은 법을 거량하기 전에 벌써 동당(東堂)과 서당(西堂)의 두 선방에서 수좌가 서로 보는 순간 동시에 할을 한 적이 있었다.
어떤 스님이 그 문제를 들고 나와 임제스님께 물었다.
“이럴 때 두 사람의 할에 나그네와 주인의 차별이 있습니까?”
“나그네와 주인이 분명하지. 대중들이여, 임제의 나그네와 주인의 소식[賓主句(빈주구)]을 알고 싶으면
두 선방의 두 수좌들에게 가서 물어보라.”라고 하시고는 곧 법상에서 내려오셨다.
照用同時(조용동시)하니 本無前後(본무전후)요 菱花對像(능화대상)하고 虛谷傳聲(허곡전성)이로다.
비춤과 작용이 동시(同時)라. 본래 앞뒤가 없고, 거울[菱花]은 만상을 비추고 빈 골짜기에는 메아리를 전하네.
(강의)
방편으로 본다면 수미산을 겨자씨 안에 들려놓는 일이다.
그 진실에 있어서는 위에는 하늘이요 아래는 땅이며,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며, 승려는 승려고 속인은 속인이다.
또 비춰보는 입장에서는 삼천대천세계와 온 우주를 남김없이 다 비취 본다.
그 작용을 하는 데는 할과 방이 번개 치고 태풍 불고 폭우 내리듯 난무한다.
임제의 사조용(四照用)이란 것이 있다.
역시 법을 쓰는 경우의 한 예로써, 임제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어떤 때는 먼저 사람을 비추어 관찰하고
뒤에 작용을 보이며[先照後用(선조후용)], 어떤 때는 먼저 작용을 하고 뒤에 관찰한다[先用後照(선용후조)].
또 어떤 때는 관찰하고 작용하는 것을 동시에 하며[照用同時(조용동시)],
어떤 때는 관찰하고 작용하는 것을 때를 달리 한다[照用不同時(조용불동시)].” 라고 하였다.
본문의 말처럼 사람을 관찰하는 것과 열어주고 보여주는 작용은 일정하지 않다.
오는 사람의 근기와 수준과 성향에 따라서 그 법을 쓰고 방편을 쓰는 것이 다르다.
본래 앞뒤가 없다.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시중(示衆)에서 설명이 있을 것이다.
임제스님이 찾아오는 납자를 알아보는 데는 이쁘고 추하고 잘나고 못나고를 가려내는 것이 마치 거울과 같다.
남자가 오면 남자를 비추고 여자가 오면 여자를 비춘다.
서양 사람 동양 사람을 너무도 밝게 잘 비춘다.
머리카락하나 빠뜨리지 않고 소소영영하게 비춰내듯이 오는 사람들을 소상하게 살핀다.
근기와 수준과 그 마음 씀씀이를 알아보는 것이 이렇게 거울 같다.
때로는 텅 빈 골짜기에 메아리 울리듯 가 닫는데도 없이 공허하기 이를 데 없다.
물에 비친 달그림자 같다. 크게 치면 크게 울리고 작게 치면 작게 올리는 종소리 같다.
妙應無方(묘응무방)하야 不留朕蹟(불유짐적)이로다.
신묘하게 대응하는 솜씨는 종잡을 수 없어서 그 자취를 남기지 않았도다.
(강의)
이렇게 하여 임제스님의 제자들을 훈도하는 능대능소(能大能小)하고 능살능활(能殺能活)하는
신묘불측(神妙不測)한 솜씨는 불교사에 독보적 가풍을 세운 예가 되었다.
사람들을 제접하는데 출신지역과 남녀노소를 따지랴.
근기를 따라 응하여 주는 데는 자신의 지금 상황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
모두가 큰마음 큰 작용이 활달자재하고 예측 불가능한 모습이다.
여기까지는 임제스님의 법의 깃발을 세우고 사방에서 모여오는 사람들을 제접하여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기능과 활동작용[機用(기용)]을 말하였다.
拂衣南邁(불의남매)하야 戾止大名(여지대명)하니 興化師承(흥화사승)이라 東堂迎侍(동당영시)로다.
