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경

[스크랩] *** 佛 遺 敎 經***

수선님 2018. 8. 12. 12:20

*** 佛 遺 敎 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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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分>(釋迦牟尼佛,初轉法輪,度阿若교陳如.- - -)

 

<正宗分>(汝等比丘.於我滅後,當尊重珍敬波羅提木叉.- - -)

 

<1>初明共世間法要.

1>初對治邪業法要 (邪業 對治하는 法.)

.初明根本淸淨戒 (근본 청정계를 밝힌다.)- - - 以戒爲師

.次明方便遠離淸淨戒 (방편으로 세상을 멀리 떠나 淸淨하라는 밝힌다.)- - -持戒之相

.三明戒能生諸功德 (戒律 모든 功德 낳음을 밝힌다.)- - - 正順解脫

.四說勤修戒利益 ( 가지기를 권해서 이익을 말한다.)- - - 持戒功德

2>二對治止苦法要 (괴로움을 對治하는 法.)

ㄱ.初根欲放逸苦對治

1.初根放逸苦對治 (根(감각 기관) 방일의 괴로움을 다스리는 .)- - - 當制五根

2.二欲放逸苦對治 (욕심의 방일의 괴로움을 다스리는 .)- - - 制之一處

.二多食苦對治 (많이 먹는 괴로움을 다스리는 .)- - - 應量受食

.三懈怠睡眠苦對治 (게으름과 졸음의 괴로움을 다스리는 .)- - - 睡魔慙愧

3>三對治滅煩惱法要 (번뇌를 對治하는 法.)

.初瞋애煩惱障對治 (성냄의 번뇌를 다스리는 .)- - - 忍辱瞋

ㄴ.二貢高煩惱障對治 (교만의 번뇌를 다스리는 .)- - - 脫俗離慢

.三諂曲煩惱障對治 (諂曲(아첨) 번뇌를 다스리는 .)- - - 質直爲本

<2>二明不共世間法要 (세상을 초월한 大人 功德 말한다.)---(謂成就出世間大人功德也)

 

1>初無求功德 (함이 없는 功德.)- - - 少欲無求

2>二知足功德 (만족을 아는 功德.)- - - 吾唯知足

3>三遠離功德 (멀리 떠나는 功德.)- - - 寂靜遠離

4>四不疲倦功德 (게으르지 않는 功德.)- - - 精進無難

5>五不忘念功德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功德.)- - - 不忘念慧

6>六禪定功德 (선정의 功德.)- - - 攝心禪定

7>七智慧功德 (지혜의 功德.)- - - 智慧明燈

8>八畢竟功德 (戱하지 않는 功德.)- - - 善不戱論

<流通分>

<1>初勸修流通 (닦기를 권하는 流通.)- - - 令不放逸

<2>二證決流通 (깨달아 결정하는 유통.)- - - 無疑四諦

<3>三斷疑流通 (의심을 끊게 하는 유통.)

1>初顯示餘疑 (남은 의심을 나타낸다.)- - - 夜見電光

2>二爲斷彼彼疑 (여럿의 의심을 끊게 한다.)- - - 大悲重說

3>三重說有爲無常相勸修 (세상의 덧없음을 말해 수행하기를 권한다.)- - - 會必有離

<4>四囑付流通 (탁하여 청촉하는 유통.)- - - 滅度

<序分>

 

釋迦牟尼佛,初轉法輪,度阿若교陳如.最後說法,度須跋陀羅.所應度者,皆已度訖於娑羅雙

樹間,將入涅槃.是時中夜,寂然無聲.爲諸弟子,略說法要.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처음으로 법의 바퀴를 굴리시어 아야 교진여등을 제도하시고, 최후의 설법으로 수발타라를 제도하시니, 제도할 사람은 모두 제도하시었다. 사라쌍수 사이에서 장차 열반에 들려 하시니, 이때 한밤중이라 사방은 고요하여 아무 소리도 없었다. 모든 제자를 위하여 간략하게 법의 요긴한 점을 말씀하셨다.

 

 

<正宗分>

 

<1>初明共世間法要.

1>初對治邪業法要 (邪業 對治하는 法.)

 

.初明根本淸淨戒 (근본 청정계를 밝힌다.)-----以戒爲師

 

汝等比丘.於我滅後,當尊重珍敬波羅提木叉.如闇遇明,貧人得寶.當知.此則是汝等大師.

若我住世,無異此也.

 

너희들 비구여, 내가 멸도한 후에 마땅히 파라제목차를 존중하고 보배같이 공경해야 한다. 마치 어둠 속에서 밝은 빛을 만난 , 가난한 사람이 보배를 얻은 것같이 해야 한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은 너희들의 스승이니, 만약 내가 세상에 머물드라도 이와 다를 것이 없느니라.

 

講說: 中阿含經卷第36 中阿含梵志品瞿黙目건連經第四(第三誦)에 佛滅後 얼마되지 않은 시기에 아난존자가 마가다국 왕사성 교외의 산수 목건련의 집을 방문했을 때에 마가다국 대신 우세와의 대화에서 아난존자는 비구의 열가지 條件을 설하고 있다. 즉,

1> 云何爲十? 雨勢! 比丘修習禁戒,守護從解脫,又復善攝威儀禮節,見纖芥罪,常懷畏怖,受

持學戒.

비구는 禁하고 있는 계율을 닦아 익히고 파라제목차를 수호하여야 한다. 또 위의와 예절을 잘 가져서 겨자씨처럼 작은 죄를 보더라도 항상 두려운 마음을 가슴에 품으며 戒學을 받아 지녀야 한다.

2> 比丘廣學多聞,守持不忘,積聚博聞,所謂法者,初妙.中妙.竟亦妙,有義有文,具足淸淨,顯

現梵行,如是諸法廣學,多聞誦習至千,意所惟觀,明見深達.

비구는 널리 배우고 많이 알아서,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지켜가져서 들었던 것을 마음에 쌓아 두어야 한다. 말하자면 法(가르침)이라는 것은 처음과 중간과 끝이 다같이 妙하여 뜻이 있고 이름이 있으며 淸淨을 구족하여 종교적 도덕생활과 수행을 나타낸다. 이와같이 모든 법을 널리 배우고 많이 듣고 외워 익혀서, 思惟 觀察한 바의 뜻을 밝게 보고 깊이 통달해야 한다.

*千---明本作“于”.

 

3> 比丘作善知識,作善朋友,作善伴黨.

비구는 선지식이 되어야하고 좋은 벗이 되어야하고 훌륭한 도반으로서 무리를 이루어야 한다.

4> 比丘樂住遠離,成就二遠離,身及心也.

비구는 몸과 마음의 罪惡을 멀리 여의어서 몸과 마음의 깨끗함을 이루어야 한다.

