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능가경

[스크랩] 입능가경 3. 집일체불법품 ② - 2 매우 중요

수선님 2018. 4. 8. 12:54

입능가경 3. 집일체불법품 ② - 2

 

그 때 거룩하신 대혜보살은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원하옵나니 세존께서는 저희를 위하여 언어상(言語相)을 분별함이라고 말하는 심법문(心法門)을 말씀해 주십시오. 저와 여러 보살들이 언어상을 분별함이라 말하는 심법문을 얻어 잘 알게 되면, 곧 말과 뜻의 두 가지 법에 통달하여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얻을 것이며, 보리(菩提)를 얻고는 말과 뜻으로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청정한 알음을 얻게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거룩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다. 대혜여,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라. 마땅히 그대를 위하여 말할 것이다."

 

대혜보살은 말하였다.

"어지신 세존이시여, 가르침을 잘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네 가지 허망한 모양인 언어가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상언설(相言說)이요,

둘째는 몽언설(夢言說)이요,

셋째는 망집언설(妄執言說)이요,

넷째는 무시언설(無始言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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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혜여, 상언설이란 것은 이른바 색(色) 등의 모든 모양에 집착하므로 생기는 것이다.

 

대혜여, 몽언설이란 것은 본래 수용(受用)하던 허망한 경계를 기억하고서 경계에 의거하여 꿈을 꾼다. 꿈을 깨고는 허망한 경계에 의거하여 진실하지 않은 것을 아는 것이 생기는 것이다.

 

대혜여, 집착언설이란 것은 본래 듣는 것과 짓는 업을 생각하여 생긴 것이다.

 

대혜여, 무시언설이란 것은 끝없는 예로부터 희론번뇌와 종자훈습에 집착하여 생긴 것이다.

대혜여, 내가 말하던 네 가지 말인 허망한 집착을 이미 모두 말하였다."

 

그 때 거룩하신 대혜보살은 또 다시 이 뜻을 부처님께 청하여 여쭈려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원하오니 저희를 위하여 네 가지 허망하게 언어(言語)의 상(相)에 집착하는 것을 거듭 말씀해 주십시오. 중생의 언어는 어느 곳에서 나온 것이며, 어떻게 출현하며, 무슨 원인으로 나오게 됩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머리와 가슴과 목구멍과 코와 입술과 혀와 어금니와 이로부터 구르기 때문에, 화합하여 소리가 나는 것이다."

 

대혜보살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입 속의 언어가 허망한 법상(法相)과 다른 것입니까? 다르지 않은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언어는 허망한 법상과 다른 것도 아니며, 다르지 아니한 것도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저 허망한 법상으로 인하여 언어가 나는 까닭이다.

 

대혜여, 만약 언어가 그와 다르다면 마땅히 원인이 없이 생겨야 한다.

 

대혜여, 만약 그와 다르지 않다면 언어는 능히 눈앞에 나타나는 경계를 말로 표현할 수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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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혜여, 그러나 저 언어는 눈앞에 나타나는 경계를 능히 표현할 수 있으니, 그러므로 다른 것도 아니며,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대혜보살은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언어가 바로 제일의(第一義)입니까? 언어로서 설명하는 것이 제일의입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언어가 바로 제일의가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대혜여, 제일의로 하여금 언어를 수순(隨順)하여 성인(聖人)의 경지에 들어가게 함이니, 그러므로 언어로서 제일의를 설명함이 있을 뿐이요, 언어가 바로 제일의(第一義)는 아니다.

 

대혜여, 제일의는 거룩한 지혜로 깊이 증득할 바요, 언어의 법은 아닌 것이다. 이는 지혜의 경계이니, 언어로서는 그 경계를 알릴 뿐이다.

 

대혜여, 제일의를 설명하는 언어도 생멸(生滅)의 법이니, 생각 생각이 머무르지 않고 인연으로 화합하여 언어가 생긴 것이다.

 

대혜여, 인연으로 화합한 그것은 능히 제일의를 나타내지 못하니, 무슨 까닭인가? 자기 모양[自相]과 다른 모양[他相]이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대혜여, 언어로는 능히 제일의를 나타내지 못한다.

