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량부구사론
인도부파 불교 중의 일부파. 산스크리트어 Sautrāntika.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 최후로 분파했다. 종래는 분파사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의 기술에 의해서 기원전 1세기에 성립되었다고 생각하였는데, 현재의 연구에 의하면 기원후 1세기경 유부(有部)내에 발생한 이단자 그룹 <비유자(譬喩者)>의 교의가 논사(論師) 쿠마랄라타(Kumāralāta)를 거쳐서 그의 제자 슈릴라타(Śrīlāta)에 이르러 정비되어서, 4세기경 경량부가 성립했다고 본다. 그러나 슈릴라타 이외에도 다수의 계통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유부가 경(經)의 주 취지를 일탈한 논장에 너무 의존한다고 보고, 경장에 의존하여야 한다고 주장해서 <경량>부라고 자칭하였는데, 상세하게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경량부의 근본적 주장은 유부(有部)의 삼세실유설(三世實有說)에 대한 현재유체(現在有體)ㆍ과미무체(過未無體, 법은 현재에만 존재하고, 과거 미래에는 존재하지 않는다)설이다. 그리고 이에 의거해서 유부처럼 마음과 심리현상을 구별하지 않고, 마음이 시간적으로 전후해서 심리현상이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또한 삼세실유설을 성립시킨 심부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 생(生), 주(住), 이(異), 멸(滅) 등 마음에 관계없이 존재하고, 어떤 종류의 힘을 가지는 제법)의 실유(實有)를 부정하고, 나아가서 물질(색)에 대해서도 유부의 소조색(所造色,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4대 원소로 만들어지며, 원소와는 다른 물질)의 몇 가지 존재와 무표색(無表色, 극단적인 선악의 행위를 하였을 때, 신체에 생명이 다할 때까지 존속하는 영향력. 이를 유부는 물질이라고 생각했다)의 존재를 부정했다. 또한 무위법(無爲法, 제행무상이라는 시간적 제약을 받지 않는 제법)도 실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경량부는 치밀한 인식론에 의해서 유부의 모순을 공격하고, 유부의 식(識)의 작용을 보다 펼쳐서, 실재하지 않는 것도 인식할 수 있다고 보고 무소연(無所緣)의 식(識)의 존재를 주장했다. 그리고 종자나 구수계(舊隨界, 종자와 거의 동일. 시릴라타가 제창했다)의 개념을 이용해서 인간의 행위와 그 결과의 관계를 고찰했다.
이들 주장은 차대의 대승불교의 유식파의 선구사상으로 생각되며, 『구사론(俱舍論)』의 작자 세친(世親)도 이 부파에 공명했다고 한다. 경량부가 확고한 승원을 조직했다는 것에는 의문이 가며, 오히려 유부의 교의의 모순을 올바르게 하는 학파적 존재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후대 불교 외의 사람들에게는 유부, 중관파, 유가행파와 함께 불교 여러 파의 대표적 존재로 간주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량부 [經量部, Sautrā–ntika] (종교학대사전, 1998. 8. 20., 한국사전연구사)
구사론의 지각연구구사론
•발행기관 : 한국불교사연구소
• 수록지정보 : 한국불교사연구 / 5권 0호
•저자명 : 이소영 ( So Young Lee )
한국어 초록
불교는 苦의 인식에서부터 출발하였으며 苦의 진상을 해명하여 해탈을 얻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렇다면 苦에 대한 진상은 과연 어떤 것이며 그 해명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그것은 붇다가 正覺을 이룬 뒤 행한 최초의 설법인 四聖諦와 그 실천체계로서 제시되고 있는 八正道의 첫 번째 항목인 正見에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正見은 바르게 ``四聖諦의 진리를 봄``, 또는 ``올바른 견해``이며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말한다. 즉 正覺의 길에는 正見이 선행요건인 것이다. 그렇다면 있는 그대로를 본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여기에서 인식의 문제가 시작된다. 인간의 분석은 인간이 갖추고 있는 감관과 대상의 상관관계로써 함께 파악된다고 할 수 있는데 자신이 경험하는 세계와 유기적, 역동적인 관계에 의해 일상을 영위하기 때문이다. 초기불교 이래 아비달마 논사들은 아함경전에 다양하고 비체계적으로 수록되어 있는 교설들을 하나의 사상체계로 조직화하는 과정에서 해탈에 대한 지적 접근으로 인식론과 존재론적인 문제들을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인식주관, 인식대상, 인식과정 등이 매우 상세하게 분석 추구되었다. 여러 부파 가운데 가장 아비달마 불교적인 태도를 고수한 설일체유부는五位七十五法이라는 독자적인 범주체계를 설정하고 현상적인 존재는 假일지라도 그것을 구성하는 기본요소(dharma)는 실재하며, 모두 동등한 존재성을 갖는다고 보았다. 이러한 유부의 인식론은 초기경전인 雜阿含經권13의 감각적 인식작용의 정의 이래 유부 교학 체계 속에서 인식에 대해 심층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유부가 제시했던 인식 근거로서의 根, 境,識에 대한 개념 정의와 인식작용의 문제는 경량부와의 대론으로 학파 간인식론의 발전을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본 논고에서는 유부의 개별적존재인 三事의 상호작용적 인식론과 그에 대한 경량부의 비판적 對論들을 비교 검토함으로써 차이점을 고찰해 보고자한다.
영어 초록
In this paper, I will attempt to examine the perspective of Sarvastivada and Sautrantika on ``To see(drsti, 見)`` through their argument about perception component : subject, object, process. Because the basic proposition that Right view(Samyagdrsti, 正見) precedes for Supreme perfect enlightenment(Sambodhi, 正覺). As you can see in the summary above, Sarvastivada stands opposite side to Sautrantika as to understanding epistemological phenomena and the grounds of essential confrontation. Examining argument of both schools shows this opposite polarity well. First, due to differences in interpretation on grounds by scriptures, the development of epistemological phenomena between Sarvastivada and Sautrantika take different steps. By interpreting epistemological phenomena following it``s own category system, Sarvastivada assumes the reality of features and functions as basic elements (dharma). Second, Focusing on understanding epistemological phenomena within the framework of categorical realism and forming theory based on it, Sarvastivada developed circular logic. Focusing on , it starts the theory from the category theory. Also, Samghabhadra, who responds to Sautrantika with a new concept of genuine Sarvastivada, reaches the limits of the circular logic. It is because the theory follwed system of the category theory. Third, Sautrantika, unlike Sarvastivada, exceeds the limit of circular theory. It sets epistemological phenomena only by the regularity of cause and effect. Also it derives the theory much closer to Impermanent(Anitya, 無常), No-soul(Anatman, 無我) based on Dependent arising(pratitya-samutpada, 緣起). Like this, Sarvastivada and Sautrantika show different perspectives on epistemological phenomena. However we can not conclude that it is the Dependent arising, Impermanent and No-soul which are Buddha``s preaching in their system. Therefore, rather distinguishing between right and wrong, it might be desirable to focus on inevitable deduction of epistemological phenomena. Also we need to concentrate on theoretical advance. Research on argument of two schools can be said to be more important because it is the cornerstone of research on Yogacara scholar or late Buddhism epistemology.
구사론의지각연구
무의식과 ≪구사론≫의 번뇌
인도에서 불교사상은 ‘초기불교→ 아비달마→ 중관학→ 유식학’의 순으로 발전하였다. 초기삼장에 산설(散說)된 교학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 아비달마 교학이었고, 아비달마 교학의 ‘법(法)’에 대한 고착을 타파한 것이 반야중관학의 공사상이었으며, 반야중관의 토대 위에서 ‘식(識)’에 의해 불교전반을 재해석한 것이 유식학이었다. 유식학 이론은 불멸 후 7백년 이상 지나서 성립한 대승불교 사상이기에 원시성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앞 절에서 보았듯이 정치(精緻)한 아뢰야식 이론에서 정신분석의 무의식 이론과 유사한 측면을 찾을 수 있긴 하지만, 부처의 가르침이 원래 그랬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불교사상사의 흐름을 더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한다. 중관학의 경우 ‘언어와 분별로 이루어진 모든 이론’을 타파하는 일종의 테크닉이기에, 그 사상 중에 무의식 이론 중에 직접 대비되는 것이 있을 수 없다.44) 그러나 아비달마교학의 ‘번뇌론’에는 프로이드나 융의 ‘무의식이론’에 비견할 만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일반적으로 괴로움이 있을 때, 그 원인과 해결책을 외부에서 찾는다. 예를 들어 돈이나 명예, 권력을 획득할 경우 괴로움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신분석과 불교 모두 그런 괴로움의 원인이 마음속에 있으며, 이를 해소할 때 괴로움에서 해방된다고 본다는 점에서 방법을 같이 한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이드, 태고유형, 콤플렉스’와 같은 무의식 속의 ‘심리적 핵’과, 불교에서 말하는 ‘탐욕, 분노, 교만, 어리석음’과 같은 번뇌들이, 괴로움을 야기하는 ‘마음속의 원인’인 것이다.
부처의 가르침, 즉 불교는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사성제(四聖諦)로 요약된다. 순서대로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의미한다. ‘탐욕, 분노, 교만, 어리석음’과 같은 번뇌는 이 가운데 ‘괴로움의 원인’, 즉 집성제에 속한다. 초기불전에서도 괴로움의 원인인 번뇌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만, 아비달마 문헌 가운데 세친(世親: 4세기경)의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Abhidharma-ko?a)≫에서는 수행론과 연관하여 번뇌의 종류와 성격 등을 잘 정리하고 있다.
번뇌(煩惱)의 산스끄리뜨 원어는 끌레샤(kle?a)다. “괴롭히다.”거나 “괴로움을 겪다”는 뜻의 어근 ‘끌리슈(√kli?)’에서 파생한 명사다. 혹(惑)이라고 번역하기도 하였다. ≪구사론≫에서는 불전에서 발견되는 번뇌의 이명(異名)으로 수면(隨眠: anu?aya), 전(纏: paryavasth?na), 누(漏: ?srava), 폭류(瀑流: ogha), 액(?: yoga), 취(取: upad?na) 등을 소개하는데 이 가운데 ‘수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번뇌에 대해 설명한다.45)
≪구사론≫에서는 먼저 근본번뇌로 ①탐(貪: r?ga), ②진(瞋: pratigha), ③만(慢: m?na), ④무명(無明: avidy?), ⑤의(疑: vicikits?), ⑥견(見: d???i)의 여섯 가지를 든다. 그리고 이렇게 여섯 번뇌 가운데 ‘⑥견’을 다시 ⑹유신견(有身見: satk?ya-d???i), ⑺변집견(邊執見: anta-gr?ha-d???i), ⑻사견(邪見: mithy?-d???i), ⑼견취(見取: d??ti-par?mar?a), ⑽계금취(戒禁取: ??lavrata-par?mar?a)의 다섯으로 세분하면 총 열 가지가 된다. 이런 열 가지 근본번뇌를 십수면(十隨眠)이라고 부른다.
이 가운데 ①탐은 탐욕으로 오욕락(五欲樂)46)에 대한 욕탐(欲貪)과 내생에 태어나 다시 존재하고 싶은 욕망인 유탐(有貪)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②진은 분노, ③만은 교만한 마음을 의미하며, ④무명은 사성제에 대한 무지, ⑤의는 사성제에 대한 의심이다. ⑹유신견이란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진 심신복합체에 변치 않고, 단일하며, 자유자재한 내가 존재한다고 보는 착각이며, ⑺변집견이란 죽음 이후에 ‘지금의 나’와 같은 내가 그대로 존재한다거나, 아니면 완전히 사라진다고 보는 편견이고, ⑻사견은 인과응보의 이치를 부정하는 잘못된 생각이며, ⑼견취는 ‘유신견, 변집견, 사견’의 세 가지에 대해서 올바른 사상이라고 집착하는 것이고, ⑽계금취는 잘못된 수행을 천상에 태어나는 원인으로 착각하든가, 지계(持戒)만으로도 해탈이 가능하다고 오해하는 것이다.47)
이런 열 가지 번뇌가 프로이드나 융의 이론에서 말하는 무의식 속의 ‘심리적 핵’들과 그대로 일치하지는 않지만, ‘①탐욕’은 프로이드의 ‘이드(Id)’에 대응되고 ‘⑻사견, ⑼견취, ⑽계금취’는 초자아(Superego)와 연관시킬 수 있으며, ‘③만이나 ④무명과 ⑹유신견’은 융의 페르소나(Persona) 또는 자아(Ego)와 연관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무의식이든 번뇌든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심리적 핵’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수면(隨眠)의 산스끄리뜨 원어는 ‘아누싸야(anu?aya)’다. “잇따르다.”는 의미의 ‘아누(anu, 隨)’와 ‘잠’을 뜻하는 싸야(?aya, 眠)가 합쳐진 단어로 보아 수면이라고 한역하였다. ≪구사론기(俱舍論記)≫에서는 수면의 어의에 대해 풀이하면서 “유정을 따라다니기에 ‘수(隨)’라고 이름을 붙이고, 그 작용이 은밀하기에 ‘면(眠)’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마치 사람이 잘 때 그에게 무엇이 떠오르는지 알기 힘든 것과 같다.”48)고 쓰고 있다. 유정은 ‘감정이 있는 존재’라는 뜻으로 산스끄리뜨 원어는 삿뜨와(sattva)다. 중생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인간과 짐승을 포함한 생명 있는 존재를 가리키는 불교용어다. 잠을 자는 사람의 경우 그가 무슨 꿈을 꾸는지 알 수 없다. 간혹 일어나는 잠꼬대나 표정을 보고서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번뇌의 경우도 스스로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 화(瞋)가 날 때든, 욕심(貪)이 날 때든, 잘못된 종교관(癡)을 갖고 있을 때든 그런 감정이나 생각에 파묻혀 있을 때에는 그것들이 나에게 뚜렷하게 자각되지 않는다. 그런 감정이나 생각의 와중에서 순간적으로 반성이 일어나든지, 그런 감정과 생각이 없어진 다음에 회고해 보든지 해야 비로소 나에게 화, 욕심, 잘못된 종교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 열 가지 근본번뇌가 동시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 잠재되어 있으며 적절한 상황에서 여러 가지 조건이 어우러질 때 몇 가지 번뇌만 나타나 작용하며 그것이 자각된다. 그래서 번뇌의 종류를 더 나누어서, 마치 잠자는 것(睡眠)과 같이 잠재(潛在)되어 있는 번뇌를 ‘수면(隨眠)’, 의식에 나타나 작용하는 번뇌를 ‘전(纏, 얽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49) 잠(睡眠)에 비유하는 이유는 번뇌가 [아직 발아하지 않은] 종자(種子)의 상태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50)전(纏)은 ‘빠리아와스타나(paryavasth?na)’에 대한 현장의 번역어다. 접두사 ‘빠리(pari)’가 ‘두루’나 ‘완전’을 의미하고 ‘아와스타(avasth?)’는 ‘머무름, 거주함’을 의미하며 접미사 ‘아나(ana)’는 ‘작용’을 뜻하는데, 현장은 ‘얽힘’을 의미하는 전(纏)이라고 번역했지만 ≪구사론≫의 이역본인 ≪구사석론(俱舍釋論)≫의 번역자 진제(眞諦: 499~569)는 상심(上心, 위로 떠오른 마음), 상심혹(上心惑, 위로 떠오른 마음인 미혹), 도기혹(倒起惑, 뒤집힌 마음) 등으로 번역하였다.51)
어쨌든52) 대부분의 번뇌는 잠재되어 있고, 매 순간 몇 가지 번뇌만 작용하며 그것이 나에게 의식된다. 프로이드 정신분석의 용어로 설명하면 대부분의 번뇌는 ‘전의식’이나 ‘무의식’ 상태로 잠재되어 있는 ‘수면(隨眠)’들이고, ‘의식’에 나타난 것은 ‘전(纏)’이다.
구사론구사론
구사론의 근대적 연구
전통적인 구사학의 연구가 한역 {구사론} 특히 현장의 신역과 그 주석서들을 위주로 하여 이루어졌다면 서양의 근대적 연구는 동양학 인도학의 발전과 더불어 산스크리트 원문과 티벳 역의 자료를 통한 문헌학적 연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효시는, 1884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부르누프가 1820년대 허디슨이 네팔에서 수집하여 파리 아시아협회에 소장되어 있던 칭우의 {스푸타아르타}의 범본을 자료로 삼아 저술한 {인도불교사서설}(E.Burnouf : L'introd- uc- tion de l'histoire du Buddhisme indien, 1844)이었다. 20세기 초 중앙아시아를 탐사하였던 영국의 스타인(S.Stein)이 오늘날 방글라데시에서 위구르어 역의 {구사론}을 발견하여 로스(D.Ross) 등이 이를 연구하였다고 한다.(未公刊) 1917년에는 러시아의 불교학자 체르바스키가 티벳 역 {구사론} 1장(界品)을 간행하였고, 이듬해 범본 {스푸타아르타} 제1장을 프랑스의 레비와 공역하였으며,15) 1919년에는 제9장(破我品)을 티벳 역으로부터 영역하기도 하였다.16) 그리고 1923년에는 설일체유부의 중심개념인 '법(dharma)'을 논구한 『불교의 중심개념과 다르마의 의미(The Central Conception of Buddhism and the Meaning of the Word 'Dharma')』17)를 저술하고, 부록으로 티벳역 {구사론} 제5장(隨眠品) 중 유부와 경량부의 삼세실유(三世實有)에 관한 논쟁 부분을 영역하기도 하였다. 벨기에의 저명한 인도 학자 뿌쌩은 1914년에서 1919년에 걸쳐 제3장(世間品)을 티벳 역으로부터 불역(佛譯)하였고, {스푸타아르타}의 그것을 교정 출판하였다. 그리고 1923년에서부터 1931년에 걸쳐 색인을 포함한 본론 전 9품을 불역 출판하였다.18) 아울러 그는 1927년에 유부의 업사상을 해설한 {불교도덕(La Morale Bouddhique)}(Nouvelle Librairie Nationale, Paris)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1932년부터 1936년에 걸쳐 일본의 적원운래(荻原雲來)에 의해 칭우의 {스푸타아르타}가 교정 출판되었으며19), 1939년에는 산구익(山口益)과 함께 이것의 [계품]과 [근품]의 역주를 출간하였다.20)
1935년에는 마침내 인도의 라훌라 상크리티야야나가 티벳에서 본송(本頌)과 {구사론} 본문의 범문 사본을 발견하였다고 보고하였고, 1946년 인도의 고칼레가 본송을 교정 출판하였으며,21) 1967년에는 {구사론} 본문이 프라단에 의해 교정 출판되었다.22) 이후 {구사론} 연구는 이러한 여러 판본에 따른 원전대조 연구가 성행하였는데, 샤스트리가 범문 {구사론}과 칭우의 주석을 합본하여 출판하였고,23) 일본에서는 다음과 같은 각 품과 본송에 대한 역주작업이 이루어졌다.: 주교일재(舟橋一哉), {업의 연구(업품)}(東京 : 법장관, 1954.) : 산구익(山口益)·주교일재(舟橋一哉), {구사론의 원전해명(세간품)}(법장관, 1955). : 앵부건(櫻部?), {구사론의 연구, 계·근품}(법장관, 1969). : 앵부건, [파아품연구], ({大谷大學硏究年報} 제12집, 京都 ; 1969) : 고하영언(古賀英彦), [유부교의에 있어 선정(정품)]({禪文化硏究所記要} 제12집, 1972). 그리고 최근에는 복원량엄(福原亮嚴) 등이 범본 및 티벳 역 한역의 제 판본과 영역 일역을 함께 대조한 {아비달마구사론본송 연구}(경도;永田文昌堂, 1973-1974)가 출판되었으며, 평천창(平川彰)의 주도하에 범본 티벳 역 한역의 색인대조 작업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24)
구사론구사론
아비달마구사론」은 모두 30권 9품으로 되어 있으며, 인도의 논사 세친이 지은 것을 현장이 한역한 것이다. 세친의 원래 이름은 바수반두(Vasubhandu)로서 천친(天親)이라고도 하며, 대승과 소승에서 각 5백부 씩 1,000부의 논을 지었다고 해서 천부논사(千部論師)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대논사다. 그는 북인도 건타라국 페사르 지방 출신의 바라문이었다. 세친의 형은 무착(無着)이라는 사람인데, 그 역시 대승의 논사로 매우 유명하다. 이들 형제는 처음 설일체유부로 출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형 무착은 대승으로 전향했고, 세친은 여러 가지 저술을 통해 대승을 비판하다가 종국에는 역시 대승의 길로 들어섰다. 세친은 자신의 고향에서 「대비바사론」을 강의하였는데, 매번 강의를 하나의 송(頌)으로 정리하여 동판에 새긴 것이 육백송이 되었다. 그는 이 육백송의 동판을 코끼리에 싣고 다니면서 논적(論敵)을 구했지만,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세친은 그 동판을 스승 오입(悟入) 존자에게 보냈는데, 오입 존자는 "실로 설일체 유부를 깊이 알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론"이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오입 존자는 국왕에게 세친을 추천하여 그 육백송에 주석을 달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아비달마구사론」이다.
세친은 「구사론」을 쓰면서 기본적으로는 설일체유부의 교리를 따랐지만, 다른 부파의 이론도 많이 참작했다고 한다. 그는 유부의 이론이 불합리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소위 "이치에 맞으면 그것을 따른다"는 합리적인 입장에서 다른 부파의 견해를 상세히 소개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도 부가했는데, 이때 많은 경우 경량부(經量部)의 주장을 따랐다고 한다. 경량부는 설일체유부와는 달리 과거와 미래는 이름만 있는 존재이며 현재만이 실재한다고 주장했던 부파다. 이 부파는 불교가 소승에서 대승으로 넘어가는 데 교량 역할을 한 부파로 알려지고 있다.
이 「구사론」의 다른 번역으로는 진제의 「아비달마구사석론」이 있고, 대표적인 주석서로는 보광(普光)의 「구사론기」와 법보(法寶)의 「구사론소」가 있다. 그러면 「구사론」의 각 품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분별계품(分別界品)
이 품에서는 만유의 본체를 밝히고 있는데, 분별계란 여러 가지 요소를 살펴본다는 뜻이다. 본론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내용은 무위법, 색법, 심법의 유루(有漏)와 무루(無漏), 그리고 5온, 12처, 18계다. 여기에서 유루란 번뇌가 있는 것을 말하고 번뇌가 없는 것을 무루라고 한다.
본 품에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5온, 12처, 18계를 사람의 능력이나 요구의 차이에 따라 설명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점이다. 먼저 정신작용을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그 작용을 비교적 세밀하게 분류한 5온을 설명하고, 물질적 요소에 어두운 사람에게는 그것을 자세히 분석한 12처를 설명 하며, 앞의 두 가지에 다 어두운 자에게는 18계를 설명한다는 것이다. 또 머리가 좋은 사람에게는 간단한 5온을 설명하고, 미련한 사람에게는 보다 구체적인 18계를 설명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간단한 것을 요구하는 사람에게는 5온을 설명하고, 구체적인 것을 요구하는 자에게는 18계를 설명하며, 그 중간을 요구하는 자에게는 12처를 설명한다고 했다.
분별근품(分別根品)
22근의 기능과 물질 및 정신적 현상이 생겨날 때 동시에 작용하는 여러 가지 구성요소와 그들 상호간의 인과관계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그러면 지금까지 살펴본 적이 없는 육인(六因), 오과(五果), 사연(四緣)을 이 품에 따라 간단하게 설명해보기로 한다.
육인은 다음과 같다.
1. 능작인(能作因) : 어떤 결과가 생겼을때 그 결과 자체를 제외한 모든 사물 현상을 가리킨다. 어떤 결과가 발생했다는 것은 일체 사물현상이 그 결과의 발생을 방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능작인은 또 유력능작인(有力能作因)과 무력능작인(無力能作因)으로 구별된다. 유력능작인은 간접적으로나마 결과를 낳는 데 영향을 준 능작인을 말한다. 예를 들면 영양이 많은 음식물을 섭취해서 몸이 건강해지는 경우, 영양이 많은 음식물은 유력능작인이 된다. 무력능작인은 다만 어떤 사물현상의 발생을 방해하지 않았을 뿐이고 간접적으로도 영향을 준 것이 없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면 지옥의 중생은 천인(天人)의 생존에 아무런 작용을 하는 것이 없고, 다만 천인의 생존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관계만 있다. 그러나 천인의 생존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은 천인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능작인이 된다는 것이다.
2. 구유인(俱有因) : 어떤 사물이 동시에 존재하면서 서로 인과관계를 이루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인과관계를 공간적인 의존관계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지팡이 세 개를 서로 의지하여 세웠을 경우 각각의 지팡이는 다른 지팡이의 구유인이 된다는 것이다.
3. 동류인(同類因) : 같은 성질의 사물이 같은 성질의 결과를 낳게 되는 원인을 말한다. 예를 들면 과거의 선행이 원인이 되어 현재의 복이 된다면 과거의 선행은 동류인이 된다. 이것은 인과관계를 시간적인 선후관계로 파악하는 것이다.
4. 상응인(相應因) : 구유인 중에서 특히 심(心)과 심소(心所)의 관계를 말한다. 심리적 요소들은 독립적으로 일어날 수 없다. 그것은 각각의 심리적 요소들의 힘이 미약하기 때문이다. 갈대를 한 대씩 따로따로 세울 수는 없지만 그것을 여러 대 합해서 단으로 묶으면 세울 수 있는 것처럼, 심리적 요소들은 여러 개가 상응인이 되어 서로 어울릴 때 비로소 하나의 온전한 심리현상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5. 변행인(遍行因) : 동류인 중에 번뇌가 일어나는 경우를 따로 독립해서 가리키는 말이다. '나'에 대한 집착과 같은 잘못된 견해, 의혹, 무지 등의 번뇌는 그 것이 원인이 되어 다른 번뇌들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즉, 어떤 번뇌가 다른 번뇌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를 특별히 변행인이라고 한다.
6. 이숙인(異熟因) : 성질이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을 말한다. 이 경우의 성질이란 선악의 성질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현생에서 악업을 지어 내생에 지옥에 떨어졌다면 현생에서 지은 악업은 이숙인이 되고, 그 결과로 지옥에서 받은 몸은 이숙과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옥에서 받은 몸은 선악의 성질로 볼 때에는 중성이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는 그 성질이 다르다고 한다.
다음으로 오과(五果)를 알아보자.
1. 등류과(等類果) : 선인선과, 악인악과처럼 인과 동일한 질을 갖고 있는 과를 말한다.
2. 이숙과(異熟果) : 인과 성질이 다른 결과라는 뜻으로 보과(報果)라고도 한다.
3. 사용과(士用果) : 인이 강한 힘을 남자(士夫)의 동작(用)에 비유해서 붙인 이름으로, 곧 동시의 인과를 말한다. 구유인과 상응인의 결과를 모두 사용과라 부른다.
4. 증상과(增上果) : 능작인에 의해 생긴 과를 말한다. 이상의 사과는 유위법이므로 유위과라고 한다.
5. 이계과(離繫果) : 무위과로 이계란 번뇌의 속박을 벗어났다는 뜻이므로, 이계과는 곧 열반의 깨달음을 뜻한다.
계속해서 사연(四緣)으로 넘어가 보자. 여기에서 연이란 말은 직접적 원인과 간접적 원인을 총칭하는 말이다.
1. 인연(因緣) : 씨앗이 싹을 돋아나게 하는 직접 원인이 되는 것처럼 사물발생의 직접적 원인을 말한다. 여기에는 육인 중에 능작인을 제외한 나머지 오인이 해당된다.
2. 등무간연(等無間緣) : 심리적 현상 발생에만 필요한 조건이다. 새로운 심리 상태가 생길 때는 반드시 이전 순간의 심리작용이 자리를 내주고 새 심리작용이 일어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하는 만큼, 이전 순간의 심리작용이 다음 순간의 심리작용을 발생하게 하는 간접적인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동일한 순간에 성질이 다른 두 가지 심리현상이 동일한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나온 것이다.
3. 소연연(所緣緣) : 소연, 곧 외부의 대상(外境)이 마음을 생하게 하는 연이 되는 것을 말한다.
4. 증상연(增上緣) : 육인 중에 능작인과 같은 것으로, 그 범위가 가장 넓은 연이다. 해당되는 유위법을 제외한 기타의 일체 사물현상은 그 유위법을 위한 증상연이 되기 때문이다.
분별세품(分別世品)
이 품에서는 유정(有情)이 육도를 윤회하는 과정을 12인연에 의거 설명하고 있다. 또 유정이 살고 있는 3천대천세계의 구조를 밝히고 마지막으로 시공의 크기에 관한 문제, 부처님들이 출현하는 시기 및 세계가 성립·존속·괴멸되는 과정에 관한 문제 등을 고찰하고 있다.
분별업품(分別業品)
과보를 가져오는 원인으로서 행위에 관한 문제를 살피고 있다. 이 대목에선 창조론 등의 외도의 견해를 부정하고, 세상만물은 모두 업에 의해서 만들어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분별수면품(分別隨眠品)
선악의 행위를 낳게 하는 근원인 번뇌를 고찰하고 있다. 먼저 근본적인 번뇌에 관한 설명이 나오므로 그것을 알아보자.
번뇌는 원래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히는 일종의 정신작용이다. 사람들은 이 번뇌로 인해 악업을 쌓고, 그 과보로 지옥에도 가고 축생으로도 태어나 온갖 고통을 당하게 된다. 말하자면 번뇌는 고통에 가득 찬 인간생존의 근원이다. 그러면 어째서 번뇌를 인간생존의 근원으로 보는 것일까?
번뇌는 일단 마음속에 자리잡으면 차츰 힘을 얻어 번뇌 그 자체를 증대시키고, 나아가서 다른 번뇌를 일으키는 힘을 가지게 된다. 또 번뇌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착한 성품을 거세하는 작용을 한다. 번뇌는 사람들이 건전한 사고를 할 수 있는 바른 지혜를 마비시키고 내생에 좋지 않은 과보를 받게 하는 악업을 짓는 힘을 가지게 된다. 바로 위와 같은 번뇌의 작용 때문에 사람들은 고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없이 생존의 고통을 되풀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분별현성품(分別賢聖品)
깨달음의 과위(果位)인 현자, 성자, 수행의 계위, 즉 삼현(三賢)과 사선근(四善根), 견도(見道)와 수도(修道) 및 무학도(無學道), 차제증(次第證)과 초월증(超越證), 그리고 사향사과(四向四果)등을 자세하게 고찰하고 있다.
분별지품(分別智品)
십지(十智)와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무쟁(無諍), 원지(願智), 사무애해(四無碍解), 삼명(三明), 육통(六通), 삼시도(三示導) 등을 설명하고 있다.
분별정품(分別定品)
먼저 여러 가지 선정을 설명하고 나서, 선정이 불러일으키는 공덕, 즉 사무량(四無量)과 팔해탈(八解脫), 팔승처(八勝處)와 십변처(十遍處) 등을 논하고 있다.
파집아품(破執我品)
'파집아'란 '나'에 대한 집착을 깨뜨린다는 말이다. 이 품에서는 '나'의 실재를 주장하는 잘못된 견해 때문에 여러 가지 번뇌를 일으키게 되고 결국은 육도를 윤회하며 해탈을 얻을 수 없다고 하면서, 특히 부파 중의 하나인 독자부와 외도 중에서 수론(數論)과 승론(勝論)의 견해를 논파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비달마구사론 [阿毘達磨俱舍論] (한 권으로 읽는 팔만대장경, 2007. 6. 10., 도서출판 들녘)
분별정품구사론
[제28권] 8. 분별정품(分別定品) ①
존자 세친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권오민 국역
▒ 목 차 ▒
제8편 정품(定品)
Ⅰ. 선정(禪定)
1. 4정려(靜慮)
(1) 심일경성(心一境性)에 대한 논쟁
2. 4무색정(無色定)
(1) 무색계에서의 색의 존재유무에 대한 논쟁
3. 8등지(等至)와 미(味)·정(淨)·무루등지
4. 정려등지에 관한 제문제
1) 정려지(靜慮支)
2) 정려지의 실제적 본질
(1) 정려지에 대한 유부와 경량부의 논쟁
3) 염정려(染靜慮)의 지(支)에 대하여
4) 정려의 동(動)과 부동(不動)
5) 생(生) 정려의 수(受)에 대하여
(1) 위의 세 생정려에서 안식 등을 일으키게 되는 근거
5. 미·정·무루의 세 등지에 관한 제문제
1) 등지를 처음으로 획득하는 방식
2) 세 등지의 상생(相生) 관계
3) 정(淨)등지의 4분정(分定)과 그 상생관계
4) 한 단계 뛰어넘어 등지를 닦는 방식
5) 등지의 소의신
6) 등지의 경계
7) 단혹(斷惑)의 등지
8) 특히 근분정(近分定)에 대하여
9) 중간정려와 근분정의 차이
6. 경에서 설한 여러 등지(等持, 즉 삼마디)
1) 유심유사(有尋有伺) 등의 세 삼마지
2) 공(空)·무원(無願)·무상(無相) 삼마지
3) 공공·무원무원·무상무상 삼마지
4) 네 가지 수등지(修等持)
■ 각 주
제8편 정품(定品)
Ⅰ. 선정(禪定)
1. 4정려(靜慮) ▲ 위로
온갖 지(智)가 성취하는 공덕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여기서는 먼저 온갖 '지'의 소의지가 되는 선정[定]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1)
바야흐로 온갖 선정 중에서 정려(靜慮, dhyana)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정려의 네 가지에는 각기 두 가지가 있으니
그 중의 생(生)정려에 대해서는 이미 설하였고
정(定)정려는 선(善)으로, 심일경성(心一境性)이며
수반하는 법과 함께할 경우 5온을 자성으로 한다.
靜慮四各二 於中生已說
定謂善一境 幷伴五蘊性
초정려는 사(伺)·희(喜)·낙(樂)을 갖추고 있으며
뒤의 정려일수록 점차 앞의 지(支)를 떠나게 된다.
初具伺喜樂 後漸離前支
논하여 말하겠다. 일체의 공덕은 대다수 정려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먼저 정려의 차별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한다.
여기에는 모두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초정려와 제2·제3·제4정려가 그것이다.
4정려에는 각기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정정려(定靜慮)와 생정려(生靜慮)가 바로 그것이다. 생정려에 대해서는 이미 「세간품」에서 제4정려에는 여덟 가지가 있으며, 앞의 세 정려에는 각기 세 가지가 있다고 논설하였다.2)
정정려의 경우, 그것을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바로 선한 성질에 포섭되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이니, 선의 등지(等持)를 자성으로 삼기 때문이다.3) 그러나 만약 이에 수반하는 법[助伴, 즉 상응·구유법]과 함께하는 경우라면 5온을 자성으로 한다.
(1) 심일경성(心一境性)에 대한 논쟁 ▲ 위로
무엇을 일컬어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한 가지 소연에 전념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전념하는 상태에서 그것에 근거하여 '삼마지'라고 하는 명칭을 건립하였다고 한다면, 마땅히 그 밖의 다른 심소법이 별도로 존재한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4)
개별적인 법[別法]으로서 마음으로 하여금 하나의 대상에서 일어나게 하는 것을 '삼마지'라고 이름하니, 전념하는 것 자체가 바로 마음은 아닌 것이다.(유부의 해석)
온갖 마음은 찰나멸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모두 어찌 하나의 대상에서 일어난다고 하지 않겠는가? 만약 그 같은 마음으로 하여금 제2찰나에 산란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등지(等持, 즉 삼마지)가 존재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첫 찰나 마음과] 상응함에 있어 등지는 어떠한 작용도 하지 않았어야 한다.5) 또한 이 같은 사실로 말미암아 삼마지가 성립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찌하여 그것에 의해서는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6) 또한 삼마지는 바로 대지법(大地法)이므로 마땅히 일체의 마음은 모두 하나의 대상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7)(이상 경부의 힐난)
그렇지 않으니, 다른 품류의 등지는 저열하기 때문이다.8)(유부의 대답)
이에 대해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9)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서 상속하여 일어나는 때를 삼마지라고 이름하니, 계경에서도 이러한 삼마지를 설하여 증상심학(增上心學)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며,10) 마음이 청정하고 가장 뛰어난 상태를 바로 4정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11)
어떠한 뜻에 근거하여 '정려'라고 하는 명칭을 설정한 것인가?
이러한 선정은 적정(寂靜)하며, 능히 잘 심려(審慮)하기 때문이다.12) 여기서 '심려'란 바로 진실로 잘 안다[了知]는 뜻으로, 이를테면 [계경에서] "마음은 선정에 들 때 능히 참답게 안다"고 설한 바와 같으니, 심려의 뜻 중에 '지(地, dh )'라는 계(界, 즉 어근)가 있기 때문이다.13) 그리고 이 종의(유부종)에서는 혜를 심려의 본질이라 하였다.1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온갖 등지를 다 '정려'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다.15)
그렇지는 않다. 오로지 수승한 것만에 대해서만 비로소 이 같은 명칭을 설정하니, 마치 세간에서 광명을 발하는 것을 해[日]라고 이름하지만, 그렇다고 반딧불이나 촛불 따위에 대해서도 역시 해라고는 이름하지 않는 것과 같다.
어찌하여 정려만을 수승하다고 하는 것인가?
모든 등지 중에서 오로지 이것만이 지분[支]을 포섭하며,16) 지(止)와 관(觀)이 균등하게 작용하여 가장 잘 심려하며, 현법락주(現法樂住)와 낙통행(樂通行)이라는 명칭을 획득하기 때문에 이러한 등지만을 정려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염오혜가 어찌 이러한 명칭('정려'라는 명칭)을 얻는 것인가?
그것도 역시 능히 삿되게 심려하는 것[邪審慮]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다면(염오혜도 심려 즉 정려라고 한다면) 마땅히 크나큰 과실을 범하게 될 것이다.
크나큰 과실이 없으니, 요컨대 서로 유사한 것에 대해서도 바야흐로 그 명칭을 설정할 수 있기 때문으로, 마치 '부패한 종자' 등으로 말하는 것과 같으며,17) 세존께서도 역시 "악정려가 있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심일경성이 바로 정려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어떠한 특징에 근거하여 초·제2·제3·제4 정려를 설정하게 된 것인가?
사(伺)·희(喜)·낙(樂)을 갖춘 정려를 초정려로 설정한 것으로, 이에 따라 역시 심(尋)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밝힌 셈이니, 마치 연기와 불의 관계처럼 거기에는 반드시 '심'이 함께 작용하기 때문이다. 즉 '사'에 '희'와 '낙'이 존재할 경우, '심'과 함께하지 않는 경우는 없는 것이다.18) 그리고 앞의 지분[支]을 점차 떠나게 된 것을 제2·제3·제4 정려로 설정한 것으로, '사'를 떠나 두 가지 지분(희·낙)이 존재하는 것과, 두 가지(사·희)를 떠나 '낙'만이 존재하는 것과, 세 가지 종류를 모두 떠나게 된 것이 바로 그와 같은 순서의 정려이다. 그래서 심일경성을 네 가지 종류로 나누게 된 것이다.
정려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2. 4무색정(無色定) ▲ 위로
무색정(無色定)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색정도 역시 이와 같으며
네 온으로, 하지를 떠난 것이다.
無色亦如是 四蘊離下地
이와 아울러 위의 세 근분정을
모두 색의 상(想)을 제거한 것이라 하니
무색정이란 말하자면 색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출관 후의 색은 마음으로부터 일어난다.
幷上三近分 總名除色想
無色謂無色 後色起從心
공무변처 등의 세 명칭은
가행에 따라 설정된 것이며
비상비비상처라는 명칭의 설정은
그 상(想)이 어둡고 저열하기 때문이다.
空無邊等三 名從加行立
非想非非想 昧劣故立名
논하여 말하겠다. 이것은 수(數)와 자성에 있어서 정려와 동일하니, 이를테면 무색정은 네 가지로, 여기에는 각기 두 가지가 있는데, 생(生) 무생정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설한 바와 같으니, 「세간품」에서 생(生)에 따라 네 가지가 있다고 논설하였다.19) 정(定) 무색정의 본질은 그것을 전체적으로 말하면 역시 선한 성질에 포섭되는 심일경성이니, 이 같은 사실에 의해 [본송에서] '역시 이와 같다'는 말을 설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 수반하는 법의 경우 색온이 제외되니, 무색정에 수전색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듯 무색정은 비록 심일경성으로서 그 자체의 특징상으로는 어떠한 차별도 없을지라도 하지를 떠날 때 생겨나기 때문에 [생이 동일하지 않음에 따라] 네 종류로 나눈 것으로, 이를테면 이미 제4정려를 떠났을 때 생겨나는 것을 공무변처(空無邊處)로 설정하였으며, 내지는 무소유처(無所有處)를 떠났을 때 생겨나는 것을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로 설정하였다.
여기서 '떠난다'고 함은 무슨 뜻인가?
이를테면 이러한 도에 의해 하지의 혹(惑)에서 해탈하는 것을 말하니, 바로 하지의 염오를 떠난다는 뜻이다.
이러한 네 가지 근본정(根本定)과 아울러 위의 세 근분정(近分定)을 일컬어 모두 '색의 상(想)을 제거한 것'이라고 하는데, 공무변처의 근분정은 하지(즉 제4정려)의 색을 소연으로 삼아 색의 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아직 이 같은 명칭을 획득하지 못하는 것이다. 즉 여기에는 모두 어떠한 색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색'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이유는 이루어질 수 없으니, 거기에도 색이 존재한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20)
(1) 무색계에서의 색의 존재유무에 대한 논쟁 ▲ 위로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무색정'이라는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인가?
그곳의 색은 미세하기 때문에 '무색'이라고 이름한 것이니, 노란색이 아주 적게 섞인 물건에 대해서도 역시 노란색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 세계에 색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경우, 그것은 어떠한 형태의 색인가? 만약 그곳에는 오로지 신(身)·어(語)의 율의(律儀)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한다면, 소의신과 말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데 율의가 어찌 존재할 것인가? 또한 대종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소조색이 존재할 것인가? 만약 이를테면 무루의 율의가 존재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그렇지가 않으니, 무루의 율의는 유루의 대종에 근거하기 때문이며,21) 또한 그 같은 선정 중에서도 역시 그것의 존재가 부정되기 때문이다.22) 만약 그곳에 색근신(色根身, 즉 5색근의 몸)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인정한다면, 어떻게 그곳의 색이 미세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그곳에는 신체의 크기가 적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였다고 한다면, 물에 사는 작은 곤충으로서 지극히 미세한 것도 역시 마땅히 '무색'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니, 역시 신체의 크기가 너무나 작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곳의 신체가 지극히 청철(淸徹) 미묘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였다고 한다면, 중유와 색계도 마땅히 '무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곳의 신체가 청철 미묘한 것 가운데에서도 지극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오로지 마땅히 유정처(有頂處)의 신체만이 '무색'이라는 명칭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니, 무색정이 그러한 것처럼 그곳에 생겨나는 몸에도 수승함과 저열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23)
또한 생(生)정려(즉 색계천)에 존재하는 색신도 하지의 근(根)에 의해 능히 취해지는 것이 아닌데, 이는 그것과 어떠한 차이가 있어 '무색'이라 이름하지 않는 것인가?24) 또한 만약 욕계와 색계는 그 뜻에 따라 명칭을 설정하였지만 무색계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여기에 무슨 이치가 있을 것인가?25)
또한 만약 경에서 '목숨[壽]과 체온[煖]은 화합하여 있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에,26) 또한 '명색과 식은 마치 두 단의 갈대 다발이 서로에 의지하여 지탱하듯이 상호 의존하며 존재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에,27) 또한 '명색은 식을 연으로 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에,28) 또한 '색(色)을 떠나고 내지는 행(行)을 떠나 식(識)이 오고 가는 것'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에,29)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무색계에 색이 존재한다는 이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경증은 이루어질 수 없으니, 마땅히 살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앞에서 인용한 말씀에 대해 마땅히 다 같이 살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바야흐로 계경에서 '목숨과 체온은 화합하여 있다'고 말한 것은 일체의 세계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욕계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또한 '명색과 식은 서로 의존하며 존재한다'고 한 것은 일체의 세계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욕계와 색계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또한 '명색은 식을 연으로 한다'고 설한 것은 일체의 식이 모두 명색을 연으로 한다는 사실을 설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명색이 생겨날 때 식을 연으로 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설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또한 '색을 떠나고 내지는 행을 떠나 식이 오고 가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고 함은, 그 중 한 가지 온을 떠난 식을 비판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일체의 온을 떠난 식을 비판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계경의 말씀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해 더 이상 살펴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이 같은 설은 옳지 않으니, 크나큰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외적인 따뜻함도 역시 목숨과 화합하여 있다고 해야 할 것이며, 또한 외적인 명색도 식에 의존하고 식을 연으로 한다고 해야 할 것이며, 또한 4식주(識住)와 마찬가지로 4식(食)을 설하고 있으므로 무색계에도 마땅히 단식(段食)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30)
만약 경에서 "어떤 종류의 천(天)은 단식을 초월하였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에,31) 또한 "그 천은 희(喜)를 먹거리[食]로 삼는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에,32) 그 같은 허물이 없다고 한다면, 무색계에는 마땅히 색이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계경에서 "그는 색을 출리(出離)하였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계경에서 "무색의 해탈은 최고의 적정이니, 온갖 색을 초월하였기 때문이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계경에서 "무색의 유정은 일체의 색상(色想)을 모두 초월하였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33)
만약 무색계에 실로 색이 존재한다면 결정코 마땅히 그 같은 색의 자상을 알았다고 해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색상을 초월하였다는 따위로 말하고 있는 것인가? 만약 하지의 거친 색을 관찰하였기 때문에 그같이 설하였다고 한다면, 단식(段食)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34) 그리고 또한 온갖 정려의 경우도 하지의 보다 거친 색을 초월한 것이므로 역시 또한 '색을 출리하였다'는 말로 설할 수 있어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그것도 역시 마땅히 '무색계'라고 일컬어야 할 것이다. 또한 역시 '무색계는 수(受) 등도 출리하였다'고 설해야 할 것이니, 거기서도 역시 하지의 보다 거친 '수' 등을 초월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에서는 그 같은 말을 설하고 있지 않다. 곧 무색계 중에서는 색의 종류는 모두 두루 초월하지만 '수' 등은 초월하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상과 같은 사실에 따라 그러한 무색계에는 결정코 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계경 중에서 "유(有)는 유를 능히 벗어나지 못한다"고 설한 것은 자지(自地)의 유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두루 벗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히 벗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같이 설한 것이다.35)
또한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정려 중에는 "색(色)의 종류 내지 식(識)의 종류가 존재한다"고 설하고 있으면서 무색계 중에는 "수(受)의 종류 내지 식의 종류가 존재한다"고만 설하였을 뿐 '색이 존재한다'고는 설하지 않았으니,36)
만약 무색계 중에 실로 색이 존재한다면 어찌 정려에서처럼 '색의 종류가 존재한다'고 설하지 않았을 것인가? 따라서 [우리가] 제시한 [무색계에는 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의] 이유에는 이루어지지 않는 허물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무색계에 존재할 때에는 많은 겁(劫)에 걸쳐 색의 상속이 끊어졌는데, 그 후 그곳에서 몰(沒)하여 하지(욕계·색계)에 태어날 때 색은 무엇으로부터 생겨나게 되는 것인가?
그 때의 의식은 마음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으로 색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옛날에 일어났던 색의 이숙인이 훈습(熏習)하여 마음상에 머물러 있다가 그 공능이 지금 성숙하여 낳아진 것으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색(욕계·색계의 색)은 그 같은 [무색계의] 마음으로부터 생겨났다고 한 것이다.37)
그곳에 색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마음은 무엇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인가?(대중부의 물음)
색신을 떠났다고 마음이 어찌 일어나지 못하겠는가?(유부의 반문)
그 같은 일은 하지에서는 일찍이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색계에는 단식(段食)이 존재하지 않는데, 색신은 또한 무엇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인가? 하지(즉 욕계)에서도 역시 색신이 단식을 떠나 일어나는 것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38) 또한 앞에서 그 같은 마음이 일어나는 소의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39)
무색정이라는 전체적인 명칭[總名]에 대해 이미 해석하였다.
그렇다면 공무변처(空無邊處) 등은 허공 등을 소연으로 함에 따라 개별적인 명칭을 획득하게 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어떠한가?
