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굿따라 니까야(증일)

[스크랩] 앙굿따라니까야에 포함된 주요 경전들

수선님 2018. 3. 11. 12:14

「뜻을 알아내어야 함 경」1/2(A2:3:5~6) 

세존께서는 45년 동안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게 아주 다양하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우리는 그것을 대기설법(對機說法, pariyāya-desana)이라 부른다. 듣는 사람의 처한 상황이나 문제의식이나 이해 정도나 수행 정도나 기질이나 성향에 따라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서 설법을 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다보니 자기 깜냥만큼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여 세존의 근본 가르침과는 다르게 의미를 해석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런 자들을 두고 세존께서는 본경을 말씀하신 것이다. 세존께서는 본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두 부류의 사람은 여래를 사실과 다르게 이야기 한다. 어떤 것이 둘인가? 

[숨은] 뜻을 알아내어야 할 가르침에 대해서 이미 [그 뜻이] 확정된 가르침이라고 하는 자와 [이미 그 뜻이] 확정된 가르침에 대해서 [숨은] 뜻을 알아내어야 할 가르침이라고 말하는 자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 부류의 사람은 여래를 사실과 다르게 이야기 한다.” 


숨은 뜻을 알아내어야 할 가르침에 대해서 이미 그 뜻이 확정된 가르침이라고 하는 자에 대해서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네 사람이 있다.’라는 가르침은 그 ‘[숨은 뜻을] 알아내어야 하는 가르침(neyyattha suttanta)’이다. 왜냐하면 비록 정등각께서 ‘한 사람이 있다.’라는 식으로 말씀을 하셨더라도 ‘궁극적 의미에서는 사람(puggala)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 숨은 뜻을 알아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이런 가르침을 두고 ‘이미 그 뜻이 확정된 가르침(nītattha suttanta)’이라고 우긴다. ‘만약 궁극적 의미에서 사람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존께서 ‘비구들이여, 한 사람이 있다.’라는 식으로 설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세존께서 그렇게 설하셨기 때문에 궁극적 의미에서 사람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잘못 이해하면서 숨은 뜻을 알아내어야 할 가르침에 대해서 이미 그 뜻이 확정된 가르침이라고 우긴다.”(AA.ii.118) 


그리고 이미 그 뜻이 확정된 가르침에 대해서 숨은 뜻을 알아내어야 할 가르침이라고 말하는 자에 대해서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무상이요 괴로움이요 무아다.’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오직 무상이요 오직 괴로움이요 오직 무아라는 것이 그 뜻이다. 그러나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이것은 [숨은 뜻을] 알아내어야 할 가르침이다. 나는 그 뜻을 밝힐 것이다.’라고 하면서 ‘참으로 항상한 것이 있다. 참으로 행복이 있다. 참으로 자아가 있다.’라고 거머쥐면서 [이미 그 뜻이] 확정된 가르침에 대해서 [숨은 뜻을] 알아내어야 할 가르침이라고 우기는 것이다.”(Ibid) 


우리 주위에도 잘못된 견해를 가진 이런 사람을 종종 만난다. ‘부처님은 브라흐마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범아일여를 말씀하셨다. 그리고 부처님은 초기경 도처에서 참된 사람(참사람, 眞人)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자아나 개아는 실재한다. 그리고 부처님은 본자청정 객진번뇌를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마음은 영원하다.’라고. 이런 사람은 특히 이 말씀을 잘 음미해볼 필요가 있으리라. 

 

「깔라마 경」(A3:65) 

세상에는 서로 다른 여러 종교가 있고 서로 다른 여러 철학이 있고 서로 다른 여러 계율 규범이나 생활 규범이 있고 또 서로 다른 여러 관습이 있다.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의 종교나 철학이나 규범이나 관습만을 평생 접하고 산다면 어쩌면 인간에게 큰 혼란이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물론 더 큰 미망에 빠져 지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인터넷이나 미디어나 고도로 발달된 교통수단과 통신수단의 영향 하에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은 다양한 종교, 다양한 철학, 다양한 규범, 다양한 관습을 접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러한 다양한 체계를 접하여 그것을 받아들이고 거부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는 무엇일까? 무엇에 근거해서 어떤 체계는 받아들여야 하고 무엇에 바탕해서 어떤 체계는 거부해야 하는 것일까? 


이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깔라마 경」이다. 이런 의미에서「셋의 모음」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경은 뭐라 해도「깔라마 경」일 것이다. 다양한 종교인들이 서로 극단적으로 다른 가르침을 설하자 그것을 접하여 혼란스러웠던 께사뿟따의 깔라마 인들은 세존께서 그들의 마을에 도착하시자 바로 이러한 문제를 단도직입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세존께서는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소문으로 들었다 해서, 대대로 전승되어 온다고 해서, ‘그렇다 하더라.’고 해서, [우리의] 성전에 써 있다고 해서, 논리적이라고 해서, 추론에 의해서, 이유가 적절하다고 해서, 우리가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일치한다고 해서, 유력한 사람이 한 말이라 해서,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생각 때문에 그대로 따르지는 말라.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은 참으로 스스로가 ‘이러한 법들은 해로운 것이고, 이러한 법들은 비난받아 마땅하고, 이런 법들은 지자들의 비난을 받을 것이고, 이러한 법들을 많이 받들어 행하면 손해와 괴로움이 있게 된다.’라고 알게 되면 그때 그것들을 버리도록 하라.”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하나하나 문답을 통해서 어떤 가르침이 나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증장시키는가 감소시키는가를 가지고 그 가르침을 판단하라고 말씀하신다. 어떤 가르침을 듣고 그대로 행해서 나의 탐욕이나 성냄이나 어리석음이 증장한다면 그 가르침은 따르지 말라고 하시고 반대로 해소가 된다면 그런 가르침은 따르라는 말씀이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존께서는 이렇게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네 가지 위안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세존의 말씀을 인용해본다. 

