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상당(上堂) 2. 3
2 정안(正眼)이란
師(사), 因一日(인일일)에 到河府(도하부)한대 府主王常侍(부주왕상시)가
請師陞座(청사승좌)하니라 時麻谷出問(시마곡출문), 大悲千手眼(대비천수안)에 那箇是正眼(나개시정안)고
師云(사운), 大悲千手眼(대비천수안)에 那箇是正眼(나개시정안)고
速道速道(속도속도)하라 麻谷?師下座(마곡예사하좌)하고
麻谷却坐(마곡각좌)하니 師近前云(사근전운), 不審(불심)이로다 麻谷擬議(마곡의의)한대
師亦?麻谷下座(사역예마곡하좌)하고 師却坐(사각좌)라
麻谷便出去(마곡편출거)어늘 師便下座(사편하좌)하니라.
임제스님이 어느 날 하북부에 갔더니 부주 왕상시가 스님을 청해서 법좌에 오르게 했다.
그 때에 마곡스님이 나와서 물었다.
“대비보살의 천수천안중에서 어느 것이 바른 눈입니까?”
임제스님이 말했다.
“대비보살의 천수천안중에서 어느 것이 바른 눈인가? 빨리 말하라”
그러자 마곡스님이 임제스님을 법좌에서 끌어내리고 마곡스님이 대신 법좌에 올라앉았다.
임제스님은 마곡스님 앞으로 가까이 가서 “안녕하십니까?”라고 하니, 마곡스님이 어리둥절하여 머뭇거렸다.
임제스님도 또한 마곡스님을 법좌에서 끌어내리고 다시 그 자리에 앉았다.
마곡스님은 곧바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러자 임제스님도 곧 법좌에서 내려왔다.
(강의)
관세음보살의 천수천안중에 어느 것이 정안(正眼)인가? 하고 물었는데 임제스님은 똑 같은 질문으로 대답하였다.
관음보살에게는 천수 천안뿐만 아니다. 천 손 만 손 팔만 사천 모다라 손이 있고, 천 눈 만 눈 팔만 사천 모다라 눈이 있다.
몇 개의 눈이 있든지 관계없이 이와 같은 형식의 법담은 조사스님들에게 자주 보인다.
능엄경에도 있다.
설법제일의 부루나가 “청정본연(淸淨本然)한데 어떻게 해서 홀연히 산하대지(山河大地)가 생겼습니까?”라고 물으니
부처님은 똑같이 “청정본연한데 어떻게 해서 홀연히 산하대지가 생겼는가?”라고 되묻는다.
임제스님과 마곡스님이 천수천안의 질문을 주고받은 것과, 법좌에서 끌어내리는 일을 주고받은 것과
세존과 부루나가 똑 같은 말로 법담을 주고받은 것을 한데 묶어서 저 삼계(三界) 밖으로 던져버리고 싶다.
비록 그것을 부처와 부처의 경계요, 종사와 종사들이 주인과 손을 서로 바꿔가며 상즉상입(相卽相入)의
무애자재한 경지를 보여준 것이라 하더라도. 천개의 눈은 그만두고 그대의 한 개의 눈은 어떤가?
이렇게 환하게 보고 있으니 어찌하겠는가?
똑똑히 듣고 있으니 어찌하겠는가?
그래서 청정본연하지 않은가?
청정본연하니까 산하대지가 이렇게 있지 않은가?
마곡스님이 밖으로 나가버린 것이나, 임제스님이 바로 법좌에서 내려온 것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진정한 정안을 보여준 멋진 마무리라고 하겠다.
두 사람이 합작으로 엮어낸 빼어난 법문이다.
선가에서는 그것을 빈주호환(賓主互換)이라고 한다.
3 무위진인(無位眞人)
上堂云(상당운), 赤肉團上(적육단상)에 有一無位眞人(유일무위진인)하야 常從汝等諸人面門出入(상종여등제인면문출입)하나니 未證據者(미증거자)는
看看(간간)하라 時有僧出問(시유승출문), 如何是無位眞人(여하시무위진인)고
師下禪牀把住云(사하선상파주운), 道道(도도)하라 其僧擬議(기고의의)한대 師托開云(사탁개운), 無位眞人(무위진인)이 是什?乾屎?(시십마간시궐)시고 便歸方丈(편귀방장)하다
법상에 오라 말씀하셨다.