앞의 세 가지 무색정은 그 순서대로 가행을 닦을 때 무변(無邊)의 허공과 무변의 의식과 무소유(無所有)를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 같은 세 가지 명칭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며,40) 생각[想]이 어둡고 저열함[昧劣]으로 말미암아 네 번째 무색정(비상비비상처)의 명칭을 설정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이러한 경지의 선정은 그 생각이 밝거나 수승[明勝]하지 않기 때문에 '비상(非想)'이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되었으며, 어둡고 저열하기 때문에 '비비상(非非想)'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41) 비록 이러한 선정의 가행을 닦을 때에도 역시 '선정의 모든 상(想)은 병(病)과 같으며, 화살과 같으며, 부스럼과 같지만, 그러나 상이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다면(즉 무상정) 그것은 바로 치암(癡闇)과 같으니,42) 오로지 비상비비상 중에서만이 앞의 것과는 다른 적정(寂靜)의 미묘함이 있다'고 하는 이와 같은 생각을 지을지라도 이는 가행에 근거하여 설정한 명칭이 아니다. 만약 어떠한 연유에서 가행을 닦을 때 이와 같이 생각하게 된 것인가 하고 힐난한다면, 필시 마땅히 그러한 처(處, 즉 有頂處)에서는 생각이 어둡고 저열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해야 한다.43) 즉 '이러한 선정은 어둡고 저열하기 때문에'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의 명칭을 설정하게 된 올바른 이유이다.
무색정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3. 8등지(等至)와 미(味)·정(淨)·무루등지 ▲ 위로
등지(等至, samapatti)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러한 근본 등지는 여덟 가지로서
앞의 일곱 가지에는 각기 세 종류가 있으니
미(味)와 정(淨)과 무루가 바로 그것이며
뒤의 것에는 '미'와 '정' 두 종류만이 있다.
此本等至八 前七各有三
謂味淨無漏 後味淨二種
'미'란 애(愛)와 상응하는 것이고
'정'이란 세간의 선한 등지로서
바로 미착(味著)되는 법을 말하며
무루는 말하자면 출세간의 법이다.
味謂愛相應 淨謂世間善
此卽所味著 無漏謂出世
논하여 말하겠다. 앞에서 분별한 정려와 무색정의 근본등지(根本等至)에는 이처럼 모두 여덟 가지의 종류가 있는데, 이 가운데 앞의 일곱 가지 등지는 각기 세 종류(味·淨·무루등지)를 갖추고 있지만, 유정(有頂)의 등지에는 오로지 두 종류(미·정등지)가 있을 뿐이니, 이러한 경지는 어둡고 저열하여 무루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의 미등지(味等至)란 이를테면 애(愛)와 상응하는 등지를 말한다.44) 즉 '애'는 능히 미착(味著)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미'라고 한 것으로, 그 같은 '애'와 상응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이것을 '미등지'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정등지(淨等至)라고 하는 명칭은 세간의 선한 선정에 근거한 것으로서, 무탐 등의 온갖 백정(白淨)의 법과 상응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정'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45) 이는 바로 애미(愛味) 상응의 등지(즉 미등지)가 미착(味著)하는 경계로서, 이것이 무간에 멸할 때 그러한 미등지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즉 과거의 정등지를 연으로 삼아 미착을 깊이 낳으니, 그 때 비록 미착되는 선정[所味定, 즉 정등지]에서는 출관(出觀)하였다고 말할지라도 능히 미착하는 선정[能味定]에 대해서는 '들었다[入]'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무루정(無漏定, 즉 無漏等至)이란 이를테면 출세간의 선정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은 애미의 소연이 되지 않기 때문에 미착되는 선정(즉 정등지)이 아니다.
이와 같이 앞에서 설한 8등지 중에서 정려는 지분[支]을 포섭하지만, 모든 무색정은 포섭하지 않는다.46)
4. 정려등지에 관한 제문제
1) 정려지(靜慮支) ▲ 위로
4정려는 각기 몇 가지의 지분을 갖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초정려에는 다섯 가지의 지분이 있으니
심(尋)·사(伺)·희(喜)·낙(樂)·정(定)이 그것이며
제2정려에는 네 가지의 지분이 있으니
내등정과 희·낙·정이 그것이다.
靜慮初五支 尋伺喜樂定
第二有四支 內淨喜樂定
제3정려에는 다섯 지분을 갖추고 있으니
사(捨)·염(念)·혜·낙·정이 바로 그것이며
제4정려에는 네 가지의 지분이 있으니
사·염과 중(中)의 수(受)와 정이 그것이다.
第三具五支 捨念慧樂定
第四有四支 捨念中受定
논하여 말하겠다. 오로지 정(淨)과 무루(無漏)의 4정려 중에만 [정려지가 존재하는 것으로], 초정려는 다섯 가지 지분을 갖추고 있으니, 첫째는 심(尋)이며, 둘째는 사(伺)이며, 셋째는 희(喜)이며, 넷째는 낙(樂)이며, 다섯째는 등지(等持)이다. 여기서 등지란 본송에서 '정(定)'으로 설한 것으로, 등지와 '정'은 그 명칭은 달라도 본질은 동일하다. 그래서 계경에서 "심정(心定)과 등정(等定)을 정등지(正等持, 즉 正定)라고 이름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47) 이것을 또한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고도 이름하니, 그 뜻은 앞에서 해석한 바와 같다.
전(傳)하여 설(說)하기를, "이 가운데 오로지 '정'만이 정려이면서 역시 또한 정려지(支)이며, 그 밖의 네 지분은 모두 정려지일 뿐 정려가 아니다"고 하였다. 그러나 참다운 뜻은 마치 사지군(四支軍)처럼 그 밖의 정려지도 역시 그러한 것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48)
제2정려에는 오로지 네 가지 지분만이 있을 뿐이니, 첫째는 내등정(內等淨)이며,49) 둘째는 '희'이며, 셋째는 '낙'이며, 넷째는 등지이다.
제3정려는 다섯 가지의 지분을 갖추고 있으니, 첫째는 행사(行捨)이며,50) 둘째는 정념(正念)이며, 셋째는 정혜(正慧)이며, 넷째는 수락(受樂)이며,51) 다섯째는 등지이다.
제4정려에는 오로지 네 가지 지분만이 있을 뿐이니, 첫째는 행사청정(行捨淸淨)이며, 둘째는 염청정(念淸淨)이며, 셋째는 비고락수(非苦樂受)이며, 넷째는 등지이다.
2) 정려지의 실제적 본질 ▲ 위로
정려지(支)의 명칭에 이미 열여덟 가지가 있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실제적인 본질[實事]로서는 모두 몇 가지 종류가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정려지는 실제적 본질은 열한 가지이니
초정려와 제2정려의 낙은 경안의 낙이고
내등정은 바로 신근(信根)이며
'희'는 바로 희수(喜受)이다.
此實事十一 初二樂輕安
內淨卽信根 喜卽是喜受
논하여 말하겠다. 이러한 정려지(支)의 실제적인 본질로서는 오로지 열한 가지가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초정려의 5지는 바로 다섯 가지 실제적 본질이며, 제2정려의 경우 세 가지 지분(희·낙·등지)은 앞의 그것과 같으므로 앞의 다섯 지에 내등정을 더하여 여섯 가지가 된다. 제3정려의 경우 등지는 앞의 그것과 같으므로 앞의 지에 그 밖의 네 지를 더하여 열 가지가 되며, 제4정려의 경우 세 가지 지분(사·염·등지)은 앞의 그것과 같으므로 앞의 지분에 비고락수를 더하여 열한 가지가 되는 것이다.52)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초정려의 지분이면서 제2정려의 지분은 아닌 것에 대해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니, 마땅히 4구(句)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제1구는 이를테면 심(尋)과 사(伺)이며, 제2구는 이를테면 내등정이며, 제3구는 이를테면 희·낙·등지이며, 제4구는 이를테면 앞에서 언급한 것을 제외한 그 밖의 법이다.53) 그 밖의 정려의 지분이 서로 대응하는 관계에 대해서도 이치에 맞게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어째서 제3정려에서 낙수가 증가한다고 설한 것인가?54)
초정려와 제2정려의 낙은 경안(輕安)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치를 근거로 삼아 그것이 바로 경안임을 아는 것인가?
처음 두 가지 선정(초정려와 제2정려) 중에는 낙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처음의 두 가지 선정에는 신수(身受)의 낙(樂)이 존재하지 않으니, 선정 중에 있을 때에는 5식(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심수(心受)의 낙도 역시 존재하지 않으니, 희(喜)가 존재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희'는 바로 희수로서, 한 찰나의 마음 중에 두 가지 수(受)가 구행(俱行)하지 않기 때문에 낙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55) 또한 '희'와 '낙'은 서로에 대해 현전할 수도 없으니, 5지와 4지를 갖추었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56)
(1) 정려지에 대한 유부와 경량부의 논쟁 ▲ 위로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심수의 낙근은 결코 존재하지 않지만 앞의 세 정려 중에서 설한 낙의 지분[樂支]은 모두 신수에 포섭되는 낙근이다"고 하였다.57)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계경에서 "무엇이 낙근인가? 이를테면 낙촉(樂觸)에 따르는 힘에 의해 인기되어 생겨난 신(身)과 심(心)의 낙수이다"고 설하였겠는가?58)(유부)
유여사(有餘師, 즉 유부)가 여기에 '심'이라는 말을 보탠 것이니, 여러 부파의 경에서는 다만 '신'의 낙수만을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제3정려에 설정한 낙의 지분에 대해 계경에서는 "몸에 의해 감수된 즐거움이다"고 자설(自說)하고 있기 때문이다.59) 그럼에도 만약 여기에서는 '마음[意]을 몸이라고 설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같이 '몸'이라는 말로 설하여 무슨 이익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또한 제4정려에서는 경안이 배(倍)로 증가할 것임에도 거기에 낙의 지분이 존재한다고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60) 만약 그 때의 경안은 행사(行捨)에 의해 감손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으니, 행사는 경안을 증대시키기 때문이며, 또한 그 때의 경안은 앞의 두 가지(초·제2정려)의 경안보다 뛰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만약 그 때 여러 성(聖) 제자들이 [욕계 염오를] 떠남으로써 낳아진 '희'를 몸으로 작증하고 구족하여 머무르면, 그들은 그 때 이미 5법(즉 5하분결)을 끊고 5법을 수습하여 모두 원만함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무엇을 일컬어 수습해야 할 5법이라고 하는가? 첫째는 환(歡)이며, 둘째는 희(喜)이며, 셋째는 경안이며, 넷째는 낙(樂)이며, 다섯째는 삼마지이다."61) 즉 이 경문에서는 경안과 낙을 따로이 설하고 있기 때문에 초정려와 제2정려의 낙은 바로 경안이 아닌 것이다.
만약 '선정 중에서 어찌 5식신의 [신수락을 일으키는] 일이 있을 것인가?'라고 말한다면, 그러한 일이 있다고 하여도 역시 어떠한 과실도 없으니, [우리 경부에서는] 선정 중에 있을 때 뛰어난 선정의 힘에 의해 일어나는 경쾌 안적(安適)한 바람[輕安風]의 감각이 존재한다고 인정하니, 그것이 [신식(身識) 상응의] 낙수를 순조롭게 낳아 신근과 두루 접촉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만약 '그럴 경우 [그 때의 신식은] 외적 경계에서 산란되기 때문에 마땅히 선정을 상실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와 같은 과실은 없으니, 뛰어난 선정에 의해 생겨난 이러한 경쾌 안적한 바람이 내적인 신식 상응의 낙수[內身樂, 즉 신수락]를 인기함으로써 도리어 능히 [의식상응의] 삼마지를 순조롭게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선정 중에] 신식을 일으키면 그것은 마땅히 출정(出定)이라 일컬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러한 힐난도 옳지 않으니, 앞에서 언급한 이유 때문이다.62) 또한 만약 '욕계의 신근에 의지하여서는 색계의 촉과 신식을 획득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경안을 연으로 하여 식이 생겨난다고 인정하므로 아무런 과실이 없다.63)(이상 초정려와 제2정려의 신수락에 대한 경부의 논증)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바로 무루정 중에 있을 때에는 촉과 신식도 마땅히 무루가 되어야 할 것으로, 설정한 지분이 일부는 유루이고 일부는 무루일 수 없으니, 이치에 어긋나는 과실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64)(유부의 힐난)
이치에 어긋나는 과실은 없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신경안(身輕安) 즉 신식 상응의 경안은 바로 각지(覺支)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인정하여 논설하였기 때문이다.65) 만약 '그 같은 각지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각지라고 설하였다'고 한다면, 무루의 경우도 역시 마땅히 이와 같이 설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66) 만약 '그같이 설하는 것을 인정할 경우 계경에 위배되니, 계경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안(眼)……(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이라 하여 이 경 중에서는 열다섯 가지의 계(界)가 전부 다 유루라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한다면,67) 경에 위배되는 과실이 없으니, 이 경은 다른 경우(즉 散位)의 촉과 신식에 근거하여 밀의(密意)로써 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어떻게 무루의 정려가 일부는 유루로서, 일부는 무루로서 현전할 수 있는 것인가?68)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아닌데 거기에 무슨 과실이 있을 것인가? 만약 '그럴 경우 희(喜)와 낙(樂)은 구기하지 않기 때문에 [초정려의] 5지와 [제2정려의] 4지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 역시 어떠한 허물도 없다. 즉 그것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근거하여 희지와 낙지가 존재한다고 설한 것으로, 마치 '심(尋)'과 '사(伺)'의 경우와도 같다.69) 또한 만약 '심'과 '사'는 역시 구기하는 것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구기하지 않는다는 '희'와 '낙'의 비유가 될 수 없다고 한다면, 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논증이니, 마음의 거친 상태(즉 '심')와 세밀한 상태(즉 '사')도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응당 마땅히 구기하는 것이 아니며,70) 또한 구기하지 않는 것에 대해 능히 [비유가 되지 않는다는] 허물을 설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설할 수 있다. "초정려의 5지에 근거하여 두 가지와 세 가지와 네 가지의 지분을 감소시켜 제2정려 등을 설정하였다. 즉 이 같은 이치에 따라 초정려에 5지를 설하였으며, 앞의 정려의 지분을 점차로 배제함으로써 뒤의 정려를 건립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 상(想) 등을 설하지 않은 것은 점차 감소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71) 혹은 마땅히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니,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어째서 초정려에 오로지 5지만을 설정하였겠는가? 만약 '이러한 다섯 가지가 초정려에 뛰어난 자량(資糧)이 되기 때문에 그것만을 지분으로 설정하였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염(念)과 혜(慧)도 능히 '심'과 '사'보다는 더 뛰어난 자량이 되기 때문이다.72) 비록 어떤 한 부류에서 이와 같이 설하였을지라도 이는 옛날의 모든 궤범사(軌範師)들이 다 같이 시설하였던 바가 아니기 때문에 마땅히 살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73)
[그렇다면] 마땅히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니, 어떠한 법을 일컬어 내등정(內等淨)이라고 한 것인가?
이러한 선정(즉 제2정려)은 심(尋)·사(伺)의 동요를 원리(遠離)하여 그 상속이 청정하게 일어나니, 그것을 일컬어 '내등정'이라고 한다. 만약 심·사의 동요가 있다면 상속은 청정하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마치 강물에 파랑이 이는 것과 같다.7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것은 마땅히 [정려의 마음과는 다른]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인데, 그럴 경우 어떻게 정려지의 실제적 본질에 열한 가지가 있다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이것은 바로 신근(信根)이라고 설해야 한다. 이를테면 만약 제2정려를 증득하면 선정(초정려)의 경지를 역시 떠날 수 있고, 그러한 가운데 깊은 믿음이 생겨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 내적인 등정(等淨)이라 이름한다. 곧 믿음은 청정한 것[淨相]이기 때문에 '정'이라는 명칭을 설정한 것이며, 외적 동요[外門]를 떠나 균등하게 유전하기 때문에 '내등'이라 이름하였으니, 청정하게 내적으로 등류(等流)하기 때문에 '내등정'이라고 하는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75)
그러나 유여사(경부사)는 말하기를, "이러한 내등정과 등지와 '심'과 '사'는 모두 다 개별적인 실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만약 개별적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심소는 마땅히 이루어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마음 특수한 상태도 역시 '심소'라고 말할 수 있다.
비록 그 같은 이치가 있을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종의로 삼는 바가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희'가 바로 희수라면, 어떠한 근거에서 결정코 그러함을 아는 것인가?76)
그대는 어찌 '희'는 희수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인가?
다른 부파에서 그렇다('희'는 희수가 아니다)고 인정하는 것처럼 우리도 역시 그러하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다른 부파에서는 어째서 희수가 아니라고 인정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희'는 바로 심소법으로서 별도의 다른 존재이며, 세 선정 중의 '낙'이 모두 희수이다. 그래서 '희'와 희수는 그 본질이 각기 다른 것이다.
세 선정 중의 '낙'을 희수라고 말할 수 없으니, 두 가지의 아급마(阿笈摩, gama, 즉 阿含)가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변전도계경(辯顚倒契經)』 중에서 설하기를, "점차로 남김없이 우(憂) 등의 5근을 멸하니, 제3정려 중에서는 희근을 남김없이 멸하며, 제4정려에서는 낙근을 남김없이 멸한다"고 하였으며,77) 또 다른 경에서도 "제4정려에서 낙을 끊고 고(苦)를 끊으면, 이보다 먼저 희수와 우수가 몰(沒)하게 된다"고 설하고 있다.78) 따라서 제3정려에는 필시 희근이 존재하지 않으며,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희수는 바로 희로서 낙이 아닌 것이다.
3) 염정려(染靜慮)의 지(支)에 대하여 ▲ 위로
이와 같이 설한 온갖 정려지는 염오의 정려(즉 味等至) 중에도 모두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가 않다.79)
그러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염오의 정려에는 초정려부터
차례대로 희·낙과 내등정과
정념과 혜, 사(捨)와 염이 없으나
어떤 이는 경안과 행사가 없다고 설한다.
染如次從初 無喜樂內淨
正念慧捨念 餘說無安捨
논하여 말하겠다. 앞에서 논설한 바와 같은 온갖 정려지는 염오의 정려 중에 모두가 갖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니, 바야흐로 어떤 한 부류에서는 상(相)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80) "첫 번째 염오정려 중에는 이생(離生)의 '희'와 '낙'이 존재하지 않으니, 번뇌를 떠나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81) 두 번째 염오정려 중에는 내등정이 존재하지 않으니, 그것은 번뇌로 인해 어지럽고 혼탁[擾濁, 澄淨의 반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82) 세 번째 염오정려 중에는 [사(捨)와 아울러] 정념(正念)과 혜가 없으니, 그것은 염오의 낙[染樂]으로 인해 미란(迷亂)되었기 때문이다.83) 네 번째 염오정려 중에는 사(捨)와 염(念)의 청정한 정려지(支)가 없으니, 그것은 번뇌로 인해 더럽혀진 것이기 때문이다."84)
그런데 유여사는 "앞의 두 가지 염오정려 중에는 단지 경안만이 존재하지 않을 뿐이며, 뒤의 두 가지 염오정려 중에는 단지 행사만이 존재하지 않을 뿐이니, 그것들은 대선지법에 포섭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85)
4) 정려의 동(動)과 부동(不動) ▲ 위로
계경 중에서는 '앞의 세 정려는 동요함이 있는 것[有動]이지만, 제4정려는 동요하지 않는 것[不動]이다'고 설하고 있다.86) 어떠한 뜻에 근거하여 그같이 설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제4정려를 동요하지 않는 것이라고 함은
여덟 가지 재환(災患)을 떠났기 때문이니
여기서 여덟 가지란 심(尋)·사(伺)와
네 가지 수(受)와 입식·출식을 말한다.
第四名不動 離八災患故
八者謂尋伺 四受入出息
논하여 말하겠다. 아래 세 정려를 일컬어 '동요함이 있는 것'이라고 한 것은 재환(災患)이 있기 때문이며, 제4정려를 일컬어 '동요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 것은 재환이 없기 때문이니, 재환에는 여덟 가지가 있다.
그 여덟 가지란 무엇인가?
심(尋)과 사(伺)와 네 가지 수(受)와 입식(入息)과 출식(出息)이 바로 그것이니, 제4정려에는 이러한 여덟 가지 재환 중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불세존께서는 그것을 설하여 '동요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제4정려는 마치 밀실에 등불이 비칠 때 동요함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5) 생(生) 정려의 수(受)에 대하여 ▲ 위로
정(定)정려에 존재하는 온갖 수(受)의 차별과 마찬가지로,87) 생(生)정려의 경우도 역시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생(生)정려에는 초정려부터
차례대로 희수·낙수·사수와
아울러 희수·사수와, 낙수·사수와
오로지 사수가 있을 뿐이다.
生靜慮從初 有喜樂捨受
及喜捨樂捨 唯捨受如次
논하여 말하겠다. 생(生)정려의 경우, 초정려에는 세 가지의 수가 있으니, 첫째는 의식과 상응하는 희수이며, 둘째는 세 가지 식(안·이·신식)과 상응하는 낙수이며, 셋째는 네 가지 식(안·이·신·의식)과 상응하는 사수이다.
제2정려에는 두 가지의 수가 있으니, 이를테면 의식과 상응하는 희수와 사수이다. 즉 여기에는 낙수가 결코 존재하지 않으니, 그(의식) 밖의 다른 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마음의 기쁨[心悅]이 거칠기 때문이다.88)
제3정려에는 두 가지의 수가 있으니, 이를테면 의식과 상응하는 낙수와 사수이다.
제4정려에는 오로지 한 가지 수만이 있을 뿐이니, 이를테면 의식과 상응하는 사수이다.
말하자면 이것이 바로 정(定)정려와는 차별되는 생(生)정려의 수(受)의 차별이다.
(1) 위의 세 생정려에서 안식 등을 일으키게 되는 근거 ▲ 위로
위의 세 정려에는 세 가지 식신(안·이·신식)도 없으며, 또한 심·사도 존재하지 않는데, 그곳에 태어나 어떻게 능히 보고, 듣고, 감촉할 수 있으며, 어떻게 표업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인가?
그러한 경지에 태어나더라도 결코 안식 등이 없는 것은 아니며, 다만 그곳에 계속(繫屬)되지 않을 뿐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위의 세 정려에 태어난 자의
세 가지 식과 표업을 일으키는 마음은
모두 초정려에 포섭되는 것으로
오로지 무부무기일 따름이다.
生上三靜慮 起三識表心
皆初靜慮攝 唯無覆無記
논하여 말하겠다. 위의 세 정려지에 태어난 자에게 있어 세 가지 식신(識身)을 일으키고, 아울러 표업을 발동시키는 마음은 모두 초정려에 계속(繫屬)되는 것으로,89) 상지에 태어나 하지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변화심을 일으키는 것과 같기 때문에 능히 보고, 듣고, 감촉할 수 있으며, 또한 표업을 발동시킬 수 있다.
이러한 네 가지 법은 오로지 무부무기로서 하지의 염오를 일으키지 않으니, 이미 염오를 떠난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하지의 선을 일으키지도 않으니, 하지는 저열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정려의 본질에 대해 이미 개별적으로 해석하여 보았다.
5. 미·정·무루의 세 등지에 관한 제문제
1) 등지를 처음으로 획득하는 방식 ▲ 위로
그렇다면 정(淨) 등의 등지(等至)는 어떻게 처음으로 획득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전부를 성취하지 않고서 획득하는 경우
정(淨)등지는 이염과 생(生)에 의해
무루등지는 이염에 의해
염(染)등지는 생과 물러남에 의해 획득한다.
全不成而得 淨由離染生
無漏由離染 染由生及退
논하여 말하겠다. 8근본등지(4정려와 4무색정)를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만약 전부를 성취하지 않고서 획득하는 경우라면, 정(淨)등지는 염오를 떠남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생을 받음[受生]으로 말미암아 획득되니, 이를테면 하지에 있으면서 하지의 염오를 떠날 때와 상지로부터 몰하여 자지에 태어날 때가 그러하다. 다만 아래 일곱 등지는 모두가 다 그러하지만, 유정지(有頂地)의 경우는 그렇지 않고 오로지 염오를 떠남으로써 획득되니, 상지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방지하기 위해 [본송에서] '전부를 성취하지 않고서'라고 하는 말을 설한 것인가?
이미 성취한 자가 다시 그 일부를 획득하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서이니,90) 이를테면 가행에 의해 순결택분(順決擇分) 등을 획득하거나, 물러남으로 말미암아 순퇴분정(順退分定)을 획득하는 때와 같은 경우이다.91)
그럴 때 이러한 뜻에 의거하여 이와 같이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염오를 떠남으로써 정등지[淨定]를 획득하고, 염오를 떠남으로써 그것을 버리는 경우가 있는가? 물러남에 의해서와 태어남에 의해서가 문제가 되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92)
이에 대해서는 '있다'고 말할 수 있으니, 이를테면 순퇴분정이 그러하다. 바야흐로 초정려의 순퇴분정에 포섭되는 것은 욕계의 염오를 떠날 때 획득하며, 자지의 염오를 떠날 때 버리게 된다. 또한 자지의 염오를 떠나는 것에서 물러날 때 획득하며, 욕계의 염오를 떠나는 것에서 물러날 때 버리게 된다. 또한 상지로부터 자지에 태어날 때 획득하며, 자지로부터 하지에 태어날 때 버리게 된다. 나아가 그 밖의 정려지(地)와의 포섭 관계에 대해서도 마땅히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무루의 등지는 단지 염오를 떠남으로 말미암아 획득되니, 이를테면 성자는 하지의 염오를 떠나 상지의 무루등지를 획득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다만 전부를 성취하지 않은 경우에 의거하여 설한 것으로,93) 만약 일찍이 이미 성취한 자라면, 그 밖의 다른 때에도 역시 획득한다고 말할 수 있으니, 이를테면 진지(盡智)의 단계에서도 무학도를 획득하고, 근을 단련[練根]할 때에도 유학과 무학을 획득한다.
나아가 그 밖의 가행과 물러남으로 말미암아 획득하는 경우에 대해서도 모두 마땅히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94)
정성이생(正性離生)에 들어감에 의해서도 처음으로 무루등지를 획득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찌 말하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결정적인 것이 아니니, 차제증자(次第證者)는 그 때 아직 근본정을 획득하지 못하였기 때문으로, 여기서는 다만 결정적으로 획득하는 경우에 대해서만 논의하였다.95)
염(染)등지는 생을 받음으로써, 또한 물러남으로써 획득되니, 이를테면 상지로부터 몰하여 하지에 태어날 때 하지의 염등지를 획득하며, 아울러 이러한 지의 이염(離染)에서 물러날 때 이러한 지의 염등지를 획득한다.
2) 세 등지의 상생(相生) 관계 ▲ 위로
어떠한 등지 후에 몇 가지 등지가 생겨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루등지는 다음 찰나 선(善)등지를 낳는데
상·하지에서 세 번째 정려까지만 이를 뿐이며
정등지가 다음에 낳는 것도 역시 그러하지만
그것은 아울러 자지의 염등지를 낳는다.96)
無漏次生善 上下至第三
淨次生亦然 兼生自地染
염등지는 자지의 정·염등지를 낳고
아울러 바로 아래 한 지(地)의 정등지를 낳으며
죽을 때의 정등지는 일체의 염등지를 낳고
염등지는 자지와 하지의 염등지를 낳는다.97)
染生自淨染 幷下一地淨
死淨生一切 染生自下染
논하여 말하겠다. 무루등지는 다음 찰나에 자지와 상·하지의 선(善)등지를 낳는다. 여기서 '선'이라고 하는 말은 정등지와 무루등지를 모두 포섭하는 말이다.98)
그런데 상지와 하지의 경우에는 각기 세 번째 등지까지만 이를 뿐으로, 그 이상은 멀기 때문에 능히 초월하여 네 번째 등지를 낳는 일이 없다.99) 따라서 무루의 일곱 등지(4정려와 아래 3무색정, 유정처에는 무루가 없음) 중에서 초정려로부터는 무간에 여섯 가지 등지가 낳아지니, 이를테면 자지와 제2·제3정려 각각의 '정'과 무루가 바로 그것이다. 무소유처로부터는 무간에 일곱 가지 등지가 낳아지니, 이를테면 자지와 하지의 여섯 가지와,100) 상지(즉 유정처)의 정등지가 바로 그것이다. 제2정려로부터는 무간에 여덟 가지 등지가 낳아지니, 이를테면 자지와 상지의 여섯 가지와,101) 아울러 하지의 두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식무변처로부터는 무간에 아홉 가지 등지가 낳아지니, 이를테면 자지와 하지의 여섯 가지와, 아울러 상지의 세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102) 제3·제4정려와 공무변처로부터는 무간에 열 가지 등지가 낳아지니, 이를테면 상지와 하지의 여덟 가지와, 아울러 자지의 두 가지가 그것이다.103)
그리고 유지(類智)와 무간에는 능히 무색의 등지를 낳을 수 있지만 법지(法智)의 경우는 그렇지 않으니, 소의와 소연이 하지이기 때문이다.104)
정(淨)등지로부터 생겨나는 것도 역시 그러하며, 나아가 아울러 각기 자지의 염오등지도 낳는다.105) 따라서 유정처의 정등지는 무간에 여섯 가지 등지를 낳으니, 이를테면 자지의 정·염등지와, 하지(무소유처와 식무변처)의 정·무루등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초정려로부터는 무간에 일곱 가지 등지가 낳아지고, 무소유처로부터는 여덟 가지 등지가, 제2정려로부터는 아홉 가지 등지가, 식무변처로부터는 열 가지 등지가 낳아지며, 그 밖의 등지(제3·제4·공무변처)로부터는 열한 가지의 등지가 낳아진다.106)
염(染)등지로부터는 무간에 자지의 정·염등지가 낳아지고, 아울러 바로 아래 한 지(地)의 정등지가 낳아지니, 이를테면 자지의 번뇌에 핍박되어 하지의 정등지에 대해서도 역시 존중하는 마음을 낳기 때문에 염등지로부터 바로 아래 지의 정등지가 낳아지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만약 염등지와 정등지에 대해 능히 올바로 요지(了知)하였다면, 능히 염등지로부터 하지의 정등지가 낳아질 수 있을 것이지만,107) 모든 염오등지는 능히 올바로 요지하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그 같은 염등지로부터 능히 정등지가 낳아질 수 있는 것인가?
선행된 원력(願力) 때문이다. 즉 일찍이 원하여 말하기를, "차라리 하지의 정등지를 획득할지언정 상지의 염등지는 구하지 않으리"라고 하였으니, 이러한 선행된 원력의 힘이 상속신에 따라 일어났기 때문에 그 후 염등지로부터 하지의 정등지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마치 먼저 원을 세우고 잠자리[睡眠]에 들어야만 능히 약속한 시간에 깨어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무루와 염등지는 필시 상생(相生)하지 않지만, 정등지는 두 가지 모두와 상생하기 때문에 [상생에] 세 가지 차별이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상에서 설한 바와 같이 정등지와 염등지가 염등지를 낳는다고 하는 사실은 다만 선정에 들어 있을 때의 청정과 염오를 기준으로 하여 설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생(生)정려의 정등지[生淨]와 염등지[生染]가 염등지를 낳는 경우라고 한다면 그렇지가 않다.108) 즉 목숨을 마칠 때, 태어나면서 획득한 생득(生得)의 정등지는 각기 무간에 일체의 염등지를 낳을 수 있지만, 만약 생정려의 염등지라면 각기 무간에 자지와 일체 하지의 염등지를 능히 낳을 수 있을 뿐으로, 상지의 염등지를 낳지 않는 것은 아직 하지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3) 정(淨)등지의 4분정(分定)과 그 상생관계 ▲ 위로
앞에서 말하기를 '정등지로부터 무간에 무루등지가 낳아질 수 있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일체의 정등지의 종류가 모두 무루등지를 낳을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정등지에는 네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바로 순퇴분과
순주분과 순승진분과
순결택분에 포섭되는 것이다.
淨定有四種 謂卽順退分
順住順勝進 順決擇分攝
이는 순서대로 번뇌와 자지와
상지와 무루에 수순하는 것으로
서로를 비교하여 보면 차례대로
두 가지·세 가지·세 가지·한 가지를 낳는다.
如次順煩惱 自上地無漏
互相望如次 生二三三一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정등지(淨等至)에는 모두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순퇴분(順退分)에 포섭되는 것이며, 둘째는 순주분(順住分)에 포섭되는 것이며, 셋째는 순승진분(順勝進分)에 포섭되는 것이며, 넷째는 순결택분(順決擇分)에 포섭되는 것이다. 그리고 [유정지를 제외한] 선정의 경지에는 각기 네 종류가 있지만, 유정지에는 오로지 세 종류만이 존재한다. 즉 그것은 더 이상 상지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경지에는 순승진분에 포섭되는 등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네 가지 종류 중에서 오로지 네 번째 순결택분에 포섭되는 정등지만이 능히 무루등지를 낳을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 같은 네 가지 종류에는 바로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즉 순퇴분은 능히 번뇌에 수순(隨順)하며,109) 순주분은 능히 자지의 정등지에 수순하며, 순승진분은 능히 상지의 정등지에 수순하며,110) 순결택분은 능히 무루등지에 수순한다. 그래서 모든 무루의 등지는 오로지 이 같은 순결택분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네 가지 분(分) 상호간의 상생(相生) 관계에 대해 살펴보면, 첫 번째 순퇴분은 능히 두 가지를 낳으니, 이를테면 순퇴분과 순주분이 바로 그것이다. 두 번째 순주분은 순결택분을 제외한 세 가지를 낳으며, 세 번째 순승진분는 순퇴분을 제외한 세 가지를 낳는다.111) 그리고 네 번째 순결택분은 한 가지를 낳으니, 이를테면 자신의 분으로 그 밖의 분은 낳지 않는다.
4) 한 단계 뛰어넘어 등지를 닦는 방식 ▲ 위로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정등지와 무루등지는 다 같이 능히 상·하지를 초월하여 세 번째 등지까지만 이를 수 있다.112) 그럴 때 관행자는 어떻게 초(超)등지를 닦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두 가지 종류의 선정을 순(順)·역(逆)·
균(均)·간(間)·차(次)하고, 초(超)하니
간·초에 이르는 것을 초월의 성취라고 하는데
세 주(洲)의 이근의 무학이 닦는 것이다.
二類定順逆 均間次及超
至間超爲成 三洲利無學
논하여 말하겠다. 근본정인 선(善)등지는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으니, 첫째는 유루이며, 둘째는 무루이다. 그리고 어떤 등지에서 상지로 가는 것을 일컬어 '순(順)'이라고 하였으며, 하지로 되돌아가는 것을 일컬어 '역(逆)'이라고 하였으며, 동류(同類)를 일컬어 '균(均)'이라고 하였으며, 이류(異類)를 일컬어 '간(間)'이라고 하였으며, 서로 인접하는 것을 일컬어 '차(次)'라고 하였으며, 한 단계[地]를 뛰어넘는 것을 일컬어 '초(超)'라고 하였다.113)
이를테면 관행자는 초등지[超定]를 닦을 때에는 먼저 유루 8지의 등지에 대해 순(順)·역(逆)·균(均)·차(次)로서 현전·수습(數習)하고, 다음으로 무루 7지(유정지를 제외한 나머지)의 등지에 대해 순·역·균·차로서 현전·수습하며, 다음으로 유루와 무루의 등지에 대해 순(順)·역(逆)·간(間)·차(次)로서 현전·수습한다. 또한 다음으로 유루의 등지에 대해 순(順)·역(逆)·균(均)·초(超)로서 현전·수습하고, 다음으로 무루의 등지에 대해 순·역·균·초로서 현전·수습하니, 이를 일컬어 초등지를 닦고 익히는 가행이 원만하게 된 상태라고 한다.
그리고 그 후 유루와 무루의 등지에 대해 순·역·간·초로서 현전·수습하는 것을 일컬어 초등지의 성취가 원만하게 된 상태라고 한다.
여기서 '초(超)'라고 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의 단계를 능히 뛰어넘는 것(즉 그로부터 세 번째 등지에 이르는 것)을 말하는데, 네 번째 등지는 너무 멀기 때문에 능히 초월하여 그곳에 들어가는 일이 없는 것이다.
초등지를 닦는 이는 오로지 북구로주를 제외한 인취의 세 주(洲)에 머무는 불시해탈(不時解脫)의 모든 아라한으로서,114) 그들은 선정이 자재하기 때문이며, 번뇌가 없기 때문이다. 비록 시해탈 아라한 역시 번뇌가 없을지라도 선정이 자재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온갖 견지(見至)의 성자는 선정이 자재하다 할지라도 아직 남은 번뇌가 있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능히 초등지를 닦을 수 없는 것이다.
5) 등지의 소의신 ▲ 위로
이러한 온갖 등지(等至)는 어떠한 소의신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모든 선정은 자·하지신(身)에 의지하고
상지신에 의지하지 않으니, 무용하기 때문이며
오로지 유정지에 태어난 성자만은
하지의 선정을 일으켜 남은 번뇌를 멸진한다.
諸定依自下 非上無用故
唯生有頂聖 起下盡餘惑
논하여 말하겠다. 모든 등지는 자지와 하지의 몸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상지의 몸에 의지하여 하지의 등지를 일으키는 일은 없으니, 상지의 몸으로 하지의 등지를 일으키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기 때문이며, 그 자체 수승한 선정이기 때문이며, 하지의 선정은 그 세력이 저열하기 때문이며, 이미 버렸기 때문이며,115) 싫어하여 훼손할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특상은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보다 자세하게 논설해 본다면, 성자로서 유정지(有頂地)에 태어난 자는 반드시 자지의 나머지 번뇌를 멸진하기 위하여 무루의 무소유처를 일으키는데,116) 자지(유정지)에서는 성도에 대해 흔락(欣樂)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로지 무소유처만을 일으키는 것은 그것이 인접하여 가깝기 때문으로, 그것을 일으켜 현전시키면 [유정처의] 나머지 번뇌도 모두 멸진하게 되는 것이다.
6) 등지의 경계 ▲ 위로
이러한 온갖 등지는 어떠한 경계를 소연으로 삼아 생겨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미등지는 자지의 계(繫)를 소연으로 삼으며
정·무루등지는 일체를 두루 소연으로 삼지만
근본정으로서 선의 무색정은
하지의 유루를 소연으로 삼지 않는다.
味定緣自繫 淨無漏遍緣
根本善無色 不緣下有漏
논하여 말하겠다. 미(味)등지는 단지 자지의 유루법(즉 전찰나의 淨등지)만을 소연으로 삼을 뿐 필시 하지의 법을 소연으로 삼는 일은 없으니, 이미 [하지의] 염오를 떠났기 때문이며, 상지의 법을 소연으로 삼는 일도 없으니, 애탐의 지(地)가 다르기 때문이며, 무루법을 소연으로 삼지도 않으니, 그럴 경우 마땅히 선(정 또는 무루)의 등지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117)
정(淨)과 무루의 등지는 다 같이 능히 자지와 상·하지의 유위·무위법을 두루 소연으로 삼으니, 모두 다 경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양자에 차별이 있다고 한다면, 무기의 무위는 무루등지의 경계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 뿐이다.
근본지에 포섭되는 선(즉 정과 무루)의 무색정은 하지의 온갖 유루법을 소연으로 삼지 않으며,118) 자지와 상지의 법으로서 능히 연으로 삼지 않는 것은 없다. 또한 역시 비록 하지의 무루법을 능히 소연으로 삼을지라도 유지품(類智品)의 도만을 소연으로 삼고, 법지품(法智品)은 소연으로 삼지 않으며,119) 또한 역시 하지법의 멸(滅)도 능히 소연으로 삼지 않는다.120)
그러나 무색의 근분정은 역시 하지의 법을 소연으로 삼으니, 그것의 무간도는 필시 하지를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
7) 단혹(斷惑)의 등지 ▲ 위로
미(味)와 정(淨)과 무루(無漏)의 세 등지 가운데 어떠한 것의 힘이 능히 온갖 번뇌를 끊을 수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루등지가 번뇌를 능히 끊을 수 있으며
아울러 온갖 정(淨)등지의 근분도 능히 끊는다.
無漏能斷惑 及諸淨近分
논하여 말하겠다. 무루의 온갖 선정은 모두 다 능히 번뇌를 끊을 수 있지만 [근본정의 정등지는 능히 번뇌를 끊을 수 없으며], 정등지조차 능히 번뇌를 끊을 만한 힘이 없는데 하물며 온갖 염오등지(미등지)가 능히 끊을 수 있을 것인가? 즉 근본정의 정등지는 하지의 번뇌를 능히 끊을 수 없으니, 이미 그것의 염오를 떠났기 때문이며, 자지의 번뇌를 능히 끊을 수 없으니, 자지의 번뇌에 의해 계박되어 있기 때문이며, 상지의 번뇌를 능히 끊을 수 없으니, 그것은 자신의 등지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정등지로서 근분(近分)일 경우에는 역시 능히 번뇌를 끊을 수 있으니, 그것들은 모두 능히 바로 아래 단계의 번뇌를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121)
그렇지만 중간정(中間定)에 포섭되는 정등지의 경우에는 역시 능히 번뇌를 끊을 수 없다.122)
8) 특히 근분정(近分定)에 대하여 ▲ 위로
근분정(近分定, samantaka-)에는 몇 가지가 있으며, 어떠한 수(受)와 상응하는가? 미(味) 등의 세 등지에 모두 갖추어져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근분은 여덟 가지로, 사수이고 정등지인데
첫 근분은 성법, 혹은 세 등지를 갖추고 있다.123)
近分八捨淨 初亦聖惑三
논하여 말하겠다. 모든 근분정(近分定)에도 역시 여덟 가지 종류가 있으니, 8근본정으로 들어가는 문(門)이 되기 때문이다.
일체의 근분정은 오로지 사수(捨受) 한 가지와 상응할 뿐이니, 애써 노력하여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며,124) 아직 하지의 두려움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8근분정은 모두 정등지(淨等至)에 포섭되며, 오로지 첫 번째 근분정만은 역시 또한 무루등지와도 통하니,125) 미착함이 없는 이염(離染)의 도이기 때문이다.126) 그리고 비록 근분정의 마음에 결생(結生)의 염오함이 존재할지라도 여기서는 정(定)등지의 염오함[定染]을 비판하기 위해 그와 같이 설한 것인다.127)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미등지(未等持, 즉 첫 번째 근분정인 미지정)도 역시 미(味)등지와 상응하는 경우가 있으니,128) 아직 근본정을 일으키지 않았지만 역시 이에 대해 애탐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미지정에는 세 종류(미·정·무루)의 등지를 모두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중간정려(中間靜慮, dhyanantara)와 온갖 근분정 사이에 차별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인가, 역시 또한 다른 점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 뜻에 역시 다른 점이 있으니, 이를테면 모든 근분정은 하지의 염오를 떠나는 것이므로 바로 [근본정에] 들어가는 첫 번째 원인이 되지만, 중간정려는 그렇지 않다.129)
9) 중간정려와 근분정의 차이 ▲ 위로
그 밖에 또 다른 점이 있으니, 게송으로 말하겠다.
중간정려에는 심(尋)이 없으며
세 등지를 갖춘 것으로, 오로지 사수이다.
中靜慮無尋 具三唯捨受
논하여 말하겠다. 첫 번째 근본정과 근분정은 심·사와 상응하며, 위의 일곱 가지 선정 중에는 다 같이 심·사가 존재하지 않지만, 오로지 중간정려에는 '사'만이 존재하고, '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초정려보다는 뛰어나지만 제2정려에는 아직 미치지 않는 것으로, 바로 이러한 뜻에 근거하여 '중간'이라는 명칭을 설정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상지에는 중간정려가 존재하지 않으니, 어떤 한 경지로 오르내리는 이와 같은 단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정은 미(味) 등의 세 종류의 등지를 모두 갖추고 있으니, 뛰어난 공덕에 대해 애미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130)
[이러한 선정은] 모든 근분정과 마찬가지로 오직 사수와 상응할 뿐,131) 희수와 상응하지 않으니,132) 애써 노력하여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으로,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이것을 바로 '고통행(苦通行)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설한 것이다.133)
그리고 이러한 선정은 능히 대범처의 과보를 초래하니, 많이 닦고 익히는 자는 대범천이 되기 때문이다.
등지(等至)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6. 경에서 설한 여러 등지(等持, 즉 삼마디)
1) 유심유사(有尋有伺) 등의 세 삼마지 ▲ 위로
그렇다면 무엇을 등지(等持)라고 하는가?134)
경에서는 등지에 모두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설하고 있으니,135) 첫째는 유심유사(有尋有伺)삼마지이며, 둘째는 무심유사(無尋唯伺)삼마지이며, 셋째는 무심무사(無尋無伺)삼마지이다.
그 상의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초정려와 하지에는 심·사가, 중간정에는
'사'가 존재하지만, 상지에는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初下有尋伺 中唯伺上無
논하여 말하겠다. 유심유사삼마지라고 함은 이를테면 심(尋)·사(伺)와 상응하는 등지로서, 이는 초정려와 미지정에 포섭된다.
무심유사삼마지라고 함은 이를테면 오로지 '사'와 상응하는 등지로서, 이는 바로 중간정려지에 포섭된다.
무심무사삼마지라고 함은 이를테면 심·사와 상응하지 않는 등지로서, 이는 제2정려의 근분정으로부터 비상비비상처정에 포섭된다.
2) 공(空)·무원(無願)·무상(無相) 삼마지 ▲ 위로
계경에서는 다시 세 종류의 등지를 설하고 있으니,136) 첫째는 공(空)삼마지이며, 둘째는 무원(無願)삼마지이며, 셋째는 무상(無相)삼마지이다.
그 상의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공은 공(空)과 비아(非我)의 행상과
무상은 멸제(滅諦)의 네 행상과
무원은 그 밖의 열 가지
진리[諦]의 행상과 상응하는 것을 말한다.
空謂空非我 無相謂滅四
無願謂餘十 諦行相相應
이러한 삼마지는 정·무루등지와 통하는데
무루의 등지를 세 가지 해탈문이라고도 한다.
此通淨無漏 無漏三脫門
논하여 말하겠다. 공(空) 삼마지란, 이를테면 공(空)과 비아(非我)의 두 종류의 행상과 상응하는 등지를 말한다.137)
무상(無相) 삼마지란, 이를테면 멸제를 소연으로 하는 네 종류의 행상(滅·靜·妙·離)과 상응하는 등지를 말한다. 즉 열반(멸)은 열 가지의 상(相)을 떠난 것이기 때문에 '무상(無相)'이라고도 이름하는데, 바로 그러한 열반을 소연으로 하는 삼마지도 '무상'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열 가지 상이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색 등의 다섯 가지와 남·여의 두 가지와 세 가지 유위상을 말한다.138)
무원(無願)삼마지란, 이를테면 그 밖의 진리[諦]를 소연으로 하는 열 가지 종류의 행상과 상응하는 등지를 말한다.139) 곧 비상(非常)·고(苦)와 그것의 원인(즉 집제)은 참으로 싫어하고 근심할 만한 것이기 때문에, 도(道)는 마치 뗏목과 같아 필시 마땅히 버려야 하기 때문에 능히 그것을 소연으로 하는 선정을 '무원'이라고 이름한 것이니,140) 그것들은 모두 현재 대관(對觀)되는 바에서 뛰어넘어야 하기 때문이다.141) 그러나 공과 비아의 행상은 싫어하여 버려야 할 것이 아니니, 열반의 상과 서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 가지 등지에는 각기 정(淨)과 무루의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세간의 등지와 출세간의 등지로서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142) 그리고 세간에 포섭되는 것은 열한 가지 지(地)와 통하지만, 출세간에 포섭되는 것은 오로지 아홉 지와 통할 뿐이다.143)
나아가 이 중에 무루의 세 등지를 세 가지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이름하는데, 능히 열반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기 때문이다.
3) 공공·무원무원·무상무상 삼마지 ▲ 위로
계경에서는 다시 세 가지의 중(重)등지를 설하고 있으니, 첫째는 공공(空空)삼마지이며, 둘째는 무원무원(無願無願)삼마지이며, 셋째는 무상무상(無相無相)삼마지이다.
그 상의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중첩하는 두 삼마지는 무학의 그것을
연으로 하여 공과 비상의 행상을 취하는 것이며
뒤의 삼마지는 무상정(無相定)의 비택멸을
연으로 하여 정(靜)의 행상을 취하는 것이다.
重二緣無學 取空非常相
後緣無相定 非擇滅爲靜
이는 유루로서, 인취의 불시해탈이
위의 7근분정을 떠나서 일으키는 것이다.
