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

[스크랩] 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상당(上堂) 1-1, 1-2, 1-3, 1-4, 1-5

수선님 2018. 1. 14. 13:16

무비스님, 임제록 강설-상당(上堂) 1-1, 1-2, 1-3, 1-4, 1-5

 

상당(上堂)

 

(강의)

임제록에 실려 있는 내용을 그 형식에 맞추어 분류하면 서문(序文상당(上堂

시중(示衆감변(勘辨행록(行錄탑기(塔記) 이렇게 여섯 종류가 된다.

상당이란 선지식이 특정한 날에 법상에 높이 올라 설법하는 것을 말한다.

결제나 해제나 그 외의 의미 있는 날에 총림에서 행해진다.

그러므로 법문의 내용도 가장 격이 높다.

시중이나 만참(晩參), 소참(小參) 같은 경우의 법문은 대종장이 행한 법문이라도 상당법어와는 그 격이 다르다.

법상에 높이 올라가서 법문을 할 때는 상당법문이 되므로 반드시 상당법문답게 종지(宗旨종풍(宗風)을 거량해야한다.

 

1-1 전쟁의 시작
府主王常侍(부주왕상시)가 與諸官(여제관)으로 請師陞座(청사승좌)하니 師上堂云(사산단운),
山僧今日(산승금일)에 事不獲已(사불획이)하야 曲順人情(곡순인정)하야 方登此座(방등차좌)하나 若約祖宗門下(약약조종문하)하야 稱揚大事(칭양대사)인댄 直是開口不得(직시개구부득)이라 無?措足處(무이조족처)니라 山僧此日(산승차일)에 以常侍堅請(이상시견청)이니 那隱綱宗(나은강종)이리오 還有作家戰將(환유작가전장)하야 直下展陣開旗?(직하전진개기마)아 對衆證據看(대중증거간)하라

 

하북부의 부주 왕상시가 여러 관료들과 더불어 임제스님께 법상에 오르시기를 청하니 스님이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산승이 오늘 어쩔 수 없이 인정에 따라서 겨우 이 자리에 올랐으나

만일 조사들이 면면히 이어온 전통에 입각하여 큰일을 드날려 본다면 곧 바로 입을 열수가 없다.

또 그대들이 발붙일 곳도 없다.

그런대 산승에게 오늘 왕상시가 간곡히 청하니 어찌 근본종지를 숨길 수 있겠는가.

여기에 이름 난 장군[作家]이 있다면 곧 바로 진을 펼치고 깃발을 열어서 대중들에게 그 증거를 보여라.”

 

(강의)

먼저 글의 단락을 나누고 번호를 붙인 것은 뜻을 더욱 잘 파악하자고 임의로 나눈 것이다.

매 단락마다 담긴 뜻을 요약해서 그 제목을 붙인 것도 이해에 도움을 주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다른 길로 흐르게 하지는 않았는가 해서 좀 염려가 된다.

부주는 하북부의 지방장관이다.

우리로 치면 도지사 정도에 해당한다.

상시(常侍)라는 말도 관직의 이름으로서 항상 왕의 좌우에 있으면서 국사를 의논하는 직책이다.

부주이면서 상시라는 벼슬을 지낸 사람이니 외호(外護)인연으로서는 법을 펴기에 손색이 없다.

자고로 선지식이 한 지역에서 법을 펴는 데는 외호인연뿐만 아니라

토지인연, 납자인연, 단월인연,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임제스님은 이 왕상시로 해서 당신의 법을 펴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게 되었다.

법이란 언어나 사량으로 표현할 일이 아니다.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부처님이나 조사님의 본마음은 더욱 아니다.

하지만 간청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좀 흠이 되는 부담을 안고라도 어쩔 수 없이 언어로 거량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마치 굽은 화살로도 원숭이를 쏘아 맞히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렇더라도 내가 먼저 무어라고 말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특히 일대사인연을 거론함에 있어서는 스승도 입을 열 수가 없고 학인도 발붙일 곳이 없다.

