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 Early Buddhism

[스크랩] 가장 수승한 보시-파욱스님 법문

수선님 2018. 4. 8. 12:43

가장 수승한 보시

여러분, 두 종류의 보시가 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선한 과보를 가져오는 보시와 과보가 전혀 없는 보시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형태의 보시를 선호합니까? 이제 나는 보시에 관한 부처님의 바람을 말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바람과 부처님의 바람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이제 닷킨나 위방가 숫따를 읽어 봅시다.

한때, 부처님께서는 카필라왓투 니그로다 공원에 있는 사캬족 마을에 머물고 계셨다. 어느 날 마하파자파티 고따미가 한 벌의 새 가사를 가지고 부처님께 찾아 왔다. 그 가사는 숙련된 솜씨로 그녀가 직접 만든 것이었다. 부처님께 존경을 표한 후, 한 쪽에 앉아서, 그녀는 부처님께 말했다.

 

“세존이시여, 이 새 가사는 특별히 부처님을 위해서 제가 실을 돌리고, 제가 천을 짠 것입 니다. 세존이시여, 연민으로 이것을 받아 주십시오.” 그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상가에 보시하십시오, 고따미여. 상가에 보시하면, 나와 상가 두 군데에 모두 보시한 것이 될 것입 니다.”

그녀는 부처님께 똑같이 세 번을 요청했고, 부처님께서는 똑같이 세 번을 대답하셨다. 그때 아난다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새 가사를 마하 파자파티 고따미에게서 받으십시오. 마하 파자파티 고따 미는 세존께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비록 그녀가 세존의 이모이지만, 세존께 젖을 준 유 모이자 양모입니다. 세존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녀는 세존께 젖을 먹였습니다. 세존 께서도 마하 파자파티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마하 파자파티 고따미가 불법승 삼보 를 의지처로 삼은 것은 세존 때문입니다.

 

그녀가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가지지 않고, 감각적 쾌락을 위해 삿된 음행을 저지르지 않고, 거짓말 하지 않고, 방 일의 기본이 되는 포도주나 증류주나 취하게 하는 것을 마시지 않는 것은 세존 때문입니 다.

 

그녀가 불법승 삼보에 완벽한 믿음을 가지게 된 것도, 성자들이 인정하는 계율을 지니 게 된 것도 세존 때문입니다. 그녀가 괴로움의 성스런 진리,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런 진 리,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런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런 진리를 전혀 의심하지 않는 것도 붓다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존께서도 역시 마하 파자파티 고따미에게 많은 도움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자 붓다께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그건 그렇다, 아난다여, 그건 그렇다. 제자가 스승 때문에 불법승 삼보를 의지처로 삼게 됐을 때, 제자가 일어나서 공손한 인사와 정중한 예배로 스승에게 존경을 표함으로써, 그리고 네 가지 공양물을 올림으로써,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기란 쉽지 않다.

 

제자가 스승 때문에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가지지 않고, 감각적 쾌락을 위해 삿된 음행을 저지르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방일의 기본이 되는 포도주나 증류주나 취하게 하는 것을 마시지 않게 되었을 때, 제자가 일어나서 공손한 인사와 정중한 예배로 스승에게 존경을 표함으로써, 그리고 네 가지 공양물을 올림으로써,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기란 쉽지 않다.

 

제자가 스승 때문에 불법승 삼보에 완벽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성자들이 인정하는 계를 지니게 되었을 때, 제자가 일어나서 공손한 인사와 정중한 예배로 그분에게 존경을 표함으로써, 그리고 네 가지 공양물을 올림으로써,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기란 쉽지 않다.

 

제자가 스승 때문에 괴로움의 성스런 진리, 괴로움이 일어남의 성스런 진리,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런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런 진리를 전혀 의심하지 않게 되었을 때, 제자가 일어나서 공손한 인사와 정중한 예배로 그분에게 존경을 표함으로써, 그리고 네 가지 공양물을 올림으로써,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기란 쉽지 않다.”

 

여기서 붓다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새겨 봅시다.

