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의 삼보하옵고..
승만경은 재가의 여성 불자인 승만 부인이 설법하고 수기를 받는다는 내용으로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을 저본으로 하였으며 여래장사상을 설하는 경전으로서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 경전입니다.
함께 읽으면서 재가 불자도 성불할 수 있다는 확신과 그를 위한 수행이 함께 이루어질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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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 여래의 진실한 공덕 [如來眞實義功德章]
부모님의 편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舍衛國)의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 머무르고 계셨다. 그때 파사익(波斯匿,Prasenajit)왕과 말리(末利)부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서로 함께 말하였다.
“승만은 우리 딸이지만,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근본이 뛰어나서 금방 쉽게 깨달을 것입니다. 부처님을 뵈옵기만 한다면, 반드시 가르침을 잘 이해하여 마음에 의심이 없는 경지를 얻을 것입니다. 마땅한 때에 편지를 보내서 그녀의 보리심[道意]을 발하게 합시다.”
부인이 사뢰어 말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왕과 부인은 승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여래의 한량없는 공덕을 간단히 찬탄하였다. 그리고는 곧 궁녀를 보냈는데 그 이름이 전제라(Chandra)였다. 그 사자(使者)는 편지를 받잡고 아유사국에 이르러서 그 궁전 안에 들어가 삼가 승만에게 드렸다.
승만 부인의 귀의
승만 부인이 편지를 받고 기뻐하며 정수리까지 올리며 읽고 외우며 받아 지녀서 희유한 마음을 내고서, 전제라에게 게송으로 말씀하였다.
내가 듣건대, ‘부처님의 음성은
세상에는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 하니
그 말씀이 참으로 진실하다면
마땅히 공양을 닦아야 하리.
우러러 생각건대, 부처님 세존께서
널리 세상 위해 출현하셨다면
또 마땅히 불쌍히 여기셔서
나로 하여금 뵈올 수 있게 하시리.
이렇게 생각하자마자, 부처님께서 공중에서 널리 청정한 광명을 비추시면서 비할 데 없는 몸을 나타내 보이셨다. 승만 부인 및 그녀의 권속(眷屬)들이 그들의 얼굴과 머리를 부처님 발에 대면서 예배하고, 모두가 청정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진실한 공덕을 찬탄하였다.
승만 부인의 찬탄
여래의 묘한 모습은
세상에서 더불어 같이할 이 없으며
비할 수 없으며 헤아릴 수 없으니
이제 공경하며 예배합니다.
여래의 모습이 다함없고
지혜 역시 또 그와 같으며
모든 진리는 영원하므로
저희가 귀의합니다.
마음의 허물과
몸으로 짓는 네 가지 악을 항복 받았으며
그들이 항복시킬 수 없는 지위에 도달하신
진리의 왕[法王]에게 예배하나이다.
모든 알아야 할 것은 다 아시고
지혜의 몸이 자재하여
모든 진리를 받아 지니셨으므로
이제 예경하나이다.
헤아림을 넘어서 계신 님께 예경하옵고
비유할 데가 없으신 님께 예경하오며
가이없는 진리에 예경하옵고
생각하기 어려운 님께 예경하나이다.
불쌍히 여기셔서 저희를 가호 하시고
진리의 종자[法種]가 자라게 하소서
이 세상부터 다음 세상까지
부처님께서 언제나 거두어 주시기를 원하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 그대를 편안케 한 지 이미 오래이니
전생에 이미 깨달음을 얻었으며
이제 다시 그대를 또 거두어 주노니
미래의 생에서도 역시 그러하리라.
다시 승만 부인이 사뢰었다.
제가 이미 공덕을 지었으며
현재 및 다른 세상에서도
이러한 모든 선의 근본을 심겠사오니
오직 저를 거두어 주시는 모습을 뵙고자 하나이다.
부처님의 예언
그대 승만 부인 및 그녀의 모든 권속들이 얼굴과 머리를 부처님 발에 대면서 예불하자, 부처님은 대중들 가운데서 곧 예언[受記]하셨다.
“그대는 여래의 진실한 공덕을 찬탄하였다. 이러한 선근으로 말미암아서 마땅히 한량없는 아승지겁을 지낸 뒤 신들이나 사람 중에서 자재한 왕이 될 것이다. 모든 태어나는 곳마다 언제나 나를 보고 직접[現前] 찬탄하는 것이 지금과 같아서 다름이 없을 것이다. 마땅히 다시 한량없는 아승지의 부처님을 공양하기를 2만 아승지겁을 지나서 부처가 될 것이니, 이름을 보광(普光) 여래, 응공, 정변지라고 할 것이다. 그 부처님 국토에는 모든 나쁜 갈래[惡趣]와 늙음, 병, 쇠퇴, 뜻에 맞지 않는 괴로움이 없으며, 또한 선하지 못한 악업의 이름도 없을 것이다. 그 나라의 중생들은 모습, 힘, 수명, 다섯 가지 욕망, 모든 소유물들에 있어서 쾌락 하기가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보다도 더 뛰어날 것이다. 그 나라의 모든 중생은 한결같이 대승에 머무를 것이며, 선근을 닦는 모든 중생들이 그 나라에 모일 것이다.”
승만 부인이 수기를 얻을 때, 그 곳에 있던 한량없는 중생과 모든 신과 사람들이 그 나라에 태어나기를 원하였으므로 세존께서 모두에게 예언하셨다.
“전부 마땅히 왕생할 것이다.”
제2. 열 가지 큰 서원[十大受章]
승만 부인의 열 가지 큰 서원
그 때 승만 부인이 수기를 들은 뒤에, 합장하여 열 가지 큰 서원[大受]를 세웠다.
“첫째,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받아 지닌 계율에 대하여 범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둘째,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모든 어른들에 대하여 오만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셋째,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모든 중생에 대하여 화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넷째,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다른 사람의 신체 및 소유물에 대하여 질투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다섯째,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자신을 위해서 재물을 쌓아 두지 않으며 전부 가난한 중생들을 성숙시키는 데 쓰겠습니다.
일곱째,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자신을 위해서 사섭법(四攝法)을 행하지 않겠사오니, 모든 중생을 위해서입니다. 애착하지 않는 마음, 싫어하거나 만족하지 않는 마음, 걸림 없는 마음으로 중생을 거두어들이겠습니다.
여덟째,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부모가 안 계신 아이, 자식이 없는 노인, 죄를 짓고 갇힌 사람, 병든 사람 등 갖가지 고난으로 괴로움에 처한 중생을 보면 마침내 잠시도 외면하지 않으며 반드시 안온케 하겠습니다. 재물로써 이익케하여 모든 고통을 벗어나게 한 뒤에야 외면하겠습니다.
아홉째,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동물을 잡아 기르는 등의 갖가지 올바르지 못한 생활 방편[惡律儀] 및 계를 깨뜨리는 것을 보게 되면 절대로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힘을 얻게 될 때는 어느 곳에서든지 마땅히 잘못을 항복 받아야[折伏] 할 사람에게는 항복 받으며 마땅히 용서해 줄 사람은 용서하겠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때로는 항복하고 벌함으로써 때로는 용서함으로써 가르침을 오래도록 머물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르침이 오래도록 머물게 되면, 신들과 다시 사람들의 몸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늘어나고 나쁜 갈래[惡趣]에 가는 사람은 감소하게 될 것입니다. 능히 여래께서 굴리시는 바 법륜(法輪)에 따라서 부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익을 보기 때문에 구하여 거두어들임을 잠시도 멈추지 않겠습니다.
