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해설

[스크랩] [碧巖錄] 제43칙 洞山無寒暑 - 동산화상의 춥지도 덥지도 않은곳

수선님 2018. 8. 12. 12:25

관련 이미지 <벽암록> 제43칙은 동산양개(洞山良价)화상의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곳으로 가라는 법문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어떤 스님이 동산화상에게 질문했다. ‘추위와 더위가 닥치면 어떻게 피해야 합니까.’ 동산화상이 말했다. ‘왜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으로 가지 않는가.’ 스님이 질문했다.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이 어디입니까.’ 동산화상이 말했다. ‘추울 때는 그대가 추위와 혼연 일체가 되고, 더울 때는 그대가 더위와 하나가 되도록하라!’

 

擧. 僧問洞山, 寒暑到來, 如何廻避. 山云, 何不向無寒暑處去. 僧云, 如何是無寒暑處. 山云, 寒時寒殺黎, 熱時熱殺黎.


본칙 공안은 〈조당집〉과 〈전등록〉에는 전하지 않고 있으며 출처가 분명치 않다. 〈사가어록(四家語錄)〉의 〈동산록〉과 〈설두송고〉 43칙에 수록하고 있는 것처럼, 송대에 주장된 화두라고 할 수 있다. 동산양개(807~869)화상은 조동종(曹洞宗)의 개창자로 그의 전기는 〈조당집〉 제6권, 〈전등록〉 제15권, 〈송고승전〉 제12권에 전하고 있으며, 그의 법문집인 어록도 전하고 있다. 〈조당집〉 제5권에는 운암화상과 동산의 사자(師資) 전법의 인연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운암선사가 입적하려고 할 때 동산이 질문했다. 화상께서 백년 뒤에 누군가가 ‘화상의 초상을 그릴 수가 있는가?’ 질문한다면 그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할까요? 운암선사가 대답했다. ‘다만 그에게 단지 이러한 사람(只這漢)이었다고 하라.’ 동산이 한참 침음하거늘 운암선사가 말했다. ‘이 한 문제는 밤송이 같아서 삼켜도 넘어가지 않는다. 천생 만겁에 쉬어야 한다. 그대가 한 생각 잠깐 일으켜도 번뇌의 풀이 한 길이나 깊을 터인데, 하물며 말로서 표현 하겠는가.’ 운암선사는 동산이 깊이 사유하는 모습을 보고, 안쓰러워 속마음(哀情)을 설하려고 하자, 동산이 말했다. ‘설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저 사람 몸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함일 뿐이니, 이 본분사의 일을 위해 애를 씁니다.’”

 

운암선사가 입적한 뒤 신산(神山)과 함께 담주(潭州)에 이르러 동산이 개울을 건너다가 물속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고 깨닫고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었다. “절대로 남에게서 불도를 찾으려 하지 말라. 점점 나와는 더욱 멀어질 뿐이다. 나(我)는 지금 홀로 가지만, 곳곳에서 그(渠)를 만난다. 그(渠)는 지금 바로 나(我)이지만, 나(我)는 이제 그(渠)가 아니다. 응당히 이렇게 깨달아야, 비로소 본래와 여여(如如)하게 계합하리라.”

 

운암선사가 제시한 ‘단지 이러한 사람(只這漢)’은 운암의 본래면목(본래인)을 말하는데, 동산은 그(渠)로서 체득한 것이다. 동산이 말한 나는 자기 본래이고, 그(渠)는 물속에 비친 자기 모습(그림자)이다. 동산의 오도송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는 바로 나(渠是我)’라고 말하지만, ‘나는 바로 그(我是渠)’라고 말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인데 그것은 나와 그는 하나이며, 주객(主客)이 둘이 아닌 본래인의 경지를 체득했기 때문이다..

 