만일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으로 사성제를 알게 되었다면, 그의 사성제에 대한 통찰지는 스승에게 올리는 네 가지 공양물과 정중한 예배보다 훨씬 더 이익이 됩니다. 만일 그가 수다원도의 지혜와 수다원과의 지혜를 통하여 사성제를 알게 됐다면, 그의 통찰지는 그가 4악도를 벗어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과보는 놀라운 것입니다. 선행을 하는데 게으른 사람은 일반적으로 4악도를 헤매고 다닙니다. 4악도는 그들의 집과 같지요. 그들은 때때로 선처를 방문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4악도를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것은 스승에게 표하는 존경의 행위나 네 가지 공양물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제자가 사다함도의 지혜 그리고 사다함과의 지혜를 통해서 사성제를 알게 됐다면, 그는 인간계에 오직 1번만 돌아올 것입니다. 그가 아나함도의 지혜 그리고 아나함과의 지혜를 통해서 사성제를 알게 됐다면, 그의 통찰지는 열 한군데 욕계로부터 벗어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는 확실히 범천에 태어날 것입니다. 그는 결코 욕계에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범천의 행복은 욕계의 즐거움보다 훨씬 더 뛰어납니다. 범천에서는 남자, 여자, 아들, 딸을 비롯해 가족이 없습니다. 다툼이나 싸움도 없고 음식을 먹는 것도 불필요합니다.

 

그들의 수명은 아주 길고 그들의 행복을 망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그들은 모든 위험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아라한과를 얻지 않는 한, 늙음을 면할 수 없고 죽음을 면할 수 없으며 다시 태어남을 면할 수 없습니다.

 

다시, 제자가 아라한도 그리고 아라한과를 통해서 사성제를 알게 됐다면, 그는 통찰지를 통해 윤회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반열반 후에 그는 확실히 열반에 들 것입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괴로움, 재생, 늙음, 병듦, 죽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이익은 스승에게 올리는 네 가지 공양물과 존경심의 표현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습니다. 심지어 제자가 메루산 높이만큼 공양을 올린다 해도 그 보시는 스승의 은혜를 갚기에 충분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윤회로부터 벗어나고, 태어남, 늙음, 질병,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훨씬 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제자가 깨달은 사성제는 무엇입니까?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입니다. 이것은 오온(五蘊) 입니다. 제자가 스승에 의지해서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알게 됐다면, 이 통찰지는 스승에게 올린 네 가지 공양물이나 존경의 행위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습니다.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集聖諦)입니다. 이것은 연기(緣起)입니다. 제자가 스승에 의지해서 연기를 알게 됐다면, 이 통찰지는 스승에게 올린 네 가지 공양물이나 존경의 행위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습니다.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滅聖諦)입니다. 이것은 열반(涅槃)입니다. 제자가 스승에 의지해서 열반을 알게 됐다면, 이 통찰지는 스승에게 올린 네 가지 공양물이나 존경의 행위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습니다.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의 성스러운 진리(道聖諦)입니다. 이것은 팔정도(八正道)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은 통찰지와 도의 지혜입니다.

 

만일 제자가 스승에 의지해서 통찰지와 도의 지혜를 지니게 됐다면, 이 통찰지는 스승에게 올린 네 가지 공양물이나 존경의 행위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통찰지는 윤회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네 가지 공양물과 존경의 행위는 윤회를 벗어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열반에 이르기 위해 사마타-위빠사나를 수행하는 사람에게 간접적인 원인이 될 뿐이지요.

 

여기서 더 설명을 하면, 오온(五蘊)은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입니다. 오온 가운데 물질 무더기인 색온(色蘊)이 있습니다. 이 물질은 깔라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깔라파를 분석하면, 28가지 물질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 봅시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존재하지 않던 시대에는 이 물질의 종류와 물질을 분류하는 방법을 가르칠 수 있는 스승이 없었습니다. 오직 부처님과 그의 제자만이 물질을 식별하고, 분류하는 방법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오온에는 물질 무더기 외에 네 가지의 정신 무더기인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식온(識薀)이 있습니다. 인식과정을 벗어난 마음인 재생연결식, 바왕가, 죽음의 마음을 제외하고, 이 네 가지 정신 무더기들은 인식과정을 따라 항상 일어납니다.

 

부처님께서는 한 심찰라에 얼마나 많은 마음부수(cetasikā)가 하나의 마음과 연관되어 있는지, 그것들을 어떻게 식별하고 분류할 수 있는지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이 정신현상들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가르칠 수 있는 스승이 석가모니 부처님 시대 밖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완전히 깨달은 스승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열심히 체계적으로 수행한다면, 이 정신현상들을 분명하게 식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불자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이고 여러분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다시, 연기(緣起)는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集聖諦)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또한 제자들에게 연기를 어떻게 식별하는지 가르치셨습니다. 부처님의 제자가 그 분의 가르침에 따라서 연기를 식별할 수 있을 때,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깨달을 것입니다.

 

그는 과거의 원인이 현재의 결과를 낳고, 현재의 원인이 미래의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아는 통찰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서 어떤 결과를 창조하는 창조자는 없다는 것을 알고, 원인 없이 일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압니다. 이 지혜는 오직 석가모니 부처님의 시대에만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제자가 연기를 식별할 때, 그는 과거생과 미래생을 볼 것입니다. 만일 많은 과거 생을 식별한다면, 어떤 악업이 악도에 떨어지게 했으며, 어떤 선업이 선처에 태어나게 했는지를 아는 통찰지를 얻습니다. 서른 한 개의 세계에 대한 지식과 업의 법칙은 오직 부처님의 교법안에서만 발견됩니다.

