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처경

[스크랩] 사띠빳따나 숫따(念處經)

수선님 2018. 2. 18. 12:39

〈사띠빳따나 숫따(念處經)>

‘염처경’은‘마음챙김’의 가르침 / 몸, 감각, 마음상태, 마음대상, 관찰

 

 

사념처, 즉 네 가지 ‘마음챙김(念)’이 깨달음으로 가는 바로 그 한 길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육성에 보다 가까운 이 빨리 경전의 가르침을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

 

따라서 여기서,

동북아시아의 대승불자들에게 생소할 수밖에 없을 마음챙김(念, sati 싸띠),

마음집중(禪定, 止, samatha 사마타),

지혜(智慧, 觀, vipassana 위빠싸나)에 대한 기본이해가 다시 절실해진다.

 

마음챙김으로 번역되는

싸띠(sati, 念)는 ‘기억하다(samsarati)’ 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어근(語根)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하지만 싸띠는 과거의 ‘기억’보다는 현재에 대한 주의 ‘집중’, 분명한 ‘알아차림’, 충분히 ‘깨어있음’등으로 번역될 철저한 ‘주의 깊음 ’을 의미한다.

 

빠따나(pat.t.ha-na)는 말은 ‘긴밀함’, ‘확고함’을 의미한다.

 

이 두 말을 결합하면, ‘관찰 대상에 대한, 분명한 알아차림의 확립’이 된다.

이러한 종류의 알아차림을 ‘확고부동하게 잘 정립된 마음챙김’(suppatit.t.hita sati)이라고 하는 것이다.

 

마음집중(禪定, 止, samatha 사마타)은 마음을 한 곳에만 모으는[心一境性] 실천을 의미하며,

관찰(觀, 見, vipassana 위빠싸나)은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여실하게 보는 눈을 의미한다.

관찰은 마음집중과 마음 챙김에 의해서 생긴다.

이 둘 없이는 관찰이 생기지 않는다.

마음 챙김과 마음집중은 정견(正見)의 공통기반이다.

마음집중은 번뇌를 일시적으로 억누르지만 관찰은 번뇌를 뿌리째 잘라 내버린다.

 

테라바다불교의 수행자에는 크게 두 부류가 있는데, 사마타 행자와 위빠사나 행자이다.

사마타 행자는 사선(四禪) 또는 팔선(八定)의 완전한 마음집중을 먼저 닦아

그 힘으로 번뇌를 억누른 후 위빠사나를 닦는다.

반면에 위빠사나 행자는 완전한 마음집중 없이 처음부터 대상을 챙기는

-순간순간의 마음집중이라고 할 수 있을-

마음 챙김에 의해서 위빠사나를 실천한다.

 

〈염처경〉은 바로 이 마음 챙김,

즉 ‘관찰 대상에 대한, 분명한 알아차림의 확립’에 관한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염처경〉은 ‘마음챙 김의 명상법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그 마음 챙김의 대상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1)육체적인 현상(身, ka-ya),

(2)느낌 또는 감각 (受, vedana-),

(3)마음의 여러 가지 상태(心, citta),

(4)마음의 여러 가지 대상(法, dhamma-)의 네 가지다.

 

신(身)은 현대적인 개념으로는 감각(sensation)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마음 챙김의 대상으로서 까야란 몸을 움직임에 따라 경험되는 감각을 말한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수행되는 신의 마음 챙김에는 이러한 감각 외에도 몸을 구성하는 성분에 대한 관찰과 백골관(白骨觀)이라 하여 죽은 후에 몸이 부패해 가는 과정에 대한 관찰이 포함된다.

 

수(受)는 현대적 개념으로 느낌(feeling)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마음 챙김의 대상으로서 수는

매순간 우리가 느끼는 쾌(樂), 불쾌(苦), 및 쾌도 불쾌도 아닌 모든 느낌(非苦非樂)들을 말한다.

 

윤영해 동국대 교수 <불교신문-윤영해의 경전 다시 읽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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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세존께서 한때

쿠루(Kuru) 나라의 수도인 카마사다마(Kammassadamma)에서 쿠루 나라 사람들과 함께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비구들아,

존재를 정화하고,

슬픔과 한탄을 극복하고,

고통과 재난을 극복하고,

올바른 길에 도달하고,

열반에 드는 데에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있나니,

곧 올바른 관찰의 네 가지 형태인 사념처(四念處)가 그것이니라.