열째,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여서 마침내 잊지 않겠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가르침을 잊는다는 것은 곧 대승을 잊는 것이 되며, 대승을 잊는다는 것은 곧 바라밀을 잊는 것이 되며, 바라밀을 잊는 것은 대승을 욕구 하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보살이 대승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곧 능히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며, 즐거워하는 바를 따라서 들어가고자 하나 영원히 범부의 경지를 뛰어넘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와 같이 한량없는 큰 잘못을 보며, 또한 미래에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일 보살마하살들의 한량없는 복덕을 보기 때문에 이러한 큰 서원을 세우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증명
“진리의 주인[法王]이신 세존이시여, 저를 위해서 증명하옵소서. 오직 부처님 세존만이 지금 여기서 증명하실 수 있습니다. 모든 중생들은 선근이 약하고 엷어서 어떤 중생은 ‘열 가지 큰 서원을 실천하기는 지극히 어렵다’라는 의심을 일으킬 수도 있으며, 또 어떤 중생들은 오랫동안 올바른 뜻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고 안락을 얻지도 못하고 있다는 의혹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중생들을 안락케 하기 위하여 이제 부처님 앞에서 진실한 서원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제가 이러한 열 가지 큰 서원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제가 이러한 열 가지 큰 서원을 지닐 수 있으며, 말씀드린 것처럼 행할 수 있다면, 이러한 서원으로 말미암아서 대중들 가운데 마땅히 하늘꽃[天花]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하늘의 미묘한 소리가 나게 하소서.”
승만 부인이 이렇게 말했을 때, 허공 중에서 수많은 하늘 꽃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으며 미묘한 소리가 들렸다.
“그렇다, 그렇다! 그대가 설한 바 그대로이니 진실하여 틀림이 없다.”
하늘 꽃을 보고 미묘한 음성을 듣고 나서는, 모든 대중들의 의혹이 모두 제거되었으며, 기뻐함이 한량없어서 원을 발하여 말하였다.
“언제나 승만 부인과 함께 하며, 언제나 함께 법회에 동참하며, 그분이 행하시는 바를 같이하겠습니다.”
세존께서는 모든 대중에게 예언하셨다.
“그대들이 원하는 바와 같이 되리라.”
제3. 세 가지 큰 원[三大願章]
그때 승만 부인이 다시 부처님 앞에서 세 가지 큰 원을 발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러한 진실한 원으로써 한량없으며 가이없는 중생을 안온케 하며, 이러한 선근으로 모든 생(生)에 올바른 가르침의 지혜를 얻겠습니다. 이를 첫 번째 큰 원이라 이름합니다.
제가 올바른 가르침의 지혜를 얻은 뒤에는 싫어하지 않는 마음으로 중생을 위하여 설하겠습니다. 이를 두 번째 큰 원이라 이름합니다.
제가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인 뒤에는 몸, 목숨, 재물을 버리고 올바른 가르침을 보호해 지니겠습니다. 이를 세 번째 큰 원이라 이름합니다.”
그때 세존께서는 곧 증명하셨다.
“승만 부인의 세 가지 큰 서원은, 마치 모든 형체 있는 것이 허공 속에 다 포함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보살들이 세운 갠지스 강의 모래알같이 많은 모든 원 역시 전부 이 세 가지 큰 원 속에 포함된다. 이 세 가지 큰 원은 진실하며 광대한 것이다.”
제4.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攝受正法章]
하나의 큰 원
그때 승만 부인이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저는 이제 다시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을 이어받아 조복(調伏)하는 큰 원이 진실하여 틀림이 없음을 설하고자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승만 부인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설하는 바를 듣겠노라.”
승만 부인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보살이 세운 바 갠지스 강의 모래알만큼 많은 원은 모두 이 하나의 큰 원 속에 포함되는 것이니, 이른바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큰 원입니다.”
부처님께서 승만 부인을 찬탄하셨다.
“훌륭하다, 훌륭하다! 지혜와 방편이 매우 깊고 미묘하니, 그대는 이미 오랫동안 모든 선의 근본을 심었기 때문이다. 내세의 중생 중에도 오래 선근을 심는 자는 능히 그대가 설한 바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가 설하는 바,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은 과거, 미래, 현재의 모든 부처님들이 이미 설하였으니 장차 설할 것이며 이제 설하고 있는 바이며, 나 역시 이제 위없는 깨달음을 얻어서 이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을 항상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내가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을 설함으로써 얻게 되는 공덕은 가이없으니, 왜냐하면 이렇게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에는 큰 공덕이 있으며 큰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의 광대한 뜻
승만 부인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제가 마땅히 부처님의 위신력을 이어받아서 다시금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의 광대한 뜻을 연설하고자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설하도록 하라.”
승만 부인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의 광대한 뜻은 곧 한량이 없으니, 모든 불법을 얻는 것이며 팔만 사천 법문(八萬四千法門)을 거두어들이는 일입니다. 비유하면 겁(劫)이 처음 이루어질 때 널리 큰 구름이 일어나고 온갖 색깔의 비와 갖가지 보배가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 역시 한량없는 복의 과보와 한량없는 선근의 비를 내리게 하는 것입니다.”
큰 수원(水源)의 비유
“세존이시여, 또한 겁이 처음으로 이루어질 때 큰 수원(水源, 大水聚)이 있어서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보배[三千大千世界藏]와 사백억이나 되는 갖가지 세계를 낳은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 역시 대승의 한량없는 세계[無量世藏], 모든 보살의 신통한 힘, 모든 세간의 안온한 쾌락, 모든 세간의 자유자재 및 출세간의 안락을 낳게 하는 것입니다. 겁(劫)이 이루어진 일 등은 신이나 인간이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일이니, 모두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또 대지(大地)가 네 가지 무거운 짐, 즉 대해(大海), 모든 산, 초목, 중생을 짊어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인 선남자(善男子)와 선여인(善女人)도 대지를 건립하여 네 가지 무거운 책임을 능히 짊어지려고 합니다. 저 대지는 비유입니다. 어떤 것이 넷인가 하면, 선지식을 떠난 중생, 가르침을 듣지 않는 중생, 법의 그릇이 아닌 중생들은 인천(人天)의 선근(人天乘)으로서 성숙시키고, 성문을 구하는 자는 성문의 가르침[聲覺乘]을 주고, 연각을 구하는 자는 연각의 가르침[緣覺乘]을 주고, 대승을 구하는 자는 대승의 가르침[大乘]을 줍니다. 이를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이름합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인 선남자와 선여인은 대지를 건립하여 네 가지 무거운 책임을 능히 짊어짐으로써, 널리 중생을 위하여 청하지 않은 벗[不請之友]이 되고 중생을 편안하게 위로하며 불쌍히 여겨서 세상에서 진리의 어머니[法母]가 됩니다.