“만약 다음 세상이 있고, 선행과 악행의 업들에 대한 결실과 과보가 있다면 나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善處], 천상세계에 태어날 것이다. 

만약 다음 세상도 없고 선행과 악행의 업들에 대한 결실과 과보도 없다면 나는 금생에 원한 없고 악의 없고 고통 없이 행복하게 살 것이다. 

만약 어떤 이가 행하면서 나쁜 행을 하더라도 내가 다른 이에게 악을 저지르도록 교사하지 않았고 내 스스로도 악업을 짓지 않았거늘 어떻게 내가 고통과 마주치겠는가? 

만약 어떤 이가 행하면서 나쁜 행을 하지 않으면 나는 양면으로 청정한 나를 볼 것이다.” 


네 번째 위안에 대해서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양면으로 청정하다는 것은 내가 악을 저지르지 않고 또 어떤 이가 행하면서 악을 행하지 않기 때문에 양면으로 청정하다.”(AA.ii.306) 


한편 이러한 세존의 가르침은 본서 제2권「밧디야 경」(A4:193)에도 나타나는데 세존의 이러한 말씀을 들은 밧디야는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개종시키는 요술’이라고 경탄해마지 않는다.

 

「우루웰라 경」1(A4:21) 

본경은『상윳따 니까야』(S6:2)에도 나타나는 가르침이며 참다운 귀의처를 밝히신 경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세존께서는 정등각을 이루신 뒤에 니그로다 강변의 염소치기의 니그로다 나무 아래에 앉아서 다음과 같이 깊이 사유하신다. ‘아무도 존중할 사람이 없고 의지할 사람이 없이 머문다는 것은 괴로움이다. 참으로 나는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러야 하는가?’ 


그렇다. 존중하고 의지할 사람이 없이 머문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부처님께서도 이렇게 스스로에게 말씀하시는데 우리 범부중생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황막한 광야를 치달리는 것과 같은 우리의 삶에서 진정한 의지처란 무엇인가? 이러한 고뇌에서 인류에게는 종교가 생긴 것이리라. 그러면 참다운 귀의처, 끝내 우리에게 아무런 해코지도 퇴락도 상처도 주지 않는 진정한 의지처란 무엇인가? 부처님께서는 다시 사유하신다. 


‘내가 아직 완성하지 못한 계의 무더기[戒蘊]가 있다면 … 삼매의 무더기[定蘊]가 있다면 … 통찰지의 무더기[慧蘊]가 있다면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서 나는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신과 마라와 범천을 포함한 세상에서, 사문․바라문과 신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 가운데에서, 나보다도 더 계를 …삼매를 … 통찰지를 잘 구족하여 내가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할 만한 다른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도 보지 못한다.’ 


이처럼 세존께서는 자신의 의지처가 되어 줄 세상의 모든 것을 두루 고찰해보았지만 자신에게 귀의처가 되어 줄 그 어떤 존재도 발견하지 못하셨다. 이것은 결코 세존의 자만심이 아니다. 깨달은 분은 있는 그대로 보시는 분이다. 초기경들의 도처에서 세존께서는 당신을 능가할 어떤 존재도 보지 못한다고 단언하고 계신다. 만일 자신을 능가하는 다른 존재를 보셨다면 그분은 당연히 그런 존재를 찬탄하셨을 것이고 그런 존재를 의지처로 삼으셨을 것이다. 이렇게 고찰하신 뒤 마침내 세존께서는 다음의 결론에 도달하셨다. 


‘참으로 나는 내가 바르게 깨달은 바로 이 법(dhamma)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무르리라.’ 

이것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가르침이며 불교를 대표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의지처가 없는 사람은 깨달은 분일지라도 괴로운 것이다. 세존께서는 마침내 법을 의지처로 삼겠노라고 결심하셨으며 이것은 45년간 전법에 헌신한 그분의 삶에서 그대로 입증되고 있다. 세존께서는 당신의 의지처인 그 법을 선포하셨고, 그 법으로 중생들을 제접하셨으며, 꾸시나라의 사라쌍수 아래서 반열반에 드시면서도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라고 유훈을 남기셨다. 우리의 스승 세존께서 이처럼 법등명과 법귀의를 천명하셨는데 하물며 그분의 제자인 우리는 말해무엇하겠는가? 불자가 가슴깊이 새겨야 할 가르침이다

 

「로히땃사 경」1(A4:45) 

인간은 구경의 진리 혹은 최고의 진리를 추구할 줄 아는 존재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이나 수단을 동원하여 이를 추구하여 왔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것을 저 밖을 향하여 찾았고 그리하여 우리가 추구하는 것을 채 알기도 전에 삶을 마감하곤 해왔다. 끊임없이 밖으로 치달리는 이러한 인간의 성향에 대해서 거듭해서 반성과 자제를 촉구하신 분이 바로 부처님이시다. 


