除夕 (鏡虛스님)
千緖暗懷以言 山深雪冷一書軒
천 갈래 은밀한 마음 어찌 말로 다하리? 산은 깊고 눈은 차가운데 서고(書庫)에 앉았네.
去歲淸明江界邑 今年除夕甲山村
지난 해 청명절은 강계읍서 보내고, 금년의 마지막 그믐은 갑산 마을에서 맞았네.
俄忽鄕關先入夢 不期旅暫忘痕
아까 고향 생각 문득 내고 선잠 꿈에 들었지만, 나그네 한이 잠시나마 잊힐리야.
窓燈耿耿喧譁絶 佇聽隣鷄幾倚門
창에 비친 등불 깜빡이고 인적이 끊겼지만, 옆집 닭 울음에 얼마나 문 열어 보았던고.
〈보충설명〉 선불교를 중흥시킨 경허 스님은 정세가 매우 어지러웠던 구한말의 특출한 선지식으로서 수월, 만공 등 뛰어난 제자를 많이 길러 내셨습니다. 말년에는 자취를 감추고 수년간 소식이 없었는데 입적하셨다는 소식을 접한 만공 스님이 강계, 갑산 등을 찾아다니며 경허 스님의 자취를 찾았습니다. 강계에서 이 ‘제석(除夕)’이란 시를 발견한 만공 스님은 대성통곡 했습니다. 섣달 그믐날 밤, 경허 스님이 얼마나 고향을 그리워했는지 절절합니다.
앞에서부터 이어져 온 금강경의 큰 가르침은 여래를 모습으로 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래를 모습으로 보지 말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어리석은 범부들은 여래를 아무 것도 없는 단멸상(斷滅相)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오해할까봐 부처님께서는 다시 여래의 실상은 텅 빈 진리의 모습이지만 그 텅 빈 가운데서 삼라만상이 현실로 나투어지므로 여래는 무단무멸(無斷無滅)이라고 설명을 덧붙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28번 째 단락인 ‘불수불탐분(不受不貪分)’에 이르러서는 청정보살은 무량한 공덕과 열반을 얻을 수 있으나 그 공덕을 탐하지도 않고 받지도 않으며 도리어 중생을 위해 회향한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법신을 체현시킨 화신불 석가모니 부처님은 무량복덕을 수용해서 이 세상에 출현하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는 의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의 설법으로 그 의심을 풀어주었습니다.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의 주된 가르침은, 법신(法身)은 오고 감이 없으며 항상(恒常)스럽고 텅 빈 진리라는 것입니다.
중생의 위의(威儀)는 행주좌와어묵동정이 모두 탐진치 삼독(三毒)과 아상(我相)을 비롯한 사상(四相)으로 얽혀있어 번거롭고 시비가 많아서 업과 과보가 따르지만 법신의 위의(威儀)는 고요합니다. 옷자락만 스쳐도 조용하고 아늑함을 느낄 수 있는 우리 곁의 큰 스님들을 통해 우리는 적정(寂靜)상태인 법신의 위의(威儀)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須菩提 若有人 言如來 若來若去若坐若臥 是人 不解我所說義 何以故 如來者 無所從來 亦無所去 故名如來
“수보리여!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가 오고 가고 앉고 눕기도 한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내가 설법한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여래라는 것은 어디에선가 오는 곳도 없으며 또한 가는 곳도 없기 때문에 여래(如來)라 이름 할 뿐이기 때문이니라.”
{六祖}如來者 非來非不來 非去非不去 非坐非不坐 非臥非不臥 行住坐臥四威儀中 常在空寂 卽是如來也
여래라는 것은 오는 것도 아니고 오지 않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고 가지 않는 것도 아니며, 앉는 것도 아니고 앉지 않는 것도 아니며, 눕는 것도 아니고 눕지 않는 것도 아니니, 행주좌와 네 가지 위의 가운데 항상 텅 비고 고요하게 있는 것이 곧 여래다.
{冶父}山門頭合掌 佛殿裏燒香
산문 입구에서 합장하고 불전 안에서 향을 피우도다.
〈보충설명〉 부처님께서 법신에 대하여 텅 비어 오고감이 없는 위의만 강조하니까, 야보스님은 현실에서 우리가 인사하고 향 피우는 그 모습이 바로 법신불 모습이라고 거들어 주는 것입니다.
衲捲秋雲去復來 幾南岳與天台 寒山拾得相逢笑 且道笑箇甚 笑道同行步不擡
장삼자락에 가을 구름 걷어 들여 오가며, 남악과 천태산을 몇 번이나 돌았던고. 한산과 습득이 서로 만나 웃으니, 또한 일러라! 무엇 때문에 웃는가? 웃으며 말하기를, “같이 걸으며 한 걸음도 떨어진 적 없도다.”
〈보충설명1〉 납(衲)은 장삼자락을 말하며, 장삼자락에 가을구름을 거두어 넣고서 오가는 모습은 선지식을 찾아다니는 과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보충설명2〉 한산은 법신의 체(體)로서 문수보살을 의미하며, 습득은 법신의 용(用 : 바라밀의 실천, 중생구제)으로서 보현보살을 의미합니다. 수행자는 집만 지키고 앉아있는 문수도 경계해야 하며, 집을 잊어버린 채 밖에만 돌아다니는 보현도 경계해야 합니다. 즉, 중생교화에는 소홀하고 수행만을 중시하며 숨어 있는 것도 경계해야 하며 수행은 소홀하면서 포교만 중시하는 것도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법신의 경계에서 살림하고 오고감에 자유로운 납승(衲僧)의 입장에서 보면, 이 둘 모두가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저 웃음만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모습이 잘 절충된 것은 바로 구름처럼 오고가는 납승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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