그러면 사념처란 무엇인가?

 

올바로 사물을 이해하고 관찰하며 정진하는 비구라면

몸(body)의 행위를 관찰하여 세계에 대한 탐욕과 거부감을 극복하느니라.

 

또 느낌을 관찰하여 세계에 대한 탐욕과 거부감을 극복하며,

마음(mind)의 활동을 관찰하여 세계에 대한 탐욕과 거부감을 극복하며,

정신적 대상(mental abjects)을 관찰하여 세계에 대한 탐욕과 거부감을 극복하느니라.

 

그러면 비구는 어떻게 몸의 활동을 관찰하는가?

 

먼저 숲 속 나무 아래나 어느 조용한 장소에 가서 가부좌를 하고 앉은 다음

몸을 바로 하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리고는 숨을 들이고 내는 것에 신경을 집중한다.

 

길게 숨을 들이쉴 때 길게 숨을 들이쉬는 것을 안다.

길게 숨을 내쉴 때는 길게 숨을 내쉬는 것을 안다.

 

짧게 숨을 들이쉴 때는 짧게 숨을 들이쉬는 것을 안다.

짧게 숨을 내쉴 때는 짧게 숨을 내쉬는 것을 안다.

 

호흡하는 몸 전체를 겪으면서 숨을 들이쉴 것이라고 스스로를 훈련시킨다.

호흡하는 몸 전체를 겪으면서 숨을 내쉴 것이라고 스스로를 훈련시킨다.

 

호흡하는 몸의 활동을 조용하게 하면서 숨을 들이쉴 것이라고 스스로를 훈련시킨다.

호흡하는 몸의 활동을 조용하게 하면서 숨을 내쉴 것이라고 스스로를 훈련시킨다.

 

이렇게 몸의 활동을 내적으로,

혹은 외적으로, 혹은 내외로 관찰한다.

 

또한 몸 안에서의 활동의 시작을, 혹은 소멸을, 혹은 시작과 소멸을 관찰한다.

혹은 몸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깨닫기 위해 가능한 한 정신을 집중시킨다.

그러면 이 세상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초탈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몸의 활동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비구는 드나듬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또 정면이나 뒤를 봄에,

몸을 구부리거나 폄에,

옷을 입거나 바루를 지니는 것에,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보는 것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또 자연의 소리에 주위를 기울여야 하며,

걷고 서고 앉고 잠들고 깨고 말하고 침묵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모든 것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처럼 몸의 활동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비구는 살갗으로 덮혀 있으면서 머리끝에서 발바닥까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이 몸에 대해 관찰한다.

 

이 몸 안에는 머리털, 털, 손톱, 이, 살갗, 살, 근육, 뼈, 골수, 콩팥, 심장, 간장, 횡격막, 지라, 허파, 창자,

장간막, 위장, 근막, 담즙, 담, 고름, 피, 땀, 지방, 눈물, 기름, 침, 콧물, 활액, 오줌이 있다고.

 

그것은 마치 두 개의 구멍이 있는 식량 자루에 쌀과 이집트 콩과 완두콩과 참깨와 나락이 있을 때

정상적인 눈을 가진 사람이 그 자루를 열어 보고

 

이것은 쌀이다,

이것은 콩이다,

이것은 완두콩이다,

이것은 참깨다,

이것은 나락이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비구는 피부로 덮혀 있으며 머리 끝부터 발바닥까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찬 이 몸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 몸에는 머리털, 털, 손톱, 이, 살갗, 살, 근육, 뼈, 골수, 콩팥, 심장, 간장, 횡격막, 지라, 허파, 창자,

장간막, 위장, 근막, 담즙, 담, 고름, 피, 땀, 지방, 눈물, 기름, 침, 콧물, 활액, 오줌이 있다고.

이처럼 몸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비구는 이 몸이 어떤 물질적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가를 관찰한다.

이 몸에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요소가 있다고.

 

그것은 마치 영리한 백정이나 그의 도제가 소를 잡아 토막을 낼 때 네 개로 크게 나누는 것과 같다.

