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수선님 2018. 6. 3. 13:04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이 논을 지은이는 마조 도일(馬祖道一) 스님의 제자인 대주 혜해(大株慧海)스님 입니다. 스님의 전기는 명확하게 기록된 것이 없고 다만 [조당집(祖堂集)]권14,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6 등에 단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를 종합해 보면 마조스님을 6년간 모시고 살았다는 사실만이 스님의 생존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입니다.

혜해스님은 건주(福建省) 사람으로 성은 주[朱]씨이며 월주(浙江省)의 대운사 도지(道智)스님에게 출가 득도하였습니다. 그후 스님은 강서(江西)에 있는 마조스님을 찾아가 뵈오니, 마조스님이 물었습니다.

"어디서 오는가?"
"월주 대운사에서 왔습니다"
"여기 와서 무엇을 구하려고 하는가?"
"불법(佛法)을 구하러 왔습니다."
"자기 집의 보배창고는 돌아보지 않고 집을 떠나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무엇을 구하려 하는가? 나에게는 한 물건도 없는데 어떤 불법(佛法)을 구하려 하는가?"

그러자 혜해스님이 절을 하고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혜해 자신의 보배창고 입니까?"
"지금 나에게 묻고 있는 것이 너의 보배창고이다. 일체가 구족하여 조금도 모자람이 없고 사용[使用]이 자제한데 어찌하여 밖에서 구하려 하는가?"

이 말 끝에 혜해스님은 크게 깨쳐서 자신의 본래 마음을 알았는데, 그것은 지적인 이해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님은 뛸듯이 기뻐서 절을 올려 감사를 드리고 6년 동안 마조스님을 시봉하였습니다. 그후 도지스님이 연로하시므로 대운사로 다시 돌아와서 도지스님을 봉양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취와 활동을 감춘 채 겉으로는 어리석게 살면서 [돈오입도요문론 (頓悟入道要門論)] 한 권을 저술하였습니다. 이 책을 조카 상좌인 현안(玄晏)스님이 훔쳐서 마조스님에게 보이니 스님이 이것을 보시고 대중들에게
"월주(越州)에 큰 구슬이 있으니 둥글고 밝은 광명이 비추어 자유자재로와 걸림이 없구나"
하고 감탄하시었습니다. 대중 가운데 혜해스님이 주씨임을 알고 있던 자가 있어서 큰 구슬(大珠)은 바로 혜해스님을 크게 칭찬하는 말임을 알아차리고,
"옛날 같이 살았을 때는 그렇게 훌륭한 스님인줄 몰랐는데 이제 보니 큰 도인임에 틀림없구나."
하고 다시 스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도반을 이루어 앞을 다투어 월주의 스님 문하에 들어와서 공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혜해스님을 대주(大珠)스님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마조스님 문하에서 대주스님의 위치를 본다면 마조스님 비문에서나 [경덕전등록], [조당집]에서나 모두 스님을 마조 스님 수제자(首第子)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덕전등록]에 1700여명의 큰 스님 법문이 실려 있지만, 그 중에서도 대주 스님의 법문이 가장 많이 실려있고 제 28권에도 다시 스님의 긴 법어가 따로 실려 있습니다.

마조스님의 정맥은 백장(百丈)스님에게로 내려갔다고 하는 것이 선가의 정설로 되어 있지만, 그 당시에는 백장(百丈)스님, 남전(南泉)스님, 법상(法常)스님들보다 대주스님이 더 유명하였으며 천하에 이름을 더 날렸습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돈오입도요문론]은 당대에 명성을 떨친 대주 스님의 저술이고 또 선가의 대조사이신 마조스님이 극찬한 책이므로 선종(禪宗)의 정통사상을 아는데 있어서 말할 수 없이 귀중한 자료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또 한가지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육조단경(六祖壇經)] 이라든가, [전심법요(傳心法要)]라든가, [백장광록(百丈廣錄)]이라든가 하는 선종의 어록들이 많이 있지만 이러한 어록들은 당시 사람들이나 후세 사람들이 그 스님이 입적 하신뒤에 그 법문을 기록하거나 수집한 것이지 본인들이 직접 편찬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돈오입도요문론]은 대주스님이 직접 저술하였으므로 거기에 가필이나 착오가 없다고 보며 다른 어떠한 어록보다도 완전한 것이라고 학자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마조스님이 인가하신 논이니 만큼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정확하게 기술한 것으로서, 선종 초기의 근본사상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증도가(證道歌)와 함께 가장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돈오(頓悟)란 구경각(究竟覺)을 말합니다. 즉 근본 무명이 완전히 끊어져서 중도(中道)를 정등각(正等覺)하여 진여본성(眞如本性)을 깨친 증오(證悟)를 말하는 것입니다. 중도를 정등각한 구경각을 돈오라고 하는 만큼, 입도(入道)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성불과 같은 뜻으로서 증도라는 말과 뜻이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돈오입도요문론]은 영가스님의 [증도가]와 그 사상과 내용이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돈오입도요문론 차례 ♠♠♠

1. 불보살(佛菩薩)께 헌사(獻辭) 2. 돈오(頓悟)
3. 선정(禪定) 4. 무주처(無住處)와 무주심(無住心)
5. 자성견(自性見) 6. 열반경(涅槃經)의 이구(二句)
7. 불견유무(不見有無)가 진해탈(眞解脫) 8. 무소견(無所見)
9. 돈오문(頓悟門)의 종지(宗旨)와 체용(體用)
10.돈오(頓悟)는 단바라밀(檀波羅蜜)로부터
11.삼학(三學)을 힘쓰다. 12.무생심(無生心)
13.상주(常住) 14.오종법신(五種法身)
15.등각(等覺)과 묘각(妙覺) 16.설법(說法)
17.금강경(金剛經)의 경전(輕賤) 18.여래(如來)의 오안(五眼)
19.대승(大乘)과 최상승(最上乘) 20.정혜(定慧)를 함께 씀
21.경상(鏡像)과 정혜(定慧) 22.언어도단심행처멸(言語道斷心行處滅)
23.여여(如如) 24.즉색즉공(卽色卽空)
25.진(盡)과 무진(無盡) 26.불생불멸(不生不滅)
27.불계(佛戒)는 청정심(淸淨心) 28.불(佛)과 법(法)의 선후(先後)
29.설통(說通)과 종통(宗通) 30.도(度)와 부도(不度)
31.부진유위(不盡有爲)며 부주무위(不住無爲) 32.지옥유무(地獄有無)
33.중생(衆生)과 불성(佛性) 34.삼신사지(三身四智)
35.불진신(佛眞身) 36.항상 부처님을 떠나지 아니함
37.무위법(無爲法) 38.중도(中道)
39.오음(五陰) 40.이십오유(二十五有)
41.무념(無念)과 돈오(頓悟) 42.중생자도(衆生自度)
43.동처부동주(同處不同住) 44.일체처(一切處)에 무심(無心)
45.필경정(畢竟淨) 46.필경증(畢竟證)
47.진해탈(眞解脫) 48.필경득(畢竟得)
49.필경공(畢竟空) 50.진여정(眞如定)
51.중도(中道)는 일체처무심(一切處無心) 52.일체처무심(一切處無心)이 해탈-解脫


1. 불보살[佛菩薩]께 헌사[獻辭]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대보살님들께 머리 숙여 예배를 올립니다.
부처님의 제자인 제가 이 논을 지었으나 부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였을까 두려우니 부디 참회를 받아 주십시오. 만약 부처님의 이치를 알았거든 일체 유정의 중생에게 모두 회향하여 내세(來世)에 다 함께 성불하기를 바라옵니다.


2. 돈오(頓悟)

"어떤 법을 닦아야 곧 해탈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돈오의 한 문[一門]만이 곧 해탈을 얻을 수 있느니라."
"어떤 것을 돈오(頓悟)라고 합니까?"
"돈(頓)이란 단박에 망념(妄念)을 없앰이요, 오(悟)란 얻은 바 없음[無所得]을 깨치는 것이니라."
"무엇부터 닦아야 합니까?"
"근본(根本)부터 닦아야 하느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근본부터 닦는 것입니까?"
"마음이 근본이니라."
"마음이 근본임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능가경]에 이르기를 '마음이 나면 갖가지 법이 나고 마음이 없어지면 갖가지 법이 없어진다'고 하였고, [유마경]에 이르기를 '정토(淨土)를 얻고자 하면 마땅히 그 마음을 깨끗이 하여야 하나니 그 마음 깨끗함을 따라 불국토가 깨끗해진다' 하였고, [유교경]에 이르기를 '마음을 한곳으로 통일하여 제어하면 성취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 고 하였고, 어떤 경에서는 '성인은 마음을 구하나 부처를 구하지 아니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부처를 구하면서 마음을 구하지 아니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다스리나 몸을 다스리지 아니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몸은 다스리나 마음을 다스리지 아니한다'고 하였고, [불명경]에 이르기를 '죄는 마음에서 났다가 다시 마음을 좇아서 없어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선악과 일체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임을 알지니, 그런 까닭에 마음이 근본이니라. 만약 해탈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모름지기 근본을 알아야 한다. 만약 이런 이치를 통달하지 못하고 쓸데없이 노력을 허비하여 바깥 모양에서 구한다면 옳지 않느니라. [선문경]에 이르기를 '바깥 모양에서 구한다면 비록 몇 겁을 지난다 해도 마침내 이루지 못할 것이요, 안으로 마음을 관조하여 깨치면 한 생각 사이에 보리를 증득한다'고 하였느니라."