 

대혜여, 자심에서 바깥의 있고 없는 법들을 보고 분별함을 따르기에 제일의를 능히 알지 못하니, 그러므로 대혜여, 그대는 마땅히 여러 가지 언어로 허망하게 분별하는 상을 떠날 것이다."

 

그 때 세존께서는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모든 법은 본래 허망하여
  진실한 자체가 없으니,
  그러므로 여러 가지 말로서
  있다 없다 말하지 못하리라.
  
  공함과 또한 공함이 아님을
  범부는 잘 알지 못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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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법은 자체상이 없으며
  중생이라 말함도 또한 그러하네.
  
  있다 없다 분별하는 법은
  마치 꿈과 환상 같으니,
  일체법을 관찰하여 열반에도
  세간에도 머무르지 아니하리.
  
  왕과 장자(長者)들이
  여러 아들을 기쁘게 하려고
  진흙으로 만든 짐승들을 먼저 주고
  진실한 것을 다음에 주듯이
  
  나도 여러 불자를 기쁘게 하려고
  여러 가지 법과 자체 법이며
  거울 모양과 같은 것들을 말하고서
  뒤에 실제(實際)를 설명하노라.
  
그 때 거룩한 대혜보살은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원하오니 세존께서 여러 보살과 저를 위하여 있는 것과 없는 것, 같음과 다름, 갖춤[俱]과 갖추지 않은 것[不俱], 있음과 없음,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아닌 것[非有非無], 항상됨[常]과 항상됨이 없는 것[無常]을 떠난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것은 모든 외도가 행하지 못할 바이며, 거룩한 지혜로서 스스로 증득한 깨달음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며, 자기 모양과 같은 모양을 떠난 것이며, 제일의(第一義)의 참다운 법성(法性)에 드는 것이며, 모든 지위가 차례대로 최상으로 청정하게 되는 것이며, 여래의 지위에 들어가는 것이며, 본원력(本願力)에 의지하여 여의주(如意珠)와 같이 한량없는 경계와 수행하는 것이 저절로 되는 것이며, 일체법에서 자심(自心)으로 차별상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니, 저와 일체 보살들은 이와 같이 망상으로 같은 모양과 다른 모양을 분별하는 것을 떠나고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빨리 얻고, 일체 중생에게 편안함과 좋은 것들을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모두 만족하게 할 것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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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대혜여, 그대는 모든 천인(天人)을 불쌍히 여겨, 그들에게 안락과 이익이 많게 하려고 능히 나에게 이러한 뜻을 묻는구나.
훌륭하고 훌륭하다. 대혜여,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라. 내 마땅히 그대를 위하여 분별하여 해설하겠노라."

 

대혜보살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지신 세존이시여, 가르침을 잘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범부는 오직 이 마음으로 보여진 것을 능히 깨닫지 못하고 밖으로 여러 가지 법상(法相)에 집착하여 참으로 있는 것으로 여기니, 그러므로 허망하게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 있음과 없음,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아닌 것, 항상됨과 항상됨이 없는 것들을 분별하니, 그는 자심의 훈습으로 인한 것이며, 허망하게 분별하는 마음에 의지한 것이다.

 

대혜여, 비유컨대 뭇 짐승들이 목마름에 시달려 아지랑이를 보고 마음이 착란하여 그를 물이라 생각하고 동서로 헤매면서 물이 아님을 알지 못함과 같다.

 

대혜여, 이와 같이 범부들의 어리석은 마음으로 생(生)·주(住)·멸(滅)의 법을 보고 잘 분별하지 못한 것은 끝없는 예로부터 허망하게 희론(戱論)에 훈습되고, 욕심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에 집착하여 미혹한 마음으로 시달려서 여러 가지 모든 색경계(色境界)를 좋아하여 구함이니, 그러므로 범부들이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 있음과 없음,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아닌 것, 항상됨과 항상됨이 없는 것들에 떨어진다.