5> 比丘樂於燕坐,內行正止,亦不離伺,成就於觀,增長空行.

비구는 즐겁게 坐禪하여 안으로 正止를 행하고 또한 관찰을 떠나지 아니하여야 한다.그리하여 觀을 이루어서 空行을 增長해야 한다.

6> 比丘知足,衣取覆形,食取充軀,隨所遊至,與衣鉢俱,行無顧戀,猶如鷹鳥,與兩翅俱,飛翔

空中.

비구는 만족할 줄을 알아야 한다. 옷은 몸을 가릴 정도면 되고 음식은 몸을 기르는 정도면 된다. 萬行하는 데에는 옷과 발우를 갖추고 행동은 무엇이든지 연연하여 되돌아 보지 말아야 한다. 마치 새가 두 날개를 갖추고 空中에 飛行하는 것과 같다.

 

7> 比丘常行於念,成就正念,久所曾習,久所曾聞,恒憶不忘.

비구는 항상 알아차림을 닦아서 正念을 成就하여, 오래도록 일찌기 익힌 것과 들었던 것을 늘 기억하여 잊지 말아야 한다.

8> 比丘常行精進,斷惡不善,修諸善法,恒自起意,專一堅固,爲諸善本,不捨方便.

비구는 항상 精進하여 善하지 않은 惡을 꾾고 모든 善法을 닦으며 항상 스스로 뜻을 일으켜서 오로지 한결같이 견고하게 하여 모든 선의 근본을 삼아서 방편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

 

9> 比丘修行智慧,觀興衰法,得如此智,聖慧明達,分別曉了,以正盡苦.

比丘는 智慧를 닦아 存在의 興亡盛衰를 잘 觀察해야 한다. 그리하여 이와같은 智를 얻어서, 성스러운 지혜가 밝게 통달하여 모든 존재의 본모습을 분명하게 분별하여 환하게 알아서 이것으로서 올바르게 괴로움을 제거해야 한다.

 

10> 比丘諸류已盡,而得無류,心解脫,慧解脫,自知自覺,自作證成就遊..生已盡,梵行已立,

所作已辦,不更受有,知如眞.

비구는 모든 번뇌를 이미 다하여 무루를 얻고, 감성적 번뇌인 갈애를 해탈함과 이성적 번뇌인 無明(無知), 즉 어리석음을 해탈하여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달아서,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여 無碍 自在함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하여 生은 이미 다하고 해탈을 위한 종교적 생활과 수행을 이미 확립하여, 다시는 아라한과 같이 다음의 생존을 받지 아니함을 알아야 한다.

 

.次明方便遠離淸淨戒 (방편으로 세상을 멀리 떠나 淸淨하라는 밝힌다.)---

持戒之相

 

持淨戒者.不得販賣貿易.安置田宅.畜養人民奴婢畜生.一切種植及諸財寶,皆當遠離,如避

火갱.不得斬伐草木.墾土掘地.合和湯藥.占相吉凶.仰觀星宿.推步盈虛.歷數算計.皆所不

應.節身時食.淸淨自活.不得參預世事.通致使命.呪術仙藥.結好貴人.親厚설慢.皆不應

作.當自端心,正念求度.不得包藏瑕疵.顯異惑衆.於四供養,知量知足.趣得供事,不應畜

積.

 

깨끗한 계율을 가지는 자는 물건을 사고 팔거나 貿易을 하지 말며, 집이나 논밭을 마련하지 말며, 사람이나 노예나 짐승을 기르지 말며, 일체 種植과 모든 재보를 모두 마땅히 멀리 여의기를 마치 불구덩이를 피하듯 하여야 한다. 초목를 베거나 땅을 개간하지 말라. 藥을 만들거나 사람의 吉凶을 점치거나, 하늘의 별을 보고 점치거나, 세상의 흥망을 점치거나, 數를 놓아 마추는 일 등을 하지 말라. 모두 해서는 안될 일들 이다.

몸을 바르게 갖고, 때를 정하여 공양하며, 청정하게 스스로 戒를 지키며 살아야 된다. 세상 일에 참여하여 관료의 심부름이나 하는 하수인이 되지 말며, 呪術을 부리거나 仙藥을 만들지(구하지) 말며, 貴人을 사귀어 친한 사람을 업신여기거나 웃 사람에게 버릇없이 굴지 말라. 이러한 일들은 모두 해서는 아니된다.

마땅히 자기 마음을 단정히 하고 바른 생각으로 남을 구제할 일이지, 자기 허물을 숨기거나, 이상한 행동으로 대중을 혹하게 하지 말라. 음식. 의복. 침구. 의약 등네가지 공양의 분량을 알고 만족하게 여기며, 받은 공양거리를 쌓아 두지 말라.

 

 

.三明戒能生諸功德 (戒律 모든 功德 낳음을 밝힌다.)---正順解脫

 

此則略說持戒之相.戒是正順解脫之本.故名波羅提木叉.因依此戒,得生諸禪定,及滅苦智

慧.

 

이것은 戒를 가지는 모양을 대략 말하였다. 戒는 해탈을 바르게 따르는 근본이다. 그러므로 파라제목차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 戒를 의지하면 모든 禪定을 얻고 苦를 滅하는 지혜를 낼 수 있다.

 

.四說勤修戒利益 ( 가지기를 권해서 이익을 말한다.)---持戒功德

 

是故比丘,當持淨戒,勿令毁缺.若人能持淨戒,是則能有善法.若無淨戒,諸善功德,皆不得

生.是以當知,戒爲第一安穩功德住處.

 

그러므로 비구들은 마땅히 깨끗한 戒를 가져 어긋나지 않게 해야 된다. 만약 사람이 淨戒를 가지면 능히 좋은 법을 가질 수 있거니와 만약 淨戒가 없으면 모든 善功德이 생길 수 없다. 그러므로 戒는 가장 安穩한 功德이 머무는 곳임을 알아야 된다.

2>二對治止苦法要 (괴로움을 對治하는 法.)

ㄱ.初根欲放逸苦對治

 

1.初根放逸苦對治 (根(감각 기관) 방일의 괴로움을 다스리는 .)---當制五根

 

汝等比丘.已能住戒.當制五根,勿令放逸,入於五欲.譬如牧牛之人,執杖視之,不令縱逸.犯

人苗稼.若縱五根,非唯五欲,將無涯畔,不可制也.亦如惡馬不以비制.將當牽人.墜於坑감.

如被劫賊,苦止一世.五根賊禍,殃及累世.爲害甚重,不可不愼.是故智者制而不隨.持之如

賊,不令縱逸.假令縱之,皆亦不久見其磨滅.

