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국 선종의 철학적 원리
중국 선종의 사상을 네가지 귀절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敎外別傳,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 이 네 귀절의 뜻을 풀이하면 이렇다.
진정한 도에 이르는 지혜는 단순한 지식과는 달라 문자나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 얻을 수 없음이다. 즉, 부처의 도는 以心傳心이고 경전이란 깨달음에 쉽게 이를 수 있도록 한 법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고명한 선사라도 자신이 깨달은 바를 상대방의 마음속에 집어넣을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나온 것이 禪問答이니 단순한 가르침을 통해 얻을 수 없는 도를 선문답을 통해 유도해 내는 것이다. 또한 선종에서는 아까와 같은 맥락에서 경전 속의 문자에 집착하지 말고, 남의 말로서 해탈할 수 없다고 말함으로서 불립문자의 도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불립문자에 얽매여 비움(空)에 집착하게 되면 그 또한 진정한 도가 아니라 말하고 있다. 六祖 慧能은 문자를 진정 포기한다면 불립문자라는 말도 문자의 옷을 걸쳤으니 버려야 한다고 한다. 즉, 이는 불립문자라는 말을 통해 도를 얻으려 하되 그 말에 집착하지 말며 경을 통해 도에 이르려 노력하다라도 그 경의 문자를 뛰어넘어 진정한 가르침을 보라는 말이다.
직지인심과 견성성불이란 말의 의미는 인간의 自性은 본래 깨끗하나 선악은 마음에서 새겨났으니 마음에서 악한 것을 생각하면 지옥에 들게 되고 선한 것을 생각하면 극락에 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도를 이루기 위해선 모든 만물에 이르고 있는 자성, 즉 佛性을 바로 찾아내어 모든 外在가 자신의 마음으로 생긴 것임을 확연히 깨닫게 되면 마음이 無의 경지에 이르게 되고 자연히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2. 중국 선종의 수양 방법
선종에 있어서의 앎은 상식적인 앎이 아닌 不知之知이다. 그러므로 그것의 수양 방법에 있어서도 상식적인 수양이 아닌 수양, 즉 不修之修이다. 선종에 있어서의 성불을 위한 최선의 수양 방법은 어떤 수행도 전혀 의도적으로 하지 않는데 있다.
고의적으로 노력을 들여 자신을 수양하는 것은 有爲이다. 黃檗선사 希運은 말했다.
“설령 오fot동안의 六度萬行(Paramitas;구원을 얻는 방법)을 수행하여 불보리(佛菩提)를 얻었다 하더라도 이 또한 因緣造作 속에 있으므로 인연이 무로 돌아간다면 無常으로 돌아간다.”
바로 최선의 수양 방법은 다하는데 있다. 이것이 바로 도가들이 말하는 ‘無爲’이며 ‘無心’이다. 이 수양 방법은 그 결과가 아무리 좋다 할지라도 좋은 결과를 얻을 목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떠한 결과도 뒤따르지 않는 그런 식의 일을 하고 있다. 자기의 모든 행동이 목적을 수반하지 않을 때, 그때는 이전에 쌓였던 업의 결과도 없어지고 그렇게 되면 생사의 윤회에서 해탈되어 열반에 신뢰를 가지고 그 밖의 모든 것을 버린다. 우리는 다만 일상생활의 평범한 일을 추구하며 그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선사들이 말하는 不修之修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이런 수양을 거친 자와 거치지 않은 자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이 양자가 모두 똑같은 일을 한다면 후자 또한 열반(Nirvana)에 이르러야 하지 않을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이렇다. 보통 사람이 일상의 생활을 해 나가는 것은 간단하고 평범한 문제이다. 그러나 완전히 어떠한 의도도 없는 마음과 집착 없이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바로 우리는 단순히 아무런 의도도 없이 어떠한 일상생활에도 집착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하며, 그러한 수양은 평범하고 간단한 일상생활을 해 나가는 데서 생긴다. 그리하여 수양을 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수양을 하는 그 자체가 하나의 훌륭한 수양이다. 이러한 無知의 지혜는 하나의 고차원의 지혜와 같다. 그러한 지혜는 원초적인 무지와는 다르다. 애써 닦지 않는 不修 수양은 마찬가지로 원초적 자연 상태와 다르다. 원초적인 무지와 자연 상태는 자연의 선물이지만 무지의 지혜(不知之知)와 불수의 수양(不修之修)은 둘 다 정신의 창조이기 때문이다.
