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구게(四句偈)-금강경, 화엄경, 법화경, 열반경, 능엄경, 원각경>
국보 제4호 고달사지 부도(원광국사 현욱?)
보물 제7호 고달사지 원종대사 혜진탑
4구게란 경전의 사상을 집약해서 짧은 4개의 구절로 이루어진 법문에 관한 한시(漢詩) 형식의 운문체 문장[게송]을 말한다. 대개 4~5자씩을 1구(句)로 해 4구, 곧 16~20자로 된 게송이다. 그러나 더러 이 규칙을 벗어나는 것도 있다.
한권의 경전을 다 읽을 수 없는 경우를 생각해서 사구게에다 경전의 의미를 함축해서 담았기 때문에 사구게만 독송하고 사경하고 외우더라도 그 공덕은 불가사의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사구게란 글자 그대로 경전에 등장하는 네 글귀로 된 하나의 의미를 가지는 경전의 말씀으로 대개 그 경전의 핵심 내용이다. 그런데 반드시 네 글귀로만 된 게 아닐 수도 있으므로 ‘네 글귀’란 말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그냥 좋은 문장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사구게 내용의 핵심은 주로 부처님 가르침 중에서도 최고라고 할 수 있는 공성(空性)과 마음의 문제에 대한 것이다. 유명한 4구게는 아래와 같다.
1) 금강경(金剛經)의 4구게
•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해설---이 사구게는 <금강경>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에 나오는 말로서, 무릇 상(相)이 있는 바는 모두 허망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 깨달음을 얻을 것이란 말이다. 여기서 ‘범소유상(凡所有相)’은 상이 있는바 모든 것이란 뜻으로, 두두물물(頭頭物物) 일체 현상계에 벌어진 모든 것을 의미한다. 꼭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안 ․ 이 ․ 비 ․ 설 ․ 신 ․ 의(眼耳鼻舌身意) 육근으로 감지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일체 모든 현상계가 개시허망(皆是虛妄), 즉 일체 현상계가 모두 허망한 것이므로, 이렇게 상이 있다고 하는 바 모든 것이 상이 아닌 사실을 바로 본다면(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할 것이라고 했다. 즉, 이 참된 이치를 바로 본다면 여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여래를 본다는 말이다. ‘여래를 본다’는 말은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바탕이 텅 비어 있다. 공(空)하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그 어떤 것도 나툴 수 있는 것이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도리어 꽉 차서 인연 따라 모든 것이 나투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나무와 나무를 비벼서 불을 얻었다고 하면 그 불이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나무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공기 중에서 나온 것도 아니며, 비비는 내 손에서 나온 것도 아니지만 분명이 이렇게 불이란 상이 나투었다.
이처럼 세상 모든 만물, 범소유상은 다 인연 따라 잠시 나툰 것일 뿐이므로 인연이 다 하면 소멸되는, 그 어느 것도 고정된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눈 ․ 귀 ․ 코 ․ 혀 ․ 몸 뜻으로 접할 수 있는 모든 상(相) 역시 고정된 상(실체)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은 드러난 모양과 현상에 집착하고 있다. 그러나 상이 상이 아님을 여리실견(如理實見) 한다면, 정각(正覺)을 이룬다는 말이다.
•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以生其心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해설---<금강경>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에 나오는 게송으로, 보살이 마음을 어떻게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 설한 게송이다. 보살은 반드시 맑고 깨끗한 마음[淸淨心]을 내야하며, 오온(五蘊)에 집착하는 마음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마음작용이 결코 현상에 꺼들려 집착심을 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즉, 응당 색(물질)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며, 성 ․ 향 ․ 미 ․ 촉 ․ 법에 머물러서도 마음을 내지 말 것이니,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청정한 마음을 내라고 했다. 보통 우리가 마음을 일으킬 때는 안(眼) ․ 이(耳) ․ 비(鼻) ․ 설(舌) ․ 신(身) ․ 의(意)라는 육근(六根)이 색(色) ․ 성(聲) ․ 향(香) ․ 미(味) ․ 촉(觸) ․ 법(法)을 대상으로 해서 마음을 일으키게 된다.