 

부처님의 시대 밖에서는 서른 한 개의 세계와 각 세계에 재생을 일으키는 업의 법칙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제자가 미래생에 원인과 결과를 식별한다면, 그는 또한 정신-물질의 소멸을 봅니다. 그는 정신-물질이 소멸할 때를 완전히 압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런 진리(滅聖諦)입니다. 이 지혜는 오직 부처님의 시대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다시, 부처님께서는 또한 소멸에 이르는 길인 사마타-위빠사나를 가르치셨습니다. 사마타-위빠사나는 팔정도를 의미합니다. 정신-물질을 분석하는 지혜, 원인과 조건을 식별하는 지혜가 바른 견해(正見)입니다. 정신-물질의 소멸의 지혜 또한 바른 견해이다. 팔정도의 지혜도 바른 견해이다.

 

사성제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바른 사유(正思惟)입니다. 바른 견해와 바른 사유가 위빠사나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빠른 향상을 위해서는 사마타인 삼매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입니다.

 

사마타-위빠사나를 실천할 때, 계청정을 이뤄야 합니다. 이것이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입니다. 계행에 의지해서 사마타-위빠사나를 수행하는 것은 팔정도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 팔정도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시대에만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왜 그러합니까? 사성제의 통찰지는 제자로 하여금 윤회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보시는 윤회로부터 해탈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닷킨나 위방가 숫따에서 부처님께서는 개인에게 하는 14가지 종류의 보시를 설명하셨습니다.

 

“아난다여,

여기에 개인에게 하는 14가지 보시가 있다.

우선, 붓다에게 하는 보시가 있다.

이것이 첫 번째 종류의 개인에게 하는 보시이다.

 

벽지불에게 하는 보시가 있다. 이것이 두 번째 종류의 개인에게 하는 보시이다.

 

붓다의 제자인 아라한에게 하는 보시가 있다. 이것이 세 번째 종류의 개인에게 하는 보시이다.

 

아라한과를 실현하는 길에 들어선 사람에게 하는 보시가 있다. 이것이 네 번째 종류의 개인에게 하는 보시이다.

 

아나함에게 하는 보시가 있다. 이것이 다섯 번째 개인에게 하는 보시이다.

 

아나함과를 실현하는 길에 들어선 사람에게 하는 보시가 있다. 이것이 여섯 번째 하는 보시이다.

 

사다함에게 하는 보시가 있다. 이것이 일곱 번째 개인에게 하는 보시이다.

 

사다함과를 실현하는 길에 들어선 사람에게 하는 보시가 있다. 이것이 여덟 번째 개인에게 하는 보시이다.

수다원에게 하는 보시가 있다. 이것이 아홉 번째 개인에게 하는 보시이다.

 

수다원과를 실현하는 길에 들어선 사람에게 하는 보시가 있다. 이것이 열 번째 개인에게 하는 보시이다.

 

붓다 시대 밖에서 선정을 얻음으로써 감각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에게 하는 보시가 있다. 이것이 열한 번째 개인에게 하는 보시이다.

 

계를 지키는 속인에게 하는 보시가 있다. 이것이 열두 번째 개인에게 하는 보시이다.

 

계를 지키지 않는 속인에게 하는 보시가 있다. 이것이 열세 번째 개인에게 하는 보시이다.

 

동물에게 하는 보시가 있다. 이것이 열네 번째 개인에게 하는 보시이다.”

 

붓다께서는 이 14가지 이익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짐승에게 보시함으로써, 그 보시는 100배로 보답을 받는 것이 기대된다.”

이것은 100생 동안에 그 과보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순수한 마음’은 받는 사람의 도움과 같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보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업의 법칙에 강한 믿음을 가지고, 선업을 쌓기 위해서만 보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것은 나의 개다’라는 생각으로 먹이를 준다고 가정해보자. 그러한 생각은 순수한 마음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비둘기 같은 새에게 먹이를 준다면, 그 보시는 순수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새로부터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또한 뒤에 언급할 예에서도 적용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것이 사업에서 성공을 가져올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비구에게 생필품을 보시한다면, 이것은 순수한 마음으로 한 보시가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보시는 수승한 이익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보시에 관한 부처님의 말씀을 계속 이어 들어봅시다.

“계를 지키지 않는 속인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보시함으로써, 그 보시는 1000배로 보답을 받는 것이 기대된다. 계를 지키는 속인에게 보시함으로써, 그 보시는 10만 배로 보답을 받는 것이 기대된다.