또한 대지가 네 가지 보배[寶藏], 즉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배, 값비싼 보배, 중간 정도 값의 보배, 값싼 보배를 갖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인 선남자와 선여인은 대지를 건립하여 중생의 최상의 큰 보배 네 가지를 얻습니다. 어떤 것이 네 가지 보배냐 하면,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인 선남자와 선여인은 가르침을 듣지 않는 중생, 법의 그릇이 아닌 중생들에게 인천(人天)의 공덕과 선근을 주고, 성문을 구하는 자에게는 성문의 가르침을 주고, 연각을 구하는 자에게는 연각의 가르침을 주고, 대승을 구하는 자에게는 대승의 가르침을 줍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인 선남자와 선여인으로 말미암아 큰 보배를 얻은 중생은 기특(奇特)하고도 희유한 공덕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큰 보배라는 것은 곧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과 바라밀
“세존이시여,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은 올바른 가르침 그 자체와 다르지 않으며, 올바른 가르침 그 자체도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올바른 가르침이 곧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은 바라밀과 다르지 않으며, 바라밀이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이 곧 바라밀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인 선남자와 선여인은 마땅히 보시로써 성숙시킬 중생에 대해서는 보시로써 성숙케 하는 것이니, 몸의 일부를 버려서라도 그들의 보리심을 보호하면서 성숙케 합니다. 그렇게 성숙된 중생이 올바른 가르침에 안주하는 것을 보시[檀] 바라밀이라 이름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계율로써 성숙시킬 중생에 대해서는 여섯 가지 감각 기관[六根]을 수호하며 몸, 말, 뜻으로 짓는 업을 깨끗이 하는 것이니, 네 가지 위의(威儀)를 올바르게 하여 그들의 보리심을 보호하면서 성숙케 합니다. 그렇게 성숙된 중생이 올바른 가르침에 안주하는 것을 지계[尸] 바라밀이라 이름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인욕으로서 성숙시킬 중생은, 만약 저 중생들이 비난, 욕설, 비방, 공포를 퍼붓는다 하더라도 화내지 않는 마음, 이익케 하려는 마음, 가장 뛰어난 인욕으로써 대하는 것이니, 얼굴빛을 바꾸지 않고 그들의 보리심을 보호하면서 성숙케 합니다. 그렇게 성숙된 중생이 올바른 가르침에 안주하는 것을 인욕 바라밀이라 이름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정진으로써 성숙시킬 중생에 대해서는, 그 중생들에게 게을러지려는 마음을 내지 않으며 큰 욕심을 내며 가장 훌륭하게 정진하는 것이니, 네 가지 위의 가운데서도 그들의 보리심을 보호하며 성숙시킵니다. 그렇게 성숙된 중생이 올바른 가르침에 안주하는 것을 정진[毘梨耶] 바라밀이라 이름합니다. 마땅히 선정으로서 성숙시킬 중생에 대해서는, 그 중생들에게 어지럽지 않은 마음, 밖으로 향하지 않는 마음, 가장 훌륭한 정념(正念)으로써 하여 오래 전에 행한 바와 오래 전에 설한 바를 마침내 잊지 않으며 그들의 보리심을 보호하면서 성숙시킵니다. 그렇게 성숙된 중생이 올바른 가르침에 안주하는 것을 선정 바라밀이라 이름합니다. 마땅히 지혜로써 성숙시킬 중생에 대해서는, 그러한 모든 중생들이 일체의 뜻을 물어 온다면, 두려움 없는 마음으로써 모든 논서, 모든 학문[工巧], 구경의 지혜, 갖가지 교묘한 일로써 연설하면서 그들의 보리심을 보호하여 성숙시킵니다. 그렇게 성숙된 중생이 올바른 가르침에 안주하는 것을 반야 바라밀이라 이름합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이 바라밀과 다르지 않으며 바라밀이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이 곧 바라밀입니다.”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과 그 사람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부처님의 위신력을 이어받아서 다시 크나큰 뜻을 말하고자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설해 보라.”
승만 부인이 부처님께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에 대하여 사뢰었다.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올바른 일을 받아들이는 일과 다르지 않으며,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은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곧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인 선남자와 선여인이 곧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만약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인 선남자와 선여인이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세 가지를 내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몸, 목숨, 재물이 그것입니다.
선남자와 선여인이 몸을 버릴 수 있다면 생사, 윤회의 맨 마지막과 같아질 것이며, 늙음, 병, 죽음을 떠나며, 부서지지 않으며, 항상 머무르며, 변화가 없으며, 가히 생각할 수 없는 공덕을 갖춘 여래의 법신(法身)을 얻을 것입니다. 목숨을 버릴 수 있다면 생사, 윤회의 맨 마지막과 같아질 것이며, 마침내는 죽음을 떠나서 가이없고, 항상 머무르며, 가히 생각할 수 없는 공덕을 얻어서 모든 깊고 깊은 부처님 법을 통달하게 될 것입니다. 재물을 버릴 수 있다면 생사, 윤회의 맨 마지막과 같아질 것이며, 모든 중생과 함께 하지 않으며, 다함없으며, 줄어들지 않으며, 마침내 항상 머무르며, 가히 생각할 수 없이 구족(具足)한 공덕을 얻으며, 모든 중생의 뛰어난 공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세 가지를 버리는 선남자와 선여인은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여서 언제나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예언을 받게 되며, 모든 중생으로부터 우러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또 선남자와 선여인이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들이 붕당(朋黨)을 지어서 서로 다투어 송사 하여 승가의 화합을 깨뜨리고 이산하여 가르침이 장차 멸하고자 할 때 굽지 않고 속이지 않으며 거짓되지 않음으로써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진리의 길벗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진리의 길벗 가운데 든 자는 반드시 모든 부처님의 예언을 받을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에 이와 같은 큰 힘이 있음을 봅니다. 부처님께서는 진실한 눈, 진실한 지혜이시며, 가르침의 근본이시며, 진리에 통달하시며, 올바른 가르침의 의지처이시며, 역시 모두 다 보고 아시는 분입니다.”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
그때 세존께서는 승만 부인이 설한 바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의 큰 정진력(精進力)에 대하여 함께 기뻐하는 마음[隨喜心]을 일으키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렇다, 승만이여! 그대가 설하는 바와 같다.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의 큰 정진력은 큰 힘을 가진 역사(力士)가 조금이라도 몸에 닿으면 큰 고통을 낳는 것과 같다. 그렇다. 승만이여! 조금만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여도 악마를 크게 괴롭히는 것이니, 다른 어떤 선법(善法)도 악마를 그렇게 크게 괴롭히는 것을 나는 본 일이 없다.
또한, 소 중의 왕[牛王]은 모습이 비할 바 없어서 모든 소보다 더 뛰어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대승을 믿는 자는 조금이라도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모든 이승(二乘)의 선근보다도 더 뛰어난 것이니, 이는 광대하기 때문이다.
또한, 마치 수미산이 단정하고 엄숙하여 모든 산보다 뛰어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대승을 믿는 자로서 몸, 목숨, 재물을 버리는 자는, 받아들이려는 마음으로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임으로써 몸, 목숨, 재물을 버리지 않고서 처음으로 대승의 모든 선근에 머무는 자보다 더 뛰어나다. 그런데 하물며 이승이겠는가. 이 또한 광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승만이여, 마땅히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임으로써 중생을 열어 주고 보여 주며, 중생을 교화하며, 중생을 건립(建立)할지니라.
승만이여,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은 이와 같은 큰 이익이 있으며 이와 같은 큰복이 있으며 이와 같은 큰 과보가 있는 것이다. 승만이여, 나는 아승지아승지겁에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의 공덕과 이익을 설한다고 하여도 가이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은 한량없으며 가이없는 공덕이 있는 것이다.”
제5. 하나의 길[一乘章]
대승, 모든 법의 근원
부처님께서 승만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이제 다시 모든 부처님께서 설한 바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에 대하여 설하여라.”
승만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오직 부처님의 분부를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곧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하였다.
“세존이시여,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은 곧 대승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대승이라는 것은 모든 성문, 연각의 세간, 출세간의 선법(善法)을 낳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아뇩대지에서 여덟 개의 큰 강의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대승은 모든 성문, 연각과 세간, 출세간의 선법을 낳습니다.
세존이시여, 또한 모든 씨앗이 대지(大地)에 의거하여 자라는 것과 같이 모든 성문, 연각의 세간, 출세간의 선법도 대승에 의지하여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대승에 머무르며 대승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이승(二乘)에 머물러서 이승의 세간, 출세간의 선법을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여섯 가지 요점
“마치 세존께서 설하시는 여섯 가지 요점[六處]과 같습니다. 여섯 가지 요점이란, 올바른 가르침의 유지[正法住], 올바른 가르침의 소멸[正法滅], 계본[波羅提木叉], 교단의 규범[毘尼], 출가하는 것, 구족계를 받는 것입니다. 대승을 위하기 때문에 이러한 여섯 가지 요점을 설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올바른 가르침의 유지는 대승을 위하기 때문이니, 대승의 유지가 곧 올바른 가르침의 유지라고 설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가르침의 소멸은 대승을 위하기 때문이니, 대승의 소멸이 곧 올바른 가르침의 소멸이라고 설하는 것입니다. 계본과 교단의 규범, 이 두 가지는 뜻은 하나인데 이름만 다른 것입니다. 교단의 규범은 곧 대승의 배움입니다. 그것은 부처님에 의지하여 출가하여서 구족계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승의 계[大乘威儀戒]가 교단의 규범이며, 출가이며, 구족계를 받는 것이라 설하는 것입니다. 즉 아라한의 길에는 출가도 구족계를 받음도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라한 스스로도 여래에게 의지하여 출가하고 구족계를 받기 때문입니다.”