3. 선정(禪定)

"근본을 닦으려면 무슨 법으로써 닦아야 합니까?"
"오직 좌선하여 선정을 하면 얻을 수 있느니라. [선문경]에 이르기를 '부처님의 성스러운 지혜인 일체종지(一切種智)를 구할진댄 곧 선정(禪定)이 요긴한 것이니, 만약 선정이 없으면 망상이 시끄럽게 일어나서 그 선근(禪根)을 무너뜨린다' 고 하였느니라."
"어떤 것을 선(禪)이라 하며 어떤 것을 정(定)이라 합니까?"
"망념(妄念)이 일어나지 아니함이 선(禪)이요, 앉아서 본성(本性)을 보는 것이 정(定)이니라. 본성이란 너의 무생심(無生心)이요, 정이란 경계를 대(對)함에 무심하여 팔풍(八風)에 움직이지 아니함이니라. 팔풍이란, 이로움과 손실(利.衰), 헐뜯음과 높이 기림(毁.譽), 칭찬함과 비웃음(稱.譏), 괴로움과 즐거움(苦.樂)을 말하느니라. 만약 이와 같이 정(定)을 얻은 사람은 비록 범부(凡夫)라고 하더라도 부처님 지위(佛位)에 들어 가느니라.
왜냐하면 [보살계경(菩薩戒經)]에 이르기를 '중생이 부처님계(佛戒)를 받으면 곧 모든 부처님 지위에 들어간다' 고 하였으니 이와 같이 얻은 것을 '해탈' 이라고 하며 또 '피안에 이르렀다'고 하느니라. 이는 육도(六度)를 뛰어넘고 삼계(三界)를 벗어난 대력보살(大力菩薩)이며 무량력존(無量力尊)이니 대장부(大丈夫)인 것이니라."

4. 무주처(無住處)와 무주심(無住心)

"마음이 어느 곳에 머물러야 곧 머무는 것입니까?
"머무는 곳이 없는데 머무는 것이 곧 머무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머무는 곳이 없는 것입니까?"
"일체처(一切處)에 머물지 아니함이 곧 머무는 곳 없는데 머무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일체처(一切處)에 머물지 아니하는 것입니까?"
"일체처에 머물지 아니한다 함은 선악(善惡).유무(有無).내외(內外).중간(中間)에 머물지 아니하며, 공(空)에도 머물지 아니하며, 공(空) 아님에도 머물지 아니하며, 선정(禪定)에도 머물지 아니하며, 선정 아님에도 머물지 아니함이 일체처에 머물지 아니함이니, 다만 일체처에 머물지 아니하는 것이 곧 머무는 곳이니라. 이와 같이 얻은 것을 머물음이 없는 마음(無住心) 이라 하는 것이니 머물음이 없는 마음이란 부처님의 마음이니라."
"그 마음은 어떤 물건과 같습니까?"
"그 마음은 푸르지도 않고 누르지도 않으며, 붉지도 않고 희지도 않으며,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으며,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아니하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아니하며,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아니하여, 담연(湛然)하고 항상 고요한 이것이 본래 마음의 형상이며 또 본래 몸이니 본래의 몸이란 곧 부처님의 몸이니라."


5. 자성견(自性見)

"몸과 마음은 무엇으로써 보는 것입니까, 눈으로 봅니까, 귀로 봅니까,
몸과 마음 등으로 봅니까?"
"보는 것은 여러 가지로 보는 것이 없느니라."
"이미 여러 가지로 보는 것이 없을진댄 다시 어떻게 보는 것입니까?"
"이것은 자성(自性)으로 보는 것이니라. 왜냐하면 자성이 본래 청정하여 담연히 비고 고요하므로, 비고 고요한 본체(體) 가운데서 이 보는 것[見]이 능히 나느니라."
"다만 청정의 본체조차도 오히려 얻을 수 없는데 이 보는 것은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비유하면 밝은 거울 가운데 비록 모양이 없으나 일체 모양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으니, 왜냐하면 밝은 거울이 무심이기 때문이니라. 배우는 사람이 만약 마음에 물든 바 없어 망심이 나지 아니하고 주관과 객관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자연히 청정한 것이니, 청정한 까닭에 능히 이 보는 것이 생겨나느니라. [법구경]에 이르기를 '필경의 공 가운데서 불꽃 일듯 건립함이 선지식이다' 고 하였느니라.


6. 열반경(涅槃經)의 이구(二句)

"[열반경] 금강신품(金剛身品)에 이르기를 '볼 수 없되 분명하고 밝게 볼 수 있어 아는 것도 없고 알지 못하는 것도 없다' 하니 무슨 뜻입니까?"
" '볼 수 없다'는 것은 자성의 본체가 모양이 없어서 얻을 수 없는 까닭에 볼 수 없다고 하느니라. 그러나 '얻을 수 없는 것을 보는 것'은 자성의 본체가 공적하고 담연하여 가고 옴이 없으나 세간의 흐름을 여의지 않으니 세간의 흐름이 능히 흐르지도 아니하여 탄연히 자재[自在]함이 곧 '분명하고 밝게 보는 것' 이니라.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은 자성의 모양이 없어서 본래 분별(分別)이 없음을 이름하여 아는 것이 없다고 하느니라.
'알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은 분별이 없는 본체 가운데 항사묘용을 갖추어서 능히 일체를 분별하여 알지 못하는 일이 없으니 이를 이름하여 알지 못할 것이 없다고 하느니라.
[반야(般若)의 게송]에 이르기를 '반야(般若)는 아는 것이 없으나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반야는 보지 못하나 보지 못하는 것이 없다' 고 하였느니라."


7. 불견유무[不見有無]가 진해탈[眞解脫]

"경에서 이르기를 '있음(有)과 없음(無)을 보지 않는 것이 참다운 해탈이다'고 하시니 어떤 것이 있음과 없음을 보지 않는 것입니까?"
"깨끗한 마음을 증득하였을 때를 곧 '있음'이라 하고, 그 가운데서 깨끗한 마음을 얻었다는 생각이 나지 않음이 곧 '있음'을 보지 못한다고 하느니라.
나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는다는 생각을 얻고서, 나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는다는 생각을 짓지 않는 것이 곧 '없음'을 보지 못함이니, 그런 까닭에 `있음과 없음'을 보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니라.
[능엄경]에 이르기를 '지견(知見)에 앎(知)을 세우면 무명(無明)의 근본이 되고 지견에 보는 것이 없으면 이것이 곧 열반이며 또한 해탈이라 한다'고 하였느니라."


8. 무소견(無所見)

"어떤 것이 보는 바가 없는 것입니까?"
"만약 남자나 여자 및 일체 색상을 보되 그 가운데에 사랑함과 미워함[愛憎]을 일으키지 아니하여 보지 못함과 더불어 같은 것이 곧 보는 바가 없는 것이니라."
"일체 색상을 대할 때는 곧 본다고 하거니와 색상을 대하지 않을 때도 또한 본다고 할 수 있읍니까?"
"보느니라."
"물건을 대할 때는 설령 보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물건을 대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서 보는 것이 있읍니까?"
"지금 내가 본다고 하는 것은 물건을 대하거나 물건을 대하지 않거나를 논(論)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다고 하는 그 성품은 영원한 까닭에 물건이 있을 때도 보고 물건이 없을 때도 또한 보는 것이니라. 그런 까닭에 물건에는 본래 스스로 가고 옴(去來)이 있으나 본다는 성품에는 가고 옴이 없음을 알지니, 다른 모든 감각 기관도 또한 이와 같느니라."
"바로 물건을 볼 때에 보는 가운데 물건이 있읍니까?"
"보는 가운데 물건이 서지 못 하느니라."
"바로 물건이 없음을 볼 때 보는 가운데 물건이 없읍니까?"
"보는 가운데는 물건 없는 것도 서지 못하느니라."
"소리가 있을 때는 곧 들을 수 있거니와 소리가 없을 때에도 들을 수 있읍니까?"
"역시 듣느니라."
"소리가 있을 때엔 설령 들을 수 있다고 하지만 소리가 없을 때는 어떻게 듣습니까?"
"지금 '듣는다'고 하는 것은 소리가 있거나 없거나를 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듣는다'는 자성은 영원한 까닭에 소리가 있을 때도 듣고 소리가 없을 때도 또한 듣느니라."
"이렇게 듣는 자는 누구입니까?"
"이는 자기의 성품이 듣는 것이며 또한 아는 이가 듣는다고 하느니라."


9. 돈오문(頓悟門)의 종지(宗旨)와 체용(體用).