눈을 예로 들면, 눈으로 물질인 색을 보는데 있어서 여여하게 아무런 분별없이 바라보지 못하고 대상에 마음이 머물러서(집착해서) 마음을 일으킨다는 말이다. 좋아하는 연인을 볼 때와 미워하는 사람을 볼 때, 우리 마음은 좋다고 집착하고, 밉다고 싫어하며, 대상에 좋고 싫음의 분별을 덮어씌워 놓고 그 대상에 집착해서 좋고 싫은 마음을 일으킨다.
의(意)의 경우도 그렇다. 좋은 대상에 대해서 사랑을 하고, 미운 대상에 대해서는 다툼을 일으킨다. 그러나 대상은 늘 허망하기 때문에 잠시 인연 따라 좋고 싫게 나타날 뿐, 좋고 싫다는 딱 정해진 상은 없다. 죽고 못 살듯이 사랑한 여인과 결혼해 살다가 나중에 서로 미워하며 이혼하는 숱한 예를 우리는 보고 있다. 이처럼 좋고 싫다는 게 허망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는 색 ․ 성 ․ 향 ․ 미 ․ 촉 ․ 법의 대상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고,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머무름 없는 행, 함이 없는 행이야 말로 모든 수행자들이 추구해야 할 길이다. 수행자의 길은 무집착(無執着), 방하착(放下着)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사구게 형식을 갖추지 않았으나 육조 혜능(慧能) 대사가 이 구절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금강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 중의 하나이기에 보통 사구게에 포함시킨다.
•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해설---이 게송은 <금강경>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에 나오는 너무나 유명한 게송으로, 상(相)을 염두에 두고 부처를 보려고 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수보리(須菩提) 존자에게 32상(相)으로 여래를 볼 수 있느냐고 질문 하니, 수보리 존자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러면 전륜성왕(轉輪聖王)도 32상을 가졌으니 여래(如來)라 하겠구나 하고 바로 반박하셨다. 그러니까 수보리 존자는 32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다고 수정해 대답했다. 그러니까 겉모양을 가지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서 나를 보기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 ― 그릇된 도를 행함이니 결코 여래를 보지 못한다고 했다. 깨닫겠다고 부처를 찾아 나서는 이들이 많지만 부처라는 대상을 정해 놓고 찾아 나서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잘못 가고 있는 것이다. 육근으로 부처를 만나고자 해서는 안 된다. 눈으로 형상의 부처를 보려고 하거나, 귀로서 부처의 음성을 들으려 한다면 이 사람은 잘못 길을 든 것이기 때문에 부처를 찾지 못한다. 육근으로 접할 수 있는 대상은 모두가 허망한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 왁깔리(Vakkali) 비구가 있었는데, 부처님 용모에 반해 가르침을 듣기보다 부처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으므로 부처님은 자신의 육신을 보지 말고 자신의 가르침에 주의를 집중하라고 말하셨다고 한다.
•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해설---이 게송은 <금강경>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에 나오는 것으로 공(空)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다. 일체의 유위법이란 모든 삼라만상 모든 것을 말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일체의 유위법이 하나도 없다고 관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꿈 ․ 환영 ․ 거품 ․ 그림자 ․ 이슬 ․ 번개와 같다고 관하라고 하셨다. 이게 바로 삼라만상의 공성(空性)을 제대로 관하는 것이다. 번개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꿈, 거품 등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있어도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은 더 빠르게 사라진다. 그렇게 실체가 없이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내 것이라고 여기고 영원하길 바라기 때문에 고통이 생긴다.
부처님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응신(應身)과 화신(化身)으로 나투시지만 이는 여래의 참다운 법신(法身)이 아니다.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은 진실이 아닌 망연(妄緣)임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오직 법신(法身)만이 청정해 크고 넓어 끝이 없다는 말이다. 상(相)을 떠나야 참다운 여래를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금강경>은 이와 같이 상을 떠나야 함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유위법(有爲法)은 분별망상으로 이루어진 법이다. 즉, 번뇌 망상이 연기해서 일어나는 현상이어서 참으로 허망한 것이다. 일체 현상계의 모든 생멸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해야 한다. 일체 현상계의 모든 생멸법이란 다 허망하며, 다만 잠시 인연 따라 생하고 멸할 뿐인 것이란 말이다. 여기서 ‘응작(應作)’이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란 뜻이다.
