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혜능(慧能)대사

수선님 2018. 6. 3. 13:18

대감혜능(大鑑慧能)의 돈오문(頓悟門)을 찾아서
- 편/찬/부 -



1. 출생과 성장
2. 혜능이 만난 경전(經典)
3. 홍인 (弘忍) 에게 가서 배움
4. 방아찧는 생활과 깨달음
5. 인가(印可)를 받고 구강(九江)으로
6. 혜명(慧明)을 교화하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7. 인종법사(印宗法師)와의 만남
8. 머리를 깎고 계를 받다
9. 조계(曹溪)에서의 교화와 인도
10. 조정과의 관계
11. 입적의 모습
12. 입적 후의 사건

 

1. 출생과 성장


-전혀 다른 동북아 선(禪)의 시작-
 개띠 해에 출생하시다 혜능의 출생 연월일에 관하여 최초로 명기하고 있는 것은 『송고승전(宋高僧傳)』으로 혜능 입멸 후 275년 가량 지난 뒤의 일이다. 거기에 의하면, '정관(貞觀) 12년 무술년(戊戌年)에 능(能)을 낳다' 라고 되어 있어, 혜능의 생년이 정관 12년(638) 무술년 즉 당나라 초기에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신주(新州) 촌놈 혜능의 출생지에 관한 14개 자료중 『왕유의 비명』이 '모(某)군 모(某)현의 사람' 이라 한 것 이외는 모두 '신주(新州)'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태어나 자란 혜능은 어떤 성격과 역량을 지닌 인물이었을까. 어릴 때의 역량에 관하여 때때로 각 자료에서 위인화, 초인화되기 쉬운데 혜능의 경우에도 그런 경향이 없지 않다. 첫째로 『왕유의 비명』에 의하면
착한 습관이 놀이에서도 나타났고, 날카로운 근기가 동심에서 싹텄으며, 자기 몸을 사사로이 하지 않고 농사일을 좋아했으며, 만약에 도에 맞는다면 오랑캐 지역에서도 남들이 흠모하는 착한 행동을 하였다.
라고 한다. 다음으로 『조계대사별전』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고 할지라도 개연히 방외(方外)의 뜻이 있었다. 하여,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태연하게 불도(佛)에 뜻이 높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송고승전』에서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지혜는 남보다 뛰어났다. 만풍요속이라 하지만 물듦이 심하지 않았다.
라는 것에서 순수한 마음으로 마음이 넓었고 지혜가 월등했으며 야만스런 미개지에 있었어도 악습에 빠지지 않았다고 하여, 순수고결한 성격이 강조되고 있다. 이는 나중에 혜능이 미개한 남방에서 설법 교화할 때 오랑캐 풍을 싫어하지 않으면서도 오랑캐풍에 물들지 않는 유연한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복선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2. 혜능이 만난 경전(經典)
- 『금강경(金剛經)』인가 『열반경(涅槃經)』인가 -

땔나무를 파는 나뭇꾼 혜능은 유아기에 부친을 잃고 그 후는 부친의 유지를 지킨 어머니의 손으로 양육되었는데, 이 모자는 어떠한 생활을 하였을까. 물론 한 집안의 기둥이라고도 해야 할 부친이 좌관으로서 불운을 겪었으며, 게다가 혜능의 출생 이후 곧바로 이 세상을 떠난 것을 생각하면, 뒤에 남겨진 모자의 생활이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는 점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금강경』 과 만남 저잣거리에서 땔나무를 팔아 내핍생활을 하며 지내던 어느 날, 혜능으로서는 자신의 생애에 대전환을 초래할 중대한 계기가 발생한다. 즉 『금강경』과의 만남이다. 현재 이 사실을 최초로 전해주는 돈황본(敦煌本) 『단경(壇經)』에 의해 살펴보도록 하자.
마침 땔나무를 사는 한 손님이 있었다. 드디어 혜능을 데리고 점포에 이르렀다. 손님은 땔나무를 갖고 가고, 혜능은 돈을 받았다. 문앞에서 되돌아가다가, 문득 그 손님이 『금강경』을 읽는 것을 보았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혜능은 한번 듣고 마음이 맑아지면서 바로 깨달았다.
조계(曹溪)로의 여행 『단경』 계통과 『조당집(祖堂集)』은 『금강경』을 독송한 손님에 대해, 어디로부터 와서 이 경전을 독송하게 되었는가를 묻고, 그 손님이 기주(妐州) 황매현(黃梅縣)의 동쪽 빙무산(憑茂山)에 있는 5조 홍인화상(弘忍和尙)의 거처로부터 온 사실을 알자마자, 혜능은 모친을 작별하고 즉각 황매의 홍인화상 밑으로 가서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금강경』을 들은 바도 없고 홍인에게 가서 배우기 전에 조계로 떠났다고 하여, 조계에서의 사적을 서술한 『조계대사전(曹溪大師傳)』과 이 사실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고, 『금강경』을 들은 즉시 홍인의 밑으로 가서 배웠다고 하는 돈황본 『단경』 등 두 개의 자료가 있다. 이 『단경』의 입장을 계승한 것이 『조당집』과 여타의 『단경』이고, 양자를 절충하여 『금강경』을 들었지만 곧바로 홍인의 밑으로는 가지 않고 일단 조계로 떠난 뒤에 홍인의 밑으로 갔다고 하는 것이 『송고승전(宋高僧傳)』『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전법정종기(傳法正宗記)』이다.
'유지략(劉志略)'과의 교우(交友) 조계로 간 혜능은 그 마을 사람인 유지략과 교우관계, 즉 의형제를 맺게 된다.
『열반경』 과의 만남 『조계대사전』에 의하면, 혜능과 경전과의 만남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열반경』이 등장한다. 즉 유지략의 고모인 무진장(無盡藏) 비구니는 산속의 사찰에 배속되어 늘 『열반경』을 독송하였다. 혜능은 어느 날 낮에 친우 유지략 때문에 이 사찰에 갔다가, 밤이 되어 이 무진장비구니가 독송하는 『열반경』을 들었다. 다음 날에 무진장비구니를 위하여 경전의 의의를 해석하자, 무진장 비구니는 경전을 주어 읽어보도록 하였다. 그런데 어떠하였을까. 두 사람의 문답을 통해 살펴보자.
대사(혜능)가 말하였다. "글자를 모른다."
"글자를 모른다면 어떻게 그 뜻을 해석하는가?"
"불성(佛性)의 이치는 문자를 잘 해독하는 것과 관계가 없다. 지금 문자를 알지 못하여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과연 혜능이라는 인물이 실제로 문자를 전혀 알지 못했는지는 별도의 문제이지만, 불법이 문자와 관계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선사상의 기본 입장이 이와 같이 나타나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보림사(寶林寺)에 머물다 가령 문자를 알아도 경전에서 말하는 묘한 이치를 용이하게 파악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상식이다. 그런데 문자를 모르고 경전을 손으로 넘겨 한 자도 읽을 수 없었던 혜능이 어떤 손님이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을 듣고서 깨닫고, 여승이 독송한 『열반경』을 듣고서 그 뜻을 해석했다는 것이다. 일반 상식으로 판단하건대, 이것은 실로 경탄해야 할 사실이다. 세상 사람들이 혜능이 출가하기를 바라니, 혜능도 그 요청에 따라 보림사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 수행 기간은 3년이었다.
원(遠) 선사에게서 배움 『조계대사전』은, 보림사에 머물며 3년간 수도생활을 보낸 혜능이 낙창현의 석굴에 원 선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거기에서 좌선(坐禪)을 배웠던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이 원 선사도 일찍이 글을 배운 바 없고 뜻으로 경론을 파헤치지 않았다고 하는데, 여기에서도 선자가 문자에 관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특히 강조되었던 것이다.