더구나 임제록의 안목은 언어도단하고 심행처멸한 자리다.

그 모든 것을 감안하고라도 혹 이 자리에 법의 깃발을 세우고 종풍을 드날릴 자신이 있는 사람이 있거든

어디 한번 나와서 진을 펼치고 깃발을 열어서 그 솜씨를 보여라.

목숨을 걸고 한바탕 겨뤄보자.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 걸 맞는 전쟁의 용어를 써서 법거량을 하고자 한다.

매우 살벌하고 긴장감이 도는 분위기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퍽 생동감이 넘치는 표현이었다.

 

 

1-2 불교의 대의

僧問(승문), 如何是佛法大意(여하시불법대의)오 師便喝(사편할)한대 僧禮拜(승예배)어늘 師云(사운), 這箇師僧(자개사승)이 却堪持論(각감지론)이로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불교의 대의입니까?”

임제스님이 곧!”을 하시니, 그 스님이 절을 하였다.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이 스님과는 법담(法談)을 나눌만하구나.”

 

(강의)

청천백일에 천둥치고 번개 치는 일이다.

임제장군의 막하에 목숨을 담보로 녹 쓴 칼을 비껴들고 하늘을 덮는 기계로

바람을 몰아가며 뛰어 나온 장수가 있다.

관우인가. 장비인가. 조자룡인가.

불교의 대의가 무엇인가? “이다.

참 간단하다.

일도필살(一刀必殺)의 검법이다.

혹자는 이을 부처와 부처끼리 통할 일이고 범부의 측량할 바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그렇게 복잡할 까닭은 하나도 없는 것이 불교다.

질문을 하고, 그 질문을 듣고, 들은 사실에 대해서 즉시 반응하는 이 사실이다.

여기에는 처음도 끝도 오직 활발발(??)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사람이 불법이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있는 사람이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한 번의소리에 육종 십팔상(六種 十八相)으로 진동하였다.

삼신(三身)과 사지(四智)와 팔해탈(八解脫육신통(六神通)이 이에 다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불법대의에 목숨을 걸었던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불법대의에 인생을 걸었던가.

한량없는 세월동안 인생을 걸고 목숨을 버린 일이 무량 무수 아승지 일 것이다.

세존의 6년 고행도, 달마의 9년 면벽도 모두가 이 불법대의 때문이었다.

이라는 그 한 마디. 그렇게 간단한 것을 위하여.

임제할, 덕산방이라 하여 임제스님의 불법가풍을 흔히로 설명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임제스님이 교화를 편 이후부터 오직으로 학인들에게 보였다.

그래서 내방하는 사람이 문에 들어오기가 바쁘게 곧바로을 하였다.

어느 비구니스님들의 선원에서 여름 안거를 마치던 날이었다.

차를 마시면서 입승스님이 여름 한철을 공부한 소감을 물었다.

구참(舊參)스님들부터 돌아가면서 이런 저런 소감들을 이야기 하다가

탁자 밑에 앉아있는 어느 초심자의 차례가 되었다.

그 스님 왈, “나는이요.”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순간 큰방이 온통 박장대소하는 웃음바다가 되었었단다.

연필 깎는 주머니칼을 들고 그 무서운 싸움터에 나온 것이다.

그 이야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즐거운 공양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도 또한 불법의 대의를 아는 사람이리라.

임제스님의 법을 전해 받은 법손들은 최소한 이렇다.

스님들의 법문에는 으레이 따른다.

심지어 한 생애의 영결을 고하는 장례식장에서도이 난무한다.

을 하고 싶어서 몸살이 난 것이다.

불교의 대의이기 때문이다.

임제스님의 흉내를 낸다하더라도 너무 심한 정도다.

