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문 염불수행의 실천체계
정토문(淨土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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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는 안락정토(安樂淨土)이니 "자연과 생명이 청정하여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운 세계"이다. 정토문은 안심(安心)과 정토구현의 깨달음(正覺)을 추구하는 부처님의 근본 뜻을 실현하고자 한다. 이 문은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힘입어 안심을 얻고, 자비광명에 의지하여 정토에 왕생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어 보살도를 행하고자 염불법을 실천하는데, 오늘날의 범부가 믿음의 방편으로 행하기 쉬운 이행도(易行道)이다. 정토문은 "마음을 정토에 두는 도(游心淨土)"이므로 내면을 관하는 수행과는 초점의 방향이 다르다. 염불문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는 정토문으로 통일하기로 하겠다.
선오후수문(先悟後修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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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문은 먼저 깨닫고 뒤에 보살도를 실천하여 수행의 궁극인 일심(一心)의 바다로 나아가는 문이다. 정토문은 반드시 깨달음을 우선하고 있으며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의 깨달음은 연기적 세계관을 통찰하고 발심(發心)하여 10해초발심주 즉 불퇴전지(不退轉地)에 오르는 것으로 정각(正覺)을 성취하는 지위이다.
염불수행의 실천체계
(1)칭명염불
칭명염불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수행이다. 하배 즉, 재가자 중에서 부처님의 지혜에 대한 신심이 성취되지 않은 사람이 행한다. 그러나 깊은 믿음(深心=보리심(隨事發心), 지성심, 원왕생심을 일으켜야 한다. 염불왕생을 믿고 단지 십념의 염불로 임종 후에 정토에 왕생하며, 보살종성인은 단 일념으로 왕생한다. 이것은 부처님 말씀이니 의심없이 믿어야 한다.
칭명염불을 통해 아미타불의 자비광명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결정된 믿음이 성취되면 안심과 더불어 염불삼매를 얻을 수 있지만 깨달음은 왕생 후에 이루어진다. 이 경지에 이르면 관상염불을 쉽게 실천할 수 있다.
(2)관상염불
관상염불은 정토의 경계를 관하는 수행이다. 상배(출가자)와 중배(재가자 중에서 발심한 자)가 행한다. 순리발심(順理發心)으로 작원(사마타:止)과 관상(비파사나:觀)으로써 정토의 경계를 관찰하고, 회향심을 일으켜 관불삼매를 성취하면 정토의 경계를 감득하고 이 땅에서 깨달음을 성취한다. 그러나 그 경계가 [정토삼부경]에서 묘사한 모습과는 다르다. 정토의 경계는 4단계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관상염불은 조사선 혹은 간화선이 성립되기 이전에 완성된 염불의 선이다. 선은 지관의 수행인데 관상염불은 지관행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으므로 선(선나: 正思,思惟修)이라고 부르며, 보신불의 경계를 관하기 때문에 선이다. 여기서 말하는 선은 "아미타불은 누구인가"라고 하는 염불선과는 다르다.
관법에는 총상관과 별상관이 있는데 총상관은 무량광명에 대한 믿음의 단계이며, 별상관은 일체의 경계를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관하는 화신관(化身觀)이다.
(3) 칭명과 지관의 병행
칭명에 대한 결정된 믿음을 일으키면 임종 후에 정토에 왕생함으로써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것은 확정된다. 그러므로 차원 높은 염불수행인 지관을 병행하면 그 공덕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며, 이해가 깊어지면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 만약 칭명염불만을 요구한다면, 수행의 깊이에 따라 근기가 달라져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는 자에게 그 길을 열어주지 못하는 결과가 되고 만다.
다른 수행과의 비교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칭명염불은 정토왕생과 생사해탈을 목적으로 하되 불교의 세계관과 실천체계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으므로 여타의 불보살 명호를 부르는 칭명염불과 비교하면 본질적으로 다르다. 더우기 정토문에는 차원 높은 수행법인 선까지 마련되어 있어서 상중하 근기를 모두 섭수하여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한다.
간화선(看話禪)은 화두를 관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소요되야 집중될 수 있으며 일상생활 가운데서 실천하기란 진실로 어렵다. 일하면서 화두를 든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실천해 보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비파사나(四念處觀)는 내면을 관하기 때문에 세계를 관하는 데는 단점이 있으며, 내면을 관하는 모든 수행은 자칫 행동이 경직될 수 있다.
염불은 생사해탈이 확보되고 이 땅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돈오돈수와는 거리가 있지만 스스로의 환경과 업력을 헤아린다면 단박에 부처되는 길을 걸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정토문의 수행은 번뇌란 실체가 없기 때문에 염두에 두지 않는다. 칭명염불은 믿음의 방편으로 안심을 얻고 정토에 왕생함으로써 생사해탈하는데 그것은 부처님의 지혜에 의지하는 것이므로 의심할 여지가 없다.
염불을 실천하여 정토의 경계를 깊이 이해하면 현재나 미래에 그와 같은 세계에 태어난다. 그 왕생도 부처님의 본원력에 힘입어 자연히 성취되는 것이다. 염불의 지관을 통한 왕생은 "가서 태어난다"라기 보다 믿음과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정토의 "경계가 자신에게로 다가 온다"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정토문은 이 시대 범부에게 진실로 안심과 희망을 부여하는 이행도의 실천문이다.
출처: 아미타파 (http://cafe.daum.net/amit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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