똑같이 비구는 이 몸이 물질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음을 관찰한다.

 

이 몸에는 지수화풍의 요소가 있다고.

이처럼 몸에 대해 관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비구는 몸이 죽어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면 퍼래지고 붓고 짓물러지고

묘지에 버려지는 것을 보면 자신의 몸이 바로 그대로 자연과 동일한 것이며,

그렇게 될 것이며,

결코 그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임을 알게 된다.

이처럼 몸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송장이,

까마귀나 매나 독수리나 개나 재칼이나 여러 벌레에게 먹히는 것을 보면,

자신의 몸이 바로 자연과 동일한 것이며,

그렇게 될 것이며,

그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처럼 몸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송장이

약간의 살과 피만 남고 힘줄에 연결된 해골로 변하는 것을 보면,

자신의 몸이 바로 자연과 동일한 것이며,

그렇게 될 것이며,

그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처럼 몸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송장이

살도 없이 살도 없이 힘줄로 연결된 해골과 더러운 피만 남은 모습을 보면,

자신의 몸이 바로 자연과 동일한 것이며,

그렇게 될 것이며,

그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처럼 몸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송장이

살과 피도 없어지고 힘줄로 연결된 해골로 변한 것을 보면,

자신의 몸이 바로 자연과 동일한 것이며,

그렇게 될 것이며,

그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처럼 몸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비구도 묘지에 버려진 송장이

뼈마져 분리되어 손의 뼈와 발의 뼈와 정강이의 뼈와 허벅지의 뼈와 엉덩이의 뼈와 척추와 머리의 뼈로

각각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 모습을 보면,

자신의 몸이 바로 자연과 동일한 것이며,

그렇게 될 것이며,

그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처럼 몸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송장의 뼈가 마치 조개색과 같이 희게 변하는 것을 보면,

자신의 몸이 바로 자연과 동일한 것이며,

그렇게 될 것이며,

그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처럼 몸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송장이 일년 이상이 지나 한 더미의 뼛가루로 변하는 것을 보면,

자신의 몸이 바로 자연과 동일한 것이며,

그렇게 될 것이며,

그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처럼 몸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송장이 뼈마져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보면,

자신의 몸이 바로 그대로 자연이며,

그렇게 될 것이며,

그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처럼 몸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면 비구는 느낌(覺)을 어떻게 관찰하는가?

 

비구들아,

비구는 즐거운 느낌을 경험할 때 자신이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는 줄 알며,

괴로운 느낌을 경험할 때 자신이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는 줄 알며,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할 때 자신이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줄 안다.

 

또 세속의 즐거운 느낌을 경험할 때 자신이 세속의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는 줄 알며,

즐거운 정신적 느낌을 경험할 때 자신이 즐거운 정신적 느낌을 경험하는 줄 안다.

 

또 세속의 괴로운 느낌을 경험할 때 자신이 세속의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는 줄 알며,

괴로운 정신적 느낌을 경험할 때 자신이 괴로운 정신적 느낌을 경험하는 줄 안다.

 

또 세속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할 때

자신이 세속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줄 알며,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정신적 느낌을 경험할 때

자신이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줄 안다.

 

비구는 이와같이 느낌을 내적으로,

혹은 외적으로,

혹은 내외로 관찰한다.

 

비구는 느낌의 시작을,

혹은 소멸을,

혹은 시작과 소멸을 관찰한다.

 

혹은 마음을 필요한 만큼 집중하여 느낌이 존재함을 알고 깨닫는다.

그리하면 세상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초월하게 된다.

비구는 이처럼 관찰하며 산다.

 

그러면 비구는 어떻게 마음을 관찰하는가?

 

비구들아,

비구는 탐욕(貪)이 있으면 마음에 탐욕이 있음을 알며,

탐욕이 없으면 마음에 탐욕이 없음을 안다.

 

또 증오(瞋)가 있으면 마음에 증오가 있음을 알며,

증오가 없으면 마음에 증오가 없음을 안다.

 

또 어리석음(癡)이 있으면 마음에 어리석음이 있음을 알며,

어리석음이 없으면 마음에 어리석음이 없음을 안다.

 

또 겁내거나 혼란스러운 상태일 때 자신의 마음이 그러함을 알며,

개발되거나 개발되지 않은 상태일 때 자신의 마음이 그러함을 안다.