1. 종지와 체용

"이 돈오문은 무엇으로써 종취(宗趣)를 삼고 무엇으로써 참 뜻(旨)을 삼고 무엇으로써 본체로 삼으며 무엇으로써 작용(用)으로 삼는 것입니까?"
"무념을 종취로 삼고 망심이 일어나지 않음을 참 뜻으로 삼으며 청정을 본체로 삼고 지혜로써 작용을 삼느니라."
"이미 무념으로 종취를 삼는다고 말씀할진댄 무념이란 어떤 생각이 없는 것입니까?"
"무념이란 삿된 생각이 없음이요 바른 생각이 없다는 것이 아니니라."
"어떤 것이 삿된 생각이며 어떤 것이 바른 생각입니까?"
"있음(有)을 생각하고 없음(無)을 생각하는 것이 삿된 생각이요 있음과 없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바른 생각이니라. 괴로움[苦]과 즐거움[樂], 나는 것[生]과 없어짐[滅], 취함[取]과 버림[捨], 원망(怨)과 친함(親), 미워함(憎)과 사랑함(愛)을 생각하는 것이 모두 삿된 생각이요, 괴로움과 즐거움 등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바른 생각이니라."
"어떤 것이 바른 생각입니까?"
"바른 생각이란 오직 보리(菩提)만을 생각하는 것이니라."
"보리는 얻을 수 있습니까?"
"보리는 얻을 수 없느니라."
"이미 얻을 수 없을진댄 어떻게 오직 보리만 생각합니까?"
"보리는 다만 거짓으로 이름을 세운 것이라 실지로 얻을 수 없으며 또한 과거에도 미래에도 얻을 수 없으니 얻을 수 없는 까닭에 곧 생각 있음이 없느니라.
오직 이 무념을 진실한 생각이라 하는 것이니 보리는 생각할 바가 없는 것이니라.
생각하는 바가 없다는 것은 곧 일체처에 무심함이 생각하는 바가 없음이니, 다만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무념이란 모두가 일에 따라 방편으로 거짓 이름을 세운 것인지라 모두가 하나의 본체로서 같음이요 둘도 없고 다름도 없는 것이니라.
다만 일체처에 무심함을 알면 곧 이것이 무념이니 무념을 얻을 때에 자연해탈이니라."
"어떻게 하여야 부처님의 행을 하는 것입니까?"
"일체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부처님 행동이라 하며 또 바른 행동이라 하며 또 성스러운 행동이라 함이니,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있음과 없음 미워함과 사랑함 등을 행하지 않는 것이니라.
[대율]5권 보살품에서 이르기를 '일체 성인들은 중생의 행동을 행하지 않고 중생들은 이와 같은 성인의 행동을 행하지 않는다'고 하였느니라."
"어떤 것이 바로 보는 것입니까?"
"보는 바 없음을 보는 것을 곧 바로 보는 것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보는 바 없음을 보는 것이라 합니까?"
"일체 색을 볼 때에 물들거나 집착함을 일으키지 아니함이니, 물들거나 집착하지 아니한다 함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므로 곧 보는 바 없음을 본다고 하는 것이니라.
만약 보는 바 없음을 보는 것을 얻었을 때 곧 부처님의 눈이라 하나니 다시 별다른 눈이란 없느니라.
만약 일체 색을 볼 때에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되면 보는 바가 있다고 하는 것이니 보는 바가 있음이 곧 중생의 눈이니라. 다시 별다른 눈을 가지고 중생의 눈이라 할 것이 없으니, 내지 다른 오근(五根)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2. 이성공(二性空)

"이미 지혜로써 작용을 삼는다고 말씀 하셨는데 어떤 것이 지혜입니까?
"두 가지 성품이 공(空)한 줄 아는 것이 곧 해탈이며 두 가지 성품이 공하지 않은 줄 알면 해탈을 얻지 못하나니 이것을 지혜라 하며 또 삿됨과 바름을 요달하였다고 하며 또 본체와 작용을 안다고 하느니라.
두 가지 성품이 공했다고 하는 것은 있음과 없음, 선과 악, 사랑함과 미워함이 나지 아니한 것을 이름하여 두 가지 성품이 공하다고 하느니라."


10. 돈오(頓悟)는 단바라밀(檀波蘿蜜)로부터

"이 돈오의 문은 어디로부터 들어갑니까?"
"단바라밀(檀波羅蜜)로부터 들어가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육바라밀이 보살의 행(行)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무슨 까닭으로 단바라밀 하나만을 말씀하시며 어떻게 구족하여야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미혹한 사람은 다섯 바라밀이 모두 단바라밀로 말미암아 나는 것인줄 알지 못한 것이니 오직 단바라밀만을 수행하면 곧 육바라밀을 모두 구족하는 것이니라."
"어떤 인연으로 단바라밀이라고 합니까?"
"단(檀)이란 보시(布施)를 말하느니라."
"어떤 물건을 보시하는 것입니까?"
"두 가지 성품을 보시해 버리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두 가지 성품입니까?"
"선과 악의 성품을 보시해 버리는 것이며, 있음과 없음의 성품, 사랑함과 미워함의 성품, 공과 공 아님의 성품, 정과 정 아님의 성품과 깨끗함과 깨끗하지 아니함의 성품을 보시해 버려서 일체 모든 것을 전부 보시해 버리면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을 얻느니라.
만약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을 얻을 때에 또한 두 가지 성품이 공하다는 생각을 짓지 아니하며 또 보시한다는 생각을 짓지 아니함이 곧 진실로 보시바라밀을 실행하는 것이니 만 가지 인연이 함께 끊어진다고 하느니라. 만 가지 인연이 함께 끊어진다 함은 곧 일체 법의 성품이 공한 것이니, 법의 성품이 공하다 함은 곧 일체처에 무심함이니라.
만약 일체처에 무심함을 얻었을 때에는 한 모양(一相)도 얻을 수 없으니, 왜냐하면 자성이 공한 까닭에 한 모양도 얻을 수 없느니라.
한 모양도 얻을 수 없다 함은 곧 실상이니 실상이란 여래의 묘한 색신의 모양이니라.
[금강경]에 이르기를 '일체의 모든 모양을 여의는 것이 곧 모든 부처님이라 한다' 고 하였느니라."
"부처님은 육바라밀을 말씀하셨는데 지금 어떻게 하나를 말하며 능히 구족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바라건대 하나가 여섯 가지 법을 구족하는 까닭을 말씀해 주십시요."
[사익경]에 이르기를 '망명존이 범천에게 말하되
[만약 보살이 일체의 번뇌를 버리면 단바라밀이라고 하나니 곧 보시요,
모든 법에 대해서 일어나는 바가 없음이 시라바라밀이라고 하나니 곧 지계요,
모든 법에 대하여 손상하는 바가 없음이 찬제바라밀이라 하나니 곧 인욕이요,
모든 법에 대해서 모양을 떠남이 비리야바라밀이라 하나니 곧 정진이요,
모든 법에 대해서 머무는 바가 없음이 선바라밀이라 하나니 곧 선정이요,
모든 법에 대해서 희론이 없음이 반야바라밀이라 하니니 곧 지혜이니라.
이것을 이름하여 여섯 가지 법이라 한다]'고 하였느니라.
지금 다시 여섯 가지 법에 이름을 붙이면 첫째는 버림과 둘째는 일어나지 아니함과 셋째는 손상하지 않음과 넷째는 모양을 떠남과 다섯째는 머물지 않음과 여섯째는 희론이 없음과 다르지 않느니라. 이와 같은 여섯 가지 법은 일에 따라 방편으로 거짓 이름을 세움이요, 묘한 이치에 이르러서는 둘도 없고 다름도 없느니라.
다만 하나를 버릴 줄 알면 일체를 버림이요, 하나가 일어나지 않으면 곧 일체가 일어나지 않거늘 미혹한 사람은 알지 못하고 차이가 있다고 모두 말하느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여섯 가지 법의 숫자에 머물러서 오래도록 생사에 윤회하는 것이니라.
너희들 도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말하나니, 다만 보시의 법만을 닦으면 만법이 두루 원만해지거늘 하물며 다섯 가지 법이 어찌 구족하지 않겠는가."


11. 삼학(三學)을 함께 쓰다.

"삼학을 함께 쓴다 하니 어떤 것이 삼학이며 어떤 것이 함께 쓰는 것입니까?"
"삼학이란 계.정.혜니라."
"어떤 것을 계.정.혜라 합니까?"
"청정하여 물들지 아니함이 계요,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함을 알아 경계를 대하여 고요함이 정이요,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함을 알 때에 움직이지 아니한다는 생각도 나지 아니하며 마음이 청정함을 알 때에 청정하다는 생각도 나지 아니하여 내지 선. 악을 모두 능히 분별하되 그 가운데에 물들지 아니하여 자재를 얻음을 혜라고 하느니라. 만약 계.정.혜의 본체가 모두 얻을 수 없는 것임을 알 때에 곧 분별함이 없어서 곧 동일의 본체이니 이것이 삼학을 함께 쓴다고 하는 것이니라."


12. 무생심(無生心)