 

선정을 얻어서 감각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에게 보시함으로써,그 보시는 100억 배로 보답을 받는 것이 기대된다.

수다원과를 실현하는 길에 들어선 사람에게 보시함으로써,그 보시는 셀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보답을 받는 것이 기대된다.

 

이럴진대, 수다원, 사다함과를 실현하는 길에 들어선 사람, 사다함, 아나함과를 실현하는 길에 들어선 사람, 아나함, 아라한과를 실현하는 길에 들어선 사람, 아라한, 벽지불, 온전히 깨달으신 분 붓다에게 보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찌 그 보시로 인한 공덕을 다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서 보시는 단 한번의 식사를 충분히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보시자가 여러 날, 여러 달을 보시한다면, 그러한 이익에 대해서는 묘사할 단어가 없다. 이것이 여러 종류의 개인에게 하는 보시이다.

그때 붓다께서 아난다 존자에게 설명하셨다.

 

“아난다여, 승가에게 하는 7종류의 보시가 있다.

부처님이 계시는 비구와 비구니 상가에게 하는 보시가 있다.

이것이 승가에게 하는 첫 번째 형태의 보시이다.

 

부처님이 반열반에 드신 후 비구와 비구니 승가에 하는 보시가 있다.

이것이 승가에게 하는 두 번째 형태의 보시이다.

 

비구 승가에게 하는 보시가 있다.

이것이 승가에게 하는 세 번째 형태의 보시이다.

 

비구니 승가에게 하는 보시가 있다.

이것이 승가에게 하는 네 번째 형태의 보시이다.

 

‘승가로부터 나에게 많은 비구와 비구니를 지정하기를’ 이렇게 생각하면서 하는 보시가 있다.

이것이 승가에게 하는 다섯 번째 형태의 보시이다.

 

‘승가로부터 나에게 많은 비구를 지정하기를’이렇게 생각하면서 하는 보시가 있다.

이것이 승가에게 하는 여섯 번째 형태의 보시이다.

 

‘승가로부터 나에게 많은 비구니를 지정하기를’ 이렇게 생각하면서 하는 보시가 있다.

이것이 승가에게 하는 일곱 번째 형태의 보시이다.

 

이것이 승가에게 하는 7종류의 보시입니다.

이 때 부처님께서 개인에게 하는 보시와 승가에게 하는 보시를 비교하셨습니다.

 

“미래에, 아난다여, 계를 지키지 않고 악한 성격의 가사를 걸친 도둑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승가를 대표해서 그 가사를 걸친 도둑에게 보시할 것이다. 그때조차도 승가에게 한 보시가 셀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다고 나는 말한다. 승가에게 한 보시는 개인에게 한 보시보다 훨씬 더 큰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은 승가에게 한 보시가 개인에게 한 보시보다 훨씬 유익하다는 의미입니다. 만일 마하 파자파티 고따미가 붓다가 계시는 승가에게 가사를 보시했다면, 훨씬 더 이로웠을 것이고 그 결과는 셀 수 없고 측량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그녀에게 승가에 보시하라고 권하셨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또한 네 가지 보시청정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네 가지 보시청정이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받는 자가 아니라, 주는 자에 의해서 청정하게 되는 보시가 있다.

주는 자가 아니라, 받는 자에 의해서 청정하게 되는 보시가 있다.

주는 자에 의해서도, 받는 자에 의해서도 청정하게 되지 않는 보시가 있다.

주는 자와 받는 자 둘 다에 의해서 청정하게 되는 보시가 있다.

 

무엇이 받는 자가 아니라 주는 자에 의해서 청정하게 되는 보시인가?

여기서 주는 자는 계행이 있고 착한 성격이고, 받는 자는 계행이 없고, 악한 성격이다. 그래서 그 보시는 받는자가 아니라, 주는 자에 의해서 청정하게 된다.

 

무엇이 주는 자가 아니라, 받는 자에 의해서 청정하게 되는 보시인가? 여기서 주는 자는 계행이 없고 악한 성격이고, 받는 자는 계행이 있고 착한 성격이다. 그래서 그 보시는 주는자가 아니라, 받는 자에 의해서 청정하게 된다.

 

무엇이 주는 자에 의해서도, 받는 자에 의해서도 청정하게 되지 않는 보시인가? 여기서 주는 자는 계행이 없고 악한 성격이고, 받는 자도 계행이 없고 악한 성격이다. 그래서 그 보시는 주는 자에 의해서도, 받는 자에 의해서도 청정하게 되지 않는다.

 

무엇이 주는 자와 받는 자 둘 다에 의해서 청정하게 되는 보시인가? 여기서 주는 자는 계행이 있고 착한 성격이고, 받는 자도 역시 계행이 있고 착한 성격이다. 그래서 그 보시는 주는 자와 받는 자 둘 다에 의해서 청정하게 된다.”