아라한의 귀의
“아라한은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아라한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지어진 것[行]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칼을 갖고 자기를 해치러 오는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아라한은 완전한 즐거움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의지처는 다시 의지할 대상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의지처가 없는 중생은 그러한 두려움이 있으며, 그러한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곧 귀의처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라한의 경우에도 두려움이 있으며,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여래에게 의지합니다.”
여래만이 얻는 열반의 세계
“세존이시여, 아라한과 벽지불은 두려움을 갖습니다. 또한 아라한과 벽지불에게는 업의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有餘], 윤회, 재생으로 이어지는 성질[生法]이 다하지 않았으므로 태어남이 있으며 업의 잔재가 있습니다. 청정한 행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순수하지 않으며, 일이 완전하지 않으므로 마땅히 지어야 할 바가 있습니다. 피안에 이르지 못했으므로 마땅히 끊어야 할 바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오직 여래, 응공, 정등각만이 완전한 열반을 얻으며 모든 공덕을 성취하기 때문이며, 아라한과 벽지불은 모든 공덕을 성취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열반을 얻는다’는 것은 오직 부처님의 방편일 뿐이니 오직 여래만이 완전한 열반을 얻으며,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합니다. 아라한과 벽지불은 한량이 있는 공덕을 성취할 뿐입니다. ‘열반을 얻는다’는 것은 오직 부처님의 방편일 뿐이니 오직 여래만이 완전한 열반을 얻으며, 가히 생각할 수 없는 공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아라한과 벽지불은 생각할 수 있는 공덕만을 성취할 뿐입니다. ‘열반을 얻는다’는 것은 오직 부처님의 방편일 뿐이니 오직 여래만이 완전한 열반을 얻으며, 마땅히 끊어야 할 모든 허물을 모두 끊으며 가장 훌륭한 청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아라한과 벽지불은 허물을 남겨 가장 훌륭한 청정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열반을 얻는다’는 것은 오직 부처님의 방편일 뿐이니, 오직 여래만이 완전한 열반을 얻어서 모든 중생이 존중하는 바 되며 아라한, 벽지불, 보살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라한과 벽지불은 열반의 세계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아라한과 벽지불이 해탈의 네 가지 지혜를 관찰하며 마침내 번뇌가 쉬는 경지[蘇息處]를 얻는다’는 것 역시 여래의 방편이니, 업의 잔재를 남기는 것이고 궁극적인 뜻을 다 드러내지 못한 가르침[不了議設]일 뿐입니다.”
두 가지 죽음
“왜냐하면, 두 가지 죽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죽음이란 이른바 육체적 죽음[分段死]과 부사의한 변화로서의 죽음[不思議變易死]입니다. 육체적 죽음은 거짓된 중생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며, 부사의한 변화로서의 죽음은 아라한, 벽지불, 대력(大力)보살의 의생신(意生身)이며 궁극적으로 위없는 깨달음입니다.
두 가지 죽음 가운데 육체적 죽음으로 말미암아 아라한과 벽지불의 지혜 - ‘나의 생은 이미 다했다’[我生已盡] -를 설하게 됩니다. 업의 잔재가 남게 되는 과보를 얻기 때문에 ‘청정한 행은 이미 완성했다’[梵行已立]고 설하게 됩니다. 범부와 인천(人天)의 과보를 얻을 중생은 능히 판단하지 못하고, 아라한이 되기 전 일곱 단계의 성자들은 그 이전에는 끊지 못하였던 허망한 번뇌를 끊었으므로 ‘지어야 할 바는 모두 마쳤다’[所作已辨]고 설하게 됩니다. 아라한과 벽지불이 끊은 바 번뇌는 다시 미래의 윤회하는 삶[後有]을 받지 않으므로 ‘미래의 윤회하는 삶을 받지 않는다’[不受後有]고 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모든 번뇌를 다 없앤 것도 아니며 또한 다시는 모든 생을 받는 것을 다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다시는 미래의 윤회하는 삶을 받지 않는다’고 설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번뇌가 있기 때문입니다.”
번뇌, 그 계보
“이와 같이 아라한과 벽지불이 능히 끊지 못한 번뇌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잠재적 번뇌[住持煩惱]와 현재적 번뇌[起煩惱]가 그것입니다. 다시 잠재적 번뇌에는 한 곳만을 보는 편견 속에 잠재되어 있는 번뇌[見一處住持煩惱], 욕망의 집착 속에 잠재되어 있는 번뇌[欲愛住持煩惱], 육체의 집착 속에 잠재되어 있는 번뇌[色愛住持煩惱], 윤회 생존의 집착 속에 잠재되어 있는 번뇌[有愛住持煩惱]의 네 가지가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잠재적 번뇌가 모든 현재적 번뇌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현재적 번뇌는 찰나의 일이니 찰나의 마음에 상응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마음과 서로 상응하지 않는 것이 언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는 무명의 잠재적 번뇌[無始無明住持煩惱]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네 가지 잠재적 번뇌의 힘은 모두 부수적 번뇌[上煩惱]의 의지할 종자가 되는 것이지만, 무명의 잠재적 번뇌의 큰 힘에 비교하면 산수(算數)나 비유로도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무명의 잠재적 번뇌는 욕망의 집착 속에 잠재되어 있는 번뇌나 네 가지 잠재적 번뇌보다 힘이 있습니다. 무명의 잠재적 번뇌의 힘이 가장 큰 것입니다. 마치 악마 파순(波旬)이 타화자재천보다도 모습, 힘, 수명, 도구, 자재가 뛰어난 것과 같습니다.
무명의 잠재적 번뇌의 힘이 윤회 생존의 집착 속에 잠재되어 있는 번뇌나 네 가지 잠재적 번뇌보다도 그 힘이 가장 뛰어난 것이니, 갠지스 강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부수적 번뇌의 의지하는 바 되며, 역시 네 가지 잠재적 번뇌를 오래 머물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라한과 벽지불의 지혜로도 능히 끊지 못하며 오직 여래의 깨달음의 지혜가 능히 끊을 바입니다. 이와같이 세존이시여, 무명의 잠재적 번뇌가 가장 힘이 센 것입니다.”
부처님만이 끊을 수 있는 번뇌
“세존이시여, 또한 집착[取]이 유루(有漏)의 업인(業因)으로 말미암아 세 가지 존재[三有]를 낳는 것과 같이, 이러한 무명의 잠재적 번뇌 역시 무루업(無漏業)의 원인으로 말미암아 아라한, 벽지불, 대력(大力)의 원인으로 말미암아 아라한, 벽지불, 대력(大力)보살의 세 가지 의생신(意生身)을 낳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 지위와 그러한 세 가지 의생신의 생 및 무루업의 생은 무명의 잠재적 번뇌에 의지한 것이므로 연이 있는 것이지 연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 의생신 및 무루업은 무명의 잠재적 번뇌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윤회 생존의 집착 속에 잠재되어 있는 번뇌의 업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명의 잠재적 번뇌는 네 가지 잠재적 번뇌를 떠나는 것과 달라서, 불지(佛地)에서 끊는 바이며 부처님의 깨달음의 지혜로써 끊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아라한과 벽지불도 네 가지 잠재적 번뇌는 끊을 수 있지만 무루업은 다 끊지 못해서 자재력을 얻지 못하며 역시 깨달음을 얻지 못합니다. 무루업을 다 끊지 못하는 것은 곧 무명의 잠재적 번뇌 때문입니다.”
