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붓다의 향기

[스크랩] [반야심경] 마하(摩訶) (2)

수선님 2018. 6. 17. 12:39

  
 

    마하(摩訶) (2)
    다시 말해, 우리가 ''크다・작다'' 혹은 ''많다・적다'',
    ''뛰어나다・어리석다''라고 느끼는 등의 모든 분별은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고정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즉, 무엇을 붙들고, 잘났다거나, 못났다거나, 혹은 크다거나,
    작다거나 하는 등의 분별심을 내는 것은 무명(無明) 때문에
    일어나는 어리석음의 과보(果報)일 뿐인 것입니다.
    비슷한 다른 예로 젓가락을 가지고 길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또한 전봇대라는 인연 앞에서는 짧게 되고,
    이쑤시게라는 인연과 함께라면 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젓가락 그 자체만을 가지고 길다 짧다고 한다는 것은
    잘못된 우리의 분별일 뿐, 본래자리에서는 그 어떤 차별도
    없습니다. 인연따라 짧을수도 길수도 있을 뿐,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잘생겼다, 못생겼다는 분별
    똑똑하다, 어리석다는 분별,
    뚱뚱하다, 말랐다는 분별...
    이 모든 분별들은 본래부터 있던 고정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인연따라 분별하고 고정지어 놓고는
    스스로 지어 놓은 고정관념에 빠져 괴로워하고 답답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보고 크다고 할 것이며,무엇을 보고 작다고
    하겠습니까? 이처럼 고정된 것이 없기에, ‘크다, 작다’ 라고
    하는 인식의 극단을 벗어나라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중도(中道)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분별은 단지 주위의 환경[인연]이 어떠한가에 따라
    달라지는 개념일 뿐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위의 인연 따라,
    예컨대 작은 사람들 앞에서는 큰 사람도 되었다가 또 큰
    사람들과의 인연 속에서는 작은 사람도 되고, 이렇게 일체와
    함께 돌아가는 것일 뿐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나 혼자 무인도에 살았다면,‘내가 크다・작다,
    잘났다・못났다, 똑똑하다・어리석다’라는 분별도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 인연이 없고 오직 혼자 뿐이니 무슨 분별이
    생기겠습니까.
    즉, 큰 사람이 있으니 작은 사람도 있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을 다른 말로 연기법(緣起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닌 연(緣)하여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이해한다면, 중도, 연기의 가르침을 무아(無我),
    무분별(無分別), 무자성(無自性), 공(空)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만물이 본래 크고 작은 것이 아니라
    주위의 인연, 주위의 조건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이 크다, 작다고
    하는 분별심을 일으키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본래 적정(寂靜)하고
    청정한 깨달음의 세계에서 보면 무분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본래자리에서는 분별할 것이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스님네들이 ‘분별하지 마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정되게 돌아감이 없는 세상에서 무엇을 붙들어 ‘나다’
    하고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큰 것이 나인가요, 작은 것이 나인가요? 착한 것이 나입니까,
    악한 것이 나입니까? 그러므로, ‘나다’ 하고 내세울 것이
    없는 것이고, 그렇기에 부처님께서 무아(無我)라고 하신 것입니다.

 

 

출처 : 붓다의 향기 뜨락
글쓴이 : 여실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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