有漏人不時 離上七近分
논하여 말하겠다. 이러한 세 가지 등지는 앞에서 언급한 공(空)삼마지 등을 소연으로 삼아 '공' 등의 행상을 취하기 때문에 '공공' 등의 명칭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즉 공공(空空)등지는 앞에서 언급한 무학의 공삼마지를 소연으로 삼아 그 같은 공의 행상을 취하는 것으로,144) 공의 행상은 싫어함에 따르는 것이 비아의 그것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145)
무원무원(無願無願)등지는 앞에서 언급한 무학의 무원등지를 소연으로 삼아 비상(非常)의 행상을 취하는 것으로,146) 고(苦)와 인(因) 등의 [집제의] 행상을 취하지 않는 것은 무루의 행상이 아니기 때문이며, '도' 등의 [도제의] 행상을 취하지 않는 것은 [피안에 이른 후] 싫어하여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147)
무상무상등지는 무학의 무상삼마지의 비택멸을 소연의 경계로 삼는 것으로, 무루법에는 택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이는 다만 정(靜)의 행상 만을 취할 뿐 멸(滅)·묘(妙)·리(離)의 행상은 취하지 않으니, 비상멸(非常滅)과 혼동되기 때문이며, 이는 바로 무기성이기 때문이며, 이계과가 아니기 때문이다.148)
이러한 세 가지 등지는 성도를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로지 유루일 뿐으로, 무루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149) 또한 오로지 세 주(洲)의 인취로서 오직 불시해탈(不時解脫)만이 능히 이와 같은 중첩의 삼마지를 일으킬 수 있다.150) 또한 이는 일곱 근분정을 제외한 열한 가지 지에 의지하여 일어나니, 이를테면 욕계와 미지정과 8근본정과 중간정이 바로 그것이다.151)
4) 네 가지 수등지(修等持) ▲ 위로
계경에서는 다시 네 가지 종류의 수등지(修等持)를 설하고 있으니,152) 첫째는 현법락(現法樂)에 머물기 위해 닦는 삼마지이며, 둘째는 뛰어난 지견(知見)을 획득하기 위해 닦는 삼마지이며, 셋째는 분별의 지혜를 획득하기 위해 닦는 삼마지이며, 넷째는 모든 번뇌[漏]를 영원히 끊기 위해 닦는 삼마지이다.
그 상의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현법락을 획득하기 위해
온갖 선의 정려를 닦으며
뛰어난 지견을 획득하기 위해
청정한 천안통을 닦는다.
爲得現法樂 修諸善靜慮
爲得勝知見 修淨天眼通
분별의 혜를 획득하기 위해
온갖 가행의 선을 닦으며
모든 번뇌의 멸진을 획득하기 위해
금강유정(金剛喩定)을 닦는다.
爲得分別慧 修諸加行善
爲得諸漏盡 修金剛喩定
논하여 말하겠다. [수등지(修等持)라고 함은] 계경에서, "수등지가 있으니, 만약 익혔거나, 혹은 닦았거나, 혹은 지은 바가 많으면 현재 바로 낙주(樂住)를 획득할 것이다.……"고 설한 바와 같다. 즉 [본송에서 언급한] '선'이라고 하는 말은 정(淨)등지와 무루등지를 모두 포섭하는 것으로, 모든 선의 정려를 닦으면 현법(現法, drsti dharma, 즉 현재세)의 낙주를 획득한다.
그런데 경에서 단지 초정려만을 설하고 있는 것은, 초정려를 언급하여 뒤의 정려를 나타내려는 것으로, 이치상 실로 그 밖의 것까지 통하는 것이다.153) 또한 후법(後法, samparaya, 즉 미래세)의 낙에 머문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후법의 낙은 결정적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혹 어떤 경우 물러나기도 하고, 혹은 상계에서 생을 받기도 하며, 혹은 반열반에 드는 경우도 있어 결정적으로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온갖 선정에 의지하여 천안통을 닦으면, 능히 바로 수승한 지견(知見)을 획득한다.154)
만약 3계의 온갖 가행선과 무루선을 닦으면, 분별의 혜를 획득한다.155)
만약 금강유정(金剛喩定)을 닦으면, 바로 모든 번뇌[漏]의 영원한 멸진을 획득한다.156) 이치상 실로 이러한 금강유정은 온갖 지에 의지하여 닦는 것이지만, 계경에서 다만 제4정려라고 설하고 있는 것은, 전(傳)하여 설(說)하는 바에 따르면, 그것은 세존이 자신에 근거하여 설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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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주 : ▲ 위로
1) 선정[定, samapatti]이란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여 산란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등인( 等引, samahita)·등지(等持, 또는 三摩地, samadhi)·등지(等至, samapatti)·정려(dhyana)·심일경성(心一 境性, cittaikagrata)·지(止, 奢摩多, samatha)·현법락주(現法樂住, drsta dharma sukha vihara)라고도 한 다. 지(智)가 현성(賢聖)의 무루의 인(因)이라면, 선정은 무루의 연(緣)으로서 '지'의 소의가 된다. 혹은 선 정 자체도 4무량·8해탈·8승처·10변처와 같은 뛰어난 공덕을 낳는 근거가 된다.
2) 생정려란 과보로서의 선정[果定]으로 색계 유정의 이숙신(異熟身)을 말하는데, 초정려에 범중천 등의 3 천이, 제2정려에 소광천 등의 3천이, 제3정려에 소정천 등의 3천이, 제4정려에 무운천 등의 8천이 있다.(본론 권제8, p.365 참조)
3) 정정려란 원인으로서의 선정[因定]으로 각각의 정려에 각기 한 가지가 있어 도합 네 가지가 되지만, 그 것을 전체적으로 말하면 선한 심일경성으로, 등지(마음을 평등하게 유지하여 하나의 대상에 전념하게 하는 심 소법. 즉 열 가지 심대지법 중의 하나인 三摩地, 본론 권제4 주18 참조)를 본질로 하는 것이다.
4) 마음[心王]이 하나의 대상에 전념하는 것을 삼마지라고 한다면, '삼마지'라고 이름하는 심소를 개별적 인 실체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힐난. 즉 논주 세친은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전념하는 상태를 다만 가설하여 '삼마지'라고 할 뿐 개별적 실체로서의 그것을 부정하는 경량부 설(본론 권제4 주17 참조)에 따라 이같이 유 부 설을 힐난하고 있는 것이다.
5) 삼마지는 대지법으로서 일체의 마음과 상응하는 것인데, 그것이 만약 제2찰나의 산란을 막는 것이라고 한다면, 첫 찰나에 상응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아 무용한 것이 되고 만다는 힐난.
6) 즉 삼마지에 의해 모든 심·심소법이 하나의 대상에 전념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삼마지는 무엇 에 의해 하나의 대상에 전념하게 되는 것인가? 그 어떤 법에 의해 삼마지가 하나의 대상에 전념하게 되는 것 이라고 한다면, 그것에 의해 다른 심·심소법도 하나의 대상에 전념해야 할 것인데, 어째서 삼마지에 의해서 만 여타의 심·심소법이 하나의 대상에 전념하게 하는 것인가 하는 힐난.
7) 즉 삼마지는 선·악·무기 등의 일체의 마음과 상응하는 대지법이기 때문에 그것과 상응하는 일체의 마 음은 마땅히 하나의 대상에 전념하여 일어나야 한다는 힐난.
8) 즉 정려 이외의 마음에도 삼마지가 상응하지만, 그 때 그것은 그 체성이 저열하기 때문에 정려, 즉 하 나의 대상에 전념하는 심일경성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뜻.
9) 여기서 유여사는 경부사(經部師). 즉 경량부에 의하면 삼마지란 다만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전념한 상 태를 그렇게 가설한 것일 뿐으로, 마음과는 다른 개별적 실체가 아니다.
10) 『잡아함경』 권제29 제817경(대정장2, p.210상), " 云何爲增上意學? 若比丘離欲惡不善法 乃至第四禪 具足住.……."
11) 『증일아함경』 권제23(대정장2, p.666중), " 有此四增上之心, 我以此三昧之心淸淨無瑕穢, 亦無結…… ."
12) '정(靜)'이란 등인(等引)을 말하고, '려(慮)'란 변관(遍觀)을 말하기 때문에 정려라고 한 것으로, 무 색정에는 고요함은 있으나 자세히 생각함이 없으며, 욕계의 삼마지에는 자세히 생각함은 있으나 고요함이 없 기 때문에 정려가 아니다.(『대비바사론』 권제80, 한글대장경121, p.104)
13) 심려의 근거가 되는 정려(dhyana)는 '사유하다', '의도하다'는 뜻의 어근 dh 에서 파생된 말이라는 뜻.
14) 앞의 유여사의 경우, '정려'의 본질은 사(思)이다.
15) 적정하며 능히 잘 심려(審慮)하기 때문에 정려라고 이름하였다면, 상 2계의 8지(地)의 등지를 모두 정 려라고 이름해야 한다는 힐난.
16) 정려에는 그 내용으로서 초정려와 제3정려에 각기 5지(支), 제2정려와 제4정려에 각기 4지가 있다.(후 술)
17) 부패한 종자도 역시 싹을 틔울 수 있는 종자와 유사하기 때문에 '종자'라고 이름하듯이, 염오혜 역시 심려함에 있어 지관이 균등하여 정려와 유사하기 때문에 '정려'라고 이름할 수 있다는 뜻.
18) 그래서 본송에서 '초정려는 사(伺)·희(喜)·낙(樂)을 갖추고 있다'고만 설한 것이다. 그렇더라도 '심 '이 아니라 '사'를 설하게 된 것은 제2정려에서 '사'가 배제되기 때문이다.
19) 본론 권제8(P.366) 참조. 즉 무색계에는 방처(方處)가 없지만, 이숙생의 승렬(勝劣)에 따라 공무변처( 空無邊處)·식무변처(識無邊處)·무소유처(無所有處)·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네 가지가 있다.
20) 이는 대중부와 화지부의 주장이다. 『이부종륜론』에 의하면 대중부 등에서는 '색 무색계에도 6식신이 갖추어져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것의 소의·연이 되는 미세한 색법이 존재한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대비바사론』 권제83(한글대장경121, p.187)에서는 무색계의 유색론(有色論)을 분별론자의 주장으 로 전하고 있다. 즉 그들에 의하면 '계경에서 명색은 식을 연으로 하고, 식은 명색을 연으로 한다'고 설하고 있으며, 또한 '목숨[壽]과 체온[煖]과 의식[識]은 항상 화합하여 떠나지 않는다'고 하였으므로, 식이 존재하 는 무색계에는 명색도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후술)
21) 즉 무루의 율의는 색계 대종에 근거하는 것으로, 대종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데 어찌 소조색이 존재할 것인가? 무색계에는 대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율의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대비바사론』 권제96, 한 글대장경121, p.466 참조)
22) 그러한 선정 중에서는 다만 무루의 율의만이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역시 또한 유루율의의 존재도 부정 되며, 또한 다만 그러한 신(身)·어(語)의 대종 만이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역시 또한 신·어율의의 존재도 부정되니, 무색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율의가 어찌 존재할 것인가?(『구사론기』 권제28, 대정장41, p.418하 ) 즉 색은 무색계에 태어나는 경우에만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인 무색정에서도 역시 존재하지 않 는다.
23) 4무색정이 본질적으로는 어떠한 차별도 없을지라도 생겨나는 처소가 동일하지 않듯이 거기에 생겨나는 몸에도 승렬(勝劣)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제4 비상비비상처에 태어나는 몸만을 가장 청묘(淸妙)하다고 해야 하며, 그럴 경우 그것만을 '무색'이라 해야 한다는 힐난.
24) 만약 하지의 안근에 의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미세한 것'이라 하고, 그래서 '무색'이라고 한다면, 욕 계의 안근에 의해 생정려, 즉 색계에 태어난 이의 색신도 능히 보이지 않는데, 그것은 왜 '무색'이라고 이름 하지 않는가 하는 힐난.
25) 욕계에는 탐욕이 존재하기 때문에, 색계에는 색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뜻에 따라 욕계와 색계로 일컬 은 것이지만 무색계는 예외라고 한다면, 그 예외의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힐난.
26) 『잡아함경』 권제21 제568경(대정장2, p.150중), "壽暖及與識 捨身時俱捨 彼身棄塚間 無心如木石." 『중아함경』 권제58 「법락비구니경」(대정장1, p.789상), "有三法, 生身死已, 身棄塚間, 如木無情. 云何爲 三? 一者壽, 二者煖, 三者識." 목숨[壽, 즉 命]은 체온(색법)과 의식에 의해 유지상속하므로 무색계에도 색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는 경증. 이 세 가지의 화합 관계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5(p.232)를 참조할 것.
27) 『잡아함경』 권제12 제288경(대정장2, p.81중), "彼名色緣識生, 而今復言名色緣識, 此義云何?……臂 如三蘆立於空地展轉相依, 而得堅立." 즉 경에서 식은 명색에 의지하여 일어나고 명색은 식에 의지하여 일어난 다고 하였으므로, 무색계에 식이 존재하는 한 명색도 존재해야 한다는 경증.
28) 『잡아함경』 권제2 제58경(대정장2, p.14하), "……若所有識, 彼一切名色緣故."
29) 『잡아함경』 권제2 제39경(대정장2, p.9상), "若離色受想行, 識有若來若去若住若生者, 彼但有言數, 問而不知."
30) 즉 계경의 말씀은 그 자체 진리설이기 때문에 해석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과실을 범하 게 된다. 첫째 '목숨과 따뜻함(즉 체온)은 화합하여 있다'고 하여 목숨이 있기 때문에 따뜻함이 있다고 할 경 우, 따뜻함이 있는 곳에도 모두 목숨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햇볕이나 장작불과 같은 외적인 따뜻함도 목숨 과 화합하여 있다고 해야 한다. 둘째와 셋째 '명색은 식을 연으로 한다'고 하여 무색계의 식도 명색과 상호의 존하는 것이라고 할 경우, 외적인 비유정물의 명색, 이를테면 4상 등도 식과 상호의존해야 한다. 넷째, 계경( 『잡아함경』 권제15 제372경, 대정장2. p.102상 ; 같은 경 권제17 제489경, 동 p.124하)에서 '일체의 유정은 4식(食)으로 말미암아 존재한다'고 하였으므로, 또한 계경(『장아함경』 권제8 「중집경」, 대정장1, p.51상 ; 『대집법문경』 권상, 동 p.229상)에서 '식은 색·수·상·행에 따라 머문다'고 하였으므로 무색계에도 향 ·미·촉을 본질로 하는 단식(段食, 본론 권제10, p.487 참조)이나 색식주(色識住, 본론 권제8, p.385 참조) 가 존재한다고 해야 한다. 따라서 계경의 말씀은 살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31) 『중아함경』 권제5 「성취계경(成就戒經)」(대정장1, p.449하), " 만약 비구가 계·정·혜를 성취하 면 현법에 상지멸정(想知滅定)에 들고날 것이지만, 현법에 구경지를 획득하지 못할 경우 신괴(身壞) 명종(命 終)하여 박식천(博食天)을 초월하여 다른 의생천(意生天)에 태어나 상지멸정에 들고나게 된다."
32) 『장아함경』 권제20 『세기경(世記經)』 「도리천품」(대정장1, p.133중), " 自上(즉 욕계 이상)諸天 以禪定喜樂爲食."
33) 『중아함경』 권제24 「대인경(大因經)」(대정장1, p.581중), " 有無色衆生度一切色想, 滅有對想, 不 念若干想……是謂第五識住."
34) 일체의 색상(色想)을 모두 초월하였다고 설한 것은 욕계와 색계의 보다 거친 색[麤色]을 초월하였다는 말로서, 무색계에는 여전히 미세한 색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미세한 단식도 역시 존재한다고 주장 해야 한다는 힐난.
35) 『잡아함경』 권제17 제462경(대정장2, p.118상), " [유]색계와 무색계와 멸계의 3계가 있으니, [유] 색계의 중생과 무색계의 중생으로서 멸계를 알지 못하는 자는 다시금 온갖 유(有)를 받게 된다. 그러나 만약 [유]색계를 끊고 무색계에 머물지 않으면서 멸계에서 심해탈하면 생사에서 영원히 떠나게 된다." 곧 본론상에 서 '유는 유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함은 '유를 통해 유를 떠날 수 없으며, 오로지 멸을 통해 떠날 수 있을 뿐 이다'는 뜻으로, 이는 앞의 무색계 유색론자(즉 대중부)의 힐난이다. 즉 무색유는 이미 색유를 초월한 것이라 고 한다면, 어떻게 '무색유는 색유를 벗어날 수 없다'고 설하였을 것인가? 이에 대해 유부는, 자지의 유를 벗 어나지 못한다는 의미로서, 타지의 유는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하(下) 8지는 벗어날 수 있어도 유정지는 벗 어날 수 없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재생하기 때문에 그같이 말한 것으로, 무색유 에 의해 색유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의 경설이 아니라고 통석(通釋)하고 있는 것이다.
36) 『본사경(本事經)』 권제6(대정장17, p.689하 - 690상), "最初靜慮能以正慧如實隨觀, 其中諸色受想行 識, 如是法性皆是無常.……空無邊處 能以正慧如實隨觀, 其中所有受想行識, 如是法性皆是無常."
37) 이는 유부의 설이 아니라 논주 세친이 경량부의 색심호훈설(色心互熏說)을 빌려 답한 것이다. 즉 그 때 욕계와 색계의 색은 무색계 마음 중에 잠재된 색의 종자(b ja, 즉 과거에 일어났던 색의 이숙인)로부터 생겨난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본론 권제5(p.228) 주56)의 물음과 주57)의 유여사 설을 참조할 것. 이 논설에 대해 중현은 침묵하고 있지만, 본론 권제5에서의 색심호훈설에서는 그 난점을 세세히 비판하고 있는데, '그것 은 예컨대 보리 등의 싹이 자신과 동류의 씨앗을 근거로 하지 않고 다만 땅 등에 의해 생겨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지자(智者)로서 그것을 듣고 웃지 않을 이가 어디 있겠는가'라고 하여 조소하고 있다.( 『순정리론』 권제13, 대정장29, p.404상)
38) 즉 욕계나 색계에서 색신 없이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같은 일은 있을 수 없다 고 한다면, 욕계에서도 단식을 떠나 색신이 일어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단식이 존재하지 않는 색계에는 색신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는 반증. 색계에도 단식이 존재하지 않지만 색신이 일어나듯이 무색계에 색 신이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마음은 일어날 수 있다는 뜻.
39) 본론 권제8(p.366) 참조. 즉 무색계에서의 마음은 중동분과 명근에 의해 생기 상속한다.
40) 승해에 의해 무변의 허공과 무변의 의식과 무소유를 사유하는 가행에 따라 성취된 무색정을 순서대로 공무변처(空無邊處)·식무변처(識無邊處)·무소유처(無所有處)라고 한다. 이를테면 색으로부터 출리하기를 희 구하는 자는 먼저 색과 구유하는 것일지라도 그 자체로서는 색에 의지하거나 소속되지 않는 법을 사유해야 하 는데, 그것이 바로 허공이다. 그래서 가행의 단계에서 허공을 사유하는 것으로, 그것이 성취될 때에는 상응하 는 바에 따라 그 밖의 다른 법을 소연으로 삼기도 하지만, 단지 가행에 따라 공무변처라고 하였다. 다음으로 6식신을,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이 사기(捨棄)된 무소유를 사유하는 가행을 닦음으로써 무소유처(혹은 最勝捨 라고도 이름함)의 무색정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41) 즉 이러한 경지의 선정은 그 상(想)이 아래 7지(地)처럼 분명하거나 뛰어나지 않기 때문에 '비상(非想 )'이라 한 것이며, 그럼에도 무상정(無想定)이나 멸진정(滅盡定)처럼 상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어둡고 저 열한 상은 존재하기 때문에 '비비상(非非想)'이다.
42) 온갖 선정의 상(想)이란 4정려와 아래 3무색정의 상을 말하는 것으로, 초·제2정려의 희상(喜想)은 병 과 같고, 제3정려의 낙상(樂想)은 화살과 같으며, 제4정려와 3무색정의 사상(捨想)은 부스럼과 같다. 또한 완 전한 무심의 상태인 무상천의 경우는 치암(癡暗)과 동일하다는 뜻.
43) 참고로 4무색정을 모두 '처'라고 말한 것은, 이는 바로 온갖 유정이 생장하는 처소이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네 처소는 거기에 있거나 있지 않은 유정에게 여러 가지의 업과 번뇌를 생장시키기 때문으로, 그러한 처소가 바로 열반이라고 하는 그릇된 생각을 깨트리기 위해 부처는 그곳이 유정을 생장시키는 처소라고 설하 였다.(『현종론』 권제38, 앞의 책, p.566)
44) 미등지(혹은 味定)란 애탐과 상응하는 등지로서, 전찰나의 청정한 선정(즉 다음의 淨등지)을 애탐하는 등지를 말한다.
45) 정등지(혹은 淨定)란 바로 선의 등지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은 미착(味著)의 대상이 되는 것이기 때문 에 미등지와는 다르며, 유루이기 때문에 무루등지와도 다르다.
46) 혹 어떤 이는 『시설론』에 따라 무색정과 근분정에도 지(支)를 설정하기도 하지만, 유부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데, 그것은 공덕이 적고 고도(苦道)에 포섭되기 때문이다.(『대비바사론』 권제80 한글대장경121, p.114) 중현에 의하면, 무색정은 어둡고 저열하며 지극히 적정(寂靜)한 것이어서 특별한 공덕 이 없기 때문에, 혹은 선정만이 수승하여 지관(止觀, 선정과 지혜)이 균등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색계의 근분정 중에는 오로지 지혜만이 증가하기 때문에 그것을 특별히 분별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현종론』 권제 38, 앞의 책, p.569) 그리고 여기서 '지'(支, anga, 支分·部分)는 정려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지(地 )의 정려로 능히 이끌기 때문에, 어떤 지의 정려를 능히 성취하기 때문에, 어떤 지의 정려를 도와 견고하고 뛰어나게 하기 때문에, 온갖 정려의 차이를 분별하기 때문에, '따른다[隨順]', '무거운 짐을 진다[負重擔]', '일을 성취한다[成大事]', '견고하고 뛰어나다[堅勝]', '분별(分別)'의 뜻이다.(『대비바사론』, 앞의 책, p.106)
47) 『잡아함경』 권제28 제784경(대정장2, p.203상), "何等爲正定? 謂住心不亂 堅固攝持, 寂止三昧一 心."
48) 보광에 의하면 이는 경부의 뜻에 의거한 논설이다. 즉 유부에서는 초정려를 비롯한 4정려에 모두 그것 의 본질인 정(定), 즉 등지(等持, samadhi)를 정려지의 하나로 포섭시키고 있다. 마치 왕과 백성이 비록 서로 의 바탕이 될지라도 왕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왕의 백성'이라고 하듯이 정려지 중에 등지가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그것은 정려의 부분적 성격[支]이자 그 자체의 본질[體]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삼마지 등 제심소의 개별적 실재성을 부정하는 경량부에서는, 마치 상(象)·마(馬)·거(車)·보(步)의 4군이 모여 4지군 (支軍)이라는 개념이 설정되는 것처럼 다섯 가지 부분적 내용(別, 즉 支)이 모여 전체(總, 즉 정려)가 이루어 지기 때문에 5지의 총체인 정려(즉 등지)는 가법(假法)이라고 주장하였으며, 논주 세친도 이에 따랐기 때문에 앞의 유부설을 '전설'이라 하여 불신의 뜻을 나타내었던 것이다. 이는 8지(支)의 근주율의(近住律儀)와 이비 시식계(離非時食戒)에 대한 논란과 같은 형식이다.(본론 권제14, p.66 주 61, 62 참조)
49) 내등정이란 뛰어난 믿음[信]을 말하는 것으로, 청정[澄淨]을 본질로 하며, 외적 대상에 조건받지 않고 그 자체로서 전후 동등하게 상속하기 때문에 '내등정'이다.(후술)
50) 여기서 '행사'는 사수(捨受, 즉 非苦非樂受)의 '사'가 아니라 심소의 사(捨)를 말한다.
51) 초정려와 제2정려의 '낙'이 경안락(輕安樂)으로 행온에 포섭되는 것이라면, 제3정려의 낙은 수락(受樂 )으로, 수온에 포섭된다.(후술)
52) 18정려지는 실제적으로 열한 가지이다. 정리하면 초정려의 심·사·희·낙·등지와, 제2정려의 내등정 (그 밖의 희·낙·등지는 앞의 그것과 동일함)과, 제3정려의 행사·염·혜·수락(그 밖에 등지는 앞의 그것과 동일함)과, 제4정려의 비고락수(그 밖의 행사·염·등지는 제3정려의 그것과 동일함)가 그것이다.
53) 제1구는 초정려의 지분이면서 제2정려의 지분이 아닌 경우, 제2구는 제2정려의 지분이면서 초정려의 지분이 아닌 경우, 제3구는 초정려의 지분이면서 제2정려의 지분인 경우, 제4구는 초정려의 지분도 아니며 제 2정려의 지분도 아닌 경우.
54) 앞의 두 정려에서 이미 낙(樂)을 성취하였는데, 제3정려에서 새로이 낙수를 증가시킨 것은 무슨 까닭 에서인가? 이는 바로 세 정려가 낙수가 동일하다면 정려지의 실제적 본질은 열한 가지가 아니라 열 가지가 되 어야 한다는 경부의 난문이다. 유부에 의하면 앞의 두 정려의 낙은 경안(輕安, 몸과 마음을 경쾌 안적하게 하 는 의식작용으로, 대선지법의 하나)의 낙이며, 제3정려의 낙이 수(受)를 본질로 하지만, 경량부에 의하는 한 앞의 세 정려의 낙은 모두 신수락(身受樂)이기 때문에 제3정려에서 낙이 증가하지 않는다. 이하 정려지에 관 한 유부와 경부의 대론이 전개된다.
55) 즉 초정려에는 비록 욕계의 온갖 악법을 떠나는 안(眼)·이(耳)·신식(身識)의 낙이 존재할지라도 심( 尋)과 사(伺)의 상(想)이 있어 마음을 능히 핍박하고 어지럽히기 때문에, 또한 제2정려는 비록 그러한 심·사 를 떠나는 낙은 존재할지라도 전5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신수(身受)의 낙도 심수(心受)의 낙도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이미 '희수'가 존재한다고 설한 이상 한 찰나의 마음 중에 두 가지 수(受)가 구행(俱行)할 수 없으므로 그 때의 낙은 낙수가 아니라 다만 경안락일 뿐이다.
56) 초정려는 5지를, 제2정려는 4지를 갖추고 있다고 이미 설하였기 때문에, '희'와 '낙'이 서로를 현전시 킨다고 할 경우, 초정려는 4지를, 제2정려는 3지를 갖추었다고 해야 한다.
57) 여기서 어떤 이는 경부사(칭우에 의하면 譬喩者 Darstantika). 즉 경량부에서는 앞의 두 정려의 '낙' 역시 낙수이며, 이는 제3정려의 수락(受樂)과 함께 심수가 아닌 신수의 낙이기 때문에 '두 가지 수는 한 찰나 에 함께 작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58) 『중아함경』 권제58 「법락비구니경」(대정장1p.789중), " 若樂更樂所觸生身受樂善覺, 是覺謂樂覺 也."
59) 중아함경』 권제42 「분별관법경」(대정장1p.695상중) ; 동 권제43 「의행경(意行經)」(p.700하), 復 次比丘! 離於喜欲捨, 無求遊, 正念正智而身覺樂. 謂聖所說, 聖所捨念樂, 住室得第三禪成就遊.
60) 초정려와 제2정려의 낙이 경안락이라고 한다면, 제4정려에는 훨씬 뛰어난 경안락이 존재해야 할 것임 에도 거기에 낙지(樂支)가 존재한다고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정려와 제2정려의 낙은 경안이 아니어야 한다 는 뜻.
61) 『잡아함경』 권제17 제482경(대정장2, p.123상), " 世尊, 若使聖弟子學遠離喜樂, 具足身作證, 得遠離 五法, 修滿五法?……云何修滿五法? 謂隨喜·歡喜·猗息(경안의 구역)·樂·一心."
62) 즉 뛰어난 선정에 의해 생겨난 이러한 경쾌 안적한 바람이 신식 상응의 낙수를 인기함으로써 도리어 의식상응의 삼마지를 능히 일으키기 때문에 그 같은 상태를 출정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63) 산심(散心)의 상태에서는 욕계의 신근에 의해 색계의 촉을 반연하여 신식을 일으킬 수 없지만, 선정 중에 나타나는 경쾌 안적한 바람의 감각[輕安風觸]을 연으로 하는 신식은 욕계의 신근에 의해 낳아질 수 있다 는 뜻.
64) 무루정 중에서는 일어난 경쾌 안적한 바람의 감각[風觸]과 이를 연으로 하는 신식은 마땅히 무루가 되 어야 하는데, 경부가 주장한 대로라면 경쾌 안적한 바람의 감각은 유루이지만 신식상응의 낙은 무루일 것이므 로 무루정에 유루와 무루가 혼재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65) 본론 권제4(p.165) 주24) 참조. 즉 신식상응의 경안은 선정 중에서 무루인 의식상응의 경안(즉 심경안 )을 인기하기 때문에 역시 무루의 각지에 포섭된다.
66) 사실상 신경안은 그 자체로서는 각지가 아니지만 각지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각지'라고 이름한 것 일 뿐이라고 한다면, 경쾌 안적한 바람의 감각과 신식도 역시 무루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무루'라고 이름 해야 하기 때문에, 일부는 유루이고 일부는 무루일지라도 거기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다는 뜻. '신경안은 각지 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각지라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의 경증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4 주25) 참조.
67) 이를테면 『잡아함경』 권제8 제229경(대정장2, p.56상), " 云何有漏法? 謂眼色眼識眼觸眼觸因緣生受, 內覺若苦若樂若不苦不樂. 耳鼻舌身意法意識意觸意觸因緣生受 內覺若苦若樂若不苦不樂. 世俗者 是名有漏法."
68) 경안풍이 사실상 유루이지만 무루에 따르기 때문에 무루라고 말할 뿐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무루의 정 려에 유루(신수락, 즉 樂支)와 무루[喜支]가 혼재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힐난.
69) 경량부에서도 초정려에 '심'과 '사'가 존재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구기하는 것이 아니라 1찰나의 전 후 상속으로 존재하듯이 '희'와 '낙'의 경우도 그러하다.
70) 심(尋)과 사(伺)의 구기설에 대한 경량부의 비판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4 주81)을 참조 바람.
71) 즉 경량부에서는 초정려에 심·사·희·낙·등지의 5지를 설정하고, 제2정려에는 '심'과 '사'를 배제 한 희·낙·등지의 3지를, 제3정려에는 다시 '희'를 배제한 낙·등지의 2지를, 그리고 제4정려에는 다시 '낙' 을 배제한 등지 1지만을 설정한다. 따라서 정려지의 실제적 본질은 열한 가지가 아니라 다만 여덟 가지일 뿐 이다. 그리고 모든 정려에는 물론 상(想) 등의 심소가 수반되지만, 이는 점차 감소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정 려지로 설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72) 경량부에 의하는 한, 초정려에 5지를 설정한 것은, 온갖 정려지의 계기(繼起)와 상지에서의 그것의 순 차적인 감소를 고려할 때 '등지' 자체인 제4정려에 이르기 위한 전제로도 볼 수 있다.
73) 이 문장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만약 이 논설의 설자를 경부사로 해석할 경우 '어떤 부 류'는 유부 비바사사(毘婆沙師)가 되어 그들이 설한 초정려에 5지 설정의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 될 것이며, 유부의 논사라면 '어떤 부류'는 경부가 되어 그들의 주장을 부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보광은 전자의 경우를 먼저 해석하고 있는데, 다음의 논설에서 경부설에서 배제된 '내등정'에 대해 설하고 있기 때문에 본 번역도 이에 따른다.
74) 이는 경부의 답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경량부에서는 제2정려는 희·낙·등지만을 그 지분으로 삼는 다고 하였는데, 그럴 경우 유부가 제시한 '내등정'이란 무엇인가? 곧 경량부에 있어 내등정이란 후설하는 바 와 같이 '신(信)'이라는 개별적 실체에 근거한 법이 아니라 다만 상속전변하는 마음의 청정한 한 상태를 가설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75) 즉 유부에 의하는 한 내등정(adhyatma samprasada)이란 제2정려의 실제적 특징[支]의 하나로서, 초정 려의 동요(심·사)를 떠나 제2정려를 증득하면 정려지의 염오함도 역시 떠날 수 있게 되어 깊은 신(信, sraddha)의 심소가 생겨나는데, 그 때 그것은 청정[澄淨]을 특질로 하며, 외적 대상에 조건받지 않고 그 자체 로서 전후 동등하게 상속[等流]하기 때문에 '내등정'이라고 한다.
76) 이는 본송 제4구에 관한 해석으로, 『현종론』 권제38(한글대장경201, p.579)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설 을 전하고 있다. 유여사는 설하기를, "희는 수온의 희수가 아니다. 즉 세 정려 중의 낙(樂)이 바로 희수이기 때문에 희는 바로 행온의 심소법에 포섭되는 것으로, 희와 희수는 그것의 본질이 각기 다르다"고 하였다.
77) 이는 초정려에서 우근을, 제2정려에서 고근을, 제3정려에서 희근을, 제4정려에서 낙근을 남김없이 멸 하여 점차로 5근을 멸한다는 뜻으로, 경에서 이미 제2정려에만 희근이 있고, 제3정려에만 낙근이 있다고 설하 여 이 두 가지를 따로이 설하였기 때문에 낙이 바로 희수가 아니라는 뜻.
78) 『중아함경』 권제1 「성유경(城喩經)」(대정장1, p.424상) ; 같은 경 권제42 「분별관법경(分別觀法 經)」(동 p.695하)에서 "성제자(비구)가 낙(樂)을 멸하고, 고(苦)를 멸하면 희(喜)와 우(憂)는 이미 멸해져 불고불락과 사(捨)와 염(念)청정의 제4선을 성취하여 거기에 노닐게 된다"고 하였다. 이는 제3정려의 염오를 떠날 때 낙을 끊고, 제2정려의 염오를 떠날 때 희가, 욕계를 떠날 때 우가 몰하게 된다는 뜻으로, '낙을 끊을 때 희는 이미 몰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제3정려의 낙은 희가 아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79) 모두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모두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즉 존재하기는 하지만 일체의 지분이 모두 갖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80) 염오의 정려, 즉 미(味)정려에는 진실의 정려지(支)는 없다. 예컨대 염오한 초정려의 경우 희·낙은 없지만 염오함을 특징[相]으로 하는 심·사·등지의 세 갈래가 있기 때문에 '상(相)에 따라 설한다'고 한 것 이다.
81) 비록 염오정려 역시 희와 상응하지만, 그러한 희는 이생(離生)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려지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다. 즉 초정려에 포섭되는 희와 낙은 오로지 욕계뿐만 아니라 자지의 염오를 떠날 때 생겨 나는 것이기 때문에 첫 번째 염오의 정려지에는 오로지 심·사·등지만이 존재할 뿐이다.
82) 비록 세간에서 염오한 믿음[染信]이 있다고 설할지라도 그것은 불신(不信)에 포섭되기 때문에 정려지 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며, 아울러 첫 번째 염오정려에는 희가 없으면서 제2 염오정려에 있는 것은, 앞의 정려 는 이생(離生)에 따라 설한 것이지만, 제2 염오정려 중에는 '이생'이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 서 제2 염오정려지는 희와 등지이다.(『현종론』 앞의 책, p.581)
83) 비록 염오의 선정 중에도 '염'과 '혜'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실념(失念)과 부정혜(不正慧)라는 명 칭으로 일컬어지기 때문에, 그리고 행사(行捨)는 다만 대선지법(大善地法)에 포섭되기 때문에(본송에서 언급 하지 않은 것은 제4 염오정려의 경우에서와 동일하기 때문임) 제3 염오정려지에는 수락(受樂)과 등지만이 존 재할 뿐이다.
84) 즉 자지의 번뇌로 인해 더럽혀진 선정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행사청정과 염청정이 존재하지 않으며, 다 만 비고락수와 등지만이 존재할 뿐이다.
85) 즉 경안과 '사'는 대선지법에 포섭되기 때문에 염오정려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 밖의 희(喜)·신(信 )·염(念)·혜(慧)는 모두 염오법과 통하기 때문에 염오정려지에 포섭될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첫 번째 염오정려에는 4지, 제2에는 3지, 제3에는 4지, 제4에는 3지가 존재한다.
86) 『중아함경』 권제50 「가루오타이경(加樓烏陀夷經)」(대정장1, p.743중). " 욕계를 떠나고 악과 불선 을 떠났으나 심(尋, 혹은 覺)·사(伺, 혹은 觀)가 있어 이생(離生)의 희·낙을 즐기는 초선을 '이동(移動)'이 라 하니, 그것은 심·사 때문이다. 심·사가 종식되어 내적으로 청정한 한마음이 되어 정생(定生)의 희·낙을 즐기는 제2선을 '이동'이라 하니, 그것은 '희'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기뻐하고자 하는 것[喜欲]을 떠나 사(捨 )에 노닐며 정념(正念)·정지(正智)의 신수락(身受樂)의 제3선을 '이동'이라 하니, 마음으로 즐거워하기 때문 이다. 낙(樂)과 고(苦)가 멸하고, 희(喜)·우(憂)가 이미 멸하여 불고불락과 사(捨)와 염(念)이 청정하여 획 득하는 제4선을 '이동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역자 초역)"
87) 앞에서 언급한 대로 초·제2정려에는 희수(낙은 경안락이므로 수가 아님)가, 제3정려에는 낙수가, 제4 정려에는 사수가 존재한다.
88) 즉 안 등의 5식은 항상 심·사와 상응하여 일어나는데, 제2정려 이상에는 5식이 존재하지 않아 신수( 身受)의 낙이 없으며, 마음의 기쁨은 거칠어 심수(心受)의 낙이 없기 때문으로, 그것은 다만 '희'라고 이름할 수 있을 뿐이다.
89) 즉 초정려의 마음을 빌려서 안식 등을 일으키는 것으로, 이를 차기식(借起識)이라고 한다.
90) 정(淨)등지에는 순퇴분정(順退分定, 번뇌에 수순하는 선정)·순주분정(順住分定, 定住에 수순하는 선 정)·순승진분정(順勝進分定, 상지에 수순하는 선정)·순결택분정(順決擇分定, 무루정에 수순하는 선정) 등의 네 가지 종류가 있는데(후술), 이 중에 순주분을 제외한 세 가지의 일부를 획득하는 경우에는 '획득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91) 가행에 의해서는 순결택분과 순승진분을 획득한다(순주분과 순퇴분은 앞서 이미 획득하였기 때문임). 즉 일찍이 욕계 9품의 혹을 떠나 초정려 근본정의 순주분과 순퇴분을 획득한 이가 그 후 가행을 일으켜 초정 려 근본정의 순승진분과 순결택분을 획득하는 경우, 다시 말해 일찍이 초정려의 근본정을 성취하고서 다시 그 일부를 획득하게 되는 경우 이러한 네 가지 분은 동일한 하나의 정(淨)등지이기 때문에 '획득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아가 자지의 이염(離染)에서 물러남으로써 순퇴분을 획득하는 경우에도 일찍이 순주분·승진분 혹 은 결택분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획득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92) 즉 물러남에 의해 정(淨)등지를 획득하고, 물러남에 의해 버리며, 생을 받음에 의해 정등지를 획득하 고, 생을 받음에 의해 버리는 경우가 있는가 하는 것도 역시 물어볼 수 있다는 뜻.
93) '전부를 성취하지 않은 경우'란 일찍이 이미 성취한 자가 그 후 다시 일부를 획득하는 경우를 말한다.(전술)
94) 예컨대 일찍이 무루의 제4정려를 성취한 자가 그 후 가행을 일으켜 제4정려의 무루의 잡수정려를 획득 하는 경우나 사법(思法)의 종성이 물러나 퇴법(退法)의 무루도를 획득하는 경우 역시 일찍이 성취하고 나서 다시 그 일부를 획득하는 경우이다.
95) 일반적으로 초월증자는 정성이생(견도위)에 들 때 무루의 근본정에 들지만, 차제증자는 획득하지 못하 기 때문에 여기서 언급하지 않았다는 뜻.
96) 본 송은 무루·정·염등지의 상생(相生) 관계를 설한 것으로, 앞의 2구는 무루등지로부터 정(유루선) ·무루등지(무루선)가 생겨날 가능성에 대해, 뒤의 2구는 정등지로부터 무루와 정·염등지가 생겨날 가능성에 대해 밝힌 것이다.
97) 앞의 2구는 염등지로부터 정·염등지가 생겨날 가능성에 대해, 뒤의 2구는 생(生)정려의 정·염등지로 부터 다시 그러한 등지가 생겨날 가능성에 대해 밝힌 것이다.
98) 즉 염등지에 대응하여 '선'이라 말한 것으로, 그것은 완전히 다른 성질이기 때문에 필시 낳지 않는 것 이다.
99) 예컨대 무루의 제4정려는 무간에 자지와 위로는 식무변처정까지의 선(善)등지만을 낳고 무소유처정의 그것을 낳지 못하며, 아래로는 제2정려까지의 선등지만을 낳을 뿐 초정려의 그것을 낳지 못한다.
100) 자지의 정·무루등지 두 가지와 아래 두 지의 정·무루등지 네 가지.
101) 자지의 무루·정등지 두 가지와 상 2지의 무루·정등지 네 가지.
102) 자·하지의 여섯 가지란 자지의 두 가지와 하 2지의 네 가지를 말하며, 상지의 세 가지란 무소유처의 정·무루 두 가지와 유정처의 정(淨)등지 한 가지를 말한다.
103) 제3·제4정려와 공무변처는 각기 상 2지의 네 가지와 하 2지의 네 가지, 그리고 자지의 두 가지 등지 를 무간에 낳을 가능성이 있다.
104) 정려는 상·하지를 소연으로 하며, 정려에 의해 생겨나기 때문에, 정려에 의해 생겨난 법지와 유지도 정·무루의 무색등지를 낳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법지는 욕계신과 욕계 고(苦) 등을 소의·연으로 할 뿐더러 중간에 색계의 4정려로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무색등지를 낳을 수 없으며, 단지 유지만이 그것을 낳을 수 있 다.
105) 정등지 중의 순결택분은 무루와 접해 있고, 순퇴분은 염(染)과 접해 있기 때문에, 정등지는 무간에 염등지를 일으킬 수 있다. 즉 정등지 중의 순퇴분이 일어나면, 이와 무간에 탐번뇌가 일어나 전찰나의 정등지 를 애미(愛味)하게 되는 것이다.
106) 이상은 앞의 무루등지의 그것에 자지의 염등지를 더한 것이다. 이를테면 초정려의 경우, 자지의 정· 무루·염등지와 상 2지(제2·제3정려)의 정·무루등지를 낳을 수 있다.
107) 그러나 그럴 경우 하지의 정등지는 염등지가 아니라 정등지로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올바로 요지하는 것은 바로 정등지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108) 어떤 경지에 태어남으로서 획득하는 정려를 생(生)정려라고 하는데, 그곳에 태어나 획득한 정등지와 염등지를 생정(生淨)·생염(生染)이라 한다. 그리고 생정은 생득선(生得善)이며, 생염은 그러한 경지의 산란 한 마음의 번뇌이다.
109) 이러한 순퇴분정과 무간에 자지의 염오한 미등지가 일어나 전찰나의 순퇴분정을 소연으로 하여 미착( 味著)한다.
110) 예를 들면 미지정으로서 욕계 9품의 혹을 끊고 나면, 상지(즉 초정려 근본정)의 순주분정에 따르게 된다.
111) 순승진분으로부터 물러나는 자는 순주분을 아직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은 낳을 수 있지만, 이를 초월하는 순퇴분은 낳을 수 없다.
112) 주99) 참조.
113) 이를테면 먼저 초정려를 일으키고, 이와 무간에 제2정려 내지 유정처를 일으키는 것을 '순'이라 하고 , 먼저 유정처정을 일으키고, 이와 무간에 무소유처 내지 초정려를 일으키는 것을 '역'이라 한다. 또한 예컨 대 유루의 초정려와 무간에 유루의 제2정려 내지 제4정려를 일으킬 경우, 다 같이 유루로서 동등하기 때문에 '균'이라고 하며, 유루의 초정려와 무간에 무루의 제2정려를 일으키고, 이와 무간에 유루의 제3정려를 일으킬 때를 '간'이라고 한다. 그리고 제2정려와 무간에 초정려를 일으키고 또한 제3정려를 일으키는 경우, 초정려와 제3정려는 서로 인접하여 차례로 일어나기 때문에 '차'라고 하였으며, 초정려와 무간에 제2정려를 초월하여 제3정려를 일으키는 것을 '초'라고 하였다. 이상의 순·역·균·간·차·초의 과정에 대해서는 『대비바사론 』 권제165(한글대장경124, p.348-349)를 참조할 것.
114) 불시해탈의 아라한 중 무쟁(無諍)과 미묘한 원지(願智) 등의 변제정(邊際定)을 획득한 자만이 능히 등지를 초월할 수 있다.
115) 이는 유루정에 국한된 논설로서, 하지의 유루정은 지(地)를 초월할 때 이미 버려졌기 때문이다.
116) 아래 8지의 번뇌는 유루·무루도에 의해 끊어질 수 있지만, 유정지의 번뇌는 유루도로써 끊어지지 않 는다. 그렇지만 유정지에는 무루도가 없기 때문에 유정지의 나머지 번뇌를 끊기 위해서는 어쨌든 하지(가장 인접한 하지는 무소유처임)의 무루도가 필요하며, 그래서 유정지의 성자는 하지의 무루도를 일으키게 되는 것 이다.
117) 미등지는 애미(愛味)의 행상을 일으키는 등지로서, 만약 무루를 소연으로 삼았다면 그것은 더 이상 미등지라고 할 수 없다.
118) 하지의 법은 적정하지 않기 때문으로, 근본정으로서 선의 무색정은 지극히 적정하기 때문이다.
119) 욕계의 고법지 등에 의해 대치되는 번뇌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120) 하지의 유루법을 소연으로 삼지 않는다면, 그것의 택멸·비택멸을 소연으로 삼는 일도 없어야 한다.
121) 이를테면 초정려의 근분은 욕계의 번뇌를 끊으며, 내지 유정처의 근분정에 의해 무소유처의 번뇌를 끊게 된다.
122) 본권 주129) 참조.
123) 제1구는 앞의 세 가지 물음에 대한 대답이며, 제2구의 앞부분은 미지정을 언급한 것이고, 뒷부분은 이설이다. 원문에서는 '혹(惑)'이라 되어 있으나 장행에 따라 '혹(或)은'으로 번역하였다.
124) 근분정은 지(止)·관(觀)이 균등하지 않으며, '관'만이 수승하여 어렵게 노력하여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희·낙수와는 상응하지 않는다.
125) 초 근분정은 미지정(未至定)으로, 아직 욕계를 떠나지 않은 자는 근분정에 의해 성도를 일으키기 때 문에 무루등지와 통하는 것이다.
126) 즉 위의 일곱 근분정은 자지의 법에 대해 싫어하거나 등지는 일[厭背]이 없기 때문에 무루등지가 아 니지만, 첫 번째 근분정(즉 미지정)은 많은 재환(災患)의 욕계와 지극히 인접하여 자지의 법을 싫어하고 등지 는 것이기 때문에 무루등지와 통하는 것이다.
127) 즉 『바사(婆沙)』에서 모든 근분지에 결생(結生)의 마음이 있다고 설하였으므로, 근분정에도 염오한 마음이 존재하며 따라서 미(味)등지와 상응한다고 해야 하겠지만, 지금 여기에서는 다만 정(定)등지의 염오함 [定染]만을 비판하고 있을 뿐, 생(生)등지의 염오함[生染]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루등지와 통한다 고 설하였다는 뜻.
128) 미지정, 즉 첫 번째 근분정은 선행하는 선정에 편승하여 일어난 것도 아니며, 또한 이것에 머물고 나 서 (전찰나 선정에 대해) 애미(愛味)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미지(未至)'라는 명칭을 설정하게 되었 다. 혹은 비바사사에 의하면, 아직 근본정의 경지[本地]에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미지'라는 명칭을 설정한 것 으로, 이는 바로 근본정의 공덕이 아직 현전하지 않았다는 뜻이다.(『현종론』 권제39, 앞의 책, p.602)
129) 초정려보다는 뛰어나지만 제2정려에는 미치지 못하는 단계인 중간정려는 초과(初果)이기 때문에 하지 의 염오를 떠나는 것도 아니며, 근본정에 들어가는 첫 번째 원인도 아니다. 즉 중간정려는 초정려에 포섭되는 것이면서도 심(尋)이 감소되어 초정려보다 상지로 설정된 것이기 때문에 '중간'이다. 따라서 근분정과는 다른 것이다.
