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병이들었을 때에 마음을 다잡는 방법은 무엇일까?
"벗들이여, 여기 나는 몸에 대하여 몸을 관찰하며,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로 알고 깊이 새겨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느낌에 대하여 느낌을 관찰하며,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로 알고 깊이 새겨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관찰하며,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로 알고 깊이 새겨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사물에 대하여 사물을 관찰하며,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로 알고 깊이 새겨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합니다."
"벗들이여, 이와 같이 네가지 새김의 토대에 마음을 잘 정립하여 익히면 몸에 고통의 느낌이 생겨나도 마음을 사로잡지 않습니다."
- 우리말<쌍윳따니까야> 10권 459쪽 중병
존자 아누룻다가 싸밧티의 안다바나에서 중병이 들어 괴로워했을 때 수행승들이 찾아와서 "어떻게 지내셨기에 몸에 고통의 느낌이 생겨나도 마음을 사로잡지 않습니까?" 라고 묻는다.
위의 말은 이에 대한 아누룻다의 답변이다.
이 경전을 통해 각자가 갖고 있는 사념처에 대한 이해들을 펼쳐 놓을 기회를 갖게 되었다. 네 가지 새김의 토대, 즉 [신, 수, 심, 법(身受心法)]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대화 중에 '법'에 대한 이해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의견이 오갔다.
'법(法)'은 알다시피 쌍쓰끄리뜨어로는 다르마(Dharma) 빠알리어로는 담마(Dhamma)의 한역이다. 어원적으로 '사물을 유지시켜 주는 것' 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사물, 현상, 법칙, 진리, 가르침, 상태, 사건, 조건, 원리, 정신현상, 대상으로 번역될 수 있고, 때로는 절(節)을 유도하는 문법적인 기능에 이르기까지 쓰임새가 매우 다양하다.
따라서 텍스트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고 번역하게 되면 내용과는 동떨어진 매우 난해한 이론이 펼쳐질 가능성마저 있는 용어이다.
한문 경전의 난해함은 많은 부분이 이처럼 텍스트적인 의미를 고려하지 않고 일괄적으로 법으로 번역했던 데 원인이 있다.
예를 들어 '다르마' 가 영어에서의 관계 대명사처럼 그냥 '∼하는 것' 이라고 쓰일 경우가 있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허망한 것'이라고 번역해야 할 것을 '허망법'이라고 번역하여 마치 허망법이라는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게 되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네가지 새김의 토대(四念處)에서 법념처(法念處)는 번역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이다. 그래서 학자들마다 각자의 이해방식에 따라 사물에 대한 새김, 정신현상에 대한 새김, 가르침에 대한 새김 등 다양하게 번역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느 것도 만족할만하게 '다르마'의 의미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다르마를 사물이라고 하면 정신현상을 설명하기에 부적합하고, 정신현상이라고 하면 현실의 구체적인 사건을 반영하지 못하며, 가르침이라고 번역하면, 단지 원리라는 측면이 강해서 사물이나 현상을 설명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한국 빠알리 성전협회에서도 이미 간행된 <쌍윳따니까야>에서 다르마를 '사물'로 번역한 바 있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토론과 숙고 끝에 <맛지마니까야>에서는 '사건'이라는 용어로 번역하고 있다.(매우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현재 이러한 문제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주석이나 색인을 통해 용어의 쓰임을 밝히고 있다.)
'사건'이라는 용어를 채택한 이유는 '다르마'는 연기적인 것이고 연기의 산물이 연생(緣生)이라고 할 때, 이와 같이 실체를 부정하는 사유를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의 역경가 가운데도 이것을 사건(此事)으로 번역한 경우가 있다.
물론 이날 대화모임에서 제기된 바와 같이 탐진치나 괴로움과 같은 정신현상을 일상적인 의미에서 많이 쓰이는 '사건'이라는 용어로 규정하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한편, 몸 감수 마음은 사건속의 범주적 계기이며, 법은 이러한 범주적인 계기가 총체화된 것으로서의 사건으로 봐야 하며, 이러한 사건에 대한 새김을 통해서 연기법 또는 관계성에 대한 인식에 도달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몸은 병들어도 마음은 병들지 않을까?
"그대의 몸은 허약하고 낡아버렸다. 장자여, 그와 같은 몸을 이끌고 다니면서 잠시라도 하물며 건강하다고 자칭한다면 어리석은 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장자여, 그대는 그것에 관해 이와 같이 '나의 몸은 병들어도 나의 마음은 병들어서는 안 된다' 라고 배워야한다. 장자여, 그대는 이와 같이 배워야한다."
