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사회복지 운동의 일환으로 자선을 베푸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자선이란 이름으로 자기를 알리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자선이나 보시를 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자기 수양에 있습니다.
재물을 남에게 보시한다는 것은 나의 탐욕스러운 마음을 없애는 수양입니다. 그러므로 자선이나 보시를 통하여 자기의 이름을 얻고자 하는 것은 지극히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로는 지혜(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입니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행에 순서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즉 모든 것에 앞서 바른 지혜를 얻는 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보시도 돕는 그 행위에 앞서 그 행위가 자기 수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시의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재시(財施)이니 이는 재물로서 남을 돕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적으로 돕는 것입니다. 둘은 법시(法施)이니 이는 법의 가르침을 베푸는 것입니다. 진리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셋은 무외시(無畏施)이니 이는 사람이 갖는 공포와 근심을 없애 주는 것입니다.
현세의 고통과 번뇌를 없애 주며 미래세에 완전한 자유를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이는 곧 본질적으로 법을 바르게 교화하고 실천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입니다. 재물은 육신을 돕지만 법시는 인간의 마음을 돕는 행위입니다.
《사십이장경 제10장》에 나와 있는 내용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다른 사람이 도를 베푸는 것을 보고 이를 도와 기뻐한다면, 그 얻는 복이 굉장히 클 것이다.”
어떤 사문이 질문하였다.
“이 복이 다함이 있습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비유하자면 하나의 횃불과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각 횃불을 가지고 와서 그 불을 나누어 음식을 끓여 먹고 어둠을 밝혀도 본래의 횃불은 변하지 않으니 복도 또한 그와 같다.”
이 인용문에서 도를 베푼다는 것은 법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재시의 보시는 열 가지 선행 중에서 도둑질에 대한 반대로 몸으로 짓는 적극적인 선한 행동입니다. 나에 대한 아집과 물건에 대한 집착으로 보시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금강경》에 이르길 “보살은 당연히 법에 매달림이 없이 보시하여야 한다. 색·소리·냄새·맛·촉각·생각에 매달리지 않고 베풀어 주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베풀더라도 베풀어 준다는 것에 ‘나’라는 주관적인 생각, ‘네’게 준다는 상대적인 생각, 어떤 물건이라는 생각 등에 집착이 없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대품반야경》에서는 “세 가지가 청정해야 한다. 하나는 주는 자[施者]가 청정해야 하고, 둘은 받는 자[受者]가 청정해야 하고, 셋은 주는 물건[施物]이 청정해야 한다. 이 셋은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금강삼매경론》에서는 “욕심을 떠난 경계에 잘 들어가 마음이 항상 청정하며 진실한 말의 방편과 본래의 이익으로 사람을 이롭게 하여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금강경》의 ‘청정하다’는 말은 집착이 없다는 뜻이고 ‘셋을 얻을 수 없다’고 한 것은 ‘나’와 ‘너’ ‘나의 것’이라는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달리 말하면 ‘나’라는 교만심과 ‘상대적’인 우월감 내지 사물에 대한 집착을 가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안팎의 탐욕을 멸했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한 것도 이와 상통한 말이라 하겠습니다.
대월지국의 푸슈카라바티 성에 카루나라고 하는 한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동쪽에 있는 타쿠샤시라 성에 초대되어 12년 간 그림을 그려서 30만 냥의 금을 얻었습니다.
금을 가지고 본국에 돌아오니 푸슈라비티 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북을 치며 큰 대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화가는 그곳에서 많은 출가자들의 모임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신심이 청정하여 모임의 사무장에게 물었습니다.
“얼마만한 돈이 있으면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하루를 먹을 수 있습니까?”
사무장이 말했습니다.
“한 30만 냥의 금이 있다면 하루는 족히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즉시 가지고 온 30만 냥의 금을 사무장에게 주면서 말했습니다.
“나를 위해 이 30만 냥의 금으로 하루 양식에 쓰십시오. 나는 내일 또 오겠습니다.”
맨손으로 집에 돌아온 그를 보고 아내가 물었습니다.
“12년 간 일하고 얼마나 벌었습니까?”