130) 중간정(초정려와 제2정려의 중간)은 대범천의 뛰어난 과보를 획득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후술) 이 러한 뛰어난 공덕을 대상으로 하여 애미의 마음을 낳게 된다.
131) 여기에는 안·이·비의 세 가지 식신(識身)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132) 이미 초정려의 단계를 떠난 것이기 때문으로, 그렇다고 초정려에 대한 애미를 떠난 것은 아니다.
133) 본론 권제25(p.1151) 주67) 참조. 참고로 애써 노력하여 일어나는 것은 '고통행'이라고 이름하지 '고 수'라고 하지 않는다.
134) 등지(等持, samadhi)란 마음을 평등[等]하게 유지[持]하여 한 대상에 전념하는 것으로, 이 역시 등지 (等至)와 마찬가지로 선정[定]의 뜻이다. 그러나 양자 사이에는 광·협의 차별이 있다. 즉 등지(等至, samapatti)는 오로지 선정심에 한정될 뿐 욕계 산심(散心)과는 통하지 않지만, 일체의 마음과 두루 함께 일어 나는 대지법(大地法)의 하나인 등지(等持)의 경우 욕계 선정심과 산심 모두에 통하기 때문에 전자보다 그 범 주가 넓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오로지 유심정(有心定)에만 해당하고 무심정(無心定)에는 해당하지 않 지만, 전자는 유·무심정 모두와 통하기 때문에 이 점에서 본다면 전자의 범주가 넓다고 할 수 있다.
135) 『중아함경』 권제17 「장수왕본기경(長壽王本記經)」(대정장1, p.538하), " 我當修學三定, 修學有觀 有覺(즉 有尋有伺)定, 修學無觀少覺定, 修學無覺無觀定……."
136) 『증일아함경』 권제16 제10경(대정장2, p.630중). "공(空)·무상(無想)·무원(無願)의 세 가지 삼매 가 있으니, 공삼매는 일체 제법을 모두 공허(空虛)한 것으로 관하는 것이며, 무상삼매는 일체 제법에 대해 어 떠한 상념(想念)도 없으며, 또한 역시 [상이 없어] 볼 수도 없다고 관하는 것이며, 무원삼매는 일체 제법에 대해 원하지도 희구하지도 않고서 관하는 것이다."(역자 초역) 즉 공삼매는 아와 아소가 공하다고 관하는 것 이며, 무상(혹은 無相)삼매는 공하기 때문에 차별의 상이 없다고 관하는 것이며, 무원삼매는 차별의 상이 없 기 때문에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다고 관하는 것을 말한다.
137) 즉 공의 등지는 유신견(有身見)의 두 가지 행상(아와 아소)을 직접적으로 대치하는 것으로, 아소견은 '공'의 행상에 의해, 아견은 '비아'의 행상에 의해 대치된다.(『대비바사론』 권제104, 한글대장경122, p.86 참조)
138) 색 등의 다섯 가지란 색·성·향·미·촉, 세 가지 유위상이란 유위4상 중 주상(住相)을 제외한 생· 주·멸의 세 가지로, 바로 이러한 열 가지 상을 여읜 것을 열반 즉 '멸'이라고 한다. 혹은 원인을 '상'이라 한 것으로, 유위제법은 인(因)과 연(緣)에 의해 조작된 제약적 존재이지만, 열반 즉 무위택멸은 인과 연에 의 해 제약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무상'이라고 이름하였다. 혹은 상·중·하품의 세간 온[世蘊]을 '상'이라고 하기도 하니, 열반은 이와 다르기 때문에 '무상'이라고 이름한 것이다.(『현종론』 권제39, 앞의 책, p.605)
139) 여기서 열 가지 행상이란 말하자면 고제의 고(苦)·비상(非常)의 두 행상과 집제의 인(因)·집(集)· 생(生)·연(緣)과 도제의 도(道)·여(如)·행 (行)·출(出)이 바로 그것이다.
140) 성도는 열반을 획득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피안에 이를 때 뗏목을 버리듯이 열반에 이르게 되면 반드시 버려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소연으로 하는 삼매는 무원이다.
141) 즉 현재 대관(對觀)되는 고제의 무상·고와 집·도제의 행상은 싫어할 만한 것이고, 또한 방편이기 때문에 그것을 원하여 희구하지 않고 초월하여야 비로소 열반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그것들은 모두 무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142) 세간 즉 세속에 포섭되는 등지는 정등지이고, 출세간에 포섭되는 등지는 무루등지이다.
143) 열한 가지 지란 욕계정·미지정·4근본정려·중간정·4무색정 등의 일체 유루지를 말하고, 아홉 지란 앞의 열한 가지 지에서 욕계와 무색정 중 유정처를 제외한 그것의 무루지를 말한다.
144) 중(重)삼마지는 불시해탈의 아라한이 무학의 3해탈문을 소연으로 하여 일으킨 등지로서, '공공'은 앞 에서 닦은 공 삼마지를 공이라고 사유하는 등지이다.(후술) 마치 죽은 시체를 불태울 때 막대기로써 그것을 뒤집다가 시체를 다 태우고 나서 막대기도 역시 태워 버려야 하는 것처럼, 공에 의해 번뇌를 태워 버리고 나 서는 다시 공의 선정[空定]을 일으켜 앞의 공을 싫어하고 버려야 하는 것이다.
145) '5온은 비아이다'고 관찰하는 것보다 '5온은 공이다'고 관찰하는 쪽이 싫어하는 힘이 수승하기 때문 에 공삼매에 두 가지 행상(공과 비아)이 갖추어져 있을지라도 중(重)삼마지에서는 '공'이라고만 이름하고, ' 비아'라고는 설하지 않은 것이다.
146) 먼저 무학의 등지를 일으켜 '5취온은 비상이다'고 사유한 뒤 그 후 다시 수승한 선근과 상응하는 등 지를 일으켜 앞의 무학의 무원삼마지를 연으로 하여 비상의 행상을 사유하는 것으로, 그 같은 무원삼마지를 원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무원무원'이라 이름한 것이다.
147) 무원삼마지에는 열 가지 행상이 있는데, 무원무원삼마지에서는 어째서 '비상(非常)'만을 소연으로 삼 는 것인가? 이것만이 능히 '성도를 싫어하는 것[厭道]'을 소연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고(苦)의 행상 과 집제의 네 행상은 능히 성도를 소연으로 삼을 수 없으니, 성도는 괴로움이 아니라 괴로움의 소멸(즉 열반) 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며, 성도는 괴로움을 상속하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도제의 네 행상은 성도를 기쁘게 행할 만한 것[欣行]으로, 싫어하여 버려야 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현종론』 권제39, p.608 참조) 그러나 본론에서는 그 반대로 피안(열반)에 이른 후 싫어하여 버려야 하기 때문에 무원삼마지를 원하지 않는 등지의 행상이 되지 않는다고 설하고 있다.
148) 이것은 어째서 앞에서 언급한 무상삼마지를 소연으로 삼지 않는가 하면, 무상(無相)은 열 가지 상(색 등의 5경·남·여·3유위상)이 없는 것이지만, 무상무상삼마지는 유위법으로 세 가지 유위상을 갖기 때문이다 . 또한 어째서 무학의 무상삼마지의 비택멸을 소연으로 삼는 것인가? 무학의 무상삼마지로부터 나온 직후에 유루의 찰나나 또 다른 무루의 찰나가 일어나 무학의 무상의 찰나는 연결불생(緣缺不生)의 비택멸을 획득하게 되기 때문인데, 바로 이러한 무상의 비택멸을 정(靜)이라고 사유하여 무상무상삼마지를 일으키는 것이다. 또 한 무상삼마지는 멸제의 네 행상(滅·靜·妙·離)을 소연으로 하는데, 이것은 어째서 '정(靜)'만을 소연으로 삼는가 하면 오로지 이것만이 능히 비택멸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묘(妙)'의 행상을 취하지 않는 것 은 그 경계(즉 비택멸)가 무기성이기 때문이며, '이(離)'의 행상을 취하지 않는 것은 비록 그 같은 비택멸을 증득하였을지라도 오히려 계박이 따르기 때문이며(비택멸의 증득은 이계과가 아니기 때문이며), '멸'행상을 취하지 않는 것은 비택멸은 일체의 괴로움으로부터 영원히 해탈한 것이 아니기 때문으로, 만약 '멸'의 상을 관찰하는 경우 비상(非常)과 혼동되기 때문이다('멸'이라는 말은 無常滅과 비택멸에 통하는 것으로, 만약 '멸 '행상을 취할 경우 무상멸과 혼동되기 때문에 멸행상을 취하지 않고 '정'행상을 취한 것임). 그러나 '정'은 오로지 지식(止息)만을 나타내기 때문에 비택멸의 득(得)은 '정'의 상을 갖는 것이다. 즉 성도를 닦아 오랫동 안 힘써 노력함으로써 그러한 지식 중에 즐거운 생각[樂想]을 낳기 때문에 무상무상삼마지는 '정'의 행상만을 취하고 그 밖의 다른 행상은 취하지 않는 것이다.(『현종론』 앞의 책, p.608∼609 참조)
149) 공삼마지[空]를 공으로, 무원삼마지[非常]를 무원으로, 무상삼마지[靜]를 무상으로 관하는 이러한 세 등지는 무루의 성도를 싫어하는 것이므로 유루이다. 만약 그것이 무루라면 무루법을 싫어하는 일이 없을 것이 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위 비택멸을 소연으로 하여 '정'의 행상을 취하는 무상무상삼마지가 어떻게 성도를 싫 어하는 것인가 하면, 이것은 무학의 무상등지가 일어나지 않는 것(즉 비택멸)을 바라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 다시 말해 무상삼마지의 비택멸을 바라는 것은 바로 무루의 무상삼마지를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루이다 .
150) 북구로주에는 성도가 없기 때문에, 유학의 성자는 다만 성도에 대해 기뻐할 뿐이기 때문에, 시해탈( 時解脫)의 아라한은 성도에 대해 애착하기 때문에 중첩의 삼마지를 일으킬 수 없다.
151) 위의 7근분정에는 뛰어난 공덕이 없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중첩의 삼마지는 만약 욕계정에 머물고 있을 때라면 미지정에 포섭되는 성도로부터 그 뒤에 일어나고, 유정처에 머물고 있을 때에는 무소유처에 포섭 되는 성도가 생겨난 이후에 일어나며, 그 밖의 선정에 머물고 있을 경우에는 자지의 성도가 생겨난 이후 일어 난다.
152) 『대집법문경(大集法門經)』 권상(대정장1, p.229), "다시 부처님께서 설하신 네 가지 삼마지의 상( 想)이 있으니, 견법(見法)에 의해 낙행(樂行)을 획득함이 있어 일어나는 삼마지의 상과, 지견(知見)이 있어 일어나는 삼마지의 상과, 혜(慧)의 분별이 있어 일어나는 삼마지의 상과, 몸으로 누진(漏盡)을 획득함이 있어 일어나는 삼마지의 상이 바로 그것이다."
153) 여기서 계경이란 "이와 같이 필추들이여, 여기에 머물면서 먼저 이생희락(離生喜樂)을 받고, 그 뒤에 범중천에 태어나 즐거움을 받으니, 그것은 여기서의 즐거움과 동일하다"고 설한 것을 말한다.(『현종론』, 앞 의 책, p.614) 참고로 구역인 『구사석론』 권제21(대정장29, p.301하, 13-14행)에서의 본송 전반의 제1·제2 구는 '有別修四定 淨初爲現樂'으로 되어 있고, 장행의 해석에서도 '초정(初定)의 선한 성질의 종류는 청정(淸 淨, 淨의 구역어)과 무류(無流, 무루의 구역어)로서, 이러한 삼마제(三摩提)는 반드시 현세의 안락주(安樂住) 를 능히 획득한다. 초정이 이미 그러하였으니, 그 밖의 선정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고 논 설하고 있다.
154) 여기서 '수승한 지견'이란 청정한 안식과 상응하는 혜(慧)를 말한다. 즉 『법온족론』 권제8(한글대 장경115, p.580)에서 4수(修)를 설하면서 "청정한 안식과 상응하는 혜를 설하여 '지(智)'라고 하고, '견(見)' 이라고 하는데, 이를테면 천안(天眼)의 안식과 상응하는 뛰어난 혜로서 그것의 온갖 색을 영납·관찰하는 것 을 일컬어 이것의 '수승한 지견'이라고 한다"고 말하고 있다.
155) '분별의 혜'란 제법의 성상(性相)을 분별하는 유루·무루의 혜를 말한다. 즉 욕계로부터 유정지에 이 르기까지 모든 문(聞)·사(思)·수소성(修所成)의 선법과 그 밖의 일체의 무루의 유위 선법을 모두 일컬어 ' 가행의 선법'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선법을 닦으면 능히 혜를 낳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가행'이라고 하는 말은 생득(生得)과 차별되는 말로서, 생득의 선법을 수습하여서는 일찍이 획득한 일이 없는 지혜를 획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56) 금강유정이란 유정지(有頂地)의 혹을 끊는 제9 무간도의 선정을 말하는 것으로, 일체의 번뇌를 끊는 작용이 금강과 유사하기 때문에 '금강유정'이라 이름한 것이다.(본론 권제24, p.1101 주58 참조)
157) 금강유정은 미지·중간·4근본·아래 세 무색정에 의해 일어나지만, 부처의 경우 제4정려에서 금강유 정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계경에서는 다만 '제4정려에 의지하여 일어난다'고 설하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는 비바사사(毘婆沙師)가 전하는 바로서, 논주 세친은 이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전설'로 언급한 것이다. ▲ 위로
[출처: 동국역경원]
분별정품 파집아품구사론
[제29권] 8. 분별정품(分別定品) ② 9. 파집아품(破執我品) ①
존자 세친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권오민 국역
▒ 목 차 ▒
Ⅱ. 선정에 의해 일어나는 공덕
1. 4무량(無量)
(1) 4무량의 가행과 성만(成滿)
2. 8해탈(解脫)
3. 8승처(勝處)
4. 10변처(遍處)
5. 해탈 등의 세 공덕의 득과 소의신
6. 선정을 일으키는 인연
Ⅲ. 전(前) 8품(品)의 총결
1. 정법(正法)의 본질과 세간에 머무는 기간
2. 본론을 짓게 된 취지
3. 탄식과 권학(勸學)의 유통게(流通偈)
■ 각 주
제9편 파집아품(破執我品)
Ⅰ. 유아론 비판 총론
Ⅱ. 독자부의 비즉비리온아(非卽非離蘊我) 비판
1. 이증(理證)에 의한 비판
1) 가실(假實)에 근거한 비판
(1) 불(能燒)과 땔감(所燒)의 관계에 대한 논쟁
2) 독자부의 5법장설(法藏說)에 근거한 비판
3) 보특가라의 '근거[所託]'에 따른 비판
4) 6식(識)의 대상으로서의 보특가라 비판
2. 경증(經證)에 의한 비판
3. 독자부의 논란에 대한 해명과 비판
1) '나는 과거세에 ……였다'는 경증
(1) 일체지자(一切智者)의 의미
Ⅱ. 선정에 의해 일어나는 공덕
1. 4무량(無量) ▲ 위로
이와 같이 지(智)의 소의지가 되는 선정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마땅히 이 같은 선정에 의해 일어나는 공덕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온갖 공덕 가운데 먼저 무량(無量, apramana)에 대해 분별하리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량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진(瞋) 따위를 대치하기 때문으로
자(慈)와 비(悲)의 자성은 무진이며
희(喜)는 희, 사(捨)는 무탐이다.
無量有四種 對治瞋等故
慈悲無瞋性 喜喜捨無貪
이러한 무량의 행상은 순서대로
즐거움을 주는 것과 괴로움을 없애는 것과
기뻐함과 유정의 평등함이니
욕계의 유정을 소연으로 한다.
此行相如次 與樂及拔苦
欣慰有情等 緣欲界有情
희무량은 초·제2정려에 의해 일어나며
그 밖의 무량은 6지, 혹은 5지·10지에 의해서인데
능히 온갖 번뇌를 끊을 수 없으며
인취가 일으키고, 결정코 세 가지를 성취한다.
喜初二靜慮 餘六或五十
不能斷諸惑 人起定成三
논하여 말하겠다. 무량(無量)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자(慈, maitr )이며, 둘째는 비(悲, karuna)이며, 셋째는 희(喜, mudita)이며, 넷째는 사(捨, apeksa)이다.
'무량'이라고 말한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유정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며,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복을 인기하기 때문이며,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과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오로지 이 같은 네 가지 종류만 있는 것인가?
다수의 작용[多行]을 갖는 네 가지 종류의 장애를 대치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네 가지 장애라고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온갖 진(瞋)과 해(害)와 기뻐하지 않음[不欣慰]과 욕계의 탐(貪)·진(瞋)을 말하니, 이것을 대치하기 위해 순서대로 '자' 등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1)
부정관(不淨觀)과 사(捨)가 다 같이 욕계의 탐을 대치하는데, 여기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 것인가?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설하기를, "욕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색(즉 현색과 형색)탐이고, 둘째는 음탐(貪)인데, 부정관과 '사'는 순서대로 능히 대치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치상으로 실로 부정관이 능히 음탐을 대치하며, 그 밖의 친한 벗에 대한 탐은 '사'가 능히 대치한다.
4무량 가운데 앞의 두 가지(자·비)의 본질은 바로 무진(無瞋)이다.2) 그러나 이치상으로 볼 때 '비'의 본질은 마땅히 불해(不害)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3)
또한 희무량의 본질은 바로 희수(喜受)이며,4) 사무량의 본질은 바로 무탐이다. 그러나 만약 권속(상응·구유법)과 함께 설할 경우 5온을 본질로 한다.5)
만약 '사'가 무탐을 본질로 한다면, 어떻게 능히 '진'을 대치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사'에 의해 대치되는 '진'은 탐에 의해 인기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치상으로 볼 때 실로 '사'는 마땅히 두 가지 법(무탐과 무진)을 본질로 삼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6)
이러한 4무량의 행상의 차별은 다음과 같다. 즉 '어떻게 하여야 모든 유정류로 하여금 응당 이와 같은 즐거움을 획득하게 할 것인가.' 이와 같이 사유함으로써 자등지(慈等至)에 들어가게 된다. '어떻게 하여야 모든 유정류로 하여금 응당 이와 같은 괴로움을 떠나게 할 것인가.' 이와 같이 사유함으로써 비등지(悲等至)에 들어가게 된다. '모든 유정류가 즐거움을 획득하고 괴로움을 떠난다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이와 같이 사유함으로써 희등지(喜等至)에 들어가게 된다. '모든 유정류는 평등하고 평등하여 사랑하는 이도 미워하는 이도 없다.' 이와 같이 사유함으로써 사등지(捨等至)에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4무량은 다른 이로 하여금 실제로는 즐거움 등을 능히 획득하게 할 수 없는데, 어찌 전도(顚倒)된 것이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즐거움 등을 획득하기를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혹은 아세야(阿世耶, aya)에 전도가 없기 때문에 [전도가 아니니], 승해의 상(想)과 상응하여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7)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이 바로 전도라고 한다면 다시 무슨 허물이 있게 되는 것인가?
만약 [이것이 바로 전도라고 한다면] 마땅히 선이 아니라고 해야 하지만 이치상 그렇지가 않으니, 이것은 선근과 상응하여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바로 전도라고 한다면] 마땅히 악을 인기한다고 해야 하지만 이치상 역시 그렇지가 않으니, 이것의 힘에 의해 능히 진에 등을 대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4무량은 욕계의 일체의 유정을 소연으로 삼으니, 능히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진에 등의 장애를 대치하기 때문이다.8) 그런데 계경에서는 "자무량 등을 수습할 때 한 방향[一方]과 일체 세계를 사유한다"고 설하고 있지만,9) 이 경에서는 기세간(器世間)을 언급한 것으로, 그 같은 기세간 중의 [일체 유정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4무량 중] 세 번째 희무량은 희수에 포섭되기 때문에 다만 초정려와 제2정려에 의지하는 것으로, 그 밖의 선정의 경지에는 희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밖의 세 가지 무량은 모두 여섯 지에 의지하여 일어나니, 이를테면 4정려와 미지정과 중간정이 바로 그것이다.
(1) 4무량의 가행과 성만(成滿) ▲ 위로
그런데 혹 어떤 이는 이를테면 미지정을 제외한 오로지 다섯 지에 의지하여 일어날 뿐이라고 주장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용예(容豫)의 공덕으로 이미 욕계를 떠난 자라야 비로소 능히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10) 혹은 어떤 이는, '이러한 4무량은 그것이 상응하는 바에 따라 10지 모두에 의지하여 일어나니, 이를테면 욕계정과 네 가지 근본정과 근분정, 그리고 중간정이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다.11) 곧 이러한 주장의 의미는 정지(定地, 즉 색계)와 부정지(不定地, 욕계)의 근본정과 가행(즉 근분정)을 모두 무량에 포섭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비록 앞에서 이러한 4무량이 네 가지 장애를 능히 대치한다고 설하였을지라도 온갖 번뇌의 득(得)을 끊어지게 할 수는 없으니, 이것은 유루의 근본정려에 포섭되기 때문이며, 승해작의와 상응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며, 일체의 유정을 두루 소연의 경계로 삼기 때문이다.12) 그렇지만 이것의 가행위(욕계와 미지정)에서는 진에 등을 억제하거나 숨기며, 혹은 이것(4무량)은 이미 끊어진 번뇌를 더욱 멀어지게 하기 때문에 앞에서 이러한 4무량은 능히 네 가지 장애를 대치한다고 설한 것이다. 이를테면 욕계와 미지정에서도 역시 수소성(修所成)의 근본 무량과 유사한 자(慈) 등이 존재하니,13) 이것에 의해 진에 등의 장애를 억제하거나 숨기며, 그런 다음 번뇌를 끊는 도[斷道, 즉 무간도]를 인기하여 능히 온갖 번뇌를 끊으며, 온갖 번뇌를 끊고 나서 이염위(離染位) 중에서 비로소 근본 4무량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의 상태에서는 비록 [번뇌를 일으킬 만한] 강력한 인연을 만나게 될지라도 진에 등에 의해 은폐되거나 굴복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으로 그러한 업을 수습하는 단계[初習業位]에서는 어떻게 자무량을 닦는 것인가?
이를테면 먼저 자신이 향수하는 즐거움을 사유하고서, 혹은 부처와 보살과 성문 그리고 독각 등이 향수하는 쾌락에 대해 설하는 것을 듣고서 '일체의 모든 유정이 이와 같은 쾌락을 향수하기를 원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그에게 본래 번뇌가 증성하여 이와 같이 평등하게 마음을 운용할 수 없는 자라고 한다면, 마땅히 유정을 세 가지 품류―이른바 친우와 처중(處中, 친우도 아니고 원수도 아닌 이)과 원수―로 분류하고, 다시 친우를 상·중·하의 세 품류로 나누고, 중품(즉 처중)은 오로지 한 가지로, 원수도 상·중·하의 세 품류로 나누어 모두 일곱 가지 품류를 성취해야 한다.14)
그리고 이같이 품류의 차별을 나누고 난 후 먼저 상품의 친우에 대해 진실로 즐거움을 주려고 하는 승해를 일으키며,15) 이러한 원이 성취되고 나면 중품과 하품의 친우에 대해서도 역시 이와 같은 승해를 점차로 닦는다.
이같이 하여 세 품류의 친우에 대한 평등한 마음을 획득하고 나면, 다음으로 처중의 중품과 하·중·상품의 원수에 대해서도 역시 점차로 이와 같은 승해를 닦으니, 자주 닦은 힘에 의해 상품의 원수에 대해서도 능히 즐거움을 주려고 하는 원을 일으켜 그것이 상품의 친우에 대한 원과 평등하게 된다.
이 같은 승해를 닦아 더 이상 물러남이 없게 되면, 다음으로 소연을 점차 넓혀 나가면서 닦게 된다. 즉 그 같은 생각[想]을 점차 한 동네, 한 나라, 한 방향, 일체의 세계로 옮겨 즐거움을 주려는 행상을 사유하여 두루하지 않음이 없게 될 때, 이를 자무량을 수습하는 것이 성취되어 원만해졌다[成滿]고 한다.
그리고 만약 유정에 대한 공덕(즉 좋은 점)을 즐거이 추구하는 자라면 능히 자정(慈定)을 닦아 신속하게 성취하게 되겠지만, 유정에 대한 과실(즉 약점)을 즐거이 추구하는 자는 그렇지 못하다. 즉 선근을 끊은 자라도 공덕이라 할 만한 것이 있으며, 인각유 독각에게도 과실을 찾아볼 수 있으니, 일찍이 지은 복과 죄의 과보가 현재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16)
비무량과 희무량을 닦는 법도 이에 준하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즉 유정이 온갖 괴로움의 바다에 빠진 것을 관찰하고서는 바로 그들이 모두 해탈을 획득하게 되기를 원하고, 아울러 유정이 즐거움을 얻고 괴로움에서 떠나기를 생각하고서는 스스로 깊이 기뻐하여 '진실로 즐겁도다'고 하면, [이러한 때를 일컬어 비무량과 희무량을 닦는 것이 성취되어 원만해졌다고 한다].
처음으로 사무량을 닦는 자는 먼저 처중(處中)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차로 능히 상품의 친우에 이르러 평등한 마음을 일으켜 처중과 동등하게 여기면 [이러한 때를 일컬어 사무량을 닦는 것이 성취되어 원만해졌다고 한다].17)
이러한 4무량은 인취에서 일어나며, 다른 곳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그 중의 한 가지 무량을 획득할 때 필시 세 종류의 무량을 성취하니, 제3정려 등(이상)에 태어나면 오로지 희무량을 성취하지 않기 때문에 [4무량을 성취한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다].18)
무량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2. 8해탈(解脫) ▲ 위로
다음으로 해탈(解脫, vimoksa)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해탈에는 여덟 가지의 종류가 있으니
앞의 세 가지는 무탐(無貪)의 성질로서
두 가지는 두 선정에, 한 가지는 한 선정에 의지하며
네 가지 해탈은 무색정으로서 선이다.
解脫有八種 前三無貪性
二二一一定 四無色定善
멸수상해탈(滅受想解脫)은
미미한 마음과 무간에 생기며,
자지의 청정한 마음(즉 유루)이나
하지의 무루심으로 나오게 된다.
滅受想解脫 微微無間生
由自地淨心 及下無漏出
세 해탈의 경계는 욕계의 볼 수 있는 것이며,
네 해탈의 경계는 유지품(類智品)의 도(道)와
자지와 상지의 고·집·멸제와
비택멸(非擇滅)과 허공이다.
三境欲可見 四境類品道
自上苦集滅 非擇滅虛空
논하여 말하겠다. 해탈에는 여덟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내적으로 색의 상(想)이 있으면서 외적인 색을 관찰하는 해탈이며,19) 둘째는 내적으로 색의 상이 없으면서 외적인 색을 관찰하는 해탈이며,20) 셋째는 청정한 해탈을 몸으로 작증(作證)하고 구족하여 머무는 것이며,21) 4무색정을 순서대로 네 가지 해탈이라고 하며,22) 멸수상정(滅受想定)을 여덟 번째 해탈이라고 한다.23)
이 같은 8해탈 중에서 앞의 세 가지는 무탐을 본질로 하니, 탐을 직접적으로 대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경 중에서 '……상관(想觀)……'이라고 설한 것은 '상'과 '관'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24) 즉 이러한 세 가지 해탈 중에 처음의 두 가지는 부정상(不淨相)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여기서는 푸르죽죽한 어혈[靑瘀] 등의 온갖 행상을 짓기 때문이다.25) 또한 세 번째 해탈은 청정상(淸淨相)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청정한 빛의 선명한 행상을 짓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 가지 해탈이 그것에 수반되는 법과 함께하는 경우라면, 그것은 모두 5온을 본질로 한다.
처음 두 가지 해탈은 각기 초정려와 제2정려에 의지하여 일어나니, 그것(초정려와 제2정려)은 능히 욕계와 초정려 중의 현색탐(顯色貪)을 대치하기 때문이다.26) 세 번째 해탈은 뒤의 정려(제4정려와 근분정)에 의지하여 일어나니, 그것은 여덟 가지 재환(災患)을 떠나 마음이 맑고 깨끗하기 때문이다.27) 그리고 그 밖의 경지에도 이와 서로 유사한 해탈이 존재하지만, 탁월한 것[增上]이 아니기 때문에 '해탈'이라 이름하지 않은 것이다.28)
다음의 네 가지 해탈(제4에서 제7해탈)은 그 순서대로 4무색정의 선을 본질로 한다. 즉 그것은 무기나 염오의 무색정을 본질로 하지 않으니, 그러한 법(무기와 염오)은 해탈이 아니기 때문이며, 산란심의 선[散善] 역시 본질로 하지 않으니, 그것은 그 성질이 약하고 저열하기 때문으로, 그러한 산란심의 선이란 예컨대 목숨을 마칠 때의 마음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설하기를, "그 밖의 다른 때에도 역시 산란심의 선이 존재한다"고 하였다.29)
그리고 [무색계] 근분정(近分定)의 모든 해탈도도 역시 '해탈'이라고 이름할 수 있지만 무간도는 그렇지 않으니, 하지를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요컨대 하지를 등져야 비로소 '해탈'이라고 이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다른 곳에서 대체로 그 같은 근본지(즉 4무색정)만을 '해탈'이라고 설한 것은, 근분 중의 모든 경지가 '해탈'이 아니기 때문이다.30)
여덟 번째 해탈은 바로 멸진정(滅盡定)이니, 그것의 자성 등에 대해서는 이미 앞(본론 권제5)에서 논설한 바와 같다. 즉 수(受)와 상(想)을 싫어하여 등지고서 이것을 일으켰기 때문에, 혹은 소연을 갖는 법[有所緣, 즉 심·심소를 말함]을 모두 싫어하여 등진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멸진정은 '해탈'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것에 의해 정장(定障, 불염오무지)에서 해탈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선정은 미미한 마음[微微心] 뒤에 현전한다. 즉 앞에서 상심(想心, 즉 '상'과 상응하는 마음)과 대응하는 마음을 이미 '미세한 마음[微細心]'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이것은 더욱더 미세하기 때문에 '미미한 마음'이라고 일컬은 것으로, 이와 같은 마음 다음 찰나에 멸진정에 들어간다. 그리고 멸진정으로부터 나올 때에는 혹 어떤 경우 유정지의 청정한 선정[淨定, 즉 정등지]의 마음을 일으키기도 하고, 혹 어떤 경우에는 무소유처의 무루선정의 마음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와 같이 멸진정에 들어가는 마음은 오로지 유루이지만, 유루와 무루의 마음 모두로부터 나오게 되는 것이다.31)
8해탈 가운데 앞의 세 가지는 오로지 욕계의 색처(色處)를 경계로 한다. 다만 차별이 있다면, 두 가지(제1·제2해탈)의 경계는 미워할 만한 것[可憎]이고, 한 가지(제3해탈)의 경계는 애호할 만한 것[可愛]이다.32) 그 다음의 네 가지 해탈(제4에서 제7해탈)은 각기 자지와 상지의 고·집·멸제와, 일체 유지품(類智品)의 도(道)와 그것의 비택멸과 허공을 소연의 경계로 삼는다.33)
제3정려에는 어찌 해탈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제3정려 중에는 색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자지의 미묘한 낙(樂)에 의해 어지럽혀지기 때문이다.
관행자(觀行者)는 어떠한 연유에서 정해탈(淨解脫, 즉 제3해탈)을 닦는 것인가?
마음이 잠시 기뻐하게[欣悅]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니, 이전에 닦은 부정관(不淨觀, 첫 번째와 두 번째 해탈)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근심[沈戚]하게 하는 것이라면 지금 청정관(淸淨觀)을 분발하여 닦는 것은 마음이 기뻐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혹은 스스로 감당할 능력이 있는지, 이를테면 앞서 닦은 부정관의 해탈이 성취되었다고 해야 할지 성취되지 않았다고 해야 할지 자세히 살펴 알기를 원하였기 때문으로, 만약 청정상을 관찰하더라도 번뇌(색탐)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 같은 해탈은 바야흐로 성취된 것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이유로 말미암아 모든 유가사(瑜伽師)는 해탈 등을 닦는 것이니, 첫째는 온갖 번뇌가 끊어지고 나서 더욱 멀어지게 하기 위해서이며, 둘째는 선정에 대해 뛰어난 자재를 획득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능히 무쟁(無諍) 등의 공덕과 성스러운 신통을 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이에 따라 온갖 사업을 능히 변화시켜 일으키고, 유다수행(留多壽行)과 사다수행(捨多壽行) 등의 여러 작용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34)
어째서 경에서는 제3해탈과 제8해탈은 '몸으로 작증하는 것[身作證]'이라고 설하면서 다른 여섯 가지 해탈에 대해서는 그렇게 설하지 않은 것인가?35)
8해탈 중에서 이 두 가지가 뛰어난 것이기 때문이며, 두 세계 중에서 각기 가장자리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36)
해탈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3. 8승처(勝處) ▲ 위로
다음으로 승처(勝處, abhibhayatana)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승처에는 여덟 가지 종류가 있으니
두 가지는 첫 번째 해탈과 같으며
다음의 두 가지는 두 번째 해탈과
뒤의 네 가지는 세 번째 해탈과 같다.
勝處有八種 二如初解脫
次二如第二 後四如第三
논하여 말하겠다. 승처(勝處)에는 여덟 가지가 있다.
첫째는 내적으로 색의 상(想)이 있으면서 외부의 적은 색을 관찰하는 것이며,37) 둘째는 내적으로 색의 상이 있으면서 외부의 많은 색을 관찰하는 것이며,38) 셋째는 내적으로 색의 상이 없으면서 외부의 적은 색을 관찰하는 것이며,39) 넷째는 내적으로 색의 상이 없으면서 외부의 많은 색을 관찰하는 것이다.40) 그리고 내적으로 색의 상이 없으면서 외부의 청(靑)·황(黃)·적(赤) ·백(白)을 관찰하는 것이 네 가지 승처로,41) 이를 앞의 네 가지에 더하여 8승처가 되는 것이다.42)
8승처 가운데 앞의 두 가지 승처는 첫 번째 해탈과 같고, 다음의 두 가지 승처는 두 번째 해탈과 같으며, 마지막 네 가지 승처는 세 번째 해탈과 같다.43)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8승처는 세 가지 해탈과 무엇이 다른가?
앞의 해탈을 닦는 것은 오로지 능히 [색탐 등을] 버리고 등지는 것일 뿐이지만, 뒤의 승처를 닦는 것은 능히 소연을 제압하기 위해서이다.44) 즉 즐기는 바에 따라 관찰하면서도 번뇌가 끝내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승처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4. 10변처(遍處) ▲ 위로
다음으로 변처(遍處, krtsnayatana)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변처에는 열 가지 종류가 있으니
여덟 가지는 정해탈과 같으며
뒤의 두 가지는 청정한 무색정으로
자지의 4온을 소연으로 한다.
遍處有十種 八如淨解脫
後二淨無色 緣自地四蘊
논하여 말하겠다. 변처(遍處)에는 열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지(地)·수(水)·화(火)·풍(風)·청(靑)·황(黃)·적(赤)·백(白)과 아울러 공(空)과 식(識)의 두 가지 무변처(無邊處)를 두루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즉 일체의 처소에 어떠한 간극(間隙, 틈)도 없이 두루 망라하여 관찰하기 때문에 '변처'라고 이름한 것이다.45)
10변처 가운데 앞의 여덟 가지는 정해탈(淨解脫, 세 번째 해탈)과 같은 것으로, 이를테면 그 자성은 모두 무탐이며, 만약 그것에 수반되는 법과 함께하는 경우라면 5온을 본질로 한다. 또한 제4정려에 의해 일어나며, 욕계의 가견(可見)의 색(즉 색처)을 소연으로 한다.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오로지 풍(風)의 변처만은 접촉되어지는 법[所觸法] 중의 풍계(風界)를 소연의 경계로 삼는다"고 하였다.46)
뒤의 두 가지 변처는 순서대로 공(空)과 식(識)의 두 가지 청정한 무색정을 그것의 자성으로 삼으며, 각기 자지의 4온을 소연의 경계로 삼는다.
그리고 관행(觀行)을 닦는 자는 온갖 해탈로부터 온갖 승처에 들어가며, 온갖 승처로부터 온갖 변처로 들어가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뒤의 것일수록 일어나는 것이 앞의 것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5. 해탈 등의 세 공덕의 득과 소의신 ▲ 위로
이상과 같은 해탈 등의 세 가지(해탈·승처·변처) 공덕은 무엇에 의해 획득되며, 어떠한 몸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멸진정은 앞에서 분별한 바와 같으며
그 밖의 것은 두 가지 득과 모두 통하는데
무색정의 그것은 3계신(身)에 의지하며
그 밖의 것은 오로지 인취에서만 일어난다.
滅定如先辯 餘皆通二得
無色依三界 餘唯人趣起
논하여 말하겠다. 여덟 번째 해탈은 앞에서 이미 분별한 바와 같으니, 이것은 바로 앞에서 논설한 멸진정이기 때문이다.47) 그 밖의 해탈 등(7해탈과 8승처와 10변처)은 모두 두 가지에 의해 획득된다. 이를테면 그것들은 이염과 가행에 의해 획득되니, 일찍이 수습하였던 이도 있고, 아직 수습하지 않은 자도 있기 때문이다.48)
네 가지 무색정의 해탈(즉 제4에서 제7의 해탈)과 두 가지 무색정의 변처(즉 공·식무변처의 변처)는 각기 3계의 몸에 의지하여 일어나지만, 그 밖의 공덕은 오로지 인취에 의지할 뿐이니, 요컨대 그것은 가르침의 힘[敎力]에 의해 인기되기 때문이다.49)
그리고 [멸진정을 제외한 일곱 가지 해탈과 8승처와 10변처는] 이생과 성자가 모두 능히 바로 일으킬 수 있다.
6. 선정을 일으키는 인연 ▲ 위로
그렇다면 온갖 유정이 색·무색계에 태어나 존재하면서 정려와 무색정을 일으키는 것은 어떤 다른 인연에 의해서인가?50)
게송으로 말하겠다.
2계(界)에서는 원인과 업에 의해
능히 무색정을 일으킬 수 있으며
색계에서 정려를 일으키는 것은
또한 법이력(法爾力)에 의해서이다.
二界由因業 能起無色定
色界起靜慮 亦由法爾力
논하여 말하겠다. 상 2계에 태어나는 경우에는 모두 세 가지의 인연에 의해 능히 색계와 무색계의 선정을 인기하게 된다.
첫째는 원인의 힘[因力]에 의해서이니, 이를테면 일찍이 가까이서 닦았거나 자주 닦았던 바가 선정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51)
둘째는 업의 힘[業力]에 의해서이니, 이를테면 일찍이 상지의 생을 초래할 만한 순후수업(順後受業) 등을 지었을 경우, 장차 그러한 업의 이숙을 일으켜 현전하게 하려는 세력이 능히 그 같은 선정을 일으키게 하니, 만약 하지의 번뇌를 떠나지 않았다면 필시 결정코 상지에 태어나는 일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법이력(法爾力), 즉 저절로 그렇게 되는 힘에 의해서이다. 이를테면 기세계(器世界)가 장차 허물어지려고 할 때, 하지의 유정은 저절로 능히 상지의 정려를 일으키는데,52) 이러한 단계에서는 존재하는 선법이 모두 저절로 그렇게 되는 힘에 의해 증가하고 왕성해지기 때문이다.
즉 온갖 유정으로서 상 2계 중에 태어난 자는 원인과 업의 힘에 의해 무색정을 일으키며, 저절로 그렇게 되는 힘에 의해서는 일으키지 않으니, 무운천(無雲天, 제4정려의 제1천) 등은 3재(災)로 인해 허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53) 또한 색계에 태어나 머물 때에는 앞의 두 가지 인연과 저절로 그렇게 되는 힘에 의해 정려를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만약 욕계에 태어나 상지의 선정을 일으킬 때에는 이 밖의 가르침의 힘[敎力]에 의해서도 각각의 선정을 일으키게 된다는 사실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Ⅲ. 전(前) 8품(品)의 총결
1. 정법(正法)의 본질과 세간에 머무는 기간 ▲ 위로
지금까지 여러 가지의 법문에 대해 분별하였는데, 이는 모두 세존의 정법(正法)을 널리 지니게 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정법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응당 어느 때에 머무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부처님의 정법에는 두 가지가 있어
교법(敎法)과 증법(證法)을 본질로 하니
지니고 설하고 행하는 자가 있으면
이것은 바로 세간에 머물 것이리라.
佛正法有二 謂敎證爲體
有持說行者 此便住世間
논하여 말하겠다. 세존의 정법(正法)은 그 자체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교법(敎法)이며, 둘째는 증법(證法)이다. 교법이란 이를테면 계경(契經)과 조복(調伏)과 대법(對法)을 말하며,54) 증법이란 3승의 온갖 보리분법(菩提分法)을 말한다.55)
그리고 능히 받아 지니고 올바로 설하는 자가 있으면 부처의 올바른 증법은 바로 세간에 머물게 된다. 따라서 세 사람(지니는 자와 설하는 자와 행하는 자)이 세간에 머무는 시간에 따라 정법도 그 만큼의 시간 동안 머물게 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56)
그런데 어떤 이는 해석하기를, "증법은 오로지 천 년만 머물 뿐이며, 교법이 머무는 때는 이를 초과한다"고 하였다.57)
2. 본론을 짓게 된 취지 ▲ 위로
이 논은 아비달마를 근거로 하고 거기에 포섭되는데,58) 어떠한 이치에 근거하여 대법을 해석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가습미라 비바사사에 의해 그 이치가 이루어졌으니
나는 대다수 그것에 의거하여 대법을 해석하였는데
조금이라도 폄훼하여 헤아렸으면 그것은 나의 과실로서
법의 올바른 이치는 모니(牟尼)만이 판별할 뿐이다.59)
迦濕彌羅議理成 我多依彼釋對法
少有貶量爲我失 判法正理在牟尼
논하여 말하겠다. 가습미라(迦濕彌羅) 비바사사(毘婆沙師)들이 논의한 아비달마는 그 이치가 매우 잘 성립된 것으로,60) 나는 대다수 그것에 의거하여 대법(對法)의 종의를 해석하였다. 그러나 조금이라고 폄훼하여 헤아린 바가 있으면 그것은 나의 과실이니, 법의 올바른 이치는 오로지 세존과 여러 여래 대성(大聖)의 제자들만이 판별할 수 있을 뿐이다.61)
3. 탄식과 권학(勸學)의 유통게(流通偈) ▲ 위로
대사(大師)의 진리의 눈[法眼]은 이미 감기셨고,
그것을 증명할 만한 자도 대다수 산멸(散滅)하였으니,
진리를 보지 못해 자재함이 없는 이들이
어지러운 생각[尋思]으로써 성교를 어지럽히네.
스스로 깨치신 분은 이미 뛰어난 적정에 드셨고,
그의 가르침을 지니는 자들도 대다수 따라 열반하였으니,
세간에 의지할 만한 이가 없고 온갖 공덕이 상실되매
갈고리(정법)의 제압이 없어 번뇌가 제멋대로 일어날 뿐이네.
이미 여래정법의 수명이 점차 쇠망하여
마치 목숨이 목구멍에 이른 것과 같음을 알았으니,62)
바로 이같이 온갖 번뇌의 힘이 증성할 때일수록
마땅히 해탈을 추구하여 게으르지 말아야 할 것이리라.
제9편 파집아품(破執我品) ①
Ⅰ. 유아론 비판 총론 ▲ 위로
이것(즉 불타정법)을 벗어나 다른 가르침에 의지한다 한들 어찌 해탈이 없다고 할 것인가?63)
이치상 필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허망한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 말미암아 미혹되고 뇌란되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이러한 정법 이외에 온갖 이들이 주장하는 아(我)는 바로 온(蘊)의 상속상에 일시 설정된 것이 아니라 '온을 떠난 아[離蘊我]'가 진실로 존재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곧 '아'에 대해 집착하는 힘으로 말미암아 온갖 번뇌가 생겨나고, 3유(有)를 윤회하여 결코 해탈할 수 없는 것이다.64)
어떠한 논거로써 온갖 '아'라고 하는 말은 오로지 온의 상속을 가리키는 것일 뿐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아' 자체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안 것인가?
그들이 생각하는 온을 떠나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아'는 진실로 현량(現量, 직접지각)이나 비량(比量, 추리)에 의해 알려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아' 자체가 그 밖의 다른 어떤 법이 존재하는 것처럼 개별적인 실체[實物]로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장애하는 조건[障緣]이 없을 경우 6경(境)이나 의근처럼 마땅히 현량에 의해 인식되어야 할 것이며,65) 혹은 5색근(色根)처럼 비량으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5색근이 비량에 의해 획득된다고 하는 말은 세간에서 현견(現見)되는 것과 같다. 즉 비록 온갖 연(緣)을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별도의 연이 결여될 경우 결과는 생겨나는 일이 없지만 결여되지 않았을 경우 바로 생겨나니, 마치 종자가 씨앗을 낳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견(見)'에 있어서도 역시 비록 현재찰나의 대상과 작의(作意) 등의 연을 갖추고 있다 할지라도 모든 장님과 귀머거리, 그렇지 않은 정상인[不盲聾]에게 그러한 등등의 인식이 일어나지 않고 일어나는 것은 별도의 연이 결여된 것인가, 결여되지 않은 것인가에 따른 것임을 결정코 알아야 한다.
여기서 '별도의 연'이란 바로 안(眼) 등의 근으로, 이 같은 사실을 일컬어 '색근은 비량에 의해 인식된다'고 말한 것이다.66) 곧 온을 떠나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아'는 두 가지 인식방법[量]에 의해 결코 인식되는 일이 없으니, 이러한 사실로 말미암아 '진실의 자아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이다.