 

대혜여, 비유컨대 범부가 건달바(乾達婆)의 성(城)을 보고 진짜 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끝없는 예로부터 허망하게 성이라고 분별하는 생각의 종자와 훈습으로 인하여 보는 것과 같으니 대혜여, 저 성은 성이 아니며, 성 아닌 것도 아니다.

 

대혜여, 일체 외도도 또한 그와 같아서 끝없는 예로부터 희론과 훈습에 인하여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 있음과 없음,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아닌 것, 항상됨과 항상됨이 없는 법들에 집착하니 대혜여, 그는 오직 마음에서 허망하게 본 것임을 깨닫지 못한 까닭이다.

 

대혜여,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여러 남자와 여인과 코끼리와 말과 수레들이 움직이는 것과 성읍(城邑)과 취락(聚落)과 소와 물소와 동산 숲과 나무와 여러 산과 강과 흐르는 샘과 목욕하는 못과 궁전과 누각과 여러 가지로 장엄하고 광대하며 화려한 것을 보기도 하며, 자기 몸이 그 속에 있는 것도 보다가 문득 꿈이 깨어서는 그 광대한 성읍들을 생각한다면 대혜여, 그대의 뜻에는 어떠한가? 그 사람을 성자(聖者)라고 할 수 있는가?"

 

대혜보살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일체 어리석은 범부와 외도의 삿된 견해로 본 여러 가지도 그와 같으니, 그는 모든 법이 꿈속에 있는 마음에서 본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 있음과 없음,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아닌 것, 항상됨과 항상됨이 없는 것들의 견해에 집착한 것이다.

 

대혜여, 비유컨대 그림 속의 모양은 높지도 않으며, 낮지도 않는 것과 같지만 대혜여, 어리석은 범부는 허망하게 모든 법이 높고 낮음이 있는 것으로 본다.

 

대혜여, 미래의 세상에는 외도의 삿된 견해에 의하여 마음의 훈습함이 더욱 더하여 허망하게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 있음과 없음,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아닌 것, 항상됨과 항상됨이 없는 것들을 분별하리니, 대혜여, 저 외도는 자신도 버리고 남도 버리면서 말하기를, '모든 법은 생하지도 않으며, 멸하지도 아니하여 있음과 없음이 모두 고요하다'라고 하니, 그것을 이름하여 올바르지 못한 견해라 한다.

 

대혜여, 저 외도는 인과법(因果法)도 비방하니, 삿된 견해에 빠진 까닭이다. 일체 착한 뿌리[善根]와 깨끗한 법[白法]과 청정한 종자를 뽑아 버린다.

 

대혜여, 수승한 법을 구하려면 마땅히 그와 같은 법을 말하는 사람을 멀리 할 것이니, 그 사람은 마음이 자타(自他)의 두 견해에 집착하고, 허망한 법에도 집착하였으므로 법을 비방하는데 떨어질 것이며, 삿된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악도(惡道)에 들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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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혜여, 비유컨대 병든 눈으로 허공에 털 바퀴[毛輪]가 있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와 같이 푸르고 누르며, 붉고 흰 것을 보지 못하는가'라고 하는 것과 같다.

 

대혜여, 그러나 저 털 바퀴는 본래 자체가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대혜여, 외도들이 삿된 견해에 의지하여 허망하게 분별함도 또한 그와 같다.

 

허망하게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 있음과 없음,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아닌 것, 항상됨과 항상됨이 없는 것들이 모든 법을 내었다고 집착한다.

 

대혜여, 비유컨대 하늘의 비가 물거품을 내어 수정 구슬과 같은데, 어리석은 범부는 허망한 견해로 집착하여 구슬이라는 생각하고 동쪽 서쪽으로 헤매는 것과 같다. 대혜여, 그러나 저 물거품은 보배 구슬이 아니며 보배 구슬이 아닌 것도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구슬이라고 취(取)하며 취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다.

 

대혜여, 저 외도의 허망한 마음으로 인하여 분별하며 훈습함도 또한 그와 같다. 그가 있지 않는 법을 말하여, '인연에 의지하여 생겼다'라고 하며, 또한 '실로 법이 없어지는 것이 있다'라고 말한다.