3. 깨달음의 모습 頓悟
중국 선종의 깨달음을 단어로 표현하면 頓悟漸修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점수의 과정은 아무리 길어도 다만 준비 작업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성불하려면 이 수양은 절벽을 건너뛰는 것과 같은 돈오를 통하여 도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도에 대해 南泉普願선사는 이렇게 말했다.
“도란 앎(知)에도 알지 못함(不知)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앎은 망령된 깨달음(妄覺)이며 알지 못함은 맹목적인 무의식(無記)이다. 마치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도에 참으로 도달한다면, 크게 텅 비어 툭 터진 것(太虛廓然)과 같으니 어찌 억지로 시비를 가리겠는가?”
도의 자각은 도와 일체가 되는 것이다. 툭 터진 것과 같은 공간은 허공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모든 차별이 사라진 상태다. 이 상태는 선사에 의하면 앎(智)과 이치(理)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합치되고 대상(境)과 정신(神)은 한데 모이게 되어 경험자와 경험 대상의 구분이 없어지는 상태라고 말한다. 즉 경험자와 경험 대상의 구분이 없음을 체득한 자만이 참으로 그 경지를 안다는 말이다. 이런 상태 아래서 경험자는 상식적 의미의 지식을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무지한 것은 아니다. 이것이 바로 不知之知의 경지이다.
돈오를 설명하기 위해 선사들은 ‘百尺竿頭進一步’라는 은유를 쓴다. 백척간두에서 한발짝 더 나가면 그전의 모든 일은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별안간 깨달았을 때는 그전의 모든 문제가 갑자기 해결되어 있음을 안다. 이러한 방법은 획득점을 위한 일시적 적극적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 인습을 과감히 타파할 때 지금까지의 모든 문제들이 더 이상 문제 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4. 진정한 얻음 無得之得
선종에 있어서 실재는 곧 현상이다. 바로 진정한 도(佛性)는 언제나 드러나 있다는 말이다. 깨닫기만 하면 만물 속에 모두 불타가 있고, 또 어느 곳에나 불타가 있는 것이다.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이는 세상의 도가 바로 세상 자체인 것을 알고 있으며, 진정으로 깨달은 이는 자신이 깨달은 것이 만물에 드러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얻은 것이 없다고 말한다. 이것이 無得之得이다.
5. 한국 선의 개괄
우리나라에 선이 전래 된 것은 중국에서 선종의 형태가 생겨나는 당나라 시대부터 인 것으로 보여 진다. 통일신라 말기에 당나라로 유학을 가는 승려나 학생이 많았던 것은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할 정도로 해상교통이 중요하게 대두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가 있다. 통일신라 말기부터는 선을 중심으로 하는 開山祖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선이 풍미할 때에 약간의 시간을 두고 비슷한 시기에 우리나라에도 선을 표방하는 산문이 열렸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중국에서 五家七宗의 가풍家風을 배워 와서 새롭게 산문을 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구산선문九山禪門 또는 선문구산이다. 일본인 학자 홀골곡쾌천忽滑谷快天은 그의 저서 조선선교사朝鮮禪敎史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문의 구산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구산을 총칭하여 조계종이라고 한다. 조선의 현행하는 선문예참의문禪門禮懺儀文에 대가섭이하 육조혜능에 이르는 법계를 기록하고 다음에는 선문구산의 조사를 세웠으니, 이른바 도의(가지산) 범일(사굴산) 철감(사자산) 무염(성주산) 현욱(봉림산) 도헌(휘양산)혜철(동리산) 이엄(수미산) 홍척(실상산)이다.]
바로 약간 앞 시기에는 원효와 의상이 있었다. 원효는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가장 먼저 확연하게 드러나는 인물이다. 그는 일승원교一乘圓敎 사상으로 확연하게 불교의 정수를 드러낸 뛰어난 인물이었다. 하지만 원효의 시대에는 선을 표방하는 움직임은 찾아보기 힘들다.
신라의 말기부터 시작된 구산선문의 형성은 고려 초기까지로 완성이 되나 크게 번성을 구가 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숭불정책에 의하여 중앙의 왕실 귀족과 밀접하게 결부된 불교가 시간이 갈수록 화려한 불사와 정치권력의 개입 등에 골몰해 갔다.