Ⅱ. 독자부(犢子部)의 비즉비리온아(非卽非離蘊我) 비판
1. 이증(理證)에 의한 비판
1) 가실(假實)에 근거한 비판 ▲ 위로
그런데 독자부(犢子部)에서는 "보특가라(補特伽羅, pudgala)가 존재하니, 그것 자체는 온과 동일한 것도 아니며, 다른 것도 아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그것을 실유(實有)라고 해야 할 것인가, 가유(假有)라고 해야 할 것인가?(논주 세친)
실유와 가유의 상의 차별은 어떠한가?(독자부)
색이나 소리처럼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은 바로 실유의 상이며, 젖이나 낙(酪)처럼 단지 적취물로서 존재하는 것은 가유의 상이다.(세친)
실유로 간주하거나 가유로 간주할 경우, 거기에는 각기 어떠한 과실이 있는 것인가?(독자부)
만약 보특가라 자체가 바로 실유라고 한다면 마땅히 온과는 달라야 할 것이니, 각각의 개별적인 온처럼 그 자성이 온과는 별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실체로서 존재한다면 필시 마땅히 원인을 갖어야 할 것이며, 혹은 마땅히 무위(無爲)여야 할 것으로, 이는 바로 외도의 견해와 동일한 것이다.67) 또한 마땅히 그 작용도 없어야 할 것이니, 그럴 경우 [무슨 이익이 있어] 실유의 보특가라를 주장할 것인가?68) 그러나 만약 보특가라 자체가 가유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설하는 바와 동일하다.(세친)
우리가 설정한 보특가라는 그대가 따지고 있는 실유나 가유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현재세에 포섭되는 내적인 유집수(有執受)의 제온(諸蘊)에 근거하여(skandhan upadaya) 보특가라를 설정할 수 있다고 한 것일 뿐이다.69)(독자부)
이 같은 기만의 말은 그 의미가 아직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에 나는 잘 알지 못하겠다. 여기서 무엇을 일컬어 '근거'라고 한 것인가? 만약 '제온을 취[攬]하여(skandhan grh tva)'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 같은 '근거'의 뜻이라고 한다면 이미 제온을 취하여 보특가라가 성립한 것으로, 그럴 경우 보특가라는 마땅히 가유가 되어야 할 것이니, 젖이나 낙(酪) 등이 색(色) 등을 취하여 이루어진 것과 같다.70) 또한 만약 '제온을 원인[因]으로 하여(skandhan prat tya)'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 같은 '근거'의 뜻이라고 한다면, 이미 제온을 원인으로 하여 보특가라가 설정되었으므로 보특가라 역시 이러한 온과 동일하다는 과실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71)(세친)
그와 같은 방식으로 설정되지 않았다.(독자부)
그렇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설정된 것인가?(세친)
(1) 불(能燒)과 땔감(所燒)의 관계에 대한 논쟁 ▲ 위로
이는 마치 세간에서 땔감에 근거하여 불을 설정하는 것과 같다.(독자부)
어떻게 땔감에 근거하여 불을 설정한 것이라고 설할 수 있는 것인가?(세친)
이를테면 땔감을 떠나 불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땔감과 불은 다른 것도 아니며 동일한 것도 아니다. 만약 불이 땔감과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각기 서로 개별적 실체라고 한다면) 땔감은 마땅히 뜨겁지 않아야 할 것이며, 만약 불이 땔감과 동일한 것이라고 한다면 태워지는 것이 바로 능히 태우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온을 떠나 보특가라를 설정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보특가라는 온과 다른 것도 아니고 동일한 것도 아니다. 만약 [보특가라가] 온과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상주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며, 만약 온과 동일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자체는 마땅히 단멸을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독자부)
그대는 지금 여기서 바야흐로 '무엇을 불이라 하고 무엇을 땔감이라고 하는가'에 대해 마땅히 설하여 나로 하여금 '불은 땔감을 근거로 한다'는 사실의 뜻을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다.(세친)
[불과 땔감에 대해] 마땅히 설해야 할 것이 무엇이 있을 것인가? 그러나 만약 설하라고 한다면 마땅히 '태워지는 것[所燒]'은 바로 땔감이며, '능히 태우는 것[能燒]'은 바로 불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독자부)
그렇다면 여기서 마땅히 다시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니, 무엇이 태워지는 것이고, 무엇이 능히 태우는 것이기에 '땔감'이라 이름하고 '불'이라 이름하는 것인가?(세친)
바야흐로 스스로 타지 않는 것으로서 태워지는 온갖 사물을 일컬어 '태워지는 땔감'이라 하고, 온갖 광명을 갖고 지극히 뜨거우며 [스스로] 타올라 능히 태우는 사물을 일컬어 '능히 태우는 불'이라고 한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 이것(불)은 그 같은 사물의 상속을 능히 태워 다음다음의 찰나를 그 전찰나와는 다르게 하기 때문이다. 즉 이것(불)과 저것(땔감)은 비록 8사(事)를 본질로 하는 것일지라도,72) 땔감을 근거[緣]로 하였기 때문에 불은 비로소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니, 마치 젖과 술을 근거로 하여 낙(酪)과 초(醋)가 생겨나는 것과 같다.73) 그래서 세간에서는 다 같이 '땔감을 근거로 하여 불이 존재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독자부)
2) 독자부의 5법장설(法藏說)에 근거한 비판 ▲ 위로
만약 이러한 이치에 따를 경우 불은 땔감과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니, 후찰나의 불과 전찰나의 땔감은 각기 시간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그대가 생각하는 보특가라가 마치 불이 땔감에 근거하는 것처럼 제온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결정코 마땅히 '이러한 보특가라는 온을 근거로 하여 생겨난 것으로, 그 본질은 제온과 다르며, [그럼에도] 무상성을 성취한다'고 설해야 하는 것이다.74)
또한 만약 타고 있는 나무 따위의 난촉(煖觸, 火의 자상)을 '불'이라 이름하고, 그 밖의 사물(8사 중 난촉을 제외한 7事)을 '땔감'이라고 이름한다면, 이는 즉 불과 땔감이 동시에 생기한 것[俱生]이면서 마땅히 다른 존재[異體]가 되어야 할 것이니, 자상[相]이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마땅히 '근거한다[依]'는 뜻에 대해서도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니, 이것들이 이미 동시에 생기한 것이라면 어떻게 '땔감을 근거로 하여 불을 설정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즉 이 때(동시 생기할 때)의 불은 땔감을 원인으로 삼은 것이 아니니, 각기 자신의 원인으로부터 동시에 생기하였기 때문이다.75) 또한 이 때 불이라는 명칭은 땔감을 원인으로 하여 설정된 것이 아니니, 불이라는 명칭은 난촉(煖觸)을 원인으로 하여 설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앞에서 설한 '불은 땔감을 근거로 한다'는 말이 동시 생기[俱生] 혹은 근거[依止]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럴 경우 보특가라는 온과 구생하거나 혹은 온에 의지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인정해야 할 것이니, 이는 이미 그 자체 온과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치상으로 볼 때 땔감이 존재하지 않으면 불 자체도 역시 존재하지 않듯이, 제온이 존재하지 않으면 보특가라 자체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땅히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그대는 그 같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니, 그렇기 때문에 그대의 해석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독자부)은 여기서 스스로 힐난하여 말하기를, "만약 불이 땔감과 다른 것이라면(각기 서로 개별적인 실체라고 한다면) 땔감은 마땅히 뜨겁지 않아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그럴 경우 그들은 마땅히 뜨거움이란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결정코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들이 '뜨거움이란 이를테면 난촉(煖觸)을 말한다'고 해석한다면 땔감은 뜨거워지지 않을 것이니, 그 본질이 다르기 때문이다.76) 또한 만약 '[땔감의] 뜨거움이란 난상(煖相)과 화합한 것을 말한다'고 해석한다면 [난(煖)과는] 다른 존재(즉 7事)도 역시 '뜨거움'이라는 명칭을 획득하여야 할 것으로, 실제적으로도 '불'이라는 명칭은 오로지 난촉에 근거한 것이지만 그 밖의 난상과 화합한 것도 모두 '뜨거움'이라는 명칭을 획득할 수 있다.77) 그런즉 '땔감을 일컬어 뜨거운 것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땔감과 불이 다른 것일지라도 [그럴 경우 '땔감이 뜨겁지 않게 된다'는] 허물은 성취되지 않으니, 어떻게 앞서 언급한 그 같은 사실로써 힐난할 수 있을 것인가?
3) 보특가라의 '근거[所託]'에 따른 비판 ▲ 위로
혹은 만약 '나무 등이 두루 탈 때를 설하여 땔감이라 이름하고 또한 역시 불이라고도 이름한다'고 할 경우, 마땅히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니, 그 때 '근거'라는 뜻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78) 곧 보특가라와 색 등의 온은 결정코 마땅히 동일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이 같은 사실을 능히 부정할 만한 어떠한 이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주장한 "마치 땔감을 근거로 하여 불을 설정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온을 근거로 하여 보특가라를 설정한다"고 하는 말은 앞뒤로 따져 보아도 그 이치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들(독자부)이 만약 "보특가라는 온과 동일한 것이라고도, 다른 것이라고도 다 같이 설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들이 인정하는 3세(世)와 무위법과 아울러 불가설(不可說)의 다섯 종류의 이염(爾焰, jneya)에 대해서도 역시 마땅히 설할 수 없어야 할 것이니, 보특가라를 다섯 번째라거나 다섯 번째가 아니라고도 설할 수 없기 때문이다.79)
또한 그들이 시설(施設)한 보특가라에 대해 마땅히 다시 확실하게 진술해 보아야 할 것이니, 무엇에 의탁하고 있는 것인가? 만약 온에 의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가설적(假說的)인 것이라는 뜻이 이미 성취된 셈이니, 시설된 보특가라는 보특가라에 의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이같이 시설된 보특가라가 보특가라에 의탁하는 것(즉 자기 원인적 존재)이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앞에서 제온을 근거로 하여 설정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인가? 이치상 다만 보특가라를 근거로 하여 설정한 것이라고 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그 같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오로지 온에 의탁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이 시설한 보특가라는 가설적인 것이다.]
또한 만약 온이 존재하기에 이것(보특가라)을 바로 알 수 있으며, 그래서 앞에서 '이것은 온을 근거로 하여 설정하였다'고 한다면,80) 이는 바로 온갖 색(色)은 안(眼) 등의 연(緣)이 있어야 비로소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색 등도] 마땅히 '안 등을 근거로 하여 설정하였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이상 세친)
4) 6식(識)의 대상으로서의 보특가라 비판 ▲ 위로
또한 바야흐로 마땅히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니, 보특가라는 6식(識) 중의 어떠한 식에 의해 알려지는 것인가?(세친)
6식에 의해 알려진다.(독자부)
그 까닭은 무엇인가?(세친)
만약 어느 때 안식이 색을 인식하면 이로 인해 보특가라가 존재함을 아니, 이 같은 사실을 설하여 '안식에 의해 알려진다'고 하였다.81) 그렇더라도 [이 때의 보특가라를] 색과 동일하다거나 다른 것이라고는 설할 수 없다.82) 나아가 어느 때 의식이 법을 인식하면 이로 인해 보특가라가 존재함을 아니, 이 같은 사실을 설하여 '의식에 의해 알려진다'고 하였다. 그렇더라도 [이 때의 보특가라를] 법과 동일하다거나 다른 것이라고는 설할 수 없는 것이다.(독자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대들이 생각한 보특가라는 마땅히 젖 따위처럼 오로지 가설적으로 시설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안식이 온갖 색을 인식할 때, 만약 이로 인해 능히 젖 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라고 한다면, 젖 등은 '안식에 의해 알려진다'고 바로 설할 수 있을지라도 색법과 동일하다거나 다른 것이라고는 설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내지는 신식이 온갖 촉을 인식할 때, 만약 이로 인해 능히 젖 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라고 한다면, 젖 등은 '신식에 의해 알려진다'고 바로 설할 수 있을지라도 촉법과 동일하다거나 다른 것이라고는 설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즉 [동일하다고 한다면] 젖 등은 네 가지(색·향·미·촉)를 성취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며, 혹은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네 가지에 의해 성취된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83)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마치 세간에서 색 등(향·미·촉) 모두에 근거하여 젖 등을 시설한 것과 마찬가지로 마땅히 제온 모두에 근거하여 '보특가라가 존재한다'고 일시 시설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으로, 이러한 존재는 바로 가설적인 것이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들이 설한, '만약 어느 때 안식이 색을 인식하면 이로 인해 보특가라가 존재함을 안다'고 하는 이 같은 말은 무슨 뜻인가? 온갖 색이 바로 보특가라를 요별하는 근거[因]가 된다는 말인가, 색을 요별할 때 보특가라 역시 요별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만약 '온갖 색은 바로 이러한 보특가라를 요별하는 근거가 되지만, 그러나 이것은 색과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설한다면, 이는 곧 온갖 색은 안(眼)과 밝음[明]과 작의(作意) 등의 조건[緣]을 요별의 근거로 삼기 때문에 마땅히 색이 안 등과 다른 것이라고 설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84) 그러나 만약 '색을 요별할 때 이것(보특가라)도 역시 요별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색을 능히 요별하는 것(즉 안식)이 바로 이것도 능히 요별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이것을 능히 요별하는 별도의 [안식이]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색을 능히 요별하는 것이 바로 이것도 능히 요별한다'고 한다면, 마땅히 이러한 자아 자체가 바로 색이라고 하거나, 혹은 오로지 색에 대해서만 이것을 일시 설정하는 것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혹은 마땅히 '이러이러한 것은 바로 색이고 이러이러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자아이다'와 같은 분별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니,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이와 같은 두 종류의 분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색이 존재한다'거나 '보특가라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곧 존재성[有性]은 바로 분별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85) 나아가 만약 '이것을 능히 요별하는 별도의 [안식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요별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이는 마땅히 색과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니,86) 마치 노란색이 푸른색과 다르고 전찰나의 법과 후찰나의 법이 다른 것과 같다.87)
나아가 법에 대해서도 역시 이와 같이 따져 힐난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같은 힐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를테면 이것(보특가라)과 색은 결정코 동일하다거나 다르다고 설할 수 없으며, 능히 요별하는 두 가지 종류의 식을 서로 비교해 보아도 역시 그러하다고 말한다면,88) 이 때 '능히 요별하는 식'은 마땅히 유위에 포섭되지 않아야 할 것이며,89) 만약 그렇다고 인정한다면 바로 [오로지 자아만이 불가설이라는] 자신의 종의를 허무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이상 세친)
또한 만약 '색(色)이라고도, 비색(非色)이라고도 설할 수 없는 진실의 보특가라가 존재한다'고 한다면, 세존께서는 어째서 "색(色) 내지 식(識)에는 모두 아(我)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90)
2. 경증(經證)에 의한 비판 ▲ 위로
또한 그들(독자부)은 보특가라는 안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라고 이미 인정하였는데, 이와 같은 안식은 색경(色境)과 이 같은 보특가라, 그리고 두 가지 모두 가운데 무엇을 소연으로 삼아 일어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색을 소연으로 삼아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안식이 능히 보특가라를 요별한다고 설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것은 성처(聲處) 등과 마찬가지로 안식의 소연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떤 식이 이러한 경계(색)를 소연으로 삼아 일어났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이러한 경계를 소연연(所緣緣)으로 삼았을 뿐 보특가라는 안식의 소연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어째서 [앞에서] 안식의 소연이 될 수 있다('안식에 의해 알려진다')고 설한 것인가?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보특가라는 결정코 안식에 의해 요별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안식이 이 같은 보특가라 혹은 두 가지 모두를 소연으로 삼아 일어난다고 한다면 경설에 위배될 것이니, 계경 중에서는 "식이 일어나는 것은 두 가지 연에 의한다"고 판별하고 있기 때문이다.91) 또한 계경에서 설하기를, "안근을 인(因)으로 하고 색경을 연(緣)으로 삼아 능히 안식을 낳게 된다는 사실을 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존재하는 모든 안식은 다 안과 색을 연으로 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92) 또한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안식의 소연이 된다고 한다면) 보특가라는 마땅히 무상한 것이어야 할 것이니, 계경에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계경에서는 설하기를, "온갖 인(因)과 온갖 연(緣)으로서 능히 식(識)을 낳는 것은 모두 다 무상한 존재이다"고 하였다.93)
만약 그들(독자부)이 마침내 '보특가라는 식의 소연이 아니다'고 한다면, [자아는] 마땅히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며, 만약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 존재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만약 그 존재를 설정하지 않는다면 바로 자신의 종의를 허무는 것이 될 것이다.
또한 만약 6식에 의해 인식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안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이를테면 색과 같은 것으로 소리 등과는 다른 것이어야 할 것이며, 이식에 인식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이를테면 소리와 같은 것으로 색 등과는 다른 것이어야 할 것이며, 나아가 그 밖의 식에 인식되는 경우에 대해서도 이에 준하여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자아를] 설정하여 6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바로 경설에 위배될 것이니, 이를테면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5근의 행처(行處)와 경계가 각기 다른 것임을 범지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각각의 근은 오로지 자신이 작용하는 처소[所行處]와 자신의 경계만을 수용할 뿐 다른 근으로서 다른 근의 행처와 다른 근의 경계를 역시 능히 수용하는 일은 없다. 여기서 5근이란 안·이·비·설·신을 말한다. 그렇지만 의근의 경우만은 5근의 행처와 그 경계 대상도 함께 수용하니, 그것(5근)들은 의근에 근거하기 때문이다."94) 혹은 보특가라가 바로 5근의 경계 대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 마찬가지로 바로 5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도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자신의] 종의에 어긋나는 과실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이상 세친)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의근(意根)의 경계도 역시 마땅히 [다른 근의 경계와] 달라야 할 것이니, 『육생유계경(六生喩契經)』 중에서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이와 같은 6근의 행처와 경계에는 각각의 차별이 있어 각기 다른 자신의 작용을 행하는 처소와 자신의 경계만을 즐거이 추구[樂求]하는 것이다."95)(독자부)
이 경에서는 안(眼) 등의 6근을 설한 것이 아니니, 안 등의 5근과 그것에 의해 생겨난 식에는 낙(樂)과 견(見) 따위의 세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96) 즉 여기서는 다만 안 등의 뛰어난 세력에 의해 인기된 의식(意識)을 설하여 안 등의 근이라고 이름한 것일 뿐이다. 즉 단독으로 작용[獨行]하는 의근의 뛰어난 세력에 의해 인기된 의식은 안 등의 5근이 작용하는 경계를 능히 즐거이 추구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의 뜻에는 앞서 언급한 사실과 위배되는 과실은 없다.
또한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나는 지금 그대들을 위하여 통달되는 것[所達]과 알려지는 것[所知]에 대한 법문을 모두 연설하리라.97) 그 본질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온갖 안색(眼色)과 안식(眼識)과 안촉(眼觸)과, 안촉을 연으로 하여 내적으로 생겨난 수(受)로서, 그것은 혹은 낙(樂)이고 혹은 고(苦)이며, 혹은 불고불락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의촉(意觸)을 연으로 하여 내적으로 생겨난 수로서, 그것은 혹은 낙이고 혹은 고이며, 혹은 불고불락이다. 이것을 일컬어 일체의 통달되는 것과 알려지는 것이라고 한다." 즉 이 같은 경문에 의하여 일체의 통달되는 법과 알려지는 법은 오로지 그 같은 법만이 있는 것으로 결택 판단되니, 여기에 보특가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보특가라는 역시 또한 알려지는 것[所識]도 아니니, 혜(慧)와 식(識)의 대상은 반드시 동일하기 때문이다.
'안근이 보특가라를 본다'고 주장하는 모든 이들은, 안근은 이것(색)이 소유한 상을 보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으로, 나 아닌 것[非我, 즉 이것(색)이 소유한 상]을 보고서도 '나'를 보았다고 하기 때문에 그들은 바로 악견의 깊은 구덩이에 거꾸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도 경 중에서 스스로 이 같은 뜻을 결택하여 '오로지 제온에 대해 보특가라를 설할 뿐이다'고 하였으니, 이를테면 『인계경(人契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안근과 색경을 연으로 하여 안식을 낳으며, 삼사(三事)의 화합인 촉은 수(受)·상(想)·사(思)와 함께 일어난다. 여기서 뒤의 네 가지를 무색(無色)의 온이라 하고, 처음의 안근과 색을 일컬어 색온이라 하니, 오로지 이러한 근거[量]에 의해서만 인간[人]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즉 이러한 존재(제온)에 대해 각기 뜻의 차별에 따라 일시 명상(名想)을 설정하니, 혹 어떤 경우 유정(有情)이라 하기도 하고, 불열(不悅)·의생(意生)·유동(儒童)·양자(養者)·명자(命者)·생자(生者)·보특가라(補特伽羅)라고도 하는 것이다. 또한 역시 스스로 일컬어 '내 눈이 색을 본다'고 말하고, 또한 다시 세속(世俗)에 따라 이 구수(具壽)는 이름이 이와 같고, 종족이 이와 같고, 성류(性類)가 이와 같고, 먹고 마시는 것이 이와 같고, 받아 즐기는 것이 이와 같고, 받아 괴로워하는 것이 이와 같고, 목숨의 길이가 이와 같고, 이와 같이 오래 머물며, 이와 같이 목숨이 끝났다[壽際]고 설하니, 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다만 명상(名想, 개념)일 뿐이며, 이것은 오로지 자칭(自稱)일 뿐이며, 이것은 다만 세속에 따라 일시 설정된 존재[施設有]일 뿐이다.
이와 같은 일체의 존재는 무상하고 유위이며, 온갖 연[衆緣]으로부터 생겨난 것으로서 사(思)에 의해 조작된 것이다."98) 즉 세존께서는 항상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할 것을 가르쳤는데, 이 경은 요의이니, 마땅히 달리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박가범께서 범지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나는 일체의 존재[有]는 오로지 12처(處)뿐이라고 설한다"고 하였다.99) 만약 수취취(數取趣, 즉 보특가라)가 이러한 12처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라면 존재하지 않는다[無體]는 이치가 성립할 것이며, 만약 이러한 12처에 포섭되는 것이라면 마땅히 불가설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그 부파(독자부)에서 외워 전승하는 계경에서도 역시 말하기를, "존재하는 모든 안근(眼根)과 존재하는 모든 색경(色境)……(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에 대해 필추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여래는 이것을 모두 일체(一切)로 시설하였으니,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법[自體法]을 일체로 건립하였다"고 하였다.100) 즉 여기(12처)에 보특가라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이것이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설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빈비사라계경(頻毘娑羅契經)』에서도 역시 설하기를, "우매하며 [진리를] 들은 적이 없는 모든 이생은 가명(假名)에 수축(隨逐, 집착)하여 그것을 아(我)라고 헤아리지만, 여기에는 아도 아소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일체 중고(衆苦)의 법체만이 존재하여 미래[將]·현재[正]·과거[已]에 생겨날 뿐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하였다.101)
또한 세라(世羅, ila)라고 이름하는 아라한의 필추니(苾芻尼)가 마왕을 위해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그대 악견취(惡見趣)에 떨어져
헛된 행취(行趣, 즉 유위행) 중에
그릇되이 유정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니,
지자(智者)는 존재하지 않음을 안다.
이는 마치 여러 부품을 취하여
수레라고 일시 개념[假想] 짓는 것처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제온을 취하여
세속(즉 가명)으로 유정이라 한 것임을.102)
또한 세존께서는 『잡아급마(雜阿笈摩)』 중에서 바라문인 바타리(婆柁梨, Badari)를 위해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바타리여! 잘 들어야 할 것이니
능히 온갖 번뇌[結]를 푸는 법에 대해.
말하자면 마음에 의지하여 염오가 있고
역시 마음에 의지하여 청정이 있을 따름이다.
아(我)라고 하는 것은 실로 무아성으로
전도로 인해 존재한다고 집착하지만
실로 유정도 없고 '아'도 없으며,
오로지 존재의 원인인 법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를테면 열두 가지 존재의 갈래[有支]에
포섭되는 온·처·계만이 있을 뿐으로,
이 같은 일체의 존재에 보특가라는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잘 생각해야 하리라.
내입처(內入處)가 이미 공(空)하다고 관찰하였고
외입처(外入處)의 공도 역시 그렇게 관찰하였으니,
이같이 능히 [일체를] 공으로 관찰한 이는
역시 또한 어떠한 것(보특가라)도 인식하지 않으리.
또한 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아(我)를 주장할 경우 다섯 가지 종류의 과실을 범하게 되니, 이를테면 아견(我見)과 유정견(有情見)을 일으켜 악견취(惡見趣)에 떨어지게 되며, 온갖 외도와 동일하게 되며, [열반의 올바른] 길을 벗어나 가게 되며, 마음이 공성(空性, 즉 5온무아) 중에 깨달아 들지 못하여 능히 청정한 믿음을 낳을 수 없고 능히 안주할 수 없어 해탈을 획득하지 못하게 되며, 그에게 있어 성법(聖法)은 능히 청정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이상 세친)
3. 독자부의 논란에 대한 해명과 비판 ▲ 위로
이것(앞의 경증)들은 모두 올바른 근거[量]가 아니다.(독자부)
그 까닭이 무엇인가?(세친)
우리 부파에서는 일찍이 그것을 외워 전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독자부)
그대 종의에서 인정하는 것이 바로 올바른 근거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대들 부파의 주장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부처의 말씀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그대들] 부파의 주장이 바로 올바른 근거라고 한다면 부처는 그대들의 스승이 아니어야 할 것이며, 그대들은 석자(釋子)가 아니어야 할 것이다. 만약 [올바른 근거가] 부처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이는 모두 부처의 말씀인데, 어떻게 올바른 근거가 아니라고 하는 것인가?(세친)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모두 부처의 참된 말씀이 아니다"고 하였다.103)(독자부)
그 까닭이 무엇인가?(세친)
우리 부파에서 외워 전승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독자부)
이는 지극히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다.(세친)
무엇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인가?(독자부)
이와 같은 경문은 모든 부파에서 모두 외워 전하는 것으로, [연기의] 법성(法性)이나 그 밖의 다른 경에도 위배되지 않거늘 감히 이에 대해 빈번히 '우리가 외워 전승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의 참된 말씀이 아니다'고 비방하고 부정하는 것은 오로지 흉악하고도 미치광이가 그러할 뿐이기 때문에 지극히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들 부파(독자부)에도 어찌 '일체법은 모두 비아성(非我性)이다'고 말하는 이러한 경이 없을 것인가? 만약 그들이 '보특가라는 그 소의가 되는 법(즉 5온)과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법(5온)은 모두 비아이다'는 의미로 말할 경우, 이미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마땅히 의식에 의해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식(識)은 두 가지 연(緣)에 의해 낳아진다'고 경에서 판결하고 있기 때문이다.104) 또한 그 밖의 다른 경과는 어떻게 회통하여 해석할 것인가? 즉 계경에서는 설하기를, "비아를 '아'라고 헤아리는 것, 여기에는 상(想)과 심(心)과 견(見)의 전도(顚倒)를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105)(이상 세친)
'아'를 헤아려 전도를 성취하는 것은 비아에 대해 설한 것으로 '아'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닌데,106) 어찌 번거롭게 회통하여 해석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독자부)
[그렇다면] 비아란 무엇인가?(세친)
이를테면 온·처·계를 말한다.(독자부)
이는 바로 앞에서 '보특가라는 색 등의 온과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고 설한 것에 위배되지 않는가? 또한 또 다른 경에서 설하기를, "필추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일체의 사문 바라문 등으로서 '아' 등과 그에 따른 관견(觀見)을 주장하는 모든 이는 그러한 일체의 주장을 오로지 5취온상에서 일으킨다"고 하였다.107) 따라서 '아'를 근거로 하여 아견(我見)을 일으키는 일은 없으며, 다만 비아의 법을 그릇되이 분별하여 '아'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또 다른 경에서 말하기를, "여러 숙주(宿住)에 대한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기억과 미래의 기억, 그러한 일체의 모든 기억은 오로지 5취온상에서만 일어난다"고 하였다.108) 따라서 결정코 보특가라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세친)
1) '나는 과거세에 ……였다'는 경증 ▲ 위로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이 경에서는 다시 "나는 과거세에 이와 같은 색 등으로 존재하였다"고 설하고 있는 것인가?109)(독자부)
이 경은 숙주의 한 상속 중에 여러 일들이 있었던 것을 능히 기억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만약 실유의 보특가라가 존재하여 과거 생에 능히 색 등으로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관찰한 것이라고 한다면 어찌 유신견(有身見)을 일으키는 과실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혹은 마땅히 '이러한 경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방하고 부정하여야 할 것이다.110) 그렇기 때문에 이 경은 총상(總相)의 가아(假我)에 근거하여 '색 등으로 존재하였다'고 말한 것이니, 그것은 마치 [곡물]더미[聚]와도 같고, [물의] 흐름과도 같다.111)(세친)
(1) 일체지자(一切智者)의 의미 ▲ 위로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세존께서는 마땅히 일체지(一切智)가 아니어야 할 것이니, 심·심소로써는 찰나찰나에 변이 생멸하는 일체법을 능히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아'가 존재한다고 인정한다면 일체법을 능히 두루 알 수 있을 것이다.112)(독자부)
그럴 경우 보특가라는 마땅히 상주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니, 마음이 소멸할 때 이것은 소멸하지 않는 것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는 바로 그대들이 인정하는 종의에 어긋나게 될 것이다.113) 우리들은 '부처님께서는 일체법에 대해 능히 단박에 두루 알기 때문에 일체지자(一切智者)라고 이름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상속신에 [일체지를] 감당할 만한 공능[堪能]을 가졌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그렇게 말한 것일 뿐이다. 이를테면 부처라는 명칭을 획득한 이는 제온의 상속에 이와 같은 [일체지를] 감당할 만한 뛰어난 공능(즉 一切智德)을 성취하여 문득 작의(作意)할 때 알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 전도됨이 없는 지(智)가 일어나기 때문에 '일체지'라고 이름한 것으로, 한 찰나[一念]에 능히 단박에 [일체의 경계를] 두루 안다는 뜻이 아니다. 그래서 이에 대해 이와 같은 게송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마치 불이 일체를 삼켜 버리듯이
상속신에 감당할 공능이 있기 때문이니,
이처럼 일체지(一切智)라고 함은
두루 단박에 알기 때문이 아니다.114)
상속신에 근거하여 일체법을 아는 것이라고 설할 뿐, 자아가 두루 아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독자부)
불세존께서 3세에 존재한다고 설하셨기 때문이다.(세친)
어디서 설하고 있는 것인가?(독자부)
이를테면 어떤 게송에서 말한 바와 같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도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현재의 모든 부처님도
모두 중생의 근심을 멸하시네.115)
그대의 종의에서는 오로지 온(蘊)만이 3세에 존재하며 수취취(數取趣, 보특가라)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결정코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독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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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주 : ▲ 위로
1) '진'이란 유정을 죽이려고 하는 심소이고, '해'는 유정을 괴롭히려고 하는 심소이며, 불흔위 즉 '기뻐 하지 않음'이란 경계에 탐착하여 온갖 선품에 즐거이 머물지 않게 하는 것, 다시 말해 다른 유정이 괴로움을 떠나 즐거움을 획득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않는 것으로, '질(嫉)'을 본질로 하며, '욕계의 탐·진'이란 욕 계의 경계에 대해 기뻐 즐거워하는 마음을 일으켜 싫어함이나 만족함이 없는 것을 말한다.
2) 이는 유부의 정설이다. 그러나 자·비의 본질이 다 같이 무진(無瞋)이라면 양자의 차별은 무엇인가? 중 현에 의하면, 비록 자성상으로는 어떠한 차별도 없을지라도, 자무량은 유정을 죽이려고 하는 진에를 능히 대 치하여 기쁨[歡]의 행상을 일으키지만, 비무량은 유정을 괴롭히려는 진에를 능히 대치하여 근심[戚]의 행상을 일으킨다.(『현종론』 권제40, 한글대장경201, p.617)
3) 이는 논주 세친의 해석이다. 『현종론』(앞의 책, p.618)에 따르면 그는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치상으로도 실로 그와 같을 것이지만, 해꼬지[害]는 진에와 유사하기 때문에 '진'이라는 말로써 설 한 것으로, 비무량의 행상도 역시 무진과 유사하기 때문에 무진이라는 말로 규정하였으나 실제로는 '불해'이 다."
4) 희무량은 다른 이가 괴로움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획득하는 것을 소연으로 삼아 기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본질을 희수라고 한 것이지만, 여기에는 이설이 많다. 『대비바사론』 권제141(한글대장경123, p.363)에서 는 경하하고 위로하는 작의[慶慰作意]와 상응하는 희근, 혹은 선의 심소 중의 '흔(欣)'을 본질로 한다는 이설 을 전하고 있으며, 『현종론』(앞의 책)에서는 '흔'과 '무탐'을 본질로 한다는 이설을 전하고 있다.
5) 보광에 의하면 이는 4무량 모두와 상응·구유법의 본질을 밝힌 것이다. 그런데 『대비바사론』 권제81( 한글대장경121, p.141)에 의하면, 4무량을 상응·수전법과 함께 취할 경우 욕계의 그것은 4온을 본질로 하며, 색계의 그것은 5온을 본질로 한다. 즉 욕계는 수전색이 없지만, 색계에는 정구계(定俱戒)의 수전색이 존재하 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6) 이는 논주 세친의 해석이다. 즉 사(捨)는 욕계의 탐과 진을 대치하므로 무탐과 무진을 본질로 하는 것 이라고 해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1법에 두 가지 본질이 있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사'는 탐도 아 니고 진도 아닌 마음의 평등성 즉 무경각성(無警覺性)을 말하기 때문에(본론 권제4 주27 참조) 그 같은 과실 은 없다. 다만 본송에서 '무탐'만을 언급한 것은 강성한 것에 따라, 혹은 앞의 비바사사의 설에 따른 것이다.(『광기』)
7) 전도란 괴로운 것 등을 즐거운 것 등이라고 집착하는 것으로(본론 권제19, p.873 참조), 비록 4무량이 유정들로 하여금 실제적인 즐거움을 획득하게 하지는 않을지라도 그것은 다만 이미 획득한 즐거움 등에 대해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즐거움 등을 획득하기를 원하며, 그것은 선한 아세야(즉 意樂)이기 때문에, 또한 그러한 승해의 상(想)은 가상이어서 진실로 집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도가 아니다.
8) 이를테면 욕계에는 미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세 부류의 유정들이 있어 진에 따위 를 낳게 되는데, 만약 미워하고 사랑하는 등의 상을 버릴 경우 바로 진에 등의 번뇌를 조복시켜 제거할 수 있 다. 그러므로 이것의 경계는 오로지 욕계의 유정일 뿐으로, 색·무색계의 유정을 능히 소연으로 삼을 수 없다 . 참고로 대비(大悲)의 본질은 무치(無癡)의 선근이기 때문에 3계의 유정을 모두 소연으로 삼는다.
9) 『잡아함경』 권제21 제567경(대정장2, 149하);『중아함경』 권제21 「설처경(說處經)」(대정장1, p.563중), "비구는 마음이 자무량과 함께할 때 1방(方)에 두루 차 성취하여 노닐고(사유하고), 2방·3방·4방 의 4유(維)·상하·일체에 두루하니, 마음이 자무량과 함께하기 때문에 무결(無結)·무원(無怨)·무에(無恚) ·무쟁(無諍)하여 지극히 광대한 무량의 선을 닦아 일체세간에 두루 차 성취하여 노닐게 된다.…… 비·희· 사무량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10) 이러한 4무량정은 욕계 9품의 혹을 끊어 버린 이욕자(離欲者)가 일으키는 선정으로, 용예 즉 여유가 있을 때 일으키는 공덕이기 때문에 미지정에서는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11) 『대비바사론』 권제81(한글대장경121, p.142)에 의하면 자·비·사무량은 10지와 통하며, 희무량은 욕계와 초정려와 제2정려에 의지한다.
12) 번뇌는 오로지 제법의 공상(共相)을 소연으로 하는 진실의 작의에 의해서만 끊어진다. 즉 4무량의 승 해작의는 일체의 유정을 소연으로 하여 일시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같은 가상관(觀)으로써는 번뇌를 끊 을 수 없는 것이다.
13) 여기서 '자(慈) 등'이란 자·비·사의 세 무량을 말한다. 즉 앞에서 설하였듯이 희무량은 오로지 초정 려와 제2정려에서만 존재한다.
14) 『현종론』 권제40(앞의 책, p.626)에서는 처중도 역시 상·중·하품으로 나누어 모두 9품으로 분류하 고 있다. 여기서 상품의 친우란 일체의 유정이 그의 극중한 은혜를 지고 있는 살아 있는 법신(法身)을 말하며 , 중품의 친우란 재물과 법으로써 교제하는 이를, 하품의 친우란 오로지 재물로써만 교제하는 이를 말한다. 또한 상품의 원수란 명예나 생명, 혹은 친우를 앗아간 이를, 중품의 원수란 자신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재 와 도구를 빼앗아간 이를, 하품의 원수란 친우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도구와 자재를 빼앗아간 이를 말한다. 참고로 상품의 처중이란 일찍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 중품의 처중이란 비록 듣고 보았을지라도 교류·왕래 가 없었던 이, 하품의 처중이란 비록 교류·왕래가 있었다 할지라도 은혜를 입거나 원수진 일이 없었던 이를 말한다.
15) 만약 무시(無始) 이래 자주 익혀 성취된 악한 아세야로 인해 조그마한 핍박이나 괴로움을 당하여 깊은 한(恨)을 품고서 그 같은 승해를 멈추게 될 경우, 다시 분발하여 그의 막중한 은혜를 생각하고서 그에게 즐거 움을 주려는 의요를 다시 낳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여 원한의 마음이 영원히 사라지고, 즐거움을 주려는 승해 가 끊어지지 않고 상속할 때 자무량이 성취된 것이라고 한다.(위의 논)
16) 즉 단선근자의 용모가 단정하고 독각의 용모가 추한 것은 과거 복업과 죄업의 과보로서, 단선근자에게 도 좋은 점이 있을 수 있고, 성자에게도 과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자무량을 닦고자 하는 이는 한결같이 좋 은 점만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
17) 처중은 미워하지도 않고 탐착하지도 않는 것이어서 버리기가 쉽기 때문에 먼저 버리고서, 다음으로 하 ·중·상품의 원수를 버리고, 다시 하·중·상품의 친우(가장 버리기 어렵기 때문에 제일 뒤에 닦는 것임)를 버려 마침내 일체 유정에 대한 평등심을 획득할 때 사무량을 성취하게 된다.
18) 즉 희무량은 초정려와 제2정려에서만 일어나며, 그 밖의 자·비·사무량은 4정려와 미지정과 중간정의 6지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19) 내유색상관외색해탈(內有色想觀外色解脫). 내적으로 색신을 탐하는 색상(色想)이 있어 이러한 탐심을 없애기 위하여 부정(不淨)한 푸르죽죽한 어혈 등의 외적인 색을 관찰하여 그것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
20) 내무색상관외색해탈(內無色想觀外色解脫). 내적으로 색신을 탐하는 색상은 없지만, 이를 보다 견고하 게 하기 위해 부정한 외적인 색을 관찰하여 그것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
21) 정해탈신작증구족주(淨解脫身作證具足住). 청정한 색을 관찰하여 탐심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을 '정 해탈'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해탈이 관행자의 몸에 증득되어[身作證] 구족·원만하게 되는 것.
22) 무색정의 공무변처·식무변처·무소유처·비상비비상처 해탈은 각기 하지의 탐에서 해탈한 것으로, 이 는 제4에서 제7의 해탈이다.
23) 온전한 명칭은 멸수상정해탈신작증구족주(滅受想定解脫身作證具足住). 이는 멸진정을 말하는 것으로, 수·상 등의 마음을 싫어하여 무심의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기 때문에 해탈이라고 한 것이다. 즉 여기서 '해탈 '이란 버리거나 등진다[棄背]는 뜻으로, 앞의 두 해탈은 색탐의 마음을, 세 번째 해탈은 부정관의 마음을, 4 무색처해탈은 각각 하지의 마음을, 멸수상해탈은 일체의 유소연의 마음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해탈'이다.( 『대비바사론』 권제84, 한글대장경121, p.202)
24) 즉 탐의 취집(聚集) 중에서 생각이 증대한 것을 '상'이라 하고, 무탐의 취집 중에서 관찰이 증대한 것 을 '관'이라고 하기 때문에 '상관'이라고 말한 것이다.(『구사론기』 권제29)
25) 푸르죽죽한 어혈[靑瘀]이란 피고름이 엉켜 푸르죽죽하게 변한 시체의 모양으로, 청어상·이적상(異赤 想) 등의 부정관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22 주67) 참조할 것.
26) 초·제2정려는 욕계 안식과 초정려의 안식에 의해 일어난 현색탐(청·황·적·백 등의 색상에 대한 탐 욕)을 능히 대치하기 때문이다.
27) 세 번째 해탈은 오로지 청정한 색[淨色]을 관찰하여 탐이 일어나지 않게 된 것으로, 이는 지극히 어려 운 일이기 때문에 수승한 선정에 의지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심(尋)·사(伺)·희수(喜受)·낙수(樂受 )·우수(優秀)·고수(苦受)·출식(出息)·입식(入息)의 8재환(본론 권제28 주84 참조)을 떠나 마음이 징정(澄 淨)하게 된 제4정려에 의해서만 청정한 색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28) 즉 제3·제4정려와 욕계에도 처음 두 가지 해탈과 유사한 해탈이 존재하지만 욕계의 경우에는 욕탐과 뒤섞여 있기 때문에, 제3·제4정려의 경우는 대치되는 법(현색탐)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해탈'이라고 이름하 지 않는 것이다. 또한 아래 세 정려와 욕계에도 세 번째 해탈과 유사한 해탈이 존재하지만 욕계의 경우에는 욕탐과 뒤섞여 있기 때문에, 초정려과 제2정려의 경우는 청정하게 조복되지 않기 때문에, 제3정려 중에서는 낙(樂)에 의해 미란(迷亂)되기 때문이며, 또한 다 같이 8재환에 의해 동요되고 어지럽혀졌기 때문에 '해탈'이 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후술)
29) 여기서 '그 밖의 다른 때'란 목숨을 마칠 때가 아닌 때로서, 이숙생의 심·심소를 말한다.
30) 근분정 중의 일부인 해탈도만이 '해탈'이고, 무간도는 해탈이 아니기 때문에 각각의 근분정을 제4에서 제7의 해탈로 설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는 유부의 정설이다. 즉 '모든 근분지의 9무간도와 8해탈도는 역시 '해탈'이 아니니, 하지를 싫어하여 등진 것[厭背]이 아니기 때문이며, 하지를 대상으로 하는 도가 뒤섞여 있 기 때문이며, 또한 아직 하지의 염오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현종론』 권제40, 앞의 책, p.631)
31) 즉 들어가는 마음[入心]은 '멸진정의 적정'을 소연으로 삼아 비로소 능히 들어가기 때문에 유루이지만 , 그것에서 나오는 마음[出心]은 반드시 멸진정을 소연으로 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유루와 무루 모두와 통 하는 것이다.
32) 본송에서 '욕계에서 볼 수 있는 것[可見]'이란 바로 욕계 색처를 말한다. 즉 첫 번째와 두 번째 해탈 은 부정상(不淨想)을 취하고, 세 번째 해탈은 청정상(淸淨想)을 취한다.
33) 하지의 고·집제 등을 소연으로 삼지 않는 것은, 하지는 저열하기 때문이며, 하지를 이미 배반하였기 때문이지만, 유지품의 도와 그것의 비택멸, 그리고 허공은 소의지에 따른 승렬(勝劣)이 없기 때문에 모두를 소연으로 삼는 것이다.
34) 부처님과 불시해탈의 아라한은 자신의 수명을 늘일 수도 있고 줄일 수도 있다. 예컨대 세존은 100세 혹은 120세의 수명을 80세로 단축하였으며, 열반 직전 3개월간 목숨을 연장하였다.(이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3 주 41, 42를 참조할 것)
35) 『중아함경』 권제24 「대인경(大因經)」(대정장1, p.582상), "……다시 정해탈(淨解脫)을 몸으로 작 증하고서 성취하여 노니나니, 이를 제3해탈이라고 한다.……다시 일체의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의 상(想)을 건너 멸해탈(滅解脫)을 알아 몸으로 작증하고서 성취하여 노닐며, 아울러 모든 번뇌가 다하였음을 혜관하여 아니, 이를 제8해탈이라고 한다."
36) 『대비바사론』 권제152(한글대장경124, p.49)에는 이를 포함한 여섯 이설이 언급되고 있다. 즉 "…… 정해탈은 색계의 끝(혹은 제4정려의 끝)에서 일어나며, 상수멸해탈(想受滅解脫)은 무색계의 끝(혹은 비상비비 상처정의 끝)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혹은 정해탈은 비록 색의 청정상을 취할지라도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수승하며, 상수멸해탈은 마음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몸의 힘으로 일으킬 뿐 마음의 힘으로 일으키지 않기 때문 에……세존께서 '신작증'이라 일컬으신 것이다."
37) 내유색상관외색소(內有色想觀外色少). 내적으로 색신을 탐하는 색상(色想)이 있어 이를 대치하기 위해 외부의 적은 색을 관찰하여 죽은 시체의 푸르죽죽한 어혈 등으로 여기는 것을 말한다.
38) 내유색상관외색다(內有色想觀外色多). 앞의 주에 준하여 알 것.
39) 내무색상관외색소(內無色想觀外色少). 내적으로 색신을 탐하는 상은 없지만, 보다 견고하게 하기 위해 외부의 적은 색을 관찰하여 죽은 시체의 푸르죽죽한 어혈로 여기는 것을 말한다.
40) 내무색상관외색다(內無色想觀外色多). 앞의 주에 준하여 알 것.
41) 내무색상관외청·황·적·백색(內無色想觀外靑·黃·赤·白色). 내적으로 색신에 대한 애탐이 없으면 서, 다만 마음을 책려하기 위해, 혹은 번뇌를 경계하기 위해 외부의 청·황·적·백색을 관찰하여 탐이 일어 나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42) 여기서 '승처'라고 하는 말은 경계를 능히 제압하고 조복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이를테면 비록 일체의 소연이 되는 색경(色境)에 청정하고 빛나고 아름답고 미묘함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할지라도, 선근의 힘이 그것을 능히 압도하고 가려 버리니, 비유하자면 하인이 비록 제아무리 진귀한 의복을 입었을지라도 주인 에게 압도되어 가려지는 것과 같다. 혹은 이러한 처소에서는 전변(轉變)하는 것이 자재하여 이에 따라 더 이 상 번뇌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승처'라고 이름한 것으로, 처소에 대해 수승하기 때문에 '승처'라는 명칭을 설정하였다. 혹은 이러한 선근을 일컬어 바로 '처소'라고 한 것으로, 처소가 능히 수승하기 때문에 '승처'라 는 명칭을 설정한 것이다.(『현종론』 권제40, 앞의 책, p.636)
43) 즉 제1·제2승처는 첫 번째 해탈, 제3·제4승처는 두 번째 해탈, 나머지 네 승처는 제3 정해탈의 과보 로서 각각의 본질과 소의지, 소연은 대응하는 해탈의 그것과 같다.
44) 즉 앞의 세 해탈은 온갖 색을 다만 부정상과 청정상이라고 하여 전체적으로 취할 뿐이지만, 지금의 8 승처는 모든 색에 대해 적고 많고, 푸르고 붉다는 등의 각기 다른 상으로 분별한다. 따라서 앞의 해탈이 단지 색에 대한 욕탐이나 부정상을 버리고 등지게 하는 것이라면, 지금의 8승처는 소연을 분석하고 제압 조복하여 그에 따라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45) 『대비바사론』(권제85, 한글대장경121, p.228)에 따르면 이는 대덕(大德)의 설이다. 유부의 정설은 무간(無間) 광대(廣大)하기 때문에 변처이다. 예컨대 청색 등에 대한 승해작의가 다른 어떤 상과도 뒤섞임이 없기 때문에[不相雜, 즉 무간], 청색 등을 소연으로 하는 승해작의의 대상이 무한하기 때문에[無邊, 즉 광대] '변처'이다.
46) 지계(地界)가 견고성[堅]과 사물의 유지[持]를 본질과 작용으로 하는 대종이라면, 현실의 '지(地)'는 색·향·미·촉의 4처가 합하여 이루어진 현색과 형색의 색처를 말한다.(본론 권제1, p.24 참조) 따라서 변처 는 지계가 아니라 '지'(즉 색처)를 소연으로 삼는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풍(風)과 풍계(風界)의 경우, 풍계 는 운동성[動]과 사물의 동요[長]를 본질과 작용으로 하지만, 현실의 바람 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이같이 설하 게 된 것이다.
47) 본론 권제5의 멸진정의 항목에서 논설하였다. 즉 부처님의 경우 이염득이지만, 그 밖의 성자는 가행득 이며, 욕·색계신에 의지하여 일어나며, 성자만이 일으킬 뿐 이생은 일으킬 수 없다.
48) 일찍이 수습하여 그것을 일으켰던 자는 이염에 의해 획득하지만, 일찍이 수습하지 않아 일으킨 적이 없었던 자는 가행에 의해 획득한다.
49) 즉 가르침은 인취 중에만 있는 것으로, 천취 중에는 없다. 설령 그곳에 현저한 즐거움이 있다 할지라 도 그것을 처음으로 일으킬 수는 없다. 따라서 인취에서 처음으로 일으키고, 그곳에서 물러나 욕계천(天)에 태어난 후 숙세(즉 인취)에서 익힌 힘에 의해 비로소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50) 앞에서 무색정의 해탈과 변처를 제외한 그 밖의 선정은 오로지 성교가 존재하는 욕계 인취의 세 주(洲 )에서만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색·무색계에서는 어떻게 그 같은 선정을 일으킬 수 있는가 하는 물음.(『대비바사론』 권제153, 한글대장경124, p.64-65 참조)
51) 어떤 사람이 무색정을 일으켰거나 혹은 자주 닦다가 물러나 색계에 태어나는 경우, 무색정의 동류인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색계에서 그는 능히 무색정을 일으키는데, 전자를 '가까이서 닦았던 것[近修]에 의한 것' 이라 하고, 후자를 '자주 닦았던 것[數修]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52) 본론 권제12(p.556)의 논설 참조.
53) 제4정려는 8재환을 떠난 부동(不動)이기 때문에(본론 권제28, p.1293), 그것의 하늘에도 화·수·풍의 3재가 없다.(본론 권제12, p.587 말 참조)
54) 계경·조복·대법은 경(sutra)·율(vinaya)·논(abhidharma) 3장을 말한다. 여기서 대법은 단지 승의 의 무루지로 나아가기 위한 방편 자량일 뿐이지만(본론 권제1 참조), 『현종론』 권제40(한글대장경201, p.642)에서는 아비달마를 대법(對法)이라 하지 않고 승법(勝法) 즉 '뛰어난 승의의 법'으로 논설하고 있는데, 이는 세친과는 차별되는 중현 아비달마관이다. 참고로 『분별공덕론』 제1에서는 아비달마를 '대법(大法)' 혹 은 '무비법(無比法)'으로 번역하고 있다.
55) 불타의 정법에는 깨달음 그 자체인 37보리분법과 그것을 언어적 방편을 통해 나타낸 경·율·논이 있 는데, 전자가 승의정법으로 깨달음[自證]의 대상이라면, 후자는 세속정법으로 분별, 즉 이해[敎]의 대상이다. 다시 말해 불타의 깨달음 그 자체는 말로서 드러낼 수 없는 자증의 궁극적 도리[宗趣]이며, 교법은 언어적 개 념적 이해인 가르침의 도리[言敎]이다.