헌데 초기경전인 빠알리어 <상윳다 니까야> 3권에 이런 말이 있다.
“물질은 거품 덩어리와 같고, 느낌은 물거품과 같고, 인식은 아지랑이와 같고, 심리현상은 야자수나무와 같고, 알음알이는 요술과 같다.”
<금강경> 4구게 문장과 초기불교 문장이 아주 비슷하다. 대승경전과 초기경전이 별개의 것이 아니며, 대승경전의 뿌리가 초기경전임을 이에서도 알 수 있다.
이상의 <금강경> 4구게는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를 표현하고 있다. 이는 곧 대승의 공(空)을 말한다. 도자기로 된 용기에 모래가 담겨있다면 모래그릇이 되고, 그 용기를 비워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 되며, 물을 부으면 물그릇이 된다. 즉, 나를 비우는 것은 보다 바른 것을 채우기 위한 선행 작업이며, 궁극적으로는 거기에 팔정도를 채우기 위함이다. 이와 같이 절대적인 공(空)일수록 그 속에 많은 것(유/有)을 담을 수 있으므로 이를 두고 진공묘유(眞空妙有)라 한다.
2) 화엄경(華嚴經) 4구게
• 若人慾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해설---<화엄경> ‘야마천궁게찬품(夜摩天宮偈讚品)’에 나오는 게송으로 전체 게송 중 가장 잘 알려진 게송이다. 만약 사람들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을 알고 싶으면 먼저 자기 마음의 체성(體性)을 요달(了達)해 봐라. 모든 것이 마음의 조화임을 알게 되리라고 했다.
첫 구절은 만약 사람들이 과거ㆍ현재ㆍ미래의 모든 부처를 알고 싶다면, 다시 말해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두루 통용되는 참된 진리, 참된 근본을 알고자 한다면 하는 말이다. 그리고 참된 근본이란 곧 <화엄경>의 근본, 인간의 근본, 우주의 근본, 삼세일체불의 근본, 나의 근본이기도 하고, 온 우주 산하대지(山河大地) 두두만물(頭頭萬物)의 근본이고, 부처의 근본이기도 하며, 법계(法界)의 근본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삼세의 모든 부처’라는 말은 전적으로 대승불교사상에 의거한 표현이다. 그리고 이 같은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알고자 하면 법계의 성품 모두가 마음의 조작임을 관찰해서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둘 째 구절은 (이렇게 참된 근본, 참 진리, 부처를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성품을 관해야 할 것이니, ‘일체 모든 것은 마음으로 지어졌다’고 했다. 법계의 성품이 바로 나의 성품이고, 법계의 근본이 나의 근본이기 때문에 법계의 성품을 관하라는 말이 바로 나의 근본을 살피라는 말이며, 나의 참 성품, 즉 불성(佛性)을 찾으라는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 근본이 바로 ‘마음’이라 말하고 있다. 결국 이 4구게는 부처님을 알고자 한다면 법계의 성품을 관하라는 말이다. 그렇게 해놓고 마지막에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라, <화엄경>의 핵심사상도 다 마음이고, 모든 것들은 마음의 장난이라는 말이다.
유심(唯心)사상은 <화엄경>의 사상일 뿐만 아니라 불교의 대표적인 사상이다. 그리고 이 마음의 문제는 근본불교(根本佛敎), 대승불교(大乘佛敎), 선불교(禪佛敎)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중심에 서 있다. 불교는 마음을 다스리는 종교이기 때문에 그렇다. 특히 대승불교와 선불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마음의 이치와 마음의 속성을 잘 이해해야 불교를 이해했다고 할 수 있으며, 이 마음을 깨달았다면 곧 불교를 깨달았다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이 도를 깨달았다는 것도 실은 이 마음을 깨달은 것이다.
