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선
화두선은 선종의 수행법 가운데 하나이다. 선종의 수행법은 크게 묵조선과 화두선으로 나누어진다. 묵조란 말은 고요히 비추어본다는 뜻으로 묵조선은 내 마음을 고요히 비추어보아 내 마음의 당체를 확연히 깨우치는 것을 강조한다.
화두란 사전적인 의미로는 말의 실마리 내지는 화제 등의 의미이지만 선종에서는 수행의 주제 거리를 가리킨다. 화두선에서는 하나의 주제를 집중적으로 의심하여 그것을 풀어냄으로써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법이다. 화두의 내용은 주로 전대 선사들의 기이한 언행들이다. 묵조선 수행법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기존의 불교의 수행법과 상통하는 점이 많다.
이에 비해 화두선 수행법은 이전의 불교적 전통에는 전혀 없던 새로운 수행법으로서 중국의 선사들이 새로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화두선의 원리와 특징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화두선의 원리를 말하기 전에 먼저 화두선을 하기 위하여 필요한 세 가지 조건을 살펴보자. 그것은 신심(信心), 의심(疑心), 분심(憤心)이다. 화두를 통하여 깨치려면 반드시 이 세 가지가 필요하다. 먼저 화두선의 전제조건은 신심이라고 할 수 있다.
외양상으로 볼 때는 화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심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이 신심이 더욱 본질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화두선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일단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 화두선이 굉장한 수행법이고 이 화두선을 통하여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신심이 저변에 깔려있다. 이러한 신심이 없으면 처음부터 화두선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심이 없이 화두를 보면 그것은 단순한 언어의 유희나 수수께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신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 된다. 화두선의 두 번째 관건은 의심이다. 예로부터 선사들은 화두선의 가장 큰 관건을 의심이라고 보았다. 의심 덩어리가 커야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도 있다. 어떤 사람이 조주선사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냐고 물었다. 조주는 '無'라고 답하였다. 원래 불교에서는 위로 부처로부터 아래로 개미 새끼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조주는 '無'라고 답하였을까? 이것이 바로 선종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애용하였던 무자화두(無字話頭)이다. 이것을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면 이미 화두선으로부터 한참 벗어난 것이다. 선가에서는 머리로 이해하여 답을 끌어내려고 하는 것을 가장 큰 금기로 삼는다. 머리로 푸는 길이 막힌 상태에서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가슴으로 온 마음을 모아 의심하는 것이다. 마치 닭이 알을 품듯이 고양이가 쥐를 노리듯이 온전히 화두에 대한 의심으로 일념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바로 분심이다.
분심이란 발분하는 마음이다. 한 가지 의심이 가슴에 사무치기 위해서는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하다. 그냥 이런 저런 잡생각 다 하고 남는 시간에 간간이 의심해서는 몇십 년을 해도 깨칠 수가 없다. 반드시 이 의심을 풀고야 말겠다는 사생결단의 분심이 있을 때 비로소 모든 것을 제치고 오로지 화두에 대한 의심으로 사무칠 수 있고 이렇게 화두에 대한 의심이 사무쳐야 밥을 먹으나 길을 걸으나 항상 화두를 잡을 수가 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잠을 자나 깨어 있으나 항상 화두만 잡고 있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이렇게 신심, 의심, 분심이 서로 조화가 되어 행주좌와 오매지간(行走坐臥 寤寐之間)에 오직 화두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을 때 어느 순간 화두가 풀리면서 깨치게 된다. 그 원리는 이렇다. 우리는 보통 일상적인 이미지와 관념의 세계에 살고 있으면서 이 이미지와 관념의 틀을 통해 비치는 세계가 실상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미지와 관념은 우리 의식의 표피에 불과하고 그것을 통해 비치는 세계 또한 표피의 세계에 불과하다.
이 표피의 세계 너머에 보다 근원적인 세계가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에 이를 수가 없다. 그러다가 한 가지 화두에만 온전히 몰두할 수 있을 때 평소 여러 가지 잡다한 이미지와 관념들에 의해 분산되어 있던 마음이 오직 한 가지 의문에 집중된다. 화두는 대개가 자아와 세계의 근원에 대한 의문이다. 한 가지 화두에 완전히 몰두할 때 수행자는 자신도 모르게 점차 표피의 세계를 뚫고 근원적인 마음의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를 통하여 오랫동안 잡고 있던 화두마저 놓여지면서 이미지와 관념에 가려 보지 못하던 근원의 세계를 알게 된다. 이 세계는 어떠한 이미지나 관념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세계이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의 세계이다. 화두선은 단도직입적이다. 대부분의 수행법들은 수행 과정에 여러 단계가 있고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도 여러 단계가 있다.
그리고 그 과정 중에 여러 가지 신비적인 체험을 거친다. 그러나 화두선은 곧바로 우리의 마음의 근원을 깨우칠 것을 강조한다. 화두선에서는 수행 중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초상 현상이나 심신의 변화에 대해 별로 중시하지 않는다. 요가의 황홀경 내지는 삼매경이나 단학의 태식이니 출신 등도 화두선에서는 지엽 말단의 자질구레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화두선의 깨달음의 목표는 생사의 근원이자 모든 삼라만상의 근원인 그것을 곧바로 체인하는 데 있다. 그러나 비파사나의 깨달음이 그러하듯이 화두선의 깨달음 또한 집단주관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요가의 깨달음이나 수피즘의 깨달음이나 기독교의 영성 체험 또한 마찬가지이다. 각기 집단주관의 엷은 베일을 지니고 있다. 요가의 삼매와 선의 깨달음을 비교해보자. 이 둘은 공통점이 많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서로 다른 세계이다. 다른 깨달음 또한 마찬가지이다.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초월적 감각의 열림, 지고한 정서적 고양, 심오한 우주적 통찰력의 열림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보통 사람들은 체험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문화권에 따라 미세한 차이가 있다. 선사들의 깨달음의 양상과 요가 수행자들의 깨달음의 양상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다른 깨달음들도 마찬가지이다. 깨달음의 양상은 왜 이렇게 다양할까? 그것은 문화권에 따른 집단주관의 틀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깨달음이 어떠한 형태로든 표현되었을 때에는 자신이 속한 문화권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깨달음 그 자체는 어떠한 언어와 형상을 넘어서는 세계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요가, 단학, 비파사나, 참선, 수피즘, 묵상 관상 등의 수행법을 통하여 얻은 깨달음이 밖으로 표현될 때는 제각기 자신의 문화권의 틀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지만 그 속의 내용은 한결같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그렇지가 않다.
밖으로 표현될 때에만 집단주관의 틀이 작용할 뿐만 아니라 깨달음의 체험 자체가 집단주관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인간은 어떠한 궁극적인 체험을 하여도 주관의 틀을 완전히 벗어난 절대 객관의 세계를 인식할 수 없다. 이것은 결코 기존의 깨달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한 차원 높은 패러다임을 제시하기 위한 전제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