 

대혜여, 저 외도가 삼종량(三種量)1)과 오분론(五分論)2)을 세워서 말하기를, '실로 성자(聖者)의 안으로 증득하는 법이 있는데, 두 자체(自體)를 떠난 것이다'라고 하여 허망하게 분별한다.

  
  
1) 인명학(因明學)의 용어로서 '삼량(三量)', '삼지비량(三支比量)'이라고도 한다. 인명의 입론(立論) 가운데 입(立 : 立論, 主張)과 적(敵 : 問難)의 쌍방공격의 세 가지 방법. ① 자비량(自比量 : 이는 스스로 지키는 논법으로 그 형식은 자신이 인정하는 재료로서 구성한다.) ② 타비량(他比量 : 이는 공격의 논법으로 그 형식은 대적자가 인정하는 재료로서 구성한다.) ③ 공비량(共比量 : 이는 함께 논쟁하는 논법으로 그 형식은 자신과 상대방이 인정하는 재료로서 구성하지 않고 그 宗이 나타나는 쟁론의 주제로서 이루어진다. 각각의 비량은 또한 이 세 가지를 갖추고 있어 모두 九種比量이라고도 한다.
2) 오지작법(五支作法)이라고 하며, 종(宗)·인(因)·유(喩)·합(合)·결(結)의 다섯 가지로 구성된 추론형식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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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혜여, 심(心)·의(意)·식(識)을 떠나면 이 몸이 변해서 문득 성인(聖人) 종류의 몸을 얻으리니, 여러 가지 행을 수행하지만 그러한 마음이 없이 자심의 견해와 허망한 경계를 취하는 것을 떠날 것이며, 여래의 지위에 들어가서 자신이 정진(精進)하여 거룩한 지혜를 증득할 것이니, 여실히 수행하는 자는 있다 없다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대혜여, 여실히 수행하면 반드시 이와 같은 경계를 얻을 것이다.

 

대혜여, 만약 유무법(有無法)을 취함이 있다면 곧 아상(我相)·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이 될 것이다.

 

대혜여, 유무법과 자기 모양과 같은 모양을 말함은 이는 응화불(應化佛)의 말이요, 법불(法佛)의 말이 아니다.

 

대혜여, 응화 여래께서 이와 같은 법을 말함은 어리석은 범부의 보는 마음에 따라서 그들로 하여금 수행하게 함이요, 참다운 수행을 건립하여 자신(自身)의 안으로 증득하는 거룩한 지혜와 삼매락행(三昧樂行)을 보여주기 위함은 아니다.

 

대혜여, 비유컨대 사람이 물 속의 나무 그림자를 보는 것과 같다.

 

대혜여, 저것은 그림자가 아니며 그림자가 아닌 것도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나무가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나무가 없으면 그림자가 없기 때문이다.

 

대혜여, 저 외도가 삿된 견해의 마음에 의하여 망상으로 훈습함도 또한 그와 같다. 그는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 있음과 없음,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아닌 것, 항상됨과 항상됨이 없는 것을 분별하니, 이는 망상으로 분별함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는 오직 마음에서 본 것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혜여, 비유컨대 밝은 거울이 인연을 따라 모든 색상을 비추어 나타내지만 분별하는 마음이 없는 것과 같으니 대혜여, 저것은 색상도 아니며 색상이 아닌 것도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인연이 있으면 나타내 보이고 인연이 없으면 나타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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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혜여, 이는 어리석은 범부들이 자심의 분별로 색상이 있음과 없음을 본 것이다.

 

대혜여, 비유컨대 여러 음향이 사람과 산과 강물과 허공과 집 등과 함께 어울려서 들리는 것과 같으며, 저 들리는 음향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소리로 인하여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대혜여, 일체 외도는 자심의 허망과 분별의 훈습으로서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 있음과 없음,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아닌 것, 항상됨과 항상됨이 없는 것들을 본다.

