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 바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녹야원에 계셨다.
그 때 부처님께서 5 비구(빤짜왓기)라는 다섯 수행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라고 부르셨고 다섯 수행자들은 "예, 세존이시여!"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 몸이 내가 아니다.
내가 아니기 때문에 이 몸이 나를 괴롭힌다.
그 뿐만 아니라,
'나의 몸이여, 이렇게 좋은 것만 되어지어다.'
'나의 몸이여, 이렇게 나쁜 것은 되어지지 말지어다.' 라고
계획하고 준비시키고 명령할 수도 없다.
비구들이여! 몸이 내가 아니다.
만약 몸이 나 라고 할 것 같으면
이 몸이 나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나의 관념이여, 이렇게 (좋게) 되어지어다.'
'나의 관념이여, 이렇게 (나쁘게) 되지 말지어다.' 라고
관념에게 계획하고 준비시키고 명령 내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느낌이 내가 아니다.
내가 아니기 때문에 느낌이 나를 괴롭힌다.
그 뿐만 아니라,
'나의 느낌이여, 이렇게 좋은 것만 되어지어다.'
'나의 느낌이여, 이렇게 나쁜 것은 되어지지 말지어다.' 라고
계획하고 준비시키고 명령할 수도 없다.
비구들이여!
관념이 내가 아니다.
만약 느낌이 나 라고 할 것 같으면
이 느낌이 나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나의 느낌이여, 이렇게 (좋게) 되어지어다.'
'나의 느낌이여, 이렇게 (나쁘게) 되지 말지어다.' 라고
느낌에게 계획하고 준비시키고 명령 내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관념이 내가 아니다.
내가 아니기 때문에 관념이 나를 괴롭힌다.
그 뿐만 아니라,
'나의 관념이여 이렇게 되어지어다.'
'나의 관념이여 이렇게 되어지지 말지어다.' 라고
계획하고 준비시키고 명령할 수도 없다.
비구들이여!
관념이 내가 아니다.
만약 관념이 나 라고 할 것 같으면
관념이 나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나의 관념이여, 이렇게 (좋게) 되어지어다.'
'나의 관념이여, 이렇게 (나쁘게) 되지 말지어다.' 라고
관념에게 계획하고 준비시키고 명령 내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관념이 내가 아니다.
만약 관념이 나 라고 할 것 같으면
이 관념이 나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나의 관념이여, 이렇게 (좋게) 되어지어다.'
'나의 관념이여, 이렇게 (나쁘게) 되지 말지어다.' 라고
관념에게 계획하고 준비시키고 명령 내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정신적인 의도가 내가 아니다.
내가 아니기 때문에 정신적인 의도가 나를 괴롭힌다.
그 뿐만 아니라,
'나의 정신적인 의도여 이렇게 좋은 것만 되어지어다.'
'나의 정신적인 의도여 이렇게 나쁜 것은 되어지지 말지어다.' 라고
계획하고 준비시키고 명령할 수도 없다.
비구들이여!
정신적인 의도가 내가 아니다.
만약 정신적인 의도가 나 라고 할 것 같으면
정신적인 의도가 나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나의 정신적인 의도여, 이렇게 (좋게) 되어지어다.'
'나의 정신적인 의도여, 이렇게 (나쁘게) 되지 말지어다.' 라고
정신적인 의도에게 계획하고 준비시키고 명령 내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인식 작용이 내가 아니다.
내가 아니기 때문에 인식 작용이 나를 괴롭힌다.
그 뿐만 아니라,
'나의 인식 작용이여 이렇게 좋은 것만 되어지어다.'
'나의 인식 작용이여 이렇게 나쁜 것은 되어지지 말지어다.' 라고
계획하고 준비시키고 명령할 수도 없다.
비구들이여!
인식 작용이 내가 아니다.
만약 인식 작용이 나 라고 할 것 같으면
인식 작용이 나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나의 인식 작용이여, 이렇게 (좋게) 되어지어다.'
'나의 인식 작용이여, 이렇게 (나쁘게) 되지 말지어다.' 라고
인식 작용에게 계획하고 준비시키고 명령 내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 진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몸이 영원한가? 영원하지 아니한가?"
'영원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영원하지 않은 진리가 고통인가? 행복인가?"
'고통입니다. 세존이시여.'
"영원하지 않고, 고통이며, 변하는 성품을 '나의 것' '나' 라고 집착하기에 적당한가?"
'적당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을 '나'라고 생각해서 교만을 드높이는 것이 적당한가?"
'적당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을 '나'라고 생각하여 집착하는 것이 적당한가?"
'적당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느낌이 영원한가? 영원하지 아니한가?"
'영원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영원하지 않은 진리가 고통인가? 행복인가?"
'고통입니다. 세존이시여.'
"영원하지 않고, 고통이며, 변하는 성품을 '나의 것' '나' 라고 집착하기에 적당한가?"
'적당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을 '나'라고 생각해서 교만을 드높이는 것이 적당한가?"
'적당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을 '나'라고 생각하여 집착하는 것이 적당한가?"
'적당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관념이 영원한가? 영원하지 아니한가?"
'영원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영원하지 않은 진리가 고통인가? 행복인가?"
'고통입니다. 세존이시여.'
"영원하지 않고, 고통이며, 변하는 성품을 '나의 것' '나' 라고 집착하기에 적당한가?"
'적당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을 '나'라고 생각해서 교만을 드높이는 것이 적당한가?"
'적당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을 '나'라고 생각하여 집착하는 것이 적당한가?"
'적당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정신적인 의도가 영원한가? 영원하지 아니한가?"
'영원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영원하지 않은 진리가 고통인가? 행복인가?"
'고통입니다. 세존이시여.'