“나는 30만 냥의 금을 얻었소.”
“그 30만 냥의 금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이미 복덕을 낳는 논밭에 심고 왔소.”
“복덕을 낳는 논밭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출가자의 집단에 보시한 것이요.”
이 소리를 듣고 아내는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12년 간 타국에서 벌어 온 돈을 그렇게 허무하게 버리다니. 아내는 관청에다 남편을 고발했습니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금치산(禁治産) 선고(宣告)를 제기한 셈입니다. 관리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아내가 말했습니다.
“제 남편은 미치광이고 어리석습니다. 12년 간을 타국에 가서 그림을 그려 간신히 금 30만 냥을 받았는데, 아내와 자식이 어떻게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 돈을 모두 남에게 주어 버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이를 찾으려고 남편을 고발한 것입니다.”
관리는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무슨 까닭으로 그 금을 아내와 자식에게 가져가지 않고 그것을 남에게 주었는가?”
“저는 전세에서 공덕을 행하지 않아 금세는 가난하고 곤궁하여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금세에 복덕을 낳는 논밭을 만났습니다. 만약 지금 복덕을 심지 않는다면 후세도 다시 가난할 것입니다.
가난이 대대로 이어져 빠져 나올 때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 조속히 가난과 곤궁을 버리고 싶습니다. 그런 이유로 가지고 있던 돈 전부를 수행자의 모임에 보시했습니다.”
관리 또한 부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노력하고 고생하여 얻은 것을 전부 수행자의 모임에 보시하였으니 그대는 실로 착한 사람이다.”
그리고 관리는 자기가 목에 걸었던 값진 영락(구슬 목걸이)과 타고 있던 말과 자신의 영지인 한 부락을 가난한 화가에게 보시하며 말했습니다.
“너는 처음으로 수행자의 모임에 보시하였으나 수행자들은 아직 식사를 하지 않았다. 너는 곡물의 씨앗을 뿌렸지만 아직 그 싹이 나오지는 않았다. 큰 과보는 후세에 있을 것이다.”
씨앗을 뿌리면 그 후에 씨앗이 커서 열매를 맺습니다. 지금 뿌리고 오늘 얻을 수도 있지만 내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 뿌린 씨앗에서 빨리 열매를 얻고자 볶은 씨앗을 뿌린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뿌린 씨앗은 결실을 맺게 됩니다.
요즘 사람들은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 남에게 베풀거나 다시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얻어보겠다는 욕심으로 베풉니다. 이것은 진정한 베풂이 아닙니다. 다시 일화를 하나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왕사성에 바드리카라는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재산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많았는데도 인색하고 욕심이 많아 남에게 조금도 베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에 지은 공덕을 까먹기만 하고 새로운 공덕을 쌓을 줄 몰랐습니다. 그는 어찌나 인색했던지 들어오는 문은 일곱 개를 만들고, 또 겹겹이 닫아 걸고는 무엇이든 얻으러 오는 사람은 일체 출입을 막았습니다. 또 마당에는 그물을 쳐서 새들이 뜰에 내려와 모이를 쪼아먹는 것까지도 막았습니다.
어느 날 목갈라나와 캇사파, 아니룻다 세 사람이 모여 이 사람을 교화시켜야겠다고 의논하고 그 집으로 갔습니다. 이때 바드리카는 자기 방에서 혼자 맛있는 떡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바루를 들고 나타난 아니룻다를 보고 놀랐습니다. 마음으로 못마땅했지만 아니룻다에게 남은 떡을 조금 떼어 주었습니다.