-우리말<쌍윳따니까야> 4권 25쪽 나꿀라삐따
한때 세존께서 박가의 쑹쑤마라기리에 있는 베싸깔라바나의 미가다야에 계실 때 장자 나꿀라삐따가 찾아왔다. 위의 말은 노쇠하고 고령인데다가 만년에 병고에 시달리는 자신에게 안녕과 행복을 위해 용기를 줄 수 있는 가르침을 청한 데 대해 부처님께서 답변하신 것이다.
나꿀라삐따는 이 말을 듣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멀리에 있는 싸리뿟따에게 찾아간다.
"장자여, 모든 감관들이 기쁨으로 빛나고 안색이 청정하다" 는 싸리뿟따의 인사에 "오늘 세존께서 가르치신 설법으로 감로와 같은 축복을 받았다" 고 답한다.
그리고 어떤 점에서 몸이 병들고 마음이 병들지 않는 것인가에 대해 싸리뿟따의 설법을 더 청한다. 싸리뿟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장자여, 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거룩한 이를 보지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에 이끌려 지지 않아 참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 지지 않아서 물질(또는 감수, 지각, 형성, 의식)이 나이고, 나의 것이 물질(또는 감수, 지각, 형성, 의식)이고, 나 가운데 물질(또는 감수, 지각, 형성, 의식)이 있고, 물질 가운데 내가 있어 나는 물질(또는 감수, 지각, 형성, 의식)이고, 물질(또는 감수, 지각, 형성, 의식)은 나의 것이라고 속박되어 지냅니다."
"그는 나는 물질(또는 감수, 지각, 형성, 의식)이고, 물질(또는 감수, 지각, 형성, 의식)은 나의 것이라고 속박되어 지내지만 그 물질(또는 감수, 지각, 형성, 의식)은 변화하고 달라 집니다. 그 물질(또는 감수, 지각, 형성, 의식)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납니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나' 또는 '나의 것' 에 대한 속박에서 벗어나면 그것들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물질(또는 감수,지각, 형성, 의식)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은 생겨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그런 점에서 '몸은 병들어도 마음은 병들지 않는다' 고 말한다.
병문안을 가면 환자를 위로하는 덕담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또 죽을 병이 들었을 경우 그러한 사실을 감추고 환자의 충격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그것을 당연시 여기는 우리에게 '몸은 병들어도 마음은 병들지 않아야 한다' 는 이 경의 메시지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쩌면 새로운 병실 문화를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
몸이 병들고, 그에 따라 고통이 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지만 '마음이 병들지 않는다' 는 것은 무엇일까. 그래서 마음이 병든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던 것이다.
다섯가지존재의 다발은 무엇인가?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은 우리를 구성하는 물질, 감수, 지각, 형성, 의식(色受想行識)을 말하는데, 이를 테면 물질은 흰색의 자료적 특성이며, 감수는 흰색의 좋고 싫거나 중성적인 느낌, 지각은 그 흰색을 희색으로 인식하는 것, 형성은 지각된 것이 텍스트화되어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인 작용을 일으키는 것, 의식은 흰색을 접촉했을 때에 이름붙일 수 없지만 무수한 흰색 가운데 어떤 흰색에 대한 잠재적인 인식이다.
예를 들어, 동양화가는 200여가지의 흰색을 구분한다고 한다.
우리의 의식은 원천적으로 수억만 가지 흰색가운데 하나를 전지(全知)할 정도로 식별할 수 있으나 우리의 지각을 통해서는 흰색이라는 하나의 인식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은 원래 무상하고 실체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영원한 것으로, 실체적인 것으로 착각한다. 이것이 무지이며 이로 인하여 우리에게는 '나의 것'이라는 소유관념이 생긴다. 이것은 마음이 병들게 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결국 마음이 병들지 않는다는 것은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로 이 세계의 무상함을 깨닫고 그에 대한 나의 집착을 벗어나는 것이다.
한편, 존재의 다발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다음의 의견들이 오갔다.
▶'인식과정으로서 물질에 대한 감수, 지각, 형성, 의식의 순차적인 계기로 봐야 된다'
▶'순차적인 계기로 볼 수 있는 측면이 없지는 않으나 수반적인 과정으로 이해해야 된다. 의식은 모든 인식과정에 수반된다. 의식 자체가 이미 시각의식, 청각의식, 후각의식, 미각의식, 촉각의식, 정신의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통합적인 의식이나 잠재적인 의식은 정신의식 속에 포함된다.'