 

대혜여, 비유컨대 풀과 나무와 동산 숲이 없는 대지에 햇빛과 먼지와 흙이 어울림으로 인하여 물결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저 물결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닌 것과 같으니, 무슨 까닭인가? 중생들이 그것들을 좋아하기도 하고 좋아하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혜여, 일체 외도와 어리석은 범부도 또한 그와 같아서 끝없는 예로부터 번뇌의 마음과 희론으로 훈습함을 인하여 생(生)·주(住)·멸(滅),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 있음과 없음,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아닌 것, 항상됨과 항상됨이 없는 것들을 분별하니, 이는 성인이 몸소 깊이 증득하는 지혜의 문에서 아지랑이를 목이 타게 좋아하는 일들을 보여준 것이다.

 

대혜여,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주술(呪術)의 힘에 의하여 죽은 사람과 기관목인(機關木人: 움직이도록 만든 나무 사람)을 일으키기도 하며, 중생의 체(體)가 없는데도 바사사(毘舍闍: 癲狂鬼)의 힘과 공교한 환사(幻師)의 힘에 의하여 가고 오게 하는 일들을 하지만, 어리석은 범부는 그에 집착하여 실로 있는 것으로 여기니, 오고 가고 하기 때문이다.

 

대혜여, 어리석은 범부와 외도들이 사견(邪見)의 마음에 떨어진 것도 또한 그와 같아서, 허망한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 있음과 없음,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아닌 것, 항상됨과 항상됨이 없는 것들에 집착하니, 그러므로 범부와 외도는 허망하게 이와 같은 법을 세운다. 그러므로 대혜여, 그대는 마땅히 생(生)·주(住)·멸(滅),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 있음과 없음,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아닌 것, 항상됨과 항상됨이 없는 것들을 떠날 것이니, 이것이 몸소 깊이 거룩한 지혜로 분별함을 증득함이다."

  
  
[95 / 415] 쪽
  
  그 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5음(陰)과 식(識)은
  물 속의 나무 그림자 같고,
  꿈과 환으로 보는 것과 같으니,
  의식에 의해 취(取)하지 말라.
  
  모든 법은 털 바퀴 같으며
  아지랑이를 물로 여기는 것과 같으니,
  삼계(三界)의 모든 것을
  환과 꿈으로 관찰하라.
  
  만약 이와 같이 관찰하여
  수행하면 해탈을 얻으리라.
  여름날에 물을 찾는 짐승이
  아지랑이에 착각 일으킴과 같으니,
  
  그곳에 물이 없지만
  허망한 생각이 물로 보이듯
  식(識)의 종자로서
  경계에 움직이는 견해와 같다.
  
  어리석어서 진실인양 취(取)하나
  저 법의 생함은 헛보임 같은데,
  끝없는 세월의 어리석음으로
  물질을 취함이 품에 안음과 같다.
  
  
  
[96 / 415] 쪽

  쐐기로서 쐐기를 빼내는 것과 같아

  범부를 속여 들어가게 하는 법이며,

  환술로 시체를 일으키는 기관이라
  꿈·번개·구름이듯 항상 그러하네.
  
  세간을 이와 같은 것으로 관찰하면
  유(有)를 끊고 해탈을 얻으리.
  아지랑이는 허공에서
  모든 알음이 있지 않으니,
  
  모든 법을 이와 같이 관찰하여
  일체법에 집착하지 말라.
  여러 식(識)은 이름뿐이니
  모든 상(相)이 공하기 때문이다.
  
  5음을 보는 것은 털 바퀴와 같으니,
  어느 법에 분별하랴.
  그 그림과 털 바퀴는
  환이요, 꿈이며 건달바(乾闥婆)와 같다.
  
  불 바퀴[火輪]와 새가 물로 본 아지랑이는
  실로 없건만 있다고 보나니,
  항상됨과 항상됨이 없음,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이며,
  
  그것은 끝없는 예로부터
  속박 된 범부의
  미혹한 마음에
  의지하여 된 것일세.
  
  
[97 / 415] 쪽
  밝은 거울 보배 마니(摩尼)와
  맑은 물, 깨끗한 눈(眼)에서
  여러 가지 색상이 나타나면
  허망하게 여러 가지 빛깔을 보느니라.
  
  일체법은 진실함이 없는 것이
  꿈과 석녀(石女)와 같으며,
  짐승이 허공에 아지랑이를
  물로 알고 좋아함과 같다.
  