"만약 마음이 청정함에 머물 때에는 청정함에 집착하는 것이 아닙니까?"
"청정함에 머뭄을 얻었을 때에 청정함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을 짓지 않는 것이 청정함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니라."
"마음이 공에 머물 때에는 공에 집착한 것이 아닙니까?"
"만약 공하다는 생각을 짓는다면 곧 공에 집착한 것이니라."
"만약 마음이 머뭄이 없는 곳에 머물 때에 머뭄이 없는 곳에 집착한 것이 아닙니까?"
"다만 공한 생각을 지으면 곧 집착할 곳이 없으니 네가 만약 머물 바 없는 마음을 분명하고 밝게 알고저 할진댄 바로 좌선할 때에 다만 마음만 알고, 모든 사물을 생각하여 헤아리지 말며 모든 선악을 생각하여 헤아리지 말라.
과거의 일은 이미 지나가 버렸으니 생각하여 헤아리지 아니하면 과거의 마음이 스스로 끊어지니 곧 과거의 일이 없다고 함이요, 미래의 일은 아직 다가오지 않았으니 원하지도 아니하고 구하지도 아니하면 미래의 마음이 스스로 끊어지니 곧 미래의 일이 없다고 함이요, 현재의 일은 이미 현재라 일체의 일에 집착함이 없음을 알뿐이니, 집착함이 없다 함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음이 곧 집착함이 없음인지라 현재의 마음이 스스로 끊어져서 곧 현재의 일이 없다고 하느니라. 삼세를 거두어 모을 수 없음이 또한 삼세가 없다고 말하느니라.
마음이 만약 일어날 때에 따라가지 아니하면 가는 마음이 스스로 끊어져 없어짐이요, 만약 마음이 머물 때에 또한 머뭄에 따르지 아니하면 머무는 마음이 스스로 끊어져서 머무는 마음이 없음이니, 이것이 머무는 곳 없는 곳에 머문다고 하느니라.
만약 밝고 밝게 스스로 알아 머뭄이 머뭄에 있을 때에는 다만 사물이 머물 뿐이요 또한 머무는 곳이 없으면 머무는 곳 없음도 없느니라.
만약 밝고 밝게 스스로 알아 마음이 일체처에 머물지 아니하면 곧 본래 마음[本心]을 밝고 밝게 본다고 하는 것이며, 또한 성품을 밝고 밝게 본다고 하느니라.
만약 일체처에 머물지 아니하는 마음이란 곧 부처님 마음[佛心]이며, 또한 해탈심이며, 또한 보리심이며, 또한 무생심이며, 또한 색의 성품이 공함이라 이름하나니, 경에 이르기를 '무생법인을 증득했다'고 함이 이것이니라.
너희들이 만약 이와 같이 아직 체득하지 못하였을 때는 노력하고 노력하여 부지런히 공력을 더하여 공부를 성취하면 스스로 알 수 있으니, 그러므로 안다고 하는 것은 일체처에 무심함이 곧 아는 것이니라.
무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되어 참되지 않음이 없으니, 거짓됨이란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인 것이며 참됨이란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니라. 다만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곧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이니,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이란 자연해탈이니라."


13. 상주(常住)

"앉아서만 쓸 수 있는 것입니까, 다닐 때도 또한 쓸 수 있는 것입니까?"
"지금 공(功)을 쓴다고 말함은 단지 앉아 있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하는 짓는 바 움직이는 모든 때 가운데 항상 써서 사이가 끊어짐이 없음이 항상 머문다고 하느니라."


14. 오종법신(五種法身)

[방광경(方廣經)]에 이르기를 '다섯 가지 법신은 첫째는 실상 법신이요, 둘째는 공덕법신이요, 셋째는 법성법신이요, 넷째는 응화법신이요, 다섯째는 허공법신이다'고 하였는데, 자기의 몸에는 어떤 것이 이것입니까?
"마음이 무너지지 아니함을 아는 것이 실상 법신이며, 마음이 만상을 포함하는 것을 아는 것이 공덕법신이며, 마음이 무심임을 아는 것이 법성법신이며, 근기 따라 응하여 설법함이 응화법신이며, 마음이 형상이 없어 얻을 수 없음을 아는 것이 허공법신이니, 만약 이 뜻을 확실히 아는 이는 곧 증득할 것이 없음을 아느니라.
얻음도 없고 증득함도 없음이 곧 불법법신을 증득한 것이요, 만약 증득함이 있고 얻음이 있음을 증득으로 삼는 이는 곧 삿된 견해의 증상만인이며 외도라고 하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유마경]에 이르기를 '사리불이 천녀에게 묻되 그대는 얻은 바가 무엇이며 증한 바가 무엇이기에 말재주가 이와 같으냐' 하고 물으니, 천녀가 대답하기를 '나는 얻음도 없고 증함도 없어서 이와 같음을 얻었오. 만약 얻음이 있고 증함이 있으면 불법 가운데에 증상만인이 되는 것이오' 라고 하였느니라.


15. 등각(等覺)과 묘각(妙覺)

"경에 이르기를 '등각, 묘각'이라 하니, 무엇이 등각이며 무엇이 묘각입니까?
"색(色)에 즉하고 공(空)에 즉함이 등각이요, 두 가지 성품이 공한(二性空) 까닭에 묘각이라 하며, 또한 깨달음이 없음과 깨달음이 없음도 없음을 일컬어 묘각이라 하느니라."
"등각과 묘각이 다릅니까, 다르지 않습니까?"
"일에 따라 방편으로 거짓 두 이름을 세운 것으로서, 본체는 하나요, 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니 내지 일체법이 모두 그러하니라."


16. 설법(說法)

"[금강경]에 이르기를 '설할 법이 없음이 법을 설함이다'하니 그 뜻이 무엇입니까?
"반야의 체는 필경 청정하여 한 물건도 얻을 수 없음이 설할 법이 없다고 함이요, 반야의 공적한 본체 가운데에 항사의 묘용을 갖추어서 알지 못할 일이 없음이 법을 설한다고 함이니, 그러므로 설할 법이 없음이 법을 설함이라고 하느니라."


17. 금강경의 경천(輕賤)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수지 독송하여 사람들에게 경멸과 천대를 받게 되면 이 사람은 전세의 죄업으로 마땅히 악도에 떨어질 것이지만 금세의 사람들의 경멸과 천대를 받음으로 해서 전세의 죄업이 곧 소멸하여 마침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는데, 그 뜻이 무엇입니까?"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대선지식을 아직 만나지 못하여 오직 악업만 짓고 청정한 본래 마음이 삼독의 무명에 덮여서 능히 나타나지 못하므로 사람들에게 경멸과 천대를 받는다고 말한 것이니라. 금세의 사람들에게 경멸과 천대를 받는 것은, 곧 오늘 발심하여 불도를 구함으로 무명이 다 없어지고 삼독이 나지를 아니해서 곧 본래 마음이 명랑하고 다시 어지러운 생각이 없으며, 모든 악이 영원이 없어져 버리므로써 금세 사람의 경멸과 천대를 받는다고 하느니라. 무명이 모두 없어져서 어지러운 생각이 나지 아니하면 자연히 해탈한 것이므로 마땅히 보리를 얻는다고 하는 것이니, 곧 발심한 때를 금세라 하는 것이요, 격생이 아니니라."


18. 여래(如來)의 오안(五眼)

"또 여래의 다섯 가지 눈이란 어떤 것입니까?"
"색의 청정함을 보는 것이 육안이요, 색의 본체가 청정함을 보는 것이 천안이요, 모든 색의 경계와 내지 선악에 대해서 모두 미세하게 분별하여 물듦이 없고 그 가운데 자제함이 혜안이요, 보아도 보는 바가 없음이 법안이요, 보는 것이 없고 보는 것이 없음도 없는 것이 불안이라고 하느니라."


19. 대승(大乘)과 최상승(最上乘)

"또 대승과 최상승의 뜻은 어떠합니까?"
"대승이란 보살승이요, 최상승이란 불승이니라."
"어떻게 닦아야 이 승을 얻습니까?"
"보살승을 닦음이 대승이니 보살승을 증득하여 다시 관(觀)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닦을 곳이 없음에 이르러 담연히 항상 고요하여 늘지도 아니하고 줄지도 아니함이 최상승이니 곧 이것이 불승이니라."

20. 정혜(定慧)를 함께 씀

"[열반경]에 이르기를 '선정은 많고 지혜가 적으면 무명을 떠나지 못하며 선정은 적고 지혜가 많으면 삿된 견해를 증장하며 선정과 지혜를 함께 하는 까닭에 해탈이다'고 하니, 그 뜻이 무엇입니까?"
"일체 선악에 대하여 모든 것을 분별함이 지혜요, 분별하는 곳에 애증을 일으키지 아니하며 물드는 바에 따라가지 아니함이 선정이니, 곧 선정과 지혜를 함께 쓰는 것이니라."



21. 경상(鏡像)과 정혜(定慧)

"말이 없고 설함이 없음이 곧 선정이라 하니, 바로 말하고 설할 때도 선정이라 할 수 있습니까?"
"지금 선정이라고 하는 것은 말함과 말하지 않음을 논하지 않고 항상 선정인 것이니라. 왜냐하면 선정의 본성을 쓰기 때문에 말하거나 분별할 때에 곧 말하거나 분별함도 선정이기 때문이니라. 만약 공(空)한 마음으로 색(色)을 볼 때에는 색을 볼 때도 또한 공이며, 만약 색을 보지 아니하고 말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을 때도 또한 공이며, 내지 보고 듣고 깨닫고 알 때에도 역시 이와 같느니라. 왜냐하면 자성이 공하기 때문에 곧 일체처에 있어서 모두 공한 것이니, 공이란 곧 집착이 없음이며 집착이 없음이 곧 선정과 지혜를 함께 쓰는 것이니라. 보살이 항상 이와 같이 공 그대로[等空]의 법을 써서 구경에 이르는 까닭에 선정과 지혜가 함께 함을 곧 해탈이라고 하느니라."
"지금 다시 그대들을 위하여 비유로써 나타내 보여 그대들로 하여금 분명하게 알아서 의심을 끊게 하리라.
'비유컨대 밝은 거울이 모습을 비출 때에 그 밝음이 움직이느냐?'
'움직이지 않습니다.'
'비추지 아니할 때도 또한 움직이느냐?'
'움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밝은 거울의 작용에는 밝게 비친다는 정(情)이 없으므로 비출 때도 움직이지 않고 비추지 아니할 때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니라. 어째서 그러냐 하면 분별의 정(情)이 없는 가운데에는 움직이는 것도 없고 움직이지 않는 것도 없기 때문이니라. 또,
'햇빛이 세상을 비출 때 그 빛이 움직이느냐?'
'움직이지 않습니다.'
'만약 비추지 않을 때도 움직이느냐?'
'움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빛이 분별의 정(情)이 없기 때문이니 정이 없음으로써 빛이 비추므로 움직이지 아니하며 비추지 않을 때도 또한 움직이지 아니 하느니라. 비춘다 함은 지혜요, 움직이지 아니한다 함은 선정이니 보살이 선정과 지혜를 함께한 법을 써서 삼먁삼보리를 얻는 까닭에 선정과 지혜를 함께 씀이 곧 해탈이라고 하느니라. 지금 정(情)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범부의 정이 없음이요, 성인의 정이 없는 것이 아니니라"
"어떤 것이 범부의 정이며 어떤 것이 성인의 정입니까?"
"만약 두 가지 성품을 일으키면 곧 범부의 정이요, 두 가지 성품이 공(空)하기 때문에 곧 성인의 정이니라."