56) '지니는 자[持者]'란 바로 설하는 자[說者]'와 '행하는 자[行者]'를 말하는 것으로, '교'의 정법은 설 하는 자에 의해, '증'의 정법은 행하는 자에 의해 세간에 머물게 되지만, 행하는 자는 교법에도 역시 의지하 므로 증법이 세간에 머물 때 교법도 역시 머물게 된다. 따라서 교법이 세간에 머무는 것은 설하는 자와 행하 는 자 때문이며, 증법이 머무는 것은 다만 행하는 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현종론』 권제40, p.643)
57) 즉 천 년을 지나서는 성법을 획득하지 못할지라도 그 때에도 역시 지니는 자와 설하는 자가 있기 때문 에 천 년을 지나서도 교법은 지속한다는 뜻.
58) 그래서 본론을 대법(對法) 즉 '아비달마'라고 하지 않고 대법장(對法藏) 즉 아비달마코샤(abhidharmakosa)라고 한 것이다.(본론 권제1, p.3 참조)
59) 세친은 '대다수 대법에 근거하였다'고 하여 이 논을 전적으로 가습미라 비바사사의 설에 의존하지 않 았으며, 아울러 경부의 설로써 폄훼하였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중현은 『현종론』 권제40(앞의 책, p.643)에서 '나는 오로지 그것에 의거하여 대법(對法)을 해석하였으니, 혹 그것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의 과실이다(我唯依彼釋對法 或有差違是我失)'로 고쳐 짓고 있다.
60) 가습미라(Kasm ra, 혹은 罽賓, 오늘날 카슈미르)는 북인도 간다라[犍馱羅] 동북쪽의 히말라야 산록에 위치한 나라로서, 바로 『아비달마대비바사론』이 저술된 곳이다.(이에 반해 본론은 간다라에서 저술되었음) 그리고 비바사사(Vaibhasika)란 비바사론(Vibhasa-sastra)을 존중하는 이를 말하는데, 경(經)이나 율(律)을 존중하는 이와 대비된다.
61) 그러나 중현에 의하면 위대한 모니존(牟尼尊)께서만이 모든 법의 올바른 이치를 결정하고 판별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아비달마는 진실로 불설(佛說)이다.
62) 즉 정법의 주세(住世)가 천 년일 경우, 세친의 출세는 불멸(佛滅) 900년이므로 이는 장차 정법이 멸할 때이다.
63) 보광에 의하면 앞의 「정품」 말미의 게송에서 '마땅히 해탈을 추구하여 게으르지 말아야 하리라'고 말한 것을, '이 같은 불타의 정법만이 해탈의 방편으로 그 밖에 달리 해탈의 방편이 없기 때문에 해탈을 구하 는 자는 이러한 정법을 익히는 데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이 같은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64) 이는 이하에서 논의하는 것처럼 독자부(犢子部) 혹은 승론(勝論)의 주장이다. 그렇지만 독자부의 경우 단순히 온을 떠난 개별적 실체로서의 자아가 아니라 '온과 동일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온을 떠난 것도 아 닌, 불가설의 자아[非卽非離蘊我]'를 주장하고 있다.
65) 색·성·향·미·촉의 5경은 안 등의 전5식에 의해 직접지각되며, 법경으로서 관행자(觀行者, 즉 瑜伽 師)의 경계가 되는 것도 직접지각된다. 그리고 등무간멸(전찰나)의 의근은 무간생(후찰나)의 의근에 의해 어 떤 매개물 없이 바로 요별된다.
66) 비록 습도나 광선 온도 등의 온갖 조건[衆緣]이 갖추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그와는 별도의 조건 즉 씨 앗이 없으면 싹이 생겨나지 않는 것처럼 비록 색 등의 대상과 그것을 인식하겠다는 작의(作意) 등의 조건이 갖추어져 있을지라도 안근 등의 5색근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에 대한 인식은 일어날 수 없다. 곧 5식의 작용은 5색근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5식을 통해 5색근의 존재는 추리될 수 있다는 것이다.
67) 즉 보특가라가 실체라면, 그것은 원인으로부터 생겨난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만약 전자라고 한 다면 그것은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결국 무상한 것으로 상주의 실체가 아니어야 할 것이며, 만약 후자라고 한 다면 그것은 바로 허공처럼 원인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닌 무제약적 존재(무위)이기 때문에 외도가 주장하는 자아(atman)와 같은 것이 되고 만다.
68) 보특가라가 만약 무위 즉 무제약적 초월적 존재라면 현상의 어떠한 작용도 갖지 않을 것이고, 만약 작 용이 없다고 한다면 실유의 보특가라를 주장한들 무슨 이익이 있을 것인가 하는 논주 세친의 힐난.
69) 즉 독자부에서 설정한 보특가라는 온과는 독립된 개별적 실재라거나 혹은 그 취합물을 일시 그 같은 명칭으로 일컬은 것이 아니라 다만 현재에 신체 내부에 있으면서 지각하고 인식하는 행위의 주체로서 설정된 개념이라는 뜻.
70) 젖이나 낙(일종의 요구르트)은 색·향·미·촉 등을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화합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은 실유가 아니라 가유이다.
71) 만약 제온의 취집을 원인으로 하여 보특가라를 설정하였다고 한다면 보특가라도 역시 제온과 마찬가지 로 그 자체 가유가 되어야 하며(경량부에 의하는 한 온은 가유이다. 본론 권제1, p.38 주77 참조), 이는 더 이상 독자부가 주장하는 보특가라가 아니다.(『구사론기』 권제29, 대정장41, p.440상) 참고로 본 「파아품」 은 전적으로 경량부의 입장에서 논설되고 있다.
72) 그것이 땔감이든 불이든 현상계의 모든 물질은 견(堅)·습(濕)·난(煖)·동(動)을 본질로 하는 지·수 ·화 ·풍의 4대종과 색(色)·향(香)·미(味)·촉(觸)의 4대소조생의 집적(8事俱生)이지만, 인연에 따라 그 세력이 나타나기도 하고 감추어지기도 한다.(본론 권제4, p.156 초 참조)
73) 전찰나의 젖을 연(緣)으로 하여 후찰나에 낙(요구르트)이 생겨나는 것처럼, 전찰나의 땔감을 연으로 하여 후찰나에 불이 생겨나게 된다는 뜻.
74) 즉 전찰나의 땔감을 연으로 하여 후찰나의 불이 생겨나듯이 자아(보특가라)가 제온을 연으로 하여 생 겨나는 것이라고 할 경우, 여기에서는 다음의 세 뜻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 자아는 제온을 연으로 하여 생겨 난 것이다. 둘째, 자아의 본질은 제온과는 다른 것이다. 셋째, 자아는 일찍이 없다가 지금 존재하므로 무상성 을 성취해야 한다. 그럼에도 독자부에서는 자아를 온과 다른 것이 아니며, 또한 무상한 것도 아니라고 하였으 므로 앞의 설과 모순된다는 것이다.
75) 만약 불과 땔감이 구생하는 것이라면 땔감은 땔감의 원인으로부터, 불은 불의 원인으로부터, 각기 자 신의 과거 동류인으로부터 동시에 생겨난 것이며, 그럴 경우 불은 땔감을 원인으로 하여 생겨났다고 한 앞의 주장과는 모순되는 것이다.
76) 뜨거움을 난촉(火大의 자상)으로, 땔감을 그 밖의 7사(事)로 해석할 경우, 그것들은 각기 존재양태[體 相]가 다르기 때문에 '땔감과 불이 다른 것이라면 땔감은 마땅히 뜨거워지지 않아야 한다'고 한 독자부의 힐 난은 바로 그들 자신에게 적용되고 만다는 뜻.
77) 즉 물[水]이나 바람[風] 혹은 맛[味] 또한 난상(煖相)과 화합하면 뜨거운 물, 뜨거운 바람, 뜨거운 맛 이 되는 것이다.
78) 나무 등이 탈 때를 땔감이라고도 하고 불이라고도 한다면, 다시 말해 불과 땔감이 개별적인 존재가 아 니라고 한다면(개별적 존재라고 한다면 땔감은 뜨겁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무엇을 태워지는 것[所依]이라 하고, 무엇을 능히 타는 것[能依]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즉 불과 땔감은 능의와 소의의 개별적 관계가 아니 듯이 보특가라와 제온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는 뜻.
79) 여기서 '이염'은 소지(所知) 즉 알려지는 대상. 독자부에서는 마땅히 알아야 할 법장(法藏)으로서 과 거·현재·미래의 3세의 5온과 무위법과 바로 이 같은 불가설의 보특가라를 들고 있다. 즉 보특가라는 생사의 유위에서는 5온과의 일이(一異)를, 열반에서는 무위와의 일이를 설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제5의 불가설 법장 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들이 설하는 5종의 소지도 역시 5종이 있다고 설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자아(보특가라)와 앞의 네 법장이 다르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제5의 법장이라고도 설할 수 없으며, 동일하다고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제5의 법장이 아니라고도 설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제5가 아닌 것은 바로 앞의 네 가지 법장인데, 제5라고도 제5가 아니라고도 설할 수 없는 것이라면 단지 앞의 네 가 지 법장만을 설하여야 하지 제5의 법장을 별도로 설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같은 독자부의 5법장설에 대 한 논파는 『성실론』 권제3 「유아무아품」 제35(대정장32, p.260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80) 다시 말해 온이 존재하여야 능히 그 같은 경험의 주체로서의 자아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자아를 알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보특가라는 제온을 근거로 하여 설정하였다고 말한다면'의 뜻.
81) 만약 안식 등이 꽃을 인식하면, '나는 꽃을 보았다'고 생각하므로 자아(보특가라)의 존재는 안 등의 6 식을 통해 확인된다는 것이다.
82) 보특가라는 색상(色相)이 없기 때문에 색과 동일하다고 설할 수 없으며, 불가설이기 때문에 색과 다르 다고도 설할 수 없다. 즉 독자부에서 말하는 보특가라는 보여지고 들려지고 인식되는 것과 같은 것도 아니며 다른 것도 아닌, 그 같은 인식을 통해 추리되는 존재이다.
83) 즉 젖 등이 색·향·미·촉의 4진(塵)과 동일한 것이라고 한다면 젖 등은 색 등을 성취하지 않게 되는 과실이 있으며, 만약 색 등과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젖 등은 4진에 의해 성취된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 과 실을 범하게 된다.
84) 온갖 색은 안(眼) 등의 연(緣)을 요별의 근거로 삼기 때문에 안 등과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면, 꽃을 볼 경우 그것이 눈과 다르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인가 하는 힐난.
85) 존재성[有性] 즉 자상을 갖는 실체로서의 법(法, dharma)은 현량과 비량의 분별에 의해 설정된 것으로 , 분별되지 않은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존재의 유무조차 논의할 수 없다.
86) 색을 요별하는 안식과 보특가라를 요별하는 안식은 동시에 일어날 수 없다.(그럴 경우 2心 不俱起의 원칙에 위배됨) 따라서 자아는 색과 달라야 하는 것이다.
87) 노란색과 푸른색은 각기 개별적인 것으로서, 전자가 인식될 때 후자는 인식되지 않으며, 후자가 인식 될 때 전자는 인식되지 않는다.
88) 즉 색을 능히 요별하는 식과 자아를 능히 요별하는 식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여 색을 능히 요별하는 식 이 바로 자아를 능히 요별하는 식이라고도 설할 수 없으며, 색을 능히 요별하는 식과는 별도로 자아를 능히 요별하는 식이 존재한다고도 설할 수 없다고 한다면……의 뜻.
89) 이 때 '능히 요별하는 식'은 자아처럼 불가설이기 때문에 그것을 유위법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뜻.
90) 『잡아함경』 권제10 제262경(대정장2, p.66중), " 색은 무상이다. 수·상·행·식은 무상이다. 일체 행은 무상이다. 일체법은 무아이고, 열반은 적정이다." ; 동 권제1 제24경(동, p.5중), " 諸所有色……彼一切 非我, 不異我, 不相在……如是受想行識……."
91) 『잡아함경』 권제8 제214경(대정장2, p.54상). 즉 만약 안식이 '아'를 소연으로 하여 일어난다면, 안 식은 안근과 색경과 '아'라고 하는 세 조건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되어 경설에 어긋나게 되는 것이다.
92) 『잡아함경』 권제9 제238경(대정장2, p.57하).
93) 『잡아함경』 권제1 제11경(대정장2, p.2상), " 色無常. 若因若緣, 生諸色者, 彼亦無常. 無常因無常緣 所有諸色 云何有常?"
94) 『중아함경』 권제58 『대구치라경(大拘絺羅經)』(대정장1, p.791중).
95) 『잡아함경』 권제43 제1171경(대정장2, p.313상). 즉 경에서는 제6의근도 자신의 소행처(所行處)와 경계가 있다고 하였지만, 의근은 실제적으로 법경만을 소연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전5근의 소연의 경계로 삼 는다. 그렇다면 이 같은 예에 따라 전5근도 비록 자신의 소행처와 경계만을 수용한다고 하였을지라도 그 밖의 다른 대상을 소연으로 삼는 경우도 고려해 볼 수 있다는 뜻.
96) 5근은 색을 자성으로 하며 전5식은 무분별이기 때문에 견(見)이나 낙(樂) 등의 어떠한 판단도 일어나 지 않는다.('견'이란 먼저 審慮하고 決度하는 것, 즉 제6의식 상응의 혜를 말한다. 본론 권제2, p.86) 그런데 경에서는 '즐거이 추구한다[樂求]'고 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안 등의 6근에 대해 설한 것이 아니라는 뜻.
97) 여기서 '통달되는 것[所達, abhijneya]'은 무간도로서 혜에 의해 달성되며, '알려지는 것[所知, parijneya]'은 해탈도로서 지(智)에 의해 알려진다. 즉 일체법은 모두 '혜'와 '지'에 의해 통달되고 알려지는 것으로, 그렇지 않은 그 밖의 것(이를테면 자아)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98) 『잡아함경』 권제13 권제306경(대정장2, p.87하). 여기서 유정(sattva, 존재자)·불열(nara)·의생(manuja, 마누로부터 태어난 자)·유동(manava, 마누에 소속된 善者)·양자(posa, 能食者로서 생명의 주체)·명자(j va, 能活者, 생명의 원리로써 살아가는 자)·생자(jantu, 能生者)·보특가 라(pudgala, 이기성에 근거한 개체자)는 모두 현상적 인간 일반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철학적 논의의 대상이 될 경우 영속적인 실체를 의미하는 형이상학적 용어가 된다. 즉 이것들은 모두 경험과 변화의 기체(基體)로서 의 자아(혹은 영혼)를 의미한다.
99) 『잡아함경』 권제13 제219경(대정장2, p.91상), " 一切者, 謂十二入處, 眼色耳聲鼻香舌味身觸意法, 是名一切."
100) 앞의 경, " 若復說言, 此非一切. 沙門瞿曇所說一切, 我今捨, 別立餘一切者, 彼但有言說. 問已不知, 增其疑惑. 所以者何? 非其境界故" 참조.
101) 『중아함경』 권제11 『빈비사라왕영불경(頻娑邏王迎佛經)』(대정장1, p. 49중).
102) 『잡아함경』 권제45 제1202경(대정정2, p.327중).
103) 즉 그러한 경들은 모두 후세 사람들이 증광(增廣)한 것이라는 뜻.
104) 만약 보특가라가 의식에 의해 알려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때 의식은 세 가지 연(緣)에 의해 낳아지 게 되므로 경설에 위배된다. 즉 그 때 의식은 의근과 일체법(법경)과 보특가라를 소의와 소연으로 삼아야 하 기 때문이다.
105) 『대집법문경』 권상. 본론 권제19, 주59) 참조.
106) 비아를 '아'로 헤아리는 것이 전도이지 '아'를 '아'로 헤아리는 것은 전도가 아니라는 뜻.
107) 『잡아함경』 권제2 제45경(대정장2, p.11중), " 諸沙門婆羅門見有我者, 一切皆於此五受陰見我."
108) 앞의 경 제46경(대정장2, p.11중), " 沙門婆羅門 以宿命智自識種種宿命, 已識當識今識, 皆於此五受陰 , 已識當識今識."
109) 같은 경, "我過去所經, 如是色, 如是受, 如是想, 如是行, 如是識.(나는 과거세 이와 같은 색이었고, 이와 같은 수였고, 이와 같은 상이었고, 이와 같은 행이었고, 이와 같은 식이었다.)" 즉 기억의 주체로서 '나 '를 설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경증. 이하 독자부의 논란과 이에 대한 세친의 해명이 논설되고 있다.
110) 즉 경에서 설한 '나'를 실유의 보특가라로 해석한다면, 이러한 경은 마땅히 유신견을 일으키게 하는 과실로 인해 존재 자체가 부정되어야 한다는 뜻.
111) '아'라고 하는 것은 곡물더미처럼 제온이 인연화합하여 생겨난 가법(假法)이기 때문에 단일하지 않으 며, 흘러가는 강물처럼 상속하므로 부동의 영속체가 아니다.
112) 만약 지속의 자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찰나멸하는 일체법을 역시 또한 찰나멸하는 심·심소로써 능 히 알 수 없으며, 설혹 안다고 할지라도 그 같은 인식 또한 찰나멸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참된 인식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부처 역시 일체지자라고 할 수 없다는 뜻.
113) 즉 독자부에서 설하는 보특가라는 상주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없고[非離蘊] 무상한 것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非卽蘊]이다.
114) 즉 불이 단박에 일체의 세계를 태워 버리기 때문에 '일체를 집어 삼킨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점차로 태우지만 마침내 일체의 세계를 태울 만한 공능을 지녔기 때문에 그같이 말한 것처럼 '일체지'라는 말도 다만 상속신상에 그 같은 공능을 지니고 있음을 말한다는 뜻.
115) 『잡아함경』 권제44 제1188경(대정장2, p.322상), " 過去等正覺及未來諸佛 現在佛世尊能除衆生憂." 즉 단박에 두루 일체지를 성취하는 것이라면 이처럼 3세에 각기 다른 부처가 존재할 필요가 어디에 있을 것인 가? 상속신에 근거하여 일체법을 알기 때문에 각각의 시간에 각각의 부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 위로
[출처: 동국역경원]
파집아품구사론
[제30권] 9. 파집아품(破執我品) ②
존자 세친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권오민 국역
▒ 목 차 ▒
Ⅱ. 독자부의 비즉비리온아(非卽非離蘊我) 비판
3. 독자부의 논란에 대한 해명과 비판
2) '무거운 짐(오온)을 진 자'의 경증
3) '화생(化生)의 유정'에 관한 경증
4) '하나의 보특가라가 존재한다'는 경증
5) 신명일이(身命一異)의 무기
(1) 그 밖의 세 종류의 무기설의 의미
6) '무아를 주장하면 악견처에 떨어진다'는 경증
7) 생사유전의 주체
8) '나는 옛날 세간의 도사(導師)였다'는 경증
(1) 독자부와 관련하여 공견(空見)과 아견(我見) 비판
9) 기억에 관한 논란
(1) 기억과 재인식
(2) 능히 기억해 내는 주체
(3) 기억의 소유자
■ 각 주
Ⅲ. 수론(數論,혹은 문법학자)의 유아론 비판
1. 수론의 일반적 주장과 이에 대한 비평
2. 특수한 논란에 대한 해명
1) '천수는 간다'에서의 '천수'와 '간다'
2) '의식이 소연을 요별(了別)한다'는 말의 의미
3) 전후 의식의 유사성과 결정성
Ⅳ. 승론(勝論)의 유아론 비판과 경량부(經量部)의 종자상속론
1. 승론의 일반적 주장과 이에 대한 비판
2. 특수한 논란에 대한 해명과 비판
1) 업을 짓는 까닭과 자아관념[我執]
2) 고락(苦樂)의 향수자
3) 업의 작자와 과보의 향수자
4) 비유정물에 대한 업
5) 업의 상속 ― 상속의 전변과 차별
6) 이숙과와 종자
Ⅴ. 유통분(流通分) ― 결어
Ⅱ. 독자부(犢子部)의 비즉비리온아(非卽非離蘊我) 비판
3. 독자부의 논란에 대한 해명과 비판
2) '무거운 짐(오온)을 진 자'의 경증 ▲ 위로
그러나 만약 오로지 5취온만을 보특가라라고 이름한다면, 어째서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 것인가? "내 지금 그대들을 위하여 온갖 무거운 짐[重擔]과, 무거운 짐을 취하고 버리는 것과, 무거운 짐을 지는 자에 대해 설하리라."1)(독자부)
어째서 부처는 이 같은 말을 응당 설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세친)
'무거운 짐'이 바로 '능히 지는 자'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2)(독자부)
그 까닭이 무엇인가?(세친)
그 같은 사실은 일찍이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독자부)
그렇다면 설할 수 없는 것(즉 불가설 법장인 보특가라) 역시 마땅히 설해서는 안 될 것이니, 왜냐 하면 그것 역시 일찍이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대들의 주장대로라면] '무거운 짐을 취하는 것'도 마땅히 온에 포섭시켜서는 안 될 것이니, 무거운 짐(즉 5온)이 스스로를 취한다는 것은 일찍이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3) 그렇지만 경에서는 애(愛)를 설하여 '무거운 짐을 취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것(애)은 이미 온에 포섭되고 있다. '짐을 지는 자'의 경우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으로, 제온상에 수취취(數取趣, 보특가라 즉 짐을 지는 자)를 설정한 것일 뿐이다.4) 그리고 이러한 보특가라는 바로 불가설(不可說)이고 상주(常住) 실유(實有)의 존재라고 여길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 경 후반부에서 스스로 해석하여 "다만 세속(世俗)에 따라 '이 구수(具壽, 제자)는 이와 같은 이름을 가졌다'고 설한 것일 뿐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말하였던 것으로, 앞에서 인용한 『인경(人經)』에서의 문구과 같다.5) 그것은 바로 이러한 보특가라가 설할 수 있는 것이고, 무상하며, 실유의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즉 5취온 스스로가 서로를 핍박하고 해침으로 '무거운 짐'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으며, 전전(前前) 찰나의 5온이 후후(後後) 찰나의 5온을 인기하기 때문에 그것(후후 찰나의 5온)을 일컬어 '짐을 진 자'라고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보특가라는 실유가 아니다.(세친)
3) '화생(化生)의 유정'에 관한 경증 ▲ 위로
보특가라는 결정코 마땅히 실유여야 할 것이니, 계경에서 "화생(化生)의 유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하는 모든 이는 사견(邪見)에 포섭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6)(독자부)
누가 화생의 유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던 것인가? 부처님께서 설하였듯이 우리도 화생의 유정이 존재한다고 설하니, 이를테면 온이 상속하여 능히 후세에 이르면서 태(胎)·난(卵)·습(濕)에 의하지 않은 것을 화생의 유정이라 이름한다. 곧 이를 부정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기 때문에 사견에 포섭되는 것으로, 화생의 제온은 이치상 실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사견은 바로 보특가라를 비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대들은 마땅히 이 같은 사견이 무엇에 의해 끊어지는 것인지에 대해 말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견·수소단이라고 하는 것은 이치상 모두 옳지 않으니, 보특가라는 4제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7) 사견은 마땅히 수소단이 아니기 때문이다.(세친)
4) '하나의 보특가라가 존재한다'는 경증 ▲ 위로
만약 경에서 "하나의 보특가라가 있어 세간에 태어나 존재한다"고 설하고 있으니, 이는 마땅히 온이 아니어야 할 것이라고 한다면,8) 이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이는 [5온의] 총합[總]에 대해 일시 '하나'라고 설한 것이기 때문으로, 마치 세간에서 하나의 참깨, 하나의 쌀, 하나의 무더기, 하나의 언어라고 설하는 것과 같다.9) 혹은 보특가라는 마땅히 유위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니, 계경에서 '세간에 태어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세친)
여기서 '태어난다'고 하는 말은 '온이 새로이 일어난다'고 하는 뜻과 같은 것이 아니다.(독자부)
그러면 어떤 뜻에 근거하여 '세간에 태어나 존재한다'고 설한 것인가?(세친)
지금 여기서는 [전찰나의 온과는] 다른 온[別蘊]을 취한다는 뜻에 근거한 것으로, 이를테면 세간에서 '능히 제사 지내는 이가 태어났다' '문법학자가 태어났다'고 설하는 것과 같으니, 그들은 명론(明論) 즉 학문을 성취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세간에서 '필추가 생겨났다'거나 '외도가 생겨났다'고 설하는 경우와 같으니, 수계의식(儀式)을 성취하였기 때문이다. 혹은 '늙은이가 생겨났다'거나 '병자가 생겨났다'고 설하는 경우와도 같으니, [이전과는] 다른 어떤 상태[位]를 성취하기 때문이다.10)
부처님께서는 이미 그 같은 사실을 부정하셨기 때문에 이러한 해명은 이루어질 수 없다. 즉 『승의공경(勝義空經)』 중에서 설하기를, "업도 존재하고 이숙도 존재하지만, 작자는 인식될 수 없다. 말하자면 능히 이 온을 버리고, 아울러 능히 저 온을 상속하니, 오로지 법가(法假)만은 제외한다"고 하였다.11)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이미 그 같은 사실을 부정하셨던 것이다. 『파륵구나계경(頗勒具那契經)』에서도 역시 "나는 끝내 능히 취하는 자[能取者]가 존재한다고 설하지 않는다"고 설하고 있다.12) 따라서 세간에서 능히 제온은 취하고 버리는 그 어떤 단일한 보특가라도 결정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대가 인용한 '제사를 지내는 이 등이 태어났다'고 하는 사실에서, 그러한 이의 본질이 무엇이길래 능히 이것(보특가라)의 비유로 삼은 것인가? 만약 그같이 제사 지내는 이가 바로 '아'라고 주장한다면 그것(비유)은 상식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며,13) 만약 심·심소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찰나찰나 소멸하고 새로이 생겨나기 때문에 [후찰나의 온을] 취하고 [전찰나의 온을] 버리는 것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며, 만약 소의신(즉 색신)이라고 인정한다면 역시 심 등의 경우와 같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명론(明論) 등이 소의신과 다른 것처럼 온 역시 보특가라와 달라야 하는 것이다.14) 또한 늙거나 병든 두 소의신은 각기 앞의 상태(젊거나 건강한 소의신)와는 다르지만 [병든 몸은 젊은 몸의 변화일 뿐이라고 하는 것은] 수론(數論)의 전변설(轉變說)로서,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비판한 바와 같다.15) 그렇기 때문에 그대가 인용한 ['제사 지내는 이가 태어났다'고 하는 등의] 사실은 비유가 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온은 생겨나는 것이지만 수취취(數取趣)는 그런 것이 아니다'고 주장한다면, 이러한 보특가라는 결정코 온과 다르며, 아울러 영속적인 것이라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보특가라는 오로지 단일한 것이며 온의 본질은 다섯 가지인데, 어찌 이것과 온이 다른 것이라고 설하지 않는 것인가?(이상 세친)
만약 그렇다면 대종에는 네 가지가 있고 조색(造色)은 오로지 한 가지인데, 어찌 조색이 대종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인가?16)(독자부)
이는 그들 종의의 허물이다.(세친)
무엇이 그들의 종의인가?(독자부)
조색을 바로 대종으로 간주하는 온갖 논(論)이 바로 그들의 종의이다. 그러나 만약 그들의 견해와 같다고 한다면 응당 마땅히 이같이 말해야 할 것이니, 온갖 조색이 바로 4대종이듯이 역시 마땅히 5온이 바로 보특가라라고 해야 할 것이다.(세친)
5) 신명일이(身命一異)의 무기 ▲ 위로
만약 보특가라가 바로 제온이라고 한다면 세존께서는 어찌하여 영혼[命者, j va]이 바로 육신[身]이라고 언표[記]하지 않은 것인가?17)(독자부)
능히 묻는 자의 아세야(阿世耶, 意樂, 즉 의도)를 관찰하였기 때문이다. 즉 문자(問者)는 '내적으로 작용하는 단일한 사부(士夫, 즉 푸루샤) 자체는 실유로서 허망하지 않으니, 이것을 일컬어 영혼이라 한다'고 주장하여, 이 같은 주장에 의거하여 부처님에게 '[영혼은] 육신과 동일한 것인가, 다른 것인가'하고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혼은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육신과] 동일하다거나 다르다고 하는 말은 성립할 수 없는데, 어찌 육신과 동일하다거나 다르다고 언표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마치 거북의 털이 딱딱한가 부드러운가에 대해 언표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옛날의 여러 논사들은 이미 그 같은 문제[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명하고 있다. 옛날 용군(龍軍, Nagasena)이라 이름하는 대덕(大德)이 있었는데, 3명(明)·6통(通)에 8해탈(解脫)을 갖추고 있었다.18) 그 때 필린타(畢鄰陀, Milinda)라고 하는 왕이 있어 대덕의 처소에 이르러 이와 같이 설하였다. "내가 지금 여기에 온 뜻은 의심나는 바를 청하여 묻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문들은 많은 말을 하기 좋아하는 성질입니다. 그러니 만약 존자께서 능히 바로 대답하여 주신다면 나는 마땅히 청하여 묻겠습니다."
대덕이 그 청을 받아들이자 왕이 물어 말하였다. "영혼[命者]과 육신은 동일하다고 해야 합니까, 다르다고 해야 합니까?"
대덕이 답하여 말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마땅히 말할 수가 없습니다."
왕이 말하였다. "어찌 앞에서 [바로 대답해 줄 것을] 요청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지금 말을 달리하여 묻는 바에 대답하여 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대덕이 물어 말하였다. "나는 의심나는 바를 묻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모든 국왕들은 많은 말을 하기를 좋아하는 성질입니다. 그러니 만약 왕께서 능히 바로 대답하여 주신다면 나는 마땅히 물어보고자 합니다."
왕이 바로 그의 말[敎]을 받아들이자 대덕이 물어 말하였다. "대왕 궁중의 모든 암라수(菴羅樹, amra)에 맺힌 과실은 그 맛이 시다고 해야 합니까, 달다고 해야 합니까?"
왕이 말하였다. "궁중에는 본래 이 나무가 없습니다."
대덕이 다시 따져 물었다. "일찍이 다짐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지금 말을 달리하여 묻는 바에 대답하여 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대왕이 말하였다. "궁중에는 본디 이 나무가 없는데, 어찌 그 과실이 달다 시다 말할 수 있겠읍니까?"
대덕이 말하였다. "영혼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데, 어찌 육신과 동일하다거나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이상 세친)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어째서 영혼은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하지 않은 것인가?(독자부)
역시 또한 묻는 자의 아세야를 관찰하였기 때문이다. 즉 문자(問者)는 제온의 상속을 영혼이라 하고, 이에 근거하여 물음을 던졌던 것이다. 그런데 만약 세존께서 '영혼은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셨다면, 그는 사견(邪見)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설하지 않은 것이니, 그는 아직 능히 연기의 도리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정법(무아)을 받아들일 그릇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가유(假有)라고도 설하지 않은 것으로, 이치상 필시 그러해야 할 것이니, 세존께서 설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세존께서는 아난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벌차(筏蹉, Vatsa)라는 성을 가진 어떤 한 출가외도가 나의 처소에 이르러 '자아(나)는 세간에 존재한다고 해야 합니까,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대해 아무런 언급[記]도 하지 않았다. 왜냐 하면 만약 존재한다고 말하였다면 법의 진리에 어긋나게 될 것이니, 일체의 법은 모두 무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면 그의 우혹(愚惑)은 증가하게 될 것이니, 그는 바로 '나는 일찍이 존재하였는데 지금 존재하지 않는구나'라고 말하였을 것이다.19) 자아가 존재한다고 집착하는 어리석음에 비해 이러한 어리석음이 더욱 심한데, 말하자면 자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면 상변(常邊)에 떨어지지만, 만약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바로 단변(斷邊)에 떨어지는 것이다."20) 그리고 이러한 두 변의 경중(輕重)에 대해서는 경에서 널리 분별하고 있는 바와 같다.21)
나아가 이와 같은 뜻에 근거하여 어떤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견(見)'에 의해 온갖 선업이 손상되고
허물어지는 것을 관찰하시었기에
부처님께서는 마치 암호랑이가
새끼를 다루듯이 정법을 설하신다.
진실의 자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면
'견'의 어금니에 손상을 입게 될 것이고,
세속의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하면
바로 선업의 새끼를 죽이게 될 것이다.22)
다시 게송으로 설하여 말하겠다.
진실의 영혼[命者]이 존재하지 않기에
부처님께서는 동일하다거나 다르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나
가아(假我)마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할까 두려워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설하지 않은 것이다.
말하자면 제온의 상속 중에
업과 과보와 영혼이 존재하는 것으로
만약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한다면
그는 이것(業果)의 존재마저 부정하게 되리라.
제온 중에 가명(假名)의 영혼이
존재한다고 설하지 않은 것은
문자(問者)에게 참된 공(空)을 이해할 만한
능력이 없음을 관찰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벌차종족(種族)의
의요(意樂)의 차별을 관찰하였기 때문에
그가 자아의 존재유무를 물었음에도
부처님께서는 유무를 답하지 않으신 것이다.
(1) 그 밖의 세 종류의 무기설의 의미 ▲ 위로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어떠한 이유에서 세간의 상(常) 등에 대해서는 언표하지 않은 것인가?23)(독자부)
역시 문자의 아세야(阿世耶)를 관찰하였기 때문이다. 즉 문자가 만약 자아를 주장하여 그것이 세간이 되었다고 한다면, 자아 자체는 완전히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네 가지 언표는 모두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24) 만약 생사[의 5온]을 주장하여 그것을 모두 세간이라고 말하였다면, 부처님께서 네 가지 종류로 언표하였을지라도 역시 모두 이치에 맞지 않을 것이다. 즉 만약 [생사의 세간이] 영원[常]하다면 열반을 획득하는 일이 없을 것이며, 만약 영원하지 않은 것[非常]이라면 저절로 단멸하여 아무런 공력(功力)을 들이지도 않고서 모두 열반을 획득해야 할 것이다. 만약 영원하면서 역시 또한 영원하지 않은 것이라고 설한다면 결정코 일부의 유정은 열반을 획득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고, 일부의 유정은 저절로 원적(圓寂)을 증득해야 할 것이다. 또한 만약 영원하지도 않고 영원하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 언표한다면, 열반을 획득하는 일도 없고 열반을 획득하지 않는 일도 없다고 해야 하지만, 이는 결정코 상위(相違)하여 희론(戱論)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성도에 근거하여 반열반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네 가지 결정적인 언표는 모두 이치에 맞지 않으니, 이는 마치 이계자(離繫子)가 참새의 생사를 물었을 때 부처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아시고 결정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것과 같다.25)
나아가 유변(有邊) 등의 네 가지에 대해 역시 언급하지 않은 것도 상(常) 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모두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세친)
이러한 유변 등의 네 가지의 뜻이 '상' 등의 경우와 동일하다는 것을 어떻게 안 것인가?(독자부)
온저가(溫底迦, Uktika)라는 외도가 있어 일찍이 '세간에 끝이 있는가'라고 하는 등의 네 가지를 묻고서,26) 다시 방편을 설하여 세존에게 "온갖 세간이 모두 성도(聖道)에 의해 능히 출리(出離)를 획득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일부만이 출리를 획득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라고 고쳐 물었다. 이에 존자 아난(阿難)이 그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이 일에 대해 이미 세존에게 물어 놓고서 지금 어떤 이유에서 말을 바꾸어 다시 묻는 것인가?"라고 하였다.27) 따라서 뒤의 네 가지 분별은 앞의 뜻과 동일한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28)
다시 어떠한 연유에서 세존께서는 '여래는 사후(死後)에 존재하는가?' 하는 등의 네 가지 물음에 대해 언표하지 않은 것인가?
역시 문자의 아세야를 관찰하였기 때문이다. 즉 문자는 '이미 해탈한 자아를 일컬어 여래라 한다'고 그릇되게 생각하고서 물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여기서 마땅히 자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이에게 힐난하여 물어보아야 할 것이니, 부처님께서는 어떠한 연유에서 '현재 보특가라가 존재한다'고 언급하였다면서 '여래 사후에도 역시 존재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언표하지 않은 것인가?
그들(독자부)이 말하기를, "상주(常住)에 떨어지게 되는 과실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연유에서 부처님께서는 "자씨(慈氏, 미륵)여! 그대는 내세에 마땅히 부처가 될 수 있을 것이다"고 기별(記別)하였을 것이며,29) 아울러 제자가 몸이 허물어져 목숨을 마칠 때 '아무개[甲某]는 지금 모처에 태어날 것이다'고 언급하였던 것인가?30) 여기에 어찌 상주에 떨어지는 과실이 없다고 하겠는가? 만약 부처님께서 일찍이 보특가라를 보았지만 그가 [반]열반에 들고 나서는 더 이상 보지 못하여 알지 못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언표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면,31) [해탈된 자아에 대해 능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대사(大士)께서 일체지(一切智)를 갖추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혹은 그 같은 자아 자체가 완전히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언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마땅히 인정해야 할 것이다. 또한 만약 세존께서는 보았지만 설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한다면 이온(離蘊)이나 상주(常住)의 허물이 있게 되는 것이다.32) 또한 만약 [해탈된 자아를] 보았다고도, 보지 않았다고도 다 같이 설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결국 부처님은 일체지(一切智)라고도 설할 수 없으며, 일체지가 아니라고도 설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6) '무아를 주장하면 악견처(惡見處)에 떨어진다'는 경증 ▲ 위로
만약 '실로 보특가라는 존재하니, 계경에서 "진실이기 때문에, 지속하기 때문에,33) 결정코 무아(無我)를 주장하는 자는 악견처(惡見處)에 떨어진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경증이 될 수 없으니, 그 경에서는 역시 또한 "결정코 유아를 주장하는 자는 악견처에 떨어진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34)
이에 대해 아비달마 제 논사는 "자아의 유무에 대해 주장하는 것은 다 같이 변집견에 포섭되니, 순서대로 상(常)·단(斷)의 극단[邊]에 떨어지기 때문이다"고 하였다.35) 그 논사가 설한 바가 참으로 이치에 맞으니, "자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면 상변(常邊)에 떨어지고, 만약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 단변(斷邊)에 떨어진다"고 앞의 『벌차경(筏蹉經)』에서 분명하게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36)
7) 생사유전의 주체 ▲ 위로
만약 보특가라가 결정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누가 생사(生死)를 유전(流轉)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즉 생사가 스스로 유전한다고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박가범(薄伽梵)께서도 계경 중에서 "온갖 유정으로서 무명에 덮여 있는 이는 탐애에 계박되어 생사로 치달아 헤매인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에 보특가라는 결정코 존재한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독자부)
그렇다면 이 같은 보특가라는 다시 어떻게 생사를 유전하게 되는 것인가?(세친)
전찰나의 온을 버리고 후찰나의 온을 취하기 때문에 생사를 유전하게 되는 것이다.37)(독자부)
이와 같은 뜻의 종의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따져 비판하였다. 이를테면 들판을 태우는 불이 비록 찰나에 멸할지라도 [전후로] 상속하여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유전한다고 설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제온의 취합[蘊聚]을 일시 유정(보특가라)이라고 가설한 것으로, [이 같은 유정이] 애(愛)와 취(取)를 인연으로 하여 생사를 유전하게 되는 것이다.(세친)
8) '나는 옛날 세간의 도사(導師)였다'는 경증 ▲ 위로
만약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온만이 존재한다면, 어째서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하였겠는가? "지금의 나는 옛적에는 세간의 도사(導師)였으니, 이름을 묘안(妙眼)이라고 하였다."38)(독자부)
이러한 경설에 무슨 허물이 있는 것인가?(세친)
온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39)(독자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옛적에 세간의 도사였다고 하는] 이 같은 '나'는 어떠한 존재인가?(세친)
말하자면 보특가라이다.(독자부)
옛적의 '나'가 지금의 '나'라면 나(자아) 자체는 마땅히 상주하는 것이어야 한다.40) 그러므로 '지금의 나는 옛적에 세간의 도사였다'고 하는 말을 설한 것은 옛날과 지금이 바로 동일한 상속(相續)임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를테면 '이 불은 일찍이 그것을 태웠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41) 만약 진실의 자아가 결정코 존재한다면 오로지 부처님만이 능히 명료하게 관찰할 수 있다고 해야 할 것이며, 관찰하고 나서는 견고한 아집(我執, 즉 자아의 관념)을 낳았어야 할 것이며, 그 같은 아집에 따라 아소(我所, 나의 것)의 집착이 생겨났어야 할 것이며, 이에 따라 응당 마땅히 아와 아소에 대한 애착을 낳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박가범께서도 이와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자아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바로 아소에 대해 집착하는 것이고, 아소에 집착하기 때문에 제온에 대해 다시 아와 아소에 대한 애착을 낳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살가야견(薩伽耶見, 즉 有身見)과 아애(我愛)에 속박되었다고 한다면 이는 바로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 되고, 해탈에서도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42) 그럼에도 '[부처님께서는] 자아에 대해 아애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러한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세친)
그 까닭이 무엇인가?(독자부)
(1) 독자부와 관련하여 공견(空見)과 아견(我見) 비판 ▲ 위로
'내가 아닌 것[非我]을 그릇되게 나[我]라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아애를 일으킬 수 있지만 진실의 자아에 대해서는 아애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는 이와 같은 말은 이론적 근거[理證]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그러한 이(유아론자)는 부처님의 참된 성교(聖敎)와 인연이 없으며, 견해의 부스럼(즉 악견) 만을 일으키는 자일 뿐이다.43)(세친)
이와 같이 어떤 부류에서는 불가설(不可說)의 보특가라가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또한 어떤 부류에서는 일체의 존재 자체[法體]를 전부 부정하여 그것들은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또한 외도들은 진실된 자아[我性]가 별도로 존재한다고 주장하지만,44) 이와 같은 일체의 견해는 참다운 이치가 아니니, 그것들은 모두 해탈을 낳지 못한다는 허물을 능히 면할 수 없다.
9) 기억에 관한 논란
(1) 기억과 재인식 ▲ 위로
만약 일체의 존재[類]에 자아 자체가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찰나멸의 마음이 일찍이 감수하였던 것이나 서로 비슷한 경계에 대해 어떻게 능히 기억하여 아는 것인가?45)(독자부)
이와 같은 기억과 앎(재인식)은 어떤 한 상속의 내적으로 경계를 기억하는 생각인 마음의 차별로부터 생겨난다.46)(세친)
그렇다면 바야흐로 첫 찰나의 기억은 어떠한 마음의 차별로부터 무간에 생겨난다고 해야 할 것인가?(독자부)
그것(기억의 대상)을 근거로 하는 작의(作意)와, [과거의 경계와 지금의 그것이] 서로 유사하며 양자가 서로에게 소속된다는 생각 등을 갖고, 의지하는 몸(즉 감관)이 차별되지 않으며, 근심과 산란 등의 인연에 의해 [기억의] 공덕이 손상되거나 괴멸되지 않은 마음의 차별로부터 일어난다. 그러나 비록 이와 같은 작의 등의 인연을 가졌을지라도 만약 그러한 종류의 마음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같은 기억을 수습할(낳을) 만한 힘이 없을 것이며, 비록 그 같은 종류의 마음의 차별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만약 그와 같은 [작의 등의] 인연을 갖지 않았다면 역시 또한 능히 기억을 수습할 리가 없다. 요컨대 이 같은 두 종류의 조건을 갖추어야 비로소 능히 기억을 수습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온갖 기억이 생겨나는 것은 다만 이 같은 두 가지 조건에 의한 것일 뿐이니, 이것을 떠나 어떤 [기억의] 공능(예컨대 자아)이 존재한다는 것은 관찰되지 않기 때문이다.(세친)
어떻게 다른 마음이 보았던 것을 그 후 또 다른 마음이 능히 기억할 수 있는 것인가? 천수(天授)의 마음이 일찍이 보았던 경계를 그 후 사수(祠授)의 마음이 기억한다는 것은 이치상 있을 수 없는 것이다.47)(독자부)
이러한 힐난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두 사람의 마음은] 서로에게 소속[相屬]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 같은 두 사람의 마음은 서로에게 소속되지 않으니, 이를테면 동일한 상속 중에 인과적 관계[因果性]로서 존재하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48) 우리는 다른 마음이 대상을 보고 또 다른 마음이 능히 기억한다고는 말하지 않으며, 상속이 동일하기 때문에 [전찰나의 마음과 동류의 마음이 능히 기억한다고 말할 뿐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능히 기억하는 마음은 과거의 그 같은 경계를 소연으로 하였던 마음으로부터 인기된 것으로, 이를테면 앞(본론 권제4)에서 논설한 바와 같다. 즉 상속(相續)의 전변(轉變)과 차별(差別)의 힘으로 인해 기억이 생겨나니, 여기에 무슨 허물이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기억의 힘으로 말미암아 그 후 앎[記知, 재인식]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세친)
(2) 능히 기억해 내는 주체 ▲ 위로
자아 자체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가 능히 기억해 낸다고 해야 할 것인가?(독자부)
'능히 기억해 낸다'고 함은 무슨 뜻인가?(세친)
기억[念]에 따라 능히 대상을 파악[取]하는 것을 말한다.(독자부)
대상을 파악하는 것이 어찌 기억과 다를 것인가?(세친)
비록 기억과 다르지 않을지라도 [파악하는 것은] 다만 작자에 의한 것이다.49)(독자부)
작자는 바로 앞에서 논설한 기억의 원인이니, 이를테면 그러한 종류의 마음의 차별인 것이다.50) 그런데 세간에서 '제달라(制怛羅, Caitra)가 능히 기억하였다'고 말할 경우, 이는 다만 5온의 상속을 제달라라는 명칭으로 설정한 것일 뿐이다. 즉 일찍이 보았던 마음으로부터 그 후의 기억이 일어나는 것으로, 이와 같은 이치에 따라 '그가 능히 기억하였다'고 말하는 것이다.(세친)
(3) 기억의 소유자 ▲ 위로
만약 자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는 바로 누구의 기억인가?(독자부)
어떠한 뜻에 근거하여 ['누구의'라고 하는] 소유격[第6聲]을 설하게 된 것인가?(세친)
이 같은 소유격은 주체에 소속된다는 뜻에 근거한 것이다.(독자부)
어떠한 존재[物]가 어떠한 주체에게 소속된다는 것인가?(세친)
이는 마치 소 등이 제달라에게 소속된다고 하는 것과 같다.(독자부)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소의 주인이 되는 것인가?(세친)
이를테면 그 같은 탈것[所乘, 즉 수레]과 그것에서 짠 것[所搆, 즉 우유]과 일을 시키는 것 등에 대해 그가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독자부)
그렇다면 어떠한 처소에서 기억을 [소처럼] 채찍질하여 부리려고 하길래 부지런히 방편을 지어 그 같은 기억의 주인(즉 자아)을 찾아 구하는 것인가?(세친)
기억하고자 하는 대상에서 기억을 채찍질하여 부리려고 하는 것이다.(독자부)
기억을 부리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세친)
이를테면 기억으로 하여금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이다.(독자부)
기이하도다. 이치도 없는 말을 마음대로 하는구나. 어찌 이것(기억)이 낳아지도록 하기 위해 이것을 채찍질하여 부린다고 하는 것인가?51) 또한 자아가 기억을 어떻게 채찍질하여 부린다는 것인가? 기억으로 하여금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인가, 기억으로 하여금 작용[行]하게 하기 위해서인가?(세친)
기억에는 [별도의] 작용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다만 기억으로 하여금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독자부)
그렇다면 [기억으로 하여금 일어나게 하는] 원인을 주인이라 하고, 결과를 능히 그것에 소속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즉 [기억의] 원인이 되는 증상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억이라는] 결과가 생겨나기 때문에 원인을 '주인'이라고 일컬어야 할 것이며, 결과가 생겨날 때 이는 바로 원인의 소유이기 때문에 능히 소속되는 것이라고 일컬어야 할 것으로, 기억을 낳는 원인이 기억의 주인이 되기에 충분한데, 어찌 수고스럽게 구태여 자아를 설정하여 기억의 주인이라고 할 것인가? 제행(諸行)의 취집(聚集)이 동일한 종류로서 상속하는 것에 대해 세간에서는 다 같이 '제달라'와 '소'라고 시설하고, 제달라를 소의 주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이러한 소의 상속이 다른 곳에서 생겨나게 하고(다른 곳으로 끌고 가고) 또한 변화하여 생겨나게 하는(소의 형상을 다르게 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주인이라고 일컬은 것으로, 여기에 단일한 실체로서의 '제달라'라고 하는 주인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일한 실체로서의 소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그것의 조건이 되는 5온의 상속을] 일시 시설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소의 주인이라고 하는 말 역시 원인과 관계 없는 것이 아니다.