 

또 보다 우월한 다른 어떤 정신의 상태일 때 마음의 상태가 그러함을 알며,

보다 우월한 다른 어떤 정신의 상태에 이르지 못했을 때 마음의 경지가 그러함을 안다.

 

또 집중된 상태일 때 마음이 집중된 상태임을 알며,

집중되지 않은 상태일 때 마음이 집중되지 않은 상태임을 안다.

 

또 해방된 상태일 때 마음이 해방된 상태임을 알며,

해방되지 않은 상태일 때 마음이 해방되지 않은 상태임을 안다.

 

비구는 이와같이 마음을 내적으로,

혹은 외적으로,

혹은 내외적으로 관찰한다.

 

비구는 마음의 일어남,

혹은 소멸,

혹은 일어남과 소멸에 대해 관찰한다.

 

혹은 마음이 존재함을 알고 깨닫기 위해 가능한 한 정신을 집중한다.

그러면 세상의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초탈하게 된다.

비구는 이처럼 마음을 관찰한다.

 

그러면 비구는 어떻게 정신적 대상(法)들을 관찰하는가?

비구들아,

비구는 정신적 대상으로서의 다섯 가지 장애(五蓋)를 관찰하느니라.

 

그러면 비구는 어떻게 정신적 대상으로서의 다섯 가지 장애를 관찰하느냐?

 

비구들아,

비구는 감각적 즐거움이 있을 때 감각적 즐거움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며,

감각적 즐거움이 없을 때 감각적 즐거움이 자신에게 없음을 안다.

 

또 비구는 일어나지 않은 감각적 즐거움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알며,

일어난 감각적 즐거움이 어떻게 사라지는가를 안다.

또 비구는 사라진 감각적 즐거움이 미래에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방법을 안다.

 

비구는 분노가 있을 때 분노가 자신에게 있음을 알며,

분노가 없을 때 분노가 자신에게 없음을 안다.

또 비구는 일어나지 않은 분노가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알며,

일어난 분노가 어떻게 사라지는가를 안다.

또 비구는 사라진 분노가 미래에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방법을 안다.

 

비구는 나태함과 게으름이 있을 때 나태함과 게으름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며,

나태함과 게으름이 없을 때 나태함과 게으름이 자신에게 없음을 안다.

또 비구는 일어나지 않은 나태함과 게으름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알며,

일어난 나태함과 게으름이 어떻게 사라지는가를 안다.

또 비구는 사라진 나태함과 게으름이 미래에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방법을 안다.

 

비구는 근심과 걱정이 있을 때 근심과 걱정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며,

근심과 걱정이 없을 때 근심과 걱정이 자신에게 없음을 안다.

또 비구는 일어나지 않은 근심과 걱정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알며,

일어난 근심과 걱정이 어떻게 사라지는가를 안다.

또 비구는 사라진 근심과 걱정이 미래에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방법을 안다.

 

비구는 의심이 있을 때 의심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며, 의심이 없을 때 의심이 자신에게 없음을 안다.

또 비구는 일어나지 않은 의심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알며, 일어난 의심이 어떻게 사라지는가를 안다.

또 비구는 사라진 의심이 미래에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방법을 안다.

 

비구는 이처럼 정신적 대상을 내적으로, 혹은 외적으로, 혹은 내외적으로 관찰한다.

비구는 정신적 대상의 일어남, 혹은 소멸, 혹은 일어남과 소멸을 관찰한다.

또 정신적 대상이 존재함을 알고 깨닫기 위해 가능한 한 정신을 집중한다.

 

그러면 세상의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초탈하게 된다.

 

비구들아,

비구는 이처럼 정신적 대상으로서의 다섯 가지 장애를 관찰하느니라.

그리고 더 나아가 비구는 정신적 대상으로서의 오온(五蘊)에 대해 관찰한다.

그러면 오온을 어떻게 관찰하는가?

