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에서 간화선이 처음으로 수용된 것은 보조국사 지눌(知訥:1153∼1210)에 의해서였다.
원래 간화선 자체가 지눌보다 두 세대 정도 앞서는 남송의 대혜종고(大慧宗고:1088∼1163)에 의해서 처음 체계가 잡힌 것이었으므로 한국의 간화선 수용은 그렇게 시기적으로 늦었다고는 할 수 없다. 중국에서도 간화선이 일반화된 것은 원나라 이후이므로 지눌의 간화선 수용은 오히려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지눌의 간화선 수용은 대혜종고나 그 제자들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지눌 스스로 깨달음을 추구하던 과정에서 얻게 된 것이었다. 지눌의 비문에 의하면 지눌이 십여 년 간의 수행에도 불구하고 무언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대혜어록》을 보다가 “선은 고요한 곳에 있지 않고 또한 소란한 곳에 있지도 않다.
일상의 인연에 따르는 곳에 있지도 않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그러므로 먼저 고요한 곳, 소란한 곳, 일상의 인연에 따르는 곳,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을 버리지 않고 참선(參禪)해야 홀연히 눈이 열리고 모든 것이 집안의 일임을 알게 되리라.”라는 구절을 보고서 마음의 응어리가 풀어지면서 편안함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지눌은 대혜의 어록을 중요하게 여기며 수행에 활용하였고, 이 책의 내용을 통해 간화선을 이해하고 이를 주요한 수행법으로 확립하고 제자들을 가르침에 있어서도 중요하게 사용하였다.
하지만 지눌이 간화선만을 수행법으로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주요한 선수행법은 3문 즉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의 3가지 방법이 있는데, 이 중 마지막의 간화(경절)문이 곧 간화선을 주장한 것이고 앞의 2문은 간화선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수행법이었다.
원돈신해문은 중생인 우리 범부들의 마음이 곧 부처와 같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고, 성적등지문은 그러한 마음을 지키고 실천하기 위하여 정(定)과 혜(慧)를 쌍수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수행법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것으로 지눌의 초기 저술들에서는 이러한 수행법에 의거하여 ‘자신의 본래 깨끗한 마음을 믿고 깨닫고서 그 성품대로 선(禪)을 닦는’ 것을 선수행의 요체로 거듭하여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이 두 가지 수행법은 바로 지눌이 주장한 돈오점수(頓悟漸修) 사상의 핵심이었다. 원돈신해문에 의한 깨달음이 곧 돈오(頓悟)이고 성적등지문에 의한 정혜쌍수의 실천이 곧 점수(漸修)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적등지문과 원돈신해문의 수행법 그리고 돈오점수의 사상은 지눌이 간화선을 접하기 이전에 제시한 사상이었다.
이 수행법들은 주로 육조 혜능의 《단경》과 이통현의 《화엄론》을 보고서 확립한 사상인데 지눌이 이 책들을 접한 것은 대혜의 어록을 접하기 훨씬 이전이었다. 지눌이 대혜의 어록을 통해 새롭게 접한 간화선의 수행법은 이러한 수행법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어떠한 이론도 거부하고 오로지 화두의 참구에 의해서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간화선의 입장에서 볼 때 중생인 자신의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라는 주장조차도 알음알이에 불과한 것으로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서는 완전한 깨달음을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간화선의 입장에서 볼 때는 원돈신해문이나 성적등지문의 가르침이라는 것도 부정되어야 할 내용이었던 것이다. 지눌도 이 점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간화선을 수용한 후기의 저술에서는 원돈신해문과 성적등지문의 한계를 지적하고 간화문의 방법이 보다 완전한 방법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지눌 최만년의 저술로 그의 사상을 총정리하고 있는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에서는 성적등지문과 원돈신해문의 내용을 설명한 뒤 이러한 수행법보다 화두를 통해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 간화선의 경절문 혹은 무심합도문(無心合道門)이 보다 완전한 수행법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눌은 간화선의 우월성을 인정하면서도 원돈신해문과 성적등지문의 수행법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법집절요》에서 성적등지문과 원돈신해문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그 단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법집절요》에서는 성적등지문의 내용을 수상정혜(隨相定慧)와 자성정혜(自性定慧)로 나누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고, 원돈신해문에 대해서도 마음의 구조와 작용을 여러 개념을 이용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화엄의 이론과 비교하기까지 하고 있다.
간화선의 수행법에 근거하여 성적등지문과 원돈신해문의 수행법을 부정하는 입장이었다면 그렇게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계는 있지만 성적등지문과 원돈신해문의 수행법이 일정한 의미를 갖는 것이고 후학들에게 제시할 만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자세하게 설명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지눌에게 있어서 간화선의 수행법과 성적등지문-원돈신해문의 수행법은 서로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이었을까. 그의 저술에 의하면 지눌은 이 수행법들의 차이를 우선 근기상의 차이로 인식하였던 것 같다. 간화선법은 최상근기의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원돈신해문은 초심(初心)의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에 의하면 이 열 가지 알음알이의 병도 진성연기(眞性緣起)로서 취하고 버릴 필요가 없지만 (거기에는) 아직도 말로 가리키고, 지시하고, 듣고 헤아리는 바가 있으므로 처음 발심한 공부인들도 믿고 배워서 행할 수가 있다.