옷깃을 가다듬고 남쪽으로 내려가 대명부에 머무르니, 흥화스님은 임제스님의 법을 이어받은 사람이라 스님을 동당에 모시니라.
(강의)
임제스님 말년 어느 날 병란이 일어나서 자리를 옮겼다.
남쪽 대명부라는 곳의 흥화사였다.
그곳에는 이미 제자 흥화존장스님이 교화를 펴고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흥화스님이 방장이었고, 임제스님은 동당에 모셔서 한주(閑住)로 잘 받들었다.
銅??鐵鉢(동병철발)이요 掩室杜詞(엄실두사)하니 松老雲閑(송노운한)하야 曠然自適(광연자적)이로다.
구리로 된 물병과 쇠로 만든 발우뿐이요, 방문을 닫아걸고 말을 하지 않았다.
소나무는 이미 늙었고 구름은 한가하여 시원스레 유유자적하도다.
(강의)
흥화사에 온 후로 가진 것 없고 하는 일도 없어서 노년을 보내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가진 것이라곤 기껏해야 구리로 된 물병과 밥을 담는 철발우 뿐이다.
제자 흥화스님이 대중들을 훈도하니 할 일도 없다.
문을 닫고 사니 할 말도 없다.
마치 부처님이 마갈타에서 성도하시고도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경지를 뜻하는 문을 닫은 일[摩竭掩室(마갈엄실)]과 같다.
달마대사의 소림면벽과도 같으며, 유마대사가 비야리성에서 입을 닫은 일과도 같다.
교화의 일이 모두 끝난 것이다.
늙으신 노년의 모습은 운치 있는 노송처럼 너무 멋있다.
푸른 하늘 저 멀리 흘러가는 흰 구름같이 그렇게 한가롭고 여유로울 수 없다.
세상사나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솜털처럼 홀가분하다.
텅 비고 시원스러워 유유자적, 자유자재할 뿐이다.
노선사로서, 수행자로서 가장 이상적인 노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생각하게 한다.
“지팡이에 늙은 몸 의지하며 발길 멎는 대로 쉬다가 때때로 머리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본다.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돌아 나오고, 날다가 지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올 줄 안다.
서산에 해는 지고 저녁 빛은 어두워지려 하는데, 나는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이고 있다.”
面壁未幾(면벽미기)에 密付將終(밀부장종)이여 正法誰傳(정법수전)고 ?驢邊滅(할려변멸)이로다.
면벽하고 앉으신지 오래지 않아 은밀히 입멸후의 뒷일을 부촉하였다.
"정법을 누가 전할 것인가. 눈 먼 당나귀에게서 없어지리라."하셨다.
(강의)
여기까지는 임제스님의 말년의 수용을 밝힌 것이다.
스님은 임종하실 때 앓은 일도 없었다.
당나라 함통 8년[서기 867년] 정해년 정월 10일 옷을 단정히 하고 반듯이 앉아서
제자 삼성(三聖)스님과 몇 마디의 문답을 마치고 고요히 가셨다.
행록에 나타난 열반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임제스님이 열반하실 때 자리에 앉으셔서 말씀하였다.
“내가 가고 난 다음에 나의 정법안장이 없어지지 않도록 하여라.”
삼성스님이 나와서 사뢰었다.
“어찌 감히 큰스님의 정법안장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이후에 누가 그대에게 물으면 무어라고 말해 주겠는가?”
삼성스님이 “할!”을 하므로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나의 정법안장이 이 눈 먼 나귀한테서 없어질 줄 누가 알겠는가?”
말을 마치시고 단정하게 앉으신 채 열반을 보이셨다.
일천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모두 임제스님의 정법안장에 목을 매고 있다.
너도 나도 임제스님의 법손이라고 자랑들이다.
망승(亡僧)에게까지 “속히 사바세계에 오셔서 임제문중에서 길이 인천의 안목이 되소서.”라고 축원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의 정법안장이 이 눈 먼 나귀한테서 없어지리라[滅].”라는 이 한마디 말을 아마도 30년은 좋이 참구해야 하리라.
圓覺老演(원각노연)이 今爲流通(금위유통)이라 點檢將來(점검장래)하니 故無差舛(고무차천)이로다.
원각종연스님이 이제 이 임제록을 유통하려하기에 점검해 보니 아무런 잘못이 없도다.