 

 

1-3 세 번 묻고 세 번 맞았다

(), 師唱誰家曲(사창수가곡)이며 宗風嗣阿誰(종풍사옥수)오 師云(사운), 我在黃檗處(아재황벽)하야 三度發問(삼도발문)하야 三度被打(삼도피타)니라 僧擬議(승의의)한대 師便喝(사편할)하고 隨後打云(수후타운), 不可向虛空裏釘?(불가향허공리정궐) 去也(거야)니라

 

스님이 물었다.

선사께서는 누구 집의 노래를 부르며 어느 분의 종풍을 이었습니까?”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황벽스님 처소에서 세 번 묻고 세 번 얻어맞았다.”

그 스님이 우물쭈물 머뭇거리자 임제스님이!”을 하고 뒤이어 내려치며 말하였다.

허공에 말뚝을 박을 수는 없느니라.”

 

(강의)

임제스님은 황벽스님의 법을 이었다.

황벽스님은 백장(百丈,749-814)스님의 법을 이었고, 백장스님은 마조(馬祖,709-788)스님의 법을 이었다.

마조스님은 남악(南嶽,677-744)스님의 법을 이었고, 남악스님은 육조혜능(638-713)대사의 법을 이었다.

이렇게 설명해야 할 것이지만나는 황벽스님 처소에서 세 번 묻고 세 번 얻어맞았다.”라고 하여

자신의 전법내력을 여운이 있고 의미심장하게 밝혔다.

불법(佛法)이니 종풍(宗風)이니 하는 것이 무엇인가.

임제스님이 황벽스님에게 가서 불법의 대의를 물었는데 황벽스님은 다짜고짜 20대의 몽둥이로 임제를 후려쳤다.

그렇게 간단히 불법을 열어주고, 보여주고, 깨닫게 해주고, 불법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었다.

이렇게 하기를 세 차례나 묻고 세 차례나 얻어맞았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삼도발문(三度發問) 삼도피타(三度被打)인 것이다.

스승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였고, 제자가 받을 수 있는 것은 다 받았다.

세 번 묻고 세 번 맞은 것이 황벽의 불법이며 또 한 임제의 불법인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불법이며, 역대 조사들과 천하 노화상들의 불법인 것이다.

묻고 때리는 이 사실 위에 성성역역(惺惺歷歷)하고 역역고명(歷歷孤明)한 무위진인(無位眞人)

밝은 대낮에 여기 이렇게 빨가벗고 춤을 춘다.

허공에 말뚝을 박을 수는 없느니라.”

그렇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

끈이 짧으면 깊은 우물에는 닿을 수 없다.

이렇게 천하 사람들을 모아놓고 불법을 드날리는 것은 명명백백한 근본뿌리가 있고,

금강보검이 있고, 빼어난 솜씨가 있기 때문이다.

근본도 없는 사람이, 그리고 제대로 된 실력도 없으면서 판을 벌릴 수 있겠는가.

언제 어디서 독화살이 날아와서 명줄을 끊어 놓을지 모르지 않는가.

이런 이야기가 맞다면 맞는 말이지만 사실 이 집안의 진짜 종풍은 허공에다 말뚝을 박는 일이다.

 

 

1-4 잡초가 무성하다.

有座主問(유좌주문), 三乘十二分敎(삼승십이분교)가 豈不是明佛性(기불시명불성)가 師云(사운), 荒草不曾鋤(황초블증서)로다 主云(주운), 佛豈?人也(불기잠인야)리오 師云(사운), 佛在什?(불재십마처)오 主無語(주무어)어늘 師云(사운), 對常侍前(대상시전)하야 擬瞞老僧(의만노승)이로다 速退速退(속퇴속퇴)하라 妨他別人請問(방타별인청문)이니라.

 

어떤 좌주[講師]가 물었다.

삼승 십이분교(三乘十二分敎)가 어찌 불성을 밝힌 것이 아니겠습니까?”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거친 풀을 두고 호미질을 안했구나.”

다시 좌주가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어찌 사람을 속여겠습니까?”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부처님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좌주가 말을 못하므로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상시 앞에서 노승을 속이려 하는구나.