22. 언어도단심행처멸(言語道斷心行處滅)

"경에 이르기를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가는 곳이 없어진다'고 하니 그 뜻이 어떠합니까?"
"말로써 뜻을 나타냄에 뜻을 얻으면 말이 끊어지니 뜻이 곧 공함이요, 공함이 곧 도인지라, 도는 곧 말이 끊어진 까닭에 언어의 길이 끊어졌다고 하느니라.
마음가는 곳이 없어진다고 하는 것은 중도실제의 뜻을 얻어서 다시 관(觀)을 일으키지 아니함을 말함이니, 관(觀)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곧 나는 것이 없음(無生)이니라. 나는 것이 없는 까닭에 곧 모든 색의 성품이 공한 것이니 색의 성품이 공한 까닭에 곧 만가지 인연이 함께 끊어짐이요, 만가지 인연이 함께 끊어짐이 곧 마음가는 곳이 없어진 것이니라."


23. 여여(如如)

"여여란 어떤 것입니까?"
"여여(如如)란 움직이지 아니한다는 뜻이니 마음이 진여인 까닭에 여여라고 하느니라. 과거 모든 부처님들도 이 여여행을 행해서 성도하셧고 현재의 부처님도 이 여여행을 행해서 성도하시고 미래의 부처님도 이 여여행을 행해서 또한 성도하실 것이니, 삼세에 닦아 증한 바의 도가 다름이 없으므로 여여라 함을 알지니라. [유마경]에 이르기를 '모든 부처님들도 또한 같으며 미륵에 이르러도 또한 같으며 내지 일체 중생에 이르러도 모두 같다. 왜냐하면 불성이란 끊어지지 아니하고 있는 성품이기 때문이니라'고 하였느니라."


24. 즉색즉공(卽色卽空)

"색에 즉하고 공에 즉하며 범에 즉하고 성에 즉함이 돈오입니까?"
"그러니라."
"어떤 것이 색에 즉하고 공에 즉함이며 어떤 것이 범부에 즉하고 성인에 즉한 것입니까?"
"마음에 물듦이 있음이 곧 색이요, 마음에 물듦이 없음이 곧 공이며, 마음에 물듦이 있음이 곧 범부요 마음에 물듦이 없음이 곧 성인이니라. 또한 진공묘유이므로 곧 색이요, 색을 얻을 수 없으므로 곧 공이니, 지금 공이라고 말한 것은 이 색의 성품이 스스로 공함이요 색이 없어져서 공한 것은 아니니라. 지금 색이라고 하는 것은 이 공의 성품이 스스로 색이요, 색이 능히 색인 것은 아니니라."

25. 진(盡)과 무진(無盡)

"경에 이르기를 '다함과 다함 없음의 법문'이란 무슨 뜻입니까?"
"두 가지 성품이 공한 까닭에 보고 들음이 나지 않음이 다함[盡]이니 다함이란 모든 망루(妄漏)가 다함이며, 다함이 없음은 남이 없는 본체 가운데 항하사의 묘용을 갖추고 있어서 일을 따라 응하여 나타나서 모두 다 구족하여, 본체 가운데에 손감이 없음을 다함이 없다고 하는 것이니, 이것이 곧 다함과 다함 없음의 법문인 것이니라."
"다함과 다함 없음이 하나입니까, 다릅니까?"
"본체는 하나이나 말하면 다름이 있느니라."
"본체가 이미 하나일진댄 어째서 다름을 말씀하십니까?"
"하나라 함은 말의 본체[體]요, 말함은 본체의 작용이니 일을 따라서 응용하는 까닭에 본체는 같으나 말함은 다르다고 하는 것이니라.
비유하면 천상의 한 해[日] 아래 여러가지 그릇들을 놓아두고 물을 채우면 하나하나의 그릇 가운데 모두 해가 있어서, 모든 그릇 가운데의 해가 다 원만하여 하늘 위의 해와 아무런 차별이 없는 까닭에 본체는 같다고 말하는 것이요, 그릇에 따라 이름을 세워서 곧 차별이 있으므로 다른 것이니라. 그러므로 본체는 같으나 말하면 곧 다름이 있다고 하느니라.
그릇에 나타난 모든 해가 모두 원만하여 하늘의 본래 해와 또한 손감이 없는 까닭으로 다함이 없다고 하느니라."

26. 불생불멸(不生不滅)

"경에 이르기를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하니 어떤 법이 나지 아니하며 어떤 법이 없어지지 아니하는 것입니까?"
"착하지 않음이 나지 않음이요, 착한 법은 없어지지 아니 하느니라."
"어떤 것이 착함이며, 어떤 것이 착하지 않음입니까?"
"착하지 않음이란 염루심(染漏心)이요, 착한 법이란 염루심이 없음이니 다만 염루가 없으면 곧 착하지 않음이 나지 않음이며, 염루가 없음을 얻었을 때에 곧 청정하고 둥글고 밝아 담연히 항상 고요해서 마침내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착한 법이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니, 이것이 곧 나지도 아니하고 없어지지도 아니한 것이니라."


27. 불계(佛戒)는 청정심(淸淨心)

"[보살계]에 이르기를 '중생이 부처님 계를 받으면 곧 모든 부처님의 지위에 들어가는지라 지위가 대각과 같아서 참으로 모든 부처님의 아들이다'고 하시니 그 뜻이 무엇입니까?"
"부처님의 계란 청정한 마음이니 만약 어떤 사람이 발심하여 청정행을 수행하여 받는 바가 없는 마음을 얻은 사람은 부처님의 계를 받았다고 하느니라.
과거의 모든 부처님도 다 청정하여 받음이 없는 행을 닦아서 불도를 이룬 것이니, 지금 어떤 사람이 발심하여 받음이 없는 청정행을 닦는 사람은 곧 부처님과 더불어 공덕을 균등하게 써서 다름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 지위에 들어간다고 말하는 것이니 이렇게 깨달은 사람은 부처님과 더불어 깨달음이 같으므로 지위가 대각과 같아서 참으로 모든 부처님의 아들이라고 하느니라. 청정한 마음으로부터 지혜가 나는지라 지혜가 청정함을 이름하여 모든 부처님의 아들이라고 하며 또한 이 부처님의 아들이라고 하느니라."


28. 불(佛)과 법(法)의 선후(先後)

"부처님과 법에 있어서 부처님이 앞입니까, 법이 앞입니까? 만약 법이 앞이라고 하면 법은 어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이며, 만약 부처님이 앞이라고 하면 어떤 가르침을 이어 받아서 도를 이룬 것입니까?"
"부처님은 법보다 앞에 있기도 하고 법의 뒤에 있기도 하느니라."
"어찌하여 부처와 법에 앞뒤가 있읍니까?"
"만약 적멸법에 의거하면 법이 앞이요 부처님이 뒤이며, 문자법에 의거하면 부처님이 앞이요 법은 뒤이니라. 왜냐하면 일체 모든 부처님이 모두 적멸법에 의해서 성불을 했으므로 곧 법이 앞이요 부처님은 뒤이니, 경에서 이르기를 '모든 부처님의 스승됨은 이른바 법이다'고 하였느니라. 성도하고 나서 비로소 십이부경을 널리 설하여 중생을 인도하여 교화하시니 중생이 부처님 법의 가르침을 받아서 수행하여 성불하므로 곧 부처님이 앞이요 법은 뒤인 것이니라."


29. 설통(說通)과 종통(宗通)

"어떤 것이 설법은 통하고 종취는 통하지 못한 것입니까?"
"말과 행동이 서로 틀림이 곧 설법은 통하고 종취는 통하지 못한 것이니라."
"어떤 것이 종취도 통하고 설법도 통한 것입니까?"
"말과 행동이 차이가 없음이 곧 설법도 통하고 종취도 통한 것이니라."


30. 도(到)와 부도(不到)

"경에 이르기를 '이르되 이르지 아니하고 이르지 않되 이른 법'이란 무엇입니까?"
"말은 이르러도 행은 이르지 못함이 이르렀으나 이르지 못함이요,
행은 이르러도 말은 이르지 못함이 이르지 않되 이르른 것이며,
행과 말이 함께 이르름이 이르고 이름이라 하느니라."


31. 부진유위(不盡有爲)며 부주무위(不住無爲)

"불법은 유위(有爲)에도 다하지 아니하고 무위(無爲)에도 머물지 아니한다 하니 어떤 것이 유위에도 다하지 아니하고 무위에도 머물지 아니하는 것입니까?"
"유위에도 다하지 아니한다 함은 처음 발심으로부터 드디어 보리수 아래에서 등정각을 이루시고 마침내 쌍림에 이르러 열반에 드실 때까지 그 가운데 일체법을 모두 다 버리지 않음이 곧 유위(有爲)에도 다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무위(無爲)에도 머물지 아니한다 함은 비록 무념을 닦는다 할지라도 무념으로써 증함을 삼지 않으며, 비록 공을 닦으나 공으로써 증함을 삼지 않으며, 비록 보리.열반.무상.무작을 닦으나 무상. 무작으로써 증함을 삼지 않음이 곧 무위에도 머물지 아니하는 것이니라."