 

너희들 비구는 이미 능히 戒에 머물거든 마땅히 五根을 제어하여야 한다. 마음을 방일시켜 오욕에 들어가지 않게 하라. 비유를 들자면 소치는 사람이 막대기를 쥐고 소를 주시하면서 날뛰는 소로하여금 남의 곡식을 먹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 만일 五根을 제멋대로 놓아두면 오욕으로 뿐만 아니라 갈려고 하는 곳이 끝이 없어서 제어할 수 없다. 또한 사나운 말과 같아서 재갈을 채우지 않으면 장차 사람을 끌어다 흙구덩이에 처박히게 할 것이다. 도둑의 침해를 당하는 것은 그 괴로움이 一生에 그치지만 五根이라는 盜賊의 禍는 그 災殃이 여러 生에 미치어, 그 피해가 심히 무겁다. 마땅히 삼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이는 五根을 제어하여 따르지 않고, 그것을 잡아두기를 마치 도둑을 잡는 것과 같이하여 방일하지 않게한다. 가령 방일하게 하더라도 모두 또한 오래지 않고 그것이 磨滅함을 볼 것이다.

 

2.二欲放逸苦對治 (욕심의 방일의 괴로움을 다스리는 .)---制之一處

 

此五根者,心爲其主.是故汝等當好制心.心之可畏,甚於毒蛇,惡獸,怨賊,大火越逸,未足喩

也.譬如有人,手執蜜器,動轉輕躁,但觀於蜜,不見深坑.譬如狂象無鉤,猿후得樹,騰躍초

척,難可禁制.當急挫之,無令放逸.縱此心者,喪人善事.制之一處,無事不辦.是故比丘,當

勤精進,折伏汝心.

 

이 五根은 마음이 그 주인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마땅히 마음을 잘 제지해야 된다. 마음이 두렵기는 毒蛇나 惡獸, 怨賊보다 심해서 큰 불이 넘쳐 번지는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비유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꿀 그릇을 손에 들고 이리저리 가볍게 움직이고 시끄럽게 떠들면서 단지 꿀만 보고 발아래의 깊은 구덩이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으며, 마치 미친 코끼리가 쇠로 만든 잡아 매어두는고삐가 없고, 원숭이가 나무를 타면서 이리 뛰고 저리 달림에 제지하기 어려움과 같다. 마땅히 급히 욕심을 꺾어서 방일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 마음을 풀어 놓아버리는 자는 사람의 착한 일을 잃어버리지만, 마음을 한 곳에 제어하면 갖추지 못할 일이 없다. 이런 까닭으로 비구는 마땅히 부지런히 정진하여 그 자신의 마음을 항복받아야 한다.

 

 

.二多食苦對治 (많이 먹는 괴로움을 다스리는 .)---應量受食

 

汝等比丘.受諸飮食,當如服藥.於好於惡,勿生增減.趣得支身.以除飢渴.如蜂採華,但取其

味,不損色香.比丘亦爾.受人供養,趣自除惱.無得多求,壞其善心.譬如智者,籌量牛力,所

堪多少,不令過分.以竭其力.

 

너희 비구들아. 모든 음식을 받을 때에는 마땅히 약을 먹는 듯이 하고, 좋고 나쁜 것에 대하여 마음을 더하고 덜하지 말며, 몸을 지탱하고, 주리고 목마름을 없애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 마치 꿀벌이 꿀을 딸 때에 단지 그 맛만을 취하고 빛깔이나 향기를 다치지 않는 것과 같다. 비구도 그와같이 사람들의 공양을 받을 때에 스스로의 번뇌를 제거하는 데에로 나아가, 함부로 공양을 많이 구하여 공양을 올리는 자의 착한 마음을 파괴하지 말라. 비유를 들자면 지혜 있는 자가 소의 힘이 감당할 수 있는 바가 많고 적음을 헤아려 소의 한계를 지나치게 하여 그 힘을 다 없애지 않게 하는 것과 같다.

 

.三懈怠睡眠苦對治 (게으름과 졸음의 괴로움을 다스리는 .)---睡魔慙愧

 

汝等比丘.晝則勤心.修習善法,無令失時.初夜後夜,亦勿有廢.中夜誦經,以自消息.無以睡

眠因緣,令一生空過無所得也.當念無常之火,燒諸世間.早求自度,勿睡眠也.諸煩惱賊常伺

殺人,甚於怨家.安可睡眠,不自警寤.煩惱毒蛇睡在汝心.譬如黑원在汝室睡.當以持戒之鉤

早倂除之.睡蛇旣出,乃可安眠.不出而眠,是無慙人.慙恥之服,於諸莊嚴最爲第一.慙如鐵

鉤,能制人非法.是故常當慙恥,無得暫替.若離慙恥,則失諸功德.有愧之人,則有善法.若無

愧者,與諸禽獸無相異也.

 

너희 비구들아! 낮에는 부지런한 마음으로 착한 법을 닦아 익혀서, 때(時期)를 잃지 않게 하며, 초저녁과 새벽에도 또한 공부를 廢하지 말며, 한 밤중에도 經典을 읽어서 스스로 소식이 있어야 한다. 睡眠을 因緣하여 일생을 아무 소득없이 헛되이 보내지 말라. 마땅히 무상의 불이 모든 世間을 태우고 있음을 잊지 말고 생각하여 조속히 자기를 구제할 것이요, 부디 잠만자지 말라. 모든 번뇌의 도적은 항상 사람을 엿보아 죽이는 것이 원수보다 심하다. 어찌 잠만 자고 스스로 경책하여 깨지않을 수 있겠는가. 번뇌의 독사가 너의 마음에 잠자고 있으니, 비유하자면 검은 뱀이 너의 방에 잠자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마땅히 持戒의 칼로 빨리 물리쳐 없애야 된다. 잠자는 뱀이 이미 나간 뒤에야 비로소 편안히 잠잘 수 있는 것과 같다. 독사가 나가지 않은 데도 잠자고 있는 이는 부끄러워 함이 없는 사람이니, 부끄럼의 옷은 모든 莊嚴 가운데 가장 최고이다. 부끄럼은 마치 鐵로 만든 갈고리와 같아서 능히 사람의 법답지 않는 것을 제어한다. 그러므로 항상 부끄러워할 줄 알아서 잠시라도 폐지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떠나면 모든 공덕을 잃어버린다.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착한 법이 있거니와 만약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모든 禽獸와 더불어 다를 바가 없다.

 

3>三對治滅煩惱法要 (번뇌를 對治하는 法.)

 

.初瞋애煩惱障對治 (성냄의 번뇌를 다스리는 .)---忍辱瞋

 

汝等比丘.若有人來節節支解.當自攝心,無令瞋恨.亦當護口,勿出惡言.若縱애心,則自放

道,失功德利.忍之爲德,持戒苦行所不能及.能行忍者,乃可名爲有力大人.若其不能歡喜忍

受惡罵之毒.如飮甘露者.不名入道智慧人也.所以者何.瞋애之害則破諸善法,壞好名聞.今

世後世,人不喜見.當知瞋心,甚於猛火.常當防護,無令得入.劫功德賊,無過瞋애.白衣受欲

非行道人,無法自制,瞋猶可恕.出家行道無欲之人,而懷瞋애,甚不可也.譬如淸冷雲中,霹

靂起火,非所應也.