본경에 등장하는 로히땃사는 하늘을 아주 빨리 나는 신통을 가진 신이다. 그는 이러한 신통으로 세상의 끝에 도달하려고 동서남북으로 치달렸지만 세상의 끝에는 끝내 이르지 못했다. 그래서 세존께 와서 이러한 사실을 말씀드리자 세존께서는 아무리 빨리 가는 능력을 가졌더라도 밖으로 치달려서는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떨어짐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그러한 세상의 끝, 세상의 궁극, 세상의 최고점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단언하신다. 만일 저 밖에 세상의 끝, 세상의 궁극이 있다면 우리는 과학소설이나 영화에서처럼 최고로 빠른 우주선을 타고 그곳으로 날아갈 수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그런 것은 부질없는 일이라 하셨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말씀하신다. 

“도반이여, 참으로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떨어짐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그런 세상의 끝을 걸어감을 통해서 알고 보고 도달할 수 있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밖으로 아무리 걸어가고 날아가도 세상의 끝에는 도달하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괴로움을 끝낼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신다.

 

주석서의 설명대로 형성된 세상(san#khāra-loka), 즉 오온의 끝에 이르지 않고서는 결코 괴로움의 끝, 즉 최고의 이상향, 최고의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한다는 말씀이시다. 


그러면 진정한 세상의 끝, 세상의 궁극, 세상의 최고점은 어디에 있는가? 부처님께서는 단언하신다. 그것은 내 안에 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선언하신다. 


“도반이여, 나는 인식과 마음을 더불은 이 한 길 몸뚱이 안에서 세상과 세상의 일어남과 세상의 소멸과 세상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천명하노라.” 

여기에 대해서 주석서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세상’이란 괴로움의 진리[苦諦]이다. ‘세상의 일어남’이란 일어남의 진리[集諦]이다. ‘세상의 소멸’이란 소멸의 진리[滅諦]이다. ‘세상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란 도의 진리[道諦]이다. 세존께서는 ‘도반이여, 나는 이러한 네 가지 진리(四諦)를 풀이나 나무등걸 등에서 천명하지 않는다. 네 가지 근본물질[四大]로 이루어진 바로 이 몸에서 천명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AA.iii.88~89) 


「로히땃사 경」은『상윳따 니까야』(S.i.61)에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 가르침은 상좌부 불교에서는 아주 잘 알려진 것이다. 특히 이 마지막 구절은 남방의 스님들이 즐겨 인용하는 가르침이다. 내 안에서 세상과 세상의 집․멸․도를 설하셔서 나고 죽는 인생의 근본문제를 내 안에서 그것도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해결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 불교의 가장 큰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중국 선불교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밧디야 경」(A4:193) 

개종은 한일합방이라는 수치와 6/25 전쟁이라는 처참한 동족상쟁과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극심한 서구화를 경험한 근대와 현대의 한국인들에게 중요한 화두 가운데 하나였다. 종교를 바꾼다는 것은 자신의 신념체계를 바꾼다는 말이고 자신의 삶의 태도를 바꾼다는 중요한 사실이다. 


세존께서는 깨달음을 실현하시고 인도 중원에서 전법을 시작하신 직후부터 불을 섬기던 가섭 삼형제와 그들의 제자 1000명이 부처님의 제자가 되고, 당시에 마가다 등지에서 존경 받던 유행승들과 연로하고 유명한 바라문들이 부처님의 신도가 되는 등 불교는 급속도로 인도에 퍼져나갔다. 그래서 부처님 당대에 이미 ‘고따마는 개종시키는 요술을 써서 외도들을 개종시킨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던 것 같으며 다른 교단으로부터 많은 견제를 받았던 듯하다. 그럼 과연 진정한 개종이란 어떤 것인가? 진정한 신념체계를 바꾼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진정한 삶의 태도를 바꾼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본경은 여기에 대한 부처님의 명쾌한 설명을 담고 있는 귀중한 가르침이다. 


본경은 릿차위의 밧디야와 세존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밧디야가 세존께 와서 “사문 고따마는 요술쟁이다. 그는 개종시키는 요술을 알아서 다른 외도들을 제자로 개종시킨다.”라고들 말하는데 그들의 말이 맞는지 아닌지를 여쭙는다. 세존께서는 본서 제1권「깔라마 경」(A3:65)에서 깔라마 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탐욕, 성냄, 어리석음과 본경에서는 한 가지를 더하여 폭력 없음에 대해서 밧디야와 대화를 나누신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이렇게 대화를 마무리 지으신다. 


“밧디야여, 세상에 있는 참된 사람[眞人]들은 그들의 제자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이리 오시오, 아무개 사람이여. 그대는 탐욕을 길들이고 머무시오. 그대가 탐욕을 길들이고 머물면 몸과 말과 마음으로 탐욕에서 생긴 업을 짓지 않을 것이오. 그대는 성냄을 … 어리석음을 … 폭력적인 마음을 길들이고 머무시오. 그대가 폭력적인 마음을 길들이고 머물면 몸과 말과 마음으로 폭력적인 마음에서 생긴 업을 짓지 않을 것이오.’라고.” 


즉 모든 수행자나 종교인은 만일 그가 참된 사람이라면 모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폭력적인 마음을 길들이는 것을 가르친다는 말씀이며 세존도 이러한 것을 가르치는 사람이지 요술을 써서 사람을 개종시키기에 혈안이 된 자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대화 끝에 세존께 감격한 밧디야는 재가 신자가 되고 이렇게 말씀드린다. 

“세존이시여, 세존의 개종시키는 요술은 축복입니다. 세존이시여, 그 개종시키는 요술은 훌륭합니다. 세존이시여, 나의 사랑하는 혈육과 친척들이 이러한 개종으로 개종한다면 나의 사랑하는 혈육과 친척들에게 오랜 세월 동안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그의 감격에 찬 말을 크게 인정하시면서 만일 이 모든 사람들이 “해로운 법들을 버리고 유익한 법들을 두루 갖추기 위해서 개종을 한다면”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 뒤에 “밧디야여, 만일 이 큰 살라 나무들조차도 해로운 법들을 버리고 유익한 법들을 두루 갖추기 위해서 개종을 한다면 이 큰 살라 나무들에게 오랜 세월을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다면 말이다.”라고 결론지으신다. 