32. 지옥유무(地獄有無)

"지옥이 있습니까, 지옥이 없습니까?"
"있기도 하고 또한 없기도 하느니라."
"어째서 있기도 하고 또한 없기도 합니까?"
"마음을 따라 짓는 바 일체 악업이 곧 지옥이 있음이요,
만약 마음이 물들지 아니하면 자성이 공한 까닭에 곧 지옥이 없느니라."


33. 중생(衆生)과 불성(佛性)

"죄를 지은 중생도 불성이 있읍니까?"
"또한 불성이 있느니라."
"이미 불성이 있을진댄 바로 지옥에 들어갈 때에 불성도 함께 들어갑니까?"
"함께 들어가지 않느니라."
"바로 지옥에 들어갈 때에 불성은 다시 어느 곳에 있읍니까?"
"또한 함께 들어가느니라."
"이미 함께 들어갈진댄 지옥에 들어갈 때 중생이 죄를 받음에 불성도 또한 함께 죄를 받습니까?"
"불성이 비록 중생을 따라 함께 지옥에 들어가지만 중생이 스스로 죄의 고통을 받는 것이요 불성은 원래 고통을 받지 않느니라."
"이미 함께 지옥에 들어갔을진댄 무엇 때문에 지옥고를 받지 아니합니까?"
"중생이란 모양[相]이 있음이니 모양이 있는 것은 이루어지고 무너짐이 있음이요, 불성이란 모양이 없음이니 모양이 없는 것은 곧 공한 성품이니라. 그러므로 진공의 성품은 무너짐이 없는 것이니라.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허공에 땔 나무를 쌓으면 땔 나무는 스스로 무너지나 허공은 무너지지 않음과 같으니 허공은 불성에 비유하고 땔 나무는 중생에 비유한 것이니, 그러므로 함께 들어가나 함께 받지 않는다고 하느니라."


34. 삼신사지(三身四智)

"팔식을 굴려서 네 가지 지혜를 이루며 네 가지 지혜를 묶어서 삼신(三身)을 이룬다 하니, 몇 개의 식이 한 지혜를 함께 이루며, 몇 개의 식이 한 지혜를 홀로 이루는 것입니까?"
"눈.귀.코.혀.몸의 이 다섯 식이 함께 성소작지를 이루고, 제육식은 의식이니 홀로 묘관찰지를 이루고, 제칠심식은 홀로 평등성지를 이루며, 제팔함장식은 홀로 대원경지를 이루느니라."
"이 네 가지 지혜는 각각 다른 것입니까, 같은 것입니까?"
"본체는 같으나 이름이 다르니라."
"본체가 이미 같을진댄 어째서 이름이 다르며, 이미 일을 따라 이름을 세울진댄 바로 하나의 본체일 때 어떤 것이 대원경지입니까?"
"담연히 공적하여 둥글고 밝아 움직이지 아니함이 곧 대원경지요, 능히 모든 육진에 대하여 사랑함과 미움을 일으키지 않음이 곧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이니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이 곧 평등성지요, 능히 모든 육근의 경계에 들어가 잘 분별하되 어지러운 생각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자재를 얻음이 곧 묘관찰지요, 능히 모든 육근으로 하여금 일을 따라서 응용하여 모두 정수(正受)에 들어가서 두 가지 모양이 없음이 곧 성소작지니라."
"네 가지 지혜[四智]를 묶어서 세 가지 몸[三身]을 이룬다 함은 몇 개의 지혜가 함께 한 몸을 이루며 몇 개의 지혜가 홀로 한 몸을 이룹니까?"
"대원경지는 홀로 법신을 이루고, 평등성지는 홀로 보신을 이루며 묘관찰지와 성소작지는 함께 화신을 이루니, 이 세 가지 몸도 또한 거짓으로 이름을 세워 분별하여 다만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한 것이니라. 만약 이 이치를 확실히 알면 또한 삼신의 응용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본체의 성품은 모양이 없어서 머물음이 없는 근본을 좇아서 서니 또한 머물음이 없는 근본도 없느니라."


35. 불진신(佛眞身)

"어떤 것이 부처님의 참된 몸을 보는 것입니까?"
"있음과 없음을 보지 아니하는 것이 부처님의 참된 몸을 보는 것이니라."
"어째서 있음[有]과 없음[無]을 보지 않음이 부처님의 참된 몸[眞身]을 보는 것입니까?"
"있음[有]은 없음[無]으로 인해서 서고, 없음은 있음으로 인해서 나타나느니라. 본래 있음을 세우지 아니하면 없음도 또한 존재하지 아니하니 이미 없음이 존재하지 않는데 있음을 어디서 얻을 수 있으리오. 있음과 없음이 서로 인해서 비로소 있으니 이미 서로 인해서 있으니 모두가 생멸이니라. 다만 이 두 견해를 떠나면 곧 부처님의 참된 몸을 보는 것이니라."
"다만 있음[有]과 없음[無]도 오히려 서로 건립하지 못하거늘 부처님의 진신[眞身]이 다시 무엇을 좇아서 설 수 있읍니까?"
"물음이 있기 때문이니, 만약 묻지 않을 때엔 진신의 이름도 서지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비유컨대 밝은 거울이 만약 물건의 모양을 대할 때는 모양이 나타나나 만약 모양을 대하지 않을 때는 마침내 모양을 볼 수 없음과 같으니라."


36. 항상 부처님을 떠나지 아니함(常不離佛)

"어떤 것이 항상 부처님을 떠나지 아니하는 것입니까?"
"마음에 일어나고 사라짐이 없고 경계를 대하여는 고요하여 어느 때나 필경 공적하면 이것이 곧 항상 부처님을 떠나지 아니함이니라."


37. 무위법(無爲法)

"어떤 것이 무위법(無爲法)입니까?"
"유위법(有爲法)이니라."
"지금 무위법을 물었거늘 어째서 유위라고 대답하십니까?"
"있음[有]은 없음[無]으로 인해서 서고 없음은 있음으로 인해서 나타나느니라. 본래 있음을 세우지 아니하면 없음은 어디서 날 것인가? 만약 참된 무위(無爲)를 논할진댄 곧 유위(有爲)도 취하지 아니하고 또한 무위도 취하지 아니함이 참된 무위법이니라. 왜냐하면 경에 이르기를 '만약 법의 모양을 취하면 곧 아상과 인상에 집착하고 만약 법의 모양 아닌 것을 취하여도 곧 아상과 인상에 집착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마땅히 법도 취하지 말고 법 아님도 취하지 말라'고 하시니 이것이 곧 참된 법을 취함이니라. 만약 이 이치를 밝게 알면 곧 참된 해탈이며 둘 아닌 법문을 아는 것이니라."


38. 중도(中道)

"어떤 것이 중도의 뜻입니까."
"가[邊]의 뜻이니라."
"지금 중도를 물었거늘 무엇 때문에 가[邊]의 뜻이라고 대답하십니까?"
"가[邊]는 가운데[中]로 말미암아 서고 가운데[中]는 가[邊]로 말미암아 나느니라. 만약 본래 가[邊]가 없으면 가운데는 무엇을 따라 있으리오. 지금 가운데라고 하는 것은 가로 말미암아 비로소 있는 것이므로 가운데와 가가 서로 인하여 서 있어서 모두가 항상함이 없음[無常]을 알지니 색.수.상.행.식도 이와 같으니라."


39. 오음(五陰)

"어떤 것을 오음(五陰)이라 합니까?"
"색을 대하여 색에 물들어 색을 따라 남[生]을 받는 것을 색음(色陰)이라 하며, 팔풍(八風)을 받아들인 까닭으로 삿된 믿음을 즐겨 모아서 받아들임에 따라 남[生]을 받는 것을 수음(受陰)이라 하며, 미혹한 마음이 생각을 취하여 생각을 따라 남[生]을 받는 것을 상음(相陰)이라 하며, 모든 행을 결집하여 행을 따라 남[生]을 받는 것을 행음(行陰)이라 하며, 평등한 본체에 망령되이 분별을 일으키고 얽매어 붙어서 허망한 의식이 남[生]을 받는 것을 식음(識陰)이라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오음이라고 일컫느니라."


40. 이십오유(二十五有)

"경에 이르기를 '이십오유(二十五有)'라고 하니 어떤 것입니까?"
"뒤의 몸을 받는 것이 이십오유이니, 뒤의 몸[後有身]이란 곧 육도에 생을 받는 것이니라. 중생이 현세에 마음이 미혹하여 기꺼이 모든 업을 맺어 뒤에 업을 따라 생(生)을 받는 까닭에 뒤가 있다[後有]고 하느니라. 세상에 만약 어떤 사람이 구경해탈을 닦을 뜻을 품고 무생법인을 증득한 사람은 곧 삼계를 영원히 떠나서 후유(後有)를 받지 않나니, 후유(後有)를 받지 않는 사람은 곧 법신(法身)을 증득함이요 법신이란 곧 불신(佛身)이니라."
"이십오유의 이름을 어떻게 분별합니까?"
"본체는 하나이지만 씀에 따라 이름을 세워서 이십오유를 나타내기 때문이니, 이십오유는 십악과 십선과 오음이니라."
"어떤 것이 십악.십선입니까?"
"십악은 죽이는 것, 훔치는 것, 음행하는 것, 거짓말, 아첨하는 말, 이간하는 말, 나쁜말 내지 탐냄, 성냄, 삿된 견해이니 이것이 십악이요, 십선이란 다만 십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니라."