 

너희들 비구여, 만일 어떤 사람이 와서 너의 사지 마디마디를 끊는다 해도, 스스로 마음을 거두어서 성을 내어 恨을 품지 말라. 또 입을 보호하여 나쁜 말을 하지말라. 만약 성내는 마음을 제멋대로 놓아두면 스스로가 道를 障碍하여 공덕의 이익을 잃고 만다. 참는 것이 德이 되는 것은 戒를 가지거나 苦行하는 것으로도 능히 미칠 수가 없다. 능히 참음을 행하는 者는 곧 힘 있는 大人이라고 이름할 수 있다. 만약 더러운 꾸지람의 毒을 참고 받아들이기를 마치 감로수를 마시듯이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은 道에 들어간 지혜 있는 사람이라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성냄의 害는 모든 善法을 파괴하며, 좋은 名聲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今世와 後世의 사람들이 기쁘게 보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성내는 마음은 맹렬히 타오르는 불보다 심하다. 항상 막고 보호하여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된다. 功德을 겁탈하는 도적은 성냄보다 앞서가는 것이 없다. 在家者는 욕심을 받아들이므로 道를 행하는 사람이 아니다. 스스로를 제어하는 법이 없기때문에 성냄도 오히려 용서받을 수 있지만, 出家하여 道를 행하는 욕심없는 사람이 성내는 마음을 품는 것은 심히 올바르지 못하다. 비유를 들자면 淸冷한 구름 가운데서 천둥이 쳐서 불을 일으키는 것과 같이, 應할 바가 아니다.

 

ㄴ.二貢高煩惱障對治 (교만의 번뇌를 다스리는 .)---脫俗離慢

 

汝等比丘.當自摩頭.已捨飾好.著壞色衣.執持應器.以乞自活.自見如是.若起교慢.當疾滅

之.增長교慢,尙非世俗白衣所宜.何況出家入道之人,爲解脫故,自降其身而行乞耶.

 

너희들 비구여! 마땅히 자기의 머리를 만져보라. 이미 세속의 꾸밈을 버리고, 가사를 입었으며, 발우를 들고서 걸식으로써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보기를 이와 같이 하라, 만약 교만이 일어나거든 빨리 없애야 한다. 교만을 높이 기르는 것은 오히려 세속 사람들로서도 마땅하지 않는데, 하물며 어찌 출가하여 道에 든 사람이 解脫하기 위하는 까닭에 스스로 그 몸을 낮추어서 乞食을 행함에 있어서랴.

 

講說: <수타니파타 제4경>에서 석존은 농경자 바라드바쟈와의 대화를 통해 “걸식”과 “거지”의 다른 점을 잘 말해 주고 있다.

먹을 것을 빈다는 점에서 보면 걸식과 거지와 차이가 없다. 어떤 점에서 출가자의 “걸식”과 “거지”가 틀리는 것일까. 출가자의 걸식은 걸식행이라고 하여 수행의 하나로 본다. 경에 이 걸식 수행의 참뜻을 예를 들어 가르치고 있다. 즉,

?사문이여, 나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린 후에 먹습니다.

사문이여, 당신도 밭을 가십시오. 그리고 씨를 뿌리십시오. 갈고 뿐린 다음에 먹

으십시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바라문이여,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갈고 뿌린 다음에 먹습니다.? 바라문이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당신의

멍에나 호미 그리고 작대기나 소를 본 일이 없읍니다. 그런데 당신 고오타마는 어

째서 「바라문이여,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갈고 뿌린 다음에 먹습니다」라

고 하십니까??<76>

스승은 대답했다. ?믿음은 종자요, 고행은 비이며, 지혜는 내 멍에와 호미, 부끄

러움은 괭잇자루, 의지는 잡아 메는 새끼, 생각은 내 호미날과 작대기입니다.<77>

몸을 근신하고 말을 조심하며, 음식을 절제하여 과식하지 않습니다. 나는 진실을

김매는 것으로 삼고 있습니다. 柔和는 내 멍에를 떼어 놓습니다.<78> 노력은 내

황소이어서 나를 안온의 경지로 실어다 줍니다. 물러남이 없이 앞으로 나아가 그

곳에 이르면 근심걱정이 없읍니다.<79> 이 밭갈이는 이렇게 해서 이루어지고 단

이슬(甘露)의 과보를 가져 오는 것입니다. 이런 농사를 지으면, 온갖 고뇌에서 풀

려 나게 됩니다.?<80>

 

하나하나의 비유가 멋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출가 걸식자의 생활이 농경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大地, 종자, 도구, 天氣 등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이 설명에서 잘 나타나듯이 출가걸식은 오직 밥을 먹는 것만으로 한정되지 않는 항상 깨달음을 위한 식량으로서 행해지는 수행이 아니면 안된다. 출가자는 마음을 경작하는 사람으로써 大地라고 하는 마음을 지혜로 갈고, 믿음이라고 하는 종자를 심고, 계율이라고 하는 비를 뿌려 비옥하게 하고, 산란되는 마음을 선정이라고 하는 것으로 묶어서 올바른 분별로 자신의 마음을 채찍질하여, 나태하지 않는 노력이라는 소에게 인도되어 깨달음으로 향하는 수행이 걸식 출가 생활인 것이다.

한편 인도의 승가에서 수행의 중요한 방편으로 취급되었던 걸식의 관행이 중국불교에 와서는 그 사정을 달리하게 되었다. 즉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이 능경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하였던데 반하여 중국불교에서는 농경생활이 오히려 佛道修行의 중심으로 여겨졌는데 특히나 선종계통의 수행자들은 깊은 산속에 총림을 이루고 살며 경작을 중심으로 자급자족의 생활을 하였다. 총림의 최초의 창설자인 백장선사의 「一日不作, 一日不食」이라는 말이 중국불교에서의 농경생활과 수행생활의 결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승려의 수행적 삶의 중심이 인도에서는 걸식생활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중국에서는 경작생활로 이행하게 된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중국의 승려들은 출가생활을 老莊神仙思想의 영향으로 산속에 은둔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걸식이 어려워졌다.