(그러나) 경절문(徑截門)은 직접 비밀한 가르침을 전함에 있어 말도 없고 가리키는 것도 없어 듣고 헤아릴 수가 없으므로 법계가 막힘 없이 연기한다는 이치조차도 곧 말하고 이해하는 장애(說解之碍)가 된다. 그러니 가장 뛰어난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밝게 알고 완전하게 알게 되겠는가. (《간화결의론》)
이 내용만으로 보면 원돈신해문과 간화경절문은 수행자의 기질에 따라 완전히 구분되는 것으로 보인다.(성적등지문에 대하여 별도로 언급되지 않는 것은 성적등지문이 원돈신해문에 의한 頓悟에 자연히 따르는 漸修의 방법을 제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원돈신해문과 성적등지문은 서로 구분되는 별개의 수행법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수행법인 것이다.) 이 경우 당연히 간화선의 경절문이 완전한 가르침이고 원돈신해문은 불완전한 가르침이 된다. 그리고 근기에 따른 것이라면 두 가르침은 교통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눌은 두 근기를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구분한 것 같지는 않다. 원돈신해문에 의해 깨달음을 얻은 수행자가 다시 경절문의 방편 즉 간화선에 의해 완전한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제시한 법문은 모두 언어에 의하여 이해함으로써 깨달아 들어가는 사람을 위하여 (깨달음의 대상인) 법(法)에 수연(隨緣)과 불변(不變)의 두 가지 뜻이 있고 (깨닫는 주체인) 사람(人)에 돈오(頓悟)와 점수(漸修)의 두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을 자세하게 설명한 것이다. (중략)
이와 같이 이해하면 본(本)과 말(末)이 분명해져서 사람이 분명하게 이해하여 불완전한 가르침에서 완전한 가르침으로 나아가 빨리 보리(菩提)를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언어에 의하여 이해하기만 하고 몸을 돌리는 길(轉身之路)을 알지 못한다면 하루 종일 관찰하여도 오히려 알음알이(知解)에 묶이고 편안히 쉴 수가 없다.
그래서 다시 지금 나의 문하에 언어를 떠나 깨달음에 들어가면서 알음알이를 단박에 없앨 수 있는 사람을 위하여 (중략) 조사들이 경절방편(=화두)으로 학자들을 인도한 말들을 뒤에 제시하여 참선하는 뛰어난 사람들이 몸을 벗어나는 한 가닥 활로가 있음을 알게 하고자 한다. (《법집절요》)
이 문장에서도 ‘언어에 의하여 이해함으로써 깨달아 들어가는 사람’과 ‘언어를 떠나 깨달음에 들어가면서 알음알이(知解)를 단박에 없앨 수 있는 사람’을 구분하고 있지만 실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언어에 의하여 깨달은 사람들에게 ‘몸을 돌리는 길’을 찾을 것을 촉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경절문에 의한 깨달음이 오직 최상근기의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보다 못한 근기이지만 원돈신해문(과 성적등지문)의 가르침을 통해 일정한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이 달성할 수 있는 가르침으로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원돈신해문과 간화경절문이 연결될 소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간화문이 오로지 별도의 최상근기의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두 가지 가르침이 함께 제시되기 힘들지만 원돈신해문에 의하여 일정한 깨달음에 이른 사람은 곧 간화문에 의해 완전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지눌이 간화문을 다른 가르침과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다고 이해되는 것이다.
더욱이 지눌은 현실에 있어서 곧바로 간화문에 의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 많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에1) 현실에 존재하는 보통 사람들의 근기에 맞춰 깨달음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원돈신해문(과 성적등지문)의 가르침이 간화경절문만큼 완전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유용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지눌이 말년까지도 그렇게 자세하게 설명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간화선을 완전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면서도 현실에 입각하여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원돈신해문 등의 가르침을 함께 선양한 지눌의 입장은 대단히 특징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불교 교학의 발전과정을 보면 대승불교와 선종의 등장에서 보듯 새로 대두한 학파들은 기존의 가르침을 근기가 낮은 사람들을 위한 방편적이고 불완전한 가르침이라고 폄하하면서 자신들의 가르침만이 참된 가르침이고 이러한 가르침은 근기가 뛰어난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오직 최상근기의 사람들을 위한 가르침만이 옳은 가르침이기 때문에 다른 가르침은 부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눌도 선종에 상대되는 교학불교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초기의 저술에서부터 교학불교의 한계를 지적하고 선종의 가르침에 따를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유독 간화선의 문제에 있어서만은 그 가르침이 가장 뛰어나고 완전한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간화선만에 의한 수행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보통 근기의 사람들이 수행하는 원돈신해문(과 성적등지문)의 방법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지눌이 왜 이러한 태도를 취하였을까. 그의 간화선에 대한 이해와 실천이 아직 충분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다양한 수행의 길을 추구해보고 많은 후학들을 지도한 선사로서 간화선이라는 가르침 자체가 모든 사람에게 제시할 수 있기 난해한 따라서 일반화시키기 어려운 가르침이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보다 타당한 이해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