• 心如工畵師 能畵諸世間 五蘊實從生 無法而不造
(심여공화사 능화제세간 오온샐종생 무법이부조)
해설---이 게송도 ‘야마천궁게찬품(夜摩天宮偈讚品)’에 나오는 것으로 마음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아서 능히 모든 세상일을 다 그려내고, 오온(五蘊-이 몸뚱이)도 다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마음은 무엇도 만들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화엄경>은 아름다운 삶은 일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설하면서, 우리들 마음의 공능을 화가와 비교해 일체가 모두 오직 마음임을 선명하게 이야기했다. <화엄경>에서 흔히 이야기되고 있는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이 차별이 없다는 의미와 함께 설한 내용이다. 화가가 흰 종이 위에다 그림을 그릴 경우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것을 마음대로 다 그릴 수 있다, 그와 같이 마음은 세상을 만들고 자기 자신의 온갖 능력도 만든다. 그와 같이 만들 줄 아는 능력을 ‘한 물건’이라고도 하고, 진여(眞如)라고도 하고, 자성(自性)이라고도 하고, 법계(法界)라고도 하지만 여기에서는 마음이라 했다.
• 若修習正念 明了見正覺 無相無分別 是名法王子
(약수습정념 명료견정각 무상무분별 시명법왕자)
해설---이 게송도 <화엄경> ‘야마천궁게찬품(夜摩天宮偈讚品)’에 나오는 것으로 만약 바른 생각으로 닦아 익혀 밝게 올바른 깨달음을 요달(了達)해 보면 모양도 없고, 분별도 없으니, 이것을 이름 해 법왕자(法王子=보살)라 한다는 말이다.
※법왕자(法王子)---미래에 부처님이 될 자리에 있는 보살. 세간의 국왕(國王)에게 왕자가 있듯이, 부처님을 법왕(法王)이라 함에 대해 법왕자(法王子)라 했다. 특히 문수(文殊) ․ 미륵(彌勒) 등의 보살을 가리켜 법왕자라 하지만 때로는 불자(佛子)를 말하기도 했다. 특히 문수보살의 지혜와 덕이 뛰어나서 법왕자(法王子)라는 칭호로 불리며, 그래서 보살들 중 상수(上首:우두머리) 역할을 한다는 말도 있다.
• 若人知心行 普造諸世間 是人則見佛 了佛眞實性
(약인지심행 보조제세간 시인즉견불 요불진실성)
해설---이 게송 역시 <화엄경> ‘야마천궁게찬품(夜摩天宮偈讚品)’에 나오는 것으로 어떤 사람이 만약 마음이 모든 세간을 만들어내는 줄을 안다면 이 사람은 바로 부처님을 친견하게 될 것이고 부처님의 진실성을 알게 될 것이다 - 곧 깨달음을 얻을 것이란 말이다.
3) 법화경(法華經) 4구게
• 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佛子行道已 來世得作佛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 불자행도이 내세득작불)
해설---<법화경>의 근본정신인 제법실상의 깊은 도리를 말하고 있다. <법화경>의 다른 이름이 곧 제법실상이다. 제법이라 함은 모든 것을 가리킨다. 있다는 모든 것을 말함이요, 실상이라 함은 모든 것의 참모습이며 중도를 일컫는 뜻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본래부터 스스로 고요하고 청정하므로 우리가 이와 같이 닦고 닦으면 내세에는 부처를 이룰 것이라는 말이다.
제법(諸法) ― 이 세상 모든 것은 본래부터 스스로 고요해 청정한 것이라는 말은 그대로 <금강경>의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이나 <화엄경>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같은 맥락의 말이다. ‘제법’이란 <금강경>에서의 상이 있는바 모든 것, 즉 ‘범소유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래부터 스스로 고요하고 청정하다는 말은 세상 모든 것이 허망하지만 본래는 고요하고 청정하다는 말이다.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세상 모든 것이 얼마나 번잡하며 끊임없이 시비분별을 일으키는가. 그러나 그런 것은 모두 고정된 실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허망한 것, 공한 것이고, 본래는 청정하고 고요하다는 말이다. 각기 존재 본연의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마음으로 만들어진 것일 뿐[일체유심조]이므로 허망하고[개시허망], 본래는 청정하다는 말이다[상자적멸상]. 그러니 모든 수행자가 이와 같이 닦고 닦으면 부처를 이룰 것이라 했다. 이 말이 그대로 <금강경>의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나 <화엄경>의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과 같은 맥락의 말이다.