또 남북조와 당대를 걸치는 소위 三武一宗의 法難이라는 불교탄압을 피해 한때 산속으로 은둔할 수 밖에 없었던 사회적 여건도 작용하였다. 산중에서 은둔생활을 하면 당연히 걸식이 불가능하므로 자급자족의 경작노동의 생활방식이 출현하였다. 실용성을 중시하는 중국인의 사고방식 역시 경작노동이라는 구체적 생활과 禪修行의 결합을 이상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한 생각은 「신통묘용이여. 물긷고 나무함이로다」라는 방거사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이외에도 몇가지 이유들을 더 들 수 있지만 어쨌든 그러한 문화적 요인들 때문에 중국불교에서는 걸식생활이 전혀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대신 경작생활이 대부분의 승려들에게 주요한 생활 방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여하튼 인도의 불교교단에서 중요한 수행이라고 여겨졌던 걸식의 생활이 중국에 이어 한국, 일본에서는 상당히 약화되고 오히려 경작생활이 수행의 중심으로 변질된 것은 불교 승려의 원초적인 이상적 修行者相과는 배치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雜阿含 乞食經(97)>은 걸식과 비구의 관계를 설하면서 비구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定義 하고있다. 즉,

 

所謂比丘者,非但以乞食. 소위 비구라는 것은 다만 걸식하는 것만이 아니니라.

受持在家法,是何名比丘? 재가법을 받아 가지면서 어찌 비구라 이름하겠는가?

於功德過惡,俱離修正行. 공덕과 허물을 모두 떠나 바른 행을 닦으면

其心無所畏,是則名比丘. 그 마음에 두려울 바가 없으니. 이를 비구라 이름하리라.

 

그리고 <維摩經>에는 걸식이 수행이며, 그 행의 목적은 열반임을 말한다. 즉, <維摩經 弟子品>에 부처님이 大迦葉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유마힐에게 가서 병을 위문하여라.” 가섭이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하기를 “세존이시여, 저는 그 사람에게 가서 병을 위문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어찌해서 그런가 하면 제가 옛적에 어느 가난한 마을에서 걸식을 하고 있을 때에 유마힐이 와서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큰 가섭이시여, 자비한 마음이 있기는 하오만 넓고 크지 못한 듯하오. 그러기에 넉넉하고 잘 사는 집을 버리고 가난한 이만 찾아다니며 걸식을 합니다 그려.

가섭이시여, 평등한 법에 머물러서 응당 차례대로 걸식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먹지 않기 때문에 걸식을 해야 하며, 인연으로 화합되는 모양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응당 단식(搏食)을 취해야 하며, 받지 않기 위하여 응당 그 밥을 받아야 합니다.

빈 마을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마을에 들어가서, 눈에 보이는 빛깔은 마치 장님이 빛깔을 보듯 하고, 귀에 들리는 음성도 마치 메아리를 듣는 듯하며, 코로 맡는 냄새도 마치 바람이 코끝을 스치는 듯하고, 혀로 맛보는 맛에도 분별을 내지 않아야 합니다.

몸으로 받는 촉감에도 無心定에 든 것과 같이 하여, 의식에서 분별되는 여러 법도 마치 환상과 같아서 제 바탕이 없고 남을 인해서 생기는 바탕도 없으며, 본래부터 그러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지금에 와서 멸하여 없어지는 것도 아닌 줄을 알아야 합니다.- - -

僧肇는 ?오온으로 된 몸이나 搏食은 모두 화합으로 이루어진 모양일뿐이다. 이러한 화합의 모양을 무너뜨리는 데에 열반의 경계가 나타난다. 이 자세로써 단식을 취해야 한다. 이러한 자세가 되면 온종일 단식을 하여도 온종일 열반의 경지가 나타난다.?라고 말하고 있다.

 

 

.三諂曲煩惱障對治 (諂曲(아첨) 번뇌를 다스리는.)---質直爲本

 

汝等比丘.諂曲之心,與道相違.是故宜應質直其心.當知.諂曲但爲欺광.入道之人,則無是

處.是故汝等宜當端心,以質直爲本.

 

너희 비구들아! 아첨하는 마음은 道와 더불어 서로 어긋난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 마음을 정직하고 질박하게 해야 된다. 아첨은 단지 속임수이니, 道에 들어간 사람에게는 올바르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마음을 단정히 하여 질박하고 정직함을 근본으로 해야 된다.

 

<2>二明不共世間法要 (세상을 초월한 大人 功德 말한다.)

 

1>初無求功德 (함이 없는 功德.)---少欲無求

 

汝等比丘.當知多欲之人,多求利故,苦惱亦多.少欲之人,無求無欲,則無此患.直爾少欲,尙

宜修習.何況少欲能生諸功德.少欲之人,則無諂曲以求人意.亦復不爲諸根所牽.行少欲者,

心則坦然,無所憂畏.觸事有餘,常無不足.有少欲者,則有涅槃.是名少欲.

 

너희들 비구여, 욕심이 많은 사람은 이익을 구하는 것이 많은 까닭으로 고뇌도 많거니와 욕심이 적은 사람은 구하고자함이 없어 근심 걱정이 없음을 알아야 된다. 오로지 少欲하기 위해서도 오히려 마땅히 닦아야 하거늘 하물며 少欲이 모든 공덕을 낳게 함에 있어서랴. 욕심이 적은 사람은 아첨으로써 남의 마음을 사려고 하지 않고, 모든 감관에 이끌리지 않는다.

少欲을 행하는 사람은 마음이 평안하여 아무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고, 하는 일에 여유가 있어 언제나 모자람이 없다. 이렇게 욕심이 적은 사람은 열반의 경지에 들게 되는데, 이것을 「욕심이 적음」(少欲)이라 한다.

 

講說: 욕심이 생기는 것는 마음을 밖으로 쓰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나무 뿌리는 흡수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데, 根(감관기관)이 가지고 있는 기능도 그와 같다. 때문에 밖으로 대상을 인식하는 것은 이 根의 작용에 의하는 것으로, 대상을 인식하게 되면 욕심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즉, 틈 사이로 물이 새어나가는 것처럼 마음이 감관기관의 틈 사이로 흘러나가는 것이다. 이를 「漏」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가 되면 욕심이 일어나는데, 이때에 意識이 존재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단지 相만을 취하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 만일 인식하는 마음을 그치면(止) 마음의 평안을 얻게되는데, 마음이 감관기관을 통하여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을 방지하려면 반드시 戒를 가져야만 하는데 이로써 「止」가 이루어진다. 물론 일상생활에서 「止」하는 방법은 많이 있다. 예를 들면 길을 갈 때, 우리들은 많은 생각을 하면서 걷는데, 이때 마음 속으로 반야심경이나 천수경을 외우면 생각이 밖으로 향하지 않고 사라지는 현상을 경험하게된다. 여하튼 이렇게 될 때 욕심이 적어지는 것이고 열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2>二知足功德 (만족을 아는 功德.)---吾唯知足

 

汝等比丘.若欲脫諸苦惱,當觀知足.知足之法,卽是富樂安穩之處.知足之人,雖臥地上,猶

爲安樂.不知足者,雖處天堂,亦不稱意.不知足者,雖富而貧.知足之人,雖貧而富.不知足

者,常爲五欲所牽,爲知足者之所憐愍.是名知足.