불완전한 열반
“세존이시여, 아라한, 벽지불, 최후신(最後身)의 보살은 무명의 잠재적 번뇌에 덮여 있기 때문에 저러한 모든 법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합니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땅히 끊어야 할 바를 끊지 못하며 구경(究竟)에 이르지 못합니다. 끊지 못하기 때문에 나머지 허물이 남아 있는 해탈[有餘過解脫]이라 이름하며, 모든 허물을 떠나 있는 해탈이 아니기 때문에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청정[有餘解脫]이라 이름합니다. 모든 청정이 아니기 때문에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공덕[有餘功德]을 성취할 뿐이라 이름합니다. 모든 공덕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해탈,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청정,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공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괴로움[苦]을 알며,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괴로움의 원인[集]을 끊으며,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괴로움의 소멸을 증득하며[滅],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을 닦는 것이니, 이를 불완전한 열반을 얻을 뿐이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열반을 얻는다 함은 열반의 세계를 향하는 것이라 이름합니다.”
열반의 맛
“누구라도 모든 괴로움을 알고 모든 괴로움을 일으키는 집착을 끊으며 모든 괴로움의 소멸을 증득하고 모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닦는다면, 무상하게 부서지는 세간, 무상하게 병든 세간에서 항상 머무르는 열반을 얻을 것이며, 보호해 주는 이 없는 세간, 의지할 이 없는 세간에서 보호해 주는 이가 되고 의지할 이가 될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법에는 뛰어남과 열등함이 없기 때문에 열반을 얻으며, 지혜가 평등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으며, 해탈이 평등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으며, 청정이 평등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열반은 하나의 맛[一味]이고 같은 맛[等味]이니, 이른바 해탈의 맛[解脫味]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무명의 잠재적 번뇌를 끊지 못하고 다 마치지 못한 사람은 하나의 맛, 같은 맛 -이른바 지혜의 맛, 해탈의 맛 -을 얻지 못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무명의 잠재적 번뇌를 끊지 못하고 다 마치지 못한 사람은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은 마땅히 끊어야 할 법을 다 끊지 못했으며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은 법을 마땅히 얻어야 하는데도 얻지 못하고 마땅히 깨달아야 하는데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명의 잠재적 번뇌가 쌓여서 모든 수도(修道)를 통해서 끊어야 할 번뇌와 부수적 번뇌를 낳으며, 그것은 마음을 장애 하는 번뇌, 지(止)를 장애 하는 번뇌, 관찰[觀]을 장애 하는 번뇌, 선정을 장애 하는 번뇌, 삼매[正受]를 장애 하는 번뇌, 방편을 장애 하는 번뇌, 지혜를 장애 하는 번뇌, 과보를 장애 하는 번뇌, 얻음을 장애 하는 번뇌, 힘[力]을 장애 하는 번뇌, 두려움 없음을 장애 하는 부수적 번뇌 등을 낳습니다. 이와 같이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은 부수적 번뇌는 여래의 보리, 지혜가 끊어야 할 바이니, 그 모든 것은 모두 무명의 잠재적 번뇌가 지은 바입니다. 모든 부수적 번뇌가 일어나는 것은 모두 무명의 잠재적 번뇌를 원인으로 하고 무명의 잠재적 번뇌를 조건으로 하는 것입니다.”
무명의 잠재적 번뇌를 끊어야
“세존이시여, 여기서 현재적 번뇌는 찰나의 마음을 찰나에 상응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마음과 서로 상응하지 않는 것이 언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는 무명의 잠재적 번뇌[無始無明住持煩惱]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의 보리, 지혜가 마땅히 끊어야 할 법이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더라도, 그 모든 것은 모두 무명의 잠재적 번뇌가 지니는 바 되고 건립하는 바 됩니다. 비유하면, 마치 모든 씨앗이 모두 땅에 의지하여 나고 건립하고 자라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땅이 무너지면 그 씨앗도 무너지는 것과 같아서, 이와 같이 여래의 보리, 지혜가 마땅히 끊어야 할 법이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 더 많더라도 모두 따라서 끊어지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번뇌와 부수적 번뇌를 끊고, 여래가 얻을 바 모든 법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은- 에 통달하며 모든 지견에 걸림 없이 되고 모든 과악(過惡)을 떠나며 모든 공덕을 얻은 법왕, 법의 주재자로서 자재를 얻으며 모든 법의 자재로운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래, 응공, 등정각께서는 “나의 생은 이미 다했으며, 청정한 행은 이미 완성했으며, 지어야 할 바는 이미 마쳤으며, 미래의 윤회하는 삶은 받지 않는다”라고 사자후(獅子吼)하십니다. 그러므로 세존께서는 궁극적인 가르침에 의지하여 총체적 설명[一向記]를 설하셨습니다.”
두 가지 지혜
“세존이시여, ‘미래의 윤회하는 삶을 받지 않는’ 지혜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른바 여래는 -위없는 조어(調御)로서 네 가지 마[四魔]를 항복 받고, 모든 세간을 벗어나서 모든 중생의 존경을 받는- 불가사의한 법신을 얻으며 모든 알아야 할 대상 경계에 대하여 걸림 없는 법의 자재를 얻습니다. 이 위에 다시 지어야 할 바도 없으며 얻어야 할 바도 없는 경지에서 십력(十力)이 용맹해지고 제일이며 위없는 무외(無畏)의 경지에 올라갑니다. 모든 알아야 할 대상 경계를 걸림 없는 지혜로 관찰하는 데는 다른 것에 말미암지 아니하므로 ‘미래에 윤회하는 삶을 받지 않는 지혜’라고 사자후하는 겁입니다.
세존이시여, 아라한과 벽지불은 생사의 두려움을 건너서 차례로 해탈의 기쁨을 얻어서 즐거이, ‘나는 생사의 공포를 떠났으니 생사의 괴로움을 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아라한과 벽지불이 관찰할 때는 ‘미래의 윤회하는 삶을 받지 않게 되고’, 가장 뛰어난 안식처[蘇息處]인 열반의 경지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들이 앞에서 얻은 바 열반의 경지는 법에 어리석지 않아서,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지 않고 스스로 불완전한[有餘] 지위를 얻었지만, 반드시 위없이 바른 깨달음을 얻으리라’고 아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성문승과 연각승은 모두 대승에 들기 때문입니다. 대승은 곧 부처님의 길[佛乘]입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 길은 곧 하나의 길이며 하나의 길을 얻는 자는 위없이 바른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위없이 바른 깨달음은 열반의 세계입니다. 열반의 세계는 곧 여래의 법신입니다. 궁극적인 법신을 얻음은 곧 궁극적인 하나의 길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법신은 여래와 다르지 않고, 여래는 법신과 다르지 않으니, 여래가 곧 법신입니다. 궁극적인 법신을 얻는다는 것은 궁극적인 하나의 길을 얻는 것입니다. 궁극적이라는 것은 가이없으며 끊어짐이 없는 것입니다.”
여래에의 귀의
“세존이시여, 여래는 한량없는 시간 동안 머뭅니다. 여래, 응공, 등정각은 미래의 끝[後際]과 나란히 머무릅니다. 여래는 한량없으며, 크게 자비로우심[大悲] 또한 한량없고, 세간을 편안케 하는 데 이러한 설을 짓는 것은 잘 설하는 것이라 이름합니다. 여래가 만약 다시 ‘다함없는 법, 상주하는 법은 모든 세간의 귀의를 받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면 역시 잘 설하는 것이라 이름합니다. 그러므로 여래는 아직 제도하지 못한 세간, 의지하지 못하는 세간에 있어서 미래의 끝과 같아져서 다함없는 귀의, 상주하는 귀의를 짓는다고 한다면, 이른바 여래, 응공, 등정각입니다. 법은 하나의 길[一乘]이고 승(僧)은 세 가지 길(三乘)의 무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귀의는 궁극적인 귀의는 아니며 불완전한 귀의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길을 설하는 것은 궁극적인 법신을 얻는 것이며, 이 위에 다시 하나의 길의 법신을 설함이 없는 것입니다. 세 가지 길의 무리들은 공포가 있어서 여래에게 귀의하여 벗어남을 구하며 수학(修學)하는 것이니, 위없이 올바른 깨달음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귀의는 궁극적인 귀의가 아니며 한계가 있는 귀의입니다.