대각국사 의천이 나타나 방대한 역경사업을 행하였으며 천태지의의 사상을 받아들여 천태종을 세우면서 세력을 번성하였다.
약간의 후대에 보조국사 지눌이 정혜결사를 주도하면서 집단적 수행가풍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정혜결사문 등의 저작을 통해보면 그는 선의 사상을 충분히 섭취하고 당시의 시대상황 속에서 나름대로의 선종적 수행가풍을 만들어 나가려는 노력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눌의 제자 진각혜심眞覺慧諶에 의해서 선문염송이 저술됨에 따라, 한국불교에서도 간화선의 기틀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의 불교는 점차로 귀족과 왕실의 기복을 빌어주는 불교로 전락하면서 조선시대 억불정책의 빌미가 된다.
고려 말기에는 태고보우 선사가 나타나 다시 한번 선을 부흥시키고 불교를 부흥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태고보우는 중국에 건너가 임제종 석옥청공의 법을 받아왔다고도 한다.
조선에 이르러 불교는 지리멸렬하게 되고 화려했던 귀족불교의 자취는 없어졌다. 불교도 혹독한 탄압을 받으면서 산중으로 들어가 법맥을 이어서 겨우겨우 살아남아 왔다. 이러한 암흑기에 청허휴정과 송운유정이 등불을 밝혔다.
그러나 조선의 불교는 선과 교가 융합하고, 여러가지 수행방식이 혼합되면서 교세는 다 같이 쇠약해져가는 형태였다. 그러나 조선불교의 주류적 사상은 선종적 사상임을 여러가지 저작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조선말에 이르러서는 雪坡, 白坡 등의 승려가 있었다.
백파가 지은 禪文手鏡에 대하여 草衣意恂이 四辨漫語로 논박하면서 禪門證正錄, 禪源溯流, 禪門再正錄 등의 저작이 나오고 서로 선의 종지를 논박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나라의 운명과 같이 쇠망하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조선말에 이르러 정치는 극도로 악화되어 동학난이 발생하고 청일전쟁이 벌어져서 결국은 한일합방이 되었다. 이러한 최근세의 민족수난기에는 경허선사가 홀로 우뚝 솟아 있었다.
6.공안
1) 공안의 정의
공안이란 무엇인가? 공안은 다른 말로 화두이다. 화두話頭의 <頭>자는 <話>자의 뒤에 의미없이 붙어있는 접미사이다. 즉 화두는 말(話)이라는 뜻인데 이를 다시 말하면 선사禪師들의 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면 화두는 다른 일반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니고 특정인<禪師>이 쓰는 말인 것이다. 특정인을 조금 확대 시켜 생각해 보면 특정계층<禪家>이 쓰는 말 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화두는 기본적으로 중국 수, 당시대의 선사들의 언설言說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데 화두의 발생 자체는 다분히 중국적인 개성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특히 중국의 사상적 특색이 독특하게 배어있는 노장老莊사상과 역易사상 등의 도학道學적 삼현三玄학풍은 달마도래 이전에 이미 중국을 풍미하고 있었다. 그래서 세속적인 공명과 명리를 버리고 예의와 도의도 무시하고 산수간山水間에 자유로이 노닐면서 고담준론高談峻論을 일삼는 청담학淸談學이 유행하였다. 이것은 달마도래 이전의 불교의 모습에서도 쉽게 드러나는 데 불교의 교의를 이러한 청담적 기풍이나 도교적 노장 사상에 맞추어서 해석하려는 모습들도 보인다. 이러한 모습을 격의불교格儀佛敎라고 한다.