“붉은 몸뚱이에 한사람의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있다.
항상 그대들의 얼굴을 통해서 출입한다.
아직 증거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잘 살펴보아라.”
그때에 한 스님이 나와서 물었다.
“어떤 것이 무위진인(無位眞人)입니까?”
임제스님이 법상에서 내려와서 그의 멱살을 꽉 움켜잡고 “말해봐라. 어떤 것이 무위진인가.”
그 스님이 머뭇거리자 임제스님은 그를 밀쳐버리며 말했다.
“무위진인이 이 무슨 마른 똥 막대기인가.”라고 하시고는 곧 방장실로 돌아가 버렸다.
(강의)
임제록에서 한 구절만 택하라면 바로 이 무위진인이다.
불교는 달리 표현하면 대해탈(大解脫), 대자유(大自由)를 구가하는 종교다.
그 대자유, 대해탈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바로 이 무위진인이 답이다.
여기에는 문자나 이론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수행하고 증득하는 것도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무위진인은 이 육신을 근거로 해서 존재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남녀노소와 동서남북과 재산이 있고 없고, 지위가 있고 없고에
아무런 차별이 없이 동등하게 존재하는 사람이다.
차별이 있는 사람은 가짜사람이다.
차별이 없는 사람은 참사람이다[차별 없는 참사람]. 대개 사람의 얼굴을 통해서 출입한다.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하면서. 또 손과 발을 통해서도 출입한다.
그리고 이 사람의 값은 백두산 크기의 백 만개만한 다이아몬드의 값보다도 억 만 배 더 나간다.
그렇게 얼굴을 통해서 출입하는 모습이 분명하고 확실하건마는 스스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한 스님이 새삼스럽게 “무위진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은 것이다.
자신이 무위진인이면서 달리 무위진인을 찾는 것이다.
종로에 서서 “서울이 어디입니까?”하고 묻는 것이다.
안타깝다.
그래서 임제스님은 “너 무위진인아, 어디 한번 대답해 봐라.”
무위진인은 무위진인만이 알 수 있으니까. 한데 어찌된 일인지 무위진인은 대답이 없다.
똥 막대기 같은 무위진인을 뒤로 하고 방장실로 돌아가는 것으로써
임제스님은 대 해탈, 대 자유의 무위진인을 잘 보여주었다.
이 무위진인 말고 어디서 대 해탈을 누릴 것인가. 어디서 대 자유를 누릴 것인가.
불교는 이렇게 명료하다.
명명백백, 소소영영 그 자체다. 너무 밝아서 눈이 부신다.
마치 천개의 태양이 동시에 떠 있는듯하다.
지금 보고 듣고 하는 이 사실이다.
임제일구 치천금(臨濟一句置千金). 임제록의 이 한 구절의 법문이 천금의 값을 한다.
아니 어찌 천금으로 그 값을 대신하겠는가.
만고에 빼어난 말씀이다.
어느 해(1971년) 겨울철 봉암사에서 서옹스님이 임제록을 강의하시면서 들려준 말씀이 있다.
일본의 어느 유명한 선사는 전쟁을 맞아 원자폭탄으로 일본열도가 불에 탈 때
“일본이 다 타도 이 임제록 한권만 남아있으면 된다”라고 하였단다.
필자는 이 한마디로써 일본에 사람이 있음을 믿는다.
그래서 일본을 얕보지 않는다.
임제록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데 어찌 얕볼 수 있겠는가.
나는 도반의 절을 방문했을 때 그의 방에 <무위진인(無位眞人)>이나
<수처작주(隨處作主)>라는 족자가 하나만 걸려 있으면 그 도반을 달리 본다.
속으로 두려워하면서 더 친해지고 존경하게 된다.
글씨야 졸필이든 말든 관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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