41. 무념(無念)과 돈오(頓悟)

1. 무념(無念)
"위에서 무념을 말씀하셨는데 아직도 다 이해할 수 없읍니다."
"무념이란 일체처에 무심함이니 일체 경계가 없어서 나머지 생각으로 구함이 없음이며, 모든 경계와 사물에 대하여 영영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것이 곧 무념이니라. 무념이란 참된 생각[眞念]을 이름함이니 만약 생각으로 생각을 삼는다면 곧 삿된 생각[邪念]이요 바른 생각[正念]이 아니니라. 왜냐하면 경에 이르기를 '만약 사람에게 육념(六念)을 가르치면 생각이 아님[非念]이다'고 하나니, 육념이 있으면 삿된 생각[邪念]이요 육념이 없으면 곧 참된 생각[眞念]이라 하느니라.
경에 이르기를 '선남자야, 우리가 무념법(無念法) 가운데 머물러서 이와 같은 금색의 삼십이상을 얻어 큰 광명을 놓아서 세계를 남김없이 비추나니, 이 불가사의한 공덕은 부처님이 설명하여도 오히려 다할 수 없는데 하물며 나머지 승(乘)들이 능히 알 수 있으리오' 하였느니라. 무념을 얻은 사람은 육근(六根)이 물들지 아니하는 까닭으로 자연히 모든 부처님 지견에 들어가나니, 이러한 법을 얻은 사람은 부처님 곳집이며 또 법의 곳집이라 하나니, 곧 능히 일체가 부처이며 일체가 법이니라. 왜냐하면 무념인 까닭이니, 경에 이르기를 '일체 모든 부처님들이 모두 이 경으로부터 나오신다'고 하였느니라."
"이미 무념이라고 하면서 부처님 지견에 들어간다고 하니 다시 무엇을 좇아서 세웁니까?"
"무념을 좇아서 세우니 무슨 까닭인가? 경에 이르기를 '머뭄이 없는 근본을 좇아서 일체법을 세운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비유컨대 밝은 거울과 같다'고 하였으니 거울 가운데 비록 모양이 없으나 능히 만 가지 모양이 나타남이니, 왜냐하면 거울이 밝은 까닭에 능히 만 가지 모양이 나타나느니라. 배우는 사람의 마음이 물들지 아니하는 까닭에 망념이 나지 아니하고 아인심(我人心)이 없어져서 필경 청정하니 청정한 까닭으로 능히 한량없는 지견이 나느니라. 돈오란 금생을 떠나지 않고 곧 해탈을 얻나니 무엇으로써 그것을 아는가? 비유컨대 사자새끼가 처음 태어날 때도 사자인 것과 같으니 돈오를 닦는 사람도 또한 이와 같아서 돈오를 닦을 때에 곧 부처님 지위에 들어가느니라. 마치 대나무가 봄에 순이 나서 그 봄을 여의지 않고 곧 어미 대나무와 같게 되어 함께 다름이 없는 것과 같음이니, 왜냐하면 마음이 공하기 때문이니라."

2. 돈오(頓悟)
"돈오를 닦는 사람도 또한 이와 같아서 순식간에 망념을 없애버리고 영원히 아인심(我人心)을 끊어서 필경 공적하여 곧 부처님과 같게 되어 다름이 없는 까닭에 범부가 성인이라고 하느니라. 돈오를 닦는 사람은 이 몸을 떠나지 아니하고 곧 삼계를 뛰어나나니, 경에 이르기를 '세간을 무너뜨리지 아니하고 세간을 뛰어나며 번뇌를 버리지 아니하고 열반에 들어간다'고 하였느니라.
돈오를 닦지 않는 사람은 마치 여우가 사자를 따라 좇아 다녀서 백천겁을 지나더라도 마침내 사자가 되지 못하는 것과 같느니라."

3. 진여(眞如)와 무심(無心)
"진여의 성품은 실로 공한 것입니까, 실로 공하지 않는 것입니까? 만약 공하지 않다고 말하면 곧 모양이 있는 것이요 만약 공하다고 말하면 곧 단멸이니, 일체 중생이 마땅히 무엇을 의지해서 닦아야 해탈을 얻을 수 있읍니까?"
"진여의 성품은 공하면서 또한 공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진여의 묘한 본체는 형상이 없어서 얻을 수 없으므로 또한 공하다고 하느니라. 그러나 공하여 모양이 없는 본체 가운데에 항사묘용이 구족하여 곧 사물에 응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또한 공하지 않다고 하느니라. 경에 이르기를 '하나를 알면 천가지가 따라오고 하나를 미혹하면 만가지를 미혹한다'하니, 만약 사람이 하나를 지키면 만가지 일을 마치는 것이니 이것이 오도(悟道)의 묘함이니라. 경에 이르기를 '삼라만상이 한 법의 도장 찍힌 바라' 하니 어떻게 해서 한 법 가운데에서 갖가지 견해가 나오는 것인가?
이러한 공업(功業)은 행함으로 말미암아 근본이 되니 만약 마음을 항복받지 아니하고 문자를 의지해서 증득하려 하면 옳지 못함이라. 자기도 속이고 남도 속여서 피차가 함께 떨어질 것이니 노력하고 노력하여 자세히 살필지니라.
다만 일이 닥쳐옴에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일체처에 무심함이니, 이렇게 얻은 사람은 곧 열반에 들어 무생법인을 증득 하느니라. 이것을 불이법문이라 하며 또 다툼이 없다고 하며 일행삼매라고 하나니, 왜냐하면 필경 청정하여 아상과 인상이 없는 까닭이니라. 애증을 일으키지 않음이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이며 보는 바가 없음이니, 곧 이것이 진여의 얻음이 없는 변론이니라."


42. 중생자도(衆生自度)

"이 논은 믿음이 없는 이에게는 전하지 말며 오직 견해가 같고 행함이 같은 이에게 전할 것이요, 마땅히 앞 사람이 참으로 신심이 있어 감당하여 물러가지 않는 사람인가를 관찰할 것이니, 이러한 사람을 위해 설명하고 보이어서 깨닫도록 해야 하느니라. 내가 이 논을 지은 것은 인연 있는 사람을 위함이요 명리를 구하고자 함이 아니니라. 다만 모든 부처님이 말씀하신 바 천가지 경 만가지 논은 중생이 미혹하기 때문에 마음과 행동이 한결같지 아니하여 삿됨을 따라 대응하여 설명한 것이므로 곧 여러 차별이 있으나, 구경해탈의 이치를 논하는 경우 일진댄 다만 일이 다가와도 받지 아니하고 일체처에 무심하여 영영 고요함이 마치 허공과 같아서 필경에 청정하여 자연해탈이니라. 너희들은 헛된 이름을 구하여 입으로는 진여를 말하되 마음은 원숭이와 같아서는 안되느니라. 곧 말과 행동이 서로 어긋나서 스스로 속임이라 하나니, 마땅히 악도에 떨어지느니라. 한 세상의 헛된 이름과 쾌락을 구하지 말라. 모르는 사이에 억겁의 재앙을 받게 되는 것이니 힘쓰고 힘쓸지니라. 중생이 스스로 제도함이요 부처님이 능히 제도하지 못하나니, 만약 부처님이 능히 중생을 제도할 때엔 과거 모든 부처님이 티끌 수와 같아서 일체 중생을 모두 제도하여 마쳤을 것이어늘, 무엇 때문에 우리들은 지금까지 생사에 유랑하며 성불하지 못하였는가? 중생이 스스로 제도함이요 부처님이 능히 제도하지 못함을 마땅히 알라. 노력하고 노력하여 스스로 닦아서 다른 부처님의 힘을 의지하지 말지니, 경에 이르기를 '무릇 법을 구하는 자는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 말라'고 하였느니라."


43. 동처부동주(同處不同住)

"내세에 있어서는 잡된 배움의 무리가 많을 것인데 어떻게 함께 살겠읍니까?"
"다만 그 빛을 온화하게 할 뿐이요, 그 업은 같이하지 말지니 장소는 같이하나 같이 살지는 아니 하느니라. 경에 이르기를 '흐름을 따르나 성품은 항상하다'고 하였느니라. 다만 도를 배우는 사람은 스스로 일대사인연인 해탈의 일을 위할지니, 아울러 처음 배우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부처님 같이 공경하고 배우며, 자기의 덕을 높이고 남의 능력을 질투하지 말며, 자기의 행동을 살피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춰내지 아니하면, 일체처에 있어서 방해되고 장애됨이 전혀 없어 자연히 쾌락한 것이니라.
거듭 게송을 설하여 말하리라.
인욕이 첫째 가는 도라 忍辱이 第一道라
먼저 아인심을 없앨지니 先須除我人이니
일이 옴에 받는 바 없으면 事來에 無所受하야
참다운 보리의 몸이니라. 卽眞菩提身이로다.


44. 일체처(一切處)에 무심(無心)

"[금강경]에 이르기를 '보살이 아법(我法)이 없는 사람은 여래가 참다운 보살이라'고 말씀하시며, 또 '취하지도 아니하고 버리지도 아니하여 영원히 생사를 끊어서 일체처에 무심하면 곧 모든 부처님의 아들이다'고 하였느니라. [열반경]에 이르기를 '여래가 열반을 증득하여 영원히 생사를 끊었다'고 하였느니라.
게송으로 말하노라.