(강의)
원각스님은 당시의 어록을 간행하고 유통시키는데 매우 권위 있는 스님으로 알려져 있다.
운문광록(雲門廣錄)도 중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제자도 1천 2백여 명이나 되며 북송(北宋)의 휘종황제의 청으로 궁중에서 설법한 일도 있는 스님이다.
그 스님이 교감하여 간행하면서 서문을 쓴 마방(馬防)에게 점검해보고 서문을 쓰게 하였던 것이다.
점검한 결과 특히 임제스님의 종지(宗旨)를 드러내는데 아무런 손색이 없으며 완전하다는 뜻이다.
기록을 남기는 것은 때로 사실보다 더 가치가 있는 일이다.
세존이 아무리 훌륭한 성인으로서 일세를 풍미했다하더라도 그 기록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런 분을 알았겠는가.
우리가 모른다면 그 또한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임제스님도 역시 같은 경우다.
그래서 이 어록을 간행하여 유통시킨 원각스님의 공은 바닷물을 먹으로 삼아 쓰고 또 쓴다 하더라도 다할 수 없다.
唯餘一喝(유여일할)하야 尙要商量(상요상양)하노라 具眼禪流(구안선류)는 冀無?擧(기무잠거)어다.
오직 일할(一喝)을 남겨놓고 헤아려 보기를 바라노니, 눈을 갖춘 선사들은 바라건대 잘못 거량하지 말라.
(강의)
아직도 한 “할”이 있다.
언어문자로 임제스님의 사상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문자로 다 드러냈으나, 언어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임제스님의 “할”의 낙처(落處)는 아직 그대로 있으니 언어문자를 떠나고 사량분별을 떠나서 잘 거량해 보라.
그렇다고 도안(道眼)을 갖춘 선사로써 임제할을 함부로 잘못 거론하지는 말라.
임제스님이 보고 있느니라. 깊이 경계하고 또 경계할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로지 서문을 쓴 마방의 살림살이다.
宣和庚子仲秋日(선화경자중추일)에 謹序(근서)하노라.
선화경자(宣和庚子) 중추일에 삼가 서문을 쓰다.
(강의)
임제록을 출간하기 위하여 서문을 쓴 때는 북송의 휘종황제 선화 2년(서기 1120)이다.
임제스님이 입적(入寂)하신지 254년이 되는 해이다.
서문을 강설한 것이 좀 장황한 것 같으나 필자는 좀 미진한 생각이 든다.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진주임제혜조선사어록)
住三聖嗣法小師慧然集(주삼성사법소사혜연집)
진주임제 혜조선사어록을 삼성사에 사는 법을 이은 소사(小師) 혜연(慧然)이 수집함
(강의)
임제록은 진주에 있는 삼성사의 임제스님의 높은 제자 혜연스님이 편찬하였다.
스승의 어록을 편찬할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스승에 버금가는 도안(道眼)을 가진 사람이어야 하며,
스승의 법을 이은 사람이어야 한다.
법을 이었다는 사법(嗣法)이라는 말이 그를 증명한다.
소사(小師)란 스승 앞에서 자신을 겸양하여 소승, 부족한 제자 등의 뜻으로 이르는 말이다.
법을 설하면 그것들을 수집하고 정리해서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담당하는 사람이 꼭 있어야한다.
근년의 큰스님들도 그런 일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제자가 있는 분들은 돌아가신 후에도 더욱 빛을 발한다.
후대의 사람들에게는 임제스님 보다 못하지 않는 일로 평가 된다.
그러므로 혜연스님은 당연히 임제스님 버금가는 분이다.
'임제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상당(上堂) 6-1. 6-2. 6-3. 7. 8 (0) | 2018.01.14 |
---|---|
[스크랩] 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상당(上堂) 4-1. 4-2. 5-1. 5-2 (0) | 2018.01.14 |
[스크랩] 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상당(上堂) 2. 3 (0) | 2018.01.14 |
[스크랩] 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상당(上堂) 1-1, 1-2, 1-3, 1-4, 1-5 (0) | 2018.01.14 |
[스크랩] 무비스님-임제록(臨濟錄)강설/ 이책을 쓰면서 (0) | 2018.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