우리는 스스로 불자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하고, ‘나는 불교 신자’라고 떳떳하게 말해야 한다. 그러나 이름만이 불자요 이름만이 불교 신자일 뿐 안으로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 폭력적 성향이 득시글거린다면 어찌 자신을 부처님 아들이라고 부처님의 제자라고 하겠는가? 우리는 모두 탐욕 없음, 성냄 없음, 어리석음 없음, 폭력 없음으로 개종해야 한다. “해로운 법들을 버리고 유익한 법들을 두루 갖추기 위해서” 개종해야 한다. 그래야 그가 진정한 부처님의 아들이요 부처님의 제자다. 이것이 세존께서「밧디야 경」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해주시는 간곡한 말씀이다. 

 

합리적인 행위 경」(A4:61) 재가자의 행복

세상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재물이 많기를 바라고 자신과 가문이 큰 명성을 얻기를 바라고 오래 살기를 바라고 죽어서는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란다. 이것은 모든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희망이면서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본경에서도 부처님께서는 급고독 장자에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원하지만 그렇게 되기 어려운 것으로 ‘법답게 재물을 얻는 것, 친척들과 스승들과 더불어 명성을 얻는 것, 오래 살고 긴 수명을 가지는 것, 죽어서 몸이 무너진 다음에는 천상 세계에 태어나는 것’의 네 가지를 말씀하신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모든 나라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자 하는 이러한 네 가지를 성취하게 되는가? 세존의 대답은 간단하고 분명하다. 그것은 믿음을 구족하고 계를 구족하고 보시를 구족하고 통찰지를 구족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부처님께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을 구족하고, 5계를 잘 지키고, 항상 남에게 베푸는 자세를 가지고, 다섯 가지 장애로 대표되는 오염원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설하신다. 믿음, 계행, 보시, 지혜의 이 네 가지를 닦고 실천할 때 그 사람은 재산과 명성과 긴 수명과 천상을 얻게 된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뒤 재가자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법답게 얻은 재물로 다음의 네 가지를 실천해서 바른 업을 지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첫째는 자신과 부모와 아들과 아내와 하인과 일꾼들과 친구와 친척들을 행복하게 하고 만족하게 하고 바른 행복을 보호하는 것이다. 즉 자기 식솔들을 잘 부양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둘째는 이러한 재물을 재난, 즉 불과 물과 왕과 도둑과 적과 나쁜 마음을 가진 상속인 등의 여러 가지 재난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재물을 잘 보호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셋째는 친지에게 하는 헌공, 손님에게 하는 헌공, 조상신들에게 하는 헌공, 왕에게 하는 헌공(세금), 신에게 하는 헌공의 다섯 가지 헌공을 해야 한다. 사회적인 의무를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넷째는 사문․바라문들에게 보시를 해야 한다. 이러한 사문․바라문들에게 하는 보시는 고귀한 결말을 가져다주고 신성한 결말을 가져다주며 행복을 익게 하고 천상에 태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수행자들과 종교인들을 후원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벌 줄도 알아야 하지만 쓸 줄도 알아야 한다고들 말한다. 세존께서는 각자가 번 돈으로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들을 위의 네 가지로 설명하고 계시는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재가불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중요한 말씀이다.

 

「계행이 나쁨 경」(A5:24) 해제 

수행의 목적은 깨달음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면 부처님께서 설하신 깨달음은 어떻게 해서 실현하는가? 본경은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 간단명료한 주제어로 깨달음의 과정을 잘 표현하고 있는 짧은 경들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본경의 주석서는 이것을 명쾌하게 밝혀주고 있다. 본경에서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감각기능을 단속할 때 감각기능을 단속하는 자에게 계행의 조건이 구족된다. 계행이 있을 때 계행을 구족한 자에게 바른 삼매가 생긴다. 바른 삼매가 생길 때 바른 삼매가 생긴 자에게 여실지견(如實知見)의 조건이 구족된다. 여실지견이 생길 때 여실지견이 생긴 자에게 염오와 탐욕의 빛바램의 조건이 구족된다. 염오와 탐욕의 빛바램이 생길 때 염오와 탐욕의 빛바램이 생긴 자에게 해탈지견의 조건이 구족된다.” 


즉 깨달음의 실현과정을 감각기능의 단속 → 계행의 구족 → 삼매의 실현 → 여실지견의 구족 → 염오와 탐욕의 빛바램 → 해탈지견의 완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한편 여기에 대해서 주석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여기서 ‘여실지견’이란 정신과 물질을 한정하는 지혜로부터 시작하는 얕은 위빳사나이다. ‘염오’는 강한 위빳사나이고 ‘탐욕의 빛바램’은 도이다. ‘해탈지견’은 과의 해탈과 반조의 지혜를 뜻한다.” 


한편『청정도론』에 의하면 정신과 물질을 한정하는 지혜는『청정도론』제18장 견청정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특히 XVIII.2에서는 위빳사나의 출발이라 할 수 있는 견청정을 정신․물질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처럼 주석서는 본경의 가르침 가운데 여실지견과 염오와 탐욕의 빛바램과 해탈지견을 위빳사나를 통한 도와 과의 실현으로 설명해내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본경과 다음에 설명하는「도움 경」(A5:25)은 『청정도론』에서 설명하는 수행의 단계의 이론적 토대가 되는 경들이라 할 수 있다. 