3. 홍인 (弘忍)에게 가서 배움
-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어도 불성(佛性) 에는 남북이 없다 -
가서 배울 것을 권장한 나그네 오조홍인(五祖弘忍)에게 가서 배울 것을 권장한 인물에 관해서는 『조계대사전』의 혜기선사설, 『단경』계의 어떤 손님설, 그리고 어떤 손님설을 발전시킨 『조당집』의 안조성설 등 2종 3설이 출현하였다. 이 2종의 설을 교묘하게 절충한 것이 『송고승전』『경덕전등록』『전법정종기』에 뒤따르는 여러 자료이다. 『경덕전등록』에 의해 절충의 실제를 살펴보자면,
송구스럽게 손님에게 물었다.
"이것은 어떠한 법인가, 누구나 얻을 수 있는가."
대사가 급히 모친에게 고하고 법을 위하여 대사를 찾아갈 뜻을 갖게 되었다.
..........
원(遠)이 말하였다.
"그대를 보건대 신이한 모습이 빼어나서 거의 보통사람과는 다르다. 내가 듣기로는 '서역의 보리달마께서 심인(心印)을 황매에 전하였다'고 한다. 너는 마땅히 그에게 가서 결단해야 한다."
즉 혜능 자신에게 구법의 열의를 불러일으켰던 것은 어떤 손님의 말이고, 실제로 가서 배울 것을 권장한 것은 지원선사의 말이라고 하는 양자의 절충이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스승을 따를 것인가, 어머니를 봉양할 것인가.
새로운 법문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던 것은 혜능의 생애에서 커다란 전기가 되었다. 허나 이 새로운 법문에 대한 참학구법(參學求法)의 열의가 점점 높아진 반면, 혜능에게 있어서는 기가 꺾인 점이 있었다. 그것은 연로한 모친의 봉양 문제였다. 『조당집』에는 홍인에게 가서 배울 것을 권유한 안도성과 혜능과의 사이에 다음과 같은 말을 주고받은 사실이 나타나고 있다.
그때 도성이 혜능에게 황매산에 가서 오조를 예배할 것을 권유하였다. 혜능이 대답하기를, "노모가 계시고 집이 궁핍하며 가난한데 어떻게 노모를 버리겠는가. 봉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였다. 도성이 마침내 혜능에게 은 백 냥을 주어 노모의 의복과 양식에 충당하게 하고, 곧 혜능으로 하여금 떠나가서 오조대사를 예배토록 하였다.
이런 면에서 노모를 부양하면서 더구나 도를 구하려는 열의에 불탔던 젊은 날의 혜능대사의 모습이 크게 부각된다.

 

드디어 황매(黃梅)로 이리하여 혜능은 기주(妐州) 황매현(黃梅縣) 동쪽 빙무산(憑茂山), 즉 동산(東山)에 있던 홍인대사(弘忍大師)를 찾아가게 되는데, 당시 혜능의 연령에 관해서는 가장 이른 22세에서부터 32세설, 혹은 34세설 등 10-12년 정도의 차이가 있다. 남쪽으로 여행하여 소주로부터 기주 황매의 동산에서 홍인대사를 심방했다고 하는 『조계대사전』은 그 도중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대사가 그 해 5월 3일에 소주를 출발하여, 동산에 가서 인(忍) 대사를 심방하였다. 지팡이에 맨발로 훌쩍 가서 홍주의 동쪽길에 이르렀다. 이 때 사나운 호랑이가 많았지만 대사는 두려워함이 없이 홀로 산속을 걸었다. 마침내 동산에 이르러 인대사를 배알하였다.
대승사본(大乘寺本)본, 홍성사본(興聖寺本), 종보본(宗寶本)에서는,
혜능이 모친을 편히 모신 뒤 곧바로 하직하였다. 30여 일이 지나 황매에 이르러 오조를 예배하였다.