만약 어떤 중생이 여래에게 조복하여 귀의하면 법의 은혜를 얻게 되고 믿고 즐기는 마음을 내게 될 것입니다. 법과 승의 두 가지 귀의는 단순히 두 가지 귀의가 아니라 여래에게 귀의하는 것입니다. 제일의(第一義)에 귀의하는 것은 여래에게 귀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귀의와 제일의는 궁극적으로 여래에게 귀의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두 가지 귀의는 여래와 다르지 않고, 여래는 두 가지 귀의와 다르지 않으므로, 여래는 곧 삼귀의(三歸依)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의 길을 설하는 것은 여래가 네 가지 무외를 성취하여 사자후를 설하는 것입니다. 여래가 하고자 하는 바의 방편으로 설하는 것이 곧 대승입니다. 세 가지 길이 없으며, 세 가지 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의 길이라는 것은 곧 제일의의 길입니다.”
제6. 다함없는 진리[無邊聖諦章]
“세존이시여, 성문과 연각이 처음으로 성스러운 진리를 관찰할 때에 하나의 지혜로써 모든 잠재적 번뇌를 끊는 것이 아니며, 하나의 지혜로써 네 가지 지혜의 모든 공덕을 끊는 것도 아니고, 또한 법으로서 능히 이러한 네 가지 법의 뜻을 잘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러한 네 가지 법의 뜻을 잘 압니다. 세존이시여, 세간을 벗어나는 최고의 지혜에는 점진적으로 이르게 되는 네 가지 지혜[四智]도 없으며, 점진적으로 이르게 되는 네 가지 대상[四緣]도 없습니다. 점진적으로 이르게 되는 법이 없는 것이 세간을 벗어나는 최고의 지혜입니다.
세존이시여, 금강석과 같다[金剛喩]고 하는 것은 곧 제일의(第一義]의 지혜입니다. 세존이시여, 성문과 연각은 무명의 잠재적 번뇌를 끊지 않았으므로 처음 관찰한 성스러운 진리의 지혜가 제일의의 지혜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두 가지 진리를 아는 지혜로써 여러 가지 잠재적 번뇌를 끊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 응공, 등정각은 모든 성문이나 연각의 경지가 아니고 부사의한 공의 지혜이니, 모든 번뇌의 더미를 끊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모든 번뇌의 더미가 무너진다면 구경의 지혜가 곧 제일의의 지혜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처음 관찰한 성스러운 진리의 지혜는 궁극적인 지혜가 아니며 다만 위없이 바른 깨달음의 지혜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성스러운 뜻이라는 것은 모든 성문이나 연각에 대해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성문과 연각은 유한한 공덕을 성취할 뿐이며, 성문과 연각은 불완전한 공덕을 성취할 뿐이므로, 이름해서 ‘성스럽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스러운 진리라는 것은, 성문이나 연각의 진리가 아니며, 또한 성문과 연각의 공덕도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진리는 여래, 응공, 등정각이 처음으로 비로소 깨달아 아는 것이지만, 그 뒤에도 무명의 껍질에 싸여 있는 세간을 위해서 출현하여 연설하므로 성스러운 진리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제7. 여래장[如來藏章]
“성스러운 진리란 매우 깊은 뜻을 설하는 것이며, 미세하므로 알기 어려운 것이며,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경계가 아닙니다. 이는 지혜로운 사람의 알 바이며, 모든 세간 사람들이 능히 믿을 바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매우 깊은 여래의 씨앗[如來藏]을 설하기 때문입니다. 여래장이라는 것은, 곧 여래의 경계이며 모든 성문이나 연각의 알 바는 아닙니다. 여래장의 차원에서 성스러운 진리의 뜻을 설하는 것입니다. 여래장의 차원이 매우 깊기 때문에 성스러운 진리를 설하는 것 역시 매우 깊고 미세하여 알기 어려운 것이며,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경계가 아닙니다. 이는 지혜로운 사람의 알 바이며, 모든 세간 사람들은 능히 믿을 바가 아닌 것입니다”
제8. 법신[法身章]
“만약 한량없는 번뇌의 더미에 싸여 있는 여래장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는다면, 한량없는 번뇌의 더미에서 벗어난 법신에 대해서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래장, 여래의 법신, 부사의한 부처님의 경계 및 방편을 설함에 대하여 마음으로 확신할 수 있다면, 이러한 사람은 곧 두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설함을 신해(信解)할 것입니다. 이렇게 알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른바 두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뜻을 설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두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뜻이냐 하면, 이른바 지음이 있는[有作] 성스러운 진리의 뜻을 설하는 것과 지음이 없는[無作] 성스러운 진리의 뜻을 설하는 것입니다. 지음이 있는 성스러운 진리의 뜻을 설하는 것은 곧 유한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설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으로 인해서 능히 모든 괴로움을 알수 있으며, 모든 괴로움의 원인을 끊을 수 있으며, 모든 괴로움의 소멸을 얻을 수는 있으나 모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닦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함이 있는 생사와 함이 없는 생사가 있으며, 열반도 역시 이와 같아서 남음이 있는 열반[有餘涅槃]과 남음이 없는 열반[無餘涅槃]이 있습니다.
지음이 없는 성스러운 진리의 뜻을 설한다는 것은 무한한 네 가지 진리의 뜻을 설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능히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괴로움을 받을 줄 알고 모든 괴로움의 원인을 끊을 줄 알며, 모든 괴로움의 소멸을 증득하며, 모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닦습니다.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성스러운 진리는 곧 여래가 설한 네 가지 진리입니다. 이와 같은 네 가지의 지음이 없는 성스러운 진리의 뜻은 오직 여래, 응공, 등정각의 궁극적인 일이며 아라한, 벽지불의 궁극적인 일이 아니니, 왜냐하면 하(下), 중(中), 상(上)의 법으로써 열반을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여래, 응공, 등정각은 지음이 없는 네 가지 진리의 뜻에 대하여 궁극적인 경계를 얻는 것인데, 모든 여래, 응공, 등정각으로서 모든 미래의 괴로움을 알고 모든 번뇌와 부수적 번뇌가 거두어들이는 모든 괴로움의 원인을 알며, 모든 의생신(意生身)을 멸하며 모든 괴로움을 멸하여 깨달음을 짓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존재의 소멸을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이름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하는 것은, 비롯함이 없고, 지음이 없으며, 일으킴이 없고, 다함이 없으며, 다함을 떠나 있으며, 상주하며, 자성이 청정하며, 모든 번뇌의 더미를 떠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 더 많으며, 떠나지도 않고, 벗어나지도 않으며, 다르지 않으며, 헤아릴 수 없는 불법을 성취하여 여래의 법신을 설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여래의 법신은 번뇌의 더미를 떠나지 않으므로 여래장이라 이름하는 것입니다.”
제9. 공의 두 가지 진실한 모습[空義隱覆眞實章]
“세존이시여, 여래장의 지혜는 여래의 공(空)한 지혜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장은 모든 아라한, 벽지불, 대력(大力)보살이 본래 보지 못하는 바이며 본래 얻지 못하는 바입니다.