 

 「천명 경」(A5:93) 아라한이라 천명하는 다섯 부류의 사람

어느 시대에나 아라한이 아니면서 아라한이라고 주장하고 도인이 아니면서 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나 보다. 요즘 우리 주위에도 도인 노릇하는 사이비 수행자들을 가끔 본다. 한 소식했다는 둥, 본래 부처임을 알았다는 둥, 대아에 계합했다는 둥의 말을 한다. 어디 그뿐인가? 위빳사나를 하러 미얀마를 다녀와서는 예류과를 얻었다거나, 인가를 받았다거나, 심지어 아라한이 되었다고 공공연히 떠드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본경은 짧지만 주목할 만하다. 엉터리 아라한이나 엉터리 도인 노릇하는 자들은 왜 그럴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신다.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구경의 지혜에 대한 천명이 있다. 무엇이 다섯인가? 

멍청함과 큰 어리석음 때문에 구경의 지혜를 천명한다. 그릇된 원(願)을 가진 자는 그 원에 희생되어 구경의 지혜를 천명한다. 미치고 마음이 혼란하여 구경의 지혜를 천명한다. 과도한 자만심으로 인해 구경의 지혜를 천명한다. 바르게 구경의 지혜를 천명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다섯 가지 구경의 지혜에 대한 천명이 있다.” 


여기에 대해서 주석서는 “‘구경의 지혜’는 아라한과를 뜻한다. ‘구경의 지혜를 천명한다.’는 것은 나는 아라한과를 얻었다라고 얘기하는 것이다.”(AA.iii.276)라고 설명하고 있다. 


멍청한 자들이 아라한과가 도대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남들이 아라한이라고 하니 자기도 아라한이라고 하거나, 존경과 명성을 구하려는 그릇된 원에 희생이 되거나, 미쳤기 때문에, 혹은 내가 이런 사람이요 하는 과도한 자만심 때문에 나는 아라한이라고 천명한다는 말이다. 


자신이 깨달았다거나 자신이 도인이라고 남에게 거들먹거리고 싶은 자는 본경을 진지하게 읽고 자신이 멍청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아닌지, 자신이 그릇된 생각에 빠져서 그러는 것은 아닌지, 자신이 미쳤기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아닌지,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그러는 것은 아닌지 진지한 반성을 해볼 일이다.

 

「아난다 경」(A5:106) 출가자가 갖추어야할 것

출가는 부처님들이 칭송하셨고 성자가 되고 아라한이 된 옛스님들이 택하신 수행의 방법이다. 출가는 자기 자신의 길이요, 남의 인생에 개입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출가를 결행하여 절집에 들어와서 행자 생활을 한다. 그러나 또 적지 않은 행자들은 계를 받기 전에 다시 재가의 삶으로 돌아간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자기 자신의 문제에 침잠하지 못하고 남의 허물을 보고 그것을 가지고 출가 생활의 척도로 삼기 때문인 경우가 아주 많다. 그래서 초기경에서도 부처님께서는 출가자가 편히 머물고 수행에 전념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다음의 다섯 가지 요소를 들고 있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자신은 계를 구족하지만 남에게는 계에 대해서 비난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는 숙고하지만 남에 대해서는 숙고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것 때문에 안달하지 않는다. 그는 바로 지금여기에서 행복하게 머물게 하는, 보다 높은 마음인 네 가지 선[四禪]을 원하는 대로 얻고 힘들이지 않고 얻고 어렵지 않게 얻는다. 그리고 그는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통찰지를 통한 해탈[慧解脫]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문다. 아난다여, 이렇게 하면 비구 승가가 머물 때 편하게 머물 수 있다.” 


여기서 보듯이 출가자가 편히 머물기 위한 출발점은 남에 대해서 관여하지 않고 남의 문제를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계를 항상 되돌아보고 자기 자신은 게으르지 않는지, 탐․진․치에 함몰되어가지 않는지 끊임없이 반조해서 해로운 심리 현상들은 제거하고 유익한 심리현상들은 증장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출가 생활의 전부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잘못보다 남의 잘못이 더 많이 보이는 출가자의 삶은 분명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씀을 모든 불의에 눈감으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승가에는 율이 있다. 승행이 바르지 못한 자는 그 율에 의해서 객관화된 처벌을 받게 된다.

 

스스로 보아 알 수 있음 경」1/2(A6:47~48) 

부처님 가르침은 법을 생명으로 한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S22:87)고 하셨으며 법을 귀의처로 삼고, 법을 섬으로 삼으라고 하셨다.(D16) 


여러 경에서 법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러면 불교의 생명인 법이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이라는 이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이 본경에 들어 있다. 


여기 소개하는 두 개의 경에서 몰리야시와까 유행승과 어떤 바라문은 세존께 다가가서 이 의미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고 세존께서는 그 의미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계신다. 이 두 개의 경에서 세존께서 다시 그들에게 ‘만일 그대에게 탐욕이 있으면 탐욕이 있다고 알 수 있는가?’라고 되물으시고 그들은 알 수 있다고 대답한다. 같은 방법으로 세존께서는 ‘그대에게 성냄이 있으면 성냄이 있다고 알고 어리석음이 있다면 어리석음이 있다고 알고 탐욕이나 성냄이나 어리석음과 함께 하는 법(심리 현상들)이 일어나면 그렇다고 아는가?’ 등으로 질문을 하시고 그들은 알 수 있다고 대답한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아는 것이 바로 법을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명쾌하게 말씀하신다. 우리는 자칫 법을 본다는 것을 온‧처‧계‧연기‧사성제‧ 37조도품 등의 법이나 아비담마의 법수(法數)들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그렇게 대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내 안에서 일어나는 탐‧진‧치 등의 심리 현상들을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처럼 법을 아는 것 혹은 법을 스스로 보아 안다는 것은 결코 이론적인 이해나 관념적인 지식이 아니라고 부처님께서 명쾌하게 밝히고 계신 것이 이 두 개의 경이다. 