 

홍인과의 첫 대면 아득히 양자강을 건너 기주 황매의 빙무산으로 간 혜능과 홍인대사와의 첫 대면은, 그 때에 홍인과 주고받은 '불성문답(佛性問答)'과 함께 혜능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간주된다.
홍인화상이 혜능에게 물었다. "너는 어디 사람인데 이 산에 와서 나를 예배하는가. 너는 지금 내 주변에서 다시 무엇을 구하려는가."

"저는 바로 영남사람으로 신주의 백성입니다. 이제 멀리 와서 스님을 예배하는 것은 다른 것을 구함이 아니라, 오직 부처가 되는 법을 구하려고 할 뿐입니다."

대사가 드디어 혜능을 질책하며 말하다.
"너는 영남사람이고, 또한 오랑캐이다. 어찌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사람에게는 곧 남과 북이 있어도, 불성(佛性)에는 남과 북이 없습니다. 오랑캐의 몸은 스님과 같지 않다 하더라도 불성에 어찌 차별이 있겠습니까." 인대사가 한 번 보고 묵묵히 그 사람됨을 알았다.

 

4. 방아찧는 생활과 깨달음
- '시시근불식(時時勤拂拭)'과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

 

방아를 찧으며 깨닫다

 

불성(佛性)문답에 의해 그 역량을 인정받고서 홍인의 문하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받은 혜능은, 그후 어떠한 수행생활을 보내며 깨달음을 얻었던 것일까.우선 『신회어록』에 의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함께 더 말하려고 했지만 여러 사람이 좌우에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내보내서 대중속에서 일을 하게 하였다. 마침내 대중을 위하여 방아를 찧은 지 여덟 달이 지났다. 인대사가 대중 속으로 찾아가 붇는데, 방아 위에 이르러 보고 함께 말 함에 진실로 견성(見成)을 깨달았음을 알았다.
홍인 문하에서의 혜능의 수행은 이미 이러한 수도관의 선구를 이루는 것이었다. 다만 오로지 대중을 위하여 방아를 밟는다는 한 가지 수행을 철저히 계속하는 것이 그대로 혜능의 수행생활이며 동시에 깨달음의 경지가 잘 익은 장이었다. 이렇게 하여 8개월의 방아찧는 생활이 지나갔다. 홍인의 문하에 모인 문인들은 수도 많고 모두 우수한 인물들이었다. 특히 신수상좌(神秀上座)는 대중 가운데 으뜸이었다. 그러므로 홍인은 새로 들어온 혜능을 주방에 들어가 대중을 공양하는 일에 종사하게 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8개월이 지났는데, 혜능은 수고로움을 싫어하지 않고 일에 몰두하여 몸을 잊고 오로지 도를 위하여 진력했던 것이다.

 

게(偈)에 의한 정계(正系) 다툼

 

홍인은 해탈을 구하지 못하고 생사에 끄달리는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공부한 마음을 글로 써서 제출하라고 엄한 명령을 내린다. 그 마음을 심사하고 6조로 봉하겠다고.... 심란해하는 신수(神秀) 아직 마음이 덜 찼는데... 대중들은 모두 포기하고 신수상좌만 바라본다. 우리가 제출해도 저 신수만 같지 못하리. 신수는 시험문제를 제출하지 못하고 회랑벽에 다음과 같이 게송을 써놓다. 신수의 게송
신시보리수(身是菩提樹) 몸은 보리수요
심여명경대(心如明鏡臺) 마음은 거울이네
시시근불식(時時勤不息) 열심히 털고 닦아
물사야진애(勿使惹塵埃) 티끌이 없도록 하세

많은 사람 이 게를 보고 곡조를 붙여 노래하고 다니다. 혜능 그 노랫소리 듣다.
혜능: 저게 무슨 소리냐?
스님1: 것도 모르냐? 대 신수상좌께서 쓰신 마음의 노래이다.
혜능: 그래? 그럼 내 마음의 노래도 좀 써주게.
스님1: 글도 모르는 자네가...? 그래 써주지 읊어보게나 내가 써 주리라.

 

혜능의 게송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며
명경역무대(明鏡亦無臺) 명경도 또한 대가 아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불성은 항상 청정하니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 어디에 티끌과 먼지가 있을 것인가
절 안의 무리는 혜능이 이 게를 짓는 것을 보고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혜능이 물러나서 방앗간으로 들어갔다. 오조가 문득 혜능의 게를 보고 즉시 대의를 알았지만, 대중이 알까 두려워하였다. 오조가 이에 대중에게 말하였다. "이것도 또한 아직 깨닫지는 못하였다."
홍인은 혜능의 시를 보고 바로 그 뜻을 알았지만 모두가 알아차리고 그를 해할까 염려하여, 수행자들에게는 이놈도 아직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고 했던 것이다. 즉 여기에 이르러 혜능은 깨달은 경지의 게를 보임으로써 오조홍인 문하의 제일인자였던 신수를 완전히 누르고 6조의 지위를 결정지은 사실이 명확해졌다. 이 게송은 역사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신수의 북종선과 혜능의 남종선을 구분하는 분수령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후 신수의 북종선 세력은 약화되고, 혜능의 선은 세대를 거듭할 수록 발전하여 후일에 5가7(五家七宗)종으로 발전하며, 중국 전역의 불교 문화는 물론, 한국과 일본에도 미친 영향을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인 것을.