 

비구들아,

비구는 이렇게 물질적 형상(色)이 있으며,

그것은 이러한 방식으로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또 이렇게 느낌(受)이 있으며,

그것은 이러한 방식으로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또 이렇게 인식(想)이 있으며,

그것은 이러한 방식으로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또 이렇게 정신적 구성물(行)이 있으며,

그것은 이러한 방식으로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또 이렇게 의식(識)이 있으며,

그것은 이러한 방식으로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비구는 정신적 대상을 내적으로, 혹은 외적으로, 혹은 내외적으로 관찰한다.

 

비구는 정신적 대상의 일어남, 혹은 소멸, 혹은 일어남과 소멸을 관찰한다.

또 정신적 대상이 존재함을 알고 깨닫기 위해 가능한 한 정신을 집중한다.

그러면 세상의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초탈하게 된다.

 

비구들아, 비구는 이러한 방식으로 정신적 대상으로서의 오온에 대해 관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비구는 정신적 대상으로서의 여섯 가지 내적, 외적 감각의 기초(六處)에 대해 관찰한다.

그러면 비구는 정신적 대상으로서의 여섯 가지 감각의 기초를 어떻게 관찰하는가?

 

비구는 눈(眼)과 보이는 형상(色)을 알며, 그 둘에 의하여 발생하는 번뇌를 안다.

또 비구는 일어나지 않은 번뇌가 어떻게 일어나며,

일어난 번뇌가 어떻게 사라지는지,

그리고 사라진 번뇌가 미래에 어떻게 다시 일어나지 않을지를 안다.

 

비구는 귀(耳)와 소리(聲)를 알며, 그 둘에 의하여 발생하는 번뇌를 안다.

또 비구는 일어나지 않은 번뇌가 어떻게 일어나며,

일어난 번뇌가 어떻게 사라지는지,

그리고 사라진 번뇌가 미래에 어떻게 다시 일어나지 않을지를 안다.

 

비구는 코(鼻)와 냄새(香)를 알며, 그 둘에 의하여 발생하는 번뇌를 안다.

또 비구는 일어나지 않은 번뇌가 어떻게 일어나며,

일어난 번뇌가 어떻게 사라지는지,

그리고 사라진 번뇌가 미래에 어떻게 다시 일어나지 않을지를 안다.

 

비구는 혀(舌)와 맛(味)을 알며, 그 둘에 의하여 발생하는 번뇌를 안다.

또 비구는 일어나지 않은 번뇌가 어떻게 일어나며,

일어난 번뇌가 어떻게 사라지는지,

그리고 사라진 번뇌가 미래에 어떻게 다시 일어나지 않을지를 안다.

 

비구는 몸(身)과 접촉되는 대상(觸)을 알며, 그 둘에 의하여 발생하는 번뇌를 안다.

또 비구는 일어나지 않은 번뇌가 어떻게 일어나며,

일어난 번뇌가 어떻게 사라지는지,

그리고 사라진 번뇌가 미래에 어떻게 다시 일어나지 않을지를 안다.

 

비구는 마음(心)과 정신적 대상(法)을 알며, 그 둘에 의하여 발생하는 번뇌를 안다.

또 비구는 일어나지 않은 번뇌가 어떻게 일어나며,

일어난 번뇌가 어떻게 사라지는지,

그리고 사라진 번뇌가 미래에 어떻게 다시 일어나지 않을지를 안다.

 

비구들아,

비구는 이러한 방식으로 정신적 대상을 내적으로, 혹은 외적으로, 혹은 내외적으로 관찰한다.

비구는 정신적 대상의 일어남, 혹은 소멸, 혹은 일어남과 소멸을 관찰한다.

또 정신적 대상이 존재함을 알고 깨닫기 위해 가능한 한 정신을 집중한다.

그러면 세상의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초탈하게 된다.

 

비구는 이러한 방식으로 정신적 대상으로서의 여섯 가지 내적, 외적 감각의 기초를 관찰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비구는 정신적 대상으로서의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七覺支, 七覺分)를 관찰한다.

그러면 비구는 정신적 대상으로서의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를 어떻게 관찰하는가?

 

비구는 주의깊은 관찰이라는 깨달음의 요소(念覺支)가 있을 때 염각지가 자신에게 있음을 알며,

염각지가 없을 때 자신에게 그것이 없음을 안다.

또 비구는 일어나지 않은 염각지가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알며,

일어난 염각지를 발전시켜 완성에 이르게 하는 방법을 안다.