법은 지금 여기에서 자기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정신․물질적인 현상들을 말한다. 이것을 보는 것이 법을 보는 것이요, 이것이 무상하고 괴로움이요 무아임을 여실하게 보면 그로 인해 우리는 염오하게 되고 탐욕이 빛바래게 되고 해탈‧열반을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법을 보는 것이야말로 해탈의 관문이며, 이처럼 법을 보는 것을 위빳사나(vi-passanā, 깊이 보기, 꿰뚫어보기, 해체해서 보기)라고 정의한다. 물론 온․처․계․근․제․연(5蘊․12處․18界․22根․4諦․12緣) 등으로 정리되는 초기불교의 법수나 82법․75법 등으로 정리되는 아비담마의 법수들도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법이다. 이러한 체계적인 가르침은 단순한 암기를 위하거나 형이상학적인 불교 교학 체계를 위해서 설하신 것이 절대로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법체계를 통해서 지금 여기 내 안에서 일어나는 법을 스스로 보아야 한다. 법체계는 이것을 위해서 존재하는 지도일 뿐임을 잊어버리면 그야말로 본말이 전도되어버릴 것이다. 

 

「쭌다 경」(A6:46) 선(禪)이냐 교(敎)냐?


선(禪)이 중요한가, 아니면 교(敎)가 중요한가? 


이것은 특히 중국 불교와 한국 불교사에서 지속적으로 논쟁을 벌여온 중요한 주제였다. 그래서 중국 불교와 한국 불교에서는 불교 교단을 교종과 선종으로 나누기도 하였다. 한국에서도 고려시대까지의 불교가 교종 중심이었다면 조선시대에는 선종이 우위를 점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불교를 대표하는 이념서적이라 할 수 있는『선가구감』에서는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어서 이 둘은 서로 다르지 않다고 정의하면서 선의 입장에서 교를 통합하고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불교는 선을 중심한 선교일치를 주창하였다. 선과 교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이미 초기경에도 나타나고 있는데 그 단초를 본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본경에서 마하쭌다 존자는 비구 대중에게 말하기를, 

“도반들이여, 여기 법에 열중하는 비구들은 법에 열중하는 비구들만 칭송하고 참선하는 비구들은 칭송하지 않습니다. … 여기 참선하는 비구들은 참선하는 비구들만 칭송하고 법에 열중하는 비구들은 칭송하지 않습니다. 이 경우에는 참선하는 비구들도 기쁘지 않고, 법에 열중하는 비구들도 기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고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고 신과 인간의 이상과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도닦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뒤에 법에 몰두하는 비구들은 참선하는 자들에 대해서 ‘불사(不死)의 경지를 몸으로 체득하여 머무는 경이로운 자들’이라고 존중해야 하며, 참선하는 비구들은 법에 열중하는 비구들에 대해서 ‘심오한 뜻의 경지를 통찰지로 꿰뚫고 보는 경이로운 자들’이라고 존중해야 한다고 설하고 끝을 맺는다.


주석서는 불사의 경지를 몸으로 체득하여 머무는 것을 죽음이 없는 열반의 요소를 체득하여 머무는 것을 말하며, 심오한 뜻의 경지를 통찰지로 꿰뚫고 보는 것은 온‧처‧계의 [무상‧고‧무아를] 위빳사나의 지혜로 꿰뚫어 보는 것을 말한다고 설명하고 있다.(AA.iii.379) 


그러므로 참선하는 자들은 단지 앉아있거나 앉아서 삼매만을 닦는 데 머물지 말고 불사의 경지를 몸으로 직접 체득해서 머물러야 하며, 법에 열중하는 자들은 단지 법을 지식으로 이해하는 데 그쳐서는 안되고 법을 공부하는 것이 온‧처‧계의 무상‧고‧무아를 통찰지로 꿰뚫어 보는 위빳사나로 승화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길러야 할 것이다.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자 경」(A10:91) 재가에서의 행복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행복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것으로 초기경에서 나타난다. 불교의 궁극적인 이상인 열반도 최상의 행복(parama-sukha, 至福)이라고 언급되고 있으며, 초선부터 제4선까지의 경지도 행복이라고 언급되고 있다. 세 가지 느낌 중의 하나인 즐거운 느낌도 행복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행복을 ‘욕구가 충족되어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상태’라는 사전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행복이란 인간이 눈․귀․코․혀․몸의 다섯 가지 감각기능을 통해서 느끼는 즐거움이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행복을 초기경에서는 감각적 욕망(kaama), 특히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pan$ca kaama-gun*a)이라 표현하고 있다. 세존께서는 특히 재가자들이 건전하게 누리는 감각적 욕망을 인정하고 계시는데 특히 본경은 정당하게 축적한 재물을 통한 감각적 욕망 즉 즐거움과 행복에 대해서 설하고 있다. 