대혜여, 부처님·여래의 설법은 네 가지 견해를 떠났으니, 같음과 다름, 갖춤과 갖추지 않은 것을 떠난 것이다. 있음과 없음을 세우는 것을 멀리 떠난 것이다.

 

대혜여, 모든 부처님·여래의 설법은 실제(實際)와 인연(因緣)과 적멸(寂滅)과 해탈에 의지한다.

 

대혜여, 일체 부처님 여래의 설법은 구경(究竟)의 경계에 의지한 것이며, 인(因)·자성(自性)·자재천(自在天)·무인(無因)·미진(微塵)·시간 등의 이와 같은 설법에 의한 것이 아니다.

 

대혜여, 부처님의 설법은 두 가지 장애인 번뇌장(煩惱障)과 지장(智障)을 떠났다. 큰 장사치가 여러 사람들을 거느리고 처음 보는 아주 편안하고 고요한 곳에 이르러 차례로 안치하듯이, 여래도 사람들을 차례로 안치하여 그들로 하여금 법과 지위의 차별상(差別相)을 잘 알게 한다.

 

대혜여, 네 가지 선(禪)이 있으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어리석은 범부가 행하는 선[愚癡凡夫所行禪]이요,

둘째는 뜻을 관찰하는 선[觀察義禪]이요,

셋째는 진여를 생각하는 선[念眞如禪]이요,

넷째는 부처님·여래의 선[諸佛如來禪]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어리석은 범부가 행하는 선인가?

성문과 연각과 외도의 수행자가 인무아(人無我)와 자기의 몸과 다른 이의 몸을 골쇄(骨鎖)로 관하므로 무상(無常)하고, 괴로움[苦]이요, 내가 없으며[無我], 깨끗하지 못한 것[不淨]이라 하고, 모든 상에 집착함도 이와 같아서 결코 필경에는 다르지 않다고 하여, 이와 같이 차례로 앞에서 관한 것으로 인하여 차례로 올라가서 내지 비상(非想)과 멸진정(滅盡定)의 해탈에 이르니, 이를 어리석은 범부와 외도와 성문들의 선이라 이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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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혜여, 어떤 것이 뜻을 관찰하는 선인가?

인무아와 자기의 몸 다른 이의 몸을 관하였음으로 어리석은 범부와 외도가 자기 몸과 다른 이의 몸에 자타(自他)의 모양이 진실함이 없는 것을 보고, 법무아(法無我)와 모든 지위의 행상(行相)과 뜻과 자제(次第)를 관찰함이니 대혜여, 이를 뜻을 관찰하는 선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진여를 관찰하는 선인가?

허망한 분별의 인연을 관찰하여 두 가지 무아(無我)를 참답게 알고 일체 모든 법에 진실한 체상이 없는 것을 참답게 분별하고, 그 때 분별함에 머무르지 않고 마음에 고요한 경계를 얻음이니 대혜여, 이를 진여를 관찰하는 선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여래를 관찰하는 선인가?

참답게 여래의 자리에 들어가 안의 몸[內身]의 거룩한 지혜의 모양과 삼공(三空)과 삼종락(三種樂)의 행에 들어갔으므로 능히 중생에게 베풀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을 이룬 것이니 대혜여, 이를 여래를 관찰하는 선이라 이름한다."

  

그 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범부들의 행하는 선과
  뜻을 관찰하는 선과
  진여를 관하여 생각하는 선과
  구경인 여래 청정선이여.
  
  마치 해와 달의 모양과
  발두마(鉢頭摩; 붉은 연꽃)와 바다의 모양과
  허공과 불이 다한 모양으로
  수행자가 이렇게 관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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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은 갖가지 모양은
  외도에 떨어지는 법이며,
  또한 성문과 벽지불의
  수행함에 떨어지는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면
  이는 곧 있는 바가 없음[無所有]이니,
  그 때 시방세계에서
  여러 부처님께서 진여의 손으로
  그 수행자의 이마를 만져 주시며
  진여의 모양이 없는 데에 들게 하리라.
  