삼현, 청담적인 중국적 특색은 지공誌公화상이나 부대사傅大士(497-569)에 이르러 독특한 행의行儀와 상정常情으로 이해하기 힘든 격외담格外談의 언구言句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중국적 특색은 선종의 선사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왜냐하면 수. 당 시대 선종의 독특한 문답은 사실상 인도불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달마와 양무제와의 대화를 보아도 달마는 일반적인 언어로 양무제의 공덕을 칭찬하지 않았다. 무언가 조금은 다른 언어로 양무제를 대하였으나 양무제는 이러한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 이러한 문답을 문헌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선종의 전통적인 방법으로서 중국적 특색이 가미된 격외적 문답이 행해졌으며, 또한 전승되었다는 사실을 추측하게 해 준다. 이른바 선종의 종지인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은 선종의 종파적 독립을 전후해서 나온 말이지만 이것은 다분히 중국적 개성이 가미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화두란 이러한 중국적 개성과 불교의 진수를 체득하고 압축하여 전달하려는 선사禪師들에 의해서 생겨난 선사들만의 독특한 언어라는 것이다. 특히 화두는 불교적 진리를 대상으로 하고 있고 이미 상식적 접근이나 의미적 해석을 끊어내기 위해 격외적인 언구가 사용된 특수한 언어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부러 꾸며낸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검증하거나 깨달음으로 이끌려는 지극한 노력이 중국적 개성으로 새롭게 창조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2) 공안의 기능
공안, 다시 말해서 화두는 가장 기본적으로 수행의 촉매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것은 불교에 입문해서 어느 정도 기본적 교의를 터득하고 있을 것을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화두는 이러한 기본적인 문제를 궁극적인 문제로 이끌어서 결국에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하려는 선사들의 의지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안의 기본적인 기능은 발심하여 수행을 할 수 있는 촉매제의 역할이다. 이러한 화두의 촉매적 역할에 의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교에 입문하여, 깨달음으로 인도되었는가의 문제는 뒤로 미루더라도 기본적으로 중생의 입장에서 목표를 설정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어느 정도의 인연이 있는 사람이 선사에게서 [이뭣고] 화두에 관해서 얼마간의 설법을 들었다면, 그 사람은 자기가 고민해 오던 세계와 인생에 대한 문제가 여기에 부딪쳐서 꽉 막히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래서 수행을 시작하게 되고, 나중에는 깨달음을 성취하게도 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긴 하지만, 공안의 긍정적 측면은 마치 거대한 빙산이 물위에 머리만 내어놓고 자신의 웅장한 모습은 물속으로 감추면서, 거대한 빙산을 드러내 보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공안은 깨달음에 장애가 되는 번뇌, 즉 앎음알이를 제거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하여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모든 장애와 걸림을 스스로 털어버리는 것이다. 이것만 되어도 자기의 본성을 스스로 보겠지만, 이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므로 화두에 의지하여 몰입해 들어가면 이러한 앎음알이와 번뇌에서 벗어나기가 쉬워지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올바른 간화선 수행을 전제로 하는 이야기이다.
화두를 가지고 오히려 번뇌 망상을 일으킨다면, 아무도 구제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것이 또한 간화의 병폐로 드러나는 문제점이다. 화두의 해답을 의미적으로 추구해 들어가면서, 생각을 이리저리 굴려서 여러 공안을 천착하는 것이 예로부터 간화의 가장 큰 병폐로 조사스님들이 경계하신 바다. 사선死禪이나 사구死句 고칙공안古則公案 등의 언어들은 모두 이러한 간화의 병폐를 잘 지적하는 말이다. 예로부터 간화선을 주창하신 분들은 항상 화두의 병폐를 잘 지적하여, 잘못된 앎음알이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계신다.
마지막으로 화두의 기능은 깨달음을 검증하는 기능을 갖는다. 처음 발심을 했던 그 의문이 수행을 통해서 스스로 검증되어야 만이 진정한 깨달음인 것이다. 강을 건넌 사람이 뗏목을 버리듯이 화두를 의지해서 결과적으로 자기의 본성을 깨우치면, 1800가지의 나머지 공안들도 스스로 뚫려버리는 것이다. 물론 자기의 본성을 올바로 깨우친 것이 곧 올바른 수행의 시작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만 화두는 그러한 판단의 기준까지도 되는 것이다.
3) 간화선 수행의 전통
한국 불교에서는 여전히 간화선 수행을 많이 하고 있다. 요즘 들어서 일본 조동종이나 남방의 비파싸나 수행이 많이 소개되고 있지만, 그래도 한국의 선방禪方에서는 여전히 간화선의 전통적인 수행방법이 고수되고 있다. 이러한 간화선 수행의 전통은 일반적으로 대혜종고의 간화선 주창과 거의 맥을 같이 하고 있으며, 보조 지눌과 진각혜심의 간화선 사상도 물론 거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간화선 수행은 화두에 의지해서 참구參句를 하는 것인데 이것은 외형적인 좌선의 형태나 정형적인 수행의 모습을 따로 설정하는 것이 아니고 항시 불성이 발현되는 일상적 생활 속에서 수행을 한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물론 기본적으로 좌선 수행이 선행되어야 하지만 수행의 외형적 모습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바로 간화의 특성인 것이다. 또한 좌선 수행의 병폐를 화두를 看하므로써 극복하려는 점이 또한 看話禪의 특징이다. 동시에 간화의 병폐 또한 여러가지 나타나는 데, 이러한 병폐는 옛부터 경계해 온 것이므로 간화선 수행에 있어서 경계해야 할 점을 몇 가지 옮겨본다.