본경은 세존께서 급고독 장자에게 열 부류의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자에 대해서 설해주신 가르침이다. 본경에서 세존께서는 정당하게 재산을 모았는가, 부당하게 모았는가 하는 첫 번째 관점과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두 번째 관점과 나누어 가지고 공덕을 짓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세 번째 관점과 재산에 묶이고 집착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네 번째 관점에서 모두 열 가지 측면으로 세속의 부를 즐기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고 계신다. 


물론 부당한 방법과 폭력을 써서 재산을 모으고, 부당한 방법과 폭력을 써서 재산을 모은 뒤 자신을 행복하게 하지 않고, 만족하게 하지 않고, 나누어 가지지 않고, 공덕을 짓지 않는 것이 첫 번째 경우이면서 가장 저열한 것이고, 정당한 방법으로 폭력을 쓰지 않고 재산을 모으고는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만족하게 하고, 나누어 가지고, 공덕을 지으며, 그리고 재산에 묶이지 않고, 홀리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며, 위험을 보고, 벗어남을 통찰하면서 사용하는 것이 열 번째이면서 가장 훌륭하고 뛰어난 것으로 들고 있다. 

이런 열 가지 경우의 사람은 세 가지 측면에서 비난받기도 하고 칭찬받기도 한다. 첫째는 부당한 방법과 폭력을 써서 재산을 모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며, 둘째는 자신을 행복하게 하게 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며, 셋째는 나누어 가지고 공덕을 짓는가, 짓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재가에 사는 불자들이 행복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재산을 증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가 정당한가, 정당하지 않은가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고, 이렇게 번 재산을 어떻게 사용해야 자신의 행복을 가져오는 것인가를 두 번째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남들과 나누어 가질 것인가를 세 번째로 생각해야 할 것이고, 자신이 그 재산에 집착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반성하는 것이 네 번째로 해야 할 일일 것이다. 본경은 이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경은 재가 불자들에게 아주 귀중한 가르침이 될 것이다.

 

보시로 인한 태어남 경」(A8:35) 보시의 과보

본경은 재가자들이 사문이나 바라문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과 탈것과 화환과 향수와 화장품과 침상과 숙소와 등불을 보시한 것의 과보를 여덟 가지로 설하고 있는 경이다. 


이러한 보시를 행한 자들은 여덟 가지 과보가 기대되는데 한 가지는 인간 가운데서 부유한 끄샤뜨리야들이나 부유한 바라문들이나 부유한 장자들의 일원으로 태어난 경우이고, 여섯 가지는 육욕천에 태어나는 경우이며, 마지막 한 가지는 색계 초선천인 범중천에 태어나는 경우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시를 행하였지만 계를 청정하게 지키지 못한 경우에는 이러한 여덟 가지 과보가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경은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계를 가진 자에게 해당하는 것이지 계행이 나쁜 자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계를 지닌 자는 청정하기 때문에 마음의 소원을 성취한다.” 


초기경의 여러 곳에서 부처님께서는 보시하고 계를 지키면 천상에 태어난다고 말씀하셨는데 본경도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신다. 물론 이 가운데 천상은 욕계 천상이며, 색계의 초선천까지는 가능하나 그 이상은 아니다. 왜냐하면 색계 천상과 무색계 천상은 삼매를 통해서 성취되는 천상이며 그래서 이 둘은 범천의 세상(brahma-loka)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천상에는 삼매 수행이 바탕이 되어서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색계 제4선천의 정거천은 삼매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으며, 불환과를 얻은 성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한편 바로 다음 경인「행위 경」(A8:36)도 비슷한 주제를 담고 있는데,「행위 경」에서는 공덕행의 토대를 보시를 통한 공덕행의 토대와 계를 통한 공덕행의 토대와 수행을 통한 공덕행의 토대로 나눈 뒤 인간에 태어나는 두 가지와 욕계 천상에 태어나는 여섯 가지(=육욕천) 경우를 들고 있다. 


즉, 보시를 통한 공덕행의 토대와 계를 통한 공덕행의 토대를 조금 만들었지만, 수행을 통한 공덕행의 토대를 만들지는 못한 경우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불운한 인간으로 태어나고, 앞의 둘을 보통으로 닦고 수행의 공덕행을 만들지 못한 경우는 운이 좋은 인간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보시를 통한 공덕행의 토대와 계를 통한 공덕행의 토대를 굳건하게 만들었지만, 수행의 공덕행의 토대를 만들지는 못한 경우로 여섯 가지를 들어서 육욕천에 배대하고 있다. 본경에서도 보듯이 육욕천은 보시와 지계를 통해서 도달하게 되는 곳이며 삼매나 통찰지의 수행이 없어도 가능한 곳으로 언급되고 있다. 


보시와 지계는 선진국에서 추구하는 국가의 모델이기도 하다. 봉사하는 삶과 건전한 삶이야말로 세계의 일류 국가들이 국민들에게 권장하는 삶의 지표이기 때문이다.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삶을 바탕으로[戒] 정신적인 편안함과 여유가 생기고[定], 삶의 궁극을 꿰뚫어 보는 통찰지가 완성되는 것이며[慧], 그래서 궁극적인 행복을 실현하게 되는 것이니[解脫], 이러한 삶이야말로 만 생명이 필경에 성취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무상(無常) 경」 

어떻게 해서 깨달음을 성취하는가? 어떻게 해서 예류과나 일래과나 불환과나 아라한과를 얻어 성자가 되며 생사에서 벗어나는가? 초기경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세존께서는 그 방법을 몇 가지 정형구로 정형화하여 분명하게 밝히고 계신다. 