 

비구들이여 만약 모든 苦惱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마땅히 「만족할 줄 아는」 것에 대하여 관찰해 보라. 만족함을 아는 법은 부유하고 즐거우며 安穩한 곳이다. 넉넉히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비록 맨땅 위에 누워 있을지라도 오히려 편안하고 즐겁다.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비록 天堂에 있을지라도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만족할 줄 모르는 자는 비록 부유한듯하나 가난하거니와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비록 가난한듯 하나 부유하다. 만족을 모르는 자는 항상 五欲에 이끌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불쌍하게 여기는 바가 된다. 이것을 만족할 줄 앎(知足)이라 한다.

 

講說: 知足할 줄 안다는 것은 밖의 대상에 대하여 욕심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말한다. 즉, 「止」가 이루어져야만이 가능한 것이다. 더 나아가서 자기 내부에서 항상 일어나고 있는 번뇌를 觀照하고 있어야만이 대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煩惱心의 작용이 사라지게 되는 데, 이때 五欲의 대상이 실제 우리들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면 대상이 마음 안에 나타난 映像임을 간파하게 되고 그 순간 그 영상은 사라지고 그에 상응하고 있던 五欲도 같이 사라지게 된다. 실로 「知足」은 無所得의 가르침이다. 無所得은 마음이 깨어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3>三遠離功德 (멀리 떠나는 功德.)---寂靜遠離

 

汝等比丘.欲求寂靜無爲安樂,當離궤鬧,獨處閒居.靜處之人,帝釋諸天所共敬重.是故當捨

己衆他衆,空閒獨處,思滅苦本.若樂衆者,則受衆惱.譬如大樹,衆鳥集之,則有枯折之患.世

間縛著,沒於衆苦.譬如老象溺泥,不能自出.是名遠離.

 

비구들이여, 寂靜無爲의 安樂을 구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안팎의 心亂과 시끄러움을 떠나 혼자서 한가한 곳에 있어야 한다. 조용하고 한가한 곳에 있는 사람은 帝釋天도 공경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마음 속에 일어나는 갖가지 생각과 따르는 사람들을 버리고 비고 고요한 곳에 홀로 거처하여 괴로움의 근본을 滅하려고 생각해야할 것이다. 만일 무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무리로부터 괴로움을 받는다. 마치 큰 나무에 많은 새가 모여 앉으면 그 가지가 부러질 근심이 있는 것과 같다.

세간 일에 얽매이고 집착하여 여러가지 괴로움에 빠지는 것은 마치 늙은 코끼리가 진흙 수렁에 빠져 스스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멀리 떠남(遠離)이라 한다.

 

 

4>四不疲倦功德 (게으르지 않는 功德.)---精進無難

汝等比丘.若勤精進,則事無難者.是故汝等當勤精進.譬如小水長流,則能穿石.若行者之心

數數懈廢.譬如鑽火,未熱而息.雖欲得火,火難可得.是名精進.

 

비구들이여, 만일 부지런히 정진한다면 어려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마땅히 부지런히 정진해야 한다. 비유컨대 작은 물방울도 쉬지 않고 떨어지면 돌을 뚫는 것과 같다. 만약 수행인의 마음이 게을러 정진을 쉬게 되면, 마치 나무를 비벼 불씨를 얻으려 할 때 나무가 뜨거워지기도 전에 그만두는 것과 같다. 비록 아무리 불씨를 얻으려고 하더라도 얻지 못할 것이다. 이것을 精進이라 한다.

 

 

5>五不忘念功德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功德.)---不忘念慧

 

汝等比丘.求善知識.求善護助.無如不忘念.若有不忘念者,諸煩惱賊則不能入.是故汝等,

常當攝念在心.若失念者,則失諸功德.若念力堅强,雖入五欲賊中,不爲所害.譬如著鎧入

陳則,無所畏.是名不忘念.

 

비구들이여, 善知識을 구하고 善護助를 구하는 것은 생각을 오롯하게 하여 알아차림이 지속되게 하는 것만 못하다. 만약 알아차리는 상태가 흩어지지 않고 지속하면 모든 번뇌의 도적이 능히 들어올 수 없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항상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念을 거두어 마음이 일어나는 상태를 잘 살펴야 한다. 만일 알아차려 覺察하는 힘을 잃어버리면 모든 공덕을 잃어버릴 것이며, 만일 알아차리는 힘이 굳고 강하면 비록 五欲의 도적 속에 들어가더라도 해침을 받지 않을 것다. 비유컨대 갑옷으로 무장하고 적진에 나아가도 두려울 것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不忘念」이라 한다.

 

講說: 「不忘念」의 「念」 자체가 「不忘」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觀察이 지속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 지속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흩어지지 않고 지속되면 不忘念이며, 동시에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곧 바로 해탈한다.

「攝念在心」의 「念」은 「正念」을 말하고 攝念의 의미는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힘, 즉 「念」이다. 어떤 대상에라도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알아차림이 지속되는 것은 모두 「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在心」의 의미는 「念」을 다른 곳에 두지 말고 오온 관찰에 두고, 그 오온 중에 「心」에 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攝念在心」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愛欲이 일어났다고 하자. 이 애욕을 제거할려고 할 때 애욕과 관계되는 신체적 부분을 절단한다든지 다른 일을 하므로서 잊어버리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체적 부분을 절단하거나 다른 일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애욕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또다시 고개를 들고 일어난다. 그러므로 이 애욕이 일어나는 근원이 마음이므로 다른 데에 관찰하는 것이 아닌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念 거둠, 「攝念」이라는 것이고 그렇게 「攝念」이 된 상태를 순간 순간 일어나는 마음에 고정시켜 두는 것이 「마음이 일어나는 상태를 살피는 , 「在心」이다.

 

 

6>六禪定功德 (禪定 功德.)---攝心禪定

 

汝等比丘.若攝心者,心則在定.心在定故,能知世間生滅法相.是故汝等,常當精勤修習諸

定.若得定者,心則不散.譬如惜水之家,善治제塘.行者亦爾,爲智慧水故,善修禪定令不漏

失.是名爲定.

 

비구들이여, 만일 마음을 거두면 마음은 곧 定의 상태를 이룰 것이다. 마음이 平靜상태(定)로 있는 까닭에 세간의 生滅하는 존재 양상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항상 모든 禪定을 부지런히 닦아 익혀야 한다. 만약 禪定을 이루면 마음이 흩어지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물을 아끼는 집에서 둑이나 못을 잘 관리하는 것과 같이, 수행자도 또한 그러하여 지혜의 물을 잘 보존하기위해 禪定을 잘 닦고 그 물이 새지 않도록 한다. 이것을 「定」이라고 한다.