1. 생사심을 해결할 발심을 하라.
오온이 개공함을 바르게 보고 바깥세계와 나의 심신이 모두 인연으로 이룩된 거짓 존재일 뿐 그것을 주재主宰하는 실체는 없다는 사실을(제법무아) 똑똑히 보아야 한다.
2. 의정을 일으켜라.
수행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진지한 추구력(正精進)이다. 이 진지한 추구력은 내가 모르는 것을 알려고 문득 크게 의심을 갖는 것이다. 이러한 진지한 추구력(의심)이 가슴에 뭉치지 아니하고는 큰 깨달음을 기대할 수는 없다.
어느 큰 스님의 옛말에
"크게 의심하면 크게 깨닫고, 작게 의심하면 작게 깨달으며, 의심하지 않으면 아예 깨닫지 못한다."
고 했다. 진리에 대한 진지한 추구력이 없이는 수행이 무의미 하다.
3. 고요한 경계를 조심하라.
수행하는 이가 고요한 경계에 빠져들면 사람이 말라죽은 듯한 적막 속에 갇힌 것과 같게 된다. 더욱이 이런 경계의 권태가 오래되면 잠자기를 좋아할 것이니 자기가 이런 병통에 빠져있는 사실조차 알기가 어려워진다. 오직 육신의 생사를 깨치는 데 힘써서 자기가 고요한 곳에 있는 줄을 몰라야만 비로소 옳다 하겠다. 생사대사에서 고요한 모습을 구하려 해도 정말로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으면 이야말로 된 것이다.
4. 의단疑團을 깨뜨려야 한다.
공부하는 이는 몸과 마음이 온통 의심덩어리(疑團)뿐이어서 세계를 하나로 뒤섞어 놓았다 할 만 해야 한다. 산을 보아도 산으로 보이지 않고 물을 보아도 물로 보이지 않아야 한다. 이 의심덩어리를 깨뜨리지 않고는 맹세코 마음을 놓을 수 없으니 이것이 공부에 있어서 긴요하다.
5. 의정과 하나가 되라.
간화를 하는 요체는 의정疑情을 일으켜 그것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데 있다. 그러면 들떠 움직이는 경계를 굳이 떨어버리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떨어지고 허망한 마음도 억지로 맑히려 하지 않아도 자연히 맑아진다. 그리하여 6근六根이 자연히 텅 비어 자유로와진다.
6. 아집我執과 집착 執着과 알음알이計較를 조심해야 한다.
아집은 병病이되고 집착은 마魔가되며, 알음알이는 외도外道로 빠지게 된다. 결단코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잃어버린 물건을 찾듯 열심히 공부하면 앞서 말한 세 가지 폐단이 얼음 녹듯 하여 말짱해질 것이다. 이른바 "마음을 일으켜 생각을 들뜨게 하면 그 자리에서 법체와 어긋난다." 라고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하는 말이다.
7. 항상 또렷하게 깨어있는 채로 참구해야 한다.
화두를 들고 공부하는 납자는 쥐를 잡으려는 고양이처럼 분명하고 또렷하게 깨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망상 속에서 허송세월만 하게 되니 단 10분을 참구하더라도 또렷하게 깨어서 경계에 흔들리지 않고 절실하게 공부해야 한다.
8. 옛 스님의 공안을 천착하지 말라.
참선하는 납자는 옛 스님의 공안을 알음알이로 헤아려 함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공안은 오직 그 목적이 참구에 있는 것이지 이리저리 해석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공안을 해석하고 이리저리 옮겨서 참구하는 것은 결국 자기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이 자기의 본심을 가려서 영원히 미혹함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니 마땅히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도 버려야 한다.
9. 화두를 드는 장소와 시간은 일체처와 일체시이다.
어찌 한곳에 오래 눌러앉아 외연外緣을 끊고 마음을 일어나지 못하게 한 다음에야 定에 들었다고 하겠는가? 이를 곧 삿된 선정이라 하니 납자는 모름지기 외형에 집착한 선을 하면 안된다.