공덕은 뭇삶들의 의지처
모든 삶은 죽음에 이르네.
삶은 그 끝을 죽음으로 삼으니,
행위를 하는 그대로 좋고 나쁜 과보를 받네.
나쁜 일을 한 사람은 지옥으로
좋은 일을 한 사람은 하늘나라로 간다.
오로지 좋은 일을 해서 내세를 위해 공덕을 쌓아라.
공덕은 저 세상에서 뭇삶들(중생)의 의지처가 되리.
- 우리말 쌍윳따니까야 제1권 221쪽 '할머니'경
위 게송은 120세 되신 할머니의 임종을 맞은 꼬살라국의 빠쎄나디 왕에게 부처님이 설하신 것이다.
왕은 대낮에 부처님을 찾아와 할머니가 자신에게 얼마나 사랑스러운 분이었는지를 말하고, 만약 값비싼 코끼리, 값비싼 말, 가장 좋은 마을, 가장 좋은 성을 주어서 할머니를 돌아가시지 않게 할 수 있었다면 할머니를 돌아가시지 않게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은 아주 간명하다. "대왕이여, 뭇삶은 죽어야 하는 것이고 죽음을 끝으로 하는 것이며 죽음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빠쎄나디 왕은 "세존이시여, 놀라운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었던 일입니다."라고 감탄한다.
당시 인도는 갠지스강 유역의 비옥한 토양으로 인해 농산물이 풍부하게 생산되었고, 이러한 물질적 풍요는 상공업의 발달을 촉진시키면서 강력한 도시국가를 출현시켰다. 꼬쌀라국은 16대국 가운데서도 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대한 제국의 패권주의는 바라문교의 제식만능주의 및 공덕사상과 결합되어 있었다.
공덕사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지배종교인 바라문교에서는 많은 제물을 바쳐 공덕을 쌓으면, 그 공덕으로 현세에서 번영을 누리고 죽어서는 영원한 범천의 세계에 태어나서 복락을 누린다고 하였다.
이때 바라문에서 말하는 공덕의 기준은 제물의 양에 비례하며, 공덕의 결과는 현세와 내세에서의 복락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제물의 양과 질은 세속적 가치를 반영하고 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당대에 지배적인 종교적 정서인 공덕사상을 일정하게 수용하면서도 공덕의 기준과 그 결과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입장에 서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공덕의 기준은 인간이 선하고 건전한 행위를 하는가,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하는가 하는 사회윤리적인 준거틀이며, 그러한 공덕의 결과는 자기만의 복락이 아니라 '뭇삶들의 의지처'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연기법적인 진리가 사회윤리적인 측면에서 반영된 놀라운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공덕을 구하는 이의 의도와 욕망
불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기복적인 성향은 이러한 바라문교의 제사만능주의 또는 공덕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종교가 본분사를 잃어버리고 세속화, 타락화의 길을 걷게 되는 근저에는 항상 이러한 것들로 가르침과 신행의 근본을 삼는 상황이 놓여 있다.
결국 종교의 세속화는 승단이나 사찰의 규모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과 공덕을 구하는 신도들의 욕망이 합해져서 만들어낸 산물인 셈이다.
따라서 이러한 부처님의 대답은 공덕주의에 수반되는 기복적 성향에 대한 부정일 뿐만 아니라 공덕을 구하는 이의 의도와 욕망을 꿰뚫는 할이 아닐 수 없다.
할머니를 살려만 준다면 막대한 재물을 내놓을 수도 있다는 왕 앞에서, 왕이나 왕의 할머니가 지금까지 지어온 공덕으로, 또는 지금부터라도 왕이 할머니를 위해서 이러한 공덕을 닦으면, "할머니는 하늘나라에 태어나 영생을 누릴 것이다"라는 대답은 어찌보면 진짜 인간다운 따뜻한 말이요, 동사섭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죽은 이의 가족 앞에서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조문하는 말이 그러하지 않은가. "그동안 좋은 일 많이 하셨으니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예요."
그러나 이러한 대화법은 어쩌면 상대방이 마음속으로 바라는 말을 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거기에는 무상과 고苦와 무아에 대한 어떤 성찰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부처님은 단언한다.
"뭇삶은 죽음을 끝으로 한다."
"저 세상에서도 공덕은 '뭇삶들의 의지처'가 되리"
"나쁜 일을 한 사람은 지옥으로 좋은 일을 한 사람은 하늘나라로 간다."