아니룻다가 돌아간 뒤 바드리카는 문지기를 불러 왜 사문을 들여 보냈느냐고 호통쳤습니다. 그러나 문지기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문이 꽉 채워진 것을 보고 절대로 그럴 리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바드리카가 다시 구운 떡을 먹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캇사파가 불쑥 그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이번에도 할 수 없이 먹던 것을 조금 떼어 주었습니다. 그가 돌아간 후 다시 문지기를 불러 왜 사문을 들여 보냈느냐고 호통쳤습니다. 그러나 문지기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문이 꽉 채워진 것을 보고 절대로 그럴 리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바드리카가 이번에도 구운 떡을 먹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또 캇사파가 불쑥 그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이번에도 할 수 없이 먹던 것을 조금 떼어 주었습니다. 그가 돌아간 후 다시 문지기가 불러 왜 사문을 들여 보냈느냐고 질책했지만 문지기는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똑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바드리카는 이들이 어디로 어떻게 들어왔는지 몰라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는 그들이 요술을 부려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고 욕을 퍼부었습니다. 마침 그의 아내가 그 욕설을 듣고는 놀라서 달려와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고나 욕을 하십니까? 처음 온 분은 카필라의 드로노다나 왕의 아들 아니룻다 스님입니다. 그 분은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 제자들 중에서 천안통이 으뜸이신 분입니다. 두번째 오신 스님은 카필라의 부호의 아들인 캇사파 스님입니다.
그 분은 뛰어난 미인을 아내로 맞았다가 함께 출가하여 검소한 생활을 함으로써 두타 제일이라고 칭송받는 분입니다. 이와 같은 큰스님은 뵈려고 해도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집에 찾아 오신 것은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는데 어찌 그렇게 말하십니까?”
“그 말을 들으니 언제가 그 이름을 들은 것 같군.”
하고 바드리카는 말했습니다.
그때 목갈라나는 쳐놓은 그물을 뚫고 공중에 뜬 채 가부좌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드리카는 놀라고 두려워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은 천신이냐, 귀신이냐, 야차냐?”
“나는 천신도 귀신도 야차도 아니다. 나는 부처님의 제자 목갈라나다. 법을 설하기 위해 네게 왔다.”
바드리카는 목갈라나를 보고는 보시를 청하는 거지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요구가 있을지라도 거절하리라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목갈라나는 법을 설했습니다.
“부처님은 법과 재물 두 가지 보시를 말씀하십니다. 정신차려 잘 들으시오. 내 이제 법을 보시하리다. 부처님은 다섯 가지로 이 법보시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는 주지 않는 남의 물건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는 남의 아내를 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넷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술을 마시지 않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법의 보시입니다. 당신은 한 평생 이 큰 보시를 지켜야 합니다.”
설법을 다 들은 바드리카는 이 다섯 가지 법보시가 아무 손해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우선 마음을 놓았습니다.
살생하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고, 자기는 부자이니 남의 것을 가질 필요가 없고, 남의 아내를 범하지 않는 것과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은 좋은 일이며, 술을 먹지 말라고 하니 그것은 돈을 모으는 요긴한 방법이라 더욱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런 것이라면 즐겨 따르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목갈라나에게 공양을 드렸습니다. 공양이 끝나자 그는 내친 김에 옷도 한 벌 공양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창고로 갔습니다. 창고에 들어가 값비싼 옷과 좋은 옷은 성큼 줄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갖가지 천 중에서 가장 허름한 것을 고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손이 저절로 좋은 천으로만 옮겨가는 것이었습니다.
몇번을 되풀이해도 똑같이 좋은 천으로만 손이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문득 목갈라나의 말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남에게 베풀면서 자기 마음과 싸우는 것은 어질고 착한 이로서 못할 일, 보시란 싸움이 아니니 당신의 마음 내킨 대로 하시오.”
바드리카는 이 소리를 듣자 자기 마음이 훤히 드러나 보인 것을 부끄러워하여 좋은 천을 가져다 목갈라나에게 공양했습니다. 목갈라나는 이것을 받고 다시 그에게 보시의 공덕에 대한 법을 설했습니다. 바드리카는 비로소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부처님의 제자가 될 것을 맹세했습니다.