10. 언어. 문구를 따지지 말라.
참선하는 납자는 문구文句를 따져 연구하거나 옛사람의 말씀言語이나 외우고 다녀서는 안된다. 이러한 일은 무익할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알음알이로 전락해 버린다.
위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간화선에서는 일체처와 일체시에서 화두를 들어 참구하는 것을 요구한다. 즉 외형에 집착하지 않는 집요한 수행을 요구하는 것이다. 또한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경계하고 있다. 빨리 화두를 깨뜨려서 깨달음을 얻어야겠다는 마음이 앞서면 그것이 도리어 마음을 가리고 자칫하면 상기병과 같은 것에 걸리기 쉽다. 다만 일체처와 일체시에 화두를 들뿐이지 깨달음 같은 것은 이미 잊어버려야 한다. 또한 앎음알이를 가지고 화두를 해석하거나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생각하는 것도 경계하고 있다. 어쨌든 간화는 묵묵관조의 좌선이 자칫 빠지기 쉬운 적막함의 경계를 경계하면서 새롭게 주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7. 선문답
인류가 가진 가장 위대한 표현기능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묻고 답하는 일이다.> 이것은 모든 문화발전의 원동력이자 인간이 지닌 가장 본능적인 <자기표현수단>이다. 우리는 불교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묻고 답하는 일>이야말로 정말로 어렵고 힘든 일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더욱이 실제적인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선종의 가르침은 더더욱 질문에 대한 답을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범주 속에서 발견되어진다. 이것이 바로 선문답이다. 선문답은 동문서답이 아니요, 신비적인 유희도 아니다. 선가의 언어 체계 속에서 드러나는 절실한 표현방식인 것이다.
1) 선문답의 정의
선문답이란 무엇인가? 실로 어려운 문제다. 세간에서는 대화 도중 전혀 엉뚱한 소리를 할 때에 선문답하느냐고 놀리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선문답은 선禪을 지도, 체득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선사와 납자 사이의 문답이다. 어찌 보면 좀 특수한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특수한 대화라고도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선문답에는 항상 명확한 주제가 있다. 그것은 불교의 진리를 체득하는 것에 관한 것과 불교의 진리, 즉 선종에서의 선(진리) 그 자체인 것이다. 이 한 선의 진리를 서로 묻고 답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설명이나 가르침이 없다. 단지 물음에 대하여 단순하게 드러낸 대답이 있을 뿐이다. 또한 선문답은 깨달음에 관한 검증을 위해서도 쓰여진다. 엄격한 의미에서 말한다면 선문답은 깨달은 사람 사이의 법의 문답이라고 보아야 한다. 물론 교종적 설명이 아니고 선종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묻고 답하는 것이다. 여기에 선문답의 난해한 면이 있는 것이다. 선문답에는 그래서 선기禪機가 드러난다. 여기에서 막힌다면 그것은 곧바로 물은 사람의 현성공안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인 가르침의 방편이 또한 선문답인 것이다. 억지로 이야기 하자면 선문답은 깨달은 사람이 선종의 전통적 방식에 의해서 본체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공안과 함께 선사의 지극한 지도편달의 한 방편이다.
2) 선문답의 일상적 유형
선문답은 보통 평범한 언어를 통하여 나타난다. 주로 격외적 도리를 나타내는 게송이나 납자의 질문에 대한 선사의 대답으로 이루어지는데 여기에서는 게송은 제외하고 선문답의 일반적인 유형을 몇 가지 들어 보기로 하겠다. 편의상 선사의 이름은 생략하고 납자衲子의 말을 A, 선사의 말을 B 라 하기로 한다.
(1) 혜심이 지눌 선사를 모시고 길을 가는데 길바닥에 다 떨어진 짚신 한짝이 떨어져 있었다.
B : 신발은 여기 있는데 사람은 어디 있지?
A : 웬걸요, 그때 만났지 않습니까?
선사는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자기 방으로 돌아가 혜심에게 법을 전했다.
(2) 고려의 나옹선사가 중국에 유학하고 있을 때 천암선사를 만났다. 천암이 나옹에게 물었다.
B : 스님은 어디서 왔소?
A : 정자사에서 왔습니다.
B :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에는 어디서 왔소?
A : 오늘 아침은 4월 초 이틀이지요.
B : 눈 밝은 사람은 속일 수가 없다니까.