첫째는 계․정․혜 삼학으로 정리되어 나타나는데,「사문과경」(D2)을 위시한『디가 니까야』에 포함된 여러 경들을 들 수 있다. 둘째는 연기법의 순관과 역관으로 정리되어 나타나는데,『디가 니까야』제2권「대전기경」(D14)과『상윳따 니까야』「연기 상응」(S12)의 여러 경들을 들 수 있다. 셋째는 오온 혹은 유위법의 무상․고․무아에 대한 통찰로 정리되어 나타나는데,『상윳따 니까야』「온 상응」(S22)의 여러 경들을 들 수 있다. 


『앙굿따라 니까야』의「무상(無常) 경」(A7:16)과「괴로움 등의 경」(A7:17)은 이 가운데 세 번째인 유위법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함에 의해서 성자가 되는 것을 설하고 있다. 그리고「괴로움 등의 경」에는 괴로움의 통찰과 무아의 통찰과 열반이 행복임을 통찰하는 것이 언급되고 있다. 이처럼 이들 2개의 경에서는 무상․고․무아의 삼특상과 열반이 함께 언급되고 있는데 다른 경들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조합이다. 


다시 말하면 이들 2개의 경에는 상좌부 불교에서 삼특상(Ti-lakkhaṇa)으로 정리하고 있는 무상․고․무아와 북방 불교에서 삼법인(三法印)으로 정리하고 있는 무상․무아․열반이 함께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몇몇 현대 학자들이 무상․고․무아․열반을 사법인(四法印)이라는 술어로 표현하는 것에 대한 경전적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벗어남 경(A5:200) Nissāraṇīya-sutta 

본경은 구체적인 수행 방법을 담고 있는 중요한 경이다. 거듭 말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은 속박과 장애와 족쇄와 오염원과 번뇌들로 표현되는 해로운 심리 현상들로부터 벗어나고 해탈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들로부터 벗어나는가? 그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본경은 여기에 대한 단초를 제공한다. 본경에서 설하신 세존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감각적 욕망들은 출리(出離) 즉 열 가지 부정(不淨)함을 통한 선(禪)을 통해서 벗어나고, 악의는 악의 없음 즉 자애를 통한 선을 통해서 벗어나고, 잔인함은 잔인하지 않음 즉 연민을 통한 선을 통해서 벗어나고, 물질에 대한 얽매임은 무색계에 대한 선을 통해서 벗어나고, 마지막으로 [불변하는] 자기 존재가 있음에 대한 얽매임은 순수한 위빳사나를 통해서 벗어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인간을 얽어매고 구속하는 첫 번째 장애물은 다름 아닌 감각적 욕망이다. 인간은 눈‧귀‧코‧혀‧몸으로 매순간 형상‧소리‧냄새‧맛‧감촉과 마주치게 되며 그 대상이 좋고 원하는 것이면 이러한 대상에 감각적 욕망을 일으키고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에 휩쓸려 들어 그것을 좋아하고 거머쥐고 탐닉한다. 이렇게 하여 이러한 대상에 대한 갈애는 점점 더 강하게 되고 갈애가 강할수록 괴로움은 증장한다. 왜? 이러한 대상은 추구하는 대로 다 얻을 수 없으며 마침내는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이러한 감각적 욕망에 대해서 벗어남을 닦아야 하며, 그 벗어나는 방법으로 부처님께서는 열 가지 부정함을 관찰하는 수행을 말씀하셨다. 


인간은 눈‧귀‧코‧혀‧몸으로 매순간 대상과 조우하여 싫고 원하지 않는 대상과 만나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대상을 싫어하고 증오하고 이러한 대상에 대해서 심한 반감을 가지며 악의를 일으키게 된다. 악의는 인간을 폭력적으로 만들고 집단 이기심이 개입되면 싸움과 전쟁으로 표출된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악의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자애를 설하셨다. 


인간은 매순간 대상을 만나서 그 대상이 자기보다 나약하거나 자기와 반대되는 견해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든가 혹은 그 대상을 파괴하고 훼손하여 자기의 안락이나 이익이 있다고 생각되면, 그것을 해코지하고 짓밟고 훼손하고 파괴하려는 잔인한 속성이 있다. 세존께서는 이처럼 해코지하고자 하는 잔인한 속성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연민을 닦을 것을 설하셨다. 


물질의 속박과 제한에 한정되어 사는 욕계와 색계의 존재들에게는 물질이야말로 가장 큰 얽매임 가운데 하나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장애와 속박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무색계선을 닦을 것을 말씀하셨다. 


마지막으로 중생을 중생이게끔 얽어매는 가장 본질적인 속박은 [불변하는] 자기 존재가 있음[有身]에 대한 얽매임이다. 불교를 제외한 모든 외도의 가르침은 자아니 영혼이니 참다운 인간이니 신성(神性)이니 하는 존재론적인 고정 관념에 함몰되어서 이를 추구한다. 이것을 초기경에서는 [불변하는] 자기 존재가 있음[有身, sakkāya]이라 부르고 이러한 견해를 유신견이라 한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궁극적인 해탈이란 불가능하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세존께서는 [불변하는] 자기 존재가 있음의 소멸을 마음에 새길 것을 말씀하셨다. 주석서는 이것이야말로 “순수 위빳사나를 하는 자[乾觀者, sukkha-vipassaka]가 과의 증득으로부터 출정한 뒤에 검증을 하기 위해서 [나 등으로]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를 향하여 마음을 적용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AA.iii.322) 


구체적인 수행방법은『청정도론』6장부터 10장까지 그리고 18장부터 22장까지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으니 정독할 것을 권한다. 



출처 : 붓다의 옛길
글쓴이 : 실론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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