 

이것이 네종류의 보시청정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속해서 설명하십니다.

“계행이 있는 사람이 계행이 없는 사람에게, 깨끗하고 오염 없는 마음으로 업의 결과가 크다는 믿음을 가지고 올바르게 획득한 물건을 보시할 때, 주는 자의 덕이 보시를 청정하게 한다.”

 

최상의 이익을 얻기 위해서, 주는 자는 네 가지 조건을 이행해야 합니다. 그때에 비록 받는 자가 계행이 없는 사람이라 할 지라도, 그 보시는 주는 자에 의해서 청정하게 됩니다.

 

주석서에서는 이러한 예로 웨싼따라의 경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과거생에 웨싼따라였을 때, 자기 아들과 딸(미래의 라훌라와 웁빨라완나)을 계행이 없고 악한 성격의 주자까 바라문에게 주셨습니다. 그 보시는 웨싼따라의 보시바라밀이 완성되기 위한 마지막 보시였습니다.

 

이 마지막 바라밀을 이행한 후, 그는 깨달음을 얻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는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릴 뿐이었지요. 이 보시바라밀과 이전의 보시바라밀 때문에 그는 이제 전지전능한 지혜를 얻는 것이 확실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보시가 깨달음을 얻는데 도움이 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보시가 웨싼따라에 의해서 청정하게 된 것이었지요. 그 때에 그는 계행이 있고, 착한 성격이었습니다. 그의 보시물은 정당하게 얻은 것이었고 그의 마음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단 하나의 소원뿐이어서 깨끗하고 순수했습니다. 그는 업의 법칙과 그 결과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보시는 주는 자에 의해서 청정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고, 집착과 미움으로 가득 찬 사람, 업의 법칙에 믿음도 없는 사람이 옳지 않는 방법으로 획득한 것을, 계행이 있고 덕이 있는 사람에게 보시할 때, 그 보시는 받는 자에 의해서 청정하게 됩니다.

 

주석서에서는 이러한 예로 어부의 경우를 언급합니다. 스리랑카의 깔야니 강의 어귀에서 살고 있는 어부가 아라한인 마하테라에게 탁발음식을 세 번 공양했습니다. 죽음의 순간에 그 어부는 마하테라에게 한 보시를 기억했습니다. 천상계의 좋은 표상이 그의 마음에 나타났지요.

 

그래서 그는 죽기 전에 친척들에게 말했습니다. ‘그 대장로께서 나를 구했다.’ 죽은 후에 그는 천상계에 갔습니다. 이 경우에 그 어부는 계행이 없고 나쁜 성격이었으나, 받는 자는 계행이 있고 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보시는 받는 자에 의해서 청정하게 되었습니다.

 

계행이 없는 사람,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고 집착과 미움으로 가득 찬 사람, 업의 법칙에 믿음도 없는 사람이 옳지 못한 방법으로 얻은 물건을 계행이 없는 사람에게 보시할 때, 그 보시는 주는 자에 의해서도 받는 자에 의해서도 청정하게 되지 않습니다.

 

주석서에서는 사냥꾼의 경우를 언급합니다. 그는 죽어 아귀계로 갔습니다. 그때 그의 아내가 그를 위하여 계행이 없고 나쁜 성격을 가진 비구에게 탁발음식을 공양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귀는 ‘사두(훌륭하다)!라고 소리칠 수 없었습니다.

 

주는 자도 역시 부도덕하고 계행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냥꾼의 아내도 남편이 짐승을 죽이는데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녀의 보시물은 짐승을 죽임으로써 옳지 못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깨끗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깨끗하고 지혜가 있었다면, 남편을 따라 다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업의 법칙과 그 결과에 대한 충분한 믿음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업의 법칙에 충분한 믿음이 있었다면, 살아있는 것을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받는자도 역시 계행이 없었고 나쁜 성격이었기 때문에 그 보시는 주는 자에 의해서도 받는 자에 의해서도 청정하게 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똑같이 세 번이나 탁발음식을 공양했지만, 좋은 결과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귀는 소리쳤습니다. ‘저 부도덕한 녀석이 세 번씩이나 나의 재산을 훔쳤어!’ 그 이후에 그녀는 계행이 있는 비구에게 탁발음식을 공양했고, 그 때 그 비구가 보시를 청정하게 했지요. 그때 그 아귀는 소리쳤습니다. ‘사두(훌륭하다)!’ 그리고 아귀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보시로 인해서 좋은 결과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아래의 네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첫 째, 당신은 계를 지켜야 합니다.