나는 지금 뜻이 매우 좋아서
남이 욕할 때도 괴로움이 없고
말없이 시비를 말하지 않나니
열반과 생사가 같은 길이로다.
내 집의 근본 종지를 사무쳐 알아
본래로 푸르고 검은 분별이 없나니
일체 망상의 분별은
세상 사람이 밝게 알지 못함임을 알지니라.
말세의 범부에게 이르노니
마음 가운데 우거진 풀을 없애 버려라.
내 지금 뜻이 크게 넓어서
말하지 않고 일 없어 마음이 편안하나니
종용하여 자재해탈이라
동서 어디를 가나 쉬워 어렵지 않도다.
종일토록 말 없이 적막하여
생각 생각에 이치를 향해 생각하노니
자연히 소요하여 도를 보아
생사와 결정코 상관치 않는도다.
내 지금 뜻이 몹시 기특하여
세상의 침해와 속임에 향하지 않음이라
영화는 모두 헛된 속임수이니
헤진 옷 거친 음식으로 굶주림을 채우는도다.
길에서 세상 사람을 만나 말하기를 게을리하니
세상 사람들은 모두 나를 바보라 하네.
겉으로는 질린 듯 암둔해 보이나
마음 가운데는 밝기가 유리같아서
라후라의 밀행에 묵묵히 계합하나니
너희 범부들이 알 바 아니로다.

내 너희들이 참 해탈의 이치를 알지 못할까 두려워서 거듭 너희들에게 말해 보이노라.


45. 필경정(畢竟淨)

"[유마경]에 이르기를 '정토를 얻고져 할진댄 마땅히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고 하시니 무엇이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까?"
"필경 청정으로 깨끗함(淨)을 삼느니라."
"어떤 것이 필경 청정으로 깨끗함을 삼는 것입니까?"
"깨끗함도 없고 깨끗함이 없음도 없음이 곧 필경 깨끗함이니라."
"어떤 것이 깨끗함도 없고 깨끗함이 없음도 없는 것입니까?"
"일체처에 무심함이 깨끗함이니 깨끗함을 얻었을 때에 깨끗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음이 곧 깨끗함이 없음이며, 깨끗함이 없음을 얻었을 때에 또한 깨끗함이 없다는 생각도 하지 않음이 곧 깨끗함이 없음도 없는 것이니라."


46. 필경증(畢竟證)

"도를 닦는 사람은 무엇으로 증함을 삼습니까?"
"필경 증함으로 증함을 삼느니라."
"어떤 것이 필경 증함입니까?"
"증함이 없음과 증함이 없음도 없음이 필경 증함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증함이 없음이며 어떤 것이 증함이 없음도 없는 것입니까?"
"밖으로 색과 소리 등에 물들지 아니하고 안으로 망념의 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하여 이렇게 얻은 것을 곧 증함이라고 함이니, 증함을 얻었을 때에 증득했다는 생각도 하지 않음이 곧 증함이 없음이며 증함이 없음을 얻었을 때에 또한 증함이 없다는 생각도 하지 아니함이 곧 증함이 없음도 없다고 하는 것이니라."

47. 진해탈(眞解脫)

"어떤 것이 해탈한 마음입니까?"
"해탈한 마음도 없고 또한 해탈한 마음이 없음도 없음이 곧 참 해탈이니라. 경에 이르기를 '오히려 법도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닌 것이리오' 하였으니 법이란 있음[有]이요 법 아님이란 없음[無]이니, 다만 있음과 없음[有無]을 취하지 아니하면 곧 참 해탈이니라."


48. 필경득(畢竟得)

"어떻게 도를 얻습니까?"
"필경에 얻음으로써 얻음을 삼느니라."
"어떤 것이 필경의 얻음입니까?"
"얻음도 없고 얻음이 없음도 없음을 필경의 얻음이라 하느니라."


49. 필경공(畢竟空)

"어떤 것이 필경의 공함입니까?"
"공함도 없고 공함이 없음도 없음을 곧 필경 공함이라고 하느니라."


50. 진여정(眞如定)

"어떤 것이 진여의 선정입니까?"
"선정도 없고 선정이 없음도 없음이 곧 진여의 선정이니, 경에 이르기를 '정한 법(定法)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할 것이 없으며 또한 여래가 설명할 정한 법이 없다.'고 하였느니라. 또 경에 이르기를 '비록 공을 닦으나 공으로써 증함을 삼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공한 생각을 짓지 않음이 곧 이것이며, 비록 선정을 닦으나 선정으로써 증함을 삼지 아니하여 선정이라는 생각을 짓지 않음이 곧 이것이며, 비록 깨끗함을 얻었으나 깨끗함으로써 증함을 삼지 아니하여 깨끗하다는 생각도 짓지 않음이 곧 이것이니라. 만약 선정을 얻고 깨끗함을 얻어서 일체처에 무심함을 얻었을 때에 이와 같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망상이니 곧 얽매이게 되어 해탈이라고 할 수 없느니라. 만약 이와 같이 얻었을 때에 밝고 밝게 스스로 알아 자재를 얻되 이것을 가져 증함을 삼지 않으며 또한 이와 같다는 생각도 하지 아니할 때에 해탈을 얻느니라. 경에 이르기를 '정진심을 일으키면 이는 망념으로서 정진이 아니니라. 만약 능히 마음이 망령되지 않으면 정진이 끝이 없다'고 하였느니라."



51. 중도(中道)는 일체처무심(一切處無心)

"어떤 것이 중도입니까?"
"중간도 없고 또한 이변(二邊)도 없음이 곧 중도니라."
"어떤 것이 이변입니까?"
"저 마음이 있고 이 마음이 있음이 이변이니라."
"어떤 것을 저 마음, 이 마음이라고 합니까?"
"밖으로 색과 소리에 얽매임을 저 마음이라 하며 안으로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이 마음이라 하느니라. 만약 밖으로 색에 물들지 아니하면 곧 저 마음이 없음이요, 안으로 망념이 나지 아니하면 곧 이 마음이 없음이니 이것은 두변이 없는 것이니라. 마음이 이미 두변이 없으니 중간이 또한 어찌 있을 것인가? 이와 같음을 얻는 것을 곧 중도라 하는 것이니 참된 여래의 도이니라. 여래의 도란 곧 일체 깨친 사람의 해탈이니, 경에 이르기를 '허공에 가운데와 가장자리가 없으니 모든 여래의 몸도 또한 그와 같다'고 하였느니라. 그리하여 일체 색이 공한 것은 곧 일체처에 무심함이요 일체처에 무심함은 곧 일체색의 성품이 공함이니, 두 가지 뜻이 다르지 아니하여 이것을 또한 색이 공함이라 하며 또 색이 법이 없음이라 하느니라. 너희가 만약 일체처에 무심함을 떠나서 보리.해탈과 열반.적멸과 선정.견성을 얻는다는 것은 옳지 않느니라. 일체처에 무심이란 곧 보리.해탈과 열반.정멸과 선정 내지 육바라밀을 닦음이니 모두 성품을 보는 곳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금강경]에 이르기를 '조그마한 법도 얻을 수 없음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느니라."


52. 일체처무심(一切處無心)이 해탈(解脫)

"만약 일체 모든 행을 닦아서 구족하여 성취하면 수기를 얻을 수 있읍니까?"
"얻을 수 없느니라."
"만약 일체의 법을 닦지 아니하고서 성취하면 수기를 얻을 수 있읍니까?"
"얻을 수 없느니라."
"만약 이럴 때는 마땅히 무슨 법으로써 수기를 얻을 수 있읍니까?"
"행 있음을 쓰지도 않고 행 없음도 쓰지 않으면 곧 수기를 얻느니라. 왜냐하면 [유마경]에 이르기를 '모든 행의 성품과 모양이 모두 다 무상하다'고 하였으며 [열반경]에 이르기를 '부처님이 가섭에게 말씀하시되 <모든 행이 항상한지라 옳은 곳이 없다>'고 하셨느니라. 너희는 다만 일체처에 무심하면 곧 모든 행이 없으며 또한 행이 없음도 없어서 곧 이것을 수기라 하느니라. 이른바 일체처에 무심이란 증애심이 없음이니 증애라고 말함은, 좋은 일을 보고도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함을 곧 사랑하는 마음이 없음이라 하고, 나쁜 일을 보고도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함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느니라. 사랑함이 없음이란 곧 물든 마음이 없음을 이름하나니 곧 색의 성품이 공함이요, 색의 성품이 공함이란 곧 만가지 인연이 다 끊어짐이요 만가지 인연이 다 끊어짐은 자연 해탈이니라. 너희들이 이것을 자세히 보아서 만약 뚜렷이 밝게 알지 못할 때엔 모름지기 빨리 물을 것이요 헛되이 보내지 말지어다. 너희들이 만약 이 가르침을 의지해 닦아서 해탈하지 못한다면 내가 곧 종신토록 너희들을 위해 대지옥고를 받을 것이며, 내가 만약 너희들을 속인 사람이면 내가 마땅히 나는 곳마다 사자나 호랑이나 이리의 밥이 될 것이다. 너희가 만약 이 가르침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부지런히 닦지 아니하면 내 알 바 아니니라. 한번 사람의 몸을 잃으면 만겁에 다시 돌이킬 수 없나니 노력하고 노력해서 합당히 알아야 할지니라."

- 돈오입도요문론 - 대주 혜해 스님 -

※ 출처 : 佛紀 2545. 9 .28 법보종찰 가야산 해인사 자료실 

 

출처 : 나 홀로 길을 걷네 ...
글쓴이 : 춘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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