"영원하지 않고, 고통이며, 변하는 성품을 '나의 것' '나' 라고 집착하기에 적당한가?"
'적당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을 '나'라고 생각해서 교만을 드높이는 것이 적당한가?"
'적당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을 '나'라고 생각하여 집착하는 것이 적당한가?"
'적당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인식 작용이 영원한가? 영원하지 아니한가?"
'영원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영원하지 않은 진리가 고통인가? 행복인가?"
'고통입니다. 세존이시여.'
"영원하지 않고, 고통이며, 변하는 성품을 '나의 것' '나' 라고 집착하기에 적당한가?"
'적당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을 '나'라고 생각해서 교만을 드높이는 것이 적당한가?"
'적당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을 '나'라고 생각하여 집착하는 것이 적당한가?"
'적당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나의 것' '나'로 보는 것이 적당하지 않기 때문에
과거·미래·현재의 몸이 있다.
몸 안의 몸이거나 몸밖의 몸이거나,
거친 몸이거나 부드러운 몸이거나,
저속한 몸이거나 고상한 몸이거나,
먼 몸이거나 가까운 몸이거나
이것이 '나의 것'도 '나'도 아니다.
영원하지 않은 고통의 덩어리이며,
변해서 무너지는 이 몸을
있는 대로 보아서 아는 위빠싸나 지혜,
성스러운 도의 지혜로 보아야 한다.
그렇게 이해하도록 수행해야 한다."
이와 같이 '나의 것' '나'로 보는 것이 적당하지 않기 때문에
과거·미래·현재의 느낌이 있다.
몸 안의 느낌이거나 몸밖의 느낌이거나,
거친 느낌이거나 부드러운 느낌이거나,
저속한 느낌이거나 고상한 느낌이거나,
먼 느낌이거나 가까운 느낌이거나
이것이 '나의 것'도 '나'도 아니다.
영원하지 않은 고통의 덩어리이며,
변하고 무너지는 이 느낌을
있는 대로 보아서 아는 위빠싸나 지혜,
성스러운 도의 지혜로 보아야 한다.
그렇게 이해하도록 수행해야 한다."
이와 같이 '나의 것' '나'로 보는 것이 적당하지 않기 때문에
과거·미래·현재의 관념이 있다.
몸 안의 관념이거나 몸밖의 관념이거나,
거친 관념이거나 부드러운 관념이거나,
저속한 관념이거나 고상한 관념이거나,
먼 관념이거나 가까운 관념이거나
이것이 '나의 것'도 '나'도 아니다.
영원하지 않은 고통의 덩어리이며,
변해서 무너지는 이 관념을
있는 대로 보아서 아는 위빠싸나 지혜,
성스러운 도의 지혜로 보아야 한다.
그렇게 이해하도록 수행해야 한다."
이와 같이 '나의 것' '나'로 보는 것이 적당하지 않기 때문에
과거·미래·현재의 정신적인 의도가 있다.
몸 안의 정신적인 의도거나 몸밖의 정신적인 의도거나,
거친 정신적인 의도거나 부드러운 정신적인 의도거나,
저속한 정신적인 의도거나 고상한 정신적인 의도거나,
먼 정신적인 의도거나 가까운 정신적인 의도거나
이것이 '나의 것'도 '나'도 아니다.
영원하지 않은 고통의 덩어리이며,
변해서 무너지는 이 정신적인 의도를
있는 대로 보아서 아는 위빠싸나 지혜,
성스러운 도의 지혜로 보아야 한다.
그렇게 이해하도록 수행해야 한다."
이와 같이 '나의 것' '나'로 보는 것이 적당하지 않기 때문에
과거·미래·현재의 정신적인 인식이 있다.
몸 안의 인식이거나 몸밖의 인식이거나,
거친 인식이거나 부드러운 인식이거나,
저속한 인식이거나 고상한 인식이거나,
먼 인식이거나 가까운 인식이거나
이것이 '나의 것'도 '나'도 아니다.
영원하지 않은 고통의 덩어리이며,
변해서 무너지는 이 인식을
있는 대로 보아서 아는 위빠싸나 지혜,
성스러운 도의 지혜로 보아야 한다.
그렇게 이해하도록 수행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바른 수행자는
몸을 좋아하지도 않고 즐거워하지도 않으며 혐오한다.
느낌을 좋아하지 않고 즐거워하지도 않으며 혐오한다.
관념을 좋아하지 않고 즐거워하지도 않으며 혐오한다.
정신적인 의도도 좋아하지 않고 즐거워하지도 않으며 혐오한다.
인식 작용도 좋아하지 않고 즐거워하지도 않으며 혐오한다.
이와 같이 몸(色)·느낌(受)·관념(想)·의도(行)·인식(識)에 무상·고·무아의 진리를 바르게 보고 즐거워하지 않고 좋아하지도 않으며 혐오하여,
몸과 마음에 집착이 없는 성스러운 도의 지혜가 생긴다.
집착이 없는 성스러운 도는 지혜는 번뇌에서 벗어나게 한다.
번뇌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번뇌에서 벗어났다는 과의 지혜가 생겨난다.
새로 태어날 일은 끝났다.
관찰함이라는 높은 위빠싸나(여래선)를 실천하여 마쳤다.
이 일을 위해서 달리 해야할 일은 없다.
여래도 이렇게 정진해서 알았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무아경'을 다섯 비구가 아라한이 되도록 설하셨다.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다섯 수행자들의 마음에 기쁨과 환희심이 넘쳐 즐거운 마음으로 '싸-두 싸-두 싸-두' 라고 칭송하였다.
특별히 기억할 것은 이 '무아경'을 설하는 동안 다섯 수행자들의 마음이 어느 한 가지에도 집착되지 아니하여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는 아라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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