법시란 곧 법을 베풂을 말합니다. 법은 곧 부처님의 가르침이니 이는 연기법이요, 위없는 법이며 멸함이 없는 최상의 법입니다. 그 본성은 항상(如)하고 진실되며 거짓이 없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는 과거·현재·미래 삼세에 영원하고 공간적으로는 삼계에 두루하며, 시방(十方)에 진실되고 걸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삼천대천세계보다 큽니다. 왜냐 하면 삼천대천세계는 언젠가 없어질 수 있지만 이 법은 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금강경》에서는 “선남자 선여인이 무수한 항하의 모래만큼 많은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워 보시를 한다고 해도 이 사구게(四句偈) 하나만이라도 수지하여 여러 사람을 위하여 설명을 잘하여 들려줄 것 같으면 이 공덕으로 받는 복이 훨씬 더 크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법시의 공덕이 크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이란 전생에 선업을 쌓은 공덕으로 이승에서 불법을 들을 수 있으며, 또 신앙할 수 있는 남녀, 혹은 이승에서 선행을 많이 수업한 선인(善人)을 말합니다.
항하는 갠지스 강을 말합니다. 인도 북부에서 남동으로 흘러 방글라데시에서 벵골 만으로 흘러들어 가는 인도 최대의 강이며, 인도에서는 ‘인도의 어머니’ ‘성스러운 강’으로 추앙하고 있습니다.
본류(本流)의 길이만도 2,500킬로미터나 되고, 너비는 16킬로미터나 되는 바다와 같은 큰 강입니다.
강 언덕과 바닥에는 하얗고 고운 가는 모래가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무량한 것을 늘 항하와 항하의 모래로 비유하셨습니다.
수지(受持)의 ‘수’는 부처님께 배우는 것을 의미하고, ‘지’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 뜻을 이해하고 수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지(受持)라 함은 무아(無我)·무심(無心)의 심경(心境)으로 부처님이 가르치신 말씀을 그대로 믿고 그것을 실제로 증험하며, 구현하며, 단단히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서 수행한다는 뜻입니다. 간략하게 설명하면 ‘수’는 마음에 깊이 간직하는 것이고, ‘지’는 그 믿음을 가져서 잃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삼천대천세계란 인도의 고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신화적 세계의 구조관에서 나온 말입니다. 현재 사는 이 세계는 수미산을 중심으로 주위에 일곱 개의 산과 여덟 개의 바다가 둘러싸여 있고, 그밖에는 다시 철위산이라고 하는 산이 에워싸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세계를 소세계(小世界)라 하고, 이 소세계 천 개를 소천세계(小千世界)라 하고, 소천세계의 천 개가 모인 것을 중천세계라 하고, 중천세계의 천 개가 모인 것을 대천세계라도 하는데, 이 대천세계는 천(千)을 세 번 거듭 말한 것이므로 삼천대천 세계라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삼천대천세계는 단순히 천(千)을 세 번 곱한 십억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광대무변한 우주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사구게(四句偈)라 함은 《금강경》에서 나오는 사구(四句)로 된 말을 의미합니다. 게(偈)란 길게 하신 법문을 다시 중복하고 요약하여 찬송하는 일종의 시(詩)형식의 운을 띤 게송이라 하겠습니다.
법계란 법성과 같은 말입니다. 부처님이 항하사(갠지스 강의 모래)만큼 출현하더라도 이 법계는 줄어들거나 늘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바다에 소금 몇 숟갈 부어 넣더라도 바다가 더 짜지 않듯이, 천 년 전의 불이나 지금의 불이나 그 뜨거운 성질이 변하지 않듯이, 법성은 그렇게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법성이 무한하고 장애가 없고, 시방에 두루하듯 가르침을 전하는 복 또한 이와 같이 한량없이 무궁무량한 것입니다. 하나의 횃불은 그 불을 아무리 나누더라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삼천대천세계에 나누어 주더라도 다함이 없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법이 그러하므로 그 복덕 또한 그러하다고 한 것입니다.
불자님들께서는 이제 연말연시나 명절에만 연례행사처럼 보시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닦는 수행과정으로서 늘 보시행을 하십시오. 온갖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사람들은 실의에 빠지고 절망 속에서 바른 길을 찾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에 처해 있을수록 청정하고 바람이 없는 보시행을 행할 때 뒷날 복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처지만 생각하지 말고 한량없는 복덕을 구족할 수 있는 불자가 되도록 합시다.
수보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haha723/14000440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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