(3) 약산 선사는 설법을 통하지 않았다. 어느날 자진하여 이곳 살림을 맡은 똑똑한 스님 하나가 선사께 강력히 설법을 청했다. 선사가 비로소 허락을 했다. 그는 기쁨에 겨워 종을 땡땡 울렸다. 모여라! 그러나 정작 대중이 모이자 선사는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그러자 살림 맡은 스님은 화가 나서 말했다.
A : 스님은 왜 아까는 허락하셔 놓고 이제 와서 그러십니까? 왜 저를 속이십니까?
B : 설법으로 말하면 경전에는 경사가 있고 논설에는 논사가 있고 계율에는 계사가 있는데 자네는 내게 뭘 말하라는 건가?
며칠 뒤 선사가 문득 법당에 올라오자 한 스님이 물었다.
A : 스님은 누구의 법을 이으셨습니까?
B : 오래된 불전 안에서 글귀 한 줄을 주웠지!
A : 무어라고 쓰여 있는 글귀인데요?
B : 그는 나를 닮지 않고 나는 그를 닮지 않았네. 이런 글귀였는데 내가 그 말을 알아들었지!
위와 같이 선문답은 일체의 표현수단을 없애고 절벽에 떨어진 것이 아니다. 상황 상황에 따라서 가장 적절한 언어와 행위를 구사하는 것이다. 여기서 쓰이는 언어는 사실 그 근본 뜻을 제대로 파악해 내기가 어렵다. 특히 초심자의 경우에는 완전히 헛소리처럼 들리기 십상이고 아니면 전혀 반대인 신비주의적으로 빠져든다. 그러나 선문답은 결코 있지도 않은 허위를 꾸며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선의 진리를 그대로 일상적 언어를 통해 뱉어 낸 행위에 불과 한 것이다. 그러면 좀 더 이야기를 덧붙이기 위해 선문답의 언어에 대하여 이야기를 풀기로 한다.
3) 선문답에 사용되는 언어
위의 선문답의 유형에서도 보았듯이 지극히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언어들이 사용되는 것이 선문답이다. 그러나 위의 예는 초기 선종의 일부분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것 이외에도 다양한 언어들이 선문답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시적인 표현을 위주로 표현하는 悟道頌이나 傳法偈 등의 게송을 살펴보면 상당한 상징과 비약이 등장한다. 그러나 거기에 사용되는 언어도 마찬가지로 상식적 언어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다만 논리의 비약이 따를 뿐이다. 혹시 이해 못하는 단어나 어휘는 시대상황 속에서 지금은 약간 이해하기 어려운 방언이나 도구의 이름 정도가 고작이다. 그리고 선문답에서는 단순한 언어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할, 방, 손짓, 발짓, 몸짓, 시늉 등의 광의의 언어가 등장하기도 한다. 할은 벽력같은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이고, 방은 주장자로 상대를 치는 것이다. 또한 손짓, 발짓, 몸짓, 시늉 등이 모두 상황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구사되어 진다. 난데없이 계속 소리만 지른다면 그것 또한 선사를 흉내 내는 사선死禪일 것이다. 선문답에 사용되는 개개의 언어는 지극히 일상적인 언어이다. 그러나 선문답의 정신은 결코 일상적이지가 않다. 선문답은 지극히 일상적인 것에서 항상 깨달음의 세계를 드러내 보이는 언어로 가득 차 있다. 예를 들면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조주 선사는 {무}로 대답했는데 이것은 결코 의미적인 있다. 없다로 떨어지지 않는 대답이다. 조주선사는 깨달음의 세계를 [무]라는 언어를 통해서 드러내 보인 것뿐이기 때문이다.
4) 선문답의 언어적 특성
위에서 선문답은 지극히 일상적인 언어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선문답에서 엮어진 일상적인 언어들은 더 이상 일상적이지가 않다. 왜냐하면 일상적인 언어의 작용이 변질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선문답에 사용된 언어는 더 이상 상식적 차원의 용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단계 승화된 선적 세계, 즉 깨달음의 세계에서 새롭게 구성되어 작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많은 선문답의 첫 인사에서 [어디서 오는 가?] 또는 [어디서 왔는가?] 내지는 [어떻게 왔는가?] 등의 질문을 많이 찾아볼 수가 있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결코 [부산에서 왔습니다.] [버스타고 왔습니다.] 식의 일상적 대답이 아니다. 그 질문은 이미 상식적 언어를 통하여 본래적 소식을 묻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본래적 소식이란 물론 '선' 그 자체를 나타내는 진리를 말한다. 즉 선문답의 언어는 일상적 언어를 빌려서 본래적 소식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선문답의 언어적 특성은 언어를 의미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작용적으로 사용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작용적 언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게 구사하는 사람의 능력에 달려있는 것이다.