둘 째, 당신의 공양물은 정당하게 얻은 것이어야 합니다.

셋 째, 당신의 마음은 깨끗하고 순수해야 합니다.

넷 째, 당신은 업의 법칙과 그 과보에 대한 충분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게다가 당신이 받는 자이고 주는 자에 대한 자비심이 충분히 강하다면 당신은 역시 계를 지켜야 합니다. 만일 당신의 계행이 선정과 통찰지와 함께 한다면, 훨씬 더 좋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이런 보시는 주는 자에게 훨씬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이제 네 번째 보시청정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주는 자와 받는 자 둘 다에 의해서 청정하게 되는 보시가 있습니다. 이 때 주는 자는 네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첫 째, 주는 자는 계를 지켜야 합니다.

둘 째, 주는 자의 공양물은 정당하게 얻은 것이어야 합니다.

셋 째, 주는 자의 마음은 깨끗하고 순수해야 합니다.

넷 째, 주는 자는 업의 법칙과 그 과보에 대한 충분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받는 자 또한 계를 지켜야 합니다.

이같은 보시에 대해 붓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이같은 보시는 무한한 과보를 가져올 것이다.”

이 보시는 무한하고 헤아릴 수 없는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 또한 받는 자의 계행이 선정, 통찰지, 도와 과의 지혜와 함께 한다면 이 보시공덕은 최상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또 다른 경, 앙굿따라 니까야의 찰랑가다나 숫따를 살펴봅시다.

한때 부처님께서 사왓티 근처의 아나타삔디까 공원의 제따와나 수도원에 머무셨다. 그때 재가신자이며 웰루깐다까에 살고 있는 난다의 어머니가 탁발음식을 공양했다.

 

그녀의 공양은 6가지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받는 자는 사리풋다와 목갈라나 존자가 있는 승가였다. 부처님께서는 천안으로 그 보시를 보셨다. 그리고 비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웰루깐다까의 재가신자가 사리풋다와 목갈라나 존자가 상수로 있는 승가에게 6가지 요건을 갖춘 보시를 준비하고 있구나.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6가지 요건을 갖춘 보시인가?

비구들이여, 주는 자는 세 가지 요건을 갖추고, 받는 자 또한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무엇이 주는 자의 세 가지 요건인가?

 

비구들이여,

보시하기 전에는 시주자는 마음이 매우 즐거워야 한다.

보시하는 동안에는 시주자의 마음은 만족스러워야 한다.

보시한 후에는 시주자는 기쁨으로 가득 차야 한다.

이것이 주는 자의 세 가지 요건이다.

 

무엇이 받는 자의 세 가지 요건인가?

비구들이여,

받는 자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났거나, 집착을 깨뜨리는 중이다.

받는 자는 성냄으로부터 벗어났거나, 성냄을 깨뜨리는 중이다.

받는 자은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났거나, 어리석음을 깨뜨리는 중이다.

이것이 받는 자의 세 가지 요건이다.

 

모두 합해서 6가지 요건이 있다. 보시가 이 6가지 요건을 갖추었다면, 무량하고 성스런 과보를 가져온다.”

 

부처님의 말씀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이 많은 것이 공덕의 산물이다. 미래의 복덕을 위해 저축된 것이고, 행복을 무르익게 하며, 하늘에 이르게 하고, 행복으로 이끌며, 갈망하고 바라는 최상의 복덕이다.’라고. 그러나 이렇게 말함으로써 보시의 공덕을 측정하기가 쉽지 않다. 진실로 공덕의 양은 계산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다.

 

비구들이여, 오대양의 물을 측량하면서 이렇게 말하기란 쉽지 않다. ‘거기에는 수많은 항아리의 물이 있다. 수백 개의 항아리, 수천 개의 항아리, 수십만 개의 항아리 분량의 물이 있다.’라고. 그러나 이렇게 말함으로써 6가지 요건을 갖춘 공덕을 측량하기란 쉽지 않다. 진실로 공덕의 양은 계산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다.”

 

왜 그러합니까? 그녀는 닷킨나 위방가 숫따에서 언급한 네 가지 요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첫 째, 그녀는 계를 지켰습니다.

둘 째, 그녀의 시주물은 정당하게 얻은 것이었습다.

셋 째, 그녀의 마음은 깨끗하고 순수했습니다.

넷 째, 그녀는 업의 법칙과 그 과보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찰랑가다나 숫따에 언급된 3가지 요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보시하기 전에는 그녀는 마음이 매우 즐거웠습니다.

보시하는 동안에는 그녀의 마음은 만족스러웠습니다.