그 때 거룩하신 대혜보살마하살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께서 열반(涅槃)을 말씀하시니, 열반이란 것은 어떤 법을 열반이라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거룩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열반이란 것은 모든 식(識)의 법체상(法體相)을 굴려서 소멸한 것이며, 모든 견해로 훈습함을 돌이켰으며, 심(心)과 의(意)와 아리야식(阿梨耶識)의 법상(法相) 훈습을 돌이켰음으로 열반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나와 여러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열반을 말함은 바로 법체(法體)와 경계가 공하다고 하는 것이다.

 

대혜여, 열반이란 것은 안의 몸 거룩한 지혜로 수행할 경계인 것이며, 유무법(有無法)을 허망하게 분별함을 떠난 것이다.

 

대혜여, 어찌하여 항상됨[常]이 아니라 하는가? 자기 모양과 같은 모양인 분별법을 떠난 것을 말함이니, 그러므로 항상됨이 아니다.

 

대혜여, 어찌하여 단멸(斷滅)이 아니라 하는가?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일체 성인이 안의 몸으로 증득함을 말함이니, 그러므로 단멸이 아니다.

 

대혜여, 반열반(般涅槃)이란 것은 죽음도 아니요, 멸함도 아니다.

 

대혜여, 만약 반열반이 죽음의 법이라면 마땅히 삶의 속박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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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혜여, 만약 반열반이 멸하는 법이라면 마땅히 유위법(有爲法)에 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대혜여, 반열반이란 것은 죽음도 아니며, 멸함도 아니요, 참다운 수행자가 귀의할 바이다.

 

대혜여, 열반이라 말함은 가히 취할 바도 아니고 가히 버릴 바도 아니요, 이곳도 아니고 저곳도 아니요, 단멸도 아니고 항상됨도 아니요, 하나의 뜻도 아니고 여러 가지 뜻도 아니니, 그러므로 열반이라 이름함이다.

 

대혜여, 성문(聲聞)의 열반이란 자기 모양과 같은 모양을 관찰하여 모든 법을 깨달으니, 그러므로 성문의 열반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벽지불(辟支佛)의 열반이란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모든 경계를 보니, 항상됨이 없으며[無常], 즐거움이 없으며[無樂], 내가 없고[無我], 깨끗함이 없다[無淨]하여 전도(顚倒)된 상을 내지 않는다. 그리하여 성문과 벽지불은 구경(究竟)이 아닌 곳에서 열반이란 생각을 낸다.

 

대혜여, 나는 그대를 위하여 두 법체상(法體相)을 말하리니, 무엇이 둘인가? 첫째는 언설(言說)에 집착하는 체상(體相)이요, 둘째는 세상일에 집착하는 체상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언설에 집착하는 체상인가? 끝없는 예로부터 언설의 희론에 집착하고 훈습하여 생긴 것이다.

 

대혜여, 어떤 것이 세상일에 집착하는 체상인가? 이는 오직 이 자심(自心)임을 여실히 알지 못하고 바깥 경계를 본 것이다.

 

대혜여, 여러 보살마하살이 두 가지 원력(願力)으로 주지(住持)함에 의하여 부처님·여래·응공·정변지께 정례(頂禮)하고서 의심된 일을 묻는다.

 

대혜여, 어떤 것이 두 가지 원력으로 주지함인가? 첫째는 삼매(三昧)·삼마발제(三摩跋提)에 의지하여 주지함이요, 둘째는 온 몸이 낙(樂)을 얻음이니, 부처님 여래의 손으로 그의 이마를 만져 주심을 받아 주지하는 힘을 얻는 것이다.

 

대혜여, 보살마하살이 초지(初地)에 머물러 부처님의 주지하는 힘을 받으므로 이 보살의 대승광명삼매(大乘光明三昧)에 들고나면, 그 때 시방세계의 여러 부처님·여래·응공·정변지께서 보살에게 주지하는 힘을 주시므로 몸과 입과 뜻을 나타내 보인다.

 

대혜여, 금강장(金剛藏)보살마하살 그밖에 이와 같은 공덕의 모양을 성취한 보살마하살 같은 이들이다.