5) 선문답의 지향과 방편
선문답은 물론 기본적으로 깨달음을 지향한다. 그 깨달음이란 선종의 근본적 사상인 돈오頓悟이다. 돈오란 스스로의 본성을 몰록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선문답이 지향하는 바이다. 즉 선사와 납자 사이의 대화가 언어의 상식적 수준을 벗어나 있으면 그것은 이미 본래면목을 파고들며 서로의 견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한 치의 오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설프게 몇 권의 책을 뒤지고 몇몇 선사의 말을 외워도 눈 밝은 선사는 당해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선문답은 이미 무한한 창조와 응용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자기의 체득한 바가 없으면 금방 위험한 급류에 휩쓸려 버리고 만다. 그리고 여기에는 온갖 음모가 횡행하고 있으므로 스스로의 체득한 바가 확고하고 완전하지 못하면 역시 바람에 날려가 버리고 말 것이다.
선문답의 세계는 준엄한 심판이고 동시에 엄청난 파괴이다. 미혹의 세계에서 걸리적거리는 모든 것을 일순간에 제거하려는 노력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선문답은 깨달음을 드러내 보이는 측면도 있지만 실제적인 깨달음을 시험해 보려는 검증의 역할도 한다. 완전함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가지로 건드려 본다. 쿡쿡 찔러도 보고, 소리를 냅다 질러보기도 하고, 전혀 말을 안 하기도 한다. 선문답에는 이러한 예리한 칼날들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깨달음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감추기도 하는 것이다. 선문답은 실로 살활자재殺活自在한 것이다. 선문답은 깨달음의 세계를 분명히 지향하지만 이것은 경우에 따라서 살아나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한마디의 말에 서슬이 시퍼런 두개의 칼날이 달려 있는 것이다. 미혹하면 베일 것이고 밝으면 능히 피할 것이다. 혹은 베여도 죽고 피해도 죽을 것이다. 살아있는 선문답이 바로 현성공안인 것이다.
6) 선문답의 기능과 한계
지금까지 다소 산만하게 살펴보았듯이 선문답은 선의 진수를 드러내고, 확인하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선문답이 공안화 되어 수행의 지침으로 쓰이는 것은 간화선의 훌륭한 전통이다. 물론 간화선의 병폐를 동시에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선문답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 즉 수행이 없는 선문답은 성립도 안 될 뿐더러 있을 수도 없다는 말이다. 또한 선문답만을 일삼는다면 이것 또한 하나의 폐단으로 흐를 가능성이 생긴다. 수행에 힘쓰지 않고 언구言句에 쫓아다니며 허덕이는 이가 분명히 생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간화선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이다. 따라서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것을 조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깨달음은 결코 선문답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선문답으로 인해 생긴 공안에 의지해서 올바른 수행이 지어졌을 때만이 깨달음의 조건이 갖추어 지는 것이다. 선문답은 깨달음의 응용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깨달음의 드러냄인 것이며, 또한 확인인 것이다. 공안 하나를 뚫으면 1800공안을 다 뚫는 다는 것이 빈말이 아닌 것이다. 물론 훌륭한 선사의 적절한 한마디는 기연으로 맞아 떨어질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항상 참구하며 수행하는 자세일 것이다. 선문답은 활발발지한 응용의 세계이므로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무척이나 중요시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혹한 입장에서 보면 더욱더 미혹을 가중시킬 가능성 또한 적지 않다. 아무리 활발발지한 선문답의 세계도 결국은 공안 하나의 진리에 근거하고 있다. 오로지 힘써 수행하는 자세가 먼저 필요한 것이다.
8. 결론
이상에서 개략적으로 선종의 성립과 공안의 성립 그리고 간화선에 근거한 선문답의 여러가지 모습을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선문답은 깨달음의 응용과 확인 그리고 체득을 지향하는 선종의 전통적인 표현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뜬금없는 동문서답이나 내용 없는 언어의 유희는 아닌 것이다. 오히려 잘 가꾸고 보존되어 내려온 선종의 전통적이고 비밀스런 문화에 속한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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