보시한 후에는 그녀는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런 조건이 시주자에게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측량할 수 없는 무량한 좋은 과보를 기대한다면, 이 요건을 충족해 행해야 합니다. 닷킨나 위방가 숫따에 따르면, 받는 자도 역시 계를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찰랑가다나 숫따에 따르면, 사마타-위빠사나를 아라한도까지 수행한 비구 또는 비구니이거나,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깨뜨리기 위해 사마타-위빠사나를 수행중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지금 이 위뚱사에는 많은 비구와 비구니가 있습니다. 그들은 탐욕·성냄·어리석음을 완전히 부수기 위해 사마타-위빠사나 명상을 수행하고 있지요. 이들은 또한 계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 보시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시주자들은 계를 지킨다.

그들의 마음은 깨끗하고 순수하다.

보시한 물건은 정당하게 얻은 것이었다.

그들은 삼보와 업의 법칙 그리고 그 과보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보시하기 전에 즐거웠다.

그들은 보시하는 동안 만족스러웠다.

그들은 보시한 후 기쁨이 가득했다.’라고.

 

그래서 우리는 이 두 달 수행기간에 한 보시를 부처님의 바람과 일치하는 것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성한 보시입니다.

 

만일 시주자가 미래에 좋은 과보를 기대한다면, 확실히 이 선업이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줄 것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붓다께서는 다누빠빳띠 숫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계를 지키는 사람의 서원은 행위의 정화로 인해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래서 계를 지키는 사람의 선업이 그의 서원을 실현되게 할 것이다.

 

붓다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는 붓다가 될 수 있다.

벽지불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는 벽지불이 될 수 있다.

상수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는 상수제자가 될 수 있다.

대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는 대제자가 될 수 있다.

일반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는 일반제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바라밀이 성숙했을 때의 일이다. 원하는 것만으로는 이런 깨달음을 얻기에 충분치 않다.

 

죽은 후에 인간의 행복을 원한다면, 그는 인간계에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죽은 후에 욕계 하늘에 가기를 원한다면, 그는 욕계 하늘에 갈 수 있다.

죽은 후에 색계에 가기를 원한다면, 이 선업이 색계에 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보시가 위에서 말한 조건들을 만족한다는 것은, 보시 전과 중간과 후에 그의 마음이 보시물과 받는 사람을 마음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받는 사람은 그의 마음의 자애명상의 대상이 됩니다.

 

그 때에 자애명상을 한다면, 자애삼매는 죽은 후에 색계로 그를 인도할 것입니다. 이렇게 그의 보시는 색계에 가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죽은 후에 색계에 가기를 원한다면, 그는 자애명상으로 삼매를 얻어야 합니다.

 

만일 자애삼매를 얻은 후에 탁발음식을 공양했다면, 그의 선업은 그가 색계에 가는데 매우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래에 선한 과보를 원한다면, 자애명상으로 삼매를 얻어야 합니다.

 

세 가지 행복, 즉 인간의 행복, 욕계의 행복, 색계의 행복 중에서 색계의 행복이 가장 높습니다. 색계의 행복보다 더 뛰어난 세간의 행복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31개의 세계에서 가장 수승합니다.

 

이것은 오늘 법문을 시작하면서 이야기 한 첫 번째 종류의 보시, 즉 무량한 복을 받는 보시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종류의 보시를 좋아하십니까? 그렇다면, 닷킨나 위방가 숫따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을 같이 들어봅시다.

 

“비구들이여, 한 아라한이,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업의 과보가 크다는 믿음을 갖고서, 정당하게 얻은 것을, 다른 아라한에게 보시 할 때 그 보시는 세상의 모든 보시 중에서 가장 수승하다.”

 

이 경우에 시주자는 네 가지 요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첫 째, 주는 자는 아라한입니다.

둘 째, 주는 자의 시주물은 정당하게 얻은 것입니다.

셋 째, 주는 자의 마음은 깨끗하고 순수합니다.

넷 째, 주는 자는 업의 법칙과 그 과보에 대해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다섯 번째 요건도 갖추고 있지요.

 

다섯 째, 받는 자도 역시 아라한입니다.

붓다께서는 한 아라한이 다른 아라한에게 한 보시가 세상의 보시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이 보시는 과보가 없기 때문입니다. 시주자는 어리석음과 삶에 대한 모든 집착을 부셔버렸습니다. 무명과 갈망은 업의 주된 원인, 즉 상카라(의지적 형성력, 行)입니다. 이 경우에 상카라는 보시를 하는 선한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업은 어떠한 과보도 일으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업을 일으키는 원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무명과 갈애가 없습니다. 뿌리가 완전히 뽑힌 나무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아라한의 보시는 어떠한 과보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명과 갈애 등과 같은 뿌리가 완전히 뽑혀버렸기 때문이지요. 그는 미래의 삶에 어떠한 가능성도 없습니다.