 

입문을 허락받은 혜능은 절구로 쌀을 찧는 방앗간 생활에 심부름꾼의 선두에 서서 힘썼으며 나고 죽음이 곧 열반이라는 깊은 경지를 깨쳐서 마음이 평등했다고 한다. 스승인 홍인은 제자 양육은 평등했지만, 제자들의 마음을 판별하기 위하여 우선 신수에게 스스로의 심경을 토로시켰으며, 혜능에게도 거기에 가세시켜 두 사람의 게가 벽에 제시되었는데, 견해의 깊고 얕음이 있어 두 사람의 차이는 뚜렷했다고 한다. 여기에서도 깨달은 경지의 게에 의해 두 사람의 견해의 깊이의 구별이 뚜렷하게 된 점이 중심 테마가 되고 있다.

 

5. 인가(印可)를 받고 구강(九江)으로
- 전의(傳衣)를 얻고 강을 건너다 -

 

대법(大法)을 상속하다이미 여덟 달의 방앗간 생활에서 충분히 역량도 갖추고 깨달음의 경지에도 도달한 것은 스승인 홍인에 의해서도 인정받고 있었지만, 다시 결정적인 사자상승을 얻어 혜능이 선종 제 6조로서 홍인으로부터 인가(認可)를 증명받고, 대법을 상속하는 데에는 새로운 기연이 준비되고 있었다. 즉 이 대법 상속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서술한 최초의 것은 『신회어록(神會語錄)』인데, 거기에는
마침내 밤중이 되자 몰래 불러 방안으로 들이고 3일 밤낮을 함께 이야기 하며 여래(如來)의 지견(智見)을 증명하였으며, 의심스럽거나 막힌 구석이 없음을 알았다.
라고 하여, 홍인이 밤이 되어 몰래 혜능을 방안에 불러들여 그로부터 3일 밤낮동안 함께 이야기하고 혜능이 여래의 지견(知見) 즉 깨달음을 얻고 어떤 의심이나 막힘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대법을 부촉했다고 한다.
전의(傳衣)와 전법게(傳法偈)전법의 증거로서 가사를 줄 정도로 전의는 선문(禪門)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특정한 소의경전 대신 스승과 제자 사이의 증계증통에 의한 정법 전수를 기본적 입장으로 하는 선문으로서는, 가사야말로 정신적, 내면적인 전법을 구상화하는 것으로서 가장 적절한 것이라 한다. 가사(袈裟)를 불법의 신표로 삼는 의미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서술한 것이 『조계대사전』으로,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었다고 한다.
대사(혜능)가 화상(홍인)께 여쭈었다. "법은 문자가 없이, 마음으로 마음을 전하고 법으로 법을 전하는데, 이 가사로 무엇을 하려 하십니까." "옷은 법의 신표요, 법은 옷은 종이다. 예부터 서로 전하였으며 그 외 별도로 부촉한 바는 없다. 옷이 아니면 법을 전하지 않았고, 법이 아니면 옷을 전하지 않았다. 옷은 서국의 사자존자들이 서로 전하여 불법을 끊이지 않게 하였다. 법은 여래의 깊고 깊은 반야로서, 반야가 고요하고 머무름이 없음을 알면 곧 법신을 때닫는다. 불성이 고요하고 머무름이 없음을 보면 이것이 진정한 해탈이다. 너는 이 옷을 가지고 떠나야 한다."
이는 전법의 증거로서 가사가 전해졌음을 서술했는데, 이 전의가 혜능에게 주어진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장차 위험이 닥칠 것이라는 것을 최초로 말한 것이 『왕유의 비명』이다. 제육대 전법자의 생명이 실낱처럼 덧없게 되리라는 점을 달마가 혜가에게 예언했다는 것이 『신회어록』의 보리달마전이다. 홍인이 혜능에게 대하여 이 예언을 인용하여,
혜능아 예부터 법을 전하는 자의 목숨은 실낱 같다. 만약 법을 전하는 위치에 있게 되면 누군가 너를 해치려 할 것이다. 너는 속히 떠나야 한다.
라고 경고를 하고 있다. 기주 황매의 홍인 밑에서 비밀리에 대법을 상속한 혜능은 그것이 다른 수행자들에게 알려지면 위해를 받기 때문에, 연고지인 영남으로 급히 떠나라는 스승의 지시에 따라 영남을 향하여 출발하게 되는데, 양자강의 나루터인 구강역까지 스승인 홍인이 직접 전송했다.
문득 홍인이 일러 주었다. "네 연고지는 영남에 있으니 빨리 떠나거라. 중생들이 알면 반드시 너를 해칠 것이다." "스님 어떻게 갈 수 있습니까." "내가 너를 직접 데려다 주겠다." 그 날 밤 마침내 구강에 다달아 배를 얻어 강을 건넜다. 그 날 밤에 홍인이 다시 돌아와 본산에 이르니, 대중들이 모두 알아채지 못하였다.
혜능이 떠나고 난 동산에서는 혜능이 스승 홍인의 전송을 받아 남쪽으로 떠난 후, 홍인은 많은 문인들에게, 혜능에게 은밀히 법을 부촉한 사실을 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홍인대사는 이로부터 다시는 상당(上堂)하지 않기를 무릇 3일, 대중이 의아하고 괴이하여 물으니, 오조가 말하였다. "내 도는 가버렸다. 어째 다시 이를 묻는가." "의법을 누가 얻었습니까." "능한 자가 얻었노라." 이에 대중이 의논하였다. 한참 후에야 혜능이 얻었음을 알고 곧 모두 쫓아갔다. 홍인대사는 이미 의법을 부촉하고 나서 다시 4년이 지나 상원(上元) 2년에는 홀연히 대중에게 고하였다.
"나는 이제 대사가 끝났다. 가야 할 때이다." 곧 방에 들어가 편안히 앉아서 입적했다. 나이는 74세다.
 