라고 그 당시의 종교적 정서와 관념을 사회윤리적 관점에서 수용하지만 "저 세상에서도 공덕은 '뭇삶들의 의지처'가 되리"라고 결론 지음으로서 '자아의 윤회'와 관련된 '기복적 성향'을 완전히 탈피하고 있음에 실로 주목해야 한다.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보기
한편, 이러한 담론의 과정에서 "자신의 신체나 개별적인 욕망은 그래도 노력하면 끊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자식이나 가족에 관련된 애착과 욕망을 끊기는 정말 어렵지 않겠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왜 자기 자식에 대해서만 그러한 마음이 생기는가?", "부모의 애착이 정말 자식사랑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부모 자신이 욕구하는 바를 자식을 통해서 실현하려는 것인가" 또는 "부모의 애착이 오히려 자식들에게도 고통이 되지 않을까"라는 등등의 여러 이야기들이 오가면서 대화가 진행되었는데, 많은 분들이 자신이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이중적인 태도들에 대해 드러내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되었다.
이를 통해 대화모임이 현실속에 살아있는 법모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
아무튼 이 문제를 제기한 도반은 수행실천과제를 자식에 대한 욕망과 애착을 보는 것으로 삼게 되었다고 하셨다.
▶이밖에도 '초기 경전을 이렇게 공부해가다 보면 부처님께서는 사유를 매우 강조하시는데 왜 선불교에서는 오히려 사유를 중지하라는 요청이 더 많은가. 그러한 차이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이 있었는데, 이것은 이후에 사선정을 주제로 삼을 때 다루기로 했다.
<하늘사람> 삶은 덧없고 목숨은 짧다네.
늙음을 피하지 못하는 자는 조용히 쉴 곳이 없네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보는 사람은
행복을 가져오는 공덕을 쌓아가리
<부 처 님> 삶은 덧없고 목숨은 짧다네
늙음을 피하지 못하는 자는 조용히 쉴 곳이 없네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보는 사람은
세상의 욕망을 버리고 고요함을 원하리
모두 알다시피 불교는 무상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렇지만 실제로 우리들의 삶은 무상에 대한 확고한 인식 위에 서있지 않음은 쉽게 발견된다.
3월 6일 대화모임 첫날. 이 날은 스스로 자신이 삶을 바라보는 기본관점이 무엇인가를 점검해보는 자리였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무상에 대한 인식 속에서 삶을 바라보지 않는다. 무엇인가를 추구하거나 즐거움에 빠져 있을 때는 무상함을 느끼지도 못하다가 자신이나 가까운 사람의 고통을 보고서야 문득 무상을 느끼게 된다는 고백들이 많았다.
다음으로는 수행의 측면에서 무상을 보기 위한 노력하시는 분들이 있다. 위빠싸나 수행을 많이 하신 분들은 움직일 때나 호흡할 때에 찰나찰나에서 생성과 소멸의 미세한 무상을 느끼며 또 그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무상 속에는 죽음이라는 재난이 숨어있다.
위의 두 시 가운데 앞의 것은 하늘사람이 읊은 것인데, 부처님 당시의 제사만능적인 사제계급의 이념을 반영하는 것으로 제물을 많이 바친 사람은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믿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생각은 바라문교뿐만 거의 모든 종교에 일반적인 것이며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갖게 되는 욕망이다. 그래서 무상함에 대한 인식은 존재와 시간의 영속성에 대한 추구로 발전하는데, 그 안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 자아의 영속성에 대한 갈망이 있다. 공덕사상과 현세 또는 내세의 행복은 이에 부응하는 관념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상함의 진리에서 보면 유혹이며 따라서 재난으로 인도할 뿐이다.
이어지는 부처님의 말씀을 보면 불교의 인식과 실천이 당대에 얼마만큼 혁명적인 것이었는지를 능히 알 수 있다.
"세상의 욕망을 버리고 고요함을 원하라."
'무상하지 않은 것에 대한 희구', '행복을 가져오는 공덕' 사상 역시 '세상의 욕망'이며 그것은 무상함에 대한 불철저한 인식에 서있음을 나타내는 것일 따름이다. 나아가 이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은 고통의 소멸이 아니라 고통의 증대이리라.
부끄러워할지어다, 가련한 늙음이여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는 늙음이여!
잠시 즐겁게 해주는 사람의 영상
늙어감에 따라 산산히 부서지네.
백세를 살더라도 결국 죽음을 궁극적인 것으로 할 뿐
아무도 죽음을 피하지 못하니
그것은 모든 것을 부수어 버리네.
부처님께서 연로하셨을 때의 말씀이다.