기억이 이미 그렇다고 한다면 기억하여 아는 것[記知, 재인식] 또한 역시 그러하다. 즉 기억의 경우에서 분별한 바와 같이 그러한 앎은 누가 능히 요별하는 것이며, 누구의 앎인가 하는 것 등에 대해서도 역시 마땅히 그 같은 예로써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니, 바야흐로 근(根)과 경(境) 등의 앎의 인연만 앞의 경우와 다를 뿐이며 [그 밖의 사실은] 상응하는 바대로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52)(세친)
Ⅲ. 수론(數論,혹은 문법학자)의 유아론 비판
1. 수론의 일반적 주장과 이에 대한 비평 ▲ 위로
어떤 이는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53) "결정코 자아는 존재하니, 사용(事用, bhava, 현상의 작용)은 반드시 사용자(事用者, bhavit , 즉 작자)를 근거[待]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천수(天授)의 보행'은 반드시 천수를 근거로 해야 하는 것처럼 온갖 '사용'은 '사용자'에 근거해야 하는데, 보행이 바로 '사용'이며, 천수가 '자'(사용의 작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식(識, vijnana) 등으로 존재하는 모든 사용은 반드시 그 소의(所依)가 되는 '능히 요별하는 자(vijnat )' 등을 근거로 해야 한다."(수론)
지금 마땅히 그들을 힐난해야 할 것이니, 여기서 '천수'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만약 바로 실유(實有)의 자아라고 한다면, 이는 앞에서 논파한 바와 같으며, 만약 가유(假有)의 사부(士夫)라고 한다면 그 자체 단일한 존재가 아니어야 할 것이니, 제행(諸行)의 상속상에 일시 이 같은 명칭을 설정하였기 때문이다. '천수가 능히 간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식이 능히 요별한다'의 경우도 역시 또한 그러하다.(세친)
2. 특수한 논란에 대한 해명
1) '천수는 간다'에서의 '천수'와 '간다' ▲ 위로
[만약 사용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이치에 근거하여 '천수는 능히 간다'고 설한 것인가?(수론)
이를테면 찰나생멸하는 제행의 불이(不異)의 상속을 '천수'라는 이름으로 설정한 것이지만, 어리석은 이들은 이를 단일한 실체[一體]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곧 자상속(自相續)이 다른 처소에 생겨나는 원인이 되는 것으로, 다른 처소에 생겨나는 것을 '간다'고 하며, 그 원인을 '가는 자'라고 이름할 뿐이다.54) 바로 이 같은 이치에 근거하여 '천수는 능히 간다'고 설한 것이니, 마치 불꽃이나 소리가 다른 처소로 상속하는 것을, 세간에서는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불꽃이나 소리가 능히 작용[行]한다'고 설하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천수의 [전찰나의] 신(身, kaya, 즉 5온의 집적)이 [후찰나] 식(識)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역시 '천수가 능히 요별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모든 성자들도 세간언설의 이치에 따르기 위해 역시 이같이 설하는 것이다.(세친)
2) '의식이 소연을 요별(了別)한다'는 말의 의미 ▲ 위로
경에서 설하기를, "온갖 식(識)이 능히 소연을 요별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식은 소연에 대해 어떠한 작용을 하는 것인가?(수론)
어떠한 작용도 하는 일이 없다. 다만 대상과 유사하게 생겨났을 뿐이니, 마치 결과가 원인에 따른 것과 같다. 이를테면 결과가 비록 [원인에 대해] 어떠한 작용도 하지 않을지라도 원인과 유사하게 생겨나는 것을 설하여 '원인에 따른다'고 말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식이 생겨나 비록 어떠한 작용도 하지 않을지라도 대상과 유사하게 생겨났기 때문에 그것을 설하여 '대상을 요별한다'고 말한 것이다.55)(세친)
3) 전후 의식의 유사성과 결정성 ▲ 위로
대상과 어떻게 유사한 것인가?(수론)
이를테면 그 같은 대상의 상(相)을 띠는 것이니,56) 그렇기 때문에 모든 식이 비록 [대상뿐만 아니라] 근(根)에도 역시 의탁하여 생겨날지라도 근을 요별한다고 하지 않고 다만 대상을 요별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혹은 식이 대상에 근거하여 상속 생기할 때 전찰나의 식을 원인으로 삼아 후찰나의 식이 인기(引起)되는 것을 설하여 '식이 능히 요별한다'고 하여도 역시 아무런 과실이 없으니, 세간에서는 원인을 작자로 설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종이나 북이 능히 울린다'고 설하는 것처럼, 혹은 '등불이 능히 타오른다'고 설하는 것처럼 '식이 능히 요별한다'고 하는 경우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세친)
어떠한 이치에 근거하여 '등불이 능히 타오른다'고 설한 것인가?(수론)
불꽃의 상속 중에 일시 '등불'이라는 명칭을 설정한 것으로, 등불이 다른 곳에서 상속하여 생겨날 때를 '등불이 능히 타오른다'고 설하였으니, 이와는 다른 별도의 '능히 타오르는 것'(즉 실체로서의 등불)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상속을 일시 '식'이라 이름한 것으로, 다른 대상에서 생겨날 때를 일컬어 '능히 요별한다'고 설한 것이다. 혹은 '색이 존재한다'거나 '색이 생겨난다', '색이 지속한다'고 하여도 여기에 별도의 '존재하는 것'이나 '생겨나는 것', '지속하는 것'(즉 운동의 주체)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식이 능히 요별한다'고 설하는 경우의 이치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세친)
만약 후찰나의 식이 생겨나는 것은 [전찰나의] 식에 따른 것으로, 자아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떠한 연유에서 후찰나의 식은 항상 전찰나의 식과 유사하지 않은 것이며, 아울러 싹이나 줄기, 잎 등의 경우처럼 다음 찰나에 생겨나는 것이 일정하지 않은 것인가?(수론)
유위법에는 모두 주이(住異)의 상(相)이 존재하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모든 유위법은 그 본성[自性法爾]상 미세하게 상속하여 후찰나는 반드시 전찰나와 다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의식을 놓아 선정에 들 때, 신심(身心)의 상속이 [전찰나와] 서로 유사하게 생겨나 후찰나의 그것은 초찰나의 그것과 어떠한 차별도 없어야 하기 때문으로, 마땅히 최후 찰나는 자연적으로 선정으로부터 나간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마음의 상속에도 역시 정해진 순서가 있으니, 만약 이 같은 마음 다음에 그 같은 마음이 마땅히 생겨나야 한다고 할 경우,57) 이 같은 마음 뒤에 반드시 그 같은 마음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또한 [온갖 마음의 상속에는] 일부 그 행상(行相)이 평등한 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능히 서로를 낳게 되고 [그 밖의 다른 마음을 낳지 않게 되니], 종성(種姓, 종류)이 다르기 때문이다.58) 이를테면 여인의 마음은 무간에 몸을 장엄하려고 하거나 혐오스럽다는 마음을 일으키고, 혹은 그녀의 남편이나 그녀의 아들에 대한 마음 따위를 일으키며, 그 후 이러한 온갖 마음의 상속의 전변과 차별에 의해 다시 여인의 마음을 낳게 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여인의 마음은, 후찰나에 일어날 장엄하려고 하거나 혐오스럽다는 마음에 대해서는 그것을 낳게 하는 공능을 갖지만 이와 다른 마음(이를테면 몸을 아무렇게 내버려 두려는 마음)을 낳게 하는 공능은 갖지 않으니, 그것은 종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아가 여인의 마음은 무간에 다수의 마음을 일으킬 수 있다. 그렇지만 다수의 마음 중에서 이전에 자주 일어났던 것과 명료한 것과 가까이서 일어난 것이 먼저 일어나고 그 밖의 것은 뒤에 일어나니, 이와 같은 마음은 닦은 힘[修力]이 강하기 때문이다.59) 그러나 장차 마음을 일으키려는 상태에서 소의신이나 [두드러진] 외적 대상을 소연으로 삼는 경우만은 예외로 한다.(세친)
닦은 힘이 가장 강성한 마음이라면 어찌 항상 자신의 결과를 산출하지 않는 것인가?(수론)
[닦은 힘이 강한] 이러한 마음에도 주이(住異)의 상이 존재하여 [점차 미약해지기] 때문이니, 바야흐로 이러한 주이의 상은 닦은 힘에 의해 낳아진 또 다른 과보가 상속하여 생겨나는 중에도 수순하기 때문이다.60)
Ⅳ. 승론(勝論)의 유아론 비판과 경량부(經量部)의 종자상속론
1. 승론의 일반적 주장과 이에 대한 비판 ▲ 위로
온갖 마음의 품류가 순서대로 상생(相生)하는 인연의 일부분에 대해 나는 이미 간략하게 설하였지만, 그 모두를 이해하는 이는 오로지 세존뿐이니, 일체법 중에 대한 지혜가 자재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뜻에 의거하여 어떤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 마리 공작의 꼬리[輪]에 대한
일체 모든 종류의 원인은
그 어떤 다른 지(智)의 경계가 아니니,
오로지 일체지(一切智)께서만이 아실 뿐이네.
[구체적 형색을 지닌 공작새의] 차별되는 온갖 색(色)의 원인조차 알기 어렵거늘 하물며 심·심소라는 온갖 무색법의 인연차별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인가?61)
어떤 부류의 외도는 이와 같이 주장하고 있다. "온갖 마음이 생겨날 때 그것들은 모두 '아'로부터 생겨난 것이다."62)(승론)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힐난이야말로 그들에게 가장 적절할 것이니,63) 만약 온갖 마음이 모두 '아'로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면 어떠한 연유에서 뒤의 의식은 항상 이전의 의식과 유사하지 않으며, 아울러 [씨앗으로부터] 싹이나 줄기, 잎 등이 생겨나는 것처럼 다음 찰나에 생겨나는 것이 일정하지 않은 것인가?
만약 [자아가] 의식과 '결합'하는 차별에 근거함으로 말미암아 이전과는 다른 의식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치상 결정코 그렇지 않을 것이니, 자아와 다른 어떤 것이 결합한다고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며,64) 또한 ['결합'의 존재를 인정한다 할지라도] 두 가지 실체가 결합하는 것에는 한계[分限]가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 스스로 '결합'의 특상에 대해 해석하여 말하기를, "일찍이 접하지 않은 것[非至]이 그 후 접하게 된 것을 결합이라 이름한다"65)고 하였으므로 자아와 의식의 결합에는 마땅히 한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66) 또한 그럴 경우 의식이 이전(移轉)하기 때문에 자아도 마땅히 이전해야 할 것이며, 혹은 의식과 함께 괴멸하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67) 만약 부분적으로 결합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치상 결정코 그렇지 않으니, 단일한 자아 자체에는 별도의 부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68) 설혹 '결합'을 인정할지라도 이미 자아 자체는 상주하는 것이고, 의식도 별도의 다른 점이 없는 것인데, 결합한다고 하여 어찌 [이전과는] 다른 의식이 생겨난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69)
만약 별도의 '지각[覺]'을 근거로 하여 [이전과는 다른 의식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역시 동일한 난점이 안게 될 것이니, 이를테면 그 때의 지각은 무엇에 의해 다양한 차별이 있게 되는 것인가?70)
만약 '행(行)'의 차별에 근거하여 자아와 의식이 결합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단지 마음만이 행의 차별에 근거하는 경우에도 능히 [이전과는] 다른 의식을 낳을 수 있을 것인데 자아가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71) 자아는 [다양한] 의식을 낳는 데 어떠한 작용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온갖 의식은 모두 자아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약으로써도 능히 고질병을 제거할 수 있는데 돌팔이 의사[誑醫]가 속임수로서 '보사하(普莎訶)'라는 말을 설하는 것과 같다.72)
만약 '이러한 두 가지(마음과 행)는 자아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다만 말일 뿐으로, 그것의 근거가 될 만한 어떠한 이치도 없는 것이다. 또한 만약 '자아는 이러한 두 가지의 소의(所依)가 된다'고 한다면, 무엇이 무엇에 대해 소의가 된다는 뜻인가? 마음과 행은 그림과 같고 과일과 같으며, 자아는 그것을 능히 지니는 벽과 같고 그릇과 같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니, 그와 같다고 한다면 바로 서로를 장애한다는 과실을 범하게 될 것이고, 아울러 혹 어떤 때에는 개별적으로 머물게 된다는 과실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73)(이상 논주 세친)
벽이나 그릇의 경우처럼 자아가 그것(마음과 행)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승론)
만약 그렇다면 어떠한가?(세친)
이러한 자아는 다만 지(地)가 향(香) 등의 네 실체의 소의가 되는 것과 같을 뿐이다.74)(승론)
그들이 그와 같이 말하였다면 이는 바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여 성취하는 것이기에 나는 이에 대해 참으로 기뻐하는 바이다. 즉 세간의 지(地)가 향 등을 떠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자아도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할 것으로, 마음과 행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누가 능히 향 등을 떠난(배제한) '지'를 요별할 수 있을 것인가? 다만 향 등이 취집(聚集)된 것을 세속에서 '지'라고 하는 말로 설정하여 유포한 것일 뿐이다. 자아도 역시 마땅히 그러하여 다만 마음 등의 온갖 온(蘊)의 차별을 일시 '자아'라는 명칭으로 설정한 것일 뿐이다.(세친)
만약 향 등을 떠나 지(地)가 별도로 존재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면 어째서 '지'에 향 등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인가?(승론)
[가설적 존재인] '지' 자체에 향 등이 개별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지'에 향 등이 존재한다고 설하여 다른 이로 하여금 이것('지')은 바로 이 같은 향 등일 뿐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한 것으로, 마치 세간에서 목상신(木像身) 등으로 말하는 것과 같다.75) 또한 만약 실재하는 자아가 행(行)의 차별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째서 동시에 일체의 지(智)를 낳지 않는 것인가?76)(세친)
만약 어느 때 이러한 행의 작용이 가장 강력해지면, 이것이 능히 그 밖의 다른 작용을 막아 결과를 낳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77)(승론)
어찌하여 강력한 작용으로부터 그 결과가 항상 낳아지지 않는 것인가?78)(세친)
답 : 이는 앞서 언급한 반복하여 닦은 힘[修習力, 즉 熏習]의 도리와 같은 것으로서,79) 행은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변이하는 것이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승론)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자아를 주장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 될 것이니, 마음의 차별은 [다양한] 행(行)의 힘에 의해 낳아지기 때문이며, 그러한 행과 이러한 닦은 힘은 본질적으로 어떠한 차이도 없기 때문이다.80)(세친)
자아는 그 자체로서 진실로 존재한다고 결정코 마땅히 믿어야 할 것이니, 기억[念] 등의 속성[德句義]을 갖기 때문이다. 즉 속성은 반드시 실체[實句義]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으로, 기억 등이 다른 어떤 존재에 의존한다는 것은 이치상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81)(승론)
이러한 논증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상식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기억 등은 속성의 범주에 포섭되는 것으로, 그 자체는 모두 실체가 아니다'고 설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니,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모두 실체라고 이름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며,82) 경에서도 여섯 가지의 실체적인 범주[實句]를 설하여 사문과(沙門果)라고 이름하고 있기 때문이다.83) 그리고 그 같은 기억 등이 실유의 자아에 근거한다고 하는 것도 이치상 역시 이루어질 수 없으니, '근거(즉 所依)'의 의미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비판하고 부정한 바와 같기 때문이다.84)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승론에서] 주장한 자아는 다만 헛된 말에 지나지 않는다.(세친)
2. 특수한 논란에 대한 해명과 비판
1) 업을 짓는 까닭과 자아관념[我執] ▲ 위로
만약 자아가 실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무엇 때문에 업을 짓는 것인가?(승론)
내가 응당 고락(苦樂)의 과보를 향수하기 때문이다.(세친)
그 때 '나[我]'의 본질은 무엇인가?(승론)
이를테면 아집(我執) 즉 자아관념의 대상이다.85)(세친)
무엇을 아집의 대상이라고 일컬은 것인가?(승론)
이를테면 제온(諸蘊)의 상속이다.(세친)
어떻게 그러함을 아는 것인가?(승론)
그 같은 제온을 탐애(貪愛)하기 때문이며, 희다는 등의 지각[覺]과 더불어 동일한 처소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86) 이를테면 세간에서 '나는 희다', '나는 검다', '나는 늙었다', '나는 젊었다', '나는 야위었다', '나는 뚱뚱하다'고 말한다. 즉 세간을 현견(現見)하건대 '희다'는 등의 사실을 소연으로 하는 지각과 아집(자아관념)은 동일한 처소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그대가] 주장하는 자아가 이 같은 희다는 등의 지각과 차별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87) 따라서 아집은 다만 제온을 조건[緣]으로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세친)
몸(즉 색온)은 자아를 방호하는 은혜가 있기 때문에 몸에 대해서도 역시 '나'라고 가설하기도 하니, 이를테면 '신하 등이 바로 나의 몸이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88)(승론)
은혜가 있는 것에 대해 실로 '나'라고 가설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온갖 자아관념이 취하는 대상은 그렇지가 않다.89)(세친)
만약 몸을 근거로 하여서도 역시 자아관념을 일으킨다고 인정한다면, 어찌하여 다른 이의 몸을 근거로 하여서는 자아관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승론)
다른 이의 몸과 자아관념은 서로 관계[相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자신의] 몸이나 마음은 자아관념과 서로 관계하므로 이러한 자아관념은 그것을 근거로 하여 일어나지만 다른 이의 그것을 근거로 하여서는 일어나지 않으니, 무시(無始) 이래로 그와 같이 익혀 왔기 때문이다.(세친)
'서로 관계한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승론)
이를테면 인과성을 말한다.90)(세친)
만약 '자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라고 하는 관념[我執]은 누구의 것인가?(승론)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해석하였는데 어찌 다시금 되풀이하여 묻는 것인가? 이를테면 나는 앞에서 이미 "어떠한 뜻에 근거하여 ['누구의'라고 하는] 소유격을 설하게 된 것인가?"라고 묻고서 원인에 결과가 소속된다는 사실에 대해 분별하였다.91)(세친)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자아관념은 무엇을 원인으로 삼는 것인가?(승론)
이를테면 무시(無始) 이래 자아관념이 [종자로서] 훈습되어 자신의 상속을 소연으로 삼아 더럽고 오염된 마음을 낳으니, [이것이 바로 자아관념의 원인이 된다].(세친)92)
2) 고락(苦樂)의 향수자 ▲ 위로
만약 '자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가 고락(苦樂)을 향유하는 것인가?(승론)
만약 이것(자상속의 몸과 마음)에 근거하여 고락이 생겨났으면 바로 이것이 고락을 향유한다고 설하니, 마치 숲이 과실을 향유하고 나무가 꽃을 향유하는 것과 같다.(세친)
그렇다면 고락은 무엇을 근거로 하여 생겨나는 것인가?(승론)
이를테면 내(內) 6처(處)이니, 그것에 의해 일어난 고·낙수에 따라 그러한 고락의 근거가 된다고 설한 것이다.93)(세친)
3) 업의 작자와 과보의 향수자 ▲ 위로
만약 '자아'가 실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가 능히 업을 짓고, 누가 능히 그 과보를 받는 것인가?(승론)
'짓는다'고 하는 것과 '받는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세친)
'짓는다'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능작자(能作者)를 말하고, '받는다'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향수자를 말한다.(승론)
이것은 단지 말만 바꾼 것일 뿐 그 뜻을 드러내지는 못한 것이다.(세친)
법상(法相)을 분별하는 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94) "능히 자신의 힘[自在力]만으로 행하는 자를 일컬어 '작자'라고 하며, 능히 업의 과보를 수령하는 이를 일컬어 '향수자'라고 한다. 세간을 현견하건대 이 같은 사업(事業)을 능히 스스로의 힘으로써 할 수 있는 이를 일러 능작자라고 하니, 이를테면 천수(天授)는 목욕과 식사와 보행을 스스로의 힘으로써 할 수 있기 때문에 '목욕하는 자' 등으로 일컬어지는 것과 같다."(승론)
여기서 그대들은 무엇을 '천수'라고 설한 것인가? 만약 실유의 자아를 설하여 '천수'라고 하였다면 그 같은 비유는 상식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며, 만약 제온을 설하여 천수라고 하였다면 그는 스스로의 힘만으로써 행하는 작자가 아니어야 할 것이다. 즉 업에는 이를테면 신(身)·어(語)·의(意)의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바야흐로 신업을 일으킬 때에는 반드시 몸과 마음에 의지하여야 하고, 몸과 마음은 각기 자신의 인연에 근거하여 일어나며, 나아가 이러한 인연도 다시금 자신의 인연에 의지하여 일어난다. 여기에 스스로의 힘만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일체의 유위법은 인연에 계속(繫屬)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대들이 주장하는 자아는 인연을 근거로 하지 않으며, 또한 역시 어떠한 것도 짓는 일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써 행하는 작자가 아니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그대들은 능히 자신의 힘만으로 행하는 자를 일컬어 '작자'라 한다고 설하였지만, 그러한 형태의 작자는 인식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제법을 낳는 인연 중에 만약 뛰어난 작용을지닌 것이 있다면 그것을 일시 '작자'라고 이름할 수 있다. 그러나 그대들이 주장한 자아는 어떠한 작용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결정코 마땅히 '작자'라고 이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세친)
그렇다면 능히 신업을 낳는 뛰어난 원인은 무엇인가?(승론)
이를테면 기억으로부터 욕락(欲樂)이 낳아지면 욕락은 심(尋)과 사(伺)를 낳고, 심과 사는 노력[勤勇]을 낳으며, 노력은 바람[風, 신업을 인기하는 힘]을 낳으니, 바람이 신업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대들이 주장하는 자아가 이 중의 어떤 작용을 한다고 하겠는가? 따라서 자아는 신업의 작자가 아니다. 나아가 어업과 의업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도 이에 준하여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자아가 능히 업의 과보를 수령한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만약 자아가 능히 과보를 요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결정코 그렇지 않다. 즉 자아는 어떠한 요별의 작용도 갖지 않으니, 이에 대해서는 앞서 의식을 낳는 원인을 분별하면서 이미 부정하고 비판하였기 때문이다.95)(세친)
4) 비유정물에 대한 업 ▲ 위로
만약 '자아'가 실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온갖 비정처(非情處)에 의지하여서는 죄와 복이 생장하지 않는 것인가?96)(승론)
그것들은 수(受) 등의 소의지(所依止)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로지 내(內) 6처(處)만이 바로 그러한 '수' 등의 소의가 될 뿐으로, 자아는 그것의 소의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논설한 바와 같다.(세친)
5) 업의 상속 ― 상속의 전변과 차별 ▲ 위로
만약 '자아'가 실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업은 이미 괴멸하였는데 어떻게 다시 능히 미래의 과보를 낳을 수 있는 것인가?(승론)
설혹 실유의 자아가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업은 이미 괴멸하였는데 어떻게 다시 능히 미래의 과보를 낳을 수 있는 것인가?(세친)
자아에 의지하는 법(法)과 비법(非法)으로부터 생겨난다.97)(승론)
그럴 경우 무엇이 무엇에 의지하는 것과 같은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논파하였으니,98) 그렇기 때문에 법과 비법은 응당 자아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성교(聖敎) 중에서는 '이미 괴멸한 업으로부터 미래의 과보가 생겨난다'고 하는 이와 같은 내용을 설하고 있지 않다.99)(세친)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미래의 과보는 무엇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인가?(승론)
업의 상속(相續)의 전변(轉變)과 차별(差別)에 의해 생겨나니, 마치 종자가 과실을 낳는 것과 같다. 즉 세간에서 '열매는 종자로부터 생겨난다'고 설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지만 열매는 이미 괴멸한 종자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역시 또한 종자가 무간(無間)에 직접적으로 낳는 것도 아니다.(세친)
만약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인가?(승론)
종자의 상속의 전변과 차별로부터 바야흐로 열매가 생겨날 수 있으니, 이를테면 종자가 싹과 줄기와 잎 등을 순서대로 낳고 마침내 최후로 꽃을 낳아 비로소 열매를 인기(引起)하게 되는 것이다.(세친)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떻게 종자로부터 열매가 생겨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승론)
종자가 계속 발전[展轉]하여 꽃 중에 열매를 낳는 공능을 인기하기 때문에 이같이 설한 것으로, 만약 꽃 중의 열매를 낳는 이 같은 공능이 선행한 종자로부터 인기된 것이 아니라면 생겨난 열매의 형상은 마땅히 종자와 달라야 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비록 업으로부터 과보가 생겨났다고 말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괴멸한 업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역시 또한 업으로부터 무간에 직접적으로 과보가 낳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업의 상속의 전변과 차별로부터 생겨날 뿐이다.(세친)
무엇을 일컬어 '상속'과 '전변'과 '차별'이라 한 것인가?100)(승론)
이를테면 먼저 선행하는 업이 있고서 그 후 색심(色心)이 간단(間斷) 없이 일어나는 것을 일컬어 '상속'이라 하고, 이러한 상속의 후후(後後) 찰나가 전전(前前) 찰나와 다르게 일어나는 것을 일컬어 '전변'이라고 하며, 이러한 전변의 최후 찰나에 뛰어난 공능이 있어 무간에 과보를 낳음으로써 여타의 다른 전변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차별'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유취식(有取識)이, 바로 목숨을 마칠 때 비록 후유(後有)를 초래할 만한 다수의 업에 의해 인기된 훈습(熏習, 즉 종자)을 지닐지라도 무거운 업(業)과 가까이서 일어난 업과 자주 익힌 업에 의해 인기된 것이 명료하며, 그 밖의 다른 업에 의해 인기된 것은 그렇지 않으니,101) 어떤 게송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극중한 업과 가까이서 일으킨 업과
자주 익힌 업과 먼저 지은 업 중에서
앞의 것이 먼저, 뒤의 것이 나중에 익으면서
생사를 윤전(輪轉)하는 것이로다.
여기에 차별이 있다면 이숙인에 의해 인기된 종자에는 이숙과를 낳는 공능이 있지만, 이숙과를 낳고 나서는 바로 낙사(落謝)하여 소멸한다. 또한 동류인에 의해 인기된 종자에는 등류과를 낳는 공능이 있는데, 만약 염오한 것이라면 대치도가 일어날 때 바로 낙사하여 소멸하지만 불염오성일 경우 반열반에 들 때 바야흐로 영원히 낙사하여 소멸하니, 색심의 상속이 그 때 영원히 소멸하기 때문이다.102)(이상 세친)
6) 이숙과와 종자 ▲ 위로
종자의 열매[種果]로부터는 또 다른 열매가 낳아지는데, 어떠한 연유에서 이숙과는 이와 달리 능히 이숙과를 낳지 못하는 것인가?(승론)
바야흐로 비유와 법이 모두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종자의 열매로부터 또 다른 열매가 생겨나는 일은 없다는 사실이다.(세친)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또 다른 열매는 무엇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인가?(승론)
뒤의 또 다른 열매는 [종자의 열매가] 그 후 익고 변화하는 숙변(熟變)의 차별에 의해 생겨난다. 이를테면 앞의 종자의 열매가 그 후 물이나 땅 등의 온갖 숙변의 조건을 만나 능히 숙변의 차별을 낳아 바로 싹을 틔우는 상태에 이르러 비로소 '종자'라는 명칭을 얻게 되는데, 아직 숙변의 차별을 낳지 않았을 때에는 미래에 얻게 될 명칭[當名]에 따라 그렇게 설한 것일 뿐이다. 혹은 종자와 유사하기 때문에 세간에서 그것(종자의 열매)을 '종자'라고 설하게 된 것이다.103) 이것(이숙과)도 역시 이와 같으니, 앞의 이숙과가 정(正)·사(邪) 등의 법을 듣거나 선·악의 온갖 업을 일으키는 연을 만나 온갖 선한 유루와 온갖 불선의 이숙을 초래하는 마음[有異熟心]을 능히 낳으며, 이것으로부터 낳아진 상속이 전변(轉變)하기를 계속[展轉]하다가 [최후 찰나에 이르러] 능히 전변의 차별(差別)을 인기한다. 곧 이 같은 차별로부터 뒤의 이숙과가 낳아지는 것이지 다른 어떤 것(즉 이숙과)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앞의 비유는 법과 동일한 것이다.104)
혹은 또 다른 법(비유)에 의해서도 이러한 사실을 유추하여 알 수 있으니, 이를테면 구연화(拘櫞花)에 자광즙(紫汁)을 바를 경우 그 상속의 전변과 차별을 원인으로 하여 그 후 열매를 맺을 때 속씨의 색깔이 붉게 되지만, 이러한 붉은 색의 열매로부터는 더 이상 또 다른 붉은 색의 열매가 생겨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업의 이숙과로부터 더 이상 또 다른 이숙과가 능히 낳아지지 않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세친)
Ⅴ. 유통분(流通分) ― 결어 ▲ 위로
이상은 바야흐로 나(세친) 자신의 각혜(覺慧)의 경계에 따라 온갖 업과 그 과보에 대해 간략하게 그 대충만을 밝힌 것으로, 세부적으로 또 다른 종류의 차별 공능이나 온갖 업에 의해 훈습된 상속이 전변하고, 그러 그러한 상태에 이르러 그러 그러한 과보를 낳게 된다는 것은 오로지 부처님만이 깨달아 아실 뿐 그 밖의 다른 이들이 알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니, 이와 같은 뜻에 따라 어떤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한 업과 이러한 훈습과
이러한 때에 이르러 결과를 낳는다는
일체의 모든 종류의 결정적 이치는
부처님 이외에는 능히 아는 자가 없으리.
이러한 청정(淸淨)의 원인인 도에 대해 이미 잘 설하였으니
말하자면 그것은 부처님의 지극한 말씀인 진실의 법성으로,
마땅히 눈먼 온갖 외도들이 주장하는 악견(惡見)과
그에 따른 악행을 버리고서 지혜의 눈을 추구해야 하리라.
이러한 열반궁(宮)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넓은 길은
천(千)의 성자들이 거닐었던 무아성(無我性)의 이치로
모든 불일(佛日)의 말씀의 빛[言光]이 비추었던 바인데,
길을 열었음에도 우매한 눈들은 능히 보지 못하도다.
이같이 한 귀퉁이의 말씀을 간략히 설한 것은
지자(智者)의 혜독(慧毒)의 문을 열기 위함이었으니,105)
바라건대 각자 자신의 힘이 감당할 만한 능력에 따라
알아야 할 바를 두루 깨달아 뛰어난 업을 성취해야 하리라.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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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주 : ▲ 위로
1) 『잡아함경』 권제3 제73경 「중담경(重擔經)」(대정장2, p.19상). 여기서 중담 즉 무거운 짐(bhara)이 란 5온을 말하며, 무거운 짐을 취한다(bharadana)는 것은 당래의 애탐 등을, 버린다(bharanikkhepana)는 것은 애탐 등의 영단(永斷)을, 무거운 짐을 진 자(bharahara)는 사부(士夫) 즉 푸루샤(purusa)를 말한다.
2) 즉 보특가라가 5온의 가명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바로 무거운 짐으로, 무거운 짐이 무거운 짐을 질 수는 없기 때문에 그 같은 법문은 실유의 보특가라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
3) 보특가라(자아)는 능히 짐을 지는 자이기 때문에 온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짐을 취하는 것' 역시 능히 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온에 포섭시켜서는 안 된다는 힐난.
4) '무거운 짐을 진 자'에서 짐과 진 자가 개별적인 존재라고 한다면, '무거운 짐(온)'과 그것을 '취하는 것(애)'도 개별적인 존재가 되어야 할 것으로, 무거운 짐이 바로 자신을 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 다. 그러나 '무거운 짐을 취하는 것'을 경에서는 애(愛, 행온에 포섭됨)로 규정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5 온에 포섭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거운 짐을 진 자(보특가라)' 역시 5온에 포섭되는 것으로 제온의 상속(짐을 진다는 경험)상에 일시 설정된 존재(假說, 또는 世俗)일 뿐이다.
5) 본론 권제29 주98)의 『인계경(人契經)』 후반부.
6) 『본사경(本事經)』 권제5(대정장17, p.687) 참조. 『대비바사론』 권제198(한글대장경125, p.515), "'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으며, 화생의 유정도 없다'고 하면, 이것은 원인을 비방하는 사견으로서 견집소 단이고, 혹은 결과를 비방하는 사견으로서 견고소단이기다 하다.……" 여기서 화생의 유정이 없다고 함은 그 것이 받을 업을 부정하거나 혹은 받게 되는 화생을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보광은 화생의 유정을 중유(中有) 로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 독자부는 화생의 유정을 실유의 자아로 해석하여 그것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7) 화생의 유정은 제온의 상속상에 가립되어 존재하는 것으로, 실유의 자아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만 약 이 같은 실유의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 바로 사견이라고 한다면 그 같은 사견은 어떠한 도에 의해 끊어질 것인가? 사견은 견소단이지만, 실유의 자아는 현실의 괴로움의 결과도 원인도 아니기 때문에(다시 말해 4제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견소단이 아닌 것이다.
8) 『증일아함경』 권제3(대정장2, p.561상), " 有一人出現於世 便有一人入道在於世間."
9) 본론 권제29 주111) 참조.
10) 어떤 이가 제사나 문법에 관한 학문을 학습 성취함으로써 제사 지내는 이[能祠者, yaj ikra]와 문법 학자[記論者, vaiyakarana]가 되고, 율의 내지는 병을 획득함으로써 필추(비구) 내지는 병자로 태어나는 것으 로, 그것은 실유의 보특가라가 존재하여 이전과는 다른 온을 성취함으로써 그러한 존재로 태어나게 된다는 것 이다.
11) 『잡아함경』 권제13 제335경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대정장2, p.92하). 여기서 법가(dharma samketa, 혹은 俗數法) 5온의 상속상에 일시 설정된 자아를 말하는 것으로, 이 경은 본론 권제9(주30)에서도 인용되고 있다.
12) 『잡아함경』 권제15 제372경(대정장2, p.102중), "……수(受)를 연으로 하여 애(愛)가 있고, 애를 연 으로 하여 취(取)가 있다.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누가 취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파구나(頗求那)에게 고하 기를, 나는 취하는 자가 있다고 설하지 않는다. 내가 만약 취하는 자가 있다고 설한다면 그대는 응당 '누가 취하는 것인가'라고 묻겠지만, 그대는 마땅히 무엇을 연으로 하여 취가 있는가에 대해 물어야 할 것이다."
13) 불교에 있어 실유의 자아는 부정되기 때문에(독자부에 있어서도 자아는 非卽蘊인 동시에 非離蘊이다) 자아의 비유란 있을 수 없다.
14) 즉 명론(明論, vidya vada, 학문 일반) 등은 불상응행법의 하나인 '명(名)' 등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그것을 능히 취하는 제사를 지내는 이나 문법학자의 색신과 달라야 하며, 이와 마찬가지로 소취(所取)의 오온 (예컨대 병) 역시 능취의 자아(병자)와는 달라야 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보특가라는 오온과 비일비이(非一非 異)라는 명제에 어긋나게 된다. 따라서 인용된 비유는 올바르지 않다.
15) 본론 권제20(p.911) 참조.
16) 각천(覺天)에 의하면 '색은 오로지 4대종으로 대종 이외에 조색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조색은 바로 대종의 차별일 뿐이다. 그리고 심소 역시 마음의 차별일 뿐이다.'(『대비바사론』 권제127, 한글대장경123, p.39-40) 즉 색·향·미·촉의 조색은 4대종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4대종 밖에 따로이 존재하 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온과 보특가라는 왜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하는 힐난. 그러나 후 설하듯이 각천의 설은 유부 내의 이설(異說)이다.
17) 부처님께서는 세간의 상(常)·무상(無常), 변(邊)·무변(無邊), 신명(身命)의 일(一)·이(異), 여래 사후의 유무(有無)에 대해 침묵하시고 언급하지 않았다.(본론 권제19 주116 참조) 즉 그렇게 묻는 것은 바로 전도된 견해이기 때문이다.(『잡아함경』 권제24권 제962경, 대정장2, p.245하)
18) 용군(龍軍) 즉 나가세나(Nagasena, 那先)는 기원전 2세기 무렵 후반에 활약한 논사로, 북인도의 희랍 왕국 박트리아의 왕 메난드로스(Menandros, 인도명 Milinda)와 불교 교리에 대해 문답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결과로서 편찬된 것이 『밀린다팡하(Milindapanha)』(한역은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로, 본론에서의 인 용은 이에 따른 것이다. 3명과 6통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27, 8해탈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29(p.1326) 참조.
19) 만약 일찍이 존재하였다고 하면 그것은 상견(常見)이며,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은 단견(斷 見)이다. 여래는 상견과 단견의 두 극단을 떠나 중도를 설하기 때문에 영혼의 유무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 지 않은 것이다.
20) 『잡아함경』 권제34 제961경(대정장2, p.245중).
21) '수미산과 같은 아견을 일으킬지라도 겨자씨만한 단견도 일으키지 않아야 할 것이니, 아견을 일으킬 때에는 능히 온갖 선업을 닦기 때문에 그 허물이 가볍지만, 단견을 일으킬 때에는 온갖 악업을 짓기 때문에 그 허물이 무겁다. 그래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하지 않은 것이다.'(『구사론기』)
22) 이는 경부사 구마라다(鳩摩邏多, Kumaral ta)의 게송으로 전해진다.
23) 이하 신명(身命)의 일(一)·이(異)를 제외한 세간의 상(常)·무상(無相), 세간의 변(邊)·무변(無邊), 여래 사후의 유·무에 대한 무기의 의미를 밝힌다.
24) 여기서 네 가지 언표란 세간은 영원하다, 영원하지 않다, 영원하며 영원하지 않다, 영원한 것도 아니 고 영원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고 하는 4구(句)를 말한다.
25) 손에 잡은 참새를 죽이겠는가 살리겠는가라고 물었을 경우, 죽일 것이라고 하면 놓아줄 것이고, 살릴 것이라고 하면 죽이려는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 같은 물음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는 예증.
26) 세간은 끝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끝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인가, 끝이 있으면서 끝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인가,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인가 하는 4구의 물음.
27) 『잡아함경』 권제34 제965경(대정장2, p.247하).
28) 세간의 모든 이가 출리하는가, 그 일부만이 출리하는 것인가? 이는 바로 세간의 무변(상)·유변(무상) 과 동일한 문제로서, 세간에 끝이 없다(영원)고 하면 전부 혹은 일부의 세간도 출리하는 일이 없을 것이며, 세간에 끝이 있다(영원하지 않다)고 하면 저절로 출리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세간의 모든 이가 출리한다고 하면 출리하지 못하는 어떠한 이도 없어야 할 것이며(저절로 출리하게 될 것이며), 일부만이 출리한다고 하면 일부는 결정코 출리하는 일이 없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29) 『중아함경』 권제13 「설래경(說來經)」(대정장1, p.510중).
30) 『잡아함경』 권제30 제833경(대정장2, p.213하), "만약 성(聖) 제자로서 4불괴정(不壞淨)을 성취하면 목숨을 구하면 목숨을 얻을 수 있고……명종하여 천상에 태어나면 열 가지의 법을 획득한다."
31) 즉 반열반에 들지 않았을 때에는 보특가라를 보았기 때문에 그것이 존재한다고 말하였지만, 반열반에 든 이후는 아직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래 사후의 존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는 뜻.
32) 이는 곧 열반에 들게 되면 온은 소멸하지만 자아는 소멸하지 않는다는 주장이기 때문에 '이온아(離蘊 我)'의 상주론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33) 원문은 '제고(諦故) 주고(住故)'. 『바사』(권199, 한글대장경125, p.545)에서는 이를 실의(實義)와 법이(法爾)로 해석하고 있다.
34) 한역 『아함경』 중에서는 출처 불명. 『발지론』 권제20(한글대장경176, p. 497)에 이 같은 사실이 언급되고 있다. "유아(有我)라고 하는 것은 변집견 중의 상견(常見)에 포섭되는 것으로 견고소단이며, 무아( 無我)라고 하는 것은 변집견 중의 단견(斷見)에 포섭되는 것으로서 견고소단이다."
35) 상동 『대비바사론』 권제199(한글대장경125, p.546).
36) 본권 주20).
37) 이에 대해서는 본권 주10) 참조.
38) 묘안(Sunetra, 혹은 善眼)에 대해서는 『중아함경』 권제2 「칠일경(七日經)」(대정장1, p.429) ; 『 대비바사론』 권제82(한글대장경121, p.159)를 참조할 것.
39) 지금의 온과 옛날의 온은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온이 옛날의 도사였다고 설하는 것은 모순 이라는 뜻.
40) 옛적의 나(묘안)가 바로 지금의 나(석가)라고 한다면, 그 때 '나'(즉 보특가라)는 상주하는 것이어야 하지만, 독자부에서 주장하는 보특가라는 제5의 법장으로 비즉비리온(非卽非離蘊)이기 때문에 찰나멸하는 것 도 아니지만 상주하는 것도 아니다.
41) '이 불은 일찍이 그것을 태웠다'는 말은, 지금의 불이 바로 옛날에 그것을 태운 불이라는 말이 아니라 다만 그것과 동일한 상속상에 있는 불이라는 뜻이다.
42) 만약 진실의 자아가 존재한다고 하면 부처도 역시 자아관념[我執]을 갖게 될 것이고, 자아관념을 갖는 한 '나의 것[我所]'이라는 관념과 그에 따른 애착을 갖는다고 해야 하며(이는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임), 스스로도 해탈도에서도 멀어지게 된다.
43) 부스럼이 몸을 훼손하듯이 독자부의 아견 또한 부처의 참된 성교(聖敎)를 어지럽힐 뿐이라는 힐난.
44) 첫 번째는 바로 독자부의 견해이고, 두 번째는 보광에 의하면 공견(空見)외도, 칭우에 의하면 중관론 자의 견해(Madhyamaka citta)이며, 세 번째는 뒤에 설하는 수론(數論)과 승론(勝論)의 견해이다.
45) 어떤 사물에 대한 인식은 일찍이 보았던 것을 기억[憶念, smarana]하여 재인식[記知, pratyabhij ana, 구역은 更知]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된다. 그럴 때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상속된 기억의 주체는 무엇인가?
46) 즉 일찍이 경험하였던 것을 기억하는 생각들이 종자로서 마음상에 상속 전변하다가 공능의 차별을 일 으킬 때 기억이라는 결과가 낳아지게 된다.
47) 천수(Devadatta)는 하늘에 빌어 얻었기 때문에 '천수'이며, 사수(Yaj a-datta)는 제사를 지내 얻었기 때문에 '사수'이지만, 보통 '갑돌이'처럼 인명(人名)의 일반적 명사로 사용되고 있다.
48) 마음은 찰나멸하여 전후가 동일하지 않지만 동일한 상속신 중에 인과적 관계로서 상속하기 때문에 일 찍이 전찰나의 마음이 본 것을 후찰나의 마음이 능히 기억하여 알 수 있다.
49) 즉 기억에 따라 어떤 대상을 파악하였다고 할 때 그것은 다만 기억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억하였던 작 자에 의해 파악된다는 뜻.
50) 기억의 원인이 되는 심상속의 전변과 차별의 힘(즉 종자)이 후찰나의 기억으로 하여금 대상을 파악하 게 하기 때문에 전찰나의 기억의 원인이 바로 작자가 된다.
51) 주인이 그에게 소속된 어떤 것을 부린다고 함은 이미 획득되었거나 생겨난 것에 대해서이지, 아직 생 겨나지 않은 것을 생겨나도록 하기 위해 부린다고 하는 말은 있을 수 없다는 힐난.
52) 기억과 그것을 통한 재인식은, 주체와 소유의 문제는 동일하며 단지 그 생기의 인연만이 다를 뿐이다. 즉 앞서 논설한 대로 기억은 그것(기억의 대상)을 조건으로 하는 작의(作意)와, 과거의 대상과 지금의 그것이 서로 유사하며 양자가 서로에게 소속된다는 생각 등을 갖고, 의지하는 몸이 차별되지 않으며, 근심과 산란 등 의 인연에 의해 기억의 공덕이 손상되거나 괴멸되지 않은 마음의 차별로부터 일어난다. 그러나 재인식은 식( 識)의 종자를 인(因)으로 삼고, 근(根)과 경(境)을 연으로 하여 일어나게 된다.
53) 여기서 어떤 이는 보광에 따르면 수론(數論, Samkhya)이며, 칭우에 따르면 문법학자(Vaiyakarana, 語 典家)이지만, 사실상 앞서 독자부와의 대론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54) 찰나에 생멸하는 제온의 상속이 다른 처소에 생겨나는 것을 '간다'고 말하며, 그 원인이 되는 전찰나 의 제온을 '가는 자'라고 이름할 뿐 제온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실유의 자아(가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55) 보리(결과)는 씨앗(원인)에 대해 어떠한 작용도 하지 않으며 다만 그것에 따라 유사하게 생겨난 것이 듯이 식(識) 또한 그것의 원인이 되는 대상에 따라 유사하게 생겨난 것일 뿐 그것에 대해 어떠한 작용도 하지 않는다. 즉 원인에 따르는 것이 결과의 작용은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식이란 다만 대상(色 내지 法)을 전체 적으로 취[總取]하는 것으로(본론 권제1, p.30 주61 참조) 어떤 한 대상의 형상을 지각하고 표상 판단 확인 하는 등의 개별적 작용은 심소의 역할이다.
56) 능연인 식(識)상에 소연이 되는 색이나 향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그것을 다만 '요별'이라고 규정 한 것이다.
57) 3계 12심(욕계 선·불선·유부·무부무기의 4심과 상 2계 각각에 불선을 제외한 3심, 그리고 유학·무 학심)의 상생(相生) 관계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7(p.346 이하) 참조.
58) 22심의 상생 관계에서 생겨나야 할 마음과 생겨나지 않을 마음은 그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항상 동류( 同類)로서 상속한다.
59) 여기서 '닦은 힘[修習力, bhavanabala]'이란 반복하여 익힌 힘을 말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습관력을 말한다.
60) 즉 이러한 주이(住異)의 상(相)은 닦은 힘이 강력한 마음을 억제하고, 그것에 의해 일어난 중(中)·하 (下)의 힘을 지닌 또 다른 마음에도 수순하여 점차 미약하게 하기 때문에 닦은 힘이 강력한 마음이 항상 자신 의 과보를 산출하는 것은 아니다.
61) 이 같은 겸양의 탄식은 본론 권제4(p.163)에서도 언급된다. "제(諸) 심·심소의 각기 다른 상은 너무 나 미세하여 그 하나하나의 상속을 분별하기도 어렵거늘 하물며 1찰나에 동시에 존재함에 있어서랴! 구체적인 형태를 지닌 유색(有色)의 온갖 약을 색근(色根, 즉 舌根)으로 취하여 그 맛의 차별을 알기도 어렵거늘 하물 며 어떤 구체적 형태도 갖지 않는 무색의 법을 오로지 각혜(覺慧, 관념)만으로 파악함에 있어서랴!"
62) 여기서 어떤 부류의 외도란 승론(勝論, Vaisesika)을 말한다. 즉 그들은 세계를 해명함에 있어 실체[ 實, dravya]·속성[德, guna]·운동[業, karma] ·보편[同, samanya]·특수[異, visesa]·화합[同, samavaya] 의 6범주[句義, padartha]를 설정하고, 실체를 다시 지(地)·수(水)·화(火)·풍(風)·허공·시간·방위·자 아[我, atman]·의식[意, manas]으로 분류하였다. 여기서 자아 즉 아트만이란 '나'라고 하는 관념의 주체가 되는 것으로, 지각이나 쾌·불쾌·욕구·혐오·노력·행(行, 잠재적 인상)·공덕·불공덕과 같은 속성의 기체 (基體)가 된다. 다시 말해 그러한 속성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아트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의식( 즉 마음)은 지각 등을 일으키는 하나의 조건이 될 뿐 지각의 주체는 아니다. 다시 말해 의식은 그러한 속성과 화합하지 않고서 지식을 일으키는 것으로(『승종십구의론(勝宗十句義論)』, 한글대장경250, p.587 참조), 이 를테면 아트만이 감관과 화합을 통해 얻게 되는 우연적 성질로 간주된다. 예컨대 아트만이 신체로부터 분리되 거나 깊은 수면 상태에 빠질 때에는 의식의 성질을 갖지 않는 것이다. 이에 대해 보광(普光)은 "그러한 마음 은 바로 자아의 속성[德]이기 때문이다"고 해석하고 있다.(『구사론기』 권제30, 대정장41, p.449중)
63) 수론이 불교의 무아 상속설에 대해 힐난한 것을 승론의 유아론에도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다는 뜻 .