6. 혜명(慧明)을 교화하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 법은 구하되 옷은 구하지 않다 -

 

그대! 세존으로부터 전해진 가사를 들어보게나

 

대중 가운데 있던 혜명은 아득히 먼 남방의 강서성(江西省)과 광동성(廣東省)의 경계인 대유령(大庾嶺) 위에 이르러, 겨우 혜능을 따라잡아 여기서 혜능과 맞닥뜨린 것이다. 혜능은 옷을 반석 위에 놓고 장수출신인 혜능에게 가져가도록 했다. 8척 신장의 혜명이 들려고 해도 어찌된 일인지 무거워 들리지 않았다.
혜명: 가사가 아니라 가르침을 구하러 여기까지 왔나이다. 혜능: 선도 악도 아닌 중간 마음은 그 무엇이던고?! 빨리 대답하라. 혜명: ........!! (그자리에서 깨닫다)
혜명은 자신이 추격하여 온 것은 가사 때문이 아니라, 오조홍인이 혜능을 남방으로 떠나보낼 때 전수한 가르침 때문이니, 아무쪼록 그것을 말해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혜능이 그 정법을 설하자, 그것을 들은 혜명은 합장 예배하고 급히 혜능을 고개를 지나 남방으로 가도록 했는데, 그 뒤로도 많은 사람들이 쫓아왔다.

 

남쪽 지방에서 16년 간 은둔하다

 

대유령에서 추격자 혜명을 교화한 혜능은 남으로 향하여 스승 홍인의 명에 따라 남쪽 지방에 은거하게 된다. 여기서 대사가 사냥꾼과 대화한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혜능은 후에 조계에 이르러 또 악인에게 쫓겼다. 이에 사회현에서 사냥꾼 무리 속에서 난을 피하기를 무릇 15년이 지났다. 때로 사냥꾼에게 시의적절하게 설법하였다. 사냥꾼은 늘 그물을 지키도록 하였는데 생명을 볼 때마다 이것을 다 놓아주었다. 식사 때마다 채소를 고기 굽는 그릇에 넣어 익혔다. 누가 물으면 곧, "그냥 고기 둘레의 나물을 먹을 뿐"이라고 대답하였다.
여기에서 사냥꾼들과의 실제 생활에 대하여 서술하여, 생명 있는 것은 놓아주고, 식사 때에는 야채와 함께 고기를 익혔는데, '야채만 먹고 고기는 먹지 않았다'라고 하듯이, 살생과 육식을 끊는 불자(佛子)의 면목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7. 인종법사(印宗法師)와의 만남
- 깃발이 흔들리는가 바람이 흔들리는가 비풍비번(非風非幡) -

 

『열반경』 강의를 듣다 남해에 있던 인종법사(627-713)가 『열반경』을 강의하고, 혜능이 그 강좌에 참여하여 청강한 것은, 득법 후 스승 홍인의 명에 따라 남쪽 지방에서 은둔생활을 보낸 혜능으로서는 아주 커다란 전기가 되었다. 여기에서 남해에서 『열반경』을 강의하고 있던 인종법사의 법좌에 참여한 혜능이 진실한 가르침에 의해 불법의 근본 의미를 물은 바, 인종은 거기에 대답하지 못하고 거꾸로 혜능의 설법에 따라 혜능을 찬탄하고, 자신의 제자를 이끌고 혜능의 문화에 투탁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인종법사가 『열반경』을 강의하던 그 자리에는 깃발이 세워져 있었으며, 혜능은 그 수업에 참여하여 인종법사의 강의를 듣고 있었는데, 그 때 바람이 불어 깃발이 나부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 바람이 흔들린다, 아니 깃발이 흔들린다로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 때 인종은 대중에게 물었다. "너희는 모두 바람이 깃발을 흔들리게 하는 것을 본다. 꼭대기에 깃발이 흔들리는가?" 대중들은 "바람이 부는 것을 봅니다." 라고 하였으며, 어떤 이는 "깃발이 흔들리는 것을 봅니다." 라고 하였으며, 또 어떤 이는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흔들림을 보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처럼 대답이 분분하여 일정하지 않았다. 혜능이 자리에서 일어나 법사에게 말하였다. "이는 대중의 망상심(妄想心)이 흔들리느냐 안 흔들리느냐일 따름이다. 이는 깃발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다. 법은 본래 흔들림과 흔들리지 않음이 없도다." 법사는 설법을 듣고 경악하고 망연자실하여 무슨 말인지를 몰랐다.
동산(東山)에서 법을 얻었음을 표명하다 기주 황매의 5조홍인 밑에서 법을 얻고부터 남방에 은둔하길 16년, 풍번문답을 계기로 혜능의 위대한 역량을 인정한 인종법사와의 만남은, 혜능으로 하여금 동산에서의 득법한 사실을 표명케 하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그 표명의 형식은 자료에 따라서 다양하지만, 이것에 의해 혜능이 남해에서 동산 홍인의 계승자임을 공인받게 되었다.