<쌍윳따니까야>에서는 부처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때 세존께서는 저녁 무렵 홀로 명상에 들었다가 일어나 서쪽의 양지에 앉아 등을 따뜻하게 하고 계셨다. 마침 존자 아난다가 세존께서 계신 곳을 찾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 세존의 두 손과 두 발을 만지며 세존께 이와 같이 말했다.
(중략)
[세존] "아난다여, 그러하다. 젊은 자는 늙게 마련이고 병들지 않은 자는 병들게 마련이고 오래 사는 자는 죽게 마련이다. 나의 피부색은 청정하거나 고결하지 못하고 사지가 모두 이완되어 주름이 지고 몸이 앞으로 기울고 시각능력, 청각능력, 후각능력, 미각능력, 감촉능력의 모든 능력이 변화의 조짐을 보인다."
너무도 사실적인 이 묘사에 깊은 충격이 왔다. 모두 잠깐 말을 잃은 듯 주석가 붓다고싸는 불광과 태양광의 관계에서 어떤 태양의 빛도 부처님의 신체를 건드리지 못하기 때문에 '스승은 빛을 발산하면서 앉아 있다'로 해석해야 한다고 억지로 꿰맞추고 있지만, 그러한 신격화는 반불교적인 것이며 우리를 무지로 이끄는 것이다. 이 경전의 정신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불교적 문제접근 및 해결방식은 정확한 현실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교적으로 영원한 진리나 불사의 도, 영생, 불노장생, 생사일여와 같은 관념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늙어가고 또한 죽어갈수록 자신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오히려 영원하고 찬란한 영생의 빛에 대한 욕망의 노예가 된다. 그러나 무상의 고통은 욕망이 만들어내는 찬란한 천국의 빛에 의해서가 아니라 욕망에 대한 성찰과 수행의 빛에 의해서 소멸된다.
쌍윳따니까야에 존자 사리뿟따의 죽음을 접한 아난다와 세존의 대화가 나온다.
"세존이시여, 사미 쭌다가 '존자 사리뿟따는 완전한 열반에 들었습니다. 이것이 존자의 발우와 가사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제 몸은 마비되고 제 앞은 캄캄하고 법들도 제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난다는 싸리뿟다가 자신을 '훈계하고 인도하고 가르치고 격려하고 기쁘게 하였으며 설법하는 데 피곤을 몰랐던 분'이었다고 세존께 술회한다. 선배로, 스승으로, 그리고 부모같은 어른으로 싸리뿟따를 존경하고 의지했던 싸리뿟다였기에 그가 병들어 죽자 아난다는 너무나 놀랍고 큰 충격을 받고 있다.
부처님께서 늘 무상을 이야기하고 무아를 설하셨건만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인물을 상실하자 지식이 아무 소용이 없음을 솔직히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세존께서는 "아난다여, 내가 이미 설하지 않았는가. 모든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자와 이별하게 되고 떨어지게 되고 분리된다. 생겨나고 생성되면 괴멸하고야 마는 것을 두고 실로 괴멸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라고 말씀하신다.
이어서 "아난다여, 그러므로 자신을 스승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고 남을 의지처로 하지 말며, 법을 스승으로 하고 법을 귀의처로 하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어떻게 자신을 스승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남을 귀의처로 하지 말고, 법을 스승으로 하고 법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않는가? 수행자는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로 알고 깊이 새겨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고 몸과 감수와 마음과 사물에 대하여 관찰한다."라고 부단한 정진과 함께 정견과 정념으로 사념처(몸, 느낌, 마음, 사물)에 대한 관찰을 할 것을 처방하신다.
우리는 태어나고 늙어 죽어 가는 내가 있다고 믿으며, 전생으로부터 현재 그리고 새로운 삶으로 윤회하는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 이 몸이 분명하고 이 마음이 분명하고 이 세계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분별하여 '이것이 나이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라고 믿는 것이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불멸의 자아로서 아트만이 윤회한다는 우파니샤드 철학이나 절대자를 믿는 모든 종교의 견해도 그러하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실재한다고 믿고 있는 자아에 대하여 잘 관찰하시어 몸과 마음과 세계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업에 따라 형성(연기)될 뿐이라는 것을 통찰해 내시어 무아윤회를 설파하셨다.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라는 희유한 진리를 세밀하게 말씀하신 경전이 '니까야로', 무상, 무아, 고인 현실세계를 근본적으로 구원하는 메시지가 들어 있다.
우리 모두 깊이 숙고하고 사유하며 마음챙김으로 니까야를 음미하고 소화시켜 참으로 욕탐과 근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일이다.
한국 빨알리 성전 협회
수보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haha723/13736029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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