어서 빨리 물러나라. 다른 사람이 묻는 것에 방해된다.”

 

(강의)

법석(法席)의 분위기는 이렇게 하여 점입가경으로 달아오른다.

도지사 격인 부주가 주관하여 열리고 있는 이 무차대법회에는 남녀노소와

승속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귀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 모였다.

참으로 역사에 길이 남는 대단히 중요한 법회다.

불교사에 있어서 세존이 성도하시고 처음으로 열린 화엄법회와 같으며,

성도 40년 후 영축산 영산회상의 법회와 다를 바 없다.

요즈음으로 치면 강사격인 좌주가 대뜸 나와서 묻는다.

부처님의 팔만대장경 속에 당신이 밝히려고 하는 불성이 다 밝혀져 있는데

다시 무슨 필요가 있어서 이런 거창한 법회를 열어서 야단법석인가.?”

임제스님이 보기에는 그런 말을 하는 그 마음이 너무도 황폐해 있다.

불법을 공부한다고는 하였으나 그 영혼은 거친 풀이 무성할 뿐이다.

전혀 정리되지도 않고 다듬어지지도 않았다.

부처님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라고 했을 때 좌주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생생하고 활발발한 산부처님을 보여 주었어야했다.

좌주는 몇 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노승을 속이려 하는구나.”라고 했지만 속이기야 했겠는가.

실력이 그것뿐인 것을. 임제스님은 대중에 대한 기대가 컸든 것이다.

 

 

1-5 입을 열면 벌써 틀린다.

復云(부운), 此日法筵(차일법연)은 爲一大事故(위일대사고)니 更有問話者?(갱유문화자마)아 速致問來(속치문래)하라 ??開口(이재개구)하면 早勿交涉也(조물교섭야)니라 何以如此(하이여차)오 不見(불견)가 釋尊云(석존운), 法離文字(법리문자)며 不屬因不在緣故(불속인불재연고)라하니라 爲?信不及(위이신불급)일새 所以今日葛藤(소이금일갈등)이라 恐滯常侍與諸官員(공체상시여제관원)하야 昧他佛性(매타불성)이니 不如且退(불여차퇴)니라 喝一喝云(할일할운), 少信根人(소신근인)은 終無了日(종무요일)이로다 久立珍重(구립진중)하라.

 

임제스님이 다시 말했다.

오늘의 법회는 일대사(一大事)를 위한 것이니 다시 묻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빨리 물어라.

그대들이 막 입을 열면 일대사와는 벌써 교섭할 수 없게 된다.

왜 그럴까? 보지 못했는가.

세존이 말씀하시기를법은 문자를 떠났으며 인()에도 속하지 않고 연()에도 있지 않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대들의 믿음이 모자라는 까닭에 오늘 이렇게 어지러이 갈등을 하는 것이다.

왕상시와 여러 관원들을 꽉 막히게 하고 불성을 어둡게 할까 염려된다.

물러가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하시며, “!”을 한 번 하시고는 말했다.

믿음의 뿌리가 적은 사람들은 마침내 일대사의 일을 마칠 날이 없다.

오래 서 있었으니 편히 쉬어라.”

 

(강의)

오늘의 법회는 일대사를 밝히기 위해서 열린 것이다.

일대사란 다른 말로 하면 인생의 실상이요, 제법의 실상이며, 우주와 생명의 실상이다.

그러나 일대사란 무어라고 입을 열면 벌써 틀려버린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말씀하셨듯이 법()이란,

즉 일대사란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어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수행을 쌓아서 성취하는 물건이 아니다.

참선을 하고 염불을 하고 간경을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고행을 하고 6바라밀을 닦아서 얻어지는 물건이 아니다.

본래로 있는 것이다.

불생불멸(不生不滅)한 것이며 부증불감(不增不減)한 것이다.

본래 여여(如如)한 것이다.

이렇게 보고 듣고 알고 느끼고 하는 사실이다.


출처 : 제이제이
글쓴이 : 제이제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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