64) 즉 전후 찰나로 상속하는 의식의 다양성은 자아와 의식의 '결합'의 다양성에 근거한 것이라고 한다면, '결합'이라는 존재의 실재성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같은 논증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 승론에 있어 결합[合, samyoga]이란 실체가 갖는 24속성 중의 하나로서, 서로 분리된 두 존재가 접하게 되는 것을 말하므 로(『승론십구의론』, 앞의 책, p.589) 실재하는 자아와 의식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불교에 있어 그 같은 자아와 의식 그리고 결합의 실재성은 인정되지 않는다. 참고로 6구의 중의 '화합(samavaya)'이란, 예 컨대 항아리는 이미 실체·속성·운동·보편·특수 등이 화합된 상태로서 지시되는 개물이듯이 단지 개념상으 로만 분리될 수 있는 불가분리(不可分離, 즉 內屬)의 원리를 말한다.
65) 『승론십구의론』, 앞의 책, p.589.
66) 자아와 의식이 결합한다고 하는 것은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자아와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의식이 결합 한다는 말로서, 그것은 바로 자아의 변만성(遍滿性)을 부정하는 것이며, 이는 곧 그들 자신의 종의에 위배된 다는 것이다.
67) 자아와 의식이 결합하였을 경우, 의식이 신체의 특정 부위의 감관으로 옮겨 갈 때 자아도 역시 옮겨 가야 할 것이고, 의식이 소멸할 때 역시 소멸해야 한다. 그럴 경우 자아는 운동을 갖지 않으며, 상주(常住)하 는 것이라는 그들 자신의 종의에 위배된다.
68) 즉 자아는 편재(遍在)하지만 전체적으로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결합한다고 할 경우에도 역 시 자아는 단일한 실체로서 더 이상 부분을 갖지 않는다는 그들 종의에 위배된다.
69) 자아와 의식은 다 같이 단일 상주의 실재인데, 양자의 결합으로써 어떻게 전후 차별되는 다양한 의식 의 생기를 해명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힐난.
70) 승론에서의 지각[覺, buddhi]은 24속성 중의 하나로, 그 같은 지각의 다양한 차별에 의해 의식이 다양 하게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의식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다양한 지각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인 가?' 하는 동일한 난점이 지적될 수 있다.
71) 승론의 24속성 중의 하나인 행(行, samskara)은 말하자면 잠재세력과 같은 것으로, 여기에는 반복된 지식의 습득에 의해 생겨나는 인상(印象, bhavana)과 반복된 운동에 의해 생겨나는 타성(vega)이 있는데, 전 자가 기억이 원인이 되는 행[念因]이라면 후자는 작용의 원인이 되는 행[作因]이다. 곧 이와 같은 다양한 '행 '의 차별을 전제로 하는 경우, 자아의 설정 없이 의식만으로도 그것의 다양성을 충분히 해명할 수 있다는 것 이다.
72) 즉 다양한 의식의 차별은 '행'에 의해 충분히 해명될 수 있음에도 여기에 다시금 자아를 설정하는 것 은 약으로도 고질병을 충분히 치료할 수 있음에도 '보사하(phut svaha, 吉祥의 뜻)!'라는 주문을 별도로 외우 는 것과 같다는 힐난.
73) 자아는 마치 그림을 지니는 벽처럼, 과일을 담는 그릇처럼 마음과 행을 능히 유지하는 소의(asraya, 근거)가 된다고 한다면, 양자는 색법의 경우처럼 서로를 장애해야 할 것이며, 그림과 벽처럼 개별적 존재여야 한다. 그렇지만 자아는 어떠한 장애도 갖지 않으며, 편재하는 것이므로 그러한 비유는 적절하지 못하다.
74) 지(地)가 색·미·향·촉의 소의가 되듯이 자아 또한 마음과 행의 소의처가 된다는 뜻. 승론에 따르면 9실체 중의 지(地)란 색·미·향·촉의 네 속성을 갖는 것이다.
75) 예컨대 '수레에 바퀴 등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바퀴 등을 떠나 수레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 라 바퀴 등이 바로 수레임을 이해시키기 위해 그렇게 설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간에서 '목상신(나무에 형상 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경우, 형상과는 별도의 나무가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형상의 재질이 바로 나무 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76) 즉 자아는 단일하지만 행(行)의 다양한 차별에 근거함으로써 다양한 지식을 낳게 되었다고 한다면, 무 엇이 장애하여 일시에 일체의 지식을 낳지 않게 되는 것인가 하는 물음.
77) 행(行)에는 그 세력이 강력한 것과 미약한 것이 있어 강력한 것이 먼저 일어나 미약한 것의 생기를 장 애하기 때문에 항상 일시에 일체의 지식(결과)이 생겨나지 않게 된다.
78) 강력한 작용(행)이 먼저 결과를 낳는 것이라고 한다면 항상 그것으로부터 결과가 낳아져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어느 때에는 미약한 작용으로부터도 결과가 생겨나게 되는 것인가 하는 물음.
79) 앞서 수론과의 대론에서 여인의 다양한 마음을 예로 들면서 그 같은 마음이 전후로 일어나는 것은 반 복하여 닦은 힘[修習力]의 강도에 따른 것이라고 하였다.(주59 참조)
80) 즉 승론의 행(行, samskara)은 반복된 인식과 운동에 의해 형성된 잠재세력으로(주71 참조), 그것에 의해 의식의 다양한 차별을 해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실상 불교에서 말하는 반복된 업의 훈습력(vasana, 혹은 bhavana)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불교와 마찬가지로 자아를 별도로 설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
81) 여기서 '기억'은 속성의 범주[德句義, guna-artha] 스물네 가지 가운데 행(行)에 포섭된다. 즉 '행'에 는 기억의 원인이 되는 행과 작업(作業)의 원인이 되는 행이 있는데(주71 참조), 기억의 원인이 되는 행이란 반드시 자아와 화합하는 것으로서, 그 밖의 실체 예컨대 마음은 기억의 조건이 될 뿐 주체(즉 所依止)가 아니 기 때문에 기억과 화합하지 않는다.(주62 참조) 그리고 그러한 기억의 원인이 되는 행[念因]은 현량과 비량의 지식에 근거한 것으로, 자아와 의식의 결합을 원인으로 하여 일어난다.(『승종십구의론』, 앞의 책, p.602 참 조)
82) 유부에 의하는 한 능히 자기만의 상[自相]을 갖는 개별적 존재 즉 법(dharma)은 모두 실체(dravya)로 서 실유의 존재이다. 이를테면 기억[念]이란 대상을 명기하여 잊어버리지 않게 하는 작용을 갖는 실체로서, 열 가지 심대지법(心大地法)의 하나이다.(본론 권제4, p.163 참조)
83) 즉 예류과 등 네 가지 사문의 과보는 무루의 5온과 택멸무위를 본질로 한다. 참고로 기억[念]은 심소 법으로 행온에 포섭된다.
84) 벽이 그림의 소의가 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자아가 기억의 소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85) 즉 '자아'라고 하는 것은 다만 자아관념[我執]의 대상이 되는 것일 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86) 즉 '나'라고 하는 관념은 제온에 대한 애탐의 결과이며, 또한 반드시 제온에 대한 지각과 관계함으로 써, 다시 말해 제온에 대한 지각과 동일한 공간[同處]에서 일어난다.
87) 승론에 의하면 자아는 희다는 '색'(24속성의 하나)의 기체(基體, 즉 소의)로서 그것과 분명히 차별되 지만, 현실의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든 '나' 즉 자아의 관념은 지각과 관계하여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그것은 실유의 존재가 아니라 가설적 존재[假有]이다.
88) '희다'는 등의 지각을 일컬어 '나'라고 하는 것은 다만 은유일 뿐 그것이 진실의 자아는 아니다. 예컨 대 신하 등이 능히 왕을 지켜 줄 때 왕이 '그대는 나의 몸이다'고 말하지만, 그 때 '나의 몸'은 다만 은유의 수사일 뿐 신하가 바로 왕의 몸은 될 수 없다는 뜻.
89) 자아관념[아집]은 승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 자아를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다만 몸 등의 5온을 대상으로 삼을 뿐이다.
90) 즉 자신의 몸에 대해서는 원인(몸)과 결과('나'라는 관념)로서 서로 관계하지만, 다른 이의 몸에 대해 서는 그러한 인과관계가 없다.
91) 이에 관하여서는 독자부와 '기억'의 주체에 대해 논란하면서 분별하였다.
92) 아집 즉 '나'라고 하는 관념은 염오심으로부터 낳아지는데, 그 같은 염오심은 무시 이래 선행된 아집 에 의해 물든 것으로, 지금에 이르러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하여 보다 강화된 새로운 아집을 낳게 되 는 것이다.
93) 어떠한 고·낙수도 안(眼) 등 6근을 근거로 하여 생겨나기 때문에 고락의 근거는 실유의 자아가 아니 라 안·이·비·설·신·의(意)의 6내입처라고 설한 것이다.
94) 여기서 '법상을 분별하는 자'란 비가라(毘伽羅, Vaiyakarana), 즉 문법학자로서, 언어이론[聲明論]의 해석을 통해 제법의 성상(性相)을 분별하는 자를 말한다.
95) 앞서 논설하였듯이 후찰나의 식이 생겨나는 것은 감관과 대상, 혹은 전찰나의 식에 따른 것으로, 자아 에 의한 것이 아니다.
96) 여기서 '비정처'(즉 非有情數)란 유정처에 상대되는 말로서 나무나 돌과 같은 감수작용을 갖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는 즉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유정 뿐만 아니라 그러한 존재에 있어서도 죄업이나 복업이 일어나야 하지 않는가 하는 물음이다.
97) 법(dharma)과 비법(adharma)은 승론의 24속성 중의 하나이다. 『승종십구의론』(앞의 책, p.592)에 따 르면 법에는 능히 유전(流轉)하게 하는 법과 능히 환멸(還滅)하게 하는 법이 있는데, 전자는 자아와 화합하여 참으로 애호할 만한 신체 등의 즐거움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고, 후자는 염오의 인연을 떠나 정지(正智)의 기 쁨을 초래하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비법은 자아와 화합하여 참으로 애호할 만하지 않은 신체 등의 괴로움과 사지(邪智)를 초래하는 원인이 된다. 즉 승론에서는 업이 괴멸할 때 이러한 법과 비법이 자아에 의지하여 미 래의 선악의 과보를 낳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본론 권제13(p.596 주22 참조)에서도 찰나의 상속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서 법과 비법이 언급되고 있다.
98) 즉 자아와 법·비법의 관계는 세간에서 현견되는 그림과 벽 등의 관계와는 동일하지 않다. 주73) 참조 .
99) 유부에서는 과거로 낙사(落謝)한 업, 즉 무표색(無表色)이 미래의 과보를 낳는다고 함으로써 업의 인 과상속을 해명하였지만(본론 권제1, p.21), 논주 세친은 '종자상속의 전변과 차별'이라는 경량부의 설을 쫓아 이같이 설한 것이다.
100) 종자(b ja) 상속(samtati)의 전변(parinama)과 차별(visesa)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4 , p.197 주115) 를 참조할 것.
101) 이는 '차별'을 해명하면서 그렇다면 어떠한 업이 먼저 과보를 낳게 되는지에 대해 분별한 것이다. 여 기서 유취식(sopadana vijnana)이란 '취' 즉 번뇌를 갖는 식으로 유루의 식을 말한다. 즉 유루의 식으로써 명 종할 때, 그의 색심(色心) 중에 능히 후유를 초래할 만한 다수의 업에 의해 인기된 훈습의 공능(즉 종자)을 지닐지라도 무거운 업(5역죄와 같은 업)과 목숨을 마치기 직전에 지은 업과 자주 익힌 업에 의해 인기된 종자 가 명료하기 때문에 그 순서대로 먼저 과보를 낳게 되고, 그렇지 않은 업, 이를테면 가벼운 업과 일찍이 일어 났던 업과 자주 익히지 않은 업은 지은 순서에 따라 나중에 낳게 된다.
102) 불염오성의 종자는 대치도가 일어날 때 능히 속박하는 성질은 끊어지지만 그 자체는 끊어지지 않고 여전히 여과(與果)의 공능을 일으키며, 그 후 무여열반에 들 때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
103) 즉 숙변의 차별을 일으켜 싹을 틔우게 되는 종자와 유사하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열매를 '종자'라고 하지만, 모든 열매가 종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즉 열매가 열매를 낳는 것이 아니라 숙변(熟變)의 차별을 일 으켜 종자가 된 열매만이 열매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104) 열매로부터 또 다른 열매가 직접적으로 생겨나는 일이 없듯이(비유) 이숙과로부터 이숙과가 직접적으 로 낳아지는 일은 없다(법).
105) 한 귀퉁이의 말씀[方隅]이란 광대한 아비달마 논 중의 극히 일부의 말씀이라는 뜻으로, 마치 독을 신 체의 일부분에 바르면 그 기운이 몸 전체로 퍼지듯이 일부의 말씀으로 조그마한 지혜의 문을 열게 되면 그것 은 바로 깊은 깨달음의 지혜로 번져 나가기 때문에 본론이 지혜의 독의 문을 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
106) 이상의 게송은 본론 전체(혹은 「파아품」)의 유통분(流通分)으로서, 제1송은 청정 열반의 원인이 되 는 무루성도를 찬탄하고 외도의 악견을 버릴 것을 권유한 것이고, 제2송에서는 무아법성의 도를 찬탄하면서 우매한 외도는 이를 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밝혔으며, 제3송에서는 다시금 광대한 아비달마의 한 단면에 불 과한 이 논을 인연으로 하여 면학하기를 권유하고 있다. ▲ 위로
[출처: 동국역경원]
구사론의 법의 체계구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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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俱舍論 槪觀
{俱舍論}은 산스크리트어로 {Abhidharmakosabhasya} 인데, {아비다르마藏疏}의 뜻이며, {對法藏論}이라고 번역한다. 산스크리트本과 漢譯本, 티벹譯本이 있다. 世親 또는 天親이라고 漢譯되는 바수반두(Vasubandhu)의 저작이다. 바수반두는 5세기경 서북인도에서 활약한 아비다르마論師로서 無著의 동생이기도하며, 소승불교의 학승일 뿐만아니라 대승불교의 학승으로서 瑜伽唯識學의 창도자의 한사람으로서도 이름이 높다. 한역은 玄裝이 651년에 번역한 {阿毘達磨俱舍論} 30권이 있고, 偈頌만을 모은 {阿毘達磨俱舍論本頌} 1권(玄裝 번역)이 있으며, 또 眞諦가 564년에 번역한 {阿毘達磨俱舍釋論} 22권이 있다. {俱舍論}은 인도,중국,티벹,한국,일본에서 널리 연구되어 훌륭한 註釋들이 남아있다. {구사론}에서 세친은 說一切有部의 교학을 표준으로 삼아, 이것을 체계화하면서도 비판적으로 취급하여 經量部나 大衆部 등의 교설을 소개하고, 理에 뛰어남을 宗으로 삼는 입장(理長爲宗)에서 교리해석을 전개하고 있다. 大乘 經典이나 대승의 論書는 有部의 교학을 기초로 하고 혹은 그것을 破斥하기 위하여 작성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번잡한 유부의 교학을 비판적으로 종합한 {구사론}은 널리 대,소승의 학도들에게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구사론}은 교리의 대부분을 {大毘婆沙論}에서 채택하고 있는데, 그것을 다시 정리 하였고, 論의 체계나 교리를 정리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法救의 {雜阿毘曇心論}을 따른 점도 많다. {구사론}의 구성은 九品 三十卷 六百頌으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界品(二卷 四十四頌), 根品(五卷 七十四頌), 世間品(五卷 九十九頌), 業品(六卷 百二十一頌), 隨眠品(三卷 六十九頌), 賢聖品(四卷 八十三頌), 智品(二卷 六十一頌), 定品(二卷 三十九頌), 破我品(一卷)으로 되어있다. 論의 서두에서는 먼저 題號를 해석하고, 이어서 界品과 根品으로 현실세계(물질과 정신계)를 성립시키는 요소적인 法을 설명한다. 예부터 잘 알려져 있는 5位 75法의 체계도 여기에서 제시된다.
다음 世間品에서는 地獄으로부터 天界의 생물세계(有情世界)와 물리적 세계(器世間)를 설명하는데, 여기엔 인도의 宇宙觀이나 地理說이 소개되어 있다. 나아가 12연기를 설하여 윤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業感緣起論이다. 다음 業品에서는 윤회의 원인이 되는 業을 여러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하는데, 表業, 無表業, 善業, 惡業, 身口意의 3業 등을 제시하고 善의 행위로서의 계율을 설명한다. 다음 隨眠品에서는 業이 작용하는 機緣이 되는 번뇌를 밝히는데, 이것을 6大煩惱, 10隨眠, 88使, 108번뇌 등으로 분류하여 서술하며, 아울러 과거, 미래, 현재의 三世實有論을 소개하고 이것을 破斥한다. 이상에서의 3品은 미혹의 세계(有漏)를 나타낸다. 다음 賢聖品에서는 깨달음에 진입하는 단계적 과정을 凡夫位로서는 3賢과 4善根으로, 聖者位로서는 4雙8輩로 제시하고 깨달음을 얻는 觀으로서 4諦 16現觀을 설명하고 있다. 이어 智品에서는 깨달음을 획득하기 위한 지혜를 世俗智, 法智, 類智 등의 10智로서 설명하고, 18不共法 등을 설명한다. 定品은 聖智를 낳는 기초가 되는 禪定을 설명하는데, 4禪, 4無色定, 3解脫門, 4無量心, 그밖의 禪定을 제시한다. 부록인 마지막의 破我品은 이상에서 밝혀진 無我의 입장에 서서 犢子部의 非卽非離蘊我나 勝論 의 我 등을 논파하고 無我의 도리를 밝힌 것이다. 九品三十卷中에서 처음 界根二品은 모두 有漏 無漏 迷悟兩界의 體用을 밝히고, 다음 世間, 業, 隨眠三品은 따로 迷界의 果因緣을 설하고, 뒤의 賢聖, 智, 定三品은 悟界의 果因緣을 밝히고, 마지막 破我一品에서는 諸法無我의 진리를 밝히고 있다. 또 이것을 四諦說의 입장에서 보면 世間品이 苦諦가 되고, 業品과 隨眠品이 集諦가되고,賢聖品이 滅諦가 되고, 智品과 定品이 道諦가 된다.
이 글에서는 界,根 兩品의 法體系 즉 五位七十五法을 정리하였다.
2. 諸法의 分類
경전에서는 諸法을 5蘊, 12處, 18界 등 3종으로 분류하고 있다. {俱舍論}에서는 여기에 더하여 5位75法으로 분류정리하고 있다. 諸法은 크게 나누면 有爲와 無爲의 2종으로 나눌 수 있다. 이렇게 법을 나누는 것은 無常, 苦, 無我라는 불타의 가르침을 체계적 분석적으로 설하기 위한 것이다. 본래 法(Dharma)은 존재, 진리, 교설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설일체유부에서 법을 이와같은 75종으로 분류할 때에 법은 특히 존재를 구성하는 존재의 요소라는 의미를 지닌다. 경험의 세계 속에 있는 일체의 것, 존재, 사물, 현상 등은 복잡한 인과관계에 의한 무수한 법의 이합집산에 의해 유동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有部의 법사상의 기본적 사고이다. 이러한 유부의 법사상에서 보면 실재하는 것은 75종의 법뿐이고, 그 이외의 모든 현상적 존재에는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의 본질인 일체의 무상, 고, 무아는 경전에서는 5온, 12처, 18계에 의해 설해지고, 유부에서는 75법에 의해 설해지는데, 이러한 일체는 다양한 인과관계를 기초로 하여 성립되어 있는 有爲의 존재이다. 동시에 이는 범부에 의해 욕망되고 집착되는 有漏의 존재이다. 無常이며 有爲이고 또한 有漏이며 苦인 현실의 삶의 일체는 그 無常을 無常으로 알고 有爲를 有爲로 알 때, 이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 소멸되어 그대로 寂靜하고 안락한 경지인 열반으로 전환된다. 현실의 삶이 有爲이고 有漏임에 대하여, 열반의 경지는 無爲이며 無漏이다. 이들 有爲, 無爲를 합쳐서 일체의 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유루의 법과는 별도로 무루의 법이 있으며, 이들 유루, 무루의 諸法을 합쳐 일체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有爲란 造作이라는 뜻으로 인연따라 생기한다는 의미이다. 무위란 인연따라 생기하지 않고 自體恒存해서 생멸이 없는 상주불변의 진리를 뜻한다. 유루란 六根으로부터 흘러나온다는 의미로 번뇌를 가리킨다. 무루는 번뇌를 벗어난 상태이다. 세속적 인간의 세계, 업과 번뇌의 세계는 유위이며 유루이다. 깨달음의 영역에 속하는 열반은 무위이며 무루이다. 세속적 삶으로부터 깨달음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길(道)은 유위이면서도 번뇌를 떠나기 때문에 무루이다. 다시말하여 道는 아직 깨달음에는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유위이며, 동시에 번뇌를 떠나는 길이므로 무루인 것이다. 5蘊에는 어느 것에도 무위인 것이 없으나, 12處와 18界 중의 법에는 무위인 것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동일하게 일체라고 하여도 5온에 의한 경우는 무위를 제외한 일체의 유위를 위미하지만, 12처와 18계에 의한 경우는 무위 유위를 합친 일체의 법을 의미한다. 5蘊은 色蘊, 受蘊, 想蘊, 行蘊, 識蘊의 다섯이다. 處는 산스크리트어 Ayatana 의 번역어로서 길러 生長시킨다는 뜻이다. 따라서 處는 心과 心所가 일으날 때 그 의지할 곳이 되며 心, 心所는 12처에 의지해서 발생하고 생장하는 것이다. 12처는 眼,耳,鼻,舌,身,意의 六根과, 色,聲,香,味,觸,法의 六境을 가리킨다. 18界는 六根과 六境에 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 등의 六識을 더한 것이다. 5위 75법은 色法(11), 心法(1), 心所有法(46), 不相應法(14), 無爲法(3) 등이다. 5위 75법, 5온, 12처, 18계의 상호관계는 별표 1과 같다. 5위 75법을 모두 분류하면 별표2와 같다.
3. 色法
넓은 의미의 色 즉 물질적 존재에 대해 {구사론}이 부여하고 있는 설명 중 중요한 것은 다음의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1) 파괴되므로 色이라 한다.
(2) 色은 四大와 四大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3) 色은 五根과 五境과 無表色의 11종의 法이다.
(4) 色은 法處,法界에 포함되어 있는 無表色을 제외하고는 極微의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이는 공간을 점유하며, 다른 色이 동일한 공간을 점유하는 것을 방해한다.
(5) 色이 生起할 때에는 반드시 8종류가 俱生한다.
色의 산스크리트어는 Rupa이다. Rupa는 變壞 또는 質碍(걸림)의 의미이다. 일체는 無常하기 때문에 당연히 色도 無常하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는 존재이다. 파괴되는 것이 오직 물질적 존재뿐만은 아니다. 마음도 마음의 작용도 그리고 그 이외의 것, 즉 인과관계를 가지며 존재하는 有爲의 것 중에 파괴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파괴되므로 색이다"라는 정의는 물질적 존재가 갖는 무상성, 유위성을 잘 표현하면서도, 이 정의는 물질적 존재도 포함된 유위의 달마 일반에 공통된 성질을 말하는 것이다.
四大는 地, 水, 火, 風이다. 四大는 자연계의 大地, 흘러가는 물, 타는 불, 부는 바람을 이루는 소재가 아니라, 이들이 대표하는 바의 물질의 물리적 성질 즉 암석에 보이는 것과 같은 견고함, 물에 보이는 것과 같은 濕潤性, 불에 보이는 것과 같은 熱性, 바람에 보이는 것과 같은 유동성이 四大의 본체로 생각되었다. 四大의 본체가 견고함, 습윤성, 열성, 유동성이 되면, 四大가 재료 즉 질료인이 되어 이로부터 물질이 합성된다고는 할 수 없다. 四大는 이제 물질의 근본적 성질인 것이다. 견고함, 습윤성, 열성, 유동성이라는 근본적 성질을 떠나서는 물질적 존재는 파악되지 않는다. 일반의 물질이 "四大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정의도 이러한 의미에서 이야기되는 것이다.
五根은 眼,耳,鼻,舌,身의 다섯가지 감각기관이며, 五境은 그것들의 대상인 色,聲,香,味,觸이다. 色境을 색깔과 모양으로 나누고, 색깔을 靑,黃,赤,白의 4색으로, 모양을 長,短,方,圓,高,下,正,不正의 여덟으로 나눈다. 색깔 중에는 특수한 것을 8종 또는 9종으로 헤아리는 경우도 있다. 聲境 즉 소리는 생물이 발하는 소리와 무생물이 발하는 소리, 의미를 전하는 소리(언어를 이루는 소리)와 그렇지 않은 소리, 즐거운 소리와 즐겁지 않은 소리의 차별에 따라 8종으로 구분한다. 香境은 좋은 냄새와 나쁜 냄새, 적당한 냄새와 지나친 냄새의 차이에 따라 4종으로 나눈다(3종으로 나누는 경우도 있다). 味境에는 달고 시고 짜고 맵고 쓰고 떫은 여섯 가지의 맛이 있다. 觸境 즉 감촉에는 매끄러움, 거침, 무거움, 가벼움, 차거움, 배고픔, 목마름의 7종 외에, 땅,물,불,바람의 四大 즉 견고함, 습윤성, 열성, 유동성이 포함된다. 四大가 觸境에 포함되는 점은 四大가 물질을 구성하는 소재가 아니라 물질의 근본적 성질로 생각되고 있는 사실을 보여준다. 無表色이란 表色에 대응한 명칭이다. 表色이란 우리들의 身語二業을 말하는데, 身語二業은 밖으로 "이것은 선이다" "이것은 악이다" 하고 나타내는 것이므로 이것을 表色 혹은 表業이라 한다. 이 身語二業의 表色이 그 힘이 강한 것은 身語二業과 동시에 그 결과가 특별한 善惡의 功能을 몸에 나타낸다. 이 功能은 無形象해서 밖으로 표시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無表色 또는 無表業이라 한다. 이 無表色은 極微의 집합체가 아니므로 變壞가 없고 質碍도 없다. 그러므로 色法이라하기 어려우나 본래 身語二業의 色法에서 발생한 것이므로 無表지만 色에 귀속시킨 것이다.
無表色을 제외한 色은 極微의 집합으로 이루어진다. 極微란 어떠한 방법으로써도 분할할 수 없는 최소입자를 말한다. 極微는 微粒子이지만 입체적으로 이를 둘러싼 면 즉 표면을 갖지 않는다고 한다. 만약 표면을 갖는다면 이를 더욱 분할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된다면 이는 정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極微 한 개를 중심으로 그 전,후,좌,우,상,하에 각각 하나의 極微가 결합되어 합계 7개의 極微가 집합한 것이 두 번째 단위인 微聚가 된다. 微聚가 같은 방법으로 7개 결합하면 세 번째 단위인 하나의 金塵이 된다. 이런 식으로 極微가 모여서 無表色을 제외한 色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극미가 이처럼 집합하여 공간을 차지하는 색법이 되지만, 극미 하나하나는 표면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극미끼리 접촉하여 결합을 이룰 수는 없어서, 극미들은 접촉이 없이 집합하여 경험 가능한 사물로 되는 것이다. 이 극미도 有爲의 法으로서 전혀 시간적 지속성을 갖지 못하며 刹那滅한다. 따라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사물은 순간적으로 생멸하는 무수한 극미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色法이 생기할 때에는 동시에 色境,香境,味境,觸境과 四大 등의 8종류가 반드시 함께 생기한다. 이는 외계의 현상이 물질적 존재로 파악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을 나타내는 것이다.
4. 心法
心法의 주체를 心王이라고 한다. 心王은 心, 意, 識의 세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心은 산스크리트어로 Citta인데 集起란 뜻이며, 心王의 힘에 의하여 心所 및 일과 행동을 일으킨다는 의미이다. 意는 산스크리트어로 Manas인데 思量혹은 依止란 뜻이며, 깊이 思惟考察하고 능히 다른 心心所를 발생하는 所依止라는 의미이다. 識은 산스크리트어로 Vijnana인데 了別이란 뜻이며, 所緣을 식별하는 능력이 있다는 의미이다. 六識은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이다. 여기서 第六識 즉 意識은 廣緣의 心王이므로 때로는 色, 聲, 香, 味, 觸까지도 식별하는 수가 있다.
心王의 了別作用에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自性分別로서 현재 直覺하는 작용이며, 둘째는 隨念分別로서 과거를 追想하는 작용이며, 세째는 計度分別로서 과거 현재 미래 三世에 걸쳐 널리 境의 表面을 直覺할 뿐만 아니라 또한 裏面에까지 推及하는 분별작용이다. 六識 중에서 前五識은 自性分別 뿐이므로 無分別이라 하고, 第六識은 세 가지의 분별을 구비해서 넓고 깊이 考察思惟하므로 有分別이라 한다. 六識을 발생하는 緣에 空, 明, 根, 境, 作意등 五種이 있다. 心이 生起할 때는 반드시 作意의 先導를 기다려 根에 의지하며 境에 의탁한다. 그러나 前五識에서는 그 생기하는 緣이 같지 않다. 眼識은 眼根과 色境과의 사이에 空隙과 光線의 緣을 얻어 생기하며, 耳識은 耳根과 聲境과의 사이에 空隙의 緣을 얻어 생기한다. 즉 眼識의 생기는 五緣(空, 明, 根, 境, 作意)에 말미암고, 耳識의 생기는 四緣(空, 根, 境, 作意)에 말미암으며, 鼻舌身三識 및 意識은 三緣(根, 境, 作意)을 갖추어야 생기할 수 있다.
5. 心所有法
心所란 心王에 종속해서 움직이는 心作用이므로 心王의 소유라는 뜻에서 心所라고 한다. 이에 46種이 있는데 크게 나누면 6종이 있다. 大地法(10), 大善地法(10), 大煩惱地法(6), 大不善地法(2), 小煩惱地法(10), 不定地法(8)이다. 心이 생기할 때에는 반드시 心所가 동반한다. 그러므로 마음의 작용을 心相應法이라고도 한다. 마음과 동반하는 법이라는 의미이다.
1). 大地法
大地法이란 생기하는 범위가 큰 法이라는 의미로서, 이 10종의 마음작용은 어떠한 마음과도-선한 마음과도, 악한 마음과도, 선도 악도 아닌 중성의 마음과도-상호 동반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 이 10가지는 受, 想, 思, 觸, 作意, 欲, 勝解, 念, 定, 慧이다. 受, 想, 思는 각각 五蘊의 하나에 상당한다(思가 行蘊임). 受는 苦, 樂, 不苦不樂의 感受, 想은 대상의 모양을 마음으로 파악하는 표상작용, 思는 마음이 어떤 방향으로 동기를 부여하는 것, 지향, 의지의 발동을 의미한다. 觸은 根, 境, 識의 접촉 즉 마음이라는 내계가 외계와 접촉하는 것을 말한다. 作意는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欲은 어떠한 일을 하고자 하는 욕구, 勝解는 대상이 어떠한 것인가를 확인하고 아는 것, 念은 기억작용, 定은 마음을 유동케 하지 않고 어느 한 점에 집중하는 것, 慧는 분별하고 판단하는 작용이다.
2). 大善地法
이 法은 信, 勤, 捨, 慙, 愧, 無貪, 無瞋, 不害, 輕安, 不放逸의 10종이다. 信은 마음의 청정함으로 해석되기도 하며, 불교에서 말하는 四諦, 三寶, 그리고 業과 그 果報 사이의 因果性의 셋에 대한 확신으로도 해석된다. 勤은 마음의 힘씀으로서 선행을 하고자 힘씀을 말한다. 捨는 마음의 평정으로서 치우침이 없는 것이다. 慙과 愧는 각각 두 가지로 이해된다. 첫번째의 이해에 따르면, 다른 사람의 덕에 대한 공경이 慙이며, 자신의 죄에 대한 두려움이 愧이다. 두 번째의 이해에 의하면, 스스로를 관찰함으로써 자신의 과실을 부끄러워함이 慙이며, 다른 사람을 관찰함으로써 자신의 과실을 부끄러워함이 愧이다. 無貪은 탐욕이 없는 것, 無瞋은 미움이 없는 것을 의미하지만, 단순히 탐욕과 미움의 비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욕망의 대상을 厭捨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不害는 비폭력으로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는 것이다. 輕安은 적응성으로서 어떠한 일을 행함에 마음이 안정되는 것이다. 不放逸은 靜慮로서 전념하여 禪을 행하는 것이다.
3). 大不善地法
大不善地法에는 無慙과 無愧의 2종이 있다. 慙과 愧의 반대의 마음작용이다.
4). 大煩惱地法
大煩惱地法은 6종으로서 痴, 放逸, 懈怠, 不信, 昏沈, 掉擧이다. 痴는 無明과도 같은 것으로 어리석음, 무지이다. 放逸은 不放逸의 반대로 마음이 과감하지 않은 것, 태만함을 말한다. 不信은 信의 반대로 마음이 청정하지 않음으로 해석된다. 昏沈은 마음이 침울함이며, 어떠한 일을 행함에 마음이 안정되지 않은 것, 즉 輕安의 반대이다. 掉擧는 마음의 경박하고 초조함, 유동하여 평정함이 없는 것이다.
5). 小煩惱地法
小煩惱地法으로는 10종이 열거된다. 忿, 恨, 稻, 嫉, 惱, 覆, 堅, 狂, 僑, 害가 그것이다. 忿은 성냄, 恨은 원한, 稻는 마음이 비뚤어짐, 嫉은 질투, 惱는 다른 사람의 충고를 듣지 않는 완고하고 우매함, 覆은 자기의 허물을 은폐함, 堅은 인색함, 狂은 기만, 僑는 자기만족이며, 害는 해를 끼치고자 하는 마음 즉 不害의 반대이다. 이들 여섯 가지의 小煩惱地法은 마음이 제6의 意識으로 작용하는 경우에만 이것과 동반한다. 前五識과는 동반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은 각각 개별적으로 생기한다.
6). 不定地法
不定地法은 8종으로서 이는 尋, 伺, 睡眠, 惡作, 貪, 瞋, 慢, 疑이다. 尋은 추론을 통하여 규명하고자 하는 거친 마음의 활동이며, 伺는 관찰적인 미세한 마음의 활동이다. 睡眠은 마음의 무딤, 惡作은 본래는 악한 행위를 의미하지만, 여기에서는 과거의 악행에 대하여 그 과오를 뉘우치는 마음작용을 뜻한다. 貪은 탐욕 즉 마음에 드는 대상의 대한 욕구, 瞋은 미움 즉 마음에 들지 않는 대상에 대한 증오, 慢은 자만심이다. 僑와 여기의 만의 차이는 전자가 자신의 성질(미모와 젊음과 혈통과 학식 등)을 훌륭하다고 생각하여 자신에 집착하는 마음의 교만함임에 대하여, 후자는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훌륭하다고 망상하여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는 마음의 교만함을 말한다. 疑는 四諦의 진리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생각하는 迷惑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煩惱는 모두 마음의 작용이다. 業도 그 중심이 되는 것은 마음의 業으로서, 결국 마음작용의 일종인 思이다. 煩惱를 끊는 올바른 지혜도 마음작용의 일종인 無漏의 慧이다. 業, 煩惱의 迷惑의 세계도, 이를 초월하여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하는 道도 모두 이 마음과 마음작용의 俱生의 관계 중의 어떠한 것에 의해 성립된다. 즉 넓은 의미의 마음의 세계 안의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6. 不相應法
不相應法은 갖추어 말하면 不相應行法이다. 色法과心法이 있으면 그 法 위에 특별한 세력이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이 세력은 心法이 아니므로 心에 相應하지도 않고 色法이 아니므로 色에 相應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不相應이라고 한다. 또 不生不滅의 法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行을 붙여 生滅變遷함을 표시한다. 이에는 得, 非得, 命根, 同分, 無想果, 無想定, 滅盡定, 生, 住, 異, 滅, 名, 句, 文 등 14종이 있다.
1). 得
得은 成就라는 뜻으로 有情法에 속하는 諸法이 서로 혼합되지 않고 성립하는 까닭은 오직 이 得이란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凡과 聖, 漏와 無漏의 구별과 五趣四生이 같지않음이 모두 得의 세력 때문이다. 得에는 法前得, 法後得, 法俱得, 非前後俱得의 4종이 있다.
2). 非得
非得은 不成就라는 뜻으로서 得의 반대이다. 非得도 또한 有情法에 한하되 得이 있을때는 반드시 그 法의 非得이 없고 非得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그 法의 得이 없게된다. 非得에는 法前非得, 法後非得, 非前後非得의 3종만이 있고, 法俱非得은 없다.
3). 命根
命根은 壽라는 뜻이다. 우리들의 身心은 원래 刹那生滅하는 것이나 同類相續해서 수십년 살아가는 까닭은 命根이란 세력이 존재해서 어느 기간동안 이 身心을 계속 보호 유지해서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4). 衆同分
衆同分이란 同類가 되게 하는 원인을 말한다. 개개의 五趣四生들의 果報와 種類가 각각 다르나 서로를 一種一類 가운데 攝入할 수 있는 것은 이 衆同分이 있기 때문이다. 衆同分에는 有情同分과 法同分이 있다. 有情同分이란 有情으로 하여금 同種同類로 되게 하는 원인세력이며, 法同分이란 有情의 신체에서 眼耳鼻舌身의 諸根이 서로 같고, 色聲香味觸의 諸境이 서로 같으며, 法法이 서로 비슷한 것은 모두 이 法同分의 힘이다.
5). 無想定
갖가지 心心所가 끊임없이 이어지며 번뇌를 생기하므로, 번뇌의 근원인 心을 滅却하기 위하여, 想을 떠나서 無心定에 들어갈 때, 이 無心定의 기간동안 心作用의 生起를 저지하는 것이 있어서 心心所로 하여금 生起하지 못하게 한다. 그것을 無想定이라 한다. 이 無心位를 定이라 하는 까닭은 禪定에서 비롯되기 때문인데, 無心에 들어가기 전의 有心定을 따라서 定이라고 한다.그 定의 體는 善性 뿐이다.
6). 無想果
無想果는 無想定을 닦은 因에 말미암는 果로서 無想天에 태어나고, 無想天에 태어난 후에는 앞서 無想定을 닦은 因의 힘으로 미래의 心心所가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 體는 無記로서 五百大劫 동안 無心에 머문다고 한다.
7). 滅盡定
滅盡定은 心心所를 모두 단절한 定으로서 無想定과 더불어 二無心定의 하나이다. 無所有處의 번뇌를 떠난 성자가 그 定의 경지를 無餘涅槃의 고요함에 견주어 無心의 寂靜境을 즐기기 위해 들어가는 定이니, 이 定을 닦음으로써 無色界의 第四天인 有頂天에 태어난다.
8). 四相
生住異滅의 四勢力을 四相이라 한다. 生은 有爲의 諸法이 미래에서 현재로 옮기는 것이다. 住는 有爲의 諸法이 한찰라 현재에 安住하는 것이다. 異는 有爲의 諸法이 衰損하는 것이다. 滅은 有爲의 諸法이 현재에서 과거에로 壞滅하는 것이다. 生住異滅의 四相 자체도 또한 生住異滅이라는 四相의 세력에 지배된다. 그래서 四相도 生住異滅한다. 무릇 有爲의 色心諸法이 생멸변천해서 무상한 까닭은 오로지 色心上에 존재하는 四相의 작용에 인한 것이다. 法의 生滅에는 一期生滅과 刹那生滅 두 가지가 있다. 일기생멸이란 보통으로 인식하는 현재의 생활기간을 生이라 하고 죽을 때를 滅이라 한다. 다시 상식으로 알 수 없는 시시각각으로 미세히 생멸변천하는 것을 찰라생멸이라 한다. 찰라란 시간의 단위를 나타내는 말로서 미세하게 시간을 분석해서 극단에 이르러 다시 분석할 수 없는 단위를 말한다. 법이 생할 때는 반드시 인연을 의지하고 멸할 때는 인연을 의지하지 않으므로 法體는 본래부터 壞滅하는 性이므로 자연히 멸하는 것이다. 유위의 제법은 本體와 作用이 있다. 본체는 恒存하지만 작용에는 생멸이 있으므로 三世를 구분한다. 작용이 아직 일어나지 않고 다만 본체만이 있는 位(未作用位)를 미래라 하며, 인연이 무르익어 바야흐로 작용을 일으키는 位(正作用位)를 현재라 하며, 인연이 이미 흩어져 작용이 멸한 位(已作用位)를 과거라 한다. 미래에서 현재에 이르고 현재에서 과거로 들어가는 순서에 따라 찰라생멸의 뜻을 중심으로 해서 四相을 설명한다. 善惡業感의 순서는 과거의 번뇌와 업으로 인해서 현재 五蘊의 身心을 感得하고 현재의 번뇌와 업으로 인해서 미래 五蘊의 身心을 感得한다.
9). 名句文
文이란 音韻屈曲해서 언어를 조직하는 단위로서 가나다라 등과 같은 單音이다. 2文을 文身이라 하고 3文 이상을 多文身이라 한다. 名은 文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간단한 名詞, 動詞혹은 形容詞등을 말함이니 소나무, 대나무, 하늘, 구름등의 낱말이다. 2名을 名身이라 하고 3名 이상을 多名身이라 한다. 句는 두 개 이상의 名을 연결되어서 일종의 의미를 나타내는 언어를 말한 것이니 즉 "산에 오른다" "냇물을 건넌다" "꽃을 본다"는 등과 같은 것이다. 2句를 句身이라 하고 3구 이상을 多句身이라 한다. 이 名句文은 모두 소리 위에 존재해서 이 힘으로 언어를 조직하며 思想을 표시하며 事理를 나타내고 설명한다.
7. 無爲法
無爲法이란 생멸변천함이 없는 常住한 실체를 말한다. 이에 三種이 있으니 虛空無爲, 擇滅無爲, 非擇滅無爲이다.
1). 虛空無爲
虛空無爲란 장애됨이 없음이 本義이어서, 有爲法이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를 막론하고 一切處에 遍滿하며 十方世界에 가득차서, 개개의 법이 서로서로 장애를 받지 않도록하는 常住不動의 體이다. 그러므로 수없는 세계가 동시에 일어나고 혹은 멸하나 虛空無爲는 增減消長하는 일이 없고 그 체는 오직 하나뿐이다.
2). 擇滅無爲
擇滅無爲란 有漏의 諸法에 존재하는 壞滅의 原理이다. 이 原理는 낱낱의 有漏法이 번뇌의 繫縛을 여의었을 때에 나타나는 唯善無漏의 常住法으로서, 오직 有漏와 無漏의 2智로써 證得하는 뛰어난 解脫法이다. 擇이란 簡擇의 뜻으로서 지혜의 작용이다. 이 지혜의 힘으로 인해 번뇌의 繫縛을 벗어났을 때에 나타나는 壞滅의 原理가 擇滅無爲이며 離繫라고도 한다.
3). 非擇滅無爲
이 無爲는 畢竟不生法에서 얻는 불생불멸의 法體이다. 一切法은 본래 미래에 잡다하고 혼란스럽게 있다가 여러가지 인연을 만나면 현재에 나타나고 작용을 마치면 곧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만약 인연이 없을 때는 그 法이 영원히 미래에 住해서 현재에 생기하지 못하는 것을 畢竟不生法이라 한다. 이 無爲는 지혜에 의해 얻어지는 無爲가 아니라 다만 인연이 없기 때문에 이루어지므로 非擇滅無爲라고 한다.
8. 諸法의 三性
75法의 性에 善, 惡, 無記의 구별이 있다. 인간과 天이라는 즐거운 果를 가져오는 法을 善이라 하고, 三惡趣의 괴로운 果를 초래하는 法을 不善이라고 하며, 果를 가져올 힘이 없는 것을 無記라고 한다. 이 삼성에 따라 諸法을 분류하면 별표3과 같다.
#. 참고문헌
1. 世親 {阿毘達磨俱舍論} 30권, 현장 역, 신수대장경 29.
2. 世親 {俱舍論} 한글대장경 121,122. 동국역경원
3. 梶川乾堂 {俱舍論大綱} 全明星 역, 불광출판부
4. 上山春平,櫻部建 {아비달마의 哲學} 정호영 역, 민족사
5. 테오도르 체르바츠키 {小乘佛敎槪論} 권오민 역, 경서원
#구사론의법의체계
구사론구사론
소승서 대승 전향 세친이 주역한
제자들 체계적 토론 해석 논문집
北傳 漢譯논장들 아함으로 성립
논장(論藏)이 처음 성립되었을 때 본래의 범어 이름으로 아비달마장(阿毘達磨藏)이라 불렀다. 아비달마를 번역하면 ‘법에 대하여’ 라는 뜻을 가진 대법(對法)이라 한다. 경장과 율장은 부처님의 교설과 훈계에서 시작된 부처님의 직접적인 말씀을 가리키는 반면, 논장은 부처님의 말씀과 훈계에 대하여 제자들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토론하여 논의하고 해석한 논문집이라 할 수 있다. 아비달마의 기원이 토론하고 논의한 점 등에서 보면 부처님 재세 시부터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아비달마는 부파불교 시대의 여러 부파 안에서 활발히 연구된 교의들을 체계적으로 조직한 것을 말한다. 부파불교를 아비달마 불교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아비달마는 주로 <아함경>을 연구한 결과물이다.
<아함경>은 불교 경전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경으로 한역에서는 <장아함> <중아함> <증일아함> <잡아함>의 4아함이 있다. 남전(南傳)의 5니까야와 같은 내용이다. 이 아함을 바탕으로 성립된 북전(北傳) 한역의 논장은 설일체유부에서 나온 논장들이다. 기원 전후부터 나오기 시작하여 남전의 <법집론>과 <분별론>에 상응하는 <집이문족론(集二門足論)>과 <법온족론(法蘊足論)> 등이 초기 논장에 해당된다. 그러나 5세기 무렵 <구사론(俱舍論)>이 나오고부터 교리적 이론이 체계화 되고 불교사상을 정연하게 조직적으로 서술하게 되었다.
<구사론>은 세친(世親, Vasubandhu)이 지은 것으로, 카니쉬카 왕의 명에 의하여 500 아라한이 지었다는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의 내용을 위주로 법구(法救)의 <잡아비담심론>의 체계를 본 따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구사론> 본 이름 역시 <아비달마구사론>이다.
<구사론>이 나오고 아비달마 체계가 이의 없이 완성된 것처럼 보였으나 의외의 논쟁이 또 일어났다. 그것은 중현(衆賢, Sanghabhadra) 논사(論師)가 구사론을 반박하기 위해서 또 다른 논서를 짓고부터다. 중현은 <비바사론>을 깊이 연구한 뒤에 <구사론>을 지은 세친의 견해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구사론>을 반박하기 위해서 논을 지어 처음에는 이름을 <구사박론(俱舍雹論)>이라 하였다. 이 <구사론>을 반박하는 <구사박론>을 쓰기 위해 <구사론>을 12년간 연구하였다 한다. 이로 인해 후대에 <구사론>을 공부하려면 12년을 해야 한다는 말이 생겼다.
중현은 세친을 만나 논쟁을 벌이려고 시도했지만 세친이 그를 만나주지 않아 무산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중현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다. 죽기 얼마 건 임종을 앞두고 있던 중현이 세친에게 편지를 써 보내 사죄를 청하며 사과를 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지은 <구사박론>을 보존하여 줄 것을 세친에게 청했다. 세친이 그의 청을 받아들여 <구사박론>을 보관하면서 책의 이름을 <순정리론(順正理論)>으로 바꾸었다. 처음 중현은 세친이 설일체유부의 교의를 왜곡하고 경량부의 교의를 도입했다고 하여 자신은 설일체유부의 정통교의를 내세우기 위하여 세친을 비판했던 것이다.
세친은 북인도 건타라국 부루사부라(지금의 페샤와르, Peshawar) 출신으로 4~5세기경에 활동한 학승이었다. 소승의 한 부파였던 설일체유부에 출가하여 유부의 교의를 전문적으로 배우고 많은 저술을 남겼다. 처음에는 소승의 교의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대승을 비방하다가 나중에 형인 무착(無着, Asangha)의 권유에 따라 대승으로 전향했다. 그 후 <십지경론>을 저술하고 형 무착이 지은 <섭대승론>을 해석한 <대승론석>을 저술하였다. 그는 소승과 대승에 모두 500부씩의 논서를 지었다 해서 1000부 논사라 불리기도 했던 인물이다. 형 무착 그리고 동생 사자각(師子覺)의 삼형제가 모두 불교사에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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