8. 머리를 깎고 계를 받다
- 계단(戒壇)과 보리수에 얽힌 인연담 -

 

머리카락을 묻고 탑을 세우다 동산홍인의 계승자임이 공인된 혜능이지만, 아직은 재속(在俗)의 신분이기 때문에, 이런 경우 정식으로 머리를 깎고 출가 수계하는 일이 그 다음 문제가 된다. 그런데 예발탑이라는 것은 머리를 깎고 출가 수계한 일을 기념하여서 그 머리카락을 묻고 세운 탑으로서, 부처의 손톱과 머리털을 공양하고자 세운 발탑과 비슷하다. 혜능이 의봉 원년(676) 정월 15일 머리를 깎고, 2월 8일 출가 수계한 것을 기념해서 이해 불탄일에 법성사(法性寺)의 법재가 깎은 머리카락을 묻고 7층의 부도를 건립했음을 적은 것이, 혜능 생존 중의 유일한 기록이자 현재 최고의 자료가 되는 『예발탑기』이다. 그렇지만 이 혜능의 발탑에 대해서는 그후의 여러 자료들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은 것도 대단히 기묘할 뿐더러, 이 발탑을 세웠다고 하는 법성사 법재의 행력(行歷)과, 법성사에서 『열반경』을 강의한 인종법사와 이 법성사의 주지인 법재의 관계 등이 완전히 불명확한 점도 이 자료의 커다란 수수께끼가 되고 있다.

계를 받고 종지(宗旨)를 보이다 의봉(儀鳳) 원년 정월 15일 법성사에서 인종법사에게 머리를 깎은 혜능은, 그로부터 24일 후인 2월 8일 같은 법성사에서 지광율사로부터 구족계 내지 만분계를 받음으로써 이제 비로소 정식으로 출가비구가 되었으며, 계단 앞 보리수 밑에서 동산 홍인대사로부터 받은 부처 이래의 단전(單傳)의 종지를 열어 보였다.


9. 조계(曹溪)에서의 교화와 인도
- 보림사(寶林寺)설법인가 대범사(大梵寺) 설법인가 -
조계 보림사로 돌아가다 『조계대사전』 에서는
인종법사가 대사를 청하여 제지사로 돌아가게 하였다. 지금의 광주 용흥사의 경장원은 대사가 법을 연 법당이다. 법사가 혜능대사에게 물었다. "오래도록 어디에 머무르셨습니까." "소주 곡현 남쪽 50리 되는 조계촌의 옛 보림사에 있었습니다." 법사는 강경을 마치고 승속 3천여 인을 거느리고 대사를 환송하여 조계로 돌아가게 하였다.
라고 하여, 인종이 3천여 인의 승속을 거느리고 혜능을 환송했음을 서술하고 있다. 특히 인종이 혜능에게 앞서의 행선지를 묻자 혜능은 소주 곡현의 남쪽 50리 되는 조계촌의 옛 보림사라고 대답함으로써 혜능과 보림사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조계에서의 교화와 인도 40세에 조계산으로 돌아온 혜능은 그 후 76세로 입적할 때까지 36년 간 조계를 중심으로 교화 활동을 폈으며, 그 동안 다음에 서술할 대범사(大梵寺)의 설법과 조정의 초빙 등이 이루어진 것이다. 크게 불법을 일으켜서 번뇌의 티끌을 씻어 내리고, 사람들을 인도할 때는 인내를 가지고 하였다 하며, 그 인내는 무생, 무아에 의해 달성되며, 무위, 무애야말로 어떠한 보시나 수행보다도 우월함이 강조되고 있다. 대범사(大梵寺) 설법

 

혜능이 조계로 돌아온 직후 무렵, 소주자사(韶州刺史) 위거(韋據)의 요청에 의해, 혜능이 대범사 강당에서 설법하고 이를 문인 법해가 모아 기록한 것이 바로 『단경』 임은 돈황본 『단경』 이 직접 얘기하였다.
혜능대사가 대범사 강당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 마하반야바라밀의 법을 설하고, 무상계(無相戒)를 주었다. 이 때 자리 아래의 승려 도속이 1만여인이나 되었다. 수주자사 위거 및 관료 30여 인, 유사(儒士) 30여 인이 함께 대사를 청해서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게 하였다. 자사가 드디어 문인인 법해로 하여금 모아서 기록하여 후대에 유행하게 하였다. 도를 배우는 자로서 이 종지를 잇고 서로 번갈아가며 전수하여 의지하고 따르는 바가 있게 하고 스승의 가르치심을 삼아 이 단경을 설하였다.
라 하여, 이하 설법의 내용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그 설법을 끝마치자 다시 조계산으로 돌아가서 교화, 인도하였는데, 우선 설법의 자리에서 사람들과의 사이에,
"대중들이여 흩어져라. 혜능도 조계로 돌아가리라. 만약 큰 의심이 있거든 저 산속으로 오라. 너희를 위해 의심을 부수고 함께 불성을 보리라." 자리를 함께 했던 관료 도속은 화상에게 예를 올리고 찬탄해 마지않았다. "좋구나 큰 깨달음이여, 예전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바이다. 영남에 복이 있어 생불이 여기 계시다. 누가 능히 지혜를 얻을 것인가." 일시에 다 흩어졌다.
라고 수작이 오고가니, 모였던 사람들이 해산하였다.

 

경(經)이라니 큰일 날 소리(?). 석가세존께서 설하신 팔만사천 대장경을 경(經)이라 하는데, 조사인 혜능의 설법집을 단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혜능이 깨달은 돈오의 깨달음은 절대적으로 부처님과 동일하다는 전제이다. 석가세존께서 깨달음을 얻은 연기법이나, 혜능대사가 깨달은 돈오의 깨달음은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임을 말한다. 더욱이 부처님께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마하가섭에게 법을 부촉하시고, 그 법의 징표로서 가사가 전해져 달마대사와 홍인대사를 거쳐 혜능에게 이르렀으니, 부처님과 혜능대사는 동일선상에 두는 것. 곧 혜능대사의 말씀은 경전과 조금도 차이가 없다. 따라서 혜능대사께서 대범사 강당에서 하룻동안 설하신 법문집 『육조단경』인 것을.