세존이시여, 두 가지 여래장의 공한 지혜가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공한 여래장(空如來藏)은 모든 번뇌의 더미에서 혹은 떠나 있으며, 혹은 벗어나 있으며, 혹은 그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공하지 않은 여래장[不空如來藏]은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은 부사의한 불법을 혹은 떠나지 않으며, 혹은 벗어나지도 않으며, 혹은 그것과 다르지도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두 가지 공한 지혜는 모든 위대한 성문들도 능히 여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모든 아라한, 벽지불의 공한 지혜는 네 가지 전도된 경지를 반연으로 해서 작용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아라한, 벽지불은 본래 보지 못하는 바이고 본래 얻지 못하는 바입니다. 모든 괴로움의 소멸은 오직 부처님만이 깨달아 얻는 것이며, 모든 번뇌의 더미를 부수며 모든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을 닦는 것입니다.”
제10. 하나의 진리[一諦章]
“세존이시여, 이러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서 셋은 무상하고 하나는 영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 가지 진리는 함이 있는 현실[有爲相] 속에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함이 있는 현실 속에 포함된다는 것은 곧 무상한 것입니다. 무상한 것은 곧 허망한 존재입니다. 허망한 존재라는 것은 진리도 아니며, 영원한 것도 아니며 의지할 만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괴로움이라는 진리,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진리 등은 모두 제일의의 진리가 아닌 것이며, 영원한 것도 아니며, 의지할 만한 것도 아닙니다.”
제11. 하나의 의지처[一依章]
"오직 하나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만이 함이 있는 현실을 떠나는 것입니다. 함이 있는 현실을 떠나는 것은 곧 영원한 것입니다. 영원한 것은 허망한 존재가 아닙니다. 허망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진리이며 영원한 것이며 의지할 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만이 제일의의 진리입니다."
제12. 전도된 견해와 올바른 견해[顚倒眞實章]
두 가지 전도된 견해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입니다. 모든 중생의 심식(心識)으로 헤아릴 수 있는 대상을 넘어서 있는 것이며, 또한 모든 아라한, 벽지불의 지혜가 미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비유하면, 마치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는 사람은 갖가지 형상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고, 이제 태어난 지 7일되는 아기가 태양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 역시 이와 같아서 모든 범부의 심식으로 헤아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며, 또한 이승(二乘)의 지혜가 미칠 수 있는 경계도 아닙니다. 범부의 심식이라는 것은 극단적인 견해[二見]로 뒤바뀐 것이며, 모든 아라한, 벽지불의 지혜는 곧 청정합니다.
치우친 견해[邊見]라는 것은, 범부가 몸과 마음의 다섯 가지 구성 요소[五受陰]에 대하여 아견, 망상, 집착으로 두 가지 소견을 일으키는 것을 치우친 견해라 이름하는 것이니, 이른바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입니다. 모든 지어진 것은 무상하다고 보는 것은 단견이니 올바른 견해가 아닙니다. 열반은 영원하다고 보는 것은 상견이니 올바른 견해가 아닙니다. 모두 망상으로 인해서 이러한 견해를 짓는 것입니다. 신체와 여러 가지 감각 기관에 대하여 분별하고 사유하되 현재의 존재가 부서짐을 보면서도 윤회 생존의 계속함[有相續]을 보지 못하여 단견을 일으키는 것은 망상으로 인해서입니다. 마음의 상속에 대하여 어리석은 사람이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며, 찰나 사이의 의식 작용에 대하여 상견을 일으키는 것도 망상으로 인해서입니다.
이같은 망상의 견해가 그같은 뜻에 대하여 지나치거나 모자라서 다르다는 분별[異相分別]을 짓거나, 끊어졌다고 하거나 영원하다고 생각하여서 전도된 중생은 몸과 마음의 다섯 가지 구성 요소에 대하여 무상한 것을 영원하다고 생각하고, 괴로움인데 즐거움이 있다고 생각하고, 무아를 아(我)라고 생각하고, 부정한 것을 청정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아라한, 벽지불의 청정한 지혜라는 것은 모든 앎의 경계 및 여래의 법신에 대하여는 본래 보지 못한 바입니다. 어떤 중생이 부처님 말씀을 믿기 때문에 영원하다는 생각, 즐겁다는 생각, 나라는 생각, 깨끗하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니, 전도된 견해가 아니며 올바른 견해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견해
“왜냐하면 여래의 법신은 곧 완전한 상주[常波羅蜜], 완전한 기쁨[樂波羅蜜], 완전한 아[我波羅蜜], 완전한 청정[淨波羅蜜]이니, 부처님의 법신에 대하여 이러한 견해를 갖는 것을 올바른 견해라고 이름합니다. 올바르게 보는 자는 곧 부처님의 참된 아들이니 부처님의 입으로부터 태어나며, 올바른 가르침을 좇아서 태어나며, 올바른 가르침의 교화를 좇아서 태어나며, 가르침의 재산을 상속하는 사람입니다.
세존이시여, 청정한 지혜라는 것은 모든 아라한, 벽지불의 지혜 바라밀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청정한 지혜는 비록 청정한 지혜라고는 하지만 저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에 있어서도 작용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네 가지 의지의 지혜[四依智]에 작용하겠습니까. 왜냐하면, 세 가지 길[三乘]에 속하는 초심자도 가르침과 그 뜻에 어리석지 않으며, 마땅히 깨닫고 마땅히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를 위하여 세존께서는 네 가지 의지할 바를 설하시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네 가지 의지할 바는 곧 세간의 법입니다. 세존이시여, 하나의 의지할 바[一依]라는 것은 모든 존재의 의지할 바이며, 세간을 벗어나는 제일의(第一義)의 의지할 바이니, 이른바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입니다.”
제13. 자성의 청정[自性淸淨章]
생사의 뿌리, 여래장
“세존이시여, 생사(生死)라고 하는 것은 여래장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여래장이기 때문에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것[本際]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장이 있기 때문에 생사를 설하는 것은 잘 설하는 것이라 이름합니다. 세존이시여, 생사라고 하는 것은 모든 감각 기관이 사라지고 이어서 일어나지 않았던 감각 기관이 일어나는 것을 생사라고 이름합니다. 세존이시여, 죽음과 태어남의 이 두 법은 여래장입니다. 세간의 언어로 설하기에 죽음이 있고 태어남이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감각 기관이 부서지는 것이며, 태어남은 새로 감각 기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래장은 태어남이 있으며 죽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래장은 함이 있는 현실을 떠나 있습니다. 여래장은 상주하여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래장은 의지하는 바가 되며, 지니는 바가 되며, 건립하는 바가 됩니다. 세존이시여,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불법에 떠남도 없으며 끊어짐도 없고, 벗어남도 없고 다름도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끊어지고, 벗어나며, 달라지고, 외화(外化)되는 함이 있는 법이 의지하고 건립하는 것은 여래장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여래장이 없다면 괴로움을 싫어하고 즐거이 열반을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여섯 가지 의식[六識]과 의식 작용 그 자체로서의 마음[心法] -이 일곱 가지- 은 찰나적인 존재여서 머무르지 않으며, 갖가지 괴로움을 심지 못하며, 괴로움을 싫어하고, 즐거이 열반을 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장은 아(娥)도 아니며, 중생도 아니며, 생명도 아니며, 다른 사람도 아닙니다. 여래장은 몸이 있다고 보는 견해에 떨어진 중생, 전도된 중생, 공으로 말미암아 혼돈에 빠진 중생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래장과 번뇌
“세존이시여, 여래장은 곧 법계장(法界藏), 법신장(法身藏), 출세간상상장(出世間上上藏), 자성청정장(自性淸淨章)입니다. 이 성품은 청정한 여래장인데 객진 번뇌(客塵煩惱)와 부수적 번뇌의 오염되는 바로서,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여래의 경계입니다. 왜냐하면 찰나의 착한 마음은 번뇌에 물들지 않고 찰나의 착하지 않은 마음 역시 번뇌에 물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번뇌도 마음에 접촉하지 않고 마음도 번뇌에 접촉하지 않으니, 사물[法]에 접촉하지 않는데 어떻게 마음을 물들일 수 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그러나 번뇌가 있으며 번뇌에 물드는 마음도 있습니다. 본래부터 청정한 마음[自性淸淸心]이면서 물드는 것이 있음은 가히 잘 알기 어렵습니다. 오직 부처님 세존만이 진실한 눈, 진실한 지혜로써 법의 근본이 되고, 법을 통달함이 되고, 정법의 의지처가 되어서 올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승만 부인이 이와 같은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을 설하면서 부처님께 물었을 때, 부처님은 곧 수희(隨喜)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자성이 청정한 마음이면서 물듬이 있다는 것은 가히 완전히 알기에는 어려운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알기 어렵다. 자성이 청정한 마음이라는 것을 완전히 알기 어렵고, 그렇게 청정한 마음이 번뇌에 물든다고 하는 것도 완전히 알기 어렵다. 이러한 두 가지는 그대와 위대한 가르침을 성취한 보살마하살이 이에 능히 듣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지, 다른 성문들은 오직 부처님 말씀을 믿기만 할뿐이다.”