4) 열반경(涅槃經)의 4구게
•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
해설---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하는 것은 생멸의 법칙이다. 모든 존재는 그 법칙에서 예외가 있을 수가 없다. 모든 현상은 한시도 고정됨이 없이 변한다는 것이 곧 생하고 멸하는 생멸의 법이고, 생멸은 영원한 것이다. 그러나 이 생멸에의 집착을 놓으면 곧 고요한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보고 듣는 모든 현상은 변한다. 곧 생하고 멸하는 법칙이다. 이 생멸이 생멸 아님을 깨달으면 곧 고요한 열반의 경지가 된다는 말이다.
무릇 화두를 들고 있어도 별별 망상이 일어나는 것이 중생의 마음이다. 그러면서 그 일어나는 근본 자리는 텅 비어 있다. 이 숱한 망상들이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찾아 들어가면 일어난 그 자리가 없다. 그 자리가 텅 비어 있다. 그것이 마음의 본체(本體) 자리이다. 생멸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마는, 그 생멸 그 너머. 적멸(寂滅)한 고요한 자리. 부단히 생멸하면서도 고요한 자리가 틀림없이 있는데, 그것이야말로 즐거움의 자리다. 부처님은 입멸에 드시기 직전에 이 게송을 말씀하셨다고 한다.
생멸멸이(生滅滅已)의 생멸(生滅)은 정신현상으로서의 생멸심, 즉 번뇌의 생멸로 봐야 한다. 그러므로 ‘생멸멸이’는 번뇌의 생멸을 가라앉히라는 의미이고, 그것은 탐ㆍ진ㆍ치(貪瞋痴)의 소멸이 바로 최상의 행복이라는 부처님의 열반에 대한 정의와 일치한다.
5) 능엄경(楞嚴經) 4구게
• 實際理地 不受一塵 佛事門中 不捨一法
(실제이지 불수일진 불사문중 불사일법)
해설 - 실질적인 진리자리에는 먼지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지만, 중생을 교화하는 부분에서는 한 법(온갖 잡동사니들)도 버려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실제적인 진리란, 이면(裏面)에 있는 본질의 세계이다. 본질의 세계란, 완벽해서 빈틈이 없다. 그런 본체란 공적한 자리이다. 따라서 진실만 취하려 하다가 보면, 실은 아무것도 붙들 것이 없고 받아들일 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먼지 하나 필요한 것이 없다. 하지만 사람의 삶이란 본질과 현상의 세계가 함께 존재한다. 불사(佛事)란 우리들이 사는 일상사(日常事)를 말한다. 사사불공(事事佛供)이라고 했듯이, 우리들이 사는 일상사 하나하나가 다 불공 아닌 게 없다는 말이다.
개혁과 쇄신은 실제이지의 바탕에서 사람의 생각을 바꾸고 제도를 고쳐 국정을 바로 잡자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들이 사는 삶, 일상사 그대로가 다 바로 설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된 지도자란 이 땅의 어느 생명도 버리지 않고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 실제이지(實際理地)란 진리의 본체를 말한다. 그러므로 어떠한 티끌만한 허물도 용납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불사(佛事)란 중생을 제도하는 일이다. 중생이란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다 모인 세계이다. 그러나 잡동사니 그들도 모두 우리 백성이니 다 함께 해야 하는 이웃(생명)이다. 그래서 참된 지도자, 좋은 리더는 그 구성원(국민) 누구도 버릴 수가 없다. 어느 누구도 버릴 수 없다는 여기에서 통합정치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 위대한 지도자가 나오기를 기원해야 하겠다.
6) 원각경(圓覺經) 4구게
• 知幻卽離 不作方便 離幻卽覺 亦無漸次
(지환즉리 부작방편 이환즉각 역무점차)
해설 - 모든 것이 환(幻, 꼭두각시)인 줄 깨닫기만 하면, 곧 (헛된 생각을)여의면 더 방편을 지을 것이 없고, 환(幻)을 여의면 곧 깨친 것이라 더 닦아갈 것도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환(幻)’은 일체의 모든 존재현상은 인연으로 얽혀 있을 뿐 불변의 실체성이 없고, 오직 환상과 같이 거짓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비유로 보인 말이다. 현상으로 나타나 있는 모든 것은 환유(幻有)이고, 나타나 있는 사상(事象)은 환술사(幻術師)가 요술을 부려 만들어 놓았듯이 환화(幻化)라는 것이다. 따라서 환을 여의면 바로 깨치게 된다는 말이다. <금강경>의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과 같은 맥락의 말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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