 

신회(神會)와의 만남

 

북종선(北宗禪) 에 대항하는 형태로, 혜능을 개조로 하는 남종선(南宗禪)을 확립하는 데 있어서 커다란 역할을 한 사람이 신회이다.혜능이 법성사에서 수계하고 이어서 같은 해 의봉 원년(676) 4월 8일에 혜능이 대중을 위해 처음 법을 열고 대중에게 질문한바, 하택사의 어린 사미인 신회가, 나이 13세였지만 그 물음에 답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몇 번의 문답 중에 신회를 때리더니, 다시 밤이 되어 재차 신회와 문답 중 비밀리에 법을 부촉하였다고 하며, 이 때 탁능은 40세이었다고 한다.
옥천사에 한 동자가 있으니, 나이 13세로 당양현 사람이며 이름은 신회라 한다. 대사에게 삼배의 얘를 하고 물었다. "스님께서는 좌선하면서 봅니까 안 봅니까?" 대사는 지팡이로 세 번 때리고 도리어 물었다. "아프기도 하고 안 아프기도 합니다." 신회는 백여 번 예를 행하여 잘못을 사과하고 스승으로 섬길 것을 청하고 좌우를 떠나지 않았다.


10. 조정과의 관계
- 병을 핑계로 부름에 응하지 않다 -

 

조정에서 부르다

 

조계에서 크게 선풍을 선양하고 있던 혜능의 명성을 듣고, 그때의 조정은 사자를 파견해서 혜능을 서울로 맞아들이려 했지만, 혜능은 병을 핑계로 굳이 사양하고, 재차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리어 마납가사와 비단 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측천무후가 즉위하여 불법을 숭상하였으며, 장수 원년 2월 20일 장창기를 칙사로 하여 혜능을 초청하였지만,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그로부터 4년 후인 만세통천 원년에 재차 초청하였지만 또다시 오지 않기에 혜능 처소에 전해지던 달마의 전신가사를 대신 청하여서 내도량에서 공양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혜능은 가사를 칙하에게 주고 칙사는 그것을 가지고 돌아간바, 측천무후는 아주 기뻐하며 내도량에 두고 공양했다고 한다.

 

천자의 칙문과 병을 핑계한 상표문

 

소주 조계산 석가혜능이 병으로 사양하는 표
혜능은 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도를 사모하여 외람되게도 홍인 대사로부터 여래의 심인(心印)을 부촉받고, 서국의 의발을 전해받고, 동토의 불심을 전수받게 되었습니다. 천은(天恩)으로 중사 설간을 보내시와 혜능을 궁궐로 부르심을 받자오나, 혜능은 오래도록 산림에 거처하였으며, 늙고 풍병에 걸렸습니다. 폐하의 덕은 만물의 바깥까지 감싸고, 도는 만민을 꿰뚫습니다. 창생을 양육하시며 백성에 인자하십니다. 뜻은 대교(大敎)를 넓히고 석문(釋門)을 흠숭하십니다. 혜능은 산에서 병을 고치고 도업을 닦고 지녀 위로는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여러 왕, 태자에까지 미치도록 허락하시기 바랍니다. 삼가 표를 바칩니다. 석가혜능은 돈수돈수합니다.
천자에 대한 상표문이므로 스스로는 겸손하면서, 천자의 덕에 대해서는 이를 찬탄하고, 자신은 중풍에 걸렸기 때문에 산에서 요양하면서 불도를 계속 닦음을 용서하기 바란다는 정중한 이유의 기분이 포함되어 있다.

 

사액을 받았기에 자택을 절로 삼다

 

신룡 3년(707) 11월 18일 조칙하여 소주의 백성에게 내리길, "대사가 중흥시킨 사찰의 불전 및 대사의 경방을 수리할 것"이라 하였다. 현판을 하사하여 법천사라 하고, 대사가 탄생한 신주의 옛집을 국은사로 삼았다.


11. 입적의 모습
- 문득 좌화(坐化)하다 -
탑을 만들다

 

앞서 혜능이 자기 대신에 설법할 인물로서 옹산사의 영진을 추천한 것은, 자신이 죽을 때를 미리 알고 있던 것이라고 여겼는데, 아마 같은 이유에서, 그 전년에 조계에 자신의 감탑(龕塔)을 쌓고 있음을 서술한 유일한 자료가 『조계대사전』이다.
대사가 살아 생전인 경운 2년에 멀리 조계에서 감탑을 만들고, 나중에 선천 2년 7월에 회랑건물이 아직 공사를 끝마치지 않자 재촉하여 빨리 마무리 짓게 하였다. "내가 바야흐로 가야 하겠다" 라고 하였으나, 문인들은 아직 그 뜻을 깨닫지 못하였다.

 

제자들에 대한 유계(遺誡)

 