제14. 참된 아들[眞子章]
“만약 나의 제자로서, 믿음에 따라서 증상(增上)하는 자는 밝은 믿음에 의지한 뒤에 진리의 지혜에 수순(隨順)하여 구경을 얻는다. 진리의 지혜에 수순한다는 것은 시설(施設)된 감각 기관과 뜻의 활동 영역을 관찰하며, 업의 과보를 관찰하며, 아라한의 번뇌[隨眠]를 관찰하며, 마음의 자재로운 즐거움과 선정으로 얻는 즐거움을 관찰하며, 아라한, 벽지불, 대력보살의 성스럽고 자재로운 신통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섯 가지 선교 방편의 관찰을 성취하고, 내가 입멸(入滅)한 뒤 미래세 중에서라도 나의 제자가 믿음에 따라서 증상하는 데 밝은 믿음과 진리의 지혜를 의지한다면, 자성의 청정한 마음이 번뇌의 오염을 입을지라도 구경을 얻을 것이다. 구경이라는 것은, 대승의 길에 들어가는 원인이다. 여래를 믿는 자는 이러한 큰 이익이 있으므로 깊은 뜻을 비방하지 않을 것이다.”
이때 승만 부인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다시 그 밖에도 큰 이익이 있사오니, 저는 마땅히 부처님의 위신력을 이어서 이 뜻을 설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다시 설하도록 하라.”
승만 부인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 부류의 선남자, 선여인은 매우 깊고 깊은 뜻을 스스로 훼손하거나 상하게 하지 않고 큰 공덕을 낳아서 대승의 길에 들어갑니다. 어떤 것이 세 부류인가 하면, 이른바 어떤 선남자, 선여인은 스스로 깊고 깊은 진리의 지혜를 성취합니다. 어떤 선남자, 선여인은 진리의 지혜를 수순함을 성취합니다. 어떤 선남자, 선여인은 모든 깊고 깊은 법을 스스로 완전히 알지 못하고 부처님을 우러르면서 ‘이는 나의 경계가 아니다. 오직 부처님만이 알 수 있는 바’라고 합니다. 이들을 선남자, 선여인이라 이름하는 것은 오직 부처님만을 우러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선남자, 선여인을 제외하고”
제15. 승만 부인[勝鬘場]
“나머지 모든 중생들 -매우 깊은 가르침에 집착하여 망령되게 말하며 올바른 가르침을 위배하고 여러 가지 외도(外道)를 익혀서 부처님의 종자를 썩게 하는 자들- 은 마땅히 왕의 힘이나 하늘, 용, 귀신의 힘으로 조복해야 합니다.”
그때 승만 부인과 모든 권속들이 부처님의 발에 정수리를 대면서 예배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착하다, 착하다, 승만이여! 매우 깊은 가르침을 방편으로 수호하며 올바르지 못한 가르침을 항복하고 그 마땅한 바를 잘 얻으니, 그대는 이미 백천억의 부처님을 모셨으므로 이러한 뜻을 능히 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 세존께서는 뛰어난 광명을 놓으셔서 널리 대중을 비추시고, 몸이 허공으로 7다라수(多羅樹)만큼 올라가셔서 발로 허공을 밟고 사위국으로 돌아가셨다. 그때 승만 부인과 모든 권속들이 합장하여 부처님을 향하고 바라보는데 싫어하거나 만족해함이 없었으며 눈을 잠시도 쉬지 않았으며,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에 기뻐하여 뛰면서 저마다 여래의 공덕이 갖추어진 것을 찬탄하였다. 부처님을 염하면서 다시 성(城)으로 돌아와서는 우칭왕(友稱王)을 향하여 대승을 찬탄하고 성(城) 중의 일곱 살 이상 여인들을 모두 대승으로 교화하였다. 우칭왕 역시 일곱 살 이상의 모든 남자들을 대승으로 교화하여서, 온 나라의 모든 국민들이 모두 대승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때 세존께서는 기타태자의 숲으로 들어가셔서 장로 아난에게 일러주었으며, 또한 천제석(天帝釋)을 염하셨다. 그때에 제석과 모든 권속들이 홀연히 와서 부처님 앞에 머무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천제석과 장로 아난을 향하여 널리 이 경전을 설하시고 나서 제석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마땅히 이 경을 받아 지니며 읽고 외워라. 교시카여, 선남자, 선여인이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겁 동안 깨달음의 행을 닦으며 여섯 가지 바라밀을 행하더라도, 만약 다시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전을 받아 지니거나 읽고 외우며 내지 잘 보호한다면 복이 저 공덕보다도 더 많을 것이다. 하물며 널리 다른 사람을 위해서 설하는 것이랴! 그러므로 교시카여, 마땅히 이 경을 읽고 외우며 삼십 삼천을 위해서 분별하고 널리 설하라.”
다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대 역시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사부 대중을 위하여 널리 설하라.”
그때 천제석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이 경을 어떻게 이름 하오며, 어떻게 받들어 지니리까?”
부처님께서 제석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은 한량없으며 가이없는 공덕을 성취하리니 모든 성문, 연각은 능히 이르지 못할 것이며 관찰하여 알 수 없을 것이다. 교시카여, 마땅히 알아라. 이 경은 매우 깊고 미묘한 큰 공덕의 덩어리이니, 이제 마땅히 그대를 위해서 그 이름을 간략히 설하리라. 잘 듣고, 잘 들어서, 잘 생각해 잊지 않도록 하라.”
그때 천제석과 장로 아난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오직 가르침을 잘 받아 지니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경은 ‘여래의 진실하고도 제일의(第一義)인 공덕을 찬탄하는 것’을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큰 서원’을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모든 원을 거두어들이는 대원(大願)’을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올바른 가르침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하나의 길에 들어가는 것’을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다함없는 성스러운 진리’를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여래장’을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법신’을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공의 두 가지 진실한 모습’을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하나의 진리’를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상주하며 안온한 하나의 의지처’를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전도된 견해와 올바른 견해’를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자성의 청정한 마음의 두 가지 측면’을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여래의 진실한 아들’을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승만 부인의 사자후’를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다시 교시카여, 이 경에서 설하는 바는 모든 의심을 끊고 궁극적인 뜻에 안주하며 하나의 길에 들어가는 것이다. 교시카여, 이렇게 승만 부인이 사자후한 경을 그대에게 부촉하나니, 이 법에 머무르며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널리 분별하여 설하라.”
제석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높으신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그때 천제석, 장로 아난 및 여러 모임의 천(天), 인(人), 아수라, 건달바 등이 모두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를 듣고, 환희하며 힘써 행하였다.
불종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01193704043/12411625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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