7>七智慧功德 (지혜의 功德.)---智慧明燈

 

汝等比丘.若有智慧,則無貪著.常自省察,不令有失.是則於我法中,能得解脫.若不爾者,旣

非道人,又非白衣,無所名也.實智慧者.則是度老病死海堅牢船也.亦是無明黑暗大明燈也.

一切病者之良藥也.伐煩惱樹之利斧也.是故汝等,當以聞思修慧而自增益.若人有智慧之

照,雖是肉眼,而是明見人也.是名智慧.

 

비구들이여, 지혜가 있으면 탐착이 없어지는 것이니, 항상 스스로 省察하여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나의 法 중에서 능히 해탈을 얻게 하는 것이다. 만약 그러지 못하는 사람은 이미 수행자도 아니며, 또 재가신자도 아니므로 무엇이라 이름할 수 없는 것이다. 眞實한 지혜는 곧 老病死의 바다를 건너는 견고한 배이고, 무명의 어두움을 밝히는 크나큰 등불이며, 모든 병든 자의 좋은 약이고, 번뇌의 나무를 베는 예리한 도끼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聞․思․修의 세가지 지혜로써 자신을 더욱 增益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지혜의 비춤을 가졌다면, 비록 그것이 육안이라도 그는 밝게 보는 사람이다. 이것을 「지혜」라고 한다.

 

講說: 지혜가 무명과 번뇌를 제거하는 작용을 갖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이 경전은 「聞․思․修의 慧로써 스스로를 增益하라」라고 설하고 있는데, 이는 무명과 번뇌를 끊어가는 지혜를 增長하는 방법으로써 三種般若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長部經典 三三 等誦經>에도 첫째, 聞所成의 般若, 둘째, 思所成의 般若, 세째, 修所成의 般若를 說하고 있다. 聞所成의 般若는 經論의 講義를 듣고 經論을 읽어서 얻어지는 智慧이다. 思所成의 般若는 배웠던 敎理를 思索하여 얻어지는 지혜이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思索이란 단순한 思索이 아니고 禪定에 의한 思索이다. 일반적으로 佛敎의 思索은 禪定에 든 상태에서 行해지는 까닭이다. 修所成의 般若는 반복하여 실천함으로써 얻어지는 지혜를 말한다. 이 경우에도 물론 禪定에 의한 修習이다. 예컨대, 禪定에 의하여 無我(空)을 觀하고 그것을 반복하여 多年간 지내면 無我觀이 익혀져 智慧를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三慧 모두가 다 청정한 戒에 安住함을 前提로 한다. 그리고 禪定에 의지하지 않으면 慧는 正覺으로 발현하지 못한다. 즉, 三種般若도 三學 가운데 戒學과 定學의 실천에 基礎한 지혜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간과하면 안될 점은, 이 戒와 定에 의하여 번뇌를 끊어가는 慧는 번뇌와 아직 함께하고 있는 有漏慧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長阿含 遊行經>에는 戒定慧를 차례로 닦음에 의하여 有漏의 번뇌가 멸하고 성취된 無漏의 깨달음을 解脫智라고 하고 있다. 즉,

 

?戒를 닦아 定을 얻음으로써 큰 과보를 얻으며, 定을 닦아 智慧를 얻음으로써 큰

과보를 얻으며, 지혜를 닦아 마음이 깨끗해서 等解脫을 얻는다. 그래서 三漏 곧

欲漏, 有漏, 無明의 漏를 다 멸하고, 그래서 해탈하고 해탈의 지혜가 생긴다.?

 

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정각을 이루기 전에 작용하는 깨어 있는 지혜는 三種般若나 三學에 의하여 능동적으로 번뇌와 무명을 끊을 수 있는 작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무명과 번뇌를 끊어가는 지혜가 갖추어지지 않았다면 아무리 수행을 하더라도 正覺은 오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번뇌를 끊는 힘이 작용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무명과 번뇌가 멸해지고 無漏의 지혜가 이루어 질 수 있겠는가.

8>八畢竟功德 (戱하지 않는 功德.)---善不戱論

汝等比丘.種種戱論,其心則亂.雖復出家,猶未得脫.是故比丘,當急捨離亂心戱論.若汝欲

得寂滅樂者,唯當善滅戱論之患.是名不戱論.

 

비구들이여, 여러가지로 무익한 戱論을 일삼는다면 그 마음은 산란해 진다. 비록 다시 출가하더라도 오히려 해탈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구는 빨리 어지러운 마음과 희론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만일 너희들이 寂滅의 즐거움을 얻고자 한다면 오직 희론으로부터 오는 환난을 잘 滅해야 한다. 이것을 「戱論하지 않음」이라고 한다.

 

 

<流通分>

<1>初勸修流通 (닦기를 권하는 流通.)---令不放逸

 

汝等比丘.於諸功德,常當一心.捨諸放逸,如離怨賊.大悲世尊所說利益,皆已究竟.汝等但

當勤而行之.若於山間.若空澤中.若在樹下.閒處靜室.念所受法,勿令忘失.常當自勉,精進

修之.無爲空死,後致有悔.我如良醫,知病說藥.服與不服,非醫咎也.又如善導.導人善道.

聞之不行,非導過也.

 

너희들 비구여! 모든 공덕에 항상 한 마음으로써 모든 放逸을 버리기를 마치 원수인 도적을 여의듯해야 한다. 크게 자비로운 世尊이 설하신 바의 이익은 모두 이미 極盡한 것이니, 너희들은 오로지 부지런히 그것을 행하라. 혹 山間이나, 혹은 비어 있는 습하고 풀이 무성한 곳이나, 혹은 나무 밑에서나, 한가하고 고요한 방일지라도 받은 바의 法을 생각하여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리지 않아야 하며, 항상 스스로 부지런히 정진하여 닦아야 한다. 한 일도 없이 헛되이 죽으면 뒤에 후회함이 있을 것이다. 나는 마치 훌륭한 의사와 같이 병을 알아 약을 베푸나니, 복용하고 복용하지 않는것은 의사의 허물이 아니다. 또 나는 잘 引導하는 길잡이와 같아서 사람들을 좋은 길로 인도하는 것과 같다. 그것을 듣고 행하지 않는 것은 引導하는 사람의 허물이 아니다.

 

講說: 아함경의 古道 이야기, 또 중아함의 산수목건련경의 길잡이 이야기.

 

 

<2>二證決流通 (깨달아 결정하는 유통.)---無疑四諦

 

汝等若於苦等四諦有所疑者,可疾問之.毋得懷疑,不求決也.爾時世尊如是三唱,人無問者.