 

라따나 숫따에는 다음과 같은 짧은 부처님 말씀이 나옵니다.

 

“아라한은 모든 선업과 악업을 소진시켰다.

새로운 선업과 악업은 그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재생의 씨를 말려버렸다.

그들은 미래의 삶에 대한 가능성이 전혀 없다.

기름과 심지가 다 타버린 기름등잔처럼,

그들의 모든 정신-물질은 소멸될 것이다.”

 

이 진리에 의해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고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이것이 진리에 대한 천명입니다. 이 진리의 천명으로 모든 웨살리(바이샬리) 사람들이 위험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아라한의 보시는 가장 수승합니다. 왜냐하면 미래에 과보가 없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삶이 없다면,태어남, 늙음, 병듦, 그리고 죽음도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수승합니다. 이것이 오늘 법문 초기에 언급한 두 번째 종류의 보시, 즉 과보가 없는 보시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종류의 보시, 즉 인간계의 행복, 욕계 하늘의 행복, 색계의 행복 같은 과보가 있는 보시의 경우에는 여전히 괴로움이 있게 됩니다. 시주자는 여전히 재생하기 마련이고, 늙기 마련이고, 병들기 마련이고, 죽기 마련입니다. 만일 시주자가 감각적 대상, 그것이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거기에 집착한다면, 그 대상이 파괴되거나 죽게 되었을 때, 그는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문제를 깊이 숙고해 보십시오. 어떤 보시가 탄생, 늙음, 병듦, 죽음,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 등의 결과를 일으킬 때, 그것이 수승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를요. 또, 이 문제도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보시가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 등의 결과를 전혀 일으키지 않을 때, 그것이 수승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를요. 그래서 붓다께서는 두 번째 보시가 가장 수승하다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 법문의 의미를 이해할 것입니다. 처음에 이미 두가지 종류의 보시를 언급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선한 과보를 가져오는 보시와 과보가 전혀 없는 보시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보시를 선호합니까?

여러분들 스스로 그 대답을 찾아 보기 바랍니다.

만일 시주자가 아라한이 아닐 때, 어떻게 두 번째 종류의 보시를 할 것입니까? 앞에 언급한 찰랑가다나 숫따에서 부처님께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받는 사람이 탐욕·성냄·어리석음에서 벗어났거나, 탐욕·성냄·어리석음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중이고, 시주자 역시 탐욕·성냄·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위빠사나를 수행하는 중이라면, 그 보시는 가장 수승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요.

 

그가 자신의 정신-물질을 식별하고, 그 정신-물질의 무상 고 무아를 식별한다면.

그가 외부의 정신-물질, 특히 받는 사람의 정신-물질의 무상 고 무아를 식별한다면.

그가 시주물에서 궁극적 물질의 무상 고 무아를 식별한다면.

그가 보시하는 동안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신현상의 무상 고 무아를 식별한다면 말입니다.

 

그가 시주물에서 4대요소를 볼 때, 그는 쉽게 물질 깔라파를 봅니다. 그는 깔라파를 분석할 때, 땅, 물, 불, 바람, 색깔, 냄새, 맛, 영양소 등의 8가지 요소를 식별합니다. 그 깔라파들은 각 깔라파 안의 불의 요소로부터 생성된, 온도에서 생긴 물질입니다.

 

그는 그 물질에서 무상 고 무아를 식별합니다. 시주자가 이런 식으로 위빠사나를 수행할 수 있다면, 그의 탐욕·성냄·어리석음이 보시하는 동안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 보시는 일반적으로 과보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보시도 가장 수승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주자는 보시하기 전, 중간, 후에 이런 식으로 위빠사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위빠사나는 강하고 힘이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무너짐의 지혜 단계까지 수행해야만 이런 식의 위빠사나가 가능합니다. 이런 기회를 역시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 기회는 붓다의 시대에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만일 우리가 통찰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이렇게 보시를 할 수 있겠냐고 물을지도 모릅니다. 그때에는 ‘이 보시가 열반을 얻는데 도움이 되기를!’이라고 생각하면서 보시하기를 권합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열반을 원하면서 시주하기를 거듭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이상으로 라따나 숫따에 나오는 붓다의 말씀을 반복하면서 법문을 모두 마치고자 합니다.

“아라한은 모든 선업과 악업을 소진시켰다.

 

새로운 선업과 악업은 그에게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재생의 씨를 말려버렸다.

그들은 미래의 삶에 대한 가능성이 전혀 없다.

기름과 심지가 다 타버린 기름등잔처럼,

그들의 모든 정신-물질은 소멸될 것이다.”

이 진리에 의해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고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모든 존재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출처 : 대전 위빠사나 명상센터
글쓴이 : 道安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