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般若) (1)
‘반야(般若)’라는 말은 범어로 ‘프라즈냐(Prajna)’
라고 하며, 팔리 어로는 ‘판냐(panna)’라고 합니다.
반야는 바로 팔리 어 ‘판냐’의 음역어로서,
마하와 같이 그 발음만 따서 옮긴 또 다른 예입니다.
이 또한 ‘마하’에서와 같이, 반야라는 의미를 중국말로
옮기기에 적당한 단어가 없었으므로,그 의미가 퇴색됨을
우려해 따로 번역하지 않고 ‘반야’라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야’ 또한 우리 범부의 사량(思量)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단어일 것입니다.
반야를 굳이 번역한다면 ‘지혜(智慧)’라고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지혜가 아니라, ‘최고의 지혜,
즉 깨달음에 이르신 부처님의 밝은 지혜’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부처가 아닌 범부중생으로서
어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단어이겠습니까?
‘지혜’와 비슷한 단어로, ‘지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은 ‘지혜’와는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계산하고, 암기하고, 생각하고,분별하는 능력이
극대화된 것이 ‘지식’이라 한다면, ‘지혜’는 이러한
범부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반야의 지혜는 머리를 굴려 생각하고 분별하는 일련의 행위에
대해서 오히려 버리고 비울 것을 강조합니다.
인간의 생각에서 오는 지식은 오히려 우리의 정신세계를
복잡하고 혼란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지식은 업(業)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지식들을 모두 비우고
놓아버려야 합니다. 방하착(放下着)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의 맑은 불성(佛性), 본래면목 자리에
모두를 되돌려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간의 지식을 부여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의 바다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식들이
‘머리 굴리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지요. 일반적으로‘지혜’
라고 하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관조반야(觀照般若)’인데, 이것은 일체의 현상계를
있는 그대로 정견(正見)하는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제법(諸法)의 실상, 즉 있는 그대로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고정된 바 없이 비춰 보는 지혜를 말합니다.
2,500년 전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젊은 청년이 오랜 수행 끝에
성취한 깨달음의 지혜가 바로 관조반야인 것입니다.
싯다르타는 어떤 신(神)과도 같은 절대적 존재에게서
깨달음을 받은 것이 아니며, 누군가의 도움으로 깨닫게 된 것도
아닙니다. 오직 현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아
현실 세계의 모습을 여실히 깨달은 것이니
이 지혜를 관조반야라 하는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