 

대혜여, 이와 같은 보살마하살은 초지에 머물면서 삼매·삼마발제의 힘으로 주지(住持)함과 백천만억 겁(劫) 동안 닦아 모은 선근(善根)의 힘으로써 차례로 참답게 알아 모든 지위에서 대치(對治)하는 법상(法相)을 성취하니, 그 보살마하살은 법운지(法雲地)에 이르러서 큰 보배 연꽃 궁전의 사자(師子)자리에 앉아 있을 것이며, 동류인 보살마하살의 권속들도 둘러 모시는데, 보관(寶冠)과 영락(瓔珞)으로 그의 몸을 장엄한 것이 염부단금(閻浮檀金 : 閻浮樹의 森林에서 흐르는 강에서 산출하는 砂金)과 해와 달의 광명과 같고, 연꽃의 빛보다 수승하다. 그 때 시방세계의 여러 부처님께서 각기 그의 손으로 멀리 연꽃 자리에 있는 보살마하살의 이마를 만져 주시리니, 이는 자재왕(自在王)과 제석왕(帝釋王)과 전륜왕(轉輪王)이 그 태자의 정수리에 물 부어 왕위를 전수함을 얻은 것과 같은 것이다.

 

대혜여, 저 지위를 받은 보살과 그 권속인 보살마하살은 부처님의 손으로 그 이마를 만져 주심으로 온 몸에 낙(樂)을 얻으니, 그러므로 보살의 이마를 만져서 주지하는 힘을 얻는다고 말함이다. 대혜여, 이를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의 두 가지 주지하는 힘이라 한다.

 

대혜여, 보살마하살이 이 두 가지 주지하는 힘을 의지하므로 능히 일체 여래의 몸을 관찰한다.

 

대혜여, 만약 이 두 가지 주지하는 힘이 없다면, 부처님·여래를 뵙지 못할 것이다.

 

대혜여, 만약 보살마하살이 이 두 가지 주지하는 힘을 떠나서 능히 설법한다면, 어리석은 범부도 또한 마땅히 설법하리니, 무슨 까닭인가? 이른바 부처님의 주지하는 힘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혜여, 여래의 주지(住持)하는 힘에 의지하므로 산하(山河)와 석벽과 풀과 나무와 숲과 또한 여러 가지 종류의 성읍과 취락과 궁전과 집들이 모두 능히 설법하는 소리를 낼 것이며, 저절로 풍류 소리가 날 것인데, 대혜여, 어찌 하물며 마음이 있는 귀머거리와 장님과 벙어리와 한량없는 중생들이 모든 고뇌(苦惱)를 떠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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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혜여, 여래의 주지하시는 힘으로 한량없이 중생을 이익 되게 하고 안락하게 한다."

 

대혜보살은 부처님께 다시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보살마하살이 삼매·삼마발제(三摩跋提)에 들어감과 여러 지위에 들어갈 때 부처님·여래·응공·정변지께서 주지하는 힘을 주십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마업(魔業)과 번뇌와 산란심(散亂心)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고, 성문의 선정(禪定)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며, 안의 몸으로 여래의 지위를 증득하기 위한 것이고, 안의 몸으로 법을 증득하는 것을 증장(增長)하기 위함이다.

 

대혜여, 그러므로 여러 부처님·여래·응공·정변지께서 보살들을 위하여 주지하는 힘을 지어 주시는 것이다. 대혜여, 만약 여래가 보살을 위하여 주지하는 힘을 지어 주지 않는다면 외도와 성문과 벽지불과 마사(魔事)에 떨어질 것이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할 것이니, 그러므로 부처님·여래·응공·정변지께서는 큰 자비로 여러 보살을 거두어 주시는 것이다."

 

그 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보살은 자신의 본원력(本願力)이
  청정함에 의지하여
  삼매에 들고 지위를 받는데,
  
  초지(初地)에서 10지(地)에 이르는 동안
  인중존(人中尊)이신 부처님의 신력으로
  주지함을 지어 주셨네.

 

 

 

 

출처 : 출리심 보리심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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