所以者何.衆無疑故.時阿누樓馱,觀察衆心,而白佛言.世尊.月可令熱.日可令冷.佛說四

諦.不可令異.佛說苦諦實苦,不可令樂.集眞是因,更無異因.苦若滅者,卽是因滅,因滅故果

滅.滅苦之道,實是眞道,更無餘道.世尊.是諸比丘,於四諦中,決定無疑.

 

너희들이 만약 苦등의 四聖諦에 대하여 의심이 있으면 빨리 질문하라. 품은 의심에 판단을 구하지 않음이 없게 하라. 이때 世尊께서 이와같이 세번 말했지만 아무도 묻는 사람이 없었다. 왜냐하면 모두 의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에 아누루태는 대중의 마음을 관찰하고 부처님에게 사뢰기를 「世尊이시여 달은 뜨겁게 할 수 있고, 해는 차게 할 수 있으나, 부처님께서 설하신 四聖諦는 다르게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苦聖諦는 실로 苦입니다. 그것을 樂으로 할 수 없습니다. 集聖諦는 진실로 原因이라. 다시 다른 原因은 없습니다. 苦가 만약 滅한다면 즉시 原因이 滅할 것이고, 원인이 滅하는 까닭으로 結果도 滅하는 것이니, 苦를 滅하는 길이 실로 眞實의 길입니다. 다시 다른 길이 없습니다. 世尊이시여 이 모든 비구들 이 四聖諦 가운데서 결정코 疑心이 없습니다.」

講說: 「이것은 苦다 이것은 苦의 解決이다.」라는 명제는 명쾌하지 않을 수 없다. 께달음의 길은 단순하다. 또 그 출발점은 현실의 苦에서부터 시작하니 四聖諦의 가르침은 事實性이며, 苦의 解決 방법은 직접 자기 자신이 禪修行을 통하여 체험하는 것이므로 實證性이 갖추어져 있다. 따라서 이 사성제의 가르침이 單純性, 事實性, 實證性을 모두 구비하여 있으므로 모든 佛敎 敎理의 대표가 되는 가르침이다.

<3>三斷疑流通 (의심을 끊게 하는 유통.)

 

1>初顯示餘疑(남은 의심을 나타낸다.) ---夜見電光

 

於此衆中所作未辦者,見佛滅度,當有悲感.若有初入法者,聞佛所說,卽皆得度.譬如夜見電

光,卽得見道.若所作已辦,已度苦海者,但作是念,世尊滅度一何疾哉.

 

이 大衆 가운데 아직 판단함을 갖추지 못한 자는 부처님의 滅度를 보고 당연히 슬픈 감정을 드러내고, 혹은 처음으로 佛法에 들어 온 者는 부처님의 설하신 것을 듣고 모두 度脫함을 얻었다. 비유를 들자면 밤에 번갯불을 보는 것 같이 道를 보는 자가 있으며, 판단함을 이미 갖추어서 苦海를 건넌 사람은 단지 생각하기를 「세존의 滅度가 한결같이 어찌 이리도 빠른가」라고 생각 하였다.

 

 

2>二爲斷彼彼疑 (여럿의 의심을 끊게 하다.)--- 大悲重說

 

阿누樓馱雖說此語.衆中皆悉了達四聖諦義.世尊欲令此諸大衆皆得堅固.以大悲心,復爲衆

說.汝等比丘.勿懷悲惱.若我住世一劫,會亦當滅.會而不離,終不可得.自利利他,法皆具

足.若我久住,更無所益.應可度者,若天上人間,皆悉已度.其未度者,皆亦已作得度因緣.自

今以後,我諸弟子展轉行之.則是如來法身常住而不滅也.

 

아누루태는 비록 대중이 「모두 다 四聖諦의 뜻을 깨달았다」라고 사뢰나, 世尊께서는 이 모든 대중으로 하여금 다 견고함을 얻게 하고자하여 大悲心으로 다시 대중을 위하여 설하셨다. 「너희들 비구는 슬프고 괴롭다는 생각을 가지지 말라. 만약 내가 세상에 한 劫을 머문다 하더라도 반드시 滅度하고 말것이니, 만나서 떠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것은 법에 모두 갖추어져 있느니라. 만약 내가 오래 머물지라도 다시 더 이익될 것이 없느니라. 응당히 濟度할 수 있는 者는 천상이나 인간계에 모두 다 이미 濟度되었고, 그 가운데 아직 濟度되지 못한자는 모두 또한 이미 제도를 얻을 인연을 지었느니라. 지금부터 이후로 나의 모든 弟子들이 쉬지 않고 이것들을 행하면 여래의 법신이 항상 머물러 滅하지 않으리라.」

 

3>三重說有爲無常相勸修 (세상의 덧없음을 말해 수행하기를 권한다.)- - - 會必有離

 

是故當知.世皆無常.會必有離.勿懷憂惱.世相如是.當勤精進,早求解脫.以智慧明,滅諸癡

暗.世實危脆,無堅牢者我今得滅,如除惡病.此是應捨之身.罪惡之物,假名爲身.沒在老病

生死大海.何有智者得除滅之,如殺怨賊而不歡喜.

 

이런까닭으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세상이 모두 無常하여, 만나면 반드시 떠남이 있는 것이니, 근심과 괴로움을 마음에 두지 말라. 세상의 모양이란 이와같은 것이다. 마땅히 부지런히 精進하라. 조속히 해탈을 구하여 智慧 밝음으로써 모든 어두운 無知하라. 세상은 실로 위태로와 堅固 것이 없느니라. 내가 지금 滅度하는 것은 마치 제거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응당 버려야할 몸이며, 罪惡 물건이고, 거짓 이름으로 몸이라 老病生死 바다에 빠져있거늘, 어찌 지혜 있는 사람이 몸을 제거하여 없애기를, 마치 원수인 도적을 죽이는 것같이 기뻐하지 않겠는가?

講說: ?오 비구들이여! 잘 들어라.

내가 너희들에게 이르노라.

모든 조건지어진 것은 영원하지 않다(諸行無常).

방일하지 말고 힘써 정진하라.?

 

 

<4>四囑付流通 (탁하여 청촉하는 유통.)- - - 滅度

 

汝等比丘.常當一心勤求出道.一切世間動不動法,皆是敗壞不安之相.汝等且止,勿得復語.

時將欲過,我欲滅度.是我最後之所敎誨.

 

너희들 비구여! 항상 一心으로 부지런히 번뇌를 벗어나는 길을 구하라. 一切世間의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는 모든 존재는 다 부서지고 파괴되는 不安한 모습이라. 너희들은 잠시 조용하라. 다시 말하지 말라. 때는 장차 지나가려 하고, 나는 滅度하고자 한다. 이것이 나의 최후의 가르침이다.

 

출처 : 대한불교용화법원미륵종불종사
글쓴이 : 현진스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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