혜능이 자신의 죽음이 가까웠음을 예측한 것은 이미 살펴본 그대로인데, 선천(先天) 2년 8월 질병에 걸렸던 사실이 『조계대사전』과 『송고승전』에 나온다. 즉 『조계대사전』에는
그 해(선천 2년) 8월 대사가 병이 들었다.
라 하였고, 『송고승전』에는,
선천 2년 8월 3일에 갑작스레 병이 들었다.
라고 하였다. 혜능이 문인에게 갑자기 유계를 한 것도 같은 8월 3일의 일이라고 한 것이 『신회어록』으로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천 2년 8월 3일에 이르러, 홀연 문도에게 고하였다. "나 이제 가리라." 제자인 법해(法海)가 스승에게 물었다. "이후에 뒤를 잇는 자가 있습니까. 여기에 옷이 있는데 무슨 까닭에 전하지 않습니까." "너는 묻지 말라. 이후에 어려움이 지극히 많이 일어날 것이다. 나는 이 가사 때문에 몇 번인가 목숨을 잃을 뻔했다. 네가 때를 알고자 하니, 내가 죽은 지 40년 후에 종지를 수립하는 자가 곧 그 사람이다."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법이 옷에 달려 있어서, 옷을 가지고 법을 전하는 것인지는." "법이 옷에 달려 있지 않다 하더라도 옷은 대대의 상승을 나타내므로, 옷을 전하는 것으로써 신표를 삼는다. 지금 불법에 스승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고 도를 배우는 자가 종지를 알 수 있게 되었으니, 착각하거나 실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물며 석가여래의 금란가사는 원래 계족산에 있었는데, 이제 생각컨대 가섭이 이 가사를 입고서 오로지 미를이 세상에 출현하기를 기다려 이 옷을 부탁하려고 하였으니, 이로써 석가여래가 옷을 전하는 것으로써 신표를 삼았음을 나타내었다. 우리 육대에 걸친 조사도 이와 같다. 나는 이제 능히 여래의 본성을 완전히 깨쳤다. 여래는 이제 내 몸 속에 있다. 나는 여래와 차이가 없다. 여래가 곧 나의 진여이다."

 

전법게(傳法偈)

 

혜능이, "너희들은 내가 두 게송을 지어서 달마화상 게송의 취지를 따르는 것을 들어보라. 너희 미혹한 자들이 이 게송에 의해 수행한다면 반드시 견성(見性)할 것이다"라 하여, 다음 두 게송을 설했다고 하였다. 첫째 게송에 이르길,
심지(心地)에 삿된 꽃이 피고,
다섯 잎은 뿌리를 좇아 따른다.
함께 무명업(無明業)을 지어,
이제 업바람에 불리운다.

둘째 게송에 이르길,
심지(心地)에 바른 꽃이 피고,
다섯 잎은 뿌리를 좇아 따른다.
함께 반야의 지혜를 닦아서,
불보리(佛菩)를 맞이한다.
이 두 게송은, 첫째 사법(邪法)에 의한 자, 둘째를 정법(正法)에 의한 자로 양자를 대비하고, 둘째의 반야의 지혜에 의한 입장을 강조하고 있는 것인데, 첫째가 북종선을, 둘째가 남종선을 가리키고 있음은 분명하며, 여기에 의해 돈황본 『단경』도 여타의 제자료와 마찬가지로 돈오(頓悟)를 주장하고 있음이 명확해졌다.

 

입적과 기이한 상서

 

이날 산이 무너지고 땅이 흔들렸으며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바람과 구름이 모습을 잃었으며 나무는 하얗게 변했다. 따로 이상한 향이 일어나 며칠 지나서 그쳤다. 조계의 시냇물이 그치고 샘과 연못이 말라붙은 지 3일 남짓 지났다.

12. 입적 후의 사건
- 유해, 비명, 문인, 전의, 시호 등 -

 

유해를 둘러싼 이야기

 

조계의 문인들이 대사의 유해를 맞아 조계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그때 수령은 기꺼이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국은사에 머무르게 하고 탑을 일으켜 공양하고자 하였다. 그 때 문인인 승려 숭일(崇一)등이 자사를 만나서 도리를 얘기하고서야 비로소 조계로 돌아갔다. 대사의 머리는 먼저 철편으로 싸고 전신은 아교와 옻으로 칠했다.

 

혜능의 제자들

 

혜능의 문인에 대해 기술한 최초의 자료는 신회 한 사람만을 거론한 『왕유의 비명』이다. 이것은 신회의 의뢰를 받아 왕유가 찬술한 것이므로, 신회 한 사람을 드는 것은 당연하다.그런데 초기 여러 자료들은 문인에 대해서는 이것을 단편적으로 언급한 데 불과하지만, 나중의 돈황본 『단경』에서는 '10대 제자'라는 정형화된 형식으로 제시하게 된다. 원래 그 전에 "문인을 논하자면, 승속 1만5천 인이니 이루 다 말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어서, 1만5천이나 육박하는 도속의 문인이 있었던 것 같지만,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제자로는 혜능이 입멸에 임하여 유계하고자 불렀다는 10대 제자이다. 이 10대 제자는 돈황본 『단경』에서는 법해, 지성, 법달, 지상, 지통, 지철, 지도, 법진, 법여, 신회의 10인이다.

 

전의(傳衣) 공양과 반환

 

『역대법보기』에 의하면, 측천무후는 두 번 칙사를 보내어 혜능을 초청하였지만, 혜능이 병을 핑계로 서울로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혜능 처소에 있는 전신가사를 청하여 공양하고 싶다고 제의하여, 반세통천 원년(696) 내도량에서 공양했다고 한다.그러나 이것은 혜능 생전의 일이다. 나중의 『조계대사전』에서는 혜능 입멸 후에 전신가사와 그것을 보관하고 있던 행도를 대궐로 불러들여 공양하려고 한 사실이 상세하게 서술되고 있다. 즉 혜능의 입멸 후 48년이 지난 상원(上元) 2년(761) 12월 17일에 그 당시 황제인 숙종이 광주절도사 위리견의 보고에 의해 혜능의 제자 행도와 더불어 혜능에게 전해진 전신가사의 입궐을 조칙하였다고 하며, 그 칙문을 게재하고 있다.

 

시호(諡號)의 추종

 

당 헌종황제가 대사에게 시호하기를 대감선사(大鑒禪師)라 하였다.

 

 

출처 : 최안 " 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 "

글쓴이 : 최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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