 

비구는 정신적 대상(法)의 탐구라는 깨달음의 요소(擇法覺支)가 있을 때 택법각지가 자신에게 있음을 알며, 택법각지가 없을 때 그것이 자신에게 없음을 안다.

또 비구는 일어나지 않은 택법각지가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알며,

일어난 택법각지를 발전시켜 완성에 이르게 하는 방법을 안다.

 

비구는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精進覺支)가 있을 때 정진각지가 자신에게 있음을 알며,

정진각지가 없을 때 그것이 자신에게 없음을 안다.

또 비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정진각지가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알며,

일어난 정진각지를 발전시켜 완성에 이르게 하는 방법을 안다.

 

비구는 즐거움의 깨달음의 요소(喜覺支)가 있을 때 희각분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며,

희각분이 없을 때 그것이 자신에게 없음을 안다.

또 비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희각분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알며,

일어난 희각분을 발전시켜 완성에 이르게 하는 방법을 안다.

 

비구는 몸과 마음의 긴장의 완화라는 깨달음의 요소(輕安覺支)가 있을 때

경안각지가 자신에게 있음을 알며,

경안각지가 없을 때 그것이 자신에게 없음을 안다.

또 비구는 일어나지 않은 경안각지가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알며,

일어난 경안각지를 발전시켜 완성에 이르게 하는 방법을 안다.

 

비구는 정신집중이라는 깨달음의 요소(定覺支)가 있을 때 정각지가 자신에게 있음을 알며,

정각지가 없을 때 그것이 자신에게 없음을 안다.

또 비구는 일어나지 않은 정각지가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알며,

일어난 정각지를 발전시켜 완성에 이르게 하는 방법을 안다.

 

비구는 평정의 유지라는 깨달음의 요소(捨覺支)가 있을 때 사각지가 자신에게 있음을 알며,

사각지가 없을 때 그것이 자신에게 없음을 안다.

또 비구는 일어나지 않은 사각지가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알며,

일어난 사각지를 발전시켜 완성에 이르게 하는 방법을 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비구는 정신적 대상으로서의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言帝)에 대해 관찰한다.

그러면 비구는 정신적 대상으로서의 네 가지 고귀한 진리를 어떻게 관찰하는가?

 

비구는 진리에 의해 이것이 듀카(Dukkha, 苦)임을 알며,

이것이 듀카의 원인임을 알며,

이것이 듀카의 소멸임을 알며,

이것이 듀카의 소멸에 이르는 길임을 안다.

 

이처럼 비구는 정신적 대상을 내적으로, 혹은 외적으로, 혹은 내외적으로 관찰한다.

비구는 정신적 대상의 일어남, 혹은 소멸, 혹은 일어남과 소멸을 관찰한다.

 

또 정신적 대상이 존재함을 알고 깨닫기 위해 가능한 한 정신을 집중한다.

그러면 세상의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초탈하게 된다.

 

비구는 이러한 방식으로 정신적 대상으로서의 네 가지 고귀한 진리를 관찰한다.

 

비구들아,

누구든지 간에 이러한 방법으로 칠년간 사념처(四念處)를 실천한다면

그는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지금 여기서 성취하거나,

혹은 번뇌의 잔재가 약간 남아 있는 상태이긴 하나 불환과(不還果)를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비구들아,

칠년은 아니더라도 육년, 오년, 사년, 삼년, 이년 혹은 일년동안

이러한 방법으로 사념처를 수행한다면 아라한과나 불환과 중 한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비구들아,

일년은 아니더라도 칠개월, 육개월, 오개월, 사개월, 삼개월, 이개월, 혹은 일개월만이라도

이러한 방식으로 사념처를 실천한다면 아라한과나 불환과 중 한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비구들아,

일개월은 아니더라도 일주일 동안만 이러한 방식으로

사념처를 실천한다면 아라한과나 불환과 중 한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비구들아,

이 때문에 사념처야말로 존재를 정화하고,

슬픔과 한탄을 극복하고,

고통과 비탄을 여의고,

정도(正道)에 도달하고,

열반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하는 것이다. '

 

세존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시자,

비구들은 그 말씀에 만족하여 기쁘게 받들었다.

 

출처 : nirvana
글쓴이 : 무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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