〈조당집〉 제4권에 약산이 법당에 오르자 어떤 스님이 ‘화상은 누구의 법을 이었습니까?’ 라고 질문했다. ‘오래된 불전에 한 줄의 글자를 주었다.’ ‘거기에 무엇이라고 씌어 있습니까?’ ‘그는 나를 닮지 않고, 나는 그를 닮지 않았다(渠不似我, 我不似渠)’ 동산의 게송은 이 말을 토대로 한 것인데, 여기서 나(我)와 그(渠)는 하나(一如)이며, 불이(不二)이며 불이(不異)인 여여(如如)한 일체인 것이기 때문에 닮은 것이라고 할 수가 없다. 닮았다고 한다면 나와 그가 서로 상대하는 이원(二元)의 차별경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어떤 스님이 동산화상에게 ‘추위와 더위가 닥치면 어디로 피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했다. 여기서 말하는 더위와 추위는 기상날씨의 현상이지만, 여기서는 인간의 생사대사(生死大事)로 비유하여 질문한 것이다. 더위나 추위는 회피할 수 없는 시절인연인 것처럼, 인간의 생사도 도망가거나 회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질문하는 스님은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 ‘생사(生死)가 도래하면 어떻게 회피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동산화상은 ‘그대는 왜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으로 가지 않는가’라고 반문하고 있다. 추위와 더위는 차별심이며 생사 망념의 중생심에 떨어진 것이지만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은 인간 정식(情識)의 갈등과 망념의 생사(生死)를 초월한 불생불멸의 경지를 말한다. 절대 깨달음의 경지인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이며, 음양(陰陽)의 차별심이 미치지 않는 곳이다. 동산이 말한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無寒暑)’이란 말은 평범한 한마디이지만 정법의 안목이 없는 사람은 무슨 말인지 당연히 의심이 생긴다. 그래서 스님도 ‘그러면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이 어디입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다. 추위와 더위가 시절인연이 도래하는 그 밖에 달리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생사(生死)와 열반을 나누고 번뇌와 보리를 구분하는 중생의 차별심에 떨어진 것이다. 〈유마경〉에서 설하고 있는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과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는 대승의 불법을 체득하지 못한 안목없는 졸승인 것이다.

 

동산화상은 ‘추울 때는 그대가 추위와 혼연일체가 되고, 더울 때는 그대가 더위와 하나가 된다면 그곳이 바로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이라고 설했다. 즉 추위와 더위를 대상으로 두고 피하려고 하지 말고, 추울 때는 철저하게 추위와 일체가 되고, 더울 때는 철저하게 더위와 일체가 되도록 하라는 말이다. 〈전등록〉 제20권 조산혜하장에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다. “선사가 말했다. ‘수행자여! 몹시 덥군!’ ‘그렇습니다.’ ‘이런 더위는 어디로 가서 피할까.’ ‘끓는 가마솥이나 숯불 속에서 피합니다.’ ‘끓는 가마나 숯불 속에서 어떻게 피하겠는가.’ ‘ 많은 고통도 미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사는 잠자코 있었다.” 〈조당집〉 제5권 운암장에 동산이 “마치 어떤 사람이 끓는 가마나 숯불속의 지옥에 들어가서도 타거나 데이지 않는 것 같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동산의 무한서(無寒暑) 공안은 여기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백낙천의 시에 “사람들이 더위를 피하려고 미친 듯이 뛰어 다니지만, 홀로 항(恒)선사는 방에서 나오지도 않네. 선방엔들 무더위가 없으랴만, 단지 마음이 차분하면 몸도 시원한 것”이라고 읊고 있다. 또한 당대의 시인 두순학(杜荀鶴)이 오공(悟空)선사의 참선수행에 대하여 “삼복더위에 문을 닫고 승복을 걸친 스님, 소나무 대나무 그늘이 선방을 덮지도 않네. 참선은 반드시 산수(山水)의 경치를 필요치 않나니, 마음에 망념이 없으면 불길도 저절로 시원하리”라고 읊고 있다. ‘평창’에도 황용 오신(黃龍悟新)선사는 이 시를 인용하여 해설하고 있다.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으로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추울 때는 추위와 더울 때는 더위와 하나가 되는 것이며, 궁극적인 해탈이란 추위와 더위도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까지 초월해야 하는 것이다. 〈벽암록〉 제40칙 평창에 “고인(덕산연밀)이 모든 건곤 대지가 바로 하나의 자기이며, 온 천지가 추우면 춥고, 더우면 온천지가 덥다”고 했다. 시방세계와 자기가 하나인 것이기 때문에 추울 때나 더울 때나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하고 있다.

 

설두는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교화의 손을 드리우면 만길 벼랑과 같다”는 말은 동산이 추위와 더위도 없는 곳으로 가라는 법문은 중생교화의 자비심이지만, 그 말은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없는 만길 벼랑과 같은 험준한 말이다. “정위(正位)와 편위(偏位)를 나눌 필요가 있겠는가.” 동산이 오위송(五位頌)에서 주장하는 평등(正位)과 차별(偏位)의 기준을 가지고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을 배치할 필요가 있겠는가. 무한서(無寒暑)의 정위(正位)와 한서(寒暑)의 편위(偏位)를 나눌 필요가 없이 한서(寒暑)가 그대로 무한서(無寒暑)인 것처럼, 동산의 법문은 정편(正偏)이 원융무애한 경지를 설하고 있는 것이다.

 

“유리궁전에 비치는 밝은 달이여! 영리한 개(韓)가 괜히 섬돌을 오른다.” 〈전국책(戰國策)〉에 나오는 고사로 한씨집의 개는 영리한 것처럼, 질문한 스님은 동산의 법문에 이런 도리 저런 도리를 궁리하여 찾아보지만 진실은 체득하지 못하고 헛된 일만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성본스님/동국